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더욱 의미 심장하게도, 일곱 인용구들 중에서 오직 하나—마지막 것—는 분명히 메시야 예언이다. 시편 110편은 우리가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부담 없이 정상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다. 우리는 저자가 다른 인용구들에서, 사용하면 안된다고 배워 온 방법으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문맥과 말하는 주체와 말듣는 대상을 바꾼다. (61.4)
 만일 우리가 텀 페이퍼(term paper)나 논문을 쓰는 일에 그의 방법을 따른다면, 우리는 동료 학생들이나 교수들로부터 호되게 당할 것이다. 더욱이, 성경을 중시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재림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그러한 접근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임 있는 연구에는 반드시 문맥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그들이 애용하는 이 이론 또는 저 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서 구절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훈련 중에 있는 설교자들이 자주 듣는 바와 같이, 문맥을 무시한 본문은 하나의 구실이다(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 (61.5)
 히브리서를 연구하는 학도들이 시간을 들여 5-14절을 입증하려 할 때 자주 곤란에 빠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숙한 숙고의 결과로 여러 가지 통찰력을 얻게 된다. (62.1)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논쟁과 문학 분석의 잣대에 맞춰서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에는 자료들을 사용하는 어떤 지배적인 법칙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상당히 다른 시대에 속하는 것이므로 성경 사용법과 논리의 방법도 달라야 한다. 굳이 더 좋거나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우월감의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논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고, “시간은 고대의 좋은 것을 투박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62.2)
 그래서 모든 성경 학도들에게 하나의 중요한 사상이 떠오른다: 성경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설명하게 하라. 우리의 안건이나 규범들을 끌어들이지 말라. 우리의 논리를 본문에 부과하지 말라—말씀이 그 자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하게 하라. 그 말은 우리가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을 준비와 배울 태세가 되어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그것은 다른 책과 다르며, 고대 문학의 한 책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62.3)
 또한 그 말은 성경은 문맥을 무시한 채 무책임하게 본문을 다루어도 되는 면허증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바울과 다른 기자들은 영감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사로운 이론의 지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에서 구(句)나 절(節)을 끄집어내어 성경을 공격해서는 안 될 것이다. (62.4)
 마침내 우리는 성경에 대한 저자의 고매한 견해에 깊은 감동을 받고 히브리서 1:5-14를 떠나온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특정한 문맥에 있어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여러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 . .”라고 기록할 수 있었다. (63.1)
 그리고 구약에 대한 이러한 고양(高揚)된 이해를 바탕으로 메시야가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에 관하여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은 전조(前兆)가 되고, 그에게로 하나님의 모든 목적들이 향하고 있다. 만유 위에, 그리고 만유 안에서 아들이 참으로 하나님 되심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그분의 지문(指紋)들을 보는 것이다. (63.2)
 그러나 왜 그토록 긴 논증을?
 분명히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확립하고 싶어한다—그는 천사들보다 월등히 높임을 받은 분이시다. 우리는 강력한 두 구절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러나 목적상 네 개의 논조들로써 계속적으로 핵심을 찔러 완결하고 있다. 그가 히브리서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독특하다.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어디에서나 성경의 한 구절로도 요점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63.3)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알려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그가 어떻게 이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책의 나머지 부분을 연구한다. 사실상, 천사들은 이 책의 어디에서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발견하는 가장 가까운 설명은 곧바로 나온다. 2장에서 천사들은 언제나 아들과 그의 사역과 대조되면서 세 번 나온다. 그러므로 2:1-4의 경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위력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천사들을 통하지 않고 아들을 통하여 이르러 왔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케 하시지 않고 아들에게 하셨다(5절). 그리고 세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셨을 때, 그는 천사들의 성정을 취하지 않으시고 혈육을 취하셨다(16절). (63.4)
 바울이 2장에서 대조를 목적으로 천사들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천사들을 무심코 언급한다고 하는 것은 1:5-14에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아들의 탁월성을 보이기 위한 그의 의도의 신중성을 보증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논의의 발전 과정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깔려 있다. (64.1)
 예수님의 탄생 직전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일말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 시기 동안, 유대인들은 천사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러한 하늘의 존재들에 대하여 심취하여 그 생각으로 거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신명기 6:4의 불굴의 일신론 사상—“이스라엘아 들으라. . . .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이 여호와를 먼 곳에 계신 분으로 여겼을 것이며, 그리고 유대인들은 신적 존재와 접촉하기를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천사들은 사람들의 경이와 찬탄을 자아냈다. 천사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유대인들이 신원을 밝힌 네 천사장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 그리고 우리엘. (64.2)
 히브리서 13:8-9에서 사도는 이상한 교훈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는 천사 숭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아마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는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천사 숭배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골 2:18). 우리는 또한 그 당시의 비성서 문학에서 천사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추측은 종종 천사들이 하늘 성전 봉사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까지 비약한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는 멜기세덱도 나온다. 쿰란(Qumran)의 한 두루마리는, 비록 보관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멜기세덱이 하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64.3)
 그러한 관심사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히브리서의 서두에서 아들의 탁월성을 확립하는 것이 왜 중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천사가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무한히 탁월하신 분이시다. 그는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분으로서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의 대상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64.4)
 ■ 말씀에 들어감
 히브리서 2장을 두 번 읽으라. 두 번째 읽을 때는 다음의 항목들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시작하라. (65.2)
 1. 다른 역본들에서 2:1을 찾아 보라. 여러 번역들에서 어떤 주요 차이점들을 발견하는가? (65.3)
 2. 그리스도인의 생애의 엄숙함이 2:1-4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