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3장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학 용어들로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할 수 있는 데까지 명료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문자주의,’ ‘우화주의’, ‘문자적’ ‘우화적,’ 그리고 ‘표상적’ 등의 용어들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이 사상적 의사소통에 있어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25.1)
 문자적 해석
 첫째, ‘문자적’ 해석 혹은 ‘문자주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대주의는 그것을 “언어의 합리적 문법적 의미를 찾아주는 것” 혹은 “말이 암시하는 자연적, 문자적, 문법적 방법”1으로, “문법적, 정상적, 혹은 쉬운 의미”2로, “일차적, 근원적, 정상적, 문법적 의미”3라고 정의한다. (25.2)
 그러나 여기에는 세대주의를 위해 자명하고도 근본적인 가치를 지닌 한 가지 비밀스런 전제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구약 예언에 대한 문자적 주석은 엄격한 문자적 성취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펜티 코스트(I. D. Pentecost)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확립된 해석 원칙에 의하면, 다윗의 언약은 문자적 성취를 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다윗의 백성들을 영원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 그와같은 결론은 구약을 신약과 분리하여 그것만 받아들 일 때만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해석은 신약을 구약의 약속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언적인 성경 해석 범위는 구약 주석의 과제보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 해석자에게 있어서는 전체 성경의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연구와 신구약의 상관성 안에서의 약속과 성취의 패턴을 포함하고 있다. (25.3)
 복음주의 학자인 램(B. Ramm)은 ‘문자주의’(literalism)란 용어를 모호한 용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부정적인 ‘축자주의’(letterism)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문자적’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웹스터)인 “단어의 관습적, 상용적, 상회 통념적 정의”5를 받아들여 문자주의와 문자적 해석을 구분한다. 그는 문자적 방법을 ‘역사적—문법적’ 혹은 ‘언어학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그것의 목적은 오직 성경 본문이 맨 처음 기록될 때의 상황에 비추어 “본문의 최초 의미와 목적을 파악하려는”6 주석이다. 거기에는 적용과 성취의 영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주석과 적용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6.1)
 성경의 단어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의미와 기별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단어와 의미는 비유적 표현이나 상징적 언어에서 항상 같은 의미로 명확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문제는 “성경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야 한다 ∙∙∙ .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의미이다.”7 문자적 규범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 하신 성경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당시에 그 구절로 나타내고자 의도한”8 그 의미를 찾고자 시도할 때, 시적 상징성을 인식하는 방법론이다. (26.2)
 문자적 혹은 언어적 해석은 문학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 문학과 성서 외 문학 모두에서 항상 문자적 주석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문헌의 이차적 의미 즉 문장의 수식, 우화, 표상, 비유 등과 같은 것은 모두 언어의 문자적 구조 내에서 그 근본적 제한과 의미가 발견된다. 문자적 해석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각 문헌의 장르와 형태의 독특한 성격을 인식해야 한다. (27.1)
 램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문자주의(혹은 축자주의)의 극단과 우화주의(통제 불능의 우화적 방법)의 극단 사이에 독립적으로 서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약의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또한 문자적 성취를 요구한다는 세대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문자적(liter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 마음에는 비교언어학적 개념으로 그 말을 생각한다.”9 이러한 점에서 세대주의와 개혁 복음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있어서 예언 해석의 진정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언 문학이 문법적 주석이란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특별 한 원리가 필요한가?10. (27.2)
 개혁 복음주의 자들은 이 ‘특별한 원리’를 늘 ‘신학적 해석’이라고 불러왔다. 이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신학적 통일성과 영적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에 제 3의 해석(신학적 해석)을 보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버코프(L. Berkhof)는 이러한 신학적 특징을 “성경의 더 깊은 개념”11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문법적 의미에 부가된 제 2의 개념이 아니라, 성경 본연의 개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7.3)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항상 표면에 놓여있지 않다. 문법적—역사적 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성경의 보조 저자들[주 저자는 하나님이심]의 의도가 항상 성경의 개념을 전적으로 나타내며, 거룩한 성경의 의미를 충만하게 드러낸다는 단언에는 전혀 진실성이 없다.12
(28.1)
