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2장 구약의 열쇠: 문자주의인가? 신약인가?
 후기 유대교의 문자주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혼돈되고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예언의 말씀들을 문자주의에 따라 잘못 해석하며, 이스라엘을 향해 약속된 언약 축복의 조건적 성질을 간과하였다.13 유대인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러하였다(눅 24:20-27; 마 16:21-22). 메시아와 하나님의 왕국을 기대하는 다양한 사상들이 나타나 있는 유대인들의 모든 묵시적 기록에는 단 한 번도 이 사야 53장의 성취로서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14 그러므로 메시아와 그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는 후기 유대교 신학은 결코 구약 예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안전한 지침이나 기독교적 규범이 될 수 없다. (16.2)
 침례 요한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메시아의 봉사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새롭고도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였다(마 11:2-6).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영광의 왕으로 바치거나 그의 왕국을 지상의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이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요 6:15)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그들의 해석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거절하시고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셨”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강조 첨가). (17.1)
 여기에 한 국가로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거절한 이유가 나타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사명과 그의 왕국이나 통치의 심오한 종교적 성질을 오해하고 있었다.15 랍비들의 유대교는 메시아의 강림과 그의 왕국의 세속적 정치적 영광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봉사와 통치의 종교적 국면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였다. 그 결과 유대 국가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었다.16 그러므로 메시아 왕국의 강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었다. (17.2)
 무엇보다 먼저 예수께서는 광야에서의 승리를 통해 유대인들의 심령을 지배하고 있는 사단과 그의 능력을 정복하고, 마귀들을 그들의 심령에서 쫓아내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은 오히려 유대인들에 의해 “악한 영에 사로잡힌”(막 3:30) 바알세불의 일이라고 저주를 받게 되었다(마 12:22-28).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강조 첨가, 눅 17:21 참고). (18.1)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통치의 영적인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메시아가 될 것을 말리려 하였을 때, 그는 베드로를 가혹하게 책망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맨슨(T. W. Manson)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해석하였다. “비켜라, 사단. 너는 나의 거치는 돌이 도다. 네가 하나님의 왕국보다 인간의 제국에 더 관심이 있구나.”17 (18.2)
 예수께서는 예언의 말씀들이 선포한 바와 같이 영광의 왕이 아니라, 종된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바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영광스런 다윗의 왕국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거절하셨고, 더욱이 그 자신의 제자들의 희망도 거절하셨다(눅 19:41-42; 마 23:37-38). 그래서 래드(G. E. Ladd)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18.3)
그가 영광스러운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겸비한 구주로 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그가 세우려는 왕국은 현시적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오히려 왕 자신이 인간에게 내려오신 그런 형태의 것이 될 것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18
(18.4)
 그러면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게 하였고,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영적 통치를 거절하게 하였는가? 그의 공생애 초기부터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세속적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와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온 세상의 머리로 높임을 받게 되리라는 그들의 소망을 실망시켰다(눅 4:16-30; 마 5:1-12). (19.1)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제1세기의 유대인들의 주석에 자주 옹용된 문자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19 성경에 대한 이런 형태의 미시적 접근으로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문자와 단어들을 매우 심각하게 취급하면서도, 선지자들의 말을 구속사와 성경의 신학적 중심에 연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성경을 쪼개어 조각내버리고 말았다. (19.2)
 구약을 통일시키는 중심성은 그로부터 모든 진리들이 나오는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20 그리고 세상과 그의 언약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계시들이 그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문자주의 (literalism)나 축자주의 (letterism)는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19.3)
 쿰란파나 사해의 거민들은 성경 예언을 구분하는 유대교의 독특한 문자주의 해석 형태를 채택하였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어떤 부분(예: 출 16:29)은 바리새적 유대교도들보다 더 분파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였을 뿐 아니라,21 예언서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예: 하박국서) 그들이 구약 예언의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완전히 무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언적 구절들을 전적으로 마지막 때로서의 그들 자신의 시대에 적용되는 것으로만 보았다.22 그들만이 성경에 대한 바른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은 쿰란 공동체의 거룩한 건설자인 ‘의의 교사’가 자신들을 인도한다는 묵시적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언의 참된 의미와 그것의 모든 신비를 여는 열쇠와 임박한 위기에 적용할 모든 기초석을 계시해 주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쿰란파 사람들은 ‘의의 교사’의 성경 해석을 완전히 거룩한 계시와 동일시하였고 그의 특별한 말씀을 절대적인 해석 규범으로 받아들였다.23 (19.4)
 예언의 ‘문자적’ 의미를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그 역사적 — 문법적 주석을 게을리 하는 이와 같은 형태의 묵시주의는 진정한 문자적 해석을 흉내 만 낸 사변적 문자주의에 불과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잘못된 소망은 추종자들의 엄청난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쿰란 문자주의는 잘못된 출발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보다는 예언의 적용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무비판적으로 당대의 카리스마적 교사의 주장을 성경 해석의 최고 규범으로 받아들 이게 한 것이다. (20.1)
 구약의 열쇠는 신약의 그리스도
 하나님 그분 자신이 그의 말씀의 해석자이다. 성경 말씀은 그 의미와 기별을 거룩한 저자로부터 받는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주어진 하나님의 이전 약속들에 대해 그분 자신이 펼치는 해석을 듣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그분의 역동적이고 점진적인 뜻과 목적에 지속적으로 연관시켜야 한다. 한 백성, 왕조, 왕, 도시, 그리고 산으로서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약속들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주어진 자기중심적 약속이 아니라, 당연히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한 부분들이었다. 구약은 그와 같은 우주적 계획들을 드러낸다. 그러한 내용은 통시적, 수평적(길게 끊어서 보는) 접근법으로 고찰할 수 있다. 이 접근법은 구약 예언 기별들의 연대기적 순서에 관심을 기울인다. (20.2)
 근래에는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가 그의 저서 구약 신학을 향해(Torward an Old Testamment Theology, Grand Rapids, M; Zondervan, 1978)에서 구약에 대한 그와 같은 연역적인 고찰을 하였다. 그는 유기체적 통일체로서의 구약의 핵심적 중심점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모든 백성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식으로 요약하였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며, 나는 너희 가운데 거할 것이라”(12, 32-35쪽).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이 한 계획, 이 약속(this promise)이 이스라엘 모든 언약들에 대한 점진적 계시에 나타난 확고한 핵심이다. 그것은 분명히 구약의 모든 본문을 부당하게 끼워 맞춘 “추상적인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 기록 시대와 그 이후의 모든 시대를 동시에 판단하는 영원하고 규범적인 기준을 위한 패턴”(14쪽)을 제공한다. (21.1)
 카이저는 메시아 약속은 태초부터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약속은 구약의 모든 거룩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조들과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인식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의 명확한 약속으로 모든 메시아적 소망을 요약하고 있다. (21.2)
이제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행 26:6-7).
(21.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시 13:32-33).
(22.1)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