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3장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
 그러므로 우화적 방법에 대한 비평은 그것의 오용에 집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문의 역사적 실체성과 형태의 중요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27 만일 우리가 우화화를 “여하튼 본문을 어떤 다른 말로 해석하는 것”28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떤 영해가 정당하거나 부당하다고 판단 할 수 있는 아무런 규범이나 기준이 없다. 그래서 한 학자는 정당한 우화적 해석은 원래의 의미와 부여된 적용 사이의 “참된 우화”29에 기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같은 우화화는 성서적 계시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전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잘못된 우화에는 성경 본문과 그것이 관련된 신비한 “다른 어떤 것” 사이에 유기체적 상관성도, 유추 할 수 있는 근거도, 실제적인 조화도 없다. (31.2)
 필로와 랍비들의 우화가 부당한 것은 그들이 성경 본문을 부조들의 구전(口傳)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우화화를 책망하셨다(마 15:6). 마찬가지로 교부시대와 중세의 우화화도 성경 본문과 로마 가톨릭 전승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와 칼뱅이 그들의 성경 해석 원리로 우화적 방법을 철저하게 배제한 이유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구약과 신약은 유기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였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은혜의 형태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둘 다 동일한 중보자와 구속자에 의한 구원을 가르 치며, 둘 다 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둘 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 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로 요약되는 동일한 언약의 하나님과 함께 같 은 교제를 나눈다. (3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러한 근본적인 통일성과 신학적 유사성 혹은 일치성 때문에, 구약을 신약에 의하여 해석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화적 해석과 표상학적 해석을 구분하는 것을 거절 한다. 그러나 바울의 우화는 “표상학의 틀을 의지하고 있으며, 유대나 헬라의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우화는 아니라”30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 같다. 갈라디아서 4:24-31의 사라—하갈 이야기(창세기 21 장)에 대한 바울의 우화에서 그는 구약의 이야기와 현재의 예루살렘(유대 주의)과 교회의 역사적 상황 모두에 공통적인(Cortron) — 우화의 기초신학적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32.2)
 세대주의자들은 우화적 해석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세대주의자들은 예언을 해석할 때, 비세대주의자들이 우화나 영해를 하고 있다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리(Ryrie)는 “세대주의자들은 비세대주의자들 과는 달리 문자적 원칙을 예언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에 적용하고 있다”31 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과연 세대주의자들이 문자주의 원칙을 ‘모든 성경에’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는가?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은 종종 구약의 진술에 대해 우화적(비유적) 해석과 표상학적 해석을 적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들을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 1967년)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아가서 전체는 삼중 해석을 가지고 있다.

   (1)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사랑,

   (2) 여호와의 아내요. 그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비유적 계시(사 54:56; 렘 2:2);

   (3) 그의 하늘 신부인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고후 11:1-2; 엡 5:25-32) (705쪽, 강조첨가). (33.1)
 여기서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기사 중 심지어 책 한권 전체를 우화하는 원칙을 공식적이고도 명백하게 채택하고 있다. 아가서의 8장 전체를 우화화하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솔로몬의 사랑으로 상징된” 거룩한 신랑의 사랑은 “혼인 관계의 알레고리를 수반하고 있다(705쪽). 그러므로 세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중 유추의 기초 위에서 구약의 역사적인 책 한권 전체에 대해 우화적 해석 혹은 영적 해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1) 혼인 언약과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언약 사이의 알레고리;

   (2)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사랑 사이의 알레고리.

