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8장 태양 숭배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일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예배일로 선택된 이유를 단지 부정적인 반유대적 동기만을 기초로 해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기념일로서 금요일을 채택해서 그 동일한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안식일을 대체할 새로운 예배일의 필요성을 야기시켰지만, 그것이 일요일을 선택 하도록 하는 특별한 결정적 인자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자에 대한 원인은 다른 경우에서 찾아야 한다. (315.1)
 몇몇 중요한 연구들이 시사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대한 “심리적 지향점”을 쿰란공동체 및 유사한 그룹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분파주의자들의 태양력으로부터 얻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태양력에서 연례 유월절과 오순절 날은 항상 일요일이 된다. 비록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더 강화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부활절 일요일이나 매주 일요일이 이러한 분파주의자들의 태양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명확한 교부들의 언급을 어쩔 수 없이 찾아야 한다.1) 더욱이 일요일 준수가 사도들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2세기 전반까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는 우리의 논제가 옳다면, 이교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절기들을 도입했던 그 때에 그들의 연례 혹은 주간의 일요일 절기들을 위한 날짜를 유대교 분파의 예식 달력으로부터 끌어들였 다는 것은 매우 믿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315.2)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태양의 날”과 더불어 태양 숭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는 것이 보다 더 그럴 듯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이것의 가능성에 대한 주요 반대 입장은 연대기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로르도르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316.1)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준수의 기원이 몇몇 태양 숭배 예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만일에 ‘태양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준수 이전에 존재했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에 우리가 기독교 이전 시기에 7일의 행성주간(the seven-day planetary week)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말이다.”2) (316.2)
 하지만 “행성주간즉 일곱 개의 행성들의 이름이 붙은 오늘날 우리의 일주일이 존재했을 것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준수가 관습으로 정착되었 때인 A.D. 1세기 말엽쯤으로 기산(起算)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태양 숭배가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명확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로르도르프는 주장하고 있다.3) (316.3)
 태양 숭배가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준수의 도입에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태양의 날”(dies solis)의 존재와 더불어 행성주간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한 주간 단위의 “태양의 날”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태양이 매일 아침마다 숭배되었었기 때문이다.4) 하지만 만일에 일요일 준수가 2세기 초반에 도입되었다면, 그 행성주간이 기독교 시기 이전에 시작되었어야 했을 필요는 없다. 사실상 행성주간이 서기 1세기경에 이미 그리스-로마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 시대에 태양이 일요일에 숭배되어졌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새로운 이교의 개종자들이 자신들을 유대인들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예배일을 찾는 과정에서 태양의 날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그 날에 마음이 기울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태양의 힘과 광채에 연결시키는 풍성한 성경적 관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과 태양숭배가 가지는 사상의 통합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런 가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요소들을 간단하게 고찰해 볼 것이다.

   (1) A.D., 150년 이전의 태양 숭배와 행성주간 제도.

   (2) 기독교 내에서 태양 숭배에 대한 반응들.

