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드라마 성소 제 9 장 2300주야와 하늘 성소정결
 “유사와 재판관”을 세우라는 이 말은 종교와 사회의 관습에 따라 치리할 수 있는 행정장관(유사)들과 왕에 대한 충성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정치와 사법적인 권한을 가진 재판관들을 임명하라는 의미였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의 전권을 위임받아 유대법과 페르시아법에 따라 통치할 수 있었다5. 또한 “이 칙령은 행정부 관리들의 주책, 관청 및 재판소, 성벽, 군인들을 수용할 성채의 건설을 허가하였다.”6 (209.3)
 에스라는 이 영이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스 7:7). (209.4)
 5. 아닥사스다 왕 칠년은 언제인가?
 1) 즉위년 방식에 의한 연대기
 즉위년 방식은 전대의 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를 하면, 그 해의 잔여 임기는 새 왕의 즉위년으로 간주하는 계산법이다. 그렇게 되면 새 왕의 통치 년대는 다음해부터 1년으로 계산이 된다. 에드윈 R. 딜레는 유다의 연대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다는 자신의 왕들과 이스라엘 왕들과의 대조연대에서 즉위년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상호 왕가에서 혼인을 맺음으로 동맹관계가 맺어진 때부터 유다는 이스라엘의 방식을 채택하여 4왕들까지 계속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유다는 티쉬리 월력을 처음부터 사용하였다”.7 (210.1)
 바벨론 페르시아력은 왕의 연대기가 니산 월(1월, 봄)로 시작이 되지만 유대력은 티쉬리월(7월, 가을)부터 시작이 된다. 가을부터 가을까지의 계산법을 티쉬리 월력 혹은 유대민력이라고 부른다. 아닥사스다왕의 연대기 계산법을 증명해주고, 더욱이 에스라서와 하나의 책으로 분류되어온 느헤미야의 연대기는 즉위년 방식을 채택하였다. (210.2)
 느헤미야서는 연대기를 기록하면서 1장 1절“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이라고 했고 순서적으로 다음해가 되어야 하는 2장 1절에서도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이라고 기록하였다. 9월과 1월이 같은 즉위 20년이 된 것을 보면 티쉬리 월력(가을에서 가을, 7~6월)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아닥사스다가 즉위한 연대에 대한 증거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엘페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i)에 나타나있다. B.C 464년 1월 3일, 당시에 페르샤를 통치하고 있던 왕은 아닥사스다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크세르크세스가 12월이 끝나기 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10.3)
아닥사다의 즉위년(Accession year)과 통치 7년8

465 464 463 462 461 460 459 458 457 456
즉위년 1 2 3 4 5 6 7 8
가을부터 가을력(티쉬리 월력)은 7월에서 시작하여 6월에 마침9

두 달력 B.C 458
니산 월력 1 2 3 4 5 6 7 8 9 10 11 12
티쉬리월력 7 8 9 10 11 12
두 달력 B.C 457
니산 월력 1 2 3 4 5 6 7 8 9 10 11 12
티쉬리월력 1 2 3 4 5 6
 즉위년 방식과 티쉬리 월력(가을부터 가을까지)의 달력에 의하면 아닥사스다 7년은 458년 7월부터 457년 6월까지 이르는 기간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211.1)
 2) 기원전 457년에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림
 그러나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7년에 왕의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받고 바벨론 도성에서 길을 떠난 것을 “왕의 칠 년 ... 정월 초하루”(스 7:7~9)이었다. 아닥사스다 7년 중에 정월은 457년 1월이 된다. 태양력으로는 3월경에 해당되는 때이다. 그렇다면 아닥사스다의 조서(에스라 7:11~26)는 이 보다 1~2 개월 빠른 겨울에 내려졌을 것이다. 아마도 태양력으로 1월이나 2월에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단 9:25)는 기원전 457년이 확실시 된다10. (211.2)
 
 가브리엘의 설명에는 메시야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나기까지는 B.C 457년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걸릴 것이며 마지막 그리고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이 금지될 것이라고 하였다. 보라! 얼마나 예언이 놀랍게 성취되었는가! 70주 중에 7주와 62주가 지난(69주) 후, 즉 483년(B.C 457~A.D 27) 후에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났다.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예수님은 69이레(483년)가 지난 서기 27년 가을에 물과 성령의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사셨다. 다시 예언처럼 반 이레 즉 3년 반이 지난 31년 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서기 34년에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마지막 3년 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기원전 457년으로 시작된 70이레 즉 490년의 은혜의 시기는 마치고 말았다. 그러나 457년을 기산점으로 시작된 2300년 후에 시작된 “성소가 정결하게 함”(단 8:14)을 입는 원형적인 대속죄일은 1844년 10월 22일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3.1)
 3) 지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결사업을 주목하라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성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죄의 정결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213.2)
 “엄숙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그 심판은 얼마동안 계속될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신다. 그대가 그대의 사업차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를 척량하고 계심을 기억하라. 그대가 가사에 종사하고 있을 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를 척량하고 계심을 기억하라. 그대의 말과 행동이 하늘 책에 사진으로 찍히고 있음을 기억하라.”(복음주석, 계 11:1) (213.3)
 1844년에 사무엘 스노우는 봄부터 여름까지 성경을 연구한 결과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봄 절기가 모두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가을절기의 성취만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1844년의 유대인 대속죄일 7월 10일 당시의 태양력으로 1844년 10월 22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성소진리의 중대한 부분들을 이해한 하이람 에드손과 크로지어 등은 예수님께서 이날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신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213.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214.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