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1 부 제칠일 안식일 신앙의 이유 제 8장 안식일은 어린양의 신부가 그 영적 정절을 나타내는 날이다
 안식일: 하나님이 자신의 쉼으로 우리를 초청한 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이 도덕적 명령이 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수하에서 6일 동안 기진하도록 살아온 남종과 여종과 육축들과 나그네들을 제칠일에도 계속하여 혹사시킨다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너의 생명도 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구속한 것이니 네 마음대로 네 자신을 혹사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91.1)
 그러나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맛있는 이 떡을 먹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친절 같은 것으로 또는 무더위 속에서 먼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된 나에게 그 마을 사람 하나가 냉수 한 그릇을 베푸는 친절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떡을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또는 일정이 급해서 그 냉수를 마시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도덕적으로 큰 죄인이 되는 것인가. 또 밤늦도록 공부하는 자녀에게 어머니가 “그만 공부하고 자거라”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앞에 대학 수능 시험을 둔 그 자녀가 “예, 알았어요” 하고 어머니의 “그만 공부하고 쉬어라” 하는 분부를 받들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녀에게 도덕적인 죄가 되는가. 죽고 사는 심각한 죄가 되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일하지 말고 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받들어 드리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었을 뿐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성경은 안식일 계명을 사람이 살고 죽는 어마어마한 도덕적 계명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91.2)
 안식일은 우리에게 “일하지 말고 쉬라”는 날이지만 이 쉼은 단순히 혼자서 육체적 피곤을 해소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쉼이 아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이 사람더러 같이 쉬자고 하는 초청이다. 일차적으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하셨으므로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이며”(창 2:3)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어 평안하였던(출 31:17)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안식일을 주시어(출 16:29) 사람이 쉴 안식일이 되게 하셨다.(레 23:30). 마치 룻의 시모 나오미가 룻을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로 복되게” 하였듯이(룻 1:9)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안식일 안에 사람이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로 복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목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시어 사람을 “푸른 초장” 같은 그 안식의 품에 “누이셨다”(시 23:2). 하나님이 그의 안식의 장막으로 사람을 안아 주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의 장막에서 쉬었다(민 9:18). 그리하여 사람은 마치 여인이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듯이”(룻 3:1) 하나님의 집에서 쉬며 평안하였던 것이다(출 31:17). 하나님의 품안에서 사람이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던” 것이다(시 23:2). (92.1)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사람 안에서 그의 “안식할 곳”(사 66:1)을 찾아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다(사 54:5).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29:45)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 하심”이었듯이(출 29:46) 하나님께서 사람을 6일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안식일인 제7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어 사람 안에 함께 쉬고자 하심이었다. 이처럼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자고 쉬는”(마 26:45) 안식의 날이요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에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쉬는 도덕률이다. (93.1)
 같이 쉬는 문제가 도덕적 문제인가
 그러면 같이 쉬는 문제가 도덕적인 문제인가? 진실로 그렇다. 어떤 사이에서는 함께 쉬는 윤리만큼 더 심각하고 더 중요한 윤리가 없다. 어떤 사이가 그런 사이인가? 부부 사이가 그런 사이이다. 부부의 제 일차적인 윤리는 함께 쉬는 윤리이다. “너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사 66:1) 하는 윤리이다. 부부 사이에 이것이 잘못되면 더 이상 부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부부 사이는 둘이서만 함께 쉬는 관계이다. 안식일의 윤리는 부부가 둘이서만 함께 자고 함께 안식을 누리는 윤리이다. (93.2)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남녀의 관계가 같이 쉬는 관계이다. 같이 잠을 자는 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이다. 같이 쉬고 같이 자는 관계는 같이 “누워 노는”(시 23:2, 공동번역) 관계이다. 그가 나를 “누이는” 관계이며 내가 그로 말미암아 눕히는 관계이다.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관계이며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관계이다. 세상에 같이 쉬고 같이 잠자는 관계만큼 가까운 관계가 없다. 부부의 관계는 이런 관계이기 때문에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부부에게 함께 잠자는 윤리만큼 막중한 윤리가 달리 없다. 부부된 사람으로서 바로 쉬고 바로 잠자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또 없다. 안식일 신앙의 윤리는 함께 쉬고 함께 잠을 자는 “사이의” 윤리이다. 부부의 윤리 같은 윤리이다. (93.3)
