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Ⅰ 부 사무엘: 왕도 없고 여호와의 말씀도 희귀함 (삼상 1-7) 제 1 장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지 않은 때에 자라남 (삼상 1-3)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유화의 여지가 없으며, 둘 중 하나가 더 낫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2:17). 여러 해 동안의 보상되지 않은 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성소와 왕과 독립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저자는 깊이 느끼고 있다. 저자에게는, 엘리의 집이 왕정과 민족의 실패를 상징하였다면 엘리의 두 아들들의 죄는 그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러한 파괴적 재난을 불러온 일을 회칠할 수 없다. (49.2)
 사무엘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국가들처럼 되기 위하여 왕을 원한다고 했을 때에(8:5), 사무엘은 카리스마적 사사들과 세습적인 왕가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제사장직은 이스라엘에서 늘 세습적이었지만, “정치적” 지도자직은 그렇지 않았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다가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은 특출한 예외다(삿 9). 그러나 사무엘이 사사 겸 제사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카리스마와 세습 사이의 구별은 모호해져서 자신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다(8:1). (49.3)
 사울과 다윗이 연속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었지만,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은 사울이나 심지어 다윗도 아니고 바로 사무엘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한 참된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진하게 남겼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실패한 왕정의 관점에서 저술하면서 사무엘을 이상화하여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참으로 맞는 사람이라고 슬며시 그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49.4)
 사무엘을 이상으로 제시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드러난다. 사무엘의 부모들은 여호와께 바칠 아들을 얻기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 잘 견뎌내는 경건한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의 부모들과 사무엘 자신이 그 당시의 횡행하는 악에 맞서 굳게 서며 하나님께 신실히 봉사하기로 작정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던 악한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매년 그곳의 예배와 희생을 위하여 갈 때 자기 가족이 정기적으로 순례길에 동참하게 하였다(1:3). 한나의 깊은 경건은 성전에서의 기도 속에 나타난다. 그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엘리를 통하여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1:9-17). 마지막으로, 사무엘은 약속된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아직도 매우 어렸을 때, 그의 부모가 그를 실로로 데려갔으며, 한나가 약속한 대로 엘리의 슬하에 그를 두었다(1:19-28). (50.1)
 그 시점으로부터 독자는 사무엘이 키가 자라가며,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에 대한 모든 언급은 그 당시의 타락상, 특히 엘리의 악한 아들들의 생애와 습관 속에 나타난 모습과 대조된다. 이 효과를 창출하기 위하여 이야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50.2)
선한 사무엘 2:11 사무엘이 엘리의 문하생으로 여호와 앞에서 봉사함
악한 아들들 2:12-17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 제도를 더럽힘
선한 사무엘 2:18-21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봉사하고 그 앞에서 성장함
악한 아들들 2:22-25 엘리의 아들들이 아비의 책망을 무시하고 부도덕한 일을 계속함
선한 사무엘 2:26 사무엘은 “자라며 여호와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음”
악한 아들들 2:27-36 “하나님의 사람”이 아들들을 잘 제어하지 못함에 대해 엘리를 책망함
선한 사무엘 3:1-10 사무엘은 충실히 성소에서 일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음
악한 아들들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엘리와 그 집에 다가올 심판에 대해 말씀하심
선한 사무엘 3:19-21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심; 온 이스라엘이 그가 선지자임을 앎;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심
(50.3)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사람들이(3:20)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 약속의 아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어려운 상황과 산당에서의 악에 대항하여 그는 자신의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2:26). (51.1)
 그러나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이상적인 인물이라지만 그의 이름은 사무엘서에서 풍겨나는 왕권에 대한 긴장을 반영하는 이중적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이는 내가 그를 주께 구하였다”는 뜻으로 사무엘이라고 지었다(1:20). 주석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요구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사무엘의 이름의 기원보다는 사울의 이름의 기원을 더 잘 설명한다. 사무엘이란 이름은 “듣는다”(“하나님께 들려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와 더 잘 연결된다. 그러나 사무엘상의 앞 장들의 이야기는 “요구한다”(사울)는 단어로 말놀이를 하고 있다. 랠프 클라인(Ralph Kle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독자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연이어 말놀이를 하는 것에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 사울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이면서 기름을 붓는 자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요구를 받았으며(‘Sauled’)(1:20), 그는 다시 하나님께 도로 바쳐진(‘Sauled’) 바 되었다(1:28). 사울은 참으로 이스라엘에게 중요했지만, 진정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울이었고, 그의 이름은 사무엘이었다”(Klein, 9). (51.2)
