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6 장 재림소망의 임박성과 거리감
 시간의 두번째 개념은 실존적 시간(existential time) 또는 연인의 시간(lover’ time)이다. 이것은 사랑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시간이며 이 시간은 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에 의해서 측정된다. 사랑과 소망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실제로 있지만 그것은 “날아간다”. 단지 지나가는 경험적이고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러한 시간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나누는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이 실제로 빨리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야곱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창 29:20)고 했다.9 (90.3)
 사랑의 관계에서 경험된 실존적인 시간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까움과 소원함 사이에 있는 성서적인 긴장을 해결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이와 같은 긴장은 고대하던 사람이 돌아오는 때 사라진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라고 기록하고 있다. 재림은 “이제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한 그 사람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때이다(고전 13:12 참조). (90.4)
 믿음으로 시간을 측정함. 그리스도인들이 열렬히 고대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고, 그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오랜 기간의 기다림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한편,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생애할 수 있게 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비록 헤어져 있는 것이 시간적으로는 길지라도 곧 서로를 보게 될 소망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90.5)
 내가 세미나리에서 공부하기 위해 이태리에 약혼녀를 남겨 두고 미국에 올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갈 것이오. 머지않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달력으로 시간을 측정하지 않고 사랑과 믿음으로 측정했다. 우리의 생애가 가까운 장래에 있을 재회(再會)의 확실성으로 밝게 빛났을 때 우리는 기다려야 할 긴 날들을 의식하지 않고 임박한 재회를 의식하면서 살기로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곧”(soon)이란 근본적으로 확실한 재회를 의미했다. (91.1)
 사랑의 교제로 경험된 시간의 개념은 재림 소망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성서적 긴장을 이해하도록 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있을 때 그의 임박한 재림을 기쁨으로 고대하는 생애가 자연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그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결혼할 희망이 없이 약혼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91.2)
 잠시 후에. 사랑의 관계에서 경험된 실존적인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복음 16장 16절에 기록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요 14:18, 19 참조). 그의 재림 전에 경과될 시간을 “조금 있으면”(미크론—mikron)이라는 말로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림 날을 계산할 어떤 종류의 시간 측정법을 제자들에게 주시지 않고, 오히려 미래에 재회할 것에 대한 확실성을 그들에게 보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시계에 의한 시간이 아닌, 연인의 시간에 대해 말씀하셨다. (91.3)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기다림의 시간은 단지 몇 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에 그분의 실제적인 사랑과 재림의 확실성 속에서 몰두하여 살 수 있기 때문에 “잠시”인 것이다. 잠시동안 기다리는 시간은 사람이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 때는 영원한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고대하던 사람에 대한 확실한 사랑 가운데 몰두하여 평온하게 살 때는 여러 해가 마치 수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91.4)
 3. 재림 소망의 통일성
 재림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을 해결하는 데 우리를 도와주는 두번째 개념은 신약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통일성이다. 이 통일성은 의미 심장한 많은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91.5)
 말씀의 이중적 의미. 이미 연구한 한 가지 방법이 파루시아(오심), 계시, 나타남 등의 세 용어에 담겨져 있는 이중 의미로서, 이 용어들은 그리스도의 과거에 오심과 미래에 오심 모두를 의미하기 위해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는 신약 신자에게 있어서 장래의 재림이 비록 멀긴하지만. 마지막 때에 시작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초림과 개념적으로 또 실 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박한 것으로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91.6)
 세상 끝. 재림 소망의 통일성은 “말일” 또는 “세상 끝”과 같은 관용구(숙어)에 의해서도 표현된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끝”(히 9:26)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 일반적으로 성육신을 생각하지 않고 재림을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에는 “세상 끝” 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히 9:26) 초림하셨을 때 그분께서 시작하신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는 “말세”(행 2:17) 또는 “마지막 때”(벧전 1:20)로 언급되고 있다(참조: 행 2:17은 the last day로, 벧전 1:20은 the end of times로 기록됨).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장래 그들이 상속할 재림의 첫 불입금(down payment)을 지불하시므로 이 마지막 시대(final age)를 시작하셨다. (91.7)
 재림은 이미 신자들의 말세(the End-time)의 축복과 특권을 미리 맛보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다.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히 6:5) 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임박한 구원의 완성을 고대하면서 생애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시간적 거리감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축복을 먼저 경험함으로 단축된다. (91.8)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왕국의 가까움과 소원함 사이에 있는 긴장을 신약이 어떻게 융화시키는가에 대한 또 다른 예를 제시한다.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는 탄원으로 또 시작해서 “나라가 ∙∙∙ 아버지께 ∙∙∙ 있사옵니다(마 6:10, 13)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강림으로 시작된 그 나라는 미래이면서 현재이며 그리고 멀고도 가까운 것이다. 폴 미니어(Paul S. Minear)가 말한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 매일의 양식의 은사, 죄의 용서 및 악으로부터의 구원과 같은 특정한 관심에 의해 측정된다.”11 (92.1)
 주의 만찬. 재림 소망의 통일성은 주의 만찬의 성경적인 의미를 통해서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고전 11:26) 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재림 사이의 거리는 두 사건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단축된다. (92.2)
 주의 만찬에 참석할 때 믿는 사람은 과거이면서 미래인 현재의 구원, 즉 수난과 재림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재림이 연대기적인 시간에 의하여는 먼 것 같지만, 그 실제성에 있어서는 이미 현재의 확실성과 경험이기 때문에 구속의 시간이란 점에서 볼 때는 가까운 것이다. 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승천 그리고 하늘 봉사와 재림의 사건 속에는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 이러한 통일성이 신약 저자들로 하여금 재림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분명한 긴장을 조화시킬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바로 고대하던 구세주께서 이미 나타나셨고 현재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며, 또 궁극적으로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9:24~28)12 (92.3)
 4. 도덕적으로 재림의 소망이 절실함
 세째로 중요한 융화의 실마리는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의 윤리적 목적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시간적으로 가까운지, 아니면 먼지를 특정한 징조들을 통해서 계산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준비는 시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날짜를 안다면 오늘 준비해야 할 어떤 일들을 내일로 미루게 될 것이다. (92.4)
 계산이 아닌 준비.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은 중요한 윤리적 기능을 실현한다. 그것은 날짜를 정하는 일을 좌절시키고 끊임없이 깨어 준비하기를 촉구한다. 유명한 감람산 설교에서 우리는 다른 두 강조점, 곧 가까움소원함을 발견하게 된다. 가깝다는 것은 주어진 징조의 중요성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바,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줄 알라”(막 13:29)이다. 아직도 멀다는 것은 징조가 성취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그것들이 발생하지만 “끝은 아직 아니”(막 13:7)라는 말씀에 의해 명확하게 지적되고 있다. (93.1)
 이러한 긴장의 목적은 분명히 윤리적인 것으로서 날짜를 추측하고 계산하는 일을 좌절시키고 주님의 오심을 맞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93.2)
 많은 감람산 설교는 권고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주의하라”(막 13:5, 9, 23, 33), “두려워 말라”(7절), “염려하지 말라”(11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35절). 이러한 권고들은 언급하고 있는 시간의 목적이 곧 추측하지 말고 인내하며 준비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재림의 징조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은 또 다른 암시를 주는 것이다. 지진, 기근, 정치적 갈등 그리고 복음의 세계적 전파 등은 역사상 그리스도께서 오실 특별한 시간의 날짜를 정하는 데 거의 사용될 수 없는 일련의 징 조들이다. 그러한 징조들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상태를 규명한다. 재림의 목적은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날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임박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풍성하게 하고 끊임없이 깨어 준비하도록 용기를 준다. (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