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7장 교부시대의 반유대주의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우리에게 2 세기의 전반기 동안의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주 정보원이 되는 작품들은 이그나티우스, 바르나바스, 유스티노스 등의 기록들이다. 이 교부들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포기하고 일요일을 새로운 예배일로 채택하도록 이끈 유대인들과의 분리 과정을 목격했고, 그 과정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 나온 그들의 증거자료들은 일요일 준수가 시작된 원인을 조사하는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283.1)
 이그나티우스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A.D. 98-117) 시기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다.1) 이그나티우스는 “지리적으로 팔레스틴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 회당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그의 교구에서 교인들이 유대화되어가는 경향들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였다.2) 그의 표현에 나타난 어법들은 유대교로부터의 분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었음을 시사해 준다.3) 사실 그는 안식일과 같은 유대인들의 제도들이 여전히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제도들이 존경받고 있었음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내는 서한(Epistle to the Magnesians)에서 “만일에 우리가 여전히 유대교를 준수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 삶의 살았기 때문이다(8:1, 2)”라고 기록하였다.4) (283.2)
 그 다음 장에서, 그는 “고대의 방식대로 살면서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삶(혹은 주의 날, μεκέτι σαββαίζοντες αλλά κατά κυριακήν ζωήν ζωντες)에 따라 살아가면서 새로운 소망을 이룬 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다시 언급한다.5) 10:3에서 또 다시 유대인들의 관습을 포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유대인처럼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필라델피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도 유사한 권고를 했다. “만일에 누군가가 그대에게 유대교 사상을 설명하면 듣지 마라. 할례 받은 자로부터 기독교사상에 대해서 듣는 것이 할례 받지 않은 자로부터 유대교사상을 듣는 것보다 더 낫다(6:1).” (284.1)
 유대교를 신봉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이 빈번한 권고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유대교의 관례들을 따르는 강력한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식일 준수로부터의 급격한 단절이 이미 발생하였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또 한편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방법에 따라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같은 유대인들의 관례들을 비난하고, “주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장려하는 이런 분위기는 불원간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살고, 심지어는 그들의 예배일이 아닌 새로운 예배일을 채택하도록 하는 상당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일요일 준수의 도입은 이미 앞서 언급했던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요청되었던 유대교로부터의 차별화 과정 중에서 하나의 요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84.2)
 이그나티우스의 시대(A.D. 115년경)에 아시아 지역에서 소수 혹은 다수에 의해 일요일이 이미 준수되었었는가? 마그네시안 9:1의 의심스러운 구절을 가지고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삶(혹은 주의 날)에 따라서 산”다는 이 핵심 구절은 최근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중요한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6) 그 구절이 일요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날”(ημέρα)이라는 실명사 가 “삶”이라는 명사 대신에 삽입되어져야 한다. 혹은 같은 어족의 대격 용례로서 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야야만 한다. 그러나 프릿츠 가이(Fritz Guy)가 지적하듯이, “그 일곱 글자 중에서 그러한 같은 어족의 대격 형태의 구성은 나타나지 않는다.”7) 이것은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헬라어 사본(Codex Mediceus Laurentinus)에는 “날”(ημέρα)이 아니라 “삶”(ζωής)이라는 명사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의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다. (285.1)
 더 중요한 것이 여전히 그 문맥 속에 들어 있다. 케넷 스트랜드는 그 사실을 간결하고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285.2)
“주의 날”이 마그네시아나 안디옥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와 상관없이, 이그나티우스가 같은 어족의 대격을 쓰고자 했는지와 상관없이, 그 문맥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구약성서 시대의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 분명히 이그나티우스는 구약성서 시대의 예언자들이 주일 중 첫째 날이 아니라 일곱째 날을 준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날들 그 자체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즉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는 삶의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상징화된 새로워진 삶 사이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8)
(286.1)
 따라서 예언자들의 행위라는 문맥 속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이그나티우스가 비난한 것은 한 날로서 안식일을 거절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레위스(R. B. Lewis)가 주장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방법, 즉 유대인들의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거절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9) 이것이 수정된 어구가 기록된 긴 교정본에서 이 구절에 주어진 사실상의 의미이다. (286.2)
그러므로 더 이상 유대인들의 방식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무위의 날로 기뻐하라10) ∙∙∙ .. 하지만 그대들 중 모두는 영적인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켜라. 육체의 편안함으로 기뻐하지 말고 율법을 명상함으로 기뻐하라.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라. 전 날에 준비해 놓은 것들을 먹지 말고, 미지근한 음료도 사용하지 말며, 지정된 공간 안에서 걷지도 말고, 그 속에 아무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은 춤과 박수로 즐거움을 찾으려하지 말라.11)
(286.3)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를 따르는”(마그네시안 8:1)것이나 “유대인처럼 사는 것”(10:3)을 중지하도록 강력하게 권하고, 안식일에 유대화되지 않은 선지자들의 모본을 따르도록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들을 따르고 있었으며,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서 저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만일이 그러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격적으로 안식일을 포기하고 대신에 일요일만을 예배의 날로 준수하고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286.4)
 또 다른 한 편에서 이그나티우스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유대인들의 관례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시키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는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던 반유대화에 대한 태도와 노력들이 어떻게 일요일 준수의 도입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에 따르면, 동방지역에서는 일요일 예배가 안식일을 대체하는 현상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하이만(A. P. Hayman)이 지적 하듯이, 그곳에서 유대교의 관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 여전히 매 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2) 회당에 다니던 유대인들이 개종하여 계속 교회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안식일과 같은 유대교의 의식들이 계속적으로 존경을 받았다.13) 실제로 동방의 교부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에 대항해 계속해서 싸워야했다.14) 하지만 서방, 특히 로마교회에서는 유대교와의 단절이 훨씬 빨리, 급진적으로 발생했으며, 그런 급진적인 단절로 인해 안식일과 유월절과 같은 유대교의 절기들이 다른 날로 대체되는 등 급진적인 변화의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7.1)
 바르나바스