 하지만, 만일 사무엘이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그의 생애는 왕가를 괴롭혔던 같은 풍자들을 반향(反響)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고자 왕을 구했던 것처럼, 한나는 다른 여인들과 같이 되고자 아들을 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한나의 요구도 들어주셨다. 그리고 왕정과 사무엘의 봉사가 이스라엘에 놀라운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끝에 가서는 둘 다 넘어졌다. 그리고 앞 장들에서부터도 이 이상적인 사무엘은 하나님의 강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한 확고함으로 항상 서 있지 못한다. 이 세 장에서 우리는 주로 한나의 음성을 듣고, 그 다음으로는 엘리 그리고 엘가나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씁쓸한 브닌나나 엘리의 아들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리고 오직 한 번 우리는 사무엘의 소리를 듣는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3:10). 엘리가 넣어준 말로 응답할 때에 “여호와”를 빼먹은 것은 필사자의 실수인가? 왜 이 어린 소년은 그 이상의 내용을 엘리에게 말하기를 그렇게도 두려워하였는가?(15절). 그러한 언급들은 사무엘이 결국은 매우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52.1)
 첫 세 장을 지나면, 법궤가 빼앗긴 일이 사무엘의 언급 없이 서술되는 것을 본다.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 7개월을 지내는데, 역시 사무엘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비나답의 집으로 와서 거기서 20년을 지냈다(7:2). 사무엘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그는 다시 등장한다(2, 3절). 이 약속의 아이는 하나님의 이상이 어둠에 빠지도록 한 왕들처럼 연약하였는가? 백성들은 사무엘이 충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다(8:3). 어쩌면 그들은 자기 아버지보다는 엘리의 아들들을 모본으로 삼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의 아버지도 오시범(誤示範)이었는가? (52.2)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언급들은 사울부터 다윗으로 전환하는 일에서 사무엘이 한 역할과 비교할 때에 매우 미묘하다. 그러나 예민한 독자들은 그들이 왕권 자체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과 같은 사무엘의 질문을 여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 (53.1)
 비록 사무엘의 발이 진흙탕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것이 사무엘상 첫 석 장 속에서 주어진 두드러진 인상을 흐리게 할 수 없다. 사무엘의 말년에 관하여 어떤 비평을 하든지, 그의 어린 시절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깊이 헌신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건한 삶에 무시무시하게 적대적인 악한 환경 속을 지나면서 그가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2:26). 사무엘은 참으로 거룩하지 않은 때에 자라나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53.2)
 왕정으로 가는 길인가?—요약
 사무엘상 1-3장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꼴지었던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에, 이에 관하여 이야기 한 약 500년 뒤의 선지자의 음성을 들어보아야 하리라. 이 이야기들은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소화되고 다윗의 위를 이은 왕이 보좌에서 찢겨지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겠는가? 성전이 폐허 속에 놓이고, 언약궤가 사라진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들은 어떤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53.3)
 이런 질문들은 왕정의 문제에 관심을 쏟게 한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왕정이 끝나고 아직도 왕정이 회복되지 않은 때에 살았고,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이스라엘 왕들의 부침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왕정은 왜 실패하였는가? 설립과 실패를 어찌 다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는가? 만일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면, 그분의 백성들은 그것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53.4)
 눈에 선한 왕정의 문제와 연결하여 더 깊이 파고드는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최상권과 사람의 자유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스스로를 파괴할 자유를 허락하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아직도 그들의 주이시며, 여전히 우주의 주인이신가? 이런 문제는 그 당시에도 어려운 문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54.1)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어떤 때는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더 많은 경우에는 반어적으로 슬며시 이야기하였다. 이 장의 결론 부분인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사무엘상 1-3장을 보면서 이야기 중에서 왕권의 문제를 어떻게 저자가 강조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더 광범위한 내용—매우 교묘하며, 기교가 높고, 자극적인 내용—은 로버트 폴친(Robert Polzin)의 사무엘서(Samuel), 18-54에서 찾아볼 수 있다. (54.2)
 이미 암시된 대로 사무엘과 엘리의 집은 왕정의 운명과 비운을 미리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첫 무대는 아들을 바라는 한나의 고뇌 어린 소원으로 시작한다. 한나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아이가 많은 대적 브닌나에게 조롱을 받았듯이, 이스라엘은 주변 가나안 국가들은 왕이 있는데 자기들은 없으므로 조롱을 받는다고 느꼈다. 아들을 달라던 한나의 간원(1:11)은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8:5)라고 사무엘에게 말한 장로들의 간원과 같다. (54.3)
 성경이 여호와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다고 두 번이나 말하지만(1:5, 6) 그분은 고뇌 어린 간청에 응하시고 그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녀는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11절)는 맹세를 하면서 아들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런 맹세는 값비싼 것이다. 입다가 암몬 사람들을 이기고 싶은 욕망 때문에 서원하였을 때, 그것은 자기의 딸을 잃게 하였다(삿 11:30, 31, 35-40). 한나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의 왕을 구하는 비극적 요구를 미리 전하는 복선이었는가? (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