 다른 성경학자들도 “본문의 신학적 핵심을 억제하는 주석은 불완전한 주석”13이며, 심지어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직접 그 자신의 예언들을 헤아리고자 했고(벧전 1:10, 11), 그 자신의 환상(단 8:27; 슥 4:13)이나 언어들(단 12:8)에 대해 무지함을 고백해야 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4 바꾸어 말하면, 문법적—역사적 해석만으로는 거룩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도 필요한 것이다.15 (28.2)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신학적’ 해석 원리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섞어버리며, 구약의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 외에 비문자적 적용을 한다는 이유로 단정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구절[신약에 인용된 구약의 예언]이 전혀 같은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16 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8.3)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통일성을 부정하고자 하지 않고 다른 전제 즉, 구원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통치 원리이며 총체적인 목적”17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세대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스라엘과 교회의 목적을 분리하고, 영광의 원리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을 기초로 하여, 다른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변형의 오류’를 범하되 특별히 예언 해석의 범주에 있어서 문자주의의 원칙을 타협했다며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Walvoord). (28.4)
 스코필드(C. I. Scofield)는 성경의 특별한 예언적 부분은 절대적인 문자주의에 의하여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진술하였다. “예언들은 결코 영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항상 문자적이다.”18 그러나 예언 해석에 있어서의 그와 같은 절대적인 문자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무리한 해석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적 신정 정치로 회복되어야만할 뿐 아니라, 모압과 암몬도 국가들로 회복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스라엘이 ∙∙∙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사 11:14). 그와 같은 철저한 문자주의는 “문자주의의 광기”19라고 불리어도 부당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적 입장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신약에 채택된 바와 같이 구약 성경에 대한 문자적 주석은 표상학적 적용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이 “기독교 서적”20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9.1)
 세대주의적 문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해석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십자가를 지향하기보다 옛 언약을 지향하고 있다.21 (29.2)
 우화적 해석
 ‘우화,’ ‘우화주의,’ 그리고 ‘우화적’이라는 용어에 대해 우리는 그리스도교 해석가들 사이에 일치된 이해나 용례가 없음을 알고 있다. 우화의 정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치된 견해는 그것을 좀 더 넓은 형태의 은유나 화법으로 보는 것이다. 우화는 여러 가지 비유점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내러티브 형태로 어떤 진리를 말한다. 성경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집이 퇴락해 가는 모습으로 묘사한 늙음에 대한 우화(전 12:3-7); 애굽에서 가져온 포도 나무로 묘사한 이스라엘에 대한 우화(시 80:8-15); 얇은 담을 건축한 이스 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우화(겔 13:8-16) 등이다.22 (30.1)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0:1-16의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와 요한복음 15:1-8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화를 사용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6:11-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에 관하여 광범위한 우화를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의도적인 우화들이며,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정당한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30.2)
 그러나 만일 어떤 해석가가 성경의 명백한 역사적 진술을 우화화한다(allegorize)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우화화는 그 구절을 성경 저자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사상을 가르치는 출발점이 된다. 어떤 우화적인 해석이 역사적인 진술을 영적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마음대로 바꾸어 놓으면, 그와 같은 사변적 우화화는 부정적으로 우화주의(allegorism)라고 불린다. 그것은 사실상 성경 본문에 전혀 없던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단지 교화를 목적으로 영적 진리와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해석자에 의해 본문에 부가된 것이다. 우화화는 유대인 주석가들(특별히 필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 그리고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방법이었다.23 램(B. Ramm)은 그런 우화는 ‘성경의 다중 의미’를 전제하고 있으나, “성경 개념의 단일성은 과거나 현재나 성경에 대한 모든 우화화를 제거한다”24는 이유로 그것을 거절하였다. (30.3)
 그러나 갈라디아서 4:24-31에서 바울이 창세기 21장의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를 취급할 때, “독자들로 하여금 종과 자유자 사이의 비교를 높이기 위해”25 우화적 적용을 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4:24에서 그가 창세기의 본문을 “우화적으로,” 즉, “비유로”(NIV) 해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린도전서 9:9에서 바울은 신명기 25:4의 법률적 본문에 대해 우화적 해석을 하고 있다. 비록 이와 같은 경우가 신약에서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진술이나 법률적 본문에 대한 모든 우화적 해석을 틀렸다고 할 수 없게 만든다. 바울은 지금 창세기에 나타난 독특한 역사적 진리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기초하여 우화적 적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우화적 해석은 “성질상 반(反) 역사적”26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필로의 경우처럼 빗나간 우화로 취급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와 근본적인 조화를 이루는 동질의 우화화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