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8 장  안식일, 하나님의 호흡이 샘솟는 시간의 여백
 제칠일에는 일하지 말라
 제칠일 안식일의 계명은 일주일 중 엿새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것이다. 3,500여 년 전에 성문화 된 이 계명, 일곱째 날에 “일하지 말라”는 이 계명이 극도의 노력과 근면이 요구되는 이 경쟁의 시대에 현대인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81.1)
 근면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던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의 안식일 습관을 게으름의 표시로 보고 경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종교는 근면과 노력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 책 첫머리에서부터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생존 조건을 설파하고 있다(창 3:19).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지혜로운 임금 솔로몬은 근면과 성공의 관계를 장황히 강조하고 있다(잠 6:6-11; 24:30-34). (81.2)
 기독교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설화에 등장하는 “악한 종”들은 하나같이 “게으른 종”들이었다(마 25:26).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가르쳤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바울의 노동 정신에 기초하여, 이른바 개신교의 노동 신성 사상을 발전시켰다. 개신교의 노동 개념에 따르면 성직자의 노동만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근로 계층의 노동이 하나같이 신성하다. 이러한 노동 개념이 근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81.3)
 그러나 재물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평가한 개신교 노동관이 초래한 폐악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개인의 끝없고 무자비한 야망, 그리고 그 탐욕으로 인한 인간의 억압과 비인간화의 현상 등이 그 일부이다. (82.1)
 제칠일 안식일의 계명 자체도 노동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다. “엿새 동상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 10) 하신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6일 창조와 하나님의 제칠일 쉬심(창 2:2)을 모델로 한 노동과 휴식의 이중적인 명령처럼 보인다. (82.2)
 그러나 정작 현대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사항은 그 노동과 휴식의 이중적 명령 체계가 아니라, 안식일 계명이 의도하는 바가 이중적 명령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안식일 계명은 게으름을 경계하고 근면을 고취해야 되는 배경에서 강조되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창 3:17)을 수 있는 삶의 환경에서 노동은 이미 명령이기 전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인간의 끝 모르는 탐욕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고와 염려는 더욱 가혹스럽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존재이다. (82.3)
 이같은 배경 속에서 보면 제칠일 안식일 계명의 취지는 일과 쉼을 같은 무게로 강조하는 이중적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수고와 염려의 황폐를 6일로 한정시키는 명령이다. 6일의 끝에 다다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삶을 제칠일의 쉼으로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는 명령이다.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출 23:12)는 것이다. 수고와 염려, 탐욕과 수탈의 “네 일”은 6일로써 오히려 족하니 뭇 생명 있는 것들의 숨돌림을 위해 구별된 제칠일, 그 하나님의 시간을 범접치 말라는 것이다. (82.4)
 모래톱 같은 제칠일의 문턱
 “네 일”을 6일의 끝으로 제한하고 있는 안식일의 명령을 생각하면, 예레미야 5장 22절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융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83.1)
 제칠일이 시작되는 문턱은 바닷가의 모래톱과 같다. 수고와 염려의 파도, 탐욕과 억압의 파도가 제 아무리 사나워도 넘어서지 못하는 자유와 안식의 문턱이다. 우는 사자와 같은 수고의 삶이 삼킬 듯 우리들의 영혼을 뒤쫓아 왔어도, 저 하늘에 닿은 천애의 높은 성, 제칠일의 도피성, 그 성벽 아래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83.2)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여러 곳에서, 염려와 애씀의 삶에서 쉽게 간과되고 있는 제칠일의 영역을 감명 깊게 환기시키셨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모두 수고와 염려 나름일 것 같지만, 사실 살고 죽는 일에 있어서 수고와 염려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말씀이셨다. “아무리 염려한다고 해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는 없는 것이다”(마 6:27 참조). (83.3)
 따라서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마 6:34)한 것이다. 6일 걱정은 6일로 족하고 제칠일에는 염려하지 않아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6일 동안의 수고와 염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제칠일에 “수고와 염려”의 내려놓음으로도 살아간다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가 6일의 수고와 염려로 입고 먹는 것이 아니라 제칠일의 쉼에 속하여 “오직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므로” 먹고 입는다. (83.4)
