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2 부 성막 뜰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8. 물두멍과 그 받침 (나의 모든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것임)
 하나님의 정결케 하는 은혜를 즐거운 마음으로 내 밀고 있는 이 경건한 여자들의 선물을 주시해 보라. 반석은 그리스도이시며(고전 10:4; 부조와 선지자, 411) 원한에 찬 손들에 의하여 깨어졌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과 피”의 폭포를 제공해 준다(슥 12:1). (106.7)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의식을 위하여 물두멍의 물은 실로의 못에서 길어 왔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된 이 샘은 평화의 왕 혹은 임마누엘의 상징이었다(창 49:10). 실로암은 이 못에 해당되는 다른 이름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냈다”는 뜻이 었다(요 9:7). (107.1)
 구주의 능력을 나타내는 거울 물두멍과 그 받침에 대한 이 묘사를 철저히 생각해 보면, 첫째로 그분의 생애를 바라보는 자들의 인간적 필요를 드러내 주고, 다음으로는 그 희미한 면에 비춰진 모든 죄악을 씻어 주는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물두멍과 그 받침의 물에 잠기고 목욕하기를 택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정결을 주셨다. 이 외식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장차 용서와 정결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기를 주는 평화의 못이 되실 그분을 가리켰다. 영원한 성령이시여, 우리의 생애로 흘러들어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정하게 해주소서. (107.2)
 물두멍의 이중(二重)봉사
 이 이중의 물두멍 봉사는 성소의 매일 봉사의 부분이었고, 구원의 계획의 이면이 계속해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했다. 그 기별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거기서 우리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피, 곧 그 곳에서 우리의 품성의 옷을 씻고 죄의 얼룩을 제거받는, 죄와 부정을 위해 열린 샘이 우리에게 효력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보고 그 잘못을 교정하고자 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 관한 바른 지식을 원치 않는다”(4T, 58, 59). 이 무관심 때문에 그들은 거울과 샘을 다 같이 배척한다. (107.3)
 영원한 속죄의 제단에서 희생 제물은 그 피 흘리는 희생을 통하여 죄인의 용서와 칭의를 주었다. 이것은 단한번의 행위, 한 순간의 역사였다. 그 후 물두멍에서 정결케 하는 은혜를 나타내는 물에 계속해서 씻음으로써 다시 태어난 죄인이 그의 정결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07.4)
 하나님은 완전한 정결을 요구하신다
 자신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 니고데모는 그가 정말로 깨닫지 못한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탐색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 이 말은 그가 어떤 이론적인 진리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희망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토라의 더 풍부하게 적용하는 길을 바랐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들린 놋 뱀의 실제적인 적용을 생각하도록 그에게 요구했다. 그 랍비는 주조된 금속 안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독사의 독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은 하나님이 제공한 해독제를 통해서만 살아났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죽어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 밖에서 오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예수님은 이것을 받는 유일의 길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데 그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 바리새인은 오직 그의 과거가 장사지낸 바 되고 은혜에 의하여 새 생애가 시작된 후에만 이 거룩한 능력이 그에게 승리의 생애를 하게 할 것임을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다. (107.5)
 여러 세기 동안 이 봉사는 물두멍과 그 물을 통하여 예표되었다. (108.1)
 제단의 봉사와 함께 그 봉사가 자주 열거되었기 때문에(출 30:28; 31:9; 35:16), 정결케 하는 이스라엘의 연꽃은 여전히 새로남에 대한 풍부한 교훈을 가르쳤다. 매 제사장은 이런 지시를 받았다. “너희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정결케 하기 전에는 이 그릇(번제단에서 취하여 향을 태우는 데 사용하는 숯을 넣어 두는 은 불접시)을 만지지 않도록 조심하라”(Tamid 1:4; 출 30:18~2). (108.2)
 물과 피의 두 물줄기
 물두멍의 정결케 하는 물, 제단의 속죄의 피, 정결케 하는 불 사이의 연쇄 관계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 의식으로 된 일조(一組)는 빛과 떡과 향으로 된 성소에서의 세 개의 일조처럼 균형을 이루어 삼각형의 세 정점을 형성했다. 오랫동안 성막의 뜰과 성소에서 이루어진 죄인을 위한 이 여섯 봉사는 오늘날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108.3)
 19세기 전 그 무서운 금요일에 하나님의 고통받은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희생 제도에 의하여 예언된 그대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버리고 당신의 피를 쏟으셨다(1904년 12월 15일, 호주 연합회 기록).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그의 창을 예수님의 심장에 꽂은 군인은 단지 그분의 죽음을 확인하는 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잃어버린 인류의 구원을 위한 “물과 피”의 두 물줄기를 열었다. “생기롭게 하는 물은 ∙∙∙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며, 그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고, 생기롭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 생수와 같은 것이다”(MLT, 139). 물로써 생애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기를 갈망하고, 피를 통하여 믿음의 새 생애를 살게 할, 구속의 능력을 바라는 죄인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은혜로운 해결의 길을 하늘의 성소에서 언제나 제공해 준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 감동적인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물두멍과 제단은 예언적으로 골고다를 가리키고 있는 표상적인 손가락들과 함께 나란히 역사했다. (108.4)
 물두멍의 물은 또한 성경에 대한 표상이었다. “말씀을 연구하는 학도는 생수의 샘을 굽어보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는 말씀의 영성을 깊이 마실 필요가 있다”(7BC, 964). 영원한 성령이시여, 이 물을 우리에게 더 풍성하게 주옵소서. (108.5)
 새 언약의 물두멍 봉사
 바울은 구약의 물두멍의 의미에 대한 두 가지 통찰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겼다. 구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한 것은 그분의 은혜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디도에게 이 구원의 봉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3~5)으로 효력을 나타냈다고 상기시켰다. 바울이 쓴 “씻음”이라는 말은 물두멍의 샘(louter, Girdlestone, Synonyms of the Old Testament, 149)과, 철저하게 목욕하는 수단을 나타내기 위하여 헬라어 구약에 사용된 말에서 온 어근에서 유래한다. 사도에게 있어서 “물두멍”으로 대표된 사상은 씻음의 행동과 동시에 물을 포함했다. (108.6)
 그는 디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로 불리어진 죄인들의 중생은 매 경우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했다. 이 기능은 물두멍의 씻음을 통하여 성소에서 잘 묘사되었다. (109.1)
 사도는 물두멍에 대한 그의 둘째번 언급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엡 5:26)하신다고 에베소인들에게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는 물두멍의 씻음이 영감의 성경을 순종함으로 제자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예시(例示)했다고 하는 한 층 깊은 사상을 강조했다. 성경을 읽는 믿는 독자가 영감에 의하여 거기에 제시된 사상을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머물도록 허용할 때, 그의 사고 과정(思考過程)은 깨끗하게 씻겨진다. (109.2)
 바울의 이 두 통찰을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물론이요, 그분의 중생케하고 의롭게 하는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계속적으로 영감의 성경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그의 마음에서 제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봉사는 물두멍의 물을 통하여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시되었다. (109.3)
 물두멍은 피와 물로써 성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