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의 안식일 준수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 바울의 투옥때까지의 약 30년 기간을 망라한다. 어떤 이들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효력이 끝났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계명을 준수했다. 누가는 바울이 안식일에 예배드린 몇 가지 경우를 기록한다. (552.2)
 바울은 첫 번째 선교여행 중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행 13:14). 그는 설교자로 온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왔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은 올바른 일이었다 바울은 권면의 말씀을 하도록 초청받았고 그의 기별은 매우 놀라워서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듣고자 하여 모[였다]”(행 13:44). (552.3)
 바울은 두 번째 선교여행 중 빌립보에서 안식일이 되자 도시 밖 강가의 “기도처”에 갔다(행 16:13). 이번에도, 심지어 회당이 없는 곳에서 바울은 단지 유대인 청중들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드리러 갔다. 그는 안식일 준수자였다. 누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 연속하여 회당에 참여했다고 기록한다(행 17:1, 2). (552.4)
 2. 율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바울은 다른 방법으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갈 4:21), 구약 전체(고전 14:21), 십계명(롬 2:17-23; 7:7; 13:8-10) 혹은 남편과 아내를 매이게 하는(롬 7:2) 것과 같은 특정한 법을 의미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율법”(노모스)이란 말을 “악의 법”(21절)이나 “죄의 법”(25절; 참조 롬 8:2; 갈 6:2)을 언급할 때처럼 비유적으로 사용한다. 바울은 그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지만, 대개 문맥상 그것의 의미는 명백하다. (552.5)
 바울은 “율법”을 복수 형태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율법은 언제나 하나이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다 율법, 더 구체적으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강령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뜻이다. 율법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바울은 분명한 결론, 즉 율법은 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믿음의 원칙”(문자적으로는 믿음의 법)에 의하여 신자는 율법에 순종한다(27절). (552.6)
 율법이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서 지지를 받지만(롬 7:12), 그것이 칭의나 구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만일 칭의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될 수는 없다. 칭의(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는 사람을, 독자적이고 반역적이고 죄된 분리로부터 하나님과의 화목함에서 오는 친밀함으로 이끈다. 그것은 오직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를 받아들이는 일은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온다(롬 5:1-10). (552.7)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율법 아래” 있는 것이며 “은혜 아래” 살고 있지 않다(롬 6:14).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죄인은 율법 앞에서 불완전하며 행함으로 칭의에 도달할 수 없다. 죄인이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율법을 칭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여 성령에 따라 순종함으로 의롭게 된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거부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율법의 의로운 요구”“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이루어지게”(롬 8:4)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순종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와 함께 사는 죄인에게만 가능하다. (553.1)
 a. 율법의 목적
 로마서 7:5-12에서 바울은 율법의 목적을 이야기한다. 율법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죄가 그 일을 한다. 율법은 죄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주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가 죄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율법(노모스)은 우리 안에서 “죄의 정욕”“일으키게 한다”(5절). 죄의 중대함과 그 영향을 부단히 과소평가하는 죄인들과는 반대로 율법은 죄인이 죄의 진정한 크기를 볼 수 있게 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가 어떤 법을 말하고 있는지 명시한다. 즉 “탐내지 말라”고 말하는 법이다(7절). 십계명은 결함이 없다. 십자가 이후 30년간 [여러 서신을] 기록한 바울은 그 점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찾지 못한다. 바울은 율법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 죄와 죄된 경험에 대하여 매우 잘 알게 되었다. 죄의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게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죄는 여전히 존재하되 개인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죄책을 가져왔다. 즉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있다. 죄책감은 죄에 의해 발생한다. 율법은 그것을 죄인의 마음에 알린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553.2)
 여기서 바울은 명백히 십계명 율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이 거룩하지 않고, 의롭지 않고, 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을 “율법으로 부터” 구원한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그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6절). (553.3)
 갈라디아서 3:19-29에서 바울은 또 한 번 율법의 목적을 다룬다. 아브라함부터 그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그 중심이 되었다. 아브라함 반응의 골자는 믿음이었다. 나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 즉 자연, 경험 그리고 믿음의 영역(15-18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포괄적인 삶의 제도를 주셨다. 삶의 제도인 이 율법은 약속을 대체하거나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다. 율법의 목적은 의나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통해서만 온다. (553.4)
 유대인의 제도는 그 목적이 “보호자”, “가정교사” 혹은 “교육자”(파이다고고스[24절])가 되는 것이었다. 파이다고고스는 선생(디다스칼로스)이 아니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학교에 가고, 학교 용품을 옮기는 일을 돕고, 바른 예절을 가르치는 노예였다. 율법(삶에 관한 총체적 유대인 제도)은 약속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었고 약속을 대체한 적도 없었다(21절). 그 교사 즉 약속의 노예가 그 아이의 선생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553.5)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약속된 삶은 더 이상 약속이 아니라 완전한 실재가 되었다(27, 29절). 그러므로 삶에 관한 유대인 제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25절). 더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삶의 방식이 없을 것이었다.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상속자”들이 된 아들딸들만이 있을 것이었다. 오직 하나의 삶의 길이 있을 뿐이며, 더 이상 “율법”이 중심이 되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길인 “약속”이 중심이 될 것이다. (553.6)
 유대인을 위한 가정교사일 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위한 가정교사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로부터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덕법이 아니라 삶에 관한 총체적인 유대인 제도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다. 율법 없는 그리스도교는 도덕관념이 없거나 부도덕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덕스러운 삶의 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삶이다. 동사 엔뒤오(입다 혹은 옷을 입다)는 다른 이의 품성, 가치, 마음가짐 등을 입고 그가 입고 있는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한결같이 순종하신 십계명 법에 반대되는 그런 생활양식을 결코 낳지 못할 것이다. (554.1)
 b. 갈라디아서의 율법과 자유
 갈라디아서의 압도적인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셨다(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윤리와 행동의 기초는 자유이며(5:1),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초대는 자유로의 초대이다(5:13). 그러나 자유는 포괄적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의(定義)가 아니므로 약간의 설명이 요구된다. (554.2)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유는 전통적인 유대인 삶의 방식(율법 아래 속박됨[갈 3:13; 4:3, 5, 9]), 이교도들의 삶의 방식 및 인간 성정의 노예가 된 것(갈 1:4; 5:13, 24)과 대조를 이룬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관점에서의 자유를 묘사하기 위해 네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각 단어는 자유와 율법에 관한 이해를 넓혀 준다. (554.3)
 (1) 엑사이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