 대다수의 학자들이 A.D. 130년에서 138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는 바르나바스의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은15) 익명의 사람이 바르나바스라는 이름을 사용해 아마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국제 문화의 센터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했던 것 같다.16) 두 가지 주요한 이유 때문에 이 서신은 지금 우리의 조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다. 첫째로, 그것은 “제8일”로 특징지워진 일요일 준수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제일 처음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 당시에 존재했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회적 신학적 논쟁과 긴장 관계가 어떻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평가절하하고 일요일을 채택하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중심 역할을 했는 지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288.1)
 바르나바스의 서신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 저자가 하나님의 편에서 유대교를 진정한 종교로서 받아들이기를 완전히 거절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그나티우스는 몇몇 그리스도 인들이 “유대화 되는 것”을 비난하지만 바르나바스는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제도인 “유대교, 자체를 거절한다. 유대교에 대한 그 저자의 공격들은 하르낙이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의 종교적 신념과 관습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유대화 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17) 사실상 바르나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유대인들과 타협적인 자세를 취한 그리스도인들을 단호하게 비난하였다. “언약이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유대인들)에게도 있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를 쌓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너희 스스로 조심하라. 언약은 우리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로부터 그것을 받은 직후 완전히 잃어버렸다(4:6-7).”18) (288.2)
 유대의 신념과 관례들을 포기하도록 유대화 된 그리스도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바르나바스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중의 공격을 가했다. 그는 그들을 한 민족으로서 비방하였으며, 그들의 신념과 관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우화적으로 해석하여 그것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무 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악한 천사에게 미혹 당했고(9:5) 그들의 조상들이 음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5:14) “비참한 사람들”(16:1)로 묘사된다. 그들은 “그의 선지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5:12),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찌르고 그에게 침을 뱉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7:9). 근본적인 유대교의 신조(희생제도, 언약사상, 약속의 땅, 할례, 레위법들, 안식일, 성전 등과 같은)에 관해서, 그 저자가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것은 그러한 신조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경험 안에서 완성됨으로써 나타나는 더 깊은 우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9) 하지만 라이트후트(J. B. Lightfoot)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 저자는 비록 “유대교에 대한 완고한 적대자이지만 ∙∙∙ 이 적대감 이외에 2세기에 발생한 반유대적 이단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0) 사실 “그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많은 주요 신조들에 있어서 매우 정통적이”라고 쉐이(W. H. Shea)는 바르게 간파하고 있다.21) (289.1)
 그래서 바르나바스 서신의 일부에서 나타나는 유대교에 대한 거절 및 유대교와의 분리는 이단적 운동에서 나타난 상황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공동체가 느꼈던 특별한 필요성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저자의 우화적인 방법과 극단적인 태도는 레브레톤(J. Lebreton)이 적절하게 평가했듯이 “사실 그 교회의 깊은 사상에 대한 증거라기 보다는 적어도 유대교가 그 교회에 야기한 위험과 그 위험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22) (289.2)
 안식일을 평가절하하고 “제8일”을 도입한 것은 바르나바스 서신의 저자가 유대교의 중심점을 파괴하기 위해 행한 이러한 시도의 일부이다. 그가 기록한 다음과 같은 논거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289.3)
1. 게다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신 안식일에 대한 내용은 10개의 단어로 기록되어진다,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으로 주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2.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만일에 내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면 나는 그들에게 나의 자비를 베풀 것이다.”
3. 그분께서는 창조의 시작에 안식일을 언급하신다. “6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손수 작업을 하셨고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 그분께서는 그 날에 쉬셨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다.”
4. 백성들아 “그분께서 육일동안에 마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찰해 보아라. 그분께는 하루가 천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6천 년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이끄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라 주님의 하루는 천년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분께서는 스스로 내게 증거 하신다. 그러므로 백성들아, 육일 동안 즉 육천 년 동안 모든 것은 다 마쳐질 것이다.
5. “그리고 제 칠일에 쉬셨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그의 아들이 오셔서 율법 없는 자의 세대를 멸하실 때, 그리고 사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이 변화되는 때, 그분께서는 제 칠일에 완전히 안식하실 것이다.”
6. 또 그는 말씀하신다. “정결한 손과 순결한 마음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따라서 만일 지금 누구나 다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선언하신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기만당한 것이다.
7. 오직 우리가 스스로를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하고 그 약속을 이행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일을 할 수 있게 될 때, 더 이상 불순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을 통해 새롭게 만들게 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발견할 것이며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기게 될 것임을 깨달아라. 그러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든 후,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8. 또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월삭과 안식일을 내가 싫어하노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안다. 주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안식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안식에 이끌도록 그분께서 만든 안식일이다. 주님은 제8일의 시작, 즉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을 만들 것이다.
9.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쁨으로 제8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 날에 예수께서도 역시 죽음에서 일어나셨고, 스스로 하늘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15장).23)
(290.1)
 안식일 준수를 무효로 만들기 위해서 바르나바스는 3가지 기본적인 주장들을 이끌어 내고 있다.

   (1) 제칠일의 안식은 현재적 경험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변화될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깨닫게 될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것이다(4-5절).

   (2) 인간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성화는 현재에는 불가능한데, 그것은 인간 자신이 불순하고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안식일의 성화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든 후”인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6-7절).

   (3) 하나님은 명확하게 선언하신다. “너희의 월삭과 안식일을 내가 싫어하노라.”

 따라서 현재의 안식일들은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없고 오직 미래의 안식일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것은 제8일의 시작, 즉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특징지을 것이다(8절). (2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