 이것은 역사적인 사랑 이야기를 이중으로 우화화한 것이다. 즉, 첫째는 이스라엘과 관련하여서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하여서이다. 제시된 성경 구절들은 이러한 이중의 우화적 해석이 정당한 해석법이라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옛 세대와 새 세대, 옛 언약과 새 언약,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본적인 신학적 유추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신학적으로 이종(異種)의 것이거나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간 동종(同種)의 것이거나 유사한 것이다.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도 다른 구약 구절들을 우화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라합이 여리고에 있는 그녀의 집에 매었던 붉은 줄(수 2:21)은 그 붉은 색 때문에 “희생을 통한 안전”(히 9:19-21)을 우화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러한 우화화를 부당한 영해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것은(수 3장) “그리스도와 함께 한 우리의 죽음을 비유하는 것(롬 6:34, 6-11)”이라고 하였다(261쪽). (33.2)
 창세기 37-45장의 요셉이야기는 요셉과 그리스도 사이의 “수많은 유사성” 때문에 우화화하여, “요셉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317쪽)라고 결론을 내렸다. 요셉의 애굽인 아내 아스낫(창 41:45)은 “교회를 묘사한다”(59쪽)고 하였으며,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교회의 표상”으로 간주되었다(34쪽). 룻기의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룻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으로 들어온 자들을 묘사”(317쪽)한다. 아담이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창 2:23)‘여자’라고 부른 하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주어졌다. “여자는 교회의 표상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엡 5:25-32)” (6쪽). (34.1)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세대주의는 구약 기사에서 기독론적, 교회론적 표상들과 유비들을 계속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약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32 세대주의의 교리적 원칙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불일치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대주의가 구약해석을 위하여 기독론적 — 교회론적 표상과 유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약성경이 예견하고 의도하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이러한 정반대 원칙의 명백한 충돌—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약에 예언되지 않았지만(not predicted),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구약에 예시되었다(prefgured)는—을 구약을 두 개의 다른 해석 원칙을 요하는 다른 두 부분 즉 역사예언으로 나누는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관점에서 표상학적,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은 신약 교회의 어떤 표상이나 비유도 거절하는 문자주의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4.2)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주의를 공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33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을 해석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첫째, 역사적인 부분을 위해서는 신약의 권위에 기초한 기독론적 — 교회론적 원칙을 적용 한다. 둘째, 예언적인 부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독론적 — 교회론적 성취를 부인하면서 문자주의 원칙을 적용한다. (35.1)
 무엇이 세대주의의 구약 해석에 있어서 이런 불일치하고 충돌되는 이중의 해석을 초래하였는가? 무엇이 이스라엘 예언에 대한 신약의 권위를 무시하는 이 문자주의의 기초가 되었는가? 그들은 “예언은 미리 쓴 역사”34라고 정의한다. 스코필드(C. I. Scofield)는 “성경의 역사는 우화적,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우리는 절대적인 축자성(absolute literalness)의 토대를 [성경의 예언에서] 찾는다”35고 한다. 이스라엘 예언의 계시와 영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세대주의만의 독특한 견해이다. (35.2)
 라이리(Ryrie)가 말한 바와 같이 이제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이 문자 주의 원칙을 ‘모든 성경에’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고 단지 선별된 성경의 일부분 즉 예언에만 적용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접하게 된다. 구약에 나타난 각 예언들의 성취에 대해 이렇게 엄격한 축자성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이중 해석학의 용례가 신약이 가르치고 있는 바인가? (36.1)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회의 표상으로서의 인물들, 구속적 사건들 등)와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신학적 유기적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예언과 교회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거절한다. 그들은 “다윗 언약은 문자적 성취를 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서 다윗의 백성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임을 의미한다”36고 공언하였다. 세대주의자들은 다윗의 언약을 현재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하늘보좌로부터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에 적용하는 것(행 2:30-36; 고전 15:25; 엡 1:20-23)은 우화화나 예언해석상 오류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구약의 역사서나 시가서의 경우는 우화적 토대가 있으므로 우화적, 표상학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예언 해석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필경 더 이상 우화적 토대가 없으므로, 이 신약의 방법은 전적으로 배척되어야 한다. 세대주의는 예언과 교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인정할 수가 없다. 세대주의 문자주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36.2)
요약하면, 바울의 말은 시오니스트의 회망이나 주장과 충돌되지 않게 해석해야 한다. 각 피조물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외치는 영광스러운 현 시대는 단지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구약의 프로그램이 잠시 중단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37
(36.3)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신약은 오직 구약의 역사적인 부분에만 기독론적 — 표상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다가 예언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적인 축자주의로 그 방법을 바꾸는가? 신약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의 예언적인 조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바른 대답을 찾을 때만 세대주의의 이중 해석이 옳은지, 아니면 신약의 권위를 넘어 성경 외적 해석 원리를 높인 사변적인 현대 이론에 불과한지 판단 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6.4)
 요약하면, 우리는 여전히 모든 성서 해석에 대한 문법적 — 역사적 — 신학적 주석 원칙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다. 특별히 구약의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증인들 사이의 연속적 계시를 인정할 때 (히 1:1-2; 요 1:7-18), 성경의 어떤 부분들 예언적인 부분을 포함하여 — 의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전체 성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구약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흔히 쏠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로 알려진 이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해석학이 모든 보수적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38 (37.1)
 참고 문헌
 1 L .S. Chaefer, Systematic Theology (Dallas: Dallas Seminary Press, 1947), vol 4, 259, 288.

