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나의 형제들아!” “나의 자매들아!”라고 하신다. 비록 우리가 악하고 부랑하여 아버지의 선하신 이름에 욕을 돌릴지라도, 그는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를 동일시하신다. 우리의 신체나 정신이 약하고 상하였을지라도, 그는 우리로 인하여 당황하거나 당혹해 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맞이해 주신다. (76.5)
 시편 22:22이사야 8:17-18에서 인용한 히브리서 2:12-13의 세 인용구들은 모두 친족(親族)의 측면을 강조한다. 구약의 문맥이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시편의 화자(話者)는 다윗이고, 이사야 8:17-18은 선지자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이지만—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이 말씀들에서 보고 있다. 히브리서 1:5-14의 구약 사용법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저자가 자신의 논점을 지지하기 위하여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77.1)
 예수님의 참 인성에 대한 확증은 2:14에서 계속된다. 비록 아들이 완전히, 영원히 하나님이실지라도, 그는 살과 피를 취하셨다. 그는 (성육신의 신비와 씨름하던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우리의 본성의 실체를 취하시지 않고 단지 외양만을 취하신 것이 아니다. 정말 아니다! 그는 우리의 본성 자체를 취하셨다. (77.2)
 그는 천사가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이 아니다. 그는 훨씬 더 낮게 내려가셨다—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까지. 그는 “범사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17절). 히브리서 2장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되심에 있어서 어떠한 예외도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4:15는 중요한 자격을 소개하고 있다—“죄는 없으시니라.” 이 점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봉사를 연구할 때에 자세하게 설명될 것이다. (77.3)
 범사에 우리와 같이 살과 피를 가진 동일한 가족의 형제—예수님의 참된 인성은 부인될 수 없다. 요점을 말하자면, 그가 우리의 본성을 나누시는 것같이 우리의 경험을 나누신다—그는 고난을 당하시며, 시험을 받으시며, 죽기까지 하신다. (77.4)
 예수님의 고난은 히브리서에서 여섯 곳에 언급되어 있다(2:9, 10, 18; 5:7, 8; 9:26; 13:12). 거의 모든 경우에 초점이 예수님의 죽음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인간 비애의 일반적인 문제들—우리의 가슴앓이, 질병, 비극, 그리고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77.5)
 예수께서 이러한 경험들을 함께 하신 반면, 히브리서의 관심은 영적인 노선을 따라 흐르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이 이곳에서는 그의 죽음에 동반된 고뇌에 초점이 맞춰진다—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78.1)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시험을 받으셨거나 유혹을 받으셨다(2:18; 다시 4:15“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사단에게 굴복하실 수 있었고, 넘어질 수 있으셨다. 참된 인성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는 “실패와 영원한 손실을 무릅쓰셨다”(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49). 나의 판단으로는, 복음서들에 대한 가장 분명한 왜곡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죄 지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신학이다(그 배후에 수세기의 전통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78.2)
 결국, 예수께서 우리 가족의 한 일원이 되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인데—즉, 공격당하기 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유혹에 대한 우리의 개방, 우리의 위험,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성향에 참여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선택은 그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 이하의 것이면, 우리가 인성에 대하여 어떠한 신학적 관점들을 쌓아올리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의 인성은 모조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78.3)
 예수님의 유혹들과 우리들의 것: 그것들은 동일한 것인가? 아니다. 마치 오늘날의 두 사람이 동일한 유혹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타고난 우리 자신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우리로 저항하게 하든지 넘어지게 하는 기존의 삶의 선택들을 배경으로 시험의 순간을 맞고 있다. 시험의 어떠한 두 순간도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각 순간은 그 자체의 환경, 그 자체의 세부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78.4)
 그러나 모든 유혹의 본질은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동일하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요일 2:16). 우리에게서와 같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기본 노선”은 아버지의 뜻이다: 우리가 그것 [아버지의 뜻]을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인가? 예수께서 비록 술집, 극장, 월 스트리트(Wall Street)와 함께 사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모든 것을 직면하셨다: 마귀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제공하는 시험의 순간. (78.5)
 첫눈에는 믿기 어려운 예수님의 인간적 경험이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그가 “온전케” 되심. 우리는 2:10 이외에도 두 곳에서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을 발견한다(5:9; 7:28). 그러므로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제시한 두 가지의 답변을 신속히 제쳐놓을 수 있다. (79.1)
 바울은 예수께서 이전에 갖지 아니한 하나님의 신분으로 일으킴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신학자들이 “양자[養子] 기독론”이라고 부르는 것). 제1장의 논리는 분명히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바울은 아들이 그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 자신의 고난으로써 정결케 되어야 할 어떤 도덕적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아들의 무죄하심을 명백히 선언한다(4:15; 7:26-28). (79.2)
 오히려, 예수님의 “온전케 되심”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그를 준비시킨 그의 성숙되고 지속적인 경험들—십자가의 고통에서 절정을 이루는—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인간 경험들을 통과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세워 놓으신 역할을 위해 자격을 구비하셨다. (79.3)
 이러한 결론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인성으로써 성취하신 것을 요약할 준비가 되어 있다. (79.4)
 지상에서 영원으로: 우리가 늘 필요로 하던 모든 것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생의 속박으로부터 구출하셨고,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한 자격을 친히 갖추셨다—성육신 때문에 모든 것을 그리고 오로지 성육신 때문에. 즉, 우리가 지금과 영원토록 필요한 모든 것을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가능케 하셨다. (79.5)
 이 세 가지의 성취 중에 십자가상의 그의 구원 사역이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저자가 아들의 V 자형 경력을 서술하는 2:9에서, 아들의 죽음이 중요한 순간으로 부각된다. 그의 죽음 때문에 그는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을 받으신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 (79.6)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발하는 다음의 진술은 진실이다: 이 아기는 죽기 위하여 태어났다. 우리는 구속의 계획을 희미하게 이해하지만, 성경은 하나의 사실을 매우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우리가 죄책감, 수치,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주로 죽으셨다. (80.1)
 그는 각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는 내 대신 죽으셨다. 그가 죽으셨을 때 내가 죽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받으실 대우를 우리가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는 우리의 몫이 아니었던 그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의 몫이 아니었던 우리의 죄를 위해 정죄를 받으셨다. 우리가 그의 것이었던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것이었던 죽음을 그가 당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25). (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