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창조론자들이 19세기에 이 개념들을 반대했으나, 20세기의 창조론자들과는 그들의 방향이 다소 달랐다. 초기의 현저한 창조론자들 중 한 사람은 루이스 애거시즈(AD 1807-1873년)였는데, 그는 특히 화석에 대한 그의 저서와 빙하들의 생성에 대한 관찰과 이론들로 잘 알려졌다. (528.1)
 b. 20세기
 이 문제들에 대해 오늘날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발전들이 지질학, 생물학 그리고 유전학 분야들에서 있었다. 지질학 분야에서는 동일과정설로부터의 표류가 있었다. 지질학자들은 오늘날, 진화론자이든지 아니든지, 지질학적 층들의 격변들에 대한 풍부한 증거들을 보다 흔쾌히 수용한다. 이 견해와 창조론자들의 견해의 차이는,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은 현재 지질학적 층들에서 다수의 격변을 보는 반면, 창조론자들은 대부분의 이 격변들을 한 번의 대격변, 성경의 홍수로 집어넣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노아 홍수에 대한 증거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우리가 그 이전의 창조를 어떻게 보느냐에도 영향을 끼친다. (528.2)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에 영향을 끼친 다른 분야는, 물리학자들이 발전시킨 복사측정에 의한 연대측정법이다. 화석이 없는(침전물이 없는) 암석들 속에 있는 요소들의 연대를 정하는, 복사측정에 의한 연대측정법은 그 요소들과 그것들의 화산성의 침전을 수백만 년 과거에 놓는다. 만일 최초의 지구가 창조주간 전에, 즉 지구상에 생명체가 출현하기 전에 활성이 없는 상태에 존재했다고 우리가 허용한다면, 이것은 여전히 창세기 1장의 창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양립할 수 있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은 죽은 유기체들, 즉 유기체의 재료의 연대를 정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이 방법은 역사에서 더욱 더 과거로 갈수록 점점 더 정확성이 떨어진다. (528.3)
 생물학 분야에서 유전학이 진화론에 가장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쳤다. 다윈은 유전학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었다. 유전된 특성들이 피에 있는 소구체(小球休)에 의해 유전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다윈이 활동하고 있던 동시대에 수사(修士)그레고르 멘델이 유전학에 의해 지배되는 유전 법칙들을 수립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저작은 잃어버렸다가 재발견되어야 했다. 특성들의 변화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통해 일어난다고 우리는 현재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진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대개 돌연변이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롭기 때문이다. 집단유전학연구를 통하여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종의 전체 집단을 택한다면, 우리는 통계적으로 해로운 돌연변이를 압도하고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를 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28.4)
 획기적인 한 혁명이 1953년 왓슨과 크리크에 의해 DNA 분자의 이중나선형 구조가 발견됨으로써 생물학에서 일어났다. 복제에서 일어난다고 현재 알려져있는 것은 디앤에이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염기쌍이 풀리고, 모쌍(母雙)의 두 반쪽이 연결되어 새로운 염기쌍을 만들며, 이런 과정을 통하여 결국 그 종의 일부 기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광대함과 복잡성 때문에 종의 진화를 가정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인간의 유전자와 염색체의 디앤에이에 있는 모든 염기쌍을 확정하기 위해 하나의 주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인간의 유전체를 구성하는 염기쌍이 10억 개 이상 있으므로, 그토록 정확하고 복잡한 존재가 진화로 생겨났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한히 작다. 유전학의 놀랄만한 경이들에 대한 증언은 우리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고 말한 성경 기자의 증언과 같다. (528.5)
 H.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의 기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20 세기 창조론에 주된 기여들을 했다. 이 노력에 있어서 최초의 지도자는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AD 1870-1963년)였다. 그는 지질학을 독학했는데, 지질학자들에 의한 전문적인 출판물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지층들에 걸쳐있는 화석들의 분포에 질서가 있다는 것을 부인했으며, 지층들이 많은 곳에서 순서가 어긋났다고 주장했다. 지질학자들은 어떤 곳들에서 지충들이 거꾸로 되어 있음을 사실상 인정했지만 이것들을 현혹시키는 일치들로 여겼다. 그것들은 하부의 지층들이 차후의 지충들에 밀려 올라왔을 때 생겨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프라이스는, 이 거꾸로 된 지층들은 올바른 순서로 퇴적되었으며 따라서 지질학자들의 이론은 그 점에서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비판들을 일련의 책들, 즉 〈새 지질학〈1923년)〉, 〈진화의 궁지(1925년)〉, 〈옹호 받은 창조(1941년)〉 그리고 〈상식지질학(1946년)〉에서 주장했다. 프라이스는 20세기 창조론자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지당했다. (528.6)
 프라이스가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심지어 재림교회 내에서도 도전받았다. 퍼시픽 유니온 대학의 생물학 교수 해롤드 W. 클라크는 지층들과 그 화석들에 대해서 프라이스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클라크는 프라이스보다 야외 작업을 더 많이 했으며, 지충들과 그 화석들은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이 말했던 그 순서로 발견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결론은 화석들의 침전에 대한 대체 이론, 즉 화석들의 중첩(superposition)과 양립할 수 있는 이론의 전개를 요구했다. 화석들이 자연에서 생태학적인 적소에 차지하고 있던 순서대로 묻혔다는 “생태학적 대상(帶狀) 분포”의 개념을 클라크는 제시했다. 따라서 바닥 생물이 먼저 묻히고, 그 다음에 물고기들이 묻혔으며, 그 위에 늪지 생물인 양서류가 묻혔고, 마침내 보다 높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포유류들이 마지막으로 묻혔다는 것이다. 비록 이 모델이 화석들의 침전에 대한 모든 의문들에 대해서 답변하지는 못했으나, 많은 창조론자들이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최상의 설명으로 수용했다(참조 클라크1946,1977년). (5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