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준비. 재림에 대한 예언들과 예수님과 신약 기자들의 윤리적 관심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 기자들도 가까움과 지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나 연대기를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와 준비를 촉구하고 있다. “가깝”다는 것은 우리의 지평선 넘어에 있는 미래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지금 준비하는 생애를 살아야 할 현재의 피할 수 없는 결정적 도전임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눅 12:45)고 말하면서 주인이 더디 올 것에 맞추어 살기로 선택한 종은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 불신실하고 무책임하며 부도덕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주인이 돌아올 것을 계속적으로 고대하면서 살아온 종은 자신의 책임을 신실히 이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93.4)
이런 관찰은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이 재림 소망의 근본적인 요소임을 지적해 준다. 이 긴장은 날짜를 정하는 것을 방지하고 주님께서 장래에 오신다는 확실성을 지금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준비하도록 신자들을 고무시킨다. (93.5)
5. 재림 소망의 예언적 전망
재림 소망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감을 이해하는 네번째 중요 개념은 “예언적 전망”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제시된다. 이 전망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관계에서 현재와 미래, 곧 가까움과 먼 것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93.6)
미래를 바라봄. 예를 들어 이미 본 것처럼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의 임박한 멸망의 배경에서 여호와의 날이 멀다고 묘사한다(9~11절).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현재적인 간섭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의 기대로서 보여졌기 때문에 가까웠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개별적인 심판과 구원을 여호와의 날의 궁극적 완성에 대한 부분적 실현으로 보았다. (93.7)
똑같은 예언적 전망이 신약의 가르침에서도 제시되고 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14~33절)은 인자가 오신다는(24~27절) 직접적인 문맥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 첫 사건은 재림 때에 있게 될 마지막 심판의 기대로서 보여진다. 이미 본 것처럼 마가복음 9장 1~3절, 즉시 뒤이은(“엿새 후”—2절)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화는 장차 올 왕국의 예비적인 표현으로 보여진다. (94.1)
무엇 혹은 언제? 질적으로보다는 양적으로 시간을 측정하도록 훈련된 우리가 이해하기란 어렵다.13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활동이 일어날 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시계나 시간, 날, 달, 해가 표시되어 있는 달력으로 시간을 측정한다. 그러나 성서적 사고(思考)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질문은 종종 “언제?”(when)가 아니고 “무엇?”(what)이다. (94.2)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when)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when)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막 13:4)라고 질문했다. 그의 대답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때”(when)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징조를 주시지 않으신다. 사실 그분께서는 강조하여 확증하시기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특징지을 사건(what)이며 때(when)는 아니다. 그 특징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세계적인 질서 안에 있는 난리들이다. 이러한 난리 중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막 13:10; 마 24:14). 인간의 역사는 악하게 버려지지 않고 인자가 모든 난리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오실 그 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막 13:26, 27). (94.3)
복음의 승리는 현재의 난리와 마찬가지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르”(막 13:29)렀다는 징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승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승리의 나라로 인도할 최종적인 싸움이 이미 현재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94.4)
두 극단. 현재의 투쟁과 승리를 그리스도께서 미래의 왕국을 완성시키기 위해 현재 구속의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징조를 보는 신자는 균형을 이룬 역동적인 긴장 속에서 현재와 미래, 곧 재림의 임박성과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예언적 전망을 공유한다. (94.5)
이러한 예언적인 전망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상반된 두 오류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 하나님의 왕국이 실제로 이루어졌으므로 주님께서 미래에 실제로 오신다는 소망을 포기하도록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재림의 날과 관련된 때와 사건에 대하여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도록 한다. (94.6)
이러한 두 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 활동하고 계신다는 명백성을 통해서 미래를 내다봄으로 연대기적인 시간의 길이를 단축시킬 수 있게 하는 예언의 전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재림이 여전히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가까운 것은 동일하신 주님께서 재림시 당신의 나라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과거나 지금이나 구속의 활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94.7)
결 론
긴장의 상존. 신약은 재림의 때를 겉으로는 모순되는 듯한 말을 하고 있는데, 곧 임박성과 어쩌면 거리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긴장이 주님께서 자신의 세대에 다시 오시지 아니하시므로 믿음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적인 재림의 소망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95.1)
긴장의 역할.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의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은
1) 신자들이 미래의 실체를 지금 경험하는 데 도움을 주고,
2)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사이에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며,
3) 시기를 계산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준비하게 하고,
4)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재림의 분명한 징조를 통해서 신자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적 전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95.2)
이 시점에서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재림의 징조는 무슨 특별한 역할을 하는가? 그런 징조들은 우리가 고찰해 보았던 임박성과 거리감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재림의 징조는 단지 실존적인 확실성에 의하여 “가깝다”는 것을 지적하는지 아니면 시간적 가까움에 의하여 인가 ? 이러한 중요한 질문들은 다음 네 장에서 연구해 볼 것이다. (95.3)
각주
1. 밑줄친 부분 강조.
2. 밑줄친 부분 강조.
3. 밑줄친 부분 강조.
4. 밑줄친 부분 강조.
5. 밑줄친 부분 강조.
6. 밑줄친 부분 강조.
7. 밑줄친 부분 강조.
8. 이 견해의 한 통찰력 있는 논의가 버쿠우버(G. C. Berkouwer)의 The Return of Christ(Grand Rapids, 1972), pp. 65~95에 있다.
9. 밑줄친 부분 강조.
10. 밑줄친 부분 강조.
11. Paul S. Minear, Christian Hope and the Second Coming(Philadelphia, 1954), p. 100.
12. 크랜필드(C. E. B. Cranfield)는 종말의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사역에서의 통일성 사이의 관계성을 인정한다(“St. Mark B,”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I(1953), p.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