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7장 교부시대의 반유대주의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바르나바스는 이러한 주장들과 함께 “우화적 해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현재 시대의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효성을 제거해버렸다.24) 그것은 안식일과 같은 중요한 유대의 제도의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복잡한 우화적이고 종말론적인 주장들을 가지고 안식일을 무의미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안식일이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절대적으로 인식하게 해준다. “제8일”은 15장에서 추가되고 있는데, 그러면서 그것을 “준수해야” 하는 정당성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이유를 제공해 준다. (292.1)
 (1) 제8일은 종말론적 안식일의 연장이다. 즉, 안식일에 의해서 상징화된 현재의 시대가 끝난 후에 제8일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8절)을 의미한다. “이것이 제8일을 더욱(διό και) 기쁨 중에 보내야(άγομεν)하는 이유이다”(9절).

 (2) 제8일은 “또한(έν ή και)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날”이다(9절). (292.2)
 일요일 준수를 위한 첫 번째 신학적 동기는 종말론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상 제8일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저자의 모순된 사고가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는 그러한 사상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는 한 편에서는 안식일이 천년기적 종말론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적 안식일을 거절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이전에 안식일을 폐기하기 위해 제시했던 그 동일한 종말론적 이유들을 가지고 제8일을 준수를 정당화하고 있다. (292.3)
 바르나바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요일 준수의 두 번째 혹은 부가적인 신학적 동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일요일이 준수되는 이유는 그 날에 예수께서 “또한(έν ή και)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이다(9절). 부활이 왜 일요일 준수의 주요 이유가 아닌 부가적인 이유로 언급되었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부활이라는 신학적 동기가 아직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바르나바스는 그의 날카로운 반유대주의를 견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8일의 “준수”를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서보다는 종말론적 안식일의 연속으로서 정당화하고 있다. 이것은 일요일 준수가 다소 소심하고 불확실하게 시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일요일 신학과 그 용어는 여전히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모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으며, 일요일에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였다는 언급도 전혀 없다. 제8일은 단순히 부활에 대한 기억과 접합된 종말론적 안식일의 연장일 뿐이다. (292.4)
 뒷부분의 연구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지만, 일요일이 처음 “제8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 그리스도교 소망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와 회당 사이에 논쟁이 점증되던 시기에 기독교가 유대교(안식일은 유대교의 한 상징이었음)의 완성이요 대체라는 사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히에로니무스(Jerome, A.D. 342-420년경)는 제칠일과 제8일의 상징적 의미를 명백하게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의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숫자 7이 성취된 후 우리는 제8을 통하여 복음에 이르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25) (293.1)
 안식일을 무효화시키고 제8일을 제칠일의 연속과 대체로서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바르나바스가 제시한 논쟁적인 주장들은 반유대적 감정들이 일요일을 새로운 예배일로 채택하도록 만든 강력한 원인이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하지만 그의 역설적인 변론 및 제7과 제8의 종말적 기간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 점, 그리고 불확실한 일요일 신학 등과 같은 불완전한 요인들은 안식일과 일요일준수에 대한 분리가 아직 발생 하지 않았음을 지적해 줄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명백한 분리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적어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26) (293.2)
 유스티노스 마르튀르
 헬라 문화와 혈통을 가진 철학자요 기독교 순교자인27) 유스티노스 마르튀르는 안식일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다루고, 일요일 예배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 자료를 제일 먼저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도 레간이 관찰한 것처럼 잘 교육받은 전문적인 철학가인 이 저자가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면서 “통찰력 있고 균형잡힌 접근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해 볼 때 그의 증거자료는 매우 중요하다.28) 더욱이 그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재위하던 시절에 로마에서 살면서 가르쳤고, “변증서”(Apologies)와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등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안식일과 일요일의 문제가 로마제국의 수도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감지할 수 있게 해 준다.29)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그의 평가는 우리의 조사 연구에 실제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294.1)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유스티노스의 태도는 그가 모세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제한적으로 보여 준다. 아마도 후자가 전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바르나바스는 우화적인 해석방법을 통해 안식일과 할례와 같은 유대인들의 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현세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가치들을 없애버리고, 그것들을 오로지 영적이고 종말적인 가치로마로 여기고자 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방인 출신인 유스티노스는 이와는 반대로 모세 법령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무시하였고, 제임스 파케스(James Parkes)의 진술대로 그 율법을 “성경의 하찮은 부분이요, 다른 모든 점에서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책에 유대인들의 특별한 사악함으로 인해 추가된 일시적인 부가물”로 여겼다.30) 예를 들어 유스티노스는 트리포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94.2)
