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2장 구약의 열쇠: 문자주의인가? 신약인가?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봉사의 목표이시다. 그리스도는 세계와 전 인류를 구속하려 오셨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으나 유대 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22.3)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22.4)
 신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에게(히 8 장) “더 좋은 소망”(히 7:19)을 소개하는 “더 좋은 언약”(히 7:19)안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하셨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의 약속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근본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고후 1:20) 된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민족적 이스라엘과 세속적 정치적 언약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모든 해석은 하나님의 언약의 진정한 핵심과 신학적 중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 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열쇠로, 뿌리로, 그리고 중심으로 이해하지 않고는(계 22:16), 하나님의 옛 언약에 대한 어떤 문자적 이해도 다만 극단적 오해로 전락하며, 약속된 축복에 대한 어떤 주장도 하나의 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2:15, 16). 그리스도나 성령이 없는 이스라엘 언약의 적용은 다만 심령을 완고하게 할 뿐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다. 오직 유대인이 예수께서 예언의 메시아라는 신약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그의 심령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일 때, 가리는 수건이 구약의 문자에서 벗겨질 것이고 그는 성경의 진정한 문자적 의미와 구약 진리의 원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주의 혹은 축자주의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의 열쇠는 그것이 문자주의든 우화주의는 이성적인 방법이나 원리가 아니라 신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2.5)
 구약을 해석하는 기독교 신학자는 영원히 히브리 성경을 신약 전체의 빛 안에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구속사인 신약 안에서, 거룩한 영감 아래, 권위 있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독교는 언제나 신약이 구약의 목표요. 완성이라고 고백하여 왔다.24 래드(G. E. Ladd)는 “우리의 출발점은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는 그 길이 어야 한다”25고 말함으로써 그와 같은 역사적인 교회의 입장을 나타냈다. 부르스(F. F. Bruce)는 좀 더 특별하게 표현하였다. “우리 구주께서 구약을 사용하신 방법이 성서 해석에 있어서 우리의 기준과 패턴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더 나아가 성령의 현재의 사역 중 하나가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26 (23.1)
 1949년 영국의 옥스포드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 성서 연구회는 “성경 해석을 위한 지도 원리들”로서 다음과 같은 절실한 신학적 명제들을 채택하였다. (23.2)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은 어떤 자연적 발전이나 정지된 정체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한 백성의 역사 속에 나타난 계속적인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에서 발견된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육신 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교회의 온전한 삼위일체 신앙이 나오게 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총체적인 계시의 빛 안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27
(23.3)
 그리고 문법적 — 역사적 주석이 마친 후에 있어야 할 성경 구절의 신학적 해석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24.1)
구약 구절을 주석할 경우에는 그 자체의 시기 전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그것을 시험하고 주해하여야 한다는 데에 합의하 였다. 그리고 해석자는 그 구절을 신약의 관점에서 보기 위하여 신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구약의 성경절은 그 범위가 정해지고 교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신약의 빛 안에서 처음 기자에게는 알 려지지 않았던 새롭고 좀 더 심오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24.2)
신약 구절의 경우는 그것의 배경과 문맥의 빛 안에서 시험하고 그 후에 하나님이 먼저 주신 계시 안에서 그 배경을 발견하기 위해 구약으로 돌 아가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신약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야 우리는 구속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빛 안에서 그 구절을 바라보고 주석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구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통해 신약 구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28
(24.3)
 참고 문헌
 1 Lewis S. Chaefer, “Dispensationalism,” BSac 93 (1936): 448.

 2 Daniel P. Fuller, “The Hermeneutics of Dispensationalism” (dissertation, Norto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 1957), 25.

 3 Chaefer, “Dispensationalism,” 406-407.

 4 John F. Walvoord,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Chicago: Moody Press, 1967), 103.

 5 Charles C.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Chicago: Moody Press, 1965), 97.

 6 Ibid., 96.

 7 Ibid., 158.

 8 Ibid.

 9 Ibid., 104.

 10 Ryrie(ibid., 88)는 “문자적 해석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사람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다양한 해석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1 bid., 94.

 12 “시오니즘의 목표는 공적인 법으로 보장된 유대 민족을 위한 하나의 집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는 것이다.”(세계 유대민족을 위한 바젤 프로그램, 1897).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선언’(1948)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팔레스타인 유대 국회와 세계 시온 운동(World Zionist Movement)은 공동으로 그들의 고향 땅 팔레스타인은 “자연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모든 세대의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울여 온 각고의 투쟁을 언급하고 있다.

 13 다음을 참조하라. S. Mowinckel, He That Cometh (Nashville, Tenn.: Abingdon Press, 1954), 제9장, “The National Messiah.”

 14 G. E.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Grand Rapids, M: Eerdmans, 1961), 115. 래드는 심지어 제4 에스드라서 7 27-31의 죽으시는(dying) 메시아도 대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G.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New York: Schocken Books, 1974), 17-18도 참조하라.

 15 G. E. Ladd가 베이커 신학사전 [Baker’s Dictionary Theology, ed. E. F. Harrison (Grand Rapids, M: Baker Book House, 1973)]에 기고한 뛰어난 논문인 “Kingdom of God”를 참조하라. 또한 그의 A Theology of the New Testam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4), 제4장도 참조하라.

 16 T. W. Manson, The Servant Messiah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7; 1953년 판 재판), 제1장. 특별히 솔로몬의 시에 나타난 메시아적 희망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부분.

 17 Ibid., 36, 각주 3.

 18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117.

 19 R. Longenecker, Biblical Exegesis in the Apostolic Period (Grand Rapids, MI: Berdmans, 1977), 제1장 “제1세기 유대 해석학”에서 몇몇 “과도한 문자주의”에 대한 예들을 참조하라. 문자주의적 해석은 “이후의 모든 주석 발달의 기본으로 간주되었다”(29쪽).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45-48)의 견해와 비교하라. “랍비주석에서 배워야 할 하나의 주요한 교훈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축자주의(letterisin)의 악이다. 성경의 문자 그 자체를 높이는 순간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된다(48).” G. F. Moore, Juda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32), 제1권 248쪽도 참조하라.

 20 G. F. Hasel, “The Problem of the Center in the OT Theology Debate,” ZAW 86 (1974): 65-82.

 21 출애굽기 16:29에 대한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은 에세네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어떤 그릇도 있던 곳에서 옮기지 않으며, 심지어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다”는 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보고에서 나타난다. Wars II, 8, 9 Josephus, Complete Works, trans. W. Whiston (Grand Rapids, MI: Kregal Publ., 1966]).

 22 F. F. Bruce, Biblical Exegesis in the Qumran Texts (Grand Rapids, MI: Eerdmans, 9f., 15-17 참조).

 23 H. K Larondelle, Perfection and Perfectionism, Andrews University Monographs, Studies in Religion, vol. 3, 3rd ed. (Berrien Springs, M: Andrews University Press, 1979), 272-275 참조.

 24 신구약의 점진적 통합성에 관한 가장 최근의 공식적인 가톨릭 고백에 대해서는 The Dictionary of Vatican II, W. M. Abbott and J. Gallagher, eds. (NY: Guild Press, 1966), 제4장 16부 “Doggmatic Constitution on Divine Revelation.”을 참조하라.

 25 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139. 그의 책 The Last Things (Grand Rapids, M: Eerdmans, 1978), 18, 19.

 26 F. F. Bruce in Baker’s Dictionary of Theology (1973), 293.

 27 G. Ernest Wright, “The Problem of Archaizing Ourselves,” Interpretation 3 (1949): 457.

 28 Ibid., 458.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