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 부 하나님께서 압제를 지켜보심 (출애굽기 1, 2장) 제 1 장 하나님께서 압제를 지켜보심 (출애굽기 1, 2장)
 종종 어떤 이들은 하나 이상의 이름을 지니게 된다. 일례로서, 모세의 장인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일관되게 미디안의 제사장으로 불렸지만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출애굽기 2:18에서 그는 르우엘(“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다. 민수기 10:29에도 또한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출애굽기 3:14:18 그리고 18장에서는 이드로(“부요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민수기 10:29 그리고 사사기 4:11에서는 호밥(“사랑하는 자,포용하는 자”)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41.5)
 왜 그가 그토록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론이 분분 하지만, 실지로 그는 많은 이름을 지녔던 개인일 수 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경된 것과 같은 많은 개명의 실례들이 모세오경에 존재하며, 오늘날 사회는 복수의 이름뿐만 아니라 개명을 허용하고 있다. 실지로 2:18은 모세 장인의 아버지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또는 증조 할아버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41.6)
 다시 모세로 불리게 된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모세 자신도 그의 백성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압제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히브리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그의 백성이 장차 기이한 방법으로 구원받을 것과 같이 기이하게 보존된다. 그러므로 모세 자신의 생애는 그의 백성의 경험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았다.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과 같이 모세 또한 미디안 땅에서 일시적인 피난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42.1)
 모세의 경험은 세 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즉 그의 탄생(1-10절), 그의 피난(11-18절), 그리고 미디안에서의 생애(16-22절) 등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함으로 가득하며, 후에 있을 사건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첫째로, 모세의 탄생은 장차 이를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 모세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역설적 사실로 비추어졌음이 분명하다. 애굽인들에게는 신성한 존재인 나일강에서 모세는 그의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이와는 반대로, 나일강이 모세의 생명을 구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압제자의 딸이 모세를 동정하여 그를 입양하게 되며, 또한 모세의 누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젖 먹여 키우는 대가로 삯을 받게끔 일조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기묘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바로에게서 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하시겠다는 예언이었다. (42.2)
 모든 사건의 시작은 신중한 단어의 선택으로 시작된다. 모세의 어머니가 “그 준수함을 보고”(2:2), 또는 문자 그대로 “그가 잘생겼음을” 알고 모세를 숨겼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보기에 좋았다는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구절들을 기억하게끔 한다(창 1:12, 18, 21, 25, 31).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이제는 그분의 백성을 구하시고자 하는 또 다른 훌륭한 창조를 진행하고 계시었다. (42.3)
 모세가 누운 갈대 상자는 일종의 “방주”였다. 이 단어가 사용되어진 성경의 유일한 곳은 노아에 관한 기사이다. 이 두 개의 방주는 모두 구원의 방주였다. 모세의 방주가 “갈대” 사이에 놓였다(2:5). 동일한 단어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해변 갈대로 등장한다. (43.1)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사건의 중대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듣는 이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셈족 사람들은 이러한 미묘한 종류의 비교를 즐겼다. (43.2)
 세 명의 현명한 여인들이 모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첫째로, 모세의 생모인데 그녀는 바로의 살인 명령에 도전하여 그의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하여 “나일 강의 방주” 계획을 꾸미게 된다. 둘째로, 모세의 누이로서 애굽의 공주와 대면하여 히브리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를 젖 먹이게 하는 착상을 한다. 세 번째로, 바로의 딸인데 그의 아버지의 살인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히브리인의 아이를 입양한다. 우리는 바로의 딸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입양한 아들에 관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43.3)
 라메세스에게는 59명의 딸이 있었으며, 라메세스가 그 당시의 바로였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모세를 구한 공주가 그의 딸이었는가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없다. 어떤 경우든지, 그녀는 대가족 출신일 것이며 그러한 배경이 모세를 보호하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다. 애굽의 기록을 살펴보면 애굽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이따금씩 바로 왕실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모세의 경우도 그렇게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43.4)
 만약에 우리가 이 3명의 여인을 1장의 산파들과 같이 분류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인들을 사용하시어 그분의 백성에게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주시는가에 대한 훌륭한 일련의 본보기일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43.5)
