다니엘서 새 연구 제 11 장 세상역사의 세 번째 대요(단 10, 11장)
 1절에서 메대를 한 마디로 언급한 뒤 가브리엘은 페르샤 역사로 들어갔다(페르샤의 자세한 역사는 8장 연구를 참조). 8장에서 수양부터 시작한 것처럼 이 때(고레스 3년) 이미 망한 바벨론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즉위 3년째인 고레스도 제외되고 “또 세 왕이 일어”나리라고 예언되었다. 고레스 다음의 세 왕은 다음과 같다. (216.60)
 ◦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530-522 BC) -- 아버지 고레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예루살렘 중건에 호의적이어서, 캄비세스의 통치기간 동안 성전사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선지자와 왕, 546.

 ◦ 찬탈왕 바르디야(Bardiya) 혹은 거짓 스메르디스(False Smerdis, 552 BC) --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원정하고 있는 동안 본국에서 출정 전에 이미 살해당한 캄비세스의 형제인 스메르디스(Smerdis)를 사칭(詐稱)하고 왕위에 올랐다. 7개월 만에 다리우스가 주동이된 반정공신(反政攻臣)에 의해 쫓겨났다.

 ◦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 --거짓 스메르디스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재위 2년에, 제2차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스 6:1-12). 헬라를 정복하려다가 마라돈 전쟁에서 패했다(490 BC).

 그 다음에 심히 부요하여 헬라 정복에 나서리라고 예언된(단 11:2) 네번째 왕은 누구인가?

 ◦ 크세르크스(Xerxes, 486-465 BC) --그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였다(에 2:16, 17). 부왕이 실패한 헬라 정복에 나서, 40개 민족을 동원시켜 25만의 군대로 헬라를 침공했으나, 살라미스(Salamis)해전에서 패하였다(480 BC). Anderson, 131. (216.61)
 그 후 페르샤의 국운(國運)은 쇠하기 시작하여 몇 명의 왕이 더 계속된 후에 마침내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에게 정복당하였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왕 때에, 제 3 차 중건령이 내려(스 7:7), 페르샤를 통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를 성취시켰다. (216.62)
 나. 헬라 통치시대(331-168 BC)
 가) 알렉산더의 통일시대(11:3)
 3절부터 4절까지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헬라반도를 통일하여,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356-323 BC) 대왕의 예언적 전기(傳記)인데, 그가 태어나기 90년 전에 예언으로 소개되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그의 치세에 대하여는 8장 연구 참조). 과연 예언된 그대로, 그의 나라와 그 자신이 한창 “강성할 때”인 기원전 323년 33세를 일생으로 바벨론에서 요절(夭折)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끝까지 반역하다가 멸망된 바벨론을 재건하여 그가 이룩하려던 대제국의 수도로 삼으려다가 꺾이고 말았다. 부조와 선지자, 상, 140, 142, 144 참조 (216.63)
 그가 13년 동안 이룩한 제국이 세상을 지배할듯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저지하셨다(10:20).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11:4)이라는 예언 그대로, 유복자(有腹子)였던 후사는 어린 아이 때에 살해당하였고, 그의 광대한 영토는 “이외의 사람들”인 그의 네 장수였던 캇산더, 리시마쿠스, 셀루쿠스, 프톨레미등에 의해 사방으로 나뉘었다(자세한 설명은 7장8장 연구 참조). (216.64)
 나) 분열 왕국시대(11:4)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후 20여년간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던 그의 분열된 제국의 후예들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기까지를 헬레네스시대(Hellenistic Age, 323-146 BC)라고 한다. 기원전 301년에 입수스(Ipsus) 전쟁의 결과로 넷으로 나뉘었던 알렉산더의 제국은, 기원전 297년에 캇산더가 죽고, 281년에 리시마쿠스가 살해당함으로써, 그들의 왕국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헬레네스 왕국으로는 이것들 외에도 소아시아의 버가모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들이 더 있었으나, 유다와 접경하여 맞부딪힌 것은 시리아와 이집트였다. (216.65)
 이리하여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동부를 다스리게 된 셀루쿠스 왕조가 시리아의 이름으로 들어섰고, 남쪽은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가 들어서게 되어, 팔레스틴이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들 북방 왕국 시리아와 남방 왕국 이집트의 두 세력이 마주치는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거룩한 땅, 영화로운 땅은 저주받은 격전지가 되었다. (216.66)
 다) 남방왕국과 북방왕국시대(11:5-15)
 이렇게 북방왕 시리아와 남방왕 이집트가 팔레스틴을 가운데 두고, 파도치듯 맞부딪히는 틈 새에서, 지치고 시달린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거나 스스로 팔레스틴을 떠남으로써 이들이 그 후 역사에 알려진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팔레스틴의 이외의 땅에 거주하게 된 국외(國外) 거주 유대인(*중국인 화교와 같음)이 되었으며 그들이 곧 오순절 당시 “천하 각국으로부터”모여든 유대인들인 것이다(행 2:5-11). 5절의 최초의 남방 왕은 알렉산더의 장군 가운데 하나였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 306-283)이고, “그 군들 중에 하나”는 북방 왕조의 창시자가 된 셀루쿠스 1세(Seleucus I, Nicator · 302-283)인데 이렇게 표현된 것은 기원전 321년 이후 셀루쿠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차지했었으나, 316년에는 중앙집권적인 통일된 군주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알렉산더의 네 장수와 맞서 싸우다가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에서 전사한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패하여 거기서 쫓겨났었다. 이에 셀루쿠스는 이집트왕 프톨레미 휘하에 들어가, 그를 도와 데메트리우스를 기원전 312년 가자(Gaza)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그의 이전 왕국을 되찾아 나중에는 프톨레미왕조보다 더욱 강한 왕국을 세웠음을 뜻한다. (216.67)
 이렇게 시작된 남북 왕조를 본문(5-13절)에 맞추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다니엘서 주석」 참조). (216.68)
 ◦ 북방왕국(시리아)—셀루쿠스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셀루쿠스 1세(Nicator. 302-283)(5절)

