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절“조금 낮게”라는 말에 유의하라. 난외주에는 “잠깐 동안 낮게”로 되어 있다(「개역한글판」은 “잠깐 동안 낮게”로 번역하였다—역자 주). 두 개의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s)를 함께 묶고 있는 헬라어 본문에는 이것이 정확하다—문자적으로, “조금 조금(a little little).” 이 지소사들은 신분이나 시간을 지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깐 동안 낮게”라는 말도 온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9절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이다—천사들보다 낮게 되신(become) 예수님은 언제나 낮게 머물지(remain)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돌아가신 후에 영광과 존귀로 관쓰셨기 때문이다. (72.2)
 하지만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헬라어 문법의 그 정교함 너머에 있다. 그가 아들의 경력을 기술할 때, 그의 생각은 아들의 경력의 절정의 순간, 한때 낮은 시점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점이었던 사건으로 끌린다. 갈바리!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72.3)
 모든 신약의 사상은 갈바리에 중심을 두고 있다.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受難)의 이야기들인데, 여러 장들은 그의 마지막 주간으로 이끄는 서론이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모든 설교는 갈바리에 중심을 두고 있다. 신약의 모든 편지서들과 또한 요한계시록은 갈바리를 그들의 움직일 수 없는 정박 지점(碇泊地點)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72.4)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갈바리를 황금 시간(prime time)에 두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비록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들을 넘어지게 하였고(고난 당하는 메시야), 헬라인들을 즐겁게 해주었지만(처형된 중죄인),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가를 숨기려고도, 그것을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 주변의 세상에게 갈바리는 최악의 죽음의 방법이었다—로마 시민은 아무도 십자가 형에 처해질 수 없다는 바로 그 법에 의한 굴욕적인 죽음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갈바리는 자신을 세상과 화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실패가 아니라 울려 퍼지는 승리였다! 비극적인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이었다! (73.1)
 히브리서 2:9가 확증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73.2)
 9절의 두 표현은 우리의 주의를 특별히 요한다. 바울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한다. 초기 교회 때로부터 유명한 전도자 크뤼소스톰(Chrysostom)은 이 말이 예수께서 죽음의 쓴 잔이 어떠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경험하셨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는 예수님을, 환자에게 약을 삼킬 수 있는 용기를 주려고 1회분의 쓴 약을 자신의 입에다 넣고 조금 마시는 의사에 비유하였다. (73.3)
 크뤼소스톰과 같은 설교자가 위대한 만큼이나 그는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잔을 단순히 마시지 않으셨다—그는 찌꺼기까지 모두 마시셨다. 맛본다는 것은 그가 참으로 죽으셨고, 참으로 죽음을 경험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로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거절과 침뱉음과 채찍질, 특별히 갈바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심을 인하여 움츠려 드실 때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보라. 다른 길을 열어 달라고 탄원하시면서 기도 중에 고뇌하시는 그를 보라. 세 번의 그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을 들어 보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것은 불가능한—그가 만약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이끌어 와야 한다면 불가능한—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로 나아가셔서 홀로 죽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는 죽음을 맛보셨다—단순히 신체적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곧 성경이 말하는 “둘째 사망”(계 20:6)을 맛보셨다. (73.4)
 또한 히브리서 2:9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죽음을 맛보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대부분의 고대 필사본은 이렇게 되어 있으나 최초기의 일부 필사본들에는 다음과 같은 깜짝 놀라게 하는 이문(異文)이 나온다: “하나님과 분리되어(apart from God).” 이 변형(變形)에는 단지 헬라어 알파벳 두 글자가 관여되어 있다. 분명히 2세기의 누군가가 히브리서를 필사(筆寫)하는 과정에서 두 글자를 변경시켰을 것이다—그러나 그 변경이 어느 방향으로 된 것인가? (74.1)
 나의 판단으로는, 이 소수 필사본의 경우가 더 그럴 듯한 것 같다. 내 생각에는 매우 오래된 소수의 필사본들이 맞을 것 같다. 즉, 히브리서의 원래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준엄한 용어들로써 기술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의 저 두려운 신음 소리를 직접 반향(反響)하는 것으로 본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나는 이것이 히브리서 5:7에 다시 암시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 곳에서 저자는 예수께서 죽으시러 나아가실 때의 그의 기도와 탄원과 심한 통곡과 눈물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74.2)
