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문제 구절
 바울은 율법, 특히 십계명을 명백히 지지하고 있지만 일부 진술은 율법이 십자가 이후에 그 효력을 잃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세 구절은 주의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 (557.5)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말한다. “율법의 마침”“율법을 끝내다”라는 의미로서 율법이 더는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구절의 문맥과 “마침”이라고 하는 헬라어 용어 등 두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557.6)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동료 유대인들이 넓은 관점에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추구했으나 믿음으로 행하지 않아 의에 이르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부딪히는 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들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게 되려고 시도하면서 모세의 율법이 그 의식들과 및 희생제물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롬 9:30-10:4). (558.1)
 텔로스라는 말은 그 의미 영역이 광범하여 끝냄, 목표하거나 목적했던 의무를 성취함 등의 의미를 포괄한다. 신약에서 그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성취”에 묶여 있으나, 텔로스는 목표, 목적, 결과나 결과물, 끝이나 결론으로도 옮길 수 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목적과 결과, 목표는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이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5에서 텔로스“이 교훈의 목적(텔로스)은∙∙∙사랑”이라는 구절에서 사용되었다. 즉, 사랑은 우리의 복음전파가 의도하는 결과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서 10:4에 나오는 “마침”(텔로스)은 전체 유대교 의식이나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목표물, 즉 그리스도를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비유와 상징의 성취이며 토라의 정점이지, 율법을 폐지하고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의 효력을 끝내는 이가 아니다. (558.2)
 바울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뜨린 그리스도의 방식을 열정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확언한다. 이방인은 더 이상 “외인”으로 남아서 약속이나 소망 없이 지내야 할 필요가 없다(12절).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가 되게 하셨다. 이 일을위하여 그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헬라어로 “법령”를 구성하는 계명의 율법[15절])을 폐지하셨다. (558.3)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백성이 되는 일의 어려움에 관하여 읽는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상을 통하여 명령하셨을 때에야 비로소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가지고 기꺼이 갈 수 있었다(행 10:9-20). 예루살렘 총회의 주요 쟁점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있었다(행 15:1-29). 어떤 신자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15:5)라고 말할 정도로 [완고]하였다. 많은 논의를 거친 후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령께서는 할례는 불필요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삼가야한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29절).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의식들을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지도자들은 사실상 이방인들에게 문호를 열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 결례 의식, 희생 제사와 같은 의식과 의례의 필요를 제거하심으로써 새롭고 더 나은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들의 모임을 제의적 의식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로 확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558.4)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이룬 구원의 놀라운 일을 묘사한다. 그들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았다(11, 12절). 그들은 “범죄와 무할례 가운데 죽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셨다. 그는 비유적으로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이 일을 하셨다(13, 14절).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골로새인들은 이제 구원의 복을 자유로이 누리게 되었다(15절). (558.5)
 이 구절의 핵심 단어는 “법조문으로 쓴 중서” 혹은“채무 중서”(새미국표준성경)인데, 이 말은 헬라어 케이로그라폰을 옮긴 것이며, 신약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비성경 문학에서 우리는 케이로그라폰이 채무를 입증하는 서류로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는 문서, 그러니까 부채 증서나 약속 어음임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비유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인간이 죄를 통하여 초래한 정죄였다. (559.1)
 이 채무 혹은 정죄는 더 나아가 우리를 거스르는 법적 요구사항을 갖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채무 증서는 우리를 거스르며 우리에게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스르는 판결(decrees)”(새미국표준성경)을 이루었다. 흥미롭게도 약속 어음을 묘사하는 이 구절은 바울 서신에 오직 두 번 등장하는(“견해” 혹은 “판결”을 의미하는) 같은 헬라어 단어 도그마이고, 에베소서 2:15에서 다른 하나가 등장한다. 두 본문에서 법적 규정의 체제가 분명하게 보인다. 에베소서에서 법조문은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분리시킨 의식, 특히 할례와 관련이 있다. 골로새서 2:14의 문맥은 의식적인 기념일 및 음식과 관련된 규정들을 가리킨다(16절;참조 안식일). 두 경우에 도그마는 유대인의 의문의 율법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전체 법 제도의 정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의식 제도가 그 종막을 고했다. 그것은 더는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원한 품성을 나타내며 십계명을 포함하는 도덕법은 그렇지 않다. 이 본문들에서는 도덕법의 폐지에 대하여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하다. (559.2)
 E. 요한의 글들에 나타난 율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요한은 신약의 마지막 기자이다. 그는 아마도 제1세기의 마지막 10년에 그의 복음서와 편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저술은 공관복음의 저술보다 30년가량 후에 일어났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는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559.3)
 1. 요한복음의 율법
 율법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루면서 이미 요한복음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II. C). 이 부분의 목표는 율법에 관하여 요한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옮긴 요한의 방식은 그가 십계명에 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비추어 준다. 또한 그것은 율법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었던 지식과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암시할 수도 있다. 요한은 “율법”이란 말을 마태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14회, 마태복음에서 8회 등장하지만, 율법에 대한 의문은 마태복음보다 요한복음에서 덜 부각돼 있다. 요한은 “율법”(노모스)이란 말을 모세오경(요 1:45), 구약 전체(10:34), 모세의 법(7:23), 법률적 규정(18:31), 십계명(1:17; 7:19) 등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한편 10장-15장에서 요한은 엔톨레“계명”이란 말을 10회 사용한다. 이 사이에 요한복음 13:34“새 계명”이 있고, “그의(복수 형태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 15:10)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두 번 언급된다. 요한복음의 이 부분은 요한의 서신에 나타나는 엔톨레의 용법과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룬다. (559.4)
 요한의 저술들은 바울의 저술에서처럼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던, 율법을 둘러싼 그런 분쟁이 보이지는 않는다.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다. 이런 배경에 반하여 율법에 대한 요한의 언급은 논의의 소지가 없었고, 마태가 기록한 말, 가령 율법의 영속성에 관한 산상설교의 말(마 5:18)처럼 그렇게 직접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율법을 성취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그런 말씀은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559.5)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을 고소한 두 번의 큰 사건을 기록한다. 첫 번째 사건은 베데스다에서 중풍 병자를 치료한 것이고(요 5:1-16),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연못에서 맹인을 치료한 일이었다(요 9:1-41). (560.1)
 첫 번째 사건에서 요한은 그 고소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응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아페크리나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그 말의 동사 형태는(예수님의 대답이) 공적 혹은 공식적인 변호임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넷째 계명을 범하였다는 그 고소를 부인하시며 자신을 변호하셨다. 그는 단순히 안식일에 아버지의 “일”, 즉 창조와 구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요한이 일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동사는 에르가조마이인데, 요한은 이 말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일을 언급할 때 사용하였고(17절;16:32, 35; 9:4),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 말할 때(요 3:21;참조 6:28)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한다고(6:27) 말할 때 인간에게 적용한다 하나님의 일은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사명의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잃어버림을 당하는 이가 아무도 없도록 일하시며(38, 39절), 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요 4:34; 9:4; 12:49, 50). 선교 행위는 안식일에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도덕법의 넷째 계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5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