 2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96.

 3 Hal Lindsey, The Late Great Planet Earth (NY: Bantam, 1973) 40; David Cooper, When Gog’s Annies Meet the Almighty in the Land of Israel.

 4 J. D. Pentecost, Things to Come (Findlay, Ohio: Dunham Pub. Co., 1961), 112.

 5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14, 119.

 6 Ibid., 115.

 7 R. H. Stein, The Method and Message of Jesus´ Teaching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8), 10.

 8 J. Barton Payne, Encyclopedia of Biblical Prophecy (NY: Harper & Row, 1973), 43.

 9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241.

 10 Ibid., 244. Ramm의 고딕.

 11 다음을 참조하라. L. Berkhof, 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Grand Rapids, M: Baker Book House, 1964), 제7장 133-166 (134).

 12 Ibid., 59, 60.

 13 J. Bright,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7), 171.

 14 Payne, Encyclopedia of Biblical Prophecy, 5; 45쪽과 비교하라. 15 F. F. Bruce in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 293.

 16 R. B. Girdlestone, A Systematic Guide to Biblical Prophecy (Grand Rapids, M: Kregal, 1955), 87. 예를 위해서는 제7장을 참조하라.

 17 Ryrie, Dispersationalism Today, 102.

 18 C B. Bass, Background to Dispensationalism (Grand Rapids, M: Baker, 1977; 1960의 재판), 150.

 19 A. B. Davidson, Old Testament Prophecy (Edinburgh: T. & T. Clark, 1905), 476.

 20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258.

 21 Bass, Backgrounds to Dispensationalism, 151 참조.

 22 M S. Terry, Biblical Hermeneutics (NY: Eaton & Mains, 1890), 214.

 23 성경의 모든 문자에서 신비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원칙을 믿었던 랍비 아퀼라(Aquila)의 예를 참조하라. F. W. Farrar, Histony of Interpretation (NY: E. P. Dutton, 1886), 71-77. 필로의 우화화에 대해서는 139-152를 참조하고, 스콜라주의자들 의 우화에 대해서는 266-274쪽을 참조하라.

 24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11, 223.

 25 A. B. Michelson, Interpreting the Bible (Grand Rapids, MI: Eerdmans, 1963), 231.

 26 J. Barr, Old and New in Interpretation (NY: Harper & Row, 1966), 103ff. 그는 신약에서는 우화적 해석이 표상학적 해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F. F. Bruce가 “우화화의 한 가지 형태가 표상학적 해석이다”라고 한 것과 비교 7727.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 (1973), 293.

 27 Barr, Old and New in Interpretation, 115-117. 다음도 참조하라. C. H. Dodd, The Bible Toda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1946), 16. Also C. H. Dodd,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Philadelphia: Fortress Press, Facet Books BS 3, 1971). 5, 8.

 28 H. A. Wolfson. Philo, vol. 1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47), 134.

 29 P. K Jewett, “Concerning the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WIJ 17 (1954):1-20 (13).

 30 E. E. Ellis, The Pauline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57), 127.

 31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90.

 32 성서적 표상학에 대한 세대주의의 정의에 대해서는 NSRB, 6쪽을 참조하라. 그것은 ‘명백한 신약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다.

 33 O. T. Allis, Prophecy and the Churc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4; reprint of 1947), 21쪽을 참조하라.

 34 A. C. Gaebelein, The Prophet Daniel, 1, 166; Allis, Prophecy and the Church, 26에도 인용.

 35 Scofield Bible Correspondence Course (Chicago: Moody Bible Institute), 45-46. Bass, Backgrounds to Dispensationalism, 150에 인용됨.

 36 Pentecost, Things to Corme, 112. 성서적 해석에 대해 좀 더 참고하려면 G. E. Ladd의 The Last Things, 17-18쪽을 참조하라.

 37 Allis, Prophecy and the Church, 50.

 38 예를 들어, B.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mpretation, 105)은 “전체 성경이 어느 특별한 성경절을 이해하기 위한 문맥과 안내자가 된다”고 하였다. W. Wenham (Christ and the Bible [Downers Grove, 111.. Inter-Varsity Press, 1973], 10)은 “성경이 나 천연계나 부분으로부터 전체가 아니라 전체로부터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을 설명하는 신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방법론을 요구한다”고 진술하였다. 솔라 스크룹투라에 대한 재림교회의 입장에 대해서는 L. E. Froom, Movement of Destiny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71), 제5장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