 안식일의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안식할 처소가 되신” 하나님이시며 사람 안에 자신의 “안식할 처소”를 찾으신 하나님이시다. 제칠일에 우리와 함께 쉬시는 하나님이시다. 제칠일에 우리와 함께 “누워 노는” 하나님이시다. 사람 “중에 거하여 사람의 하나님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94.1)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누워 놀자”고 하신 것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님이 “아론과 그 아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하나님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였듯이”(출 29:44)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에게 신부의 직분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안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한 백성”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기이한 은총의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벧전 2:9)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 신랑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94.2)
 따라서 안식일의 백성은 임자 있는 백성이다. 하나님이 그 주인인 백성이다. 하나님의 “안식할 처소가 된” 백성이다. “여호와 삼마”(겔 48:35)라 일컬어지는 백성이다. 그 거처와 그 존재에 “여호와 여기 계시다”라고 표시된 백성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 있는 백성이다.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계 14:1) 백성이다. 어느 때나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백성이다. 하나님과 함께 쉬고 자는 백성이다. 하나님과 한 몸이 된 백성이다. (94.3)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이 쉼을 공유하는 안식일 신앙의 관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관계이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 관계이다(계 3:20).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는 관계가 아니다. “더불어 쉬고 더불어 먹는” 관계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관계이다(요 17:21).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듯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는 큰 비밀의 관계(엡 5:31, 32)가 안식일 신앙의 관계이다. (94.4)
 안식일: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큰 비밀의 날
 이같은 안식일 신앙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하지 않았는가(엡 5:25)! 같이 쉬고 같이 자는 것만큼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사랑하여 자신을 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가 이런 관계이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이런 관계이고 안식일 안에서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이런 관계이다. (95.1)
 하나님이 자신의 안식일을 우리의 쉴 안식일로 내주신 것(레 23:32)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시는 행위였다. 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본받아야 하는 행위였다. 자기의 안식일을 주어 우리의 쉴 안식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곧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게 하는”(엡 5:27) 구속의 사랑이었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하는”사랑이었다(엡 5:28). 남편들이 자기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엡 5:28)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안식일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95.2)
 제6일에 태어난 사람을 제7일 안식일의 사람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남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사 54:5)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의 “남편”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는 제도가 안식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남편이 되어 신랑이 신부를 거룩하게 구별하듯 사람을 거룩하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여자로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되신 날이 안식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사람으로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의 안식일”을 사람에게 주셨던(겔 20:12) 것이다. (96.1)
 따라서 안식일 신앙의 윤리는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함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윤리이며 아내가 그 남편을 경외함 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윤리이다. 아내들이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윤리가 안식일 신앙의 윤리이다(엡 5:24절 참조). (96.2)
 안식일의 윤리: 어린양의 신부가 어린양과 더불어 사는 윤리
 그러므로 우리들의 안식일 신앙 윤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어린양과 더불어 사는 윤리이다. 어린양의 신부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 14:4) 윤리이다. 어린양과 함께 쉬고 어린양과 함께 자는 윤리이다. 어린양과 함께 먹고 마시는 윤리이다. 어린양과 더불어서만 함께 쉬고 함께 자는 “정절”의 윤리이다(계 14:4).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오르는(계 14:1) 윤리이다. 시온산이 어디인가? “여호와의 산”이다 “거룩한 곳”이다(시 24:3). “지존자의 은밀한 곳(시 91:1)”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은밀한 곳(마 6:6)이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쉼의 공간이다. 하나님이 “쉬어 평안을 누리는” 곳이다. 하나님의 침실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96.3)
 그러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가?”“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는 자이다”(시 24:3,4).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다”(시 24:6). “나 여호와와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이다(사 56: 5,6).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자이다(사 56:4). 하나님이 이러한 자들을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다”(사 56:7). (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