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안식일과 원래의 창조가 연결되었듯이, 이 두 요소는 신약에서도 연결되어 있다. 주된 본문은 마가복음 2:27이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진술의 첫 번째 부분은 긍정적인 반면, 두 번째 부분은 부정적이다. 첫 번째는 안식일이 무엇인지 말하는 반면, 두 번째는 안식일이 무엇이 아닌지 말한다. 인간은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고, 안식일은 일곱째 날에 만들어졌다. 안식일이 만들어졌을 때, 인간은 이미 존재했다. 그러므로 그날은 그들의 용도와 유익으로 만들어졌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담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인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직함을 갖고 계신다. (517.2)
 창조, 재창조 그리고 안식일의 연결은 요한복음에도 나타난다. 안식일에 있었던 두 기적이 요한복음 5장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치유를 위해 특별한 개인들을 선택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당신 자신과 안식일에 대한 그분의 관계에 관해서 가르치기 원하셨던 어떤 것의 특별한 실례가 그것들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517.3)
 이 두 기적은 다른 방식으로 행해졌다. 첫 번째는 단지 발해진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창조가 수행된 방식이었다. 그 다음의 치유는 주님의 접촉과 진흙 사용에 의해 일어났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창조된 방식이었다. 아담의 몸은 땅의 먼지로 형성되었으며, 하나님은 생명의 호흡을 그 속에 불어넣으셨다. 요한복음 9장에서 몸은 한 부분 즉 눈을 제외하고는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그 결함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은 그 잘못된 부분에 진흙을 바르셨다. (517.4)
 분명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셨으며 창조주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창세기 1장2장에서 창조주이셨다. 그분은 요한복음 5장9장에서 재창조주이셨다. 그 기능은 근본적으로 같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의 부분들뿐 아니라 전체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이 원래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능력의 사용과 적용은 진행 중이라고 분명히가르치셨다. (517.5)
 D. 마지막 때의 기별에 나타난 창조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어떤 다른 책보다 더욱 많이 종말론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책은 요한이 이상을 받았던 때로부터 마지막 때와 그 너머까지 앞을 향하여 가리킨다. 창조의 주제는 그 메시지에서 한몫을담당하고 있으며, 마지막때와몇 가지 특별한 연관성을 지닌다. (517.6)
 간접적인 것이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창조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1:10에 나온다. 그 본문은 요한이 이 이상을 받았던 시간의 틀, 즉 주의 날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날을 주님과 연결하는 독특한 진술을 찾아야 한다. 성경에서 그런 식으로 언급된 한 주간의 유일한 날은 안식일이다. 이것은 구약(사 58:13)과 신약(막 2:28) 모두에 해당한다. 이와같이 요한이 이 이상을 받은 날은 안식일로 확인될 수 있다. 그날은 또한 창조의 기념이었다(안식일 II. B. 3을 보라). (517.7)
 그와 같이 창조에 대한 첫 번째 주된 언급은 요한계시록 4장에 있다 거기에서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이 보좌에 좌정하신 거대한 하늘 보좌 장면을 보게 되었다. 보좌 주위에 24장로가 앉아 있고, 네 생물도 그곳에 위치되어 있다. 이 내러티브의 신학의 상당한 부분을 안식일에 특별히 적절한 찬양의 노랫말에서 찾을 수 있다. (517.8)
 첫 번째 노래는 네 생물이 불렀는데, 그들은 이사야 6:3에서 스랍들이 불렀던 형태를 각색한 삼성창/거룩삼창(트리사기온[trisagion])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찬양했다(계 4:8). 그 후 24장로가 그 노래에 참여하지만, 이제 그 노래의 내용은 새로웠으며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였다(11절). (517.9)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우리는 보다 더 종말론적 지향이 있는창조 진술을만나게 된다. 한힘센 천사가 땅에 내려와서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자기가 갖고 온 메시지의 진실성에 대해 엄숙한 맹세를 한다. 그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6절) 하나님께 맹세한다. 이 예언적인 메시지의 선포에 수반하여 새로워진 강조는 창조주이셨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있다. (517.10)
 바로 그 점이, 마침내 재림으로 인도하고 최후의 추수를 야기하는 마지막 때의 세 기별 중 첫째인 요한계시록 14장의 첫 번째 천사의 메시지에 의해 분명하게 된다(14:6-14). 세 가지 주된 요소가 땅의 모든 부분들과 민족들에게 주어지는 그 메시지에서 확인된다.

   (1)영원한 복음을 전하라는 외침,

   (2) 하늘에서 재림 전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고지하라는 외침 그리고

   (3)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배하라는 외침.(참조 심판 III. B. 1) (517.11)
 요한계시록 14:7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께 주의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그분을 창조주로 예배해야 한다고 단정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예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그분이 창조의 기념으로 구별해 놓으신 날 즉 안식일에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지정하신 창조의 기념, 즉 안식일을 이용하여 그분을 창조주로서 예배하라는 특별한 메시지, 특별한 설교, 특별한 외침을 찾아야 한다.(참조 세 천사 기별 V.A-B; 안식일 III. E.) (517.12)
 E. 궁극적인 재창조: 새 땅
 요한계시록 21장22장은 복음 전파의 장엄한 절정을 묘사한다. 성도들이 최후의 물리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한다. 새 땅에 대한 이 묘사는 실체가 무엇일지에 대한 희미한 반영일 뿐이다. 이 회복의 한면은 백성들 편에서의 믿음의 실패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취되지 않았던 구약의 다양한 예언들과 약속들의 성취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은 다소 구체적인 용어들로 그 연결을 보여 준다. 1절에 의하면, 요한이 “새 하늘과새 땅을보니 처음하늘과 처음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았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묘사된 하늘, 땅그리고 바다의 창조로 되돌아간다. 흥미롭게도 새 땅에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그러한 바다가 더 이상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절은, 새 하늘과새 땅에 대한약속을 처음주었던 이사야 66:22을 본떴다. 여기서 그 약속들은 구약 선지자들이 마음에 그리지 않았던 방식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517.13)
 요한계시록의 끝에 있는 두 이상의 첫째는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상세한조망과 함께 그들이 사는 장소를 강조한다. 이것은 창세기 1장2장의 창조 내러티브의 바로 그 대응이다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은 인간의 거주지로 창조되었다. 그 후 창세기 2장에는 그 거민, 아담과 하와가 그 세상에 놓여졌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본문은 거기에 거하는 자들에 관해 말하며 요한계시록 22장은 그들이 거하는 장소를 언급한다. (517.14)
 성경은 같은 음조 즉 창조로 시작하고 끝난다. 창세기 1장2장은 원래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요한계시록 21장22장은 새로운 재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둘 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다. 둘 다 인간의 건축이 아니라 그분의 작품이다. 창세기 1-2장요한계시록 21-22장 사이에 싸여진 모든 것은 구원 계획의 역사이다(참조 신론 IV. C; 새 땅 III. A-C). (5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