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언약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시도했다.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각 사람 간에 영적인 연합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일을 하시는데,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한 참된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반응했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같은 방식으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히 9:14). (565.1)
 3. 율법과 새 언약
 도덕법에 대한 순종은 새 언약의 결과이며 옛 언약의 약속보다 더 나은 약속 위에 세워졌다(히 8:6). 그 약속은 율법을 폐기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율법은 돌판에 기록되는 대신에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과 뜻에 새겨진다. 그것의 계속성은 이처럼 영원히 확립되고 도덕법에 대한 참된 순종이 가능하게 된다. 순종은 마음과 뜻 그리고 행위에서 완전하게 실현된다. (565.2)
 새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하나님에 의하여 마음과 뜻에 기록되기 때문에 순종은 영적이며 자유의지의 행동이다. 이처럼 율법의 도덕적 특성과 그리스도인 행동의 도덕성이 모두 율법주의에 빠지는 일이 없이 안전하게 된다. (565.3)
 B. 도덕법과 은혜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창 15:6; 롬 4:1-5, 22; 갈 3:6)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같다. 즉 항상 믿음이 관련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율법에 따라 죽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을 가능성을 연다. (565.4)
 은혜는 그 자체로는 죄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되는 최중심으로서 죽음과 순종을 통하여 율법을 지지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지하지 않았으며, 율법이 선고한 형벌을 당하셨고, 율법의 명령에 복종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한 죽음을 죽으셨다 죄인에게 구원의 회를 주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가 되셨고, “나무” 위에 달리셨다(신 21:22, 23).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으며(고후 5:21)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로 하여금∙∙∙약속을 받게 하려”“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셨다(갈 3:13, 14).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선고를 이루셨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 5:8). (565.5)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제거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정죄였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롬 5:20, 21). (565.6)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사랑과 감사로 순종한다. 그들은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며(롬 6:4)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경험한다. (565.7)
 1. 율법의 부적절한 기능-율법주의
 만일 도덕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을 지킨다고 해서 칭의나 성화를 얻는 것은 아니다. 율법주의란 단순히 순종한 것으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얻거나 그의 안에 남아 있을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의 어리석은 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의를 놓치는 큰 잘못이다. (565.8)
 바울은 그의 원수들이 품고 있는 율법주의의 자기 의존이 자랑하게 하고, 육체를 신뢰하게 하며, 율법에 대하여 흠 없게 되기 위해 노력하게 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의 의를 꾀하게 한다고 단언한다(빌 3:1-11). 율법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된 이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에 이른다(18, 19절). (566.1)
 율법주의는 율법을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하여 은혜에서 돌아서서 믿음을 제거하고 복음을 왜곡시킨다(갈 1:6, 7). 왜곡된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왜곡함”에 대한 헬라어는 사물을 뒤집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용어인 메타스트레포는 혁명적 행위들을 의미하는데, 바울이 율법주의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율법주의는 구원을 잘못 나타내고 사람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한다. (566.2)
 2. 참된 순종의 증인
 성경에는 율법과은혜 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는데, 이는 마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율법의 의) 구원을 얻고, 신약 시대에는 은혜(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로 구원을 얻는 것과 같다. 약속이 그것의 성취로 바뀐 것이다(갈 3-4장). (566.3)
 로마서 9:30- 10:13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율법을 자기 의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순종했으나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두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들이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한다(롬 4:3). 다윗은 그의 자전적 시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일한 것이 없이” 입혀진 의로 설명한다(롬 4:6-8). (566.4)
 순종은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의 사람의 삶에 작용한다는 증거, 즉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함이 가져온 결과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이 개인 안에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누군가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증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한 증언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순종은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도덕법에 대하여 순종의 행동을 낳게 하실 때만 일어 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수행하는 이러한 행동들은 오직 성령께서 충만한 은혜로 회심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566.5)
 에베소서 2:4-10에 따르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로, 순전히 “믿음을 통하여∙∙∙은혜로” 얻는 것이다. 선행이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작동시켜 칭의와 성화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와 성화를 포함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선행은 새로운 출생의 부산물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러므로 순종은 은혜로 된 것이며, 은혜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가시적 증거이다.(참조 구원론) (566.6)
 C. 율법과 십자가
 율법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갈보리에서 발생했다. 첫째는 의식 제도의 종결이고 두 번째 는 도덕법의 재확인이다. (5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