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저자는 2:10에서 전 성경에서 거의 발견될 것 같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수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였다고 말한다. 마치 바울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정당성에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논리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가 행하시는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시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에게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80.3)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말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정하지 못하며, 잔인하며, 변덕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이 해야 할 것과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F. F. 브루스(F. F. Bruce)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언급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해 주지 않고 다만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한다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rev. ed., 79). (80.4)
 그러나 히브리서 2:10에서 우리는 갈바리의 고난에서 그 절정을 이룬 인간의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끄신 일이 “합당하였다”는 말을 읽는다. 바울의 핵심은 확실히 위에서 주시한 바대로이다-즉,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만 그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었다. (81.1)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 이상을 하셨다. 그는 우리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굴레로부터 건져내셨다. 2:14, 15에서 우리는 옛 원수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통한의 말을 엿듣게 된다. “우리의 가장 달콤한 노래들은 가장 슬픈 생각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들이다”라고 시인 셸리(Shelley)는 기록하였다. 그러나 가장 슬픈 생각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죽음으로 귀결된다. 고대 로마에서 친구를 잃어버렸을 때나, 무자비한 추수자의 불가피성(不可避性)에 직면하여 인간 존재의 무의미(“더러운 농담”)를 반추하는 20세기의 카프카(Kafka)나 사르트르(Sartre), 또는 헤밍웨이(Hemingway)든 간에, 가락은 동일하다—애처롭고 무한히 슬프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굴레를 쓰고 있다. (81.2)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81.3)
 영원하신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망의 어두운 동굴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간수(看守)를 무장 해제 시키셨다. 죽음에 응하심으로써 그는 사망 자체를 폐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죽음은 이미 그 독침을 상실해 버렸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애통할지라도, 우리는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매일의 일출이 고통을 수반한 채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밤이 뒤따라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매 새벽은 죽음을 패주시킨 분의 약속으로 빛난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여름의 따스함이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밤이 길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우리의 숨결이 막히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긴 여행이 끝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의 손에서 안전하게 될 것을 안다. (81.4)
 예수—이제와 영원히. 예수,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모든 것을 위한 분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82.1)
 그가 우리의 것이었던 영원한 죽음을 맛보심으로써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사망의 띠를 끊으셨을 뿐만 아니라—그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셨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의 가족의 일원들인 우리와 같이 되셨다—시험을 받으시고, 고통하시고, 성장하시고, 죽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만이 그가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신다. (82.2)
 2:17은 히브리서에서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처음 일컬어지시는 절이다. 진실로,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이다. 그러나 이 말이 등장하는 방식은—우연히도 설명이 없는—이 사상이 이미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은 히브리서 외에는 성경 어느 책에서도 대제사장으로 구체적으로 일컬어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다른 곳에서 그는 대제사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로마서 8:34에서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이시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는 제사장으로 옷입으시고 또한 희생되시는 어린양으로 나타나신다(5:6). (82.3)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그의 인격과 사업에서—히브리서의 신학적 전개의 정점을 이룬다. 우리는 그의 제사장직을 다음 장들에서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2:17에서 저자가 말한 핵심—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심—에 유의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오직 그가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경험들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 되실 자격을 갖추셨다. (82.4)
 참으로, 1:5-14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와 2:5-18 (참 인간이신 예수님)에 대한 논증들은 2:17에서 교차한다. 신—인(神人)이신 그는 신성과 인성을 붙드시며, 그것에 의하여 대제사장이 되신다. (82.5)
 ■ 말씀을 적용함
 1. 히브리서 1:5-2:18에 제시된 장엄한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에 대한 나의 반응은 어떤 것인가? (83.2)
 2. 세상의 어떤 “천사들” 또는 “별들(stars)”이 나의 경배와 모방을 유발하려 하는가? 모든 존재의 슈퍼스타(Superstar)이신 예수님은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 (83.3)
 3.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에 대하여 성경 연구를 할 때 히브리서 1장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83.4)
 4. 예수님을 통하여 내가 얻는 큰 구원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의 영적 경험을 되돌아볼 때, 나는 제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곁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어떤 면에서 일년 전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83.5)
 5. 엘렌 화잇의 다음의 충고를 음미해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명상하는 일에 매일 사려 깊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잘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조목조목 취하여 매 장면을 마음에 그리되, 특별히 마지막 장면들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와 같이 우리를 위한 그의 큰 희생을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더욱 지속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소성될 것이며, 우리는 더욱 그의 정신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겸손과 인내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83).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나는 어떤 유익들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나는 그 권면을 실천하고 있는가? (83.6)
 6. 예수께서 자신을 나의 형제로 간주하신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83.7)
 7.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님의 자유케 하시는 능력이 나를 사망의 두려움에서 어떻게 해방하실 수 있는가? (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