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5. 엘 샷다이—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능력이 충만하신 이)
 이 이야기의 내용과 배경은 엘 샷다이 란 이름의 의미 심장한 뜻을 뚜렷이 드러낸다. 이스라엘은 원수의 마수 앞에 취약성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순간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 위로와 확신임을 정확히 아시는 엘 샷다이 는 돈에 팔린 선지자로 하여금 희망을 선포하는 말을 하게 만드신다. 선지자는 멀리 시내 사막 너머 동쪽 하늘에 나타난 베들레헴의 별을 본다. 그것은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후 메시야의 오심과 영원한 평화를 알리는 징조로 동방 박사들의 눈에 띄어 그들을 구유와 구원으로 인도한 바로 그 별이었다. 엘 샷다이 의 팔은 어디서나 당신을 신뢰하는 자녀들을 품에 안으신다. (88.1)
 나오미와 샷다이
 나오미는 더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여러 해 전 그녀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두 아들(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희망에 들떠 베들레헴을 떠나는 모험의 길을 택했었다. 조상이 물려준 땅을 버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약의 땅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원수 모압 땅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거기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녀의 두 아들이 “불신자” 타국 여자들과 혼인하는 것을 슬픈 눈으로 보아야 했고, 그 후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어 타국 땅에 묻히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외로이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서서히 이제 이방 모압 땅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음을 깨닫고 골똘히 귀향을 꿈꾼다. (88.2)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며느리들을 불러 앉히고 자기의 귀국 결심을 말하고 며느리들에게는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오르바는 곧 떠나갔으나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갈 결심을 굳히고 시모의 하나님, 시모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결심를 밝힌다. 그래서 이제 두 과부는 여러 해 전에 떠나온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을 향해 귀향 길에 오른다. 고향 땅에 당도하자 나오미의 옛 친구들은 그녀를 반기며 환영하나, 나오미는 엘 샷다이 께 버림받고 푸대접받는 신세를 한탄한다(룻 1:20, 21). 그러나 실은 귀국 후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하나님은 그녀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 (88.3)
 이미 말한 것처럼 샷다이 는 구약에 도합 48번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중 31번이 욥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부장(家父長) 욥은 없는 것 없이 부유하고 행복한 부자로 물질적으로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런 불편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불행을 당해 그는 갑자기 모든 소유를 잃고, 심지어 자녀들과 건강마저 잃는다. 궁지에 몰린 그는 거듭 거듭 엘 샷다이 를 부르며 그의 도우심과 위로를 간구한다(참고 욥 5:17; 8:5, 6; 22:23, 25, 등). 욥은 깊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전능자가 때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신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다. 그래서 그는 본의 아니게 자기에게 성가시게 굴던 친구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그가 항상 부르던 엘 샷다이 는 드디어 그에게 복을 내리고 그에게 전보다 배나 많은 소유를 허락하신다(욥 42:10-16). (89.1)
 샷다이 의 기능을 몇 가지 살펴보자. 그는 선지자에게 “전능자의 이상을” 보이시는(민 24:4) 한편,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전능자의 영감”을 허락하신다(욥 32:8). 확신이 없는 자에게 그는 “전능자의 음성”으로 지도하시며(겔 1:24; 10:5), 순례자들을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으로 인도하신다(욥 31:2). 두려워하는 자들을 그는 “전능자의 날개”[그늘]로 덮어 보호하시고(시 91:1), 기진하여 쓰러지는 자를 “전능자의 기운”으로 살리신다(욥 33:4). 징계를 받아야 할 자들에게 그는 “전능자의 견책”을 보내시고(욥 5:17), 정신 못 차리는 죄인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전능자의 두려움”을 보이신다(욥 6:14). 악인을 향해 그는 “전능자의 화살”을 쏘시며(욥 6:4), 그래도 꺾이지 않으면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신다(욥 21:20). (89.2)
 샷다이 는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의 엘 샷다이 는 순종을 모르고 무성의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신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을 훈련시키는 것처럼 엘 샷다이 는 때때로 자녀들이 자라는 보금자리를 흩어서 게으르고 겁 많은 어린것들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신다. 새끼를 내쫓는 냉혹한 행위는 어린것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준 어미 새가 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품에 품는 엘 샷다이 는 사랑으로 자녀를 단련시키신다(신 32:11, 12; 32:27). 욥이 말한 “전능자의 견책”은 바로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욥 5:17). (90.1)
