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8장 태양 숭배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A.D. 1세기에 행성 주간 제도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다음의 자료들은 매우 인상적인 것들이다. 그 단순한 목록들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연구 목적을 달성하게 해 줄 것이다. 푸테올리(Puteoli)에서 발견된 석판 달력(A.D. 1세기)은 세 개의 행성 요일의 이름과 날짜를 포함하고 있다; “머큐리(Mercuri, 수요일), 요비스(Jovis, 목요일), 베네리스(Veneris, 금요일).”29)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of Tynana)는 그의 전기를 기록한 작가인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 A.D. 170-245년경)에 따르면 A.D. 40~60년 사이에 인도를 여행하였는데 그곳에서 인도의 현인 이아르카스(Iarchas)로부터 각각에 “일곱 개의 별들”의 이름이 붙은 일곱 개의 반지를 받았다. 그는 “일주일 중 그 이름에 해당하는 주일의 날에 그것들을 번갈아” 가며 착용했다.30) (322.2)
 로마의 풍자가인 페트로니우스(Petronius, A.D. 66년경에 죽음)는 그의 소설 “프리말키오의 연회”(The banguet of Trimalchio)에서 한 개의 막대 달력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트리말키오가 그 문설주의 한 편에는 숫자를 새겨 넣고, 다른 쪽에는 “일곱 별들의 모양”을 새겨 넣었던 것이었다. 날짜와 요일을 지시하기 위해서 각각의 구멍에 한 둥근 장식이 삽입되어졌다.31) 로마의 병사요 작가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 티누스(Sextus Julius Frontinus, A.D. 35-103년경)는 그의 작품 “전략”(The Stratagems)에서 A.D.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토성의 날에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날은 심각한 일이나 자신들을 좌절시키는 일들은 어떤 것이든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날이다.”32) (323.1)
 폼페이(Pompeii)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에서는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관된 일곱 개의 행성일들의 신들에 대한 두 종류의 벽화들이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33) 주간의 행성일 신들의 목록들이 명확하게 나타나거나 혹은 특별한 날짜에 해당하는 요일에 행성의 이름을 기록 거대한 암벽 명문(銘文)과 낙서들이 발굴되었다.34) 예를 들어 두 줄로 된 벽의 비문은 이렇게 씌어져 있다. “그 황제의 때 유월 초하루(Kalends, 고대 로마력의 초하룻날)의 9일 전[5월 24일] ∙∙∙ 그 날은 태양의 날이었다.”35) 이러한 증거들은 모든 의문들을 종식시킨 채 A.D. 79년 이전에 행성 주간 제도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을 입증 해 준다. 왜냐하면 A.D. 79년은 베수비우스의 화산 폭발로 폼페이가 폐허가 된 날이기 때문이다. (323.2)
 폐허가 된 티투스(Titus, A.D. 79-81)의 목욕탕 벽에서 발견된 한 그림 달력은 그 독창성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정방형의 틀 안의 윗 쪽 열에는 일곱 행성의 신들을 그린 그림들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는 달들을 나타내는 황도 12궁이 있고, 양 옆으로는 날들을 의미하는 숫자 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오른 쪽에 1일부터 15일까지, 왼쪽에 16일부터 30일까지 각각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숫자들 옆에는 구멍들이 있었는데 그 구멍들은 월과 일을 가리키고 그 날의 행성 수호신을 가리 키기 위해서 둥근 장식을 삽입하는 곳이었다. 그런 공공건물 안에 그것 이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제도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36) (324.1)
 유명한 헬라의 전기 작가였던 플루타르크(Plutarch)는 질의응답 형태 로 A.D. 100-125년 사이에 기록된 “심포지움”(Symposia)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 한다. “왜 행성들의 이름을 가진 요일들이 행성의 순서에 따라서 정렬되지 않고 그 반대의 순서로 정렬되고 있는가?”37) 불행하게도 이 논문은 그 문답의 제목만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는 행성 주간 제도가 1세기 말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시 통용되고 있는 행성들에 대한 천문학상의 순서와 행성 주간의 순서 사이에 나타난 차이점들을 설명할 수 없었음을 암시해 준다.38) (324.2)
