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1:3-5) 자유는 구원, 즉 “현세대”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시고(4절; 참조 갈 2:20; 엡 5:2, 25; 딤전 2:6; 딛 2:14)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롬 4:25; 8:32; 참조 요 3:16)와 아버지 하나님이 연합하여 일하심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원이 그의 사명의 핵심 목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막 10:45; 참조 사 53:5, 6, 12). (554.4)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서의 자유는 그것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이다(갈 1:4). 이것은 구원(시편 119편에서는 자유로 정의됨)과 율법(토라)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온 것이라는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554.5)
 그러나 예수의 시대에 와서 토라에 대한 순종은 더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제 토라가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하여 짐스러운 의식률 및 도덕적 규정으로 재(再)가공되어 그 나라와 각 개인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토라는 구원을 위하여 작용하지 못하고 속박으로 작용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구원은 그들이 속박의 세력으로 변형시켜버린 율법에서는 나올 수 없었고, 구주와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원리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갈 2:16-21). (554.6)
 (2) 엘류쎄리아
 진리에 대한 순종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란 해방(벗어남)을 의미한다(4절;갈 5:1-13; 참조 롬 8:21; 고전 10:29; 고후 3:17). 바울의 개념은 갈라디아서의 전기적(傳記的) 부분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는 거짓 형제들이 할례 문제를 가지고 그가 율법에 순종하는지 알고자 염탐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갖고 있었으므로 “속박”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거절하였다. 그에게 “복종”의 대상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였다(갈 2:3-5, 14; 참조 고후 11:10; 골 1:5). (554.7)
 바울이 베드로를 안디옥에서 대면했을 때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한 것 때문에 책망했다(갈 2:14). 헬라어 본문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똑바로 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의 품행은확고하지 않았고, 신실하지 않았다그들은이 일을하는 척하면서 정작 달리 행동하는 위선자들이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아는 것 이외에도 올바른 품행은 복음의 진리와 관련이 있다. 고린도후서 11: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하여 말한다. 골로새서 1:5, 6에서는 그와 동등한 표현, 즉 “복음 진리의 말씀”을 사용한다. 복음 진리는 그리스도, 그의 뜻, 그의 말씀이다. 즉 자유를 가져오는 뜻, “열매”를 맺는 말씀이다. 이 문맥에서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품행과 사명을 가리킨다. 복음은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정하는 능력으로 삼는다. 유대인들에게 이 힘은 율법과 나란히 놓이고, 이방인들에게 그 힘은 그들의 정욕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율법과 정욕의 결과는 속박이며, 그리스도는 자유를 준다. (555.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탕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가장 안정적이고, 헌신적이며, 가장 의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정욕이나 규칙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으로서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뜻은 그리스도의 뜻과 연합되어 있고(갈 2:20) 성령을 통하여 능력을 얻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와 일치되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다(갈 5:22, 23). 그리스도인의 모든 외적인 행위들은 자유 안에서 맺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의 결과이다. (555.2)
 이런 이유로 자유는 매우 중요하며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굳게 서”야 한다(1절). 이 개념은 그 서신의 윤리적 부분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바울은 진리에 대한 순종의 맥락에서 자유를 언급한다(1-15절). 그는 속박으로 되돌아간 사람은 누구나(토라 아래 있는 유대인이나 정욕 아래 있는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라고 설명한다(4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6절)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진리를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7절).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강요가아니라 자유로이(기꺼이) 사랑한다. (555.3)
 그러나 하나의 위험이 이 자유를 위협한다(13절).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그의 뜻 아래에서 그와 연합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율법에는 율법주의의 위험이 있다.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율법이 그 삶에서 결정적인 도덕적 힘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셨을 때 그 위험은 방종의 측면에서 다시 나타나서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했다(13절). 이 위험은 악이 인간을 그 세력 아래 두려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쓰기 때문에 발생한다. 다행히 악[의 세력]은 제약을 받으며, 그것은 인간을 악의 세력들의 속박 안에 가두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아들, 혹은 성령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배 세력으로서 토라와 정욕을 제거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은 제거할 수도 없고 제거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도덕적인 그리스도인 삶, 즉 믿음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in liberty) 사랑의 지배를 받는 삶이 존재한다. 이것은 자유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 자유를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사랑(1절), 진리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맺는(22, 23절) 성령의 사랑이다(13절).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순종하며(7절), 성령안에서 행하며(25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14절). (555.4)
 (3) 엑사고라조
 갈라디아서 3:134:5에 나오는 이 말은 자유를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제시하며, 구속(救噴)을 의미한다. 이 말과 더불어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벗어나기 [이전] 상황(즉 율법의 저주)과 이런 자유에 의해 도달하게 되는 새로운 상황 즉 하나님 가족으로의 입양 모두를 포괄하는 더 간결한 말로 정의된다. (555.5)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그것의 “저주”에서 속량됨을 의미한다(갈 3:13).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10절). 바울은 오직 이곳에서만 이 표현을 사용하며, 그는 이 표현을 통해 구속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의해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됨을 의미한다(갈 4:1-9, 21-25; 5:1; 참조 2:4, 5). 한편, 유대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율법이나 그것에 대한 불순종이 저주가 될 수는 없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즉 그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짐으로써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14절). (556.1)
