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Ⅰ 부 사무엘: 왕도 없고 여호와의 말씀도 희귀함 (삼상 1-7) 제 1 장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지 않은 때에 자라남 (삼상 1-3)
 엘가나의 두 아내에 관한 첫 언급에서 한나를 브닌나보다 먼저 말한 것은 그가 첫 부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성경은 침묵을 지키는데, 유대 전통은 아브람과 사래가 자식 없이 가나안에서 10년을 지내고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말한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도 10년간 자식 없이 지내다가 한나가 우겨서 엘가나가 브닌나를 취한 것이라고 말한다. (43.1)
 유대의 전통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많이 늘여서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한나와 브닌나 사이의 긴장이 사래와 하갈 사이의 긴장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심했다는 것을 드러낸다(1:6; 창 16:1-4). 아브람은 하갈을 내보냄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엘가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둘째 부인이 계속 함께 머물렀고 한나의 생활은 끊임없는 고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뇌가 한나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아 구하게 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43.2)
 한나는 고민으로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나 잘 견뎌내고서 제사장 엘리가 보는 데서 기도하러 성소로 들어갔다. 그녀는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생각하였고, 여호와께서 아들 하나를 주시면 영원히 다시 돌려 드릴 것이라고 약속하였다(1:11). 가정의 약점이 많은 엘리는 우선 나무랐으나 후에 그녀를 축복하였다(14, 17절). 그러나 그의 축복의 말은 그녀의 요청의 핵심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43.3)
 엘리와 한나의 대화는 심각한 풍자(諷刺, irony)이다. 기도와 술 주정을 분간할 수 없었던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한나는 자기가 악한 여자(16절, 문자적으로 “벨리알의 딸”)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성경이 2:12에서 우리에게 알려 줄 것처럼, 벨리알에게 속한 것은 한나가 아니라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였다. 엘리의 자손이 바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다. 그때까지도 엘리는 한나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택한 도구였다. (43.4)
 이제 한나의 삶에 새로운 기쁨이 감돈다. 그녀는 먹고 또한 경배하였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여호와께서 그녀를 기억하셨”고(1:19),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녀와 엘가나가 엘리에게 나아와 어린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봉헌하려고 했을 때에, 엘가나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나 1인칭 복수가 아니라 1인칭 단수로 말한 것은 한나였다(24-28절). “내가 기도하였더니...,”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1:27, 28). 해마다 가족들이 실로를 찾을 때면 새 옷을 아이에게 가져다 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2:19). 그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마지막 이야기는 엘리의 기원대로 하나님께서 바친 아들 대신에 그에게 여러 자식을 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다(21절). (43.5)
 이 아름답고 부드럽기만 한 한나의 모습 뒤편에 있는 씁쓸함은 2:1-10에 기록된 그녀의 기도 시편 속에서 나온다. 비록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와 영적인 주석에서는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1절)라는 구절을 생략하거나 미화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의 진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진상은 성경의 시편들이 이상적인 경험들을 반영하기보다는 기도 모음집 자체가 이상적인 것으로 영적인 성장의 매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성경의 이곳과 다른 시편들과 기도들에 표현된 원수들에 향하여 으스대는 것(예컨대, 삼하 22:35-43; 시 17:13-15; 18:34-42)은 여호와께서 큰 축복을 주신 사람들의 생애라 할지라도 죄로 더렵혀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44.1)
 그러나 이 기도시를 현 문맥을 떠나서 본다면 훨씬 더 군사적인 내용이며 민족적인 내용임을 알게 된다. 왕과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결론부의 언급(2:10)은 그것이 왜 다윗과, 궁극적으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여겨졌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게다가, 2:1은 여성 단수 원수(브닌나)는 언급하지 않고, 남성 복수 “원수들”(“enemies”)을 언급하며, 2:3이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대항하여 말할 때는, 남성 복수 청중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 “전에 수태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2:5)라는 한나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자녀는 사무엘과 다른 5명, 즉 도합 6명이기 때문이다(21절). (4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한나의 상황에 직접 적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하면 한나와 브닌나의 사적인 적대감이 더 진하게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 전통은 브닌나의 멸시와 한나의 뻐김에 대하여 불편한 생각을 드러내며, 브닌나의 의도는 결국 한나가 자녀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도록 부추긴 것으로 이해하여 칭찬 받을 만한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5절)에 기초한 이야기에서처럼 경쟁심이 더 고조되는 것은 더 두드러진 특색이다. 유대의 전설에 의하면, 한나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브닌나는 두 자녀를 잃었고, 그래서 결국 여덟 자녀가 죽었다고 한다. 한나가 그녀를 위하여 드린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 두 자녀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45.1)
 기독교인들은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의 이상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죄의 흔적을 본다. 예수님을 우리의 교사로, 모본으로 영접하는 우리들은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듣는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리고 십자가에서부터 원수들을 위하여 드린 기도 속에서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실행하신 것을 본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러나 우리가 그 수준에 못 미치면 한나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그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힘있고 효과적인 도구였다. 그녀와 엘가나는 가정의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를 세상에 낳게 하였다. 그녀는 그를 여호와께 바쳤고, 그는 평생을 그 봉헌에 충실하게 살았다. (45.2)
 엘리