 그 이후의 세기에 행성 주간 제도가 폭넓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지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증거 자료들이 인용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상당히 지체되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에는 적절치 않다.39) 위에서 간단하게 나열한 증거들은 행성주간 제도가 이미 잘 알려져 있었 으며, 적어도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이래 고대 로마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40) (325.1)
 태양의 날의 위상이 높여짐
 일요일 예배와 행성 주간 제도가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일요일 예배의 발전과 더불어 태양에게 바쳐진 날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41) 이 것은 토성의 날이 가지고 있던 탁월한 지위와 명성이 태양의 날로 옮겨진 과정에 의해서 확증된다. 사실상 최초에 태양의 날은 “다른 날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날이었다.42) 왜냐하면 그 날은 첫째가 되었던 토성-날 다음 날인 주일의 둘째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태양의 날은 “가장 존경받는” 첫째 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25.2)
 어떤 종교적 관습들이 어떤 날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와 관련된 명확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토성의 날을 희생하여 태양의 날의 위상을 높인 과정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로마인들의 종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외부적인 견해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나키노(V. Monachino)가 설명하는 것처럼, 종교는 “매주일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표현되어지는 개인적 신앙심으로 이해되지 않고 ”정부와 신들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되었다.43) 중요한 공적 종교 예식들은 원래 외부적 의식들을 이행하므로 그들의 종교성을 드러낸 귀족 정치가들이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수행되어졌다. (325.3)
 이것은 사회적이며 종교적 목적을 위해 태양의 날이 누린 특혜를 축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서 웨이갈(Arthur Weigall)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A.D. 321년 3월 3일과 7월 3일에 반포한 두 가지 법령에서 태양의 날을 “존경할만한 날”(venerabilis), 혹은 “그 존경심으로 잘 알려진 날”(veneratione sui celebren)로 묘사함으로써,44) “그가 그 날을 전통적인 태양—축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태양신에 대한 존경심이 이교도들로 하여금 일요일에 특별한 공적 태양 숭배 예식에 참여하도록 요구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45) 이 문제는 “이교도들에게 보내는 변증”(To the Pagans, A.D. 197년에 기록됨)에서 발견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진술에서 설명된다.46)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쪽을 향하여 기도했고, 일요일을 축일로 만들었”기 때문에 태양 숭배자들이 되었다는 모욕에 대해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26.1)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대들은 이것보다 덜 하단 말인가? 그대 들 중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로 때때로 하늘의 물체들에 경배하는 척 하면서 그대들의 입술을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움직이지 않는가? 좌우간 태양을 주간의 달력 안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한 장본인은 그대들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전적으로 목욕을 삼가거나 그것을 저녁까지 미루기 위해 혹은 휴식을 취하거나 연회를 베풀기 위해 전날[토요일] 보다는 차라리 그 날[태양의 날]을 일주일 중 가장 적합한 날로 선별하였다.47)
(326.2)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1) 그것은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 모두 동쪽을 향하여 기도하는 관습과 일요일을 축일로 보내는 관습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지적해준다.

   (2) 그것은 로마인들이 행성 주간 제도를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토성의 날을 대신하여 태양의 날을 휴식과 축제의 날로 이미 선택하였음을 시사해준다.

