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다. 대신에 전망과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혜의 습득이다(
1:5). 물론, 이 지혜는 현대의 어떤 철학적 공론이나 메마르고 지적인 학식이 아니다. 야고보는 아마도 현대 철학적 공론과 밀접한 지혜에 대한 헬라적 이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토아 학파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지식으로 지혜를 정의했다. 그들에 의하면, 지혜는
“과학”이었다. 반면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초기 히브리 사람들과 같이, 지혜는 공론이 아니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야고보는 마치 그의 앞에 있었던 지혜로운 작가들(현자들)의 지혜와 같이, 생애의 사역에 관련된 것으로 지혜를 보았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가장 방대한 지혜서에 있는 첫 잠언에 의해 주어진 의미이다:
“지혜와 훈계를 얻기 위하여, 통찰력에 대해 이해하기 위하여, 훈련되고 신중한 생애를 획득하기 위하여,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
잠 1:2, 3. 지혜의 도덕적 유익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잠언 2장,
3장과 비교하라). 고대의 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2:6). 야고보는 분명히 헬라적이 아닌 유대적인 범주로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지혜를 위하여 하나님께 요구하도록—끊임없이 요구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헬라 문법은 지혜를 위한 요청은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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