   (3) 태양의 날과 일요일 준수의 기원. (316.4)
 A.D. 150년 이전의 태양 숭배와 행성주간 제도
 태양 숭배
 1세기에 고대 로마에서 태양 숭배가 잘 알려져 있었고 그 예식이 시행되고 있었는가? 만일에 그렇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 가? 가스톤 할스베르게(Gaston H. Halsberghe)는 최근에 그의 논문인 “무적의 태양신 숭배”(The Cult of Sol Invictus, 그 주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베르마세렌에 의해 편집된 ‘로마제국 내에서의 동양 종교들’이란 책의 시리즈 중의 하나)에서 태양 숭배가 “가장 오래된 로마 종교의 요소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함축해주는 설득력 있는 문서들과 논증들을 제시해주고 있다.5) 잘 정리된 그의 결론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 태양숭배는 두 가지 국면으로 나타났다. A.D. 1세기 말엽까지 로마인들은 그들이 “토착적인 태양—숭배”라고 부르는 것을 신봉하였다. 하지만 “A.D. 2세기가 시작되면서 동방의 태양 숭배가 로마와 그 나머지 제국 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6) 태양숭배가 실제적으로 존재하였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증거 사례들은 충분하다. (317.1)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한 연중행사 일람표(27 B.C. 이전으로 추정되는 필로칼루스의 연중 행사력)는 8월 9일의 날짜 곁에 이렇게 씌어져 있다. “솔리 인디기티 인 콜레 퀴리날리”(Soli indigiti in colle Quirinali, 퀴리날 언덕위에 있는 고향 땅의 태양에게).7) 태양신은 실제로는 다른 문화권에서 수입된 신들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태양을 그들의 민족 신으로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소수의 고대 로마 문서에 나타나는 “고향 땅의 태양”(Soli indiges)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의 견해마다 다르다. 하지만 솔 인디게스(Sol indiges)가 정말로 로마인들 고유의 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로마의 신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8) (318.1)
 이집트를 정복한 후(31 B.C.), 아우구스투스는 오벨리스크 두 개를 로마로 보내, 승리를 주신 그 동일한 신(태양신께 감사드리기 위해 그것들을 로마의 대경기장(Circus Maximus)과 마르스 언덕(Mars Field)에 있는 “태양신에게 헌납”(Soli donum dedit)9)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대(A.D. 150-230년경)에 원형경기장 안에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여전히 공공연하게 태양신을 위하여 세워져 있었으며,” 그 원형경기장은 “주로 태양신에게 바쳐진 것이었다.”10) (318.2)
 A.D. 1세기에 “태양과 달”(Soli et Lunae)에 바쳐진 몇 개의 제단들이 발견되었다.11) 네로 황제(A.D. 54-68)는 자신에 대한 음모를 적발한 공적을 태양신에게 돌렸고, 유명한 콜로수스 네로니스(Colossus Neronis)를 벨리아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웠는데, 그것은 네로 자신의 형상에 머리 둘레를 일곱 가닥의 긴 빛줄기로 두른 태양신을 표상하는 것이었다.12) 엘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Elius Spartianus, A.D. 300년경)에 따르면, 자신의 주화에서 자신을 태양과 동일시하였던 하드리아누스(A.D. 117-138)는 콜로수스 네로니스에서 네로의 형체를 뜯어낸 후 그 것을 “태양신에게 바쳤다.”13) 타키투스(A.D55-120년경)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A.D. 69-79)의 제3군단이 “시리아의 관습에 따라 떠오르는 태양을 영접하였다”고 기록했다.14) (319.1)
 할스베르게의 주장에 따르면, 2세기부터 동방의 “무적의 태양신”(Soli Invictus) 숭배가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로마 사회에 침투해 들어왔는 데, 비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미트라(Sol Inictus Mithra)에 대한 숭배를 통하여,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Sol Invictus Elagabal)에 대한 숭배를 통하여 들어왔다는 것이다.15) 이 두 숭배 사이를 구분한 것은 납득할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트라교(Mithraism)가 보급된 그 시기에 대한 할스베르게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미트라교가 이미 A.D. 1세기에 로마에 퍼져 있었다는16)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징후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미트라교는 로마에서 공식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장관들과 황제들 중에서도 미트라교의 신봉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Sol Invictus Elagabal)은 웅장한 성전들을 가진 대중적인 종교였고, 젊은 엘라가발루스(A.D. 218-222) 황제의 치세 동안에는 전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319.2)