   (3) 그것은 이교도들의 일요일 준수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목욕을 삼가고 쉬면서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 특징지어진 사회적 축제였다. (326.3)
 고대 로마에서 태양의 날이 그러한 축제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언 제였는가? 그 시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분명한 암시들은 없다. 대 플리니니우스(Pliny, A.D. 79년에 죽음)는 그의 책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에서 기록하기를, “이런 행성 신들의 중앙에서 태양신이 움직이는데, 그 태양신의 위엄과 권능은 가장 위대하다. ∙∙∙ 태양신은 영광스럽고 탁월하며, 모든 것을 보고 들으신다.”48) 이교 태양신 미트라의 몇몇 신전들이 발견되어진 곳에서 태양신은 행성 신들의 순열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다. 보노니아(Bononia) 부조(浮間 뿐만 아니라49) 미트라 신전의 일곱 문들과 일곱 구체(體)(둘 모두 로마의 해안 도시인 오스티아에서 발굴됨)50)에서 태양신은 행성 신들 중에서 맨 앞이나 맨 뒤, 혹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에피쿠로스파 철학자 켈수스(Celsus, A.D. 140-180년경)도 유명한 일곱 문의 미트라교 사다리를 묘사한다. 그것은 개심한 영혼들이 올라가도록 한 것인데 토성에서 시작하여 우세한 태양에서 마쳐진다.51) 태양의 날(dies Solis, 일요일)에 부여된 탁월한 지위는 쿠몽(F. Cumont)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는 일반적인 인식에 확실하게 기여했다.”52) (327.1)
 이미 2세기 중반까지는 태양의 날이 탁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점성술사인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에 의해서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A.D. 154년에서 174년 사이에 구성된 그의 “명문집”(Anthology)에서53) 발렌스는 주어진 어떤 탄생일의 요일을 찾아내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명확하게 진술한다. “요일과 관련된 행성들의 순서는 이렇다.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54) 일요일이 가지는 탁월한 지위는 유스티노스 마르튀르가 “제1변증” 67(I Apology 67)에서 그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도 역시 암시된다. 기독교 예배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서 그는 왜 “태양의 날”을 세 번씩이나 언급했는가? 그는 어째서 첫째 날 빛의 창조를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집회를 옹호하는 첫 번째 동기로 제시했는가?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로마인들에 의해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미 제안했듯이, 기독교 예배를 이교 태양신의 날 및 그 상징 모두와 관련시킴으로써 유스티노스가 목표로 했던 것은 황제로부터 기독교가 우호적인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327.2)
 태양의 날이 주일 중에서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던 정확한 시점을 확증하기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급된 이러한 몇몇 내용들은 그것이 2세기 초부터 광범위하게 시작된 일요일 예배의 발전과 공존해서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328.1)
 만일에 널리 보급된 태양 숭배로 인해서 태양의 날이 2세기 초에 로마 세계에서 토성의 날을 대신했다면, 보테(B. Botte)의 표현처럼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우신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상징하는 날로 ‘태양의 탄생일’(Natalis invicti, 12월 25일)을 채택한 것처럼 태양의 날을 기독교의 일요일(주일)로 채택하였는가?”55)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 준수를 채택한 것은 로마 세계에서 토성의 날을 능가하는 태양의 날이 출현된 것과 같은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지 않았겠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독교 사상과 관례 속에서 나타난 태양 숭배에 대한 몇 가지 반응들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이교의 태양의 날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요일을 채택하도록 미친 특별한 영향력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328.2)
 태양 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태양신 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불쾌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인했다(심지어는 황제의 제단에 한 움큼의 향을 가지고 경배하기보다는 차라리 끔찍한 순교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켓타 하우케스(Jacquetta Hawkes)가 잘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너무도 자주 분명하게 나타나는 악의적인 풍자와 더불어, 그들은 비록 한 면에서는 영웅적으로 투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치는 또 다른 것들로부터 침윤(浸潤) 당했다.”56) 예를 들어, 테르툴리아누스는 한 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태양 숭배자들 이라는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 강력하게 논박한 반면,57)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이교의 축일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58) 당시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양신과 점성술적 관례들을 존중하는 대중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서 종종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태양 숭배에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된다.59) (329.1)
 태양 숭배가 기독교 예식에 반영된 중요한 사례는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 그리스도 태양신에 대한 주제, 동쪽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날짜와 관련된 것이다. (329.2)
 그리스도 태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