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한 문제를 아무도 모르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모르네
내가 당한 문제를 아무도 모르네
영광, 할렐루야!
(41.1)
 최근 수세기 동안에 아프리카 사람들만큼 고통과 고난을 당한 민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서반구에서 노예상들에게 팔려서 흩어지는 일을 당하였다. 그러나 카리브해, 남미, 중미, 북미에 있는 이 아프리카 노예들은 아무도 내가 당한 고통을 알지 못한다고 노래한 후에, “영광, 할렐루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련으로 이 민족은 야고보의 권면에 모델이 되었다. (41.2)
 거의 2000년 전, 야고보는 이방 민족(1:1)들 사이에 흩어져 그와 비슷한 심한 시련과 협박과 고난을 당했던 한 무리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이상적인 목사로서, 그는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인정해주었다. 그는 어떤 편지나 설교들이 무의미하게 다루어지고, 추상적인 신학과 교리적 주제들이 그들의 현재의 필요와 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민감해졌다. 그는 가렵지 않은 곳을 긁어주었다. 그들의 절실한 필요는 그들의 현실적 고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시련과 유혹이 그들을 덮칠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41.3)
 이 편지 전체를 통한 여러 가지 방법 속에서 야고보는 그의 공동체가 직면한 고통과 시련을 다루는 데 있어서 사전 행동(proactive)뿐만 아니라 사후 행동(reactive)에 대해서도 시도하였다. 여기, 그의 문서 처음부터 그는 사후 행동과 사전 행동을 서로 조화시키고 있다. 그는 그의 독자들이 그들의 시련 속에서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2:2-4), 지혜를 얻음으로써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균형진 시각과 방향을 얻게 한다(1:5-8). (41.4)
 ■ 말씀에 들어감
 야고보서 1:1-8을 두세 번 정도 읽으라. 만일 가능하다면 두세 가지의 서로 다른 번역 성경을 읽으라. 당신이 그것을 몇 번 읽은 후에 다음에 나오는 질문들을 다루어 보기 시작하라. (42.1)
 1. 만일 당신이 서로 다른 번역으로 된 성경을 접할 수 있다면, 그 번역의 차이점들을 당신의 노트에 기록하라. 이러한 차이점들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하도록 당신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42.2)
 2. 야고보가 “이방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로 편지의 수신자를 기록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그 문구가 문자적, 영적, 비유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명하라. (42.3)
 3. 산상보훈(마 5-7)을 읽어 보라. 당신의 노트에 야고보서 1:2-8의 구절과 비슷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태복음의 본문을 기록해 보라. (42.4)
 4. 지혜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른 성경 본문들을 확인하게 하는 성구사전이나 성경 관주들과 성경사전을 사용하라. (42.5)
 5. 당신은 왜 야고보가 의심하는 사람을 설명함에 있어서 바다 물결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였다고 생각하는가? 비유는 그런 사람들을 상상하는 당신을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는가? (42.6)
 6. 고난과 시련과 고통에 대한 야고보의 시각은 현실주의자인가? 아니면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 구절들에 대한 당신의 답변을 보충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43.1)
 ■ 말씀을 탐구함
 인사말
 서신의 저자는 자기 자신이 야고보(1:1)라고 신원을 밝힌다. 분명히,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명할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인지는 그의 독자들에게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만일 이 서신이 가장 먼저 기록된 신약성서 문서 중의 하나라면, 그 저자는 초기 교회에서 두드러졌던 두 야고보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예루살렘 공의회의 지도자이자 예수의 형제(갈 1:19)였던 것으로 보이는 야고보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초기 교회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에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실제로 그는 A.D. 44년 순교당했다. 대조적으로 다른 야고보는 A.D. 30—40년대에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높이 존경받았던 인물로 보인다. 아마도 이 후자의 야고보가 이 서신의 저자인 것처럼 보인다. (43.2)
