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8장 태양 숭배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많은 이교의 화상(畵像)들 속에서 태양신 혹은 미트라는 그의 머리 뒤편에 원반 모양이 첨부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60) 이러한 태양신의 이미지가 진정한 “의의 태양 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초기 기독교 예술이나 문학 속에서도 사용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 모자이크(A.D. 240년경)는 성 베드로의 제단 아래 있던 바티칸 공동묘지(소 영묘 mausoleum 혹은 이룰리 Iulii 내에 있음)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모자이크에서 그리스도는 휘날리는 망토를 두르고, T자 형태(십자가를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됨)안에서 일곱 광선이 비추고, 그것으로부터 머리의 뒤쪽에 후광을 두른 채 4두의 이륜 마치를 타고 승천하는 태양 신(Helios)로 묘사되고 있다.61) 그리스도의 머리와(5세부터는) 다른 중요한 사람들의 머리 뒤에 그 그림과 동일한 것들을 갖춘 십자가와 더불어 그 태양—원반을 그리기 위해서는 수천 시간이 바쳐졌다. (330.1)
 태양신 모티프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그리스도를 회화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교사들은 풍부한 태양신 상징 기호들에 매우 익숙해 있던 이교의 대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 모티프를 사용하였다. 많은 교부들이 이교의 상징들과 태양신에 대한 신념들을 발췌하여 재해석하였고, 기독교 메시지를 가르치기 위해 그것들을 변증적으로 사용하였다.62) 그리스도가 일찍부터 도상학(圖像學)과 문학 분야에서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태양의 날 역시 의의 태양(Sol iustitiae)이신 그리스도를 예배 하기 위해서 쉽게 채택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닌가? 태양신에게 분명히 바쳐진 날 그 날에, 태양이신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 복잡한 요구조건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330.2)
 동쪽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드릴 때 지향할 새로운 방향으로 예루살렘이 위치해 있는 동쪽을 채택한 것은 초기 기독교 예배가 태양 숭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중요한 암시를 부가적으로 제공해 준다.(다니엘의 습관과 성전 헌납시 솔로몬이 드린 기도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63)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그들의 기도가 유효하도록 만들어주는 의무조항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습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분파 중의 하나였던 에비온파에 의해서 증명된 다. 이레네우스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는 것이다.64) (331.1)
 더 나아가 교부들은 기도하는 방향을 동쪽 지역으로 채택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몇 가지 논거를 제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의 설명에 따르면, “기도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드려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동쪽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탄생하는 곳을 대표하기 때문이며, “고대 성전들이” 있던 방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5) 오리게네스(A.D. 185-254)에게 있어서 동쪽은 빛의 근원이신 분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정신성을 상징한다.66) 다른 교부들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낙원과 그리스도의 오심을 스스로 일 깨우도록 동쪽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했다.67) (331.2)
 원래 태양신을 섬겼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유대인들과 분리해야할 필요에 직면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던 것을 분명히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의식적이었겠지만 그 의미를 기독교 기별에 비추어 재해석하면서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기도하는 방향을 유대인들의 성전으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바꾼 것은 또한 예배의 날을 “유대교의” 안식일로부터 태양의 날로 바꾼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가? 기도 그 자체는 주간 단위(적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됨)가 아닌 매일의 종교적 실천 의식이긴 하지만, 태양신을 향한 매일의 기도 생활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매주 태양의 날에 예배를 드리도록 촉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더욱이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이 떠오르는 태양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태양의 날에 떠오르는 “의의 태양”이신 분께 예배하도록 쉽게 유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331.3)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교양 있고 우호적인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양신을 섬긴다고 기소하면서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습과 그들의 일요일 준수를 그 기소에 대한 기본적인 증거로 제시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로 그 동일한 관습들을 이교도의 것이라고 하면서 그 기소를 부인했다. 하지만 고소자들과 반박자들 모두 그 두 관습들을 태양 숭배에 대한 기본적인 징후로 제시하면서 그것들을 서로 연관시키고 있음을 주목하라. 심지어는 이교도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는 이 두 관습들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위에서 논의한 그러한 요인들로 인해 일요일 준수와 동쪽을 향한 기도의 관습을 동시에 채택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이것은 또한 레간(F. A. Regan)이 동쪽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에 대해 취급하고 있는 교부들의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후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32.1)
기도하는 동안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습에 대한 연구로부터 이교도의 영향력에 대한 적절한 한 사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던 것으로부터 주의 날을 경배하는 것으로 이행하였기 때문에 제 칠일을 매주 첫 날로 대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은 매일의 기도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하던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관습을 바꾸었다.68)
(333.1)
 따라서 태양 숭배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강력한 흡인력이 시사해 주는 것은 그러한 요인들이 매일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관습을 채택하도록 영향을 끼쳤고, 매주 예배하는 날로 태양의 날을 채택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333.2)
 크리스마스의 날짜