 두 번째 이야기로, 애굽으로부터 도망하는 모세의 이야기는 선택된 지도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모세의 생명은 그가 어렸을 때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 하지만 그가 성인으로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바로의 양자로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의 노예와 애굽의 감독자중 어느 집단에서 자신의 신분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겨난다. 본문의 기사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자기 형제들”(11절)로 간주하였다. 그의 몸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흘렀고 그 자신 또한 그들과 동일한 공동체의 한 개체로 간주하였다. 그는 그들을 방어하고자 기꺼이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이미 그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 무엇을 인지하고 있었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主宰)와 법관을 삼았느냐”(11절)라고 말한 히브리 형제의 은근한 비난은 그가 애굽인을 죽일 때는 주재(主宰)로서 히브리인들의 다툼에는 법관의 태도를 취하려고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43.6)
 그의 도피 이야기는 또 다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구속자 되시는 하나님, 거룩한 구속의 하나님에 대한 그분의 속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나 일을 서둘렀으며 그 일들을 그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애굽인들을 살해함으로서 구원을 시작하도록 명령하지 않으셨다. 시기와 방법은 모두 모세의 결정이었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다. (44.1)
 이후에 벌어지는 구약의 기사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그분께서 하신 언약의 성취를 위해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첩으로 얻어 하나님을 도와 약속하신 아들을 얻어보려 노력하였다. 야곱은 기만과 속임수로 장자권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기드온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함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비록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좌절하였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시기와 방법을 기다렸어야 했다. 구원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결코 인간적인 도구에 불과했던 그들이 성취할 수 없었다. 현명한 지도자요 군사적 전략가인 모세도 부드러운 품성의 목자가 되었어야 했다. 이렇게 준비되었을 때 그를 통하여 출애굽을 이루도록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세주와 구속에 관한 출애굽의 교훈을 알고 있는가? (44.2)
 세 번째 이야기는 미디안에서의 모세의 생애이다. 비록 그가 바로에게서 도주한 범법자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일족을 상면하게 된다. 그가 만난 일족은 제사장 가족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내와 아들을 얻어 정착을 하게 된다.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을 뜻하는 자신의 아들의 이름은 모세에게 있었던 사건들과 부합되는 상징적 이름이었다. 22절에는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라는 이름의 해석이 주어져 있다. 실지로 히브리어 동사는 과거 시제로서 글자그대로 옮기면 “객이 되었다”이다. 그 의미는 미디안이라기보다는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곳에서”를 의미하는 게르솜이라는 단어의 두 번째 부분이 증명하고 있다. 모세는 이제 그 자신이 미디안이 아닌 애굽에서 나그네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하나님과 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3:1-4:17).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모세와 같은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선포하신 자유의 땅이었다. 때가 되었다. 해방자가 탄생하여 가정을 꾸미고 해방자의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어디에 계실까? 무엇을 하고 계실까? 2장의 마지막 두 절이 이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45.1)
 듣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23-25은 매우 중요한 성경절이다. 결론과 도입, 전환, 그리고 요약이 하나로 뭉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으며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절이다. 특별한 관심을 가질 성경절이다. (45.2)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음역(音譯) 하면 이스라엘의 고역은 “수많은 날” 동안, 혹은 영어 성경 NIV가 번역한 것과 같이 “장기간”(long period) 지속되었다. 장기간의 힘든 고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탄식을 초래했다. 상기의 성경절은 탄식하는 이스라엘을 묘사하는데 생생하고 강력한 단어들을 사용하였다. 백성들은 “신음하고”(또는 “탄식하는”) 그리고 “부르짖고”(“소리치는” 또는 “외치는”) 있었다. 동일한 두 가지 뜻이 명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다(2:23b, 24). (45.3)
 백성들은 가슴에 맺힌 뼈저린 고통을 서로 나누게 되었고 마침내 절규하게 되었으며 그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었다. 탄식이라는 단어는 굶주린 짐승의 울부짖음(욜 1:18), 또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도성 이스라엘이 무너졌을 때 비통함을 적은 책 예레미야애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46.1)
 “부르짖다”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고통 가운데 탄식함을 또는 부르짖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움을 구하는 의미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탄식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을 때는 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Botterwek and Ring-gren의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vol.4,121 참조).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이 성경절이 분명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응답하시었다. (46.2)
 이스라엘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기술은 애굽 종살이의 결론적 종결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뒤따라 있을 구원의 도입부로서, 상기의 성경절들은 압제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시련이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또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존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주목해 보자. (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