 야고보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로 신원을 밝힌다(1:1). 비록 헬라어 doulos(노예, 종)가 절대적인 충성심과 복종심과 겸손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특권과 명예의 자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언급될 때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 용어에 대해서는 이 후자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모세는 신명기(34:5) 뒷부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불린다. 이와 같은 사용은 솔로몬이 출애굽에 나타난 모세의 통치권에 대해 언급할 때(왕상 8:53; 단 9:11의 다니엘의 기도와 비교하라) 그의 장엄한 기도에서도 발견되고, 하나님께서 말라기에 주신 마지막 기별 속에(말 4:4) 하나님께서 “내 종”으로 모세에 대하여 언급한 곳에서도 발견된다. 다윗 또한 유대 역사에 있어서 종으로 언급된 중요한 인물이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언약을 다윗과 맺으셨고, 그의(다윗의) 집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은 다윗을 “내 종”(삼하 7:5, 8; 또한 렘 33:21을 보라)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에스겔은 새 “평화의 언약”(“영원한 언약”)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다윗의 “종 됨”(servanthood)을 강력하게 호소한다(겔 37:24, 25). 일반적으로 선지자는 구약에서 드물게 “목이 곧은 백성”(렘 7:25, 26)에게 기별을 갖고 보냄을 받은 종으로, 그러한 백성(렘 44:4)에 의해 미움을 받는 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선지자/종에게 당신의 계획(암 3:7)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지자나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방향에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43.3)
 그러나 야고보는 자기 자신을 또한 그리스도의 종(1:1)으로 보았다. 서론에서 주목한 바와 같이(17쪽을 보라), 아마도 이 구절은 서신의 기독교적 근원에 대하여 후세의 지도자들을 확신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주권에 대한 저자의 헌신에 대하여 그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어떤 제자나 그리스도인 편집자에 의해 신성한 인도하심 아래에 후대에 삽입된 것일 것이다. 영감은 그러한 편집상의 추가를 허락하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된 본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야고보 자신이 이 말을 기록한 것이라면 그는 여기에서 그 자신을 “그리스도인”(아마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후에 경멸적인 의미로 주어진 용어—행 11:26을 보라)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 자신을 구약의 전통과 그것의 위대한 지도자들과 선지자들 속에 견고히 서있는 한 유대인으로써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인 예수를 따르는 자로 보았던 것이다. 바울은 “종/노예”가 아닌 거의 언제나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불렀던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롬 1:1; 갈 1:10; 빌 1:1). 흥미롭게도, 디도서 1: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로 나타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의 인사말에서 이중적으로 종의 개념을 결합(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하여 사용하는 유일한 신약의 저자이다. (44.1)
 다음에 야고보는 그의 청중의 신원을 밝힌다. 그의 독자들은 “이방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이다. “열두 지파”를 구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견해가 있다. 그것은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니라 —어떤 인종적인 이해— 기독교 교회인 어떤 은유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야고보서가 1세기 후반이나 아니면 적어도 바울의 기록들 후에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은유적인 견해를 가진다.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기독교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9:24-26에서 선지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교회로 예언하여 인용하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브라함의 자손(3:7-9), 하나님의 이스라엘(6:16; 벧전 2:9, 10; 히 3:6)로 불리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스라엘의 옛 종교에 속해있는 모든 것들은 히브리서 전반을 통하여 이제 더욱 나은 길인 기독교 교회에 속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논의된, 이스라엘의 영적인 “열두” 지파—그 교회에 그의 편지를 적어 보낸다. (45.1)
 그러나 다른 성경학자들은 야고보가 실제의 유대인에게 글을 썼고, 따라서 “열두 지파”라는 용어는 문자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여긴다. 어떤 해석학자들은 기독교인 유대인으로 그 구절을 한정시킨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은 야고보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관심 깊은 공동체에 있는 다른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 양자 모두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문서를 기록하였음을 주장한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그를 따르는 고통당하는 유대 민족에게 이 글을 썼다. “열두 지파”로 그들을 기록함으로써 그는 분명히 그 당시에 유대인의 신원을 밝히는 대중적인 방법을 따랐던 것이다(행 26:7). (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