 크리스마스를 경축하기 위해서 12월 25일을 채택한 것은 아마도 태양 숭배가 기독교의 예식 달력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사례일 것이다. 무적의 태양신의 탄생일(dies natalis Solis Invicti)을 축하하는 이교의 축제가 그 날(12월 25일)에 개최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 문헌들은 그러한 이교의 축일을 차용한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69)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70) 이교의 축제일을 차용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심지어는 그 의미를 충분히 재해석한 후에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믿음을 공 개적으로 배신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교부들은 이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와 레오 대제는 크리스마스 때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는 것보다 오히려 태양을 경배했던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꾸짖었다.71) 따라서 태양 숭배가 기독교 예식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들은 직접적인 지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지적들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이 경고는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도 역시 적용된다. (333.3)
 12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천문학적-우화적 관측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몇몇 교부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잉태와 고난 모두가 춘분인 3월 25일에 발생했다는 것이다.72) 그 날로부터 마리아의 임신 기간인 9개월을 계산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오스카르 쿨만의 정확한 관찰에 따르면, 이러한 계산들은 “주도권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하다.”73) 그 계산들은 오히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날짜와 관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제안된 연역적인 이론적 해석을 나타내는 것 같다. 융만(J.. A. Jungmann)이 주장하듯이, 대다수의 학자들은 “12월 25일을 선택하게 된 진정한 동기가 그 날에 화려하게 경축되어진 이교의 ‘무적의 태양신의 탄생’(dies natalis Solis Invicti) 축제에 있었다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했다.”74) (334.1)
 가스톤 할스베르게(Gaston H. Halsberghe)는 그의 최근 논문인 “무적의 태양신 숭배집단”(The Cult of Sol Invictus)에서 이미 인용했던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334.2)
이 점과 관련해 우리가 참고했던 저자들은 인빅티가 탄생한(Natalis Invicti) 12월 25일에 무적의 태양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개최한 이교의 축제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 축제에 영향을 미쳤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인해 그 때까지 1월 6일에 동방 공현 축일로 지켜져 왔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바뀌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량의 빛과 횃불, 그리고 장식된 나뭇가지와 작은 나무 등이 동반된 태양신의 탄생 축제는 그 추종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일지라도 계속해서 태양신 탄생의 축일을 경축하게 할 만큼 그 종교의 추종자들을 사로잡았다.75)
(334.3)
 로마교회(부활절 일요일의 경우에서처럼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는 새로운 날짜를 채택하는 데 있어서 선구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추겼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했다는 분명한 첫 번째 암시는 크로노그래프 354(Chronograph of 354, 후지우스 디오니시우스 필로칼루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달력)로 알려진 로마의 문서에서 발견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월 초하루의 8일 전에 [즉 12월 25일] 예수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VIII Kal. Jan. natus Christus iin Betleem Judaeae).76) 로마교회가 이러한 새로운 날짜를 도입하고 옹호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저명한 가톨릭 예배학자인 마리오 리케티(Mario Righetti)는 이렇게 기록한다. (335.1)
화평이 이루어진 후, 로마교회는 이교 대중들로 하여금 그 신앙을 받아들이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어둠의 정복자인 ‘무적의 태양신’ 미트라에 경의를 표하여 경축한 이교 축일로부터 그들이 돌아서도록 12월 25일을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한 축일로 제정하는 것이 편리 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77)
(335.2)
 하지만 동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침례가 1월 5일과 6일에 각각 기념되었다. 벨기에 베네딕토회의 학자인 보테(Botte)는 한 중요한 연구에서 그 날짜는 원래 이교 축일, 즉 빛의 탄생과 성장을 기념한 예수 공현 축일(Epiphany)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78) 로마교회가 동방교회들에게 12월 25일을 새로운 날짜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쉬운 과제는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많은 동방교회들이 “1월 5-6일에 예수 공현 축일로서 그리스도의 탄생 축일을 지키던 옛 형태의 관습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79) (336.1)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가 로마교회가 도입한 크리스마스 날짜를 채택하게 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우리의 즉각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해서 12월 25일이라는 날짜를 채택한 것이 태양 숭배가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식 제도를 장려하는데 있어서 로마교회가 발휘한 탁월한 지위를 설명해주는 부가적인 사례를 제공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336.2)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해본 3 가지의 사례들(그리스도 태양신 모티프,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풍습, 크리스마스의 날짜)은 태양 숭배가 기독교 사상과 예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융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그것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사상은 이교의 구제도 로부터 이용되어질 수 있었던 것들을 파괴하지 않고 개조하여 좋은 목적에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독교화 한 후 그것들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80) (336.3)
 이러한 결론들은 이교도의 태양의 날 숭배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동일한 날을 예배일로 채택하도록 영향을 미쳤던 사실에 대한 더 직접적인 조사 연구를 당연한 것이 되게 해준다. (3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