 그리스도는 자신을 새끼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품고 독수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암탉에 비유하셨다(마 23:37, 38). 당시의 독수리는 로마 제국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을 노래하는 시에서 “전능자의 날개(그늘) 아래” 보호받는 백성을 상상했다(참고 시 91:1). 이 시구(詩句)는 후일 이스라엘의 랍비들이 즐겨 쓰는 어휘가 되었다. 엘 샷다이의 날개는 유약하고 방비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단의 마수로부터 지켜 준다. (90.2)
 시편 기자는 또한 부모는 자녀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영접하신다고 지적했다(시 27:10). 이것이 엘 샷다이 의 일이다. 그는 어린 소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안위와 후원과 양식을 약속하신다. (90.3)
 인애하신 구주시여, 당신의 위로와 사랑을 감사하나이다. (90.4)
 젖의 상징적 의미
 젖[乳]은 성경에서 차고 넘치는 복을 말하는 은어(隱語)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출 3:8, 17). 젖이 은유적 풍만을 묘사한 대표적 성구는 욥기에 있다: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욥 21:24). 젖은 갓난아이가 배고플 때 사모하는 것이다!(벧전 2:2, 3). 그러나 자식이 자라면 젖을 떼고 어머니의 품을 떠난다(사 28:9, 10). 사도 바울은 두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했다(고전 3:1, 2; 히 5:12-14). 그런 뜻에서 주님은 주린 자들에게 입을 크게 벌리라 하시며 흡족히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시 81:10). (90.5)
 요한계시록은 전능자의 활동을 대여섯 번 언급한다. 우리가 이미 연구한 대로 「70인역」의 역자들은 요한이 사용한 엘 샷다이(Èl šadday)란 말을 판토크라토르(pantokratōr)란 말로 번역했다. 판토크라토르“만인의 통치자”란 말이다. 이 계시에서 예수는 못 자국난 당신의 손에 악인들의 기록책을 받아 들고 그 내용을 처리할 권리를 얻은 심판장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보좌에 앉은, 피 흘리는 양이신 그는 내용의 변조를 막기 위해 봉해진 그 두루마리의 봉인을 뗄 권세를 받으신다. 그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는 기록을 도말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계 5:1-9). 그는 갈바리에서 당신의 생혈(生血)을 쏟아 그들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구원의 역사가 다 끝나면 그는 온 우주의 찬양을 받게 된다(계 4:8, 11; 5:9). 요한계시록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두려운 심판의 “나팔”을 불게 하고 “징벌”의 대접을 붓게 하는 전능자의 역사를 본다(계 11:17; 15:3; 16:7, 14; 19:15). 신약에 예언된 이 사건들이 성취되는 것을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와 요엘이 이미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때를 일컬어 “여호와의 날”이라 하였고, 그 때에 일어나는 사건을 “전능자께로서 이르러온 멸망”이라 하였다(사 13:6; 욜 1:15). 어떻게 모성적 엘 샷다이 가 그런 일을 하실 것인가? 바울은 이 심각한 모순을 하나의 질문과 대답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 그리스도 예수시니”(롬 8:34). 갈바리의 예수는 엘 샷다이 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 보이신다. (91.1)
 샷다이 가 사람을 죽이나?
 그러면 모든 은혜가 풍만하신 전능자가 어떻게 파멸의 하나님으로 돌변하실까? 인간 어머니가 빗나간 자식을 벌할 수 있는가? 종말 사건을 계시하는 이 책은 인류에 대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들을 구원키 위해 자기 생명의 진액을 쏟으신 분을 말할 때, 눈물로 백성을 심판하고 벌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91.2)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신의 형상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둘이 다 필요했다. 남자의 특성만 가지고는 그 일에 부족했으며, 여자의 특성만 가지고도 역시 부족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나타내기 위해 창조자는 남자와 여자를 고안하여 그 둘의 완전한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엘 샷다이 는 신의 성품 중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강조한다. (92.1)
 성경의 표상적 언어를 살펴보면, 이상적 예루살렘 도성은 “우리의 어머니”로 비유되고(갈 4:26), 바벨론은 그와 반대로 악하고 타락한 창녀 어미로 비유되고 있다(계 17:5). 바벨론은 세상을 멸망케 하는 사단의 도구이나, 하나님은 “시온 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세상에 하늘의 복을 부으려 하신다. 이 상징적 도성 시온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수도이다(행 20:2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예루살렘은 구주를 배척했으므로 엘 샷다이 의 좌절과 상심은 크셨다. (92.2)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서 성령은 엘 샷다이 의 대리자 역할을 하신다. 그는 생기를 주고, 인도하시며 통할하신다(행 2:17, 33). 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여 목마름을 면하게 하시며, 성경 진리의 젖을 주어 그 자양으로 영혼이 자라게 하신다. 그들을 통해 그분은 당신의 생명의 복을 세상에 나누어주시고자 하신다(요 7:17). 그러므로 그들은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92.3)
 최후의 환난 때, “전능자로부터 이르는 파멸”(사 13:6)이 와도 시편 기자가 생생하게 묘사한 것처럼(시 91),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은 살아 남는다. 그들은 “전능자의 날개(그늘) 아래” 거하기 때문이다. 고집스런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그리스도는 오늘날 잠자는 교인들을 보고 우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게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