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ewis S. Chaefer,
“Dispensationalism,” BSac 93 (1936): 448.
2 Daniel P. Fuller,
“The Hermeneutics of Dispensationalism” (dissertation, Norto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 1957), 25.
3 Chaefer,
“Dispensationalism,” 406-407.
4 John F. Walvoord,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Chicago: Moody Press, 1967), 103.
5 Charles C.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Chicago: Moody Press, 1965), 97.
6 Ibid., 96.
7 Ibid., 158.
8 Ibid.
9 Ibid., 104.
10 Ryrie(ibid., 88)는
“문자적 해석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사람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다양한 해석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1 bid., 94.
12
“시오니즘의 목표는 공적인 법으로 보장된 유대 민족을 위한 하나의 집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는 것이다.”(세계 유대민족을 위한 바젤 프로그램, 1897).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선언’(1948)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팔레스타인 유대 국회와 세계 시온 운동(World Zionist Movement)은 공동으로 그들의 고향 땅 팔레스타인은
“자연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모든 세대의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울여 온 각고의 투쟁을 언급하고 있다.
13 다음을 참조하라. S. Mowinckel,
He That Cometh (Nashville, Tenn.: Abingdon Press, 1954), 제9장,
“The National Messiah.” 14 G. E.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Grand Rapids, M: Eerdmans, 1961), 115. 래드는 심지어 제4 에스드라서 7 27-31의 죽으시는(dying) 메시아도 대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G.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New York: Schocken Books, 1974), 17-18도 참조하라.
15 G. E. Ladd가 베이커 신학사전 [
Baker’s Dictionary Theology, ed. E. F. Harrison (Grand Rapids, M: Baker Book House, 1973)]에 기고한 뛰어난 논문인
“Kingdom of God”를 참조하라. 또한 그의
A Theology of the New Testam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4), 제4장도 참조하라.
16 T. W. Manson,
The Servant Messiah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7; 1953년 판 재판), 제1장. 특별히 솔로몬의 시에 나타난 메시아적 희망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부분.
17 Ibid., 36, 각주 3.
18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117.
19 R. Longenecker,
Biblical Exegesis in the Apostolic Period (Grand Rapids, MI: Berdmans, 1977), 제1장
“제1세기 유대 해석학”에서 몇몇
“과도한 문자주의”에 대한 예들을 참조하라. 문자주의적 해석은
“이후의 모든 주석 발달의 기본으로 간주되었다”(29쪽).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 Ramm (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45-48)의 견해와 비교하라.
“랍비주석에서 배워야 할 하나의 주요한 교훈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축자주의(letterisin)의 악이다. 성경의 문자 그 자체를 높이는 순간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된다(48).” G. F. Moore,
Juda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32), 제1권 248쪽도 참조하라.
20 G. F. Hasel,
“The Problem of the Center in the OT Theology Debate,” ZAW 86 (1974): 65-82.
21
출애굽기 16:29에 대한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은 에세네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어떤 그릇도 있던 곳에서 옮기지 않으며, 심지어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다”는 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보고에서 나타난다. Wars II, 8, 9 Josephus,
Complete Works, trans. W. Whiston (Grand Rapids, MI: Kregal Publ., 1966]).
22 F. F. Bruce,
Biblical Exegesis in the Qumran Texts (Grand Rapids, MI: Eerdmans, 9f., 15-17 참조).
23 H. K Larondelle,
Perfection and Perfectionism, Andrews University Monographs, Studies in Religion, vol. 3, 3rd ed. (Berrien Springs, M: Andrews University Press, 1979), 272-275 참조.
24 신구약의 점진적 통합성에 관한 가장 최근의 공식적인 가톨릭 고백에 대해서는
The Dictionary of Vatican II, W. M. Abbott and J. Gallagher, eds. (NY: Guild Press, 1966), 제4장 16부
“Doggmatic Constitution on Divine Revelation.”을 참조하라.
25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139. 그의 책
The Last Things (Grand Rapids, M: Eerdmans, 1978), 18, 19.
26 F. F. Bruce in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 (1973), 293.
27 G. Ernest Wright,
“The Problem of Archaizing Ourselves,” Interpretation 3 (1949): 457.
28 Ibid., 458.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