 이같은 삶의 진실은 출애굽기 16장에 소개된 만나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실적으로 예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의 하루하루를 “각기 식량대로”(출 16:18) 만나를 거두고 먹으면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음날의 양식으로 염려하였다. 그 날 거둔 만나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 한 모세의 분부를 청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껴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냄새가”(출 16:20) 났다. 사람의 수고와 염려가 보람있는 결실로 이어지는 것이 정한 이치이면서도, 그 수고와 염려의 결과에 “벌레가 생기고 썩어 냄새가 나는” 현상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수고와 염려가 전혀 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넘긴 만나에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는” 현상도 있다. 들의 백합화 같은 삶, 공중의 새 같은 삶, 전적으로 하나님이 기르는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6일의 삶이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야 하는 일곱째 날 안식일을 생각하노라면, 九의 숫자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선호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곧 끝 숫자인 十자의 한발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겸양과 자제의 정신일 것이다. 또한 제칠일 안식일을 구별하려는 태도는 여백을 강조하는 동양의 묵화의 묘미를 닮았다고 할 것이다. 색깔과 물체로 가득한 서양화의 그 빈틈없음이 때로는 숨 틈 없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84.1)
 현대는 빈틈없는 서양화 같은 시대이다. 여백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시대이다. 멈출 줄 모르는 시대이다. 한계에 도전하는 시대이다. 능률은 극대화되어야 하고 “끝내주는” 사람이 제일이라고 부르짖는 시대이다. 분수를 찾는 삶이 소심한 삶이 되는 시대이다. 다니엘 3장에서 60 규빗의 신상을 금색 한가지로 도색해 버렸던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시대이다. 자신의 땅 가장자리에 힘없는 고아의 땅이 존재하는 사실을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의 시대이다. 서양화에서 채색의 끝은 화폭의 끝이듯, 현대인들의 욕심의 끝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날들의 끝이다. 왕권에 걸신들린 수양에게 단종의 존재가 탐욕의 끝이 아니듯이 사람의 탐욕의 끝은 이웃의 존재가 아니다. (84.2)
 물론 가득함이 앙망되어야 하는 삶의 측면도 있다. 은혜와 사랑의 삶에서 그렇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충만의 나라이다.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넘치는 나라이다. 5리의 한계를 넘어서 10리로 넘쳐나는 나라이다. “달아보니 부족”해서는 안 된다. 부족, 미급, 미달로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 이루지” 못한다.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9를 넘어 열(10)에 이르러서야 열(熱)도 나고 삶의 막힘도 열(開)릴 것이다. 9의 자리에 6의 자리에 멈추어 서야 하는 삶은 사랑과 은혜 등, 성령의 선한 열매로서의 삶이 아니라 사람을 고통케 하는 수고와 염려 그리고 그 탐욕과 억압의 삶인 것이다. (85.1)
 육체적 삶의 여백으로써의 안식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한계와 여백을 용납하지 않는 무자비한 수탈로 이어진다면 자연은 어떻게 되는가? 자연의 자투리까지 남겨두지 않는 철저한 개발의 끝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시간에 대한 탐욕적 지배가 시간의 자투리까지 남겨두지 않는 철저한 유린으로 끝난다면 그 시간 속의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무제한으로 이루어진다면, 개인의 생활과 생각에 지배자의 권력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제칠일 곧 개인의 여백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동물 농장” 같은 사회가 그런 사회일 것이다. 자신의 탐욕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전혀 제재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권력의 화신, 탐욕의 화신, 육욕의 화신, 곧 어둠과 죄에 팔린 사람이요 악마가 낙인찍은 사람일 것이다. 무섭고 가련한 사람이다. (85.2)
 제칠일 안식일 정신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에 한계를 설정하는 정신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와 이용에 한계를 설정하는 정신이다. 정신적 자아가 육체적 자아의 지배에 대하여 한계를 긋고 굳세게 저항하는 정신이다. 자신의 시간과 삶의 내면에 육체로서의 자신이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제칠일, 곧 하나님의 한 영역을 확보하는 정신이다. 자신의 내부에 자신의 발에서 신을 벗고 통회와 겸비로 들어설 거룩한 하나님의 전을 마련하는 정신이다. (86.1)
 공간 가운데 사람에게 짓밟히지 않은 모퉁이를 자연이라 부른다. 태고의 정적과 안식을 간직한 곳이다. 시간에도 그 같은 영역이 있다. 사람에게 마구 짓밟히지 않는 시간대, 시간의 여백 같은 것, 그것이 바로 태고의 정적과 거룩한 숨결을 간직한 제칠일이며 성일이다. 사람들의 자연과 시간의 여백을 찾는 마음이 무엇이며 거기서 얻는 체험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마음이며, 안식일의 체험인 것이다. (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