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1 장 총론
 ㅇ 렘 25:1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원년에 ···” (2.84)
 이상의 두 성경절에서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야김 4년이 다니엘서에는 여호야김 3년이 느브갓네살의 원년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명백히 시대 착오(錯誤)라고 비평가들이 주장해 왔다. 이런 경우 역사성에 있어서 인정받는 예레미야보다 다니엘서가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이다. (2.85)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의 바벨론에서는 유다에서와 같이 왕들의 재위년(在位年)을 계산함에 있어서 소위 「즉위년(卽位年) 계산법」(the accession-year method)을 썼음이 밝혀짐으로써 적절한 해답을 찾았다. SDABC, vol. 2, 138, 139. 즉위년 계산법이란 만약 “갑”이란 왕이 그의 재위 35년째 죽었다면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으로 연대를 쓰지만 뒤를 잇는 “을”이란 왕은 그 35년째 해의 마지막 부분을 자신의 이름으로 문서의 연대를 표기하기는 하나 다음 해 정월이 되기까지의 여분의 기간을 단순히 “통치가 시작된 해”(year of beginning of reign) 곧 “을”왕의 즉위년(卽位年)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하루(Nisan 1)부터 “을”왕의 원년(元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같은 해가 중복으로 계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계산 방법이었으나 이집트에서는 자주 선왕(先王)이 죽은 해가 곧 다음 왕의 원년이 되어 중복이 되는 “비 즉위년 계산법”(non -accession-year method)을 썼다. (2.86)
 느브갓네살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로니아의 제사장이요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us)의 고대 역사를 인용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Jesephus, The Antiquities of the Jews, x, xii, Against Apion, I. 19.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은 팔레스틴 지방의 국가들이 친이집트 정책으로 기울어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에 접하여 즉시 그의 젊은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병력을 주어 이를 평정하도록 했다. 그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여러 반역한 국가들을 정복하고 남하하여 이집트 국경에서 전역(戰役)에 종사하고 있던 때 본국으로부터 부왕이 서거했다는 부음(訃音)이 왔다. (2.87)
 느브갓네살은 황망히 유다와 페니기아와 시리아의 포로들을 동료 장군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수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아라비아 북부의 사막길을 가로질러 본국에 돌아가서 안전하게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굴된 당시 바빌로니아의 점토문서에 의하면 나보포랏살 제5년에 월식(月飾)이 있었는데 천문학적으로 확인해 보면 그때가 기원전 621년 4월 22일이 된다. 나보포랏살은 21년 간 재위했으므로 그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Erwin R. Gane, Daniel Revised(Angwin, Calif. : Pacific Union College), 11. (2.88)
 실제로 바벨론에서 발굴된 점토 공문서의 날짜를 종합해 보면 나보포랏살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 7월이나 8월 상순에 있었다.SDABC, vol. 3, 86, 87. 그리하여 느브갓네살은 다음 해 기원전 604년 정월 초하루 바벨론의 주신 벨(Bel · 마르둑)의 손들을 잡은 후 원년을 시작한 것이다. (2.89)
 III.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의 기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본 총론에서는 우선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기원전 701년에는 히스기야왕과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남방 유다를 거의넘어 뜨릴뻔했으며 바로 다니엘 당시의 국제정세를 초래하게 한 앗시리아와 다니엘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의 역사적 배경을 왕조 중심으로 약술하고 이를 다니엘서의 상황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 밖에 메디아(메대), 페르샤(바사), 그리스(헬라), 로마등은 그 상황이 나타날 때마다 약술하고자 한다. (2.90)
 가. 앗시리아(Assyria)
 성경에는 앗수르(Asshur)로 불리운 앗시리아는 노아의 아들 셈의 한 아들인 앗수르(Asshur)를 조상으로 하고 있다(창 10:22). 창세기 10장 11, 12절에는 이들 앗시리아의 도시들이 함의 손자인 니므롯의 영향 아래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미 5:6). 지리학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하면서 기원전 19세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과 세계 제패(制覇)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여 사르곤 1세(SargonⅠ· c.1780 BC)와 삼시-아다드 1세(Shamshi-AdadⅠ· c.1749-1717BC) 때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까지 세력을 뻗었다. (2.91)
