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2:1-3:22)
 이제 우리는 교회들에 보낸 일곱 기별을 분석할 것이다. 각 분석에서 각 교회가 위치한 도시의 역사적 배경 및 당시의 배경과 이어 더욱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추정되듯이, 이 일곱 기별은 [일곱 개의] 편지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기별들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들[4-22장]과 함께 보내진 것으로, 일곱 교회 모든 백성이 읽어야 할 내용이다. 각 교회가 위치했던 도시에 대한 정보는 그 교회에 주신 기별의 의미를 이해 하는데 도움을 준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2:1-7)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에베소.
 이 도시는 밧모에서 약 60마일(9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즈음,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중 가장 크고 으뜸가는 도시였다.1) 대도시 에베소는 유명하고도 중요한 정치, 상업 및 이교의 중심지였으며, 도시 경계 내에서 자치권의 성격을 가진 자유 도시였다. 또한 파니오니안 경기(Panionian Games)의 중심지로, 경기가 벌어질 때에는 그 속주의 전체 인구가 에베소에 함께 모였다.2) 여기에 더하여, 에베소에는 황제 숭배에 헌당된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에베소는 유방이 많은 다산(多産)의 여신 아데미(Artemis) 또는 다이애나(Diana)의 고향이었다. “온 아시아와 천하”(행 19:27)가 광신적으로 그 여신을 숭배하였다. 사람들은 그 여신의 신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믿었다(행 19:35). 그 여신에게 바쳐진 장엄한 신전은 에베소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행 19:35 참조), 이것은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다이애나 신전의 내부 사당(祠堂)은 모든 레반트(Levant 동부 지중해 연안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을 포함하는 지역 - 역자 주)로부터 온 엄청난 양의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소였다. 이것은 그 신전을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경제 활동 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3) 윌리엄 바클리는 “그 신전은 피난처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즉, 만일 어떤 범죄자가 체포되기 전에 그 신전의 경내에 도달할 수만 있으면, 그는 안전하였다. 그 면죄의 범위는 성전 사방으로 화살 하나를 날린 지역 혹은 이백 야드까지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자연히 그 신전은 “고대 세계 최대의 범죄자 집합소”가 되었다.4)

 에베소는 또한 미신적 관습과 마술로 유명했다(행 19:19). 바클리는 “온갖 종류의 범죄자, 탈법(法)자, 법망을 피하는 도피자들이 홍수처럼 에베소로 쏟아져 들어갔다. 쉽사리 믿어버리는 백성의 미신적 급류가 에베소로 흘러 들어갔다. 왜냐하면 미신적인 세계 중에서도 에베소는 거의 가장 미신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다”5)라고 지적한다. 이어서 바클리는 그 도시 시민들의 “평판은 나빴고”, 그 백성은 “변덕스럽고 미신적이고 부도덕한” 자들로 간주되었다고 부연 설명한다. 에베소에는 “눈물의 철학자”로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가 살고 있었다. 고대의 한 저술에 의하면, 그는 “익사하기에 꼭 알맞은” 에베소 주민들의 지독 한 불결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웃거나 미소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6)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즈음, 아마도 그 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가 에베소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교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18-19), 그리고 젊은 설교자 아볼로(행 18:23-26)에 의해 세워졌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간 일하였으며(행 20:31), 오늘날 우리가 에베소서로 알고 있는 그의 편지를 이 교회에 보냈다. 바로 이 도시에서 가장 위대한 복음의 승리들 중 일부가 쟁취되었다. 에베소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후일, 디모데와 사도 요한은 그 곳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봉사하며 보냈다. 비즐리 -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러 방면의 교사들과 온갖 교리들이 그 교회의 지지를 얻고 행로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하여 에베소로 유입되었음은 이해할 만하다.”7) 바클리의 언급은 매우 흥미롭다. “종종 현대의 산업적이고 경쟁적인 문명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에베소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8)
붙잡고.
