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식일에 어떻게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기쁜 소식을 경축해야 하는가?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 그리고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한 이같은 경축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장(章)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들이 시도될 것이다. 먼저 세가지의 제안들을 검토하기로 하자. (58.1)
 1. 모든 일이 마쳐진 것처럼 안식함
 하나님의 첫 창조의 완성과 완전성을 찬양하는 첫번째의 길은 마치 우리의 모든 일이 완료된듯이 안식일에 안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말마다 미처 마치지 못한 일 때문에 좌절하는 경험을 너무나 자주 치루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제안이 비 현실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최선껏 노력은 했지만 6일동안에 한 일은 당초 의도했던 것의 일부분에 불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일들이 모두 완료된 것처럼 안식을 취함으로써 안식일의 기쁜 소식을 찬양할 수 있다는 말인가? (59.1)
 이에 대한 대답은 안식일의 근본 기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안식일의 근본 기능은 우리의 미완성의 인생과 과업에 “완결”의 관념을 주는 일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는 출애굽기 20장 9절에 대한 어느 랍비의 다음과 같은 주석이 안식일의 이같은 기능을 사사하고 있다. “인간이 6일 동안에 자신의 모든 일을 마친다는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의 일은 항상 미완(未完)의 상태로 남게되는 것이 아닌가? 이 구절이 전달하려는 뜻은 마치 당신의 모든 일이 완료된 듯이 안식일에 안식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에 대한 생각까지라도 멈추라는 것이다.”17 (59.2)
 참으로 안식일은 예상보다 너무 일찍 당도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미처 마치지 못한 일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하여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강력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안식일은 우리를 매일의 일상 생활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서 6일간의 일과 생명 그 자체에 대하여 완성의 느낌을 갖게 해 주고 있다. (59.3)
 어떤 주말(週末)에는 다른 주말(週末) 보다 성취감이 클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의 노력의 결과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매 안식일 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안식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를 위한 당신의 창조적 업적과 구속적인 성취를 찬양토록 초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계적인 일상(日常)의 과정을 중단하고 마치 모든 일이 완료된 것인양 안식을 취하여 당신의 “다 이루신”(창 2:2, 요 19:30) 창조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시고 계시다. 이와같은 강조는 네째 계명에서 발견된다. 네째 계명에서는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창조 사업을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사실이 인간들이 같은 경험에 참여해야할 근거로 제시되었다(출 20:8~11). (59.4)
 미처 성취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으면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취들을 찬양하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그리고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이룩한 성취의 빛 속에서 우리들의 일을 바라보도록 권고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울인 노력의 성과가 크든 적든 간에 마치 너희의 모든 일이 성취된 듯이 안식일에 안식하라. 왜냐하면 나의 은혜가 네가 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59.5)
 안식일의 기념이 우리의 생명에게 끼쳐주는 완성감(感)이 자칫 연속적이고 무의미하며 일차(一次)적인 생존이 되기가 십상인 우리의 생존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해준다. 인간은 혹종의 분기점(分(皮點)이 없는 끝없는 연속과 같은 삶을 감내(里耐)할 수가 없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학력 수준을 확인하기 위하여 정기적인 간격으로 시험을 치를 필요가 있듯이 기독교인들도 자기 생존의 기쁨과 방향과 의의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7일에 하루씩의 안식일을 필요로 한다. (59.6)
 파시피코 마씨(Pacifico Massi)는 말하기를 “사람은 일을 중단하여 자기 자신을 세상의 사물로 부터 초연할 수 있는 연후에라야 창조의 제사장의 자세를 지닐 수가 있다. 그리고 성일(聖日)은 이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것이다. 즉 성일이 있음으로해서 사람은 사랑의 충만한 지적인 빛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고 안식일을 하나님께 거양(擧揚)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가 있다”18고 하였다. 안식일은 우리의 불완전하고 미완(未完)된 과업에 완성감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이룩하신 하나님의 업적에 대하여 하나님께 칭송과 찬양을 바침으로서 안식일의 기쁜 소식을 기념하는 일꾼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로 우리를 높여준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우리의 찬양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취까지 바치는 경험은 일을 해야하는 6일에 대해서까지 안식일의 특성들을 부여해 준다. (60.1)
 2. 완전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함
 참다운 예배의 기초. 하나님의 첫 창조의 완전함을 찬양하는 두번째 방법은 우리의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이다. 사도신경의 제 1 조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나이다”(크레아또렘 챌리 엣 떼래)19로 되어 있다. 이와같은 신앙은 성경의 첫 선언이기도 하다. 창세기 1 장 1절에 이르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다.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말로 만이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가지고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이같이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 세계의 존재 그 자체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60.2)
 조지 엘리오트(Georgpe Elliot)는 웅변적인 필치로 기록하기를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우주는 눈에 보이지 않은 실재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물질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세속주의에 대하여 안식일은 영원한 반대 증인으로 서 있다. 안식일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력과 만물의 조화와 적응을 명령하신 지혜와 모든 것을 ‘심히 좋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랑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안식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로 하나님을 삼도록 타락시키고 있는 영적인 질환으로부터 사랑을 지켜주는 영원한 길잡이로 제정된 것”20이라고 하였다. (60.3)
 

