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구절에서 아직도 한 문제를 남겨 놓았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을 이방에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기록하였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디아스포라로 번역된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이것이다: 디아스포라는 누구인가? 이것은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던 유대인에게 사용되던 전문적인 용어이지만, 나중에는 이 땅에서 이방인이자 외국인으로서 그들의 위치를 돋보이게 했던 1세기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기도 하였다(벧전 1:1; 1:17; 2:11; 히 11:13; 13:14). 베드로의 첫 서신처럼 야고보서는 그 은유적 감각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 수신자는 정확히 말하면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신자들—참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이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심한 종교적 박해로 인하여 그렇게 흩어진 것이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베드로전서가 그 종교적 박해 상황을 기록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전서와는 다르게 야고보서에는 종교적 박해의 증거가 없다. (45.3)
 우리가 디아스포라라는 이 단어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베드로전서에서 사용된 방법과는 야고보서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는 그것이 헬라어의 정관사를 가지고 있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관한 언급으로써 독립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베드로전서에서는 관사가 없으므로 후기의 전문적인 기독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46.1)
 유대인의 분산이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이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를 하는 동안 포로로 잡히게 된 시기인 B.C. 9세기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상당이 주목할 만하다(왕상 20:34, 35). 그러나 첫 번째 대규모의 디아스포라는 B.C. 722년에 있었는데 그때 앗시리아인들은 북방 이스라엘을 패배시키고 그 도성과 사마리아를 파괴시키고 그 열 지파에 속해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갔다(왕하 17:23; 대상 5:26). (46.2)
 두 번째 대규모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은 느부갓네살이 남방 유다를 정복하여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가장 뛰어나고 명석한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데려갔을 때 일어났다(왕하 24:14-16; 시 137과 비교하라). 세 번째 강제 이주는 B.C. 63년 로마 황제 폼페이가 예루살렘과 유대인을 정복하고,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로마로 데려갔을 때 있었다. (46.3)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전쟁을 원인으로 하는 강제 이주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떠났는데 그것은 그들이 조국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특별히 두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는데 북쪽으로는 시리아였고 남쪽으로는 아프리카-특별히 A.D. 1세기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있었던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였다. (47.1)
 만일 야고보가 이러한 개념 속에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서신은 그가 살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팔레스타인 밖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를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유대인으로 한정시키는 생각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 내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증거가 있다. 사실상 팔레스타인 내에 있었던 매우 드문 수의 유대인들을 흩어진 무리로 볼 수는 없다. 더 나아가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라고 오순절에 대해 언급한 사도행전 2장이 증거인 듯이 보인다. 많은 언어 집단을 나타내는 다양한 국가들의 명단이 8절부터 11절까지 이어지고, 6절은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모국어로 각 사람이 들었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흥미롭게도 예루살렘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조차도 그들 자신의 구별된 공동체와 그들 자신만의 회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회당 비명에 의해 증명된다(Maynard—Reid, “Poor and Rich,” 127을 보라). (47.2)
 비록 “이방에 흩어져 있는”이라는 문구가 그것의 독립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유대인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야고보가 우선적으로 그가 살아왔고 그와 친근한 곳이었던 팔레스타인 내에 있는 공동체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본다(그리고 아마도 시리아일 것이다—왜냐하면 실제로 고대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황에 관한 기록이나 사회적 배경을 서술한 문구는 저자가 개인적으로 그 묘사되어 있는 상황과 싸우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그 배경을 서술하는 자세는 그와 그의 독자들 모두가 그 현장의 일부임을 증명하고 있다(1:9-11; 2:1-7; 4:1-6, 13-17; 5:1-6). (47.3)
 그것은 또한 야고보가 그들의 역사적 상황을 상기하여 “디아스포라”인 그의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그들의 자유의지로 외국에 나가 흩어져있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 많은 분산은 이상적인 환경에 기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분산은 고통과 관계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져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야고보의 공동체는 아마도 저자가 의도했던 연관성과 재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48.1)
 패배에서 승리로 돌아섬
 야고보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인생이 다양한 시련의 이야기임을 인정했다(1:2). 시련은 그들이 처한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시련이다. 그것은 수많은 색상으로 얼룩진, 다양하고, 복잡하고, 난해한 것들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할 수도 있고 쉽게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것은 시련이다. 우리 중에 시련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이상적인 상태는 행복, 편안, 안정, 최대의 안전 중에 있다—기쁘고 방해받지 않는 평안함!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모두 매일의 시련에 직면한다. (48.2)