 성경은 제사장 엘리에 관한 좋은 소식을 그의 생애를 갉아먹은 악을 상기시키는 이야기 속에 넣음으로 그의 삶을 비극적으로, 또한 처량하게 묘사한다.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홉니와 비느하스의 아버지로 등장하고(1:3),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빼앗긴 소식을 듣고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4:18). (46.1)
 후세대 사람들은 멸망한 예루살렘과 몰락한 왕조를 통하여 이 이야기들을 봄으로 엘리의 운명을 왕조의 운명을 상징하는 역사적 비유로 여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1:9에서 엘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보면, 히브리어의 “의자”“전”은 의미가 넓은데, 그것들이 “보좌”“왕궁”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왕조와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에 앉았더라”고 말할 때에 예루살렘 멸망 후의 히브리인 독자는 현재는 엘리의 집처럼 기능이 마비된 왕좌와 왕궁의 빈 메아리를 들을 것이다. (46.2)
 이 늙은 제사장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시력이 약하였다. 그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경건을 악한 술주정으로 보았다(12, 13절). 사실상 그의 눈은 그의 아들들의 지독한 악행을 보지 못하였다(2:22-24). 그는 모든 일을 거꾸로 하였다. 경건한 여인을 꾸짖어 “벨리알의 딸”처럼 느끼게 하였고, 정작 “벨리알의 아들”인 자기 자식들은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 엘리는 “눈이 점점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였다”(3:2). 그가 죽기 직전에는 그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였다(4:15). (46.3)
 제2장에는 엘리의 아들들에 대한 비난이 날카롭게 나타나는데, 그는 그의 거룩한 책임과 그의 미래를 완전히 놓쳐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봉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못살게 하였다(12-17, 22-25절).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25절).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27절)이 엘리에게 제사장직이 그의 집으로부터 빼앗김을 당할 것을 알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반영할 “충실한 제사장”을 지명하시고자 하셨다(35절). 잘 아는 바 성전의 대화에서 처음에는 엘리와 사무엘이 말하였고, 마지막에는 사무엘과 여호와의 대화에서 이 모든 것의 요점은 엘리의 집에 대한 심판이었다: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3:14). (46.4)
 그러나 엘리의 오매불망(寤寐不忘)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들을 잘못 기른 것에 대한 여호와의 신랄한 꾸중에도 불구하고(3:13), 성경은 그 사람의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여러 사건들이 그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 한나가 술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는 곧 누그러져 그녀의 요청에 축복을 더하였다. 한나와 엘가나가 그들의 아이를 엘리에게 맡기려고 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고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6)는 사실 때문에 확실히 엘리는 점수를 더 얻는다. 그러나 엘리의 긍정적인 면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은 사무엘이 성전의 어두운 방들을 지나서 눈이 어두운 엘리에게 거듭거듭 달려가는 장면이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도 숨김없이 말하라고 엄히 사무엘에게 말했지만(3:17), 그 소년을 취급하는 모습은 부드러운 할아버지와 같으며, 그 부드러움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단순성에 의하여 더 부각된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한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3:18). (47.1)
 저울에 달아보면 엘리는 참으로 비극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질문한다: “어린 사무엘을 그렇게 부드럽게 돌본 엘리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아들들의 교육을 그렇게 망쳤을까?” 이 질문은 자식들이 곁길로 나간 세상의 모든 경건한 부모들을 아직도 괴롭히고 있다.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의 비극적인 투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상 이 문제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루시벨(Lucifer)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에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인과 결과, 훈련과 자유에 관하여 생각한다. 왕조 역사의 마지막에 경건한 개혁자 요시야 왕을 알던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딜레마가 있었다. 그가 선한 일을 많이 한 후에 바로느고와 싸우다가 어이없이 죽었다(왕하 23:29, 30). 그러므로 엘리의 집은 비운의 왕조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받아들일 만하다. (47.2)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
 성경은 엘리의 악한 두 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제사장의 종이 그들을 위하여 생고기를 요구한 대목에서 비로소 알 수 있다: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2:16). 비록 영감의 저자가 이 악인들의 말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아들들을 정죄하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서슴없이 높였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12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많이 제시한다. 생고기를 요구하는 불법적인 일 외에도(13-17절), 그는 예배하는 여인들과의 성적 범죄와 엘리의 꾸지람을 말하며(22-25절), “하나님의 사람”의 엘리에 대한 뼈아픈 견책을 기록하고(27-36절), 어린 사무엘에게 한밤중에 주어진 무서운 선언, 즉 엘리의 집의 죄는 어떤 것으로도 속죄할 수 없다는 선언을 기록한다(3:11-14). (48.1)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은 사무엘상이 엘리의 아들들의 심판을 선언하는 방법에 대하여 적어도 한 경우에 불편한 감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악행에 대한 엘리의 책망이 허사로 된 것을 기록한 후에, 저자는 그들이 왜 반응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려고 뜻하셨음이었더라”(2:25). 그 심판이 아무리 무섭게 들릴지라도 그들의 더러운 죄를 참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라는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탐욕, 권력 남용, 부도덕한 성생활 등으로 얼룩진 악행의 긴 기간을 시사한다. 동정심이 별로 없는 관찰자는 그 형편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일찍 개입하셨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인내의 하나님이다(벧후 3:9). 그러나 죄 가운데서 버티는 자들에게는 정산의 날이 반드시 온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고 슬픈 음성으로 선언하신다. (48.2)
 유대의 전통은 엘리의 아들들의 모습을 유화시킨다. 성경에 나온 홉니와 비느하스가 예배드리러 온 여인들에게 죄를 저질렀다는 기록은 잘못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여인들을 좀더 지체시켜 그들의 가족에게로 속히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고 논박한다. 비느하스는 둘 중에 더 나았고 생전에 대제사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죄는 자기 동생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