 동방의 태양신 숭배가 침투해 들어온 결과로 나타나게 된 이러한 다양한 태양 숭배는 “2세기 전반기부터 솔 인빅투스에 대한 숭배가 로마와 그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우세하게 나타났다”고 정리한 할스베르게의 결론을 입증해 준다.17) 황제와 태양신을 동일하게 여기고 그로 인해 황제와 태양을 숭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왕—태양”, 즉 왕을 태양으로 여기는 동방의 신학과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조장되었는데, 이것이 틀림없이 공식적인 태양 숭배를 보급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18) (320.1)
 행성주간 제도(Planetary week)
 태양 숭배의 확장과 일요일 준수의 기원이 동시대에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태양 숭배가 일요일의 기원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가? 그 둘 사이의 임의의 관계는 오직 A.D. 1세기에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태양의 날”(dies solis)과 더불어 행성 주간이 이미 존재했을 경우에 한해서만 고려되어질 수 있다. 그 행성 주간이 존재했었다면 태양의 날에 대한 중요성이 고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시에 태양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기별에 비추어 태양의 날을 매주일의 예배에 대한 상징의 날로 재해석한 후에, 그 매주일 예배를 위해 그 날(태양의 날)을 채택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320.2)
 행성 주간 제도의 기원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학자들의 견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그 제도가 유대의 주일제도를 이교도들이 재해석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것을 이교도들이 순수하게 점성학적으로 고안한 제도로 여긴다.19) 워터하우스(D. Waterhouse)는 바벨론적 요소와 헬라적 요소, 이집트적 요소 및 유대적 요소들이 융합된 것임을 지지하면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20) 하지만 본 연구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의 기원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 보다는 그 제도가 보급된 시기가 언제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320.3)
 A.D. 1세기에 이미 행성 주간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제도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몇몇 증거 자료들에 의해서 잘 입증된다. A.D. 200-220년 사이에 ‘로마 역사’(Rome History)를 기록한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63 B.C.에 폼페이우스(Pompey)와 37 B.C.에 가이우스 소시우스(Gaius Sosius)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두 번 모두 “그 당시 토성의 날로 불려진 날에” 점령당했다.21) 행성 신들의 이름을 따서 주일의 날들의 이름을 짓는 관례가 기원전부터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은 동시대의 다른 저자들의 언급에 의해서 더 분명해 진다. 예를 들어 호레이스(Horace, B.C. 35년경)는 “목성의 날”(dies Jovis, 목요일)에 대해 언급 하고 있으며,22) 티불루스(Tibullis, B.C. 29-30년경)는 토성의 날(dies Saturni, 토요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3) 디오 카시우스는 행성 주간 제도가 그의 시대에 이미 로마인들 사이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관습이었던 만큼 ”모든 곳에 널리 보급되어 졌다고 말한다.24) (321.1)
 1795년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두 개의 사빈 사람들의 달력들(Sabine calendars)과 1956년에 남부 이탈리아의 놀라(Nola) 근처인 키미텔레(Cimitele)에서 발견된 세 번째 달력(이 세 달력들은 티베리우스 [A.D. 14-37년] 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됨)25)은 오른쪽 칼럼에서 로마 눈디눔(nundinum) 장날 제도의 8일과 관련해 A부터 H까지 여덟 문자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왼쪽 칼럼에서 7일 행성 주간 제도를 의미하는 A부터 G까지의 일곱 문자들을 제공한다.26) 게다가 또 이러한 달력들은 몇 개의 이른바 “인티케스 눈디나리”(indices nundinarii)로 고려되어져야만 한다(그것들 중 몇몇은 로마 제국의 초기의 것으로 기산됨).27) 이것들은 마을의 이름들과 그 곳에서 시장이 열리는 행성 주간의 해당 일들(언제나 토요일-dies Saturni로부터 시작되는)을 제공한다. 이것과 또 다른 지적들에 비추어 고고학자인 앗틸리오 데그라씨(Attilio Degrassi)는 그리스 로마 금석학협회의 제3차 국제회의(the Third International Congress of Greek and Roman Epi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321.2)
내가 확신 있게 주장하건데 이 행성주간 제도는 ∙∙∙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단지 A.D. 1세기 전반에 알려져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알려지고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278. C.-A.D. 14]의 첫 해였다. ∙∙∙ 이 같은 사실은 놀라(Nola)의 달력이 발견된 이후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결론이다.28)
(3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