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5. 엘 샷다이—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능력이 충만하신 이)
주 예수 팔로 안아 날 품어 주시니
   이 크신 사랑 속에 내 영혼 쉬도다.
저 천사 노래 소리 너 들어보아라.
   저 하늘 진주 문을 울리고 오도다.

주 예수 팔로 안아 날 보호하시니
   이 세상 걱정 잊고 죄 생애 벗도다.
내 슬픔 사라지고 또 의심 걷히니
   저 하늘 이를 날도 눈앞에 있도다.
(82.3)
 젖먹이는 어머니
 유방과 젖가슴의 은유로 해설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돌보심은 어머니와 그 품에 안긴 젖먹이 자식과의 특별한 관계로 그 색채가 강조된다. 어머니는 그 자식을 아홉 달이나 임신하고 있다가 나을 때 자신의 생명을 자식에게 나누어준다. 자식은 원래 그녀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낳은 후에는 자식을 자기 생명의 연장으로 인식한다.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기를 사랑하고, 아이는 완전히 의존적이고 전적으로 무력하고 말할 수 없이 연약하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계속 자식에게 제공하며 자식의 모든 필요를 생각해 준다. 엄마는 아기의 모든 요구, 즉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및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일로 성취감과 만족을 느낀다. (83.1)
 그러나 반대로 무력한 유아는 엄마가 여왕이면 좋아하고 가난뱅이면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는 엄마의 연령이나 미모에 관심이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 것, 그녀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이다. 엄마는 아기에게 안전과 안일과 “맘마”의 근원이다. 혹시 개가 짖어도 아기는 엄마의 품에 있을 때 위로와 보호를 받는다. 아픔이나 사고를 당하면 포옹과 입맞춤으로 치료는 빨라지고, 배고플 때 뱃속에서 괴로움을 호소해 와도 아기는 엄마의 젖꼭지만 물면 만사가 해결된다. (83.2)
 엄마는 실로 유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엄마는 아기의 중심이요 활동의 한계이다. 그녀는 그의 심리적 후원자인 동시에 생리적 영양의 공급원이다. 아이가 태어난 초기에는 엄마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이러한 모자(母子) 관계는 엘 샷다이 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준다. 이것은 전능자의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그것을 인하여 자라기 위한” 그분과 신생아와의 밀접한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벧전 2:2). 그는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는 창고이다. 그러면 이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성경 이야기를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83.3)
 야곱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집을 떠나 피신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들의 계보를 추적할 때 우리는 장자권과 그에 따른 복을 끝내 손에 넣고야 말려는 야곱의 집념에 어떤 매력을 느낀다. 그는 이미 여러 해 전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과 그에 따르는 복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속여 자기가 원하는 때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내려고 모의했다. 그것 때문에 에서의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분노의 불씨가 심어졌다. 이삭은 전능자의 섭리로 하늘의 위업이 신비하게 이루어지는구나 생각하면서 집안 일을 조작하려는 공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까맣게 모른 채 엘 샷다이 의 이름으로 아들을 축복했다(창 28:3).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은 엘 샷다이 께서 수십 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유사했다. 아브라함은 뭇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의 계보를 통해 메시야가 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84.1)
 야곱의 속임수가 초래한 단기적 결과는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그러나 장기적 결과는 쌍둥이의 후손들 간에 맺어진 해결 불능의 원한과 적대감이었다. 이것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무시 못할 현실이다. (84.2)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에서가 두려워 야곱은 허둥지둥 집을 빠져 나와 부모의 친척들이 사는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밧단아람 지방으로 피신한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77세의 노인이 된 외로운 도피자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온 심령을 그 앞에 쏟아 놓는다. 그것이 그의 평생에 가장 고귀한 헌신의 순간이 된다. 억세고 책략에 빠르던 집념의 사람 야곱은 드디어 여지없이 적나라하고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결사적으로 엘 샷다이 를 필요로 했다. 의지할 데 없는 절망 속에서 그는 오직 “어머니의 가슴을 가진 이”의 모성적 위로를 갈망했다. 은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할 조건이 구비되었다(고후 12:9, 10). 야곱은 어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으나 인생 말년에 엘 샷다이가 어머니를 대신한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창 28:3, 35:11). 언제나 그가 도움이 필요해 부르짖으면 전능자는 한결같이 그 객지의 아들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셨다. (84.3)
