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재림운동의 초창기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언제나 재림운동의 기본 신조들의 하나였다. 1872년 처음으로, 그리고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규정되었던 그리스도의 신성은 1980년의 대총회 기간에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재명시되었다. 즉 “영원전부터, 아들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셨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었으며 인류의 구원이 완성되었고 세상이 심판받았다. 영원히 참하나님이신 그분이 또한 진실로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가 되셨다.”1 (40.1)
 이것은 재림운동의 초기에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844년의 재림운동에 가담한 목사들 중에 38명은 삼위일체를 믿었고, 다른 5명은 반—아리안이즘(Semi—Arian)을 믿었는데, 이들은 제임스 화잇, 조셉 베이츠, 우라이아 스미스, 그 후에 조셉 H. 와그너 등이며 이들 모두가 새로운 신앙의 기둥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천 커넥션(Christian Connecion) 교파에서 나왔는데,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단체였다.2 (40.2)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혹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신 동시에 구원자이심을 믿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아들’‘아버지’라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논란을 벌였으며, 그 아들은 까마득한 과거 어느 시점엔가 시작이 있었다는 반—아리안주의를 지지 했다. (41.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이 되었을 때 이 목사들은 그들의 이런 신조를 한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이 그들의 글 가운데 나타난다. 그 러한 표적들이 별 논란 없이 점진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새로운 진보상의 연합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선구자들은 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기도의 정신으로 토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아냈다. (41.2)
 제임스 화잇(1821~1881)3
 제임스 화잇은 엘렌 G. 화잇과 조셉 베이츠(Joseph Bates)와 더불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공동 설립자였다. 그는 1821년 8월 4일에 메인 주, 팔미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메이플라워 청교도의 후손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의 설교를 들은 후에 제임스 화잇은 밀러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며 1844년의 대실망을 경험하였다. 1844년 10월 22일에 영광 중에 오실 예수의 강림을 고대했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신앙을 버렸으나 제임스 화잇은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이 된 그룹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제임스 화잇은 훌륭한 설교자이 었으며 많은 글을 쓴 저술가였다. 엘렌 하몬(Ellen Harmon)에 의해 크게 격려를 받았고, 1846년 그녀와 결혼하였으며, 다수의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그것은 1850년의 <리뷰 앤드 헤랄드>, 1852년의 <청년 지도자>, 1874년의 <시조> 등이다. 1853년에서 1880년 사이에 그는 네 권의 책과 여러 개의 팸플릿을 출판했다. (41.3)
 <애드벤트 리뷰 앤드 새배쓰 헤랄드>에 수록된 기사에서 제임스 화잇은 (41.4)
 예수의 신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처음에 “구 삼위일체론의 불합리”4라고 자기가 표현한 사상,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과 동조되는 그 사상을 분명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1853년 후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그의 신조를 분명히 했다.5 (42.1)
 23년이 경과된 후,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설을 아주 밀접한 관계로 본다”고 기록하였다.6 1877년에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7라는 표제의 기사를 출간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그는 다시 한 번 “아들(the Son)은 하나님 아버지와 창조사업에 동등 하게 참여하셨고 또한 율법을 세우며 피조된 지성적 존재들의 통치에 동등하시다”8고 하였다. 제임스 화잇의 주장은 다소 온건하였으나 우라이아 스미스(Uriah Smith)의 경우는 달랐다. (42.2)
 우라이아 스미스(1832~1909)9
 우라이아 스미스는 1832년 뉴 햄프셔에서 태어났는데, 윌리암 밀러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설교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1852년 그가 재림 신도가 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1855년 초 그는 리뷰 앤드 헤랄드 부편집인으로 임명되었으며 제임스 화잇의 보조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빠르게 주필이 되어, 사망 할 때까지 거의 계속해서 그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42.3)
 우라이아 스미스는 주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과 논설들은 교회의 교리적 신조들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경 예언에 관한 그의 저서들인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예언상의 미합중국, 예수님을 바라봄 등으로 주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42.4)
 제임스 화잇, 조셉 베이츠와 그 외의 개척자들과 같이 우라이아 스미스는 자신의 반 아리안주의를 포기하였으나 난관이 없지는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계시에 관한 소고>(1867)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반—삼위일 체론의 견해에 대해 설명하였다.10 그는 성령의 존재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또한 영원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적용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11 (42.5)
 그는 말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결코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없다고 했다. (43.1)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대해 주석하면서, 우라이아 스미스는 그리스도를 “창조 사업에 있어, 시작한 창조자가 아니라 처음 창조된 피조물”12로 인식하였다. 그 직후에 그는 반—삼위일체론에서 조금 물러섰다. 1882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출판하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독생자’는 창조된 존재”로 그 의미를 거의 적용하였다.13 (43.2)
 1898년에 그의 마지막 저서인 “예수를 바라봄”에서 우라이아 스미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피조물’이란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시점엔가 예수는 나타나신 바 된 분이며, 따라서 시작이 있는 분으로 나타내었다. “하나님만이 시작이 없는 분이시다. 시작이 있을 수 있는 최초의 지점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에겐 영원한 때로, 그때에 말씀이 나타났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피조되지 않은 말씀은 실존적 존재이었고, 때가 차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분의 시작은 우주 안에서 어느 다른 존재와도 같지 않았다.”14 (43.3)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의 위치에 대하여 말할 때에, 스미스는 ‘아버지와 동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실질적 인물로 현장에 출현하게 된 이후에 창조 사업이 성취되었다”15고 했다.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기묘한 설명이 나타난다. “아들과 더불어, 신성은 비롯되고 마무리되었다. ”16 (43.4)
 다시 말하면, 스미스는 그리스도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17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관점은 죠셉 H. 와그너(Joseph H. Waggoner)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43.5)
 죠셉 H. 와그너(1820~1889)18
 죠셉 와그너는 반아리안주의(Semi-Arian)의 열성적 옹호자였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그러했다. 그도 역위일체설에 반대했고 성령은 단순히 한 비인격적인 감화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19 (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