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료 인간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가짐으로 인내가 우리를 원숙하고 온전하게 만들 때 우리가 기뻐하는 것—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라고 말할 수 있다. (52.1)
 전망과 방향을 잃음
 시련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다. 대신에 전망과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혜의 습득이다(1:5). 물론, 이 지혜는 현대의 어떤 철학적 공론이나 메마르고 지적인 학식이 아니다. 야고보는 아마도 현대 철학적 공론과 밀접한 지혜에 대한 헬라적 이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토아 학파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지식으로 지혜를 정의했다. 그들에 의하면, 지혜는 “과학”이었다. 반면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초기 히브리 사람들과 같이, 지혜는 공론이 아니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야고보는 마치 그의 앞에 있었던 지혜로운 작가들(현자들)의 지혜와 같이, 생애의 사역에 관련된 것으로 지혜를 보았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가장 방대한 지혜서에 있는 첫 잠언에 의해 주어진 의미이다: “지혜와 훈계를 얻기 위하여, 통찰력에 대해 이해하기 위하여, 훈련되고 신중한 생애를 획득하기 위하여,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잠 1:2, 3. 지혜의 도덕적 유익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잠언 2장, 3장과 비교하라). 고대의 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2:6). 야고보는 분명히 헬라적이 아닌 유대적인 범주로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지혜를 위하여 하나님께 요구하도록—끊임없이 요구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헬라 문법은 지혜를 위한 요청은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행동이다. (52.2)
 우리의 저자는 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구하라고 권고하며 그것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 마태복음 7:7-11누가복음 11:9-13의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좋은 것”과 누가의 “성령” 대신에 야고보는 독자들이 지혜의 은사를 요청하도록 제안한다. 어떤 사람이 지혜를 구할 때, 그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1)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 그는 결점을 찾지 않고 후하게 주신다(1:5), 그리고

 (2) 요청하는 사람이 요청해야 하는 방법; 그는 의심 없이 요청해야 한다(6절). (53.1)
 하나님의 주심은 흔들림이 없고, 지체함이 없고, 계산적이지 않다. “후히”로 번역된 그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오로지 이 구절에서만 발견되지만, 그것은 “심리 유보가 없다”는 의미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기꺼이—주저함 없이— 진정으로 그리고 심리 유보 없이 주신다. 그는 투덜거리거나 불평하지 않으신다. 그는 비판적이거나 과오를 찾아내지도 않으신다. 그는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결코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요구할 때 결코 꾸짖거나 질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하고 미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53.2)
 그 등식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가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법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으로 방법을 바꾼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만나는 방법은 우리가 요구하는 방법으로 한정된다. 비록 하나님께는 심리 유보가 없지만 그 약속에 첨부되는 조건이 있다. 탄원자는 의심 없이 믿음으로 구해야만 한다(6절). 마태복음 21:21, 22의 예수님의 말씀은 적절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53.3)
 이 구절에서, 우리가 경고받는 의심의 특성은 절대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요청의 목적에 대한 의심이거나 요청으로 실제로 바라는 것이나 결과에 대한 의심인지가 주된 요점이 아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지혜를 주시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발적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본문이 추구하는 바이다. (54.1)
 의심하는 사람은 역경과 여러 가지 환경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정함이 없는 자이며, 여러 가지 바람의 영향 아래에서 불안정한 파도의 움직임처럼, 이쪽으로 갔다가 금새 다른 쪽으로 떠다니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이다(1:6-8). (54.2)
 여기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4절에 언급된 성숙함, 온전함, 완전함 등과 반대된다. 야고보의 신조어 두 마음을 품는 것은 문자적으로 “두 영혼을 가진” 혹은 “두 정신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영혼”을 한 사람의 전반적인 자아, 한 사람의 총체적인 인격체(예: 창 2:7)와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야고보에게 있어서 두 영혼을 가진 사람은 각각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샴 쌍둥이와 같은 부류인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존 번얀(John Bunyan)은 그런 사람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54.3)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리라”(마 6:24)고 선언하실 때 두 마음을 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실제로 그런 사람의 헌신은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그것이 자신이건, 물질이건 혹은 어떤 다른 요인-에게 있다. (54.4)
 야고보가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단지 우리가 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에 정함이 없는 것만이 아님을 제안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들은 삶의 모든 영역(“모든 일에”, 1:8)—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매일의 일과, 그들의 행동, 습관, 생각들—에서 그들의 인생 전체의 여정 동안 정함이 없다. 만일 우리가 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시련을 견디고 그것들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우리는 전망과 방향을 잃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갈망하시는 하늘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5절). (54.5)
 ■ 말씀을 적용함
 1. 나는 눈멀고, 마비되고, 불치병을 앓고 있고, 성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학대받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그들의 시련과 고통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것이 조금 좋아졌을 때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가? 설명하라. (55.1)
 2. 내가 실패와 어려움과 위기와 역경을 만났을 때 나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의기소침해지고 분노하였는가? 혹은 나는 “주를 찬양합니다”라고 소리쳤는가? 혹은 다른 방법으로 맞섰는가? 설명하라. (55.2)
 3.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요구를 지체함이나 심리 유보 없이 받아들여 주셨는가? 만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언제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인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가? 만일 다른 이유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을 느꼈다면 그것을 적어 보라. (55.3)
 4. 의심하는 것은 언제나 죄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인간 본성의 부분인 본질적 질문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의 답변은 야고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닌가? 당신의 답변의 이유를 설명하라. (55.4)
 5. 어떤 특별한 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보는가? 나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 더욱 안정적일 필요가 있는가? (56.1)
 ■ 말씀을 연찬함
 1. 성경 사전과 성경 백과사전을 사용하여 단어 분산이나 디아스포라를 살펴보라. 유대인의 흩어짐이 궁극적으로 기독교 복음의 전파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관하여 두세 가지 점을 적어 보라. (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