우리도 역시 그대들의 육체의 할례와 그대들의 안식일, 즉 한마디로 말해서 그대들의 모든 제의들을 준수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만일에 그것들이 너희에게 부과된 이유를 우리가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너희 마음속의 죄와 완악함으로 인해 강요된 것들이었다.31)
(295.1)
 바울은 의문의 율법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인 가치를 인지하고 있지만, 유스티노스는 그것을 “부정적인 방법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 한 형벌”로 간주하고 있다.32) 그는 이러한 논제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스티노스는 모세 이전의 거룩한 사람들은33) 안식일 이는 할례는 그 어떤 것도 준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죄를 지은 사람들 때문에 이러한 규례들과 그와 유사한 규례들을 행하도록 명령하셨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34) 그래서 유스티노스에 따르면 안식일은 모세로부터 유래한 일시적인 법령이며, 당시에 유대인들이 불충성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그들에게 명령되었다는 것이다.35) (295.2)
 유스티노스가 이러한 논제를 채용한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296.1)
만일 우리가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부조리한 사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즉 우리의 하나님이 에녹 및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넌센스에 빠지게 될 것인데, 그들은 육체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고 안식일이나 다른 규례들을 준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다만 모세가 나중에 강요한 것들이었다. 혹은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면서 각 세대들이 언제나 동일한 의의 표준을 따르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가정 모두는 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죄를 지은 사람들 때문에 이러한 규례들과 그와 유사한 규례들을 행하도록 부가적으로 명령하셨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36)
(296.2)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논제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오직 유대인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들만 고통을 당하도록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고 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하려는 식별의 표로서”37) 할례와 안식일을 명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말하더라도 하나님을 차별적인 행위의 범죄를 지으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논제는 하나님께서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범죄를 부과하려는 부정적인 목적으로 이 법령들을 주셨다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유스티노스는 이런 사고의 틀 속에서 안식일을 거부해야한다고 논증하고 있다. 그의 기본적인 논쟁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296.3)
 (1) “모세 이전에는 안식일과 기타 제의들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나신 후인 지금에도 그것들은 필요 없는 것 들이다.”38) 유스티노스는 이런 입장에 따라서 안식일을 일시적인 법령으로 여기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불충성으로 인해 모세로부터 유래되어 그들에게 명령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도록 고안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297.1)
 (2) “안식일의 원리는 나태함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은 것이며, ”39)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날에 우주의 운행을 조정하시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시고 다른 날에 하신 것처럼 그 때에도 그것을 계속해서 조정하시고 계”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안식일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40) 더욱이 구약성서에서 안식일 계명이 어겨진 사례들, 즉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도 희생제사를 진행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제사장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계명이 침해되었다는 사실이 안식일을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는 것이다.41) (297.2)
 (3) 새로운 섭리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구적인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은 하루 동안 게으르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297.3)
그대들이 일주일의 한 날에 일을 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데, 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명령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새로운 법(일요일)은 그대가 영구적인 안식일을 준수하기를 요구한다. 그대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을 때 그 대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고 또한 주장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만일에 그대들 중에 위증자나 도적이 있다면 그들로 회개하게 하라; 이렇게 하여 그 사람은 참된 평안의 안식일을 지킬 것이다.42)
(297.4)
 (4) 안식일과 할례는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불순종의 표이기 때문에 준수되어질 필요가 없다. (298.1)
아브라함으로부터 전해진 육체의 할례에 대한 관습은 그대들을 다른 민족들과 분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분리하기 위해서 구별된 표로 그대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그대들 오직 그대들만 오늘날 당연히 그대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고통들을 당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직 그대들의 땅만이 황폐하게 되며, 그대들의 도시가 화염 속에 파괴되며, 그대들의 땅의 소산물들은 그대들의 눈 앞에서 이방인들의 음식이 되며, 그대들 중 아무도 그대들의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대들의 육체의 할례는 오직 그대들이 다른 사람과 확실하게 구별되어질 수 있다는 표가 된다. ∙∙∙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대들과 그대들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법칙들 중에서 안식일 준수를 한 표식으로 너희에게 부과하신 것이었다.43)
(2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