 여러 해 후 번성한 그의 대가족이 기근을 당해 허덕일 때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부득불 아들들을 애굽 땅으로 보낸다. 여려 해 전에 잃어버린 요셉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혹시 무슨 액운이라도 닥칠까 두려워 그는 불안에 떤다. 그러나 이 때 그의 믿음이 그의 의지를 지배한다. 아들들이 길 떠나는 날, 그는 용기 있게 전능자 엘 샷다이 의 이름으로(창 43:14) 그들을 축복해 떠나 보내고, 그의 가호와 축복을 믿고 안심하고 기다린다. (85.1)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야곱과 그의 온 가족이 잃었던 요셉을 다시 만나고 그가 총리로 있는 당시 세계 제일의 강국 애굽의 가장 아름답고 비옥한 지방에서 안전을 누리며 배불리 먹고살게 될 것을. 그 후 25년은 야곱이 누린 최고의 행복기였다. 어떤 환경에 살게 되던지 그는 엘 샷다이 가 항상 도움과 위로의 근원이심을 알고 있었다. (85.2)
 야곱의 임종사(臨終辭)
 임종시 부조 야곱은 아들들과 권속들을 불러 놓고 요셉의 파란 많은 자기의 인생을 회고하며, 원수들이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창 49:23). 젊어서 당한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기 자신을 구원의 샘 곁에 자란 “무성한 넝쿨”로 비유하고(창 49:22), 그 넝쿨은 처음 씨가 발아한 모판의 범위를 벗어나 “담을 넘어” 멀리 타국 땅에까지 무성하게 뻗어 나가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그는 읊는다. 요셉을 보호하신 능력의 근원을 지적하며 고령의 부조는 “그의 팔이 힘이 있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아들의 떨리는 나약한 손 위에 전능자이신 창조자의 힘있는 손이 놓인 것을 본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자식들에게 엘 샷다이 는 돕는 손길을 자기로부터 거두신 일이 전혀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의 길을 인도한 “목자”는 전능자였고, 청년기와 장년기 동안 그의 성품의 집을 세운 토대는 요동치 않는 “반석”(창 49:24)이었다고 고백한다. (85.3)
 이 때 야곱은 자기의 회고담 속에서 승리의 요인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말한다. 지난날에 그토록 풍성히 복을 주신 엘 샷다이 는 앞으로도 계속 요셉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보이지 않는 숨은 샘이 나무를 살리듯 임종의 부조는 그 복이 자기 생애의 밑바닥에 깊숙이 깔려 있었음을 말한다. 즉 “밑에 깔린 깊음의 복과 젖의 복과 태의 복”(창 49:25)을 말한 것이다. 실로 전능자의 젖과 태의 복은 보이지 않는 “깊음”(tehom, 트홈, 참고 창 1:2)에서 작용한다. 그가 나기 전에 엘 샷다이 는 그에게 이미 정신적, 물질적 복을 주셨으므로 그것이 요셉의 생애를 지배하는 근본과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86.1)
 요셉의 성품과 승리를 가능케 한 자양(滋養)은 부모인 야곱과 라헬의 관계에서 발원했다. 그들의 애정은 가장 깊고 변치 않는 사랑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은 사랑하며 아들을 고대하다가 드디어 요셉이 태어나자 그가 그들의 생애의 중심이 되었다. 라헬은 아기를 모유로 기르며 그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이 사랑과 정성이 “밑에 깔린 깊음의 복”을 구성한 것이다. 임신—태아기—분만을 둘러싼 따뜻한 사랑의 태교(胎敎), 즉 “젖의 복과 태의 복”은 안정된 인간 요셉을 만드는 데 기여한 중대한 요인이었다. 모든 것을 풍만이 주시는 엘 샷다이 는 그 복 위에 “하늘 위의 복”을 더하셨다(창 49:25). (86.2)
 부모의 책임
 부모가 될 후보자들은 누구나 야곱의 통찰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곱과 라헬 부부는 무엇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낳기를 원하는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까? 임신할 때의 주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임신 기간 중 그 보잘것없이 작은 태아는 어떤 사랑, 어떤 돌봄, 어떤 분위기로 싸여 있었을까? 태어난 후 그 아이에게 기쁨의 태양이 비쳤을까? 새들이 그를 환영하는 노래를 불렀을까? 날마다 영광과 은혜와 행복이 아이를 감싸주고 있었을까? (86.3)
 한번은 친구가 나에게 세살 난 자기의 아이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얘가 나의 작은 실수요”라고. 그 친구는 자식에게 자기가 얼마나 못할 짓을 하고 있는지, 아이의 마음 속에 무슨 씨를 심어 주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밑에 깔린 깊음의 복과 젖의 복과 태의 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만이 임하기를 나는 기원한다. 이 복은 엘 샷다이 란 이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일부이다. (86.4)
 요셉이 거둔 승리, 악한 감화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한 성공, 유혹을 당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모든 생애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심어 준 씨 때문이었다. 그의 성품의 안정성, 정직, 보디발의 아내의 노래에서 경적(警笛) 소리를 듣고 발휘한 저항, 지하 감옥에서의 그의 태도, 다년간의 고독을 뚫고 일어선 그의 개선적 인생은 모두가 “밑에 깔린 깊음의 복” 때문이었다. 야곱과 라헬이 꽃피운 그 놀라운 사랑이 빚어낸 애무, 임신, 태교, 출산과 육아, 그리고 그들이 베푼 가정 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모든 것이 엘 샷다이 가 베푼 복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일 모세를 대면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 야곱에게 엘 샷다이 란 이름으로 나타났었노라”고 자랑삼아 말씀하실 수 있었다(출 6:3). (87.1)
 그로부터 일세기 이상 지난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은 38년째 광야의 방황을 계속하고 있었다. 야산 계곡에 퍼져 질서 있는 야영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청에 못 이겨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그로써 여호와의 보호를 제거해 보려는 책략을 쓴다. 그러나 선지자의 충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그의 갈등의 저변에는 의와 진리가 있고, 그와 동시에 탐심과 위신이 있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발람은 이방 임금이 보낸 사자들에게 자기는 절대로 주께서 주시는 말씀밖에는 하지 않겠노라 못을 박는다. 그러다가 정작 산 정상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이스라엘 족속의 진영을 내려다본 순간, 그는 엘 샷다이 의 돌보심으로 번영과 안전을 누리는 한 백성에 대한 환상을 볼멘 소리로 선포하게 된다(민 23-24). (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