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2장 구약의 열쇠: 문자주의인가? 신약인가?
 세대주의란 성경의 ‘이스라엘’‘교회’라는 용어를 언제나 본질상 전혀 다른 두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성서 해석 체계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지상의 민족적 신정 국가를 나타내고 ‘교회’란 영적인 하늘 백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의 대표적인 학자인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e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1)
세대주의자들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두 가지 다른 목적을 추구해 오셨다고 믿는다. 하나는 지상의 백성들과 지상의 목적과 관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사물들과 관계된 것이다.1
(11.2)
 그래서 다니엘 풀러(Daniel F. Fuller)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세대주의의 근본적인 전제는 영원히 구별되는 두 백성들을 형성하는 데 나타난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이다.”2 다시 말해,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교회’를 위해 서로 다른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그 자신의 언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의 핵심은 성경을 “어떻게 바르게 구분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은 단순히 시간과 세대를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을 고린도전서 10:32에서 가져 온 구분대로 어떻게 이스라엘이나(either) 교회 혹은 (or) 이방인에게 적용할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11.3)
 더 나아가 체이퍼는 마침내 기독교도들에게 전해진 성경은 오직 요한복음, 사도행전, 및 신약의 서신들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3 그리고 요한계시록 6-20장의 최후의 투쟁과 환란은 “그 책 전체가 원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4(J. F. Walvoord) 때문에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2.1)
 성경의 전체 흐름을 구분하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원칙을 ‘철저한 문자주의’라고 부른다. 이 분야의 현대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라이리(Charles C. Ryri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2)
철저한 문자주의는 논리적이고도 명료한 해석 원칙이기 때문에 세대주의는 정당한 것 이상이다.5
(12.3)
세대주의는 문자적, 정상적, 상식적인 성서 해석 원칙을 철저히 적용시킨 결과이다. 어떤 다른 신학 체계도 이것을 주장할 수 없다.6
(12.4)
철저한 문자주의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심장에 있다.7
(12.5)
 이렇게 문자주의 원칙을 확정함으로써 그들은 신학, 특별히 종말론에 있어서 너무 멀리 나갔다. 그것은 구약 예언들의 문자적 성취를 요구 한다. 그래서 그것은 미래의 어느 시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날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현재 어떤 문자적인 의미로도 그것들을 성취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8 그러므로 문자주의는 필연적으로 예언 해석에 있어서 세대주의적 미래주의로 귀착되고 만다. (12.6)
 세대주의에 따르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에 탄생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것이 아니다(not). 은혜의 복음과 함께 한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중단’시킨 것에 불과하며,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한 지상 왕국에 대한 약속과 아무 상관이 없는 ‘괄호’(H Ironside), 혹은 ‘삽입구’(L. S. Chaefer)에 불과한 것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13.1)
 세대주의 해석 체계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영광스러운 지상(earthly)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메시아적 왕으로서 자신을 이스라엘 국가에 바쳤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 그들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정당한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연기하셨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는 그가 다시 유대를 그의 신정 국가로 건설할 때까지만 지속될 은혜의 왕국(마 13장)을, 한시적인 은혜의 언약으로서 제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들로 이루어지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의 ‘무조건적인’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전에, 갑작스럽고 보이지 않게 하늘로 ‘휴거’하여 세상에서 데려감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13.2)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의 약속은 오직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기 동안 미래에 유대인들이 세울 유대 국가에게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직 그때에만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하고 무조건적인 목적이 영광스럽게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동물 희생이 다시 시행될 것을 의미한다. 그 때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라이리는 “이 천년기는 역사의 절정이며, 각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의 위대한 성취”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전체적인 구속의 계획에서 분리시키고, 미래의 하나님의 왕국을 엄격 하게 유대인의 왕국의 회복, 소위 천년 왕국에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13.3)
 이스라엘과 교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과 교회,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과 바울의 은혜의 복음 사이에 대한 이와 같은 이분법은 성경의 예언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 원칙을 채택한 논리적 결과인 것이다. 이 문자주의 체계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영해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1830년대 경에 창안된 것이다. 현대의 세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전직 변호사였으며 영국에서 플리머쓰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인 존 다비(John N. Darby, 1800-1882)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고, 스코필드 주석 성경(1917)과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 뉴욕: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 1967)으로 대중화 되었다. (14.1)
 세대주의 신학은 스코필드의 후계자인 루이스 체이퍼(Lewis Sperry Chaefer)의 조직 신학(8권)이란 변증서와 달라스 신학교의 총장인 월부어드(John F. Walvoord)의 저술에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세대 주의는 시카고의 무디 성서 연구원과 미국 내 200여 개의 인가된 성경 연구기관에서 그 원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대주의 신학 잡지는 1934년 달라스 신학교가 인수한 Bibliotheca Sacra이다. 할 린제이(Hal Lindsey), 살렘 키르반(Salem Kirban)과 같은 인기 있는 저자들과 기타 사람들이 그들의 저술과 영화를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세대주의 해석 즉, 유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진정한 예언적 묘사가 중동의 아마겟돈 전쟁과 유대 민족의 천년 왕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4.2)
 구약의 열쇠는 신약
 세대주의의 ‘철저한 문자주의’ 해석학이 과연 구약 예언들의 미래적 성취를 해석하는 진정한 열쇠일까? 세대주의 신학의 문자주의가 진정으로 성경 그 자체에 유기적인 관계, 즉 참되고도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을 근거 없이 영해하고 우화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소위 ‘객관적 기준’10으로 밖에서 가져와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전제는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은 영감된 기록 그 자체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14.3)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 신자가 구약을 그 성취의 증거인 신약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닫힌 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구약과 신약 모두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의 유기체적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15.1)
 우선 구약 그 자체에는 히브리 성경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지침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 해석 지침을 제공하기 위하여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경의 빈 곳에 ‘문자주의’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그 지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신약이 성취하도록 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문자주의’란 용어를 구약을 문자 그대로 문법적, 역사적 주석을 하여 그 결과 그대로 전체 성경 경전 안에서 최종적인 진리로 높이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복음은 구약의 약속들을 공개하고, 주석하며, 재해석할 아무런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 의미는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찰스 라이리는 세대주의의 점진적 계시관에 의해 부가적인 빛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용어와 개념의 ‘충돌’을 뜻한다.11 (15.2)
 세대주의는 구약의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유기체적 관계를 부인한다. 그것은 또한 다윗 왕국의 약속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에 적용하는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적용은 예언을 문자적이 아니라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결국 잘못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5.3)
 그러므로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진정으로 전체로서의 성경의 유기체적 성격 즉, 구약과 신약의 영적, 신학적 통일성을 받아들이는가? 기독교 성경 주석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진정한 해석자로 인정하지도 않고, 신약이 구약의 예언을 적용할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은 채, 구약을 닫힌 경전으로 즉, 유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로 해석해야 하는가? 기독교인 주석가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고, 신약이 아직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는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구약을 주석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교나 시오니즘의 입장이 아닐까?12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