결함 투성이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기에게 판매한 자동차 회사를 칭찬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마찬 가지로 만약에 하나님의 첫 창작품이 완전치 못하다고 할 때는 하나님에게도 찬양받아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안식일이 선언하는바는 이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우연에 의한 볼품없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행위에 의하여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61.1)
 어째서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인간과 하나님의 의미있는 관계의 수립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되는가? 무슨 이유로 이 같은 신앙이 사도신경(使徒信經)과 성경의 첫 진술로나타나야 했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자신의 완전한 창조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참되이 예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신 분이 아니고 또 그분이 피조물들을 완전하게 창조하시지를 못했다고 할 때도 하나님은 찬양을 받을만한 유자격자가 될 수 있을까? 결함 투성이의 기계를 생산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판 회사를 찬양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이와 똑같이 만약에 하나님의 최초의 창작품이 완전치 못하다든가 또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든가 할때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르트가 말했듯이 “만약 창조의 사업에 대한 고백이 거짓되고 무기력하고 불가능하게 되면 화해와 구속의 고백도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21 (62.1)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함
 어찌하여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서 우리의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처럼 많은 형태로 도전을 받아야 했는가? 그 이유들로는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옛 날에 살았던 다신론적(多神論的)인 사람들은 일부 현대인들과 같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을 섬기려 하였다. 그리하여 태양, 달, 바람, 번개 등이 하나님의 피조물들로서가 아니라 신(神)들로서 여겨졌다. 그들의 문제는 “신(神)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너의 신(神)이냐?”였다. 수위권(首位權)을 둘러싼 신(神)들의 쟁투로 말미암아 참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빛을 잃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이유들, 그 성질이 크게 달라졌다. (62.2)
 과학적, 합리적 사고(思考)의 승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반적 개념을 무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다신론 또는 유일신론(峰一神論)으로부터 무신론과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든 중요한 요소로는 진화론과 또 자연과학 전반에 끼친 진화론의 영향을 들어야 할 것이다. 자연과 합리적인 기초 위에서 생명과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세속의 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는 수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창조를 가르치는 성경의 교리를 배척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대의 중요한 질문은 이제 “누가 너의 하나님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죽었거나 아니면 살아있다고 해도 이 세계의 기원이나 존속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있지 않다”고 한다. (62.3)
 어찌하여 이 세상에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회의(懷疑)가 이처럼 만연케 되었는가? 어찌하여 오늘날의 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설 보다는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을 더 믿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상기시키는 제칠일 안식일의 광범위한 포기가 이처럼 회의 사상이 만연케된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 엘렌 지 화잇(Ellen G. Wlite)은 대답하기를 “만약 안식일이 보편적으로 지켜졌던들 세상에는 우상숭배자도, 무신론자도, 이교도도 없었을 것이라”22고 하였다. (63.1)
 창조 기념일인 안식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잊거나 또는 의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나와 나의 아내는 4년간의 약혼 기간을 거의 대양(大洋)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이 동안에 나는 누가 나의 약혼자이며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하여 잊든가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곤 하였다. 나는 이러한 나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간을 들여 약혼녀의 편지를 거듭해서 읽든지 또는 그녀의 사진들을 보곤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의심을 이기고 약혼녀에 대한 나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데에 힘이 되어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식일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완전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도록 초청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 시작된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63.2)
 주일의 평일들 동안에 우리는 인간이 만든 여러가지 복잡한 기계들을 사용하고 탄복하면서 인간의 업적과 재간을 신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조물주를 잊어버리고 대신에 인간의 창조물을 섬기게 될 이 진정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지혜로 제칠일 안식일을 제정하여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기 숭배의 재난으로부터 구하는 안전장치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매주마다 자신의 백성들을 초청하여 당신의 창조 솜씨들을 관찰하고, 그로써 완전하신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함으로써 당신의 완전한 창조의 기쁜 소식을 듣고 기념토록 하고 계시다. 안식일의 이같이 중대한 기능이 인간의 계속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이 점은 그 어느 때보다 현재에 있어서 더 크다) 어떠한 형태의 안식일 단절도 재가되거나 적법한 것으로 생각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일 중 어느 한 날에 창조의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기념적인 기능을 부여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그날이 대표하고 있는 그 사건을 무시하려는 행위이다.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