 안티오쿠스 2세(Theos. 261-246)(6절)

 셀루쿠스 2세(Callinicus. 246-226)(7-9절)

 셀루쿠스 3세(Ceraunos. 226-223)(10절)

 안티오쿠스 3세 대왕(Magnus. 223-187)(10-13절)

 안티오쿠스 4세 (Epiphanes. 176-164)(14절) 14절은 로마세력의 진출로 생긴 일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함께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인에게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시리아의 마지막 최악의 세력인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와 그의 부친 안티오쿠스 3세의 활동이 포함된 것으로 간주된다. (216.69)
 ◦ 남방 왕국(이집트)—프톨레미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프톨레미 1세(Soter. 306-283)(5절)

 프톨레미 2세(Philadelphus. 285-246)(6절)

 프톨레미 3세(Euergetes. 246-221)(7-9절)

 프톨레미 4세(Philopater. 221-203)(10-13절)

 프톨레미 5세(Epiphanes. 204-181)(14, 15절) (216.70)
 이러한 헬라의 왕조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가 각축(角逐)한 150년 이상이나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성전은 최악의 수난(受難)을 겪었다. 북방 왕국인 시리아의 통치는 더욱 가혹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기원전 176-164년까지 다스린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은 극악스러웠다. 이 당시의 생생한 역사는 영감받은 성경은 아니지만 신임받는 역사서인 경외서 마카비전서 1, 2장을 참조. Josephus, Antiquites, i. 6. 7, Wars, i. 1 참고. (216.71)
 「유대인들에게 헬라의 관습, 헬라의 예술, 헬라의 악덕(惡德), 헬라의 우상숭배를 강요하려는 것이 그(*안티오쿠스 4세)의 고정된 목적이었다.․․․대제사장직은 곤궁해진 안티오쿠스 정부에 의해 돈을 제일 많이 내고 사겠다는 사람에게 매도(賣渡)되었다. ․․․사실 안티오쿠스는 유대 인종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는 데메트리우스가 파견한 시리아 총독. 모든 백성들이 종교적인 의식에 전념하게 되는 때인 안식일을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되면 그의 군사들을 저항하지도 않은 백성들에게 풀어놓아 거리가 피로 흥건해지기까지 그들을 죽였으며 느헤미야가 그토록 관심을 쏟아 건축해 놓은 성벽들을 헐어내렸고, 수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의식들은 억압받았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모독하도록 강제되었고 돼지고기와 다른 부정(不淨)한 음식들을 먹도록 강요되었으며, 할례 예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성전은 쥬피터신에게 봉헌되었다. ․․․정말로 참된 종교가 뿌리가 뽑히고 그 본 고장으로부터 팽개쳐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유대의 독특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부적합하게 되었다. 대문들은 불타버렸다. ․․․기원전 168년 12월 25일에는 돼지 떼를 성전 경내(境內)로 몰고 들어와 거기서 도살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 다음에는 잡은 돼지의 피로 제단이 더렵혀졌고, 심지어는 지성소까지도 모독되었으며 성경 사본들에도 돼지고깃물을 뿌렸다」 John W. Mears, From Exile to Overthrow, 120, 121. (216.72)
 이러한 최악의 사태가 메시야의 초림을 150년 앞두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성소에 대한 사단의 숙명적인 적대감(敵對感)이 표현된 것 외에도, 성소 제도에 집약돼 있는 구속의 경륜을 말살하여 메시야의 초림을 방해하려는 초토화(焦土化)정책이기도 했다. (216.73)
 다. 로마 통치시대
 가) 로마제국의 동방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