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6 장 재림소망의 임박성과 거리감
 비유들. 그리스도의 많은 비유들이 자신의 죽음과 재림 사이에 있을 긴 기다림의 시간을 지적하고 있다. 마태는 감람산의 설교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상당히 긴 시간이 경과될 것을 암시하는 충성된 종과 충성되지 못한 종, 열 처녀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불신실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마 24:48)며 부도덕과 방종의 생애를 시작했다.5 주인이 그 종을 책망한 것은 지연의 사실을 종이 알았다는 데 있을 것이 아니라 지연되는 동안에 그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88.2)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마 25:5)의 초점은 신랑이 더디 오는 동안에 있은 신부들의 행위에 있다. 같은 요점이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마 25:19).6 (88.3)
 누가에 의하면 유사한 므나의 비유도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눅 19:11)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 비유는 어떤 귀인이 먼 나라로 갔다가 종들과 회계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다. 귀인의 먼 목적지는 그가 돌아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암시하고 있다. (88.4)
 유사한 점이 신실하고 현명한 청지기의 비유 속에도 있다(눅 12:41~48). 불신실한 종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45절)는 말은 신실한 청지기와 불신실한 청지기를 구분지어 줄 지연(더디 옴)이 있을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88.5)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가라지, 겨자씨 그리고 누룩 같은 다른 비유들도 마지막 때 전에 긴 시간이 경과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가라지, 곧 불신자들은 신자들과 마지막 때까지 나란히 공존하며, 겨자씨,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작은 무리들은 감명을 주는 무리가 되어야 하며, 누룩 즉 처음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나타내져야 한다. (88.6)
 이러한 비유들 가운데 제시된 성장, 발달, 그리고 징후(manifestation)의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강림 전에 긴 시간이 흐를 것임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선언하셨지만, 동시에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어야 할 것도 인정하셨다. (88.7)
 바울.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똑같은 긴장이 바울의 서신 가운데도 나타난다. 일찍이 우리는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사도가 마지막 때의 가까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나 전장(9~1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을 모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인도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롬 11:25, 26). 분명히 이 과정이 완성되기 위하여는 마지막 때 전에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어야 할 것을 가정하고 있다. (88.8)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근신”(살전 5:6)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나, 역시 같은 신자들에게 먼저 어떤 사실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할”(살후 2:3) 것이기 때문에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살후 2:2) 말 것을 권하고 있다. (89.1)
 계시록. 이미 본 대로 계시록은 주님의 속히 오심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계 1:1, 22:20, 3:11 참조). 그러나 그 책 전반에 재림 전에 있을 긴 기다림의 의미가 표현되어 있다. 순교자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라고 부르짖는다.7 그들이 들은 대답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 6:11)이다. (89.2)
 이 과정은 기다리는 시간이 꽤나 길 것을 가상한다. 똑같은 사상이 두 증인과 여자의 이상 가운데도 나타나는 바 1260일 동안 전자는 예언을 하게 되며 후자는 양육받게 될 것이 약속되었다.(계 11:3, 12:6). (89.3)
 요약하자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외관상으로는 임박성과 상당한 거리감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적인 긴장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89.4)
 제 3 부 가능한 해결책들
 재림 소망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이러한 긴장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는가? 문제는 해석학적인 것, 즉 명백히 모순이 되는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실존적인 것 즉 오랫동안 기다리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강림의 임박성을 어떻게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89.5)
 1. 신앙의 위기
 어떤 학자들은 임박성과 거리감으로 인한 재강림의 긴장을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신앙의 위기에서 초래된 결과로 설명한다. 이 위기는 그리스도께서 당대의 세대 안에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에 의해 자극되었다. 그들의 실망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알지 못하는 다소 먼 장래에 두었을 것이다.8 (89.6)
 쓰라린 실망이 없음. 의심할 여지 없이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초창기의 기대에 관한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재림의 소망에 대한 성취를 먼 장래에 두도록 강요한 쓰라린 실망을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다고 암시하는 지적들은 없다. (89.7)
 신약의 기독교 역사 속에는 “대실망” 으로 불려지는 밀러 운동과 같은 것은 거의 없다. 1844년에 고대했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을 때 수많은 밀러주의자들은 자신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포기했다. 그러나 사도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므로 초기 기독교회 안에 집단적 배교가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89.8)
 신앙의 위기가 없음. 만약 그런 소망이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이미 마련된 구원을 경험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재림의 날짜를 알고자 하는 추측 위에 있다면 재림 소망의 위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신약 교회는 장래에 있을 복스런 “추수”“첫 열매”(롬 8:23)를 이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긴 기다림의 시간에 순응하고 있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 봉사를 통해 이미 준비된 구원의 축복을 현재 경험하는 한, 재림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지연”도 신앙의 위기로 몰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약 교회는 파루시아로 인한 신앙의 위기가 있었다는 흔적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재림의 소망은 어떤 분명한 지연을 의식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웅변적으로 말한 것처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빌 1:6) 하기 때문이다. (90.1)
 2. 재림 소망의 실존적인 시간
 경험적 시간 대(對) 실존적인 시간. 시간의 두 개념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개념은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경험적 시간(empirical time)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 개념이다. 시카고에서 로스 엔젤레스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은 도착하기 전에 아직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매 시간 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러한 경험적인 시간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어서 정확히 맞추거나 측정할 수 있다. (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