 바울은 율법의 저주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자 구약에서 네 구절을 인용한다(신 27:26; 합 2:4; 레 18:5; 신 21:23). 그는 믿음과 율법의 근본적인 분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저주와 칭의의 근원적인 분리에 대해 말한다. 저주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신 27:26)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이다. 죄수에게 저주는 나무에 매달리는 죽음이었다(신 21:22, 23). 그 저주는 율법이 아니며, 불순종 그 자체도 아니고 불순종의 결과였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율법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고, 그것을 지키는 자는 살 것이었다(레 18:1-5). 그러나 인간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고, 불순종은 죽음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 즉 믿음이었다(합 2:4). 그러나 인간은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는데, 이는 인간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됨으로써 인간이 먼저 해방되어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범죄자가 아니었으나 범죄자 취급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범죄자인 우리가 마치 범죄자가 아닌 것처럼 취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으로써 율법이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를 제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자기가 짊어짐으로써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그는 기소된 자들 대신에 돌아가셨다. (556.2)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은 더 이상 종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유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입양 관계는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율법을 주신 이의 자녀는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뻐한다. 이것은 신자들에게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가져다주고,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자들”(갈 4:5-7), 즉 “율법 아래” 있는 종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퀴리오스)이 되며, 성령 아래에서 아들과 딸들이 된다(6절).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새로운 상태에서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556.3)
 (4) 스타우로오
 자유는 갈라디아서 5:246:14에서 “십자가에 못박다”라는 말로 정의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와 율법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즉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라는 맥락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갈 5:24), 세상은 그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4).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은 의지를 보존하는 자유의 윤리를 의미한다. 정욕과 욕망을 포함하여, 육체에 대한 자발적인 죽음은 의지를 넘겨주는 것이다. 이 본문은 갈라디아서 2:19, 20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여기서 개인이 영적으로 못 박히는 일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연합에서 죽음은 의지의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하여 결정되며 기꺼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이다. 이 문맥에서 율법은 성령을 따라 살며 행하는 것으로 정의된다(갈 5:25). 구약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율법을 사랑으로 정의한다(14절). 그러고 나서 그 의미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설명한다(15절).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18절)와 정욕으로부터의 자유(24절)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윤리적 제도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와 방탕이 모두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은 그것들이 의지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켜야 할 일련의 법칙으로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의 계시로서 주셨다. 하나님은 방탕하게 살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을 보장하고자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나 인간 의지의 행사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이 두 의지가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이 같은 삶은 성령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갈 5:25),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에 조화될 것(스토이케오, 갈 5:25)을 요구한다. 강조점은 성령에 있다. 그는 뜻을 지도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힘과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못 박힘 혹은 성령을 따라 행함은 그리스도교의 “규례”(갈 6:16)라고 단언한다. 새로운 피조물의 표준(15절), 즉 사랑의 율법(갈 5:15), 그리스도의 법(갈 6:2), 진리(갈 5:7)에는 분명한 윤리적 명령이 있다. (556.4)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은 “성취된” 말씀을 통하여 연결된다. 십계명은 사랑이라는 도덕적인 동기로써 성취되어야 한다(14절; 6:2). 율법을 사랑으로 정의하는데, 사용된 본문은 이웃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레위기 19:18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오직 십계명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일부가 아닌, 십계명 전부를 성취함에 대하여 말한다(갈 5:14). (557.1)
 갈라디아서 5:3이 말하는율법은 5:14이 말하는 율법과 다르다. 다른 점은 그 초점이다. 첫 번째 율법은 제의적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둘째 것은 도덕적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본문 모두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사용된 말은 다르다. 3절에서 “모든 율법”(홀론 톤 노몬)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도 포함하는 토라의 규정 전체를 언급한다. 바울은 할례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제의적 율법을 포함해 전체 토라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4절에서 헬라어는 파스 노모스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양보다는 질적인 면에서의 전체를 의미하며, 도덕적 원칙들의 참특질에 주목한다. (557.2)
 율법에 대한 두 언급 사이의 또 다른 두드러진 차이점은 율법과 함께 이루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제의적 율법과 관련해 사용된 용어는 “하다”(포이에오)인데, 이것은 사람 자신의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도덕법 및 “그리스도의 법”(갈 6:2)과 관련해 사용된 용어는 “성취하다”(플레로오)인데, 이것은 성령의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맥은 바울이 두 용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했음을 증언한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인간 주도의 노력과 행위이고,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성령이 주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바울은 계명의 성취는 사실상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완성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순종은 성령의 열매이다. (557.3)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우리를 토라의 선언 이전 처음 시작 시점으로 도로 데리고 간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취하는 것이라고 표명한다. 이것을 도덕적 용어로 말하면 진리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법이 있다. 토라의 도덕법과 그리스도의 법의 유일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지키는, 혹은(율법주의적으로) 그것을 “행하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배우는바) 그것을 성취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5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