 신약에서 “시련”으로 번역된 단어는 peirasmos이다. 그것은 “시험”을 번역한 단어와 같다. 오직 문맥으로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외적인 고통(시련)인지 혹은 죄에 대한 내적인 유혹(시험)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야고보는 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다루고 있다. 내적인 욕망인 시험은 13-15절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장이 시작되는 바로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많은 종류의 시험에 대해 다루었고, 그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시련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야고보의 공동체 속에서,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재난(1:27; 2:1-6; 5:4), 질병(5:14-16), 인간관계의 긴장(4:1-12)을 포함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고통은 매일의 일에 대한 압력, 결혼, 가족에 대한 의무, 심각한 질병, 재정적 위기,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박해, 그리고 어떤 비극적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이라도 눈물과 고통과 땀을 가져온다. (48.3)
 우리 모두를 위하여 야고보는 상당히 현질적인 이상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말한다: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그가 형제요 자매로써 편지를 쓴 그들을 향한 그의 음성에는 따뜻함이 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독자들과 함께 느끼는 협력과 일치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그가 그들이 많은 시련을 만나게 되는 어떤 때이든지 온전히(모두, 완전히, 더 이상 없게 그러나 섞임이 없이) 기쁘게 여기도록 그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험할 때에 만, 그들의 고통이 우리에게 체현될 때만, 우리는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용기를 줄 수 있다. (49.1)
 지금, 야고보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시련을 찾고 재난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서 순교의 공포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나 모든 것에서 절대적 선함을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사람을—pollanish 사람의 한 종류—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부자연스러운 만족을 추론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시련을 즐기지 않는다. 사실, 우리도 시련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본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다. 그들에게 그는 “시련은 온전한 기쁨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그들에게 사물의 밝은 면을 바라보고 그들의 시련을 가장 최상의 선함—“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49.2)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유사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49.3)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당한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실패를 승리로 돌이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고 기록하였을 때 그것을 이해했다. (50.1)
 시험과 시련, 슬픔과 실망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회이다. William Barclay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를 떨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실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실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나약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야고보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고 말했을 때(1:3), 그는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시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시련은 이미 현재 있는 믿음(2:19에 나타난 믿음을 해석할 때의 지적인 동의가 아닌 2:1에 나타난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50.2)
 시험이나 시련을 통하여 성취되어지거나 결과로 나타나는 인내나 견딤은 전통적으로 참음, 즉 다시 말하면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자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여기에서 능동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5:11에 언급되어 있는 욥의 인내에서 증명된다. 외경 마카비 4서에서 그 동일한 단어가 궁극적으로 시리아 침략자들과 압제자들과의 투쟁에 도움을 주었던 영웅들의 어머니의—그녀의 아들들과 엘리에셀— 용기와 인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50.3)
 마카비 4서는 우리의 개신교 영어 정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구약의 헬라어 번역—70인역(혹은 LXX)에는 부록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여기서는, 야고보가 그 단어를 LXX에 있는 다른 어떤 책보다 그 책에서 더 자주 나타난 “인내”(hupomone)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들과 엘리에셀의 이야기는 그 단어의 의미를 조명한다. 그 사건은 시리아(혹은 셀류시드)의 폭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B.C. 2세기에 있었다. 유대주의를 파괴시키고 그것을 헬라문화(헬레니즘)로 대체하는 그의 결심으로, 그는 구약성경을 읽기, 안식일 지키는 것, 할례를 금지시켰다. 그는 심지어 성전의 큰 제단 위에 돼지를 제물로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많은 유대인들에 의해 저항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잔인한 통치자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마카비 4서는 제사장 엘리에셀(5:1-7:23), 그 일곱 형제들(8:1-14:10), 그들의 어머니(14:11-18:19)의 고문과 순교의 이야기를 말한다. 고통과 죽음에 관한 이 묘사에서 저자는 포악한 왕에 대한 이 순교자의 용기와 인내와 저항을 찬양하며, 그것이 급격하게 안티오커스를 패배하게 했다고 본다. 그는 “그들의 인내로 그들은 폭군을 정복하였고 그들의 조국은 그들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4 Macc. 1:11). (50.4)
 그러므로 야고보는 마카비 4서의 그와 같은 영웅적인 참음과 인내를 일종의 투사로 부르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요동치 않는, 깨질 수도 없는, 지속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요청한다. 그 용어에는 시련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기를 요청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야고보는 고통과 압제에 굴복당하지 않도록 그의 독자들을 격려한다. 이것이 야고보서 1:2에서 언급한 온전한 기쁨을 가져오는 매력적인 반응이다. (51.1)
 이 능동적인 인내는 성숙과 완전의 수준으로 사람을 이끈다(4절). NIV에서 “성숙”(maturity)으로 번역된 그 단어는 전통적으로 “완전함”이다. 야고보는 완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용어이다. 다른 신약 성경에는 야고보서만큼 그것이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야고보는 죄 없는 완전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삶 속에 어떤 죄의 명백한 부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그 단어는 NIV가 그것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같이 성숙과 관계가 있다. 그 개념은 우선 원숙한 인간의 성품-사랑으로 증명되는 성품에 대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5:48에서 요구하시는 온전과 유사하다. 산상수훈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의 원수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5:43-48). (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