 그 후 호리족(the Hurrians)의 나라인 미타니(Mitanni) 와 헷족속의 나라인 히타이트(the Hittites) 제국과 생존을 위해 각축하면서 마침내 아다드-니라리 1세 (Adad-nirari Ⅰ. c.1306-1274 BC), 투쿨티-니누르타 1세 (Tukulti-NinurtaⅠ· c.1244-1207 BC)등의 위세로 대제국의 기틀이 놓였다. 아래에 대표적인 왕들을 열거하고 성경의 역사와 연관시키고자 한다. 연대는 SDABC의 표준연대를 따랐다. 87-89. (2.92)
 ▷티글랏-필레셀 1세(Tiglath-PileserⅠ· 1113-1074 BC)···페르샤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한 위대한 전사(戰士)로 앗시리아를 중동(中東)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티그랏필레셀이 죽은 뒤 몇 명의 허약한 왕들이 뒤를 이었으나 약 150년 이후부터는 고대 세계의 최강국이 되어 거의 3세기 동안(933-612 BC) 세계역사를 주름잡았다. 전성기의 앗시리아의 영토는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소아시아의 대부분, 시리아와 팔레스틴 일대, 때로는 이집트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2.93)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히브리인들과도 접촉되어 성경의 여러 왕들, 즉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호세야등 북방 이스라엘의 왕들과 접촉했고 아사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등 남방 유다의 왕들과도 맞서게 된 것이다. (2.94)
 ▷아수르-단 2세(Ashur-dan Ⅱ · 993-910 BC) · · · 전성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전사로 거의 매년 정복에 나서 피를 강 같이 흘렸고 시체를 산 같이 쌓았다고 전한다. (2.95)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 · 859-824 BC) · · · 북방 이스라엘의 아합과 예후의 동시대 왕으로 서부 원정시인 기원전 853년에는 시리아의 연합군들과도 접전했는데 이 때 아합은 병거 2천승과 보병 1만으로 연합군을 도와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2년 후에는 예후가 싸움을 포기하고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디어 있는 모습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첨비(方尖碑)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D. J. Wiseman, Illustrations from Biblical Archaeology(London : The Tyndale Press, 1966), 57. (2.96)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 · 810-782 BC) · · · 서부 원정에 나서 히타이트, 페니키아, 다메섹등을 복종시켰고 북방 이스라엘의 요아스(798-78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Edwin R. Thiele, Outlines Studies in Daniel(Angwin, Calif. : Pacific Union college), 10. 아마도 이 때에 요나 선지자가 요나서의 기별을 가지고 수도 니느웨에 가서 경고한 것으로 믿어진다. SDABD, 220, 221. 그러나 그 후 국세가 전만 못하여 어느 정도 기울고 있었는데 이 틈에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793-753 BC)는 강력한 국방 정책과 경제 부흥을 꾀하여 국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2.97)
 ▷티글랏필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 745-727 BC) · · · 구약성경에 불(Pul)로 불리우는 앗시리아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므나헴(752-74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왕하 15:19), 베가(742-740 BC)때에는 북방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북방 영토를 점유한 후 앗시리아의 므깃도 도(道)에 예속시켜 버리고 백성들을 이산(離散)시켰다(대상 5:26).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 요청으로 기원전 732년 다메섹을 치고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으며(왕하 16:7-9), 북방 이스라엘의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732-722 BC)를 왕으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6절8장 4절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다. (2.98)
 ▷살만에셀 5세 (Shalmaneser Ⅴ․727-722 BC) · · · 이 때 이집트는 북방 이스라엘의 호세아를 꼬득여서 앗시리아에 반역하도록 조장하자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기원전 722년 그가 죽기 직전 이를 함락하여 이스라엘을 끝냈다(왕하 17:1-6). (2.99)
 ▷사르곤 2세(Sargon Ⅱ · 722-705 BC) · · · 그는 아마 찬탈자로 왕위에 올랐는데 북방 이스라엘 민족을 멀리 국외로 추방 식민(植民)했으며 코르사밧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 한편 반역한 국가들은 가차없이 징벌했다(사 20:1). (2.100)
 ▷산헤립(Sennacherib · 705-681 BC) · · ·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기원전 689년에는 바벨론성을 짓밟았다. 기원전 701년에는 서부 원정에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다의 도시들을 유린했다. 후에 재침한 산헤립은 유다를 끝장내려 하여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권면으로 힘을 얻은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18만 5천의 군사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왕하 19장, 대하 32장, 사 37장). 후에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