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6. 베드로의 구원의 경험
 다시금 사명을 부여받은 후,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증거하는 일을 자기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욥바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의 문화적 전통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그의 경직된 견해를 넓힌 이상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랴에 살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을 거느린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백부장에게로 가라고 베드로를 부르셨다. (95.1)
 어느 날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한 천사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4, 5). 천사의 지시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명시한다: “빛을 받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시다.”4) (95.2)
 그로부터 얼마 후 베드로는 자기가 묵던 집의 지붕에서 기도하는 동안 이상을 보게 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온갖 종류의 부정한 짐승들을 담은 큰 보자기를 보았다. 한 음성이 그것들을 죽이고 먹으라고 말했다. 그가 모세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거절하였을 때, 그 음성은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9-16)고 말했다. 이 이상 후 곧바로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베드로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해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그의 복음을 백부장에게 전하도록 요청했다. (96.1)
 가이사랴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큰 무리를 발견했다. 그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의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게 이렇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행 10:28).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님이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백성들을 위해 증거하도록 그가 한 나라에 사명을 부여하신 것임을 깨달았다(참조 행 10:34-43). 그런 다음 베드로는 예수께서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설교하셨다. 그리고 성령이 믿는 이방인들에게 강림하셨을 때—자신은 물론 다른 유대인들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도—베드로는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행 10:48)고 하였다. (96.2)
 엘렌 화잇은 베드로의 이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96.3)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목적,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구원의 축복의 후사가 될 것임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 중에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무너진 장벽이 아직도 존재하여 그들의 노력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방인들을 복음의 축복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제 주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의 범위가 세계적인 것임을 베드로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5)
(97.1)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가 한 일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 행동의 이유를 제시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솔선하심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방법으로 교회의 선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베드로를 쓰셔서 이방 세계를 향한 그들의 비전을 여셨다. (97.2)
 하지만 그것이 베드로가 완전무결한 빛의 수호자가 되었음을 뜻하진 않았다. 기독교의 중심지인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 없다는 원칙을 주장하지 못한 것을 책망했다. 바울은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갈 2:11)고 진술했다. 바울은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왜 책망 받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대표자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갈 2:12)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베드로는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의 제례 및 식사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보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분별력 없이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다. (97.3)
 교회의 “기둥”(참조 갈 2:9)에 의한 그런 행위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는 교리에 대해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6) 그것은 교회를 분열에 처하도록 위협했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중인격적인 실례의 파괴적 영향력을 간파하고 “그의 진정한 감정을 이처럼 위장함에 대하여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7) 그는 이 행동을 복음 진리에 대한 배반으로 보았는데, 이는 그것이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도록 강요할 것이었기 때문이다(참조 갈 2:14). (98.1)
 엘렌 화잇은 이 일화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 사도의 약점에 대한 이 기록은 그도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과 그가 다른 사도들의 수준 이상으로 높지 않았다는 사실의 증거로서 보존되어야 하였다.”8)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범한 과오를 알고서 그의 힘에 미치는 한 신속히 그 잘못을 고치고자 하였다.”9)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그의 동료 사도 바울의 조언과 예루살렘 총회의 권위를 존중하려는 자발성을 보여주었다(참조 행 15:19, 20, 28, 29). (98.2)
 베드로의 소망의 신학
 베드로의 두 사도서신들은 그가 자신의 타고난 권리로 신학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나그네”였던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벧전 1:1). 그는 자신을 “함께 장로된 자”로 불렀지 지역 교회의 장로들 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벧전 5:1). 베드로의 행적(Acts of Peter)이라는 경외서에서 발견된 전통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 말년에 로마 밖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서신들은 아마도 63-64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98.3)
 베드로는 고통 당하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고 고난 중에서 견뎌낼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자신의 첫 편지를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첫 편지에서 소망이란 단어를 중심 단어로 삼았다(참조 벧전 1:3, 21; 3:5, 15). “그는 신자들이 고통당 할 때, 자신들이 쓸데없는 경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도록 고안된 하나님의 시험에 자신들을 드리는 것임을 그들이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1:7).”10) (99.1)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불멸의 유업과 새롭게 될 땅에 대한 말씀의 약속에 기독교 소망의 기초를 두었다(참조 벧전 1:4; 벧후 3:13). 지금도 중생과 새로운 사랑의 경험을 통하여 신자는 이 약속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사 40:6-8이 인용됨]” (벧전 1:23, 24). 베드로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했다(벧전 1:25). 인간의 현재적 구원의경험은 그들의 미래의 영광을 보장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신자들은 진리를 순종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구원 안에서 성장할 특권과 의무를 가진다(벧전 1:22; 2:2, 3). (99.2)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99.3)
그[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3, 4).
(100.1)
 바로 다음 구절들(5-7)에서 베드로는 성화의 영적 “사다리”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벧후 1:10)을 의미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 11). 베드로는 일찍이 자신의 실수 후 스스로 교훈을 배운바 있었다. 예수의 은혜는 그를 모든 신자들을 위한 용감한 증인과 도덕적 본보기로 변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인 성장의 사다리, 곧 믿음, 덕,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차례차례 올라갔다. 이 얼마나 놀라운 부르심이며 특권인가! (100.2)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사다리의 발걸이를 하나 하나 오르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이상의 최고까지 올라감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11) 베드로는 성화된 생애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계속적인 고귀한 부르심이며 선택이다. 그는 영적으로 “소경이라 원시치 못”한 것과, 우리가 “[우리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벧후 1:9)을 입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예수님 따르기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00.3)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동일한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의 본질적 연속임을 강조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가 교회에 적용시킨 기술적인 용어들—“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9절)—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을 새롭게 한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참조 신 7:6). 그의 첫 서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베드로는 예수와 교회가 둘다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입었다고 지적했다(벧전 1:2; 2:4, 6, 9; 5:13, 강조 첨가). 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중대한 진술과 함께 이 편지를 끝맺었다(벧전 5:14). (101.1)
 베드로는 산 위에서 예수의 영화로우심을 목격한 증인이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었지만, 여전히 거룩한 성경에 믿음과 소망의 확실성을 두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참조 3:13).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