 2:9의 구문의 독법(讀法)이 어느 것이 선택되든, 전반적인 사상은 매우 명료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두렵고도 무섭고,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실제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가장(假裝)이나 연극이 연출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 중 가장 낮은 지점이며, 아들에게 그것은 최저 중의 최저이다. (74.3)
 그러나 나는 반대를 각오하고 이것을 반복한다: 갈바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 솔직한 인정, 이 정직한 평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끄러워할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죽음—최저 중의 최저—은 그분의 최고의 성취였다. 그가 자신을 너무나 낮추셨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높이 들리실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즉, 나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75.1)
 히브리서 2:7-9의 장엄한 개념들을 숙고할 때에, 두 가지의 인상(印象)들이 우리의 마음을 활활 태운다. 첫째, 그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헬라의 신들처럼 수동적이고 가만히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시공(時空)으로 들어오셔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오, 놀라우신 하나님! 그는 세상을 이끄시기 위하여 내려오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비천하게 되셨다. (75.2)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실 수 있는가? 신—인(神人)이 되신 분이 하나 혹은 두 마음(신성적인 것과 인성적인 것)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나의 뜻 혹은 두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만일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참 사람이 되실 수 있는가? (75.3)
 우리의 믿음이 시작된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질문들과 씨름하여 왔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무런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암시조차도 없다. 우리는 설명이 아니라 확언(確言)을 발견한다. 제 1장이 비할 데 없는 말로써 아들의 신성을 기술하듯이, 2장은 충만하고 희석되지 아니한 아들의 인성을 확증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정신 체조를 위함이 아니요 우리의 명상과 경배를 위한 것이다. (75.4)
 히브리서 1장의 나머지는 7-9절까지의 주요 사상들을 부연(敷衍)한다: 예수님의 인성의 실체와 그가 성육신으로써 이루신 것. (75.5)
 참된 인성-우리와 하나가 되심
 바울은 예수님의 참 인성을 두 가지 측면—본성과 경험들—에서 논증한다. 즉, 예수께서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되셨고(본성), 우리가 직면하는 동일한 삶의 사건들을 통과하셨다(경험들). (76.1)
 11절은 우리에게 그와 우리가 “하나에서 난지라”(“동일한 가족에게 속한다”—영문)라고 말한다. 이 표현의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하나에서”이다—하나의 기원 또는 한 본성. 본 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을 일컫고, 우리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다. 스쳐 가는 놀라운 사상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구별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은 우리 중의 하나(one of us)이시라는 것이다. 10절에서처럼, 그는 우리 구원의 주(또는 대장, 선구자, 개척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앞서 가셔서 발자국을 내시고 길을 만드셨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이해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족이다.” (76.2)
 이것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의 형제들로 인정하신다. 비록 우리가 가문의 명성을 먹칠한 유리하는 양의 초라한 무리일지라도, 그는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다. 그는 자신이 우리의 한가족으로 간주되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76.3)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하여, 곁길로 나가 가족을 당혹케 하는 아들들과 딸들은 가인처럼 자신들이 벼랑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초기의 세대들에서는 그들이 단순히 나가 버리거나 보내져서, “집단 사회(the colonies)”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버렸다. 오늘날 그들은 어떤 대도시들의 군중들 속에 합병되어 잊혀졌고, 상류 사회에서는 거의 언급조차도 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지체 부자유자로 태어난 불행한 가족의 일원들이 있다. 과거에는 이 불운한 사람들이 구호소에 집어넣어지거나 눈에 보이지 않게 보호되었다. 그들은 가문의 이름은 지니고 있었으나, 그 가족들은 그들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애썼다. (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