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보라—그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이름과 예배와 본성과 봉사로 인하여 더욱 위대하다. 사도는 말한다: 어느 면으로든지 아들을 보라. 그러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확실히 어떤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이다. (57.7)
 이 경우에 사도의 진술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그 진술을 확립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끌어들이고 있는가—즉, 그의 구약 인용법—에 대해서는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58.1)
 첫째, 인용된 매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자 [話者]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 . . 하셨으며”(1:5);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 . .”(1:6); “아들에 관하여는 [그가] . . .”(1:8); “또 [그가 말씀하시기를] . . .”(1:10);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 . . 하셨느뇨?”(1:13). (58.2)
 더욱이, 그가 인용한 구약의 일곱 구절에서 네 번(1:5, 8, 10, 13)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리고 다른 세 번(1:5b-7)은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하여 또는 천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58.3)
 이제 이 일곱 문단들로 되돌아가서 그 본래의 문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방법은 시간을 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의 깊은 성경 연구의 진수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역동적 본질과 그것에 대한 저자의 고매한 견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58.4)
 「새국제역」의 각주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1:5가 두 인용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시 2:7; 삼하 7:14). 구약의 이 본문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매우 흥미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며—동시에 매우 어리둥절한 면도 보게 된다. 비록 인용구의 말씀들이 구∙신약에서 동일하고, 양쪽 모두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긴 하지만, 문맥은 두드러지게 다르다. (58.5)
 그 본래의 배경에서 시편 2편은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이스라엘 왕의 즉위식을 묘사하고 있다(1, 6절). 7절에서 하나님은 더 나아가, 왕을 그의 아들로 입양하시며, 그에게 나라들을 통치할 권세를 약속하신다(8절). 시편 2편이 이스라엘과 그 왕들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히 그 이상을 보고 있다. 여기서 그는 다윗과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시편의 묘사를 완벽하게 성취하실 분—이스라엘의 참 왕—에 관한 예표적 그림자를 발견한다. (58.6)
 둘째 인용구—사무엘하 7:14—는 우리를 더욱 더 뒤흔들어 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 나단(4절)이 주님의 기별을 다윗에게 전하는 것을 발견한다.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하였을 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이 있다고 다윗에게 전갈하신다.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3절). 주께서는 그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시기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14절)이라고 하신다. (59.1)
 이것은 히브리서 1:5의 후반부에 인용된 말씀들의 원래 배경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솔로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구약 문맥에서 그 약속이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의 구절에서 극명해진다: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그것은 솔로몬이어야 하며, 메시야는 아니다! (59.2)
 우리는 또 다시 구약을 독특하게 이해하는 면모를 보게 된다. 시편 2편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왕은 훨씬 더 위대하신 왕을 예표한다. 그래서 저자는 한 문단에서 한 진술을 선택하여—그것이 아들(Son)에게 적용됨을 보면서—메시야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원래의 문단에서 바로 잇따라 나오는 한 진술을 간과해 버린다. (59.3)
 그의 세 번째 인용구(히 1:6)는 우리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새국제역」의 각주는 신명기 32:43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 본문으로 되돌아가면 히브리서에서 인용된 그 말을 찾을 수가 없다—“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없어진 본문은 어디에 있는가? (59.4)
 「새국제역」의 각주는 다시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신명기 32:43의 참고문은,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 MT, 히브리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세기 동안 전수된 구약 본문)에는 이 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반면,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와 「70인역」(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근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59.5)
 그러나 문맥은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모세가 죽기 얼마 전에 이스라엘에게 준 노래이다(1절). 이 노래 전체와 43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즉, 말하는 자는 여호와가 아니라 모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진술을 취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 아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60.1)
 여기서 저자의 구약 사용법은 그가 시편 2:7사무엘하 7:14에서 그랬던 것과는 다르다. 그 구절들에서 우리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어떻게 메시야를 가리킬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 32:43은 그러한 도피구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사도가—성령의 지도 아래(우리는 이것을 강조해야 한다)—원래의 문맥과는 전혀 상관없이 증거 본문(proof text)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히브리서 1장의 인용구들에 대한 연구들을 끝낼 때, 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들과 다시 씨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60.2)
 다음의 인용구(히 1:7)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는 이것이 시편 110:4에서 인용된 것임을 보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문단으로 되돌아가 보면, 천사들에 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새국제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가 바람 그의 사자(使者)로, 불꽃을 그의 종으로 삼으신다.” 그러나 헬라어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동일한 헬라어(앙겔로스[angelos])가 “천사” 혹은 “사자(使者)”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이중(二重)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히브리어 본문에서보다도 「70인역」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60.3)
 시편 110:4를 보면서, 우리는 말하는 자가 시인이며, 그가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들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자로 말하고 있는 히 1:7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60.4)
 다섯 번째 인용구인 히브리서 1:8, 9시편 45:6, 7에서 큰 변동 없이 따온다. 그러나 또 다시 원래의 문맥에서의 화자는 시편 기자(시 46:1)인 반면,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이다. (60.5)
 우리는 다음의 인용구에서도 비슷한 용례를 발견한다. 히브리서 1:10-12시편 102:25-27에서 (어법에서 약간의 변동만 있을 뿐) 인용한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화자의 변동이 있다. 시편에서는 화자가 고통받는 자로서 그가 애통을 하나님께 토해 내고 있다(1-24절). 그러나 히브리서 1장에서는 그 말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아들에게 말해지고 있다. (61.1)
 일련의 증거 본문들 중의 마지막 인용구(1:13)는 다시 시편 110:1에서 큰 변동 없이 따오고 있다. 이 시편은 신약 기자들의 구약 인용구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이다. 신약 기자들은 이 구절을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로 가득 찬 구절로 보았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인용한 여러 구약의 구절들 중에서 이 구절에 가장 많이 의존하였다. 우리는 다음의 장들에서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관한 바울의 논의에서 그 구절의 다양한 예언들이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61.2)
 히브리서 1:5-14의 일곱 구약 인용구들을 복습해 볼 때, 그 자체가 여러 가지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몇몇 인용을 위하여 원래의 히브리 본문보다는 성경의 역본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는 그의 두 논의를 위하여 역본들의 어법에 의존하였다(1:6-7).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은 그가 원하는 핵심을 찔러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