 헬라어 크라테오(krated)‘단단히 붙잡다’ 혹은 ‘움켜잡다’라는 의미의 매우 강한 단어다. 예수께서 일곱 별들을 그 오른 편에 붙들고 계시는 요한계시록 1장 16절을 보라.
요한계시록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내가 네 행위, 곧 수고와 인내를 알고.
 헬라어 카이(kai, and)는 보충 설명이 뒤 따름을 알리며 일반적으로 ‘즉’ 혹은 ‘곧’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말이 앞의 말을 설명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인내’‘수고’는 앞에서 언급된 ‘행위’와 평행을 이룬다.
수고.
 헬라어 코로스(koros)‘힘든 일’, 또는 ‘피곤하여 지칠 때까지 일하는 것’9)을 의미한다(롬 16:12; 고전 15:10; 갈 4:11; 살전 2:9 참조). 이 단어의 특징은 “사람이 쏟을 수 있는 마음과 체력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수고를 묘사하는 데 있다.”10)
자칭 사도라 하되.
 니골라 당이라 하는 이단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이다(계 2:6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생각하고(keep remembering).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법은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태도나 행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헬라어 개념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한다.
회개하여.
 부정과거 명령법은 결정적인 ‘되돌아서기’를 의미한다. 바클리는 이 개념을 “하나님을 등지고 한 방향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회개를 통하여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회개는 뒤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11)
처음 행위를 가지라.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처음 행위를 가지기 시작하라’는 의미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경에서 촛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상징한다(계 1:12의 어구 해설 참조). 그들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 겠다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신 그리스도의 경고는 마가복음 4장 21-25절누가복음 8장 16-18절의 예수님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의 빛을 비추는데 실패하는 자들은 빛을 비추는 그들의 역할이 자신들에게서 옮겨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12)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
 이 무리의 정체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레내우스(Irenaeus)13)나 힙폴뤼투스(Hippolytus)14)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에 의하면 니골라당은, 초기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으며(행 6:5) 이단으로 그 생을 마감한 안디옥의 니콜라스(헬, 니콜라오스 Nicolaos)를 따른 이단의 무리를 일컬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의 순결성과 순수성을 파괴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15) 그들은 버가모 교회의 신자 중 몇 명을 지지자로 얻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기별에서, 니골라 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계 2:14-15) 자들로 언급된 이단 그룹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니골라 당은 버가모 교회의 이단 무리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니골라와 발람은 용어상 평행을 이루는 것 같다. 니콜라오스는 복합 헬라어 니카오(nika)라오스(laos)‘백성을 정복하는 자’라는 의미다. 발람이라는 단어는 두 히브리어 (am, 백성)과 바알 baal(벨라 bela ‘파괴하다’ 또는 ‘삼키다’)에서 온 것으로 “백성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니콜라오스는 히브리어인 발람(Balaam)의 헬라어 번역이라 할 수 있는데, 정확히 똑같은 의미로, 이 두 이단의 무리는 동일한 오류를 선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수기 31장 16절에 의하면,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을 선동한 자였다(민 25:1-6). 이스라엘 군대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모압 왕 발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릴지도 모르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 발람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발람의 입에서는 축복만이 흘러나왔다.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지자 발람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려고 성적 부도덕과 이교 축제 모압 신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도 포함된 들을 이용하도록 발락에게 권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발람은 교회 내의 부패한 교사들의 선조(先祖)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버가모의 거짓 교사들, 즉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은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를 유혹하여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게 하며 음행을 조장”하였다(계 2:14).

 소아시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시민의 의무중 하나로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하여야 했다. 축제에 참여를 거부할 경우, 모욕과 사회적 격리와 경제 제재라는 고통이 따랐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축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였다. 첫째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16) 일반적으로 이교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지방 수호신에게 바쳐진 고기가 주를 이룬 음식을 먹었다. 축제는 종종 취태(醉態)와 온갖 부도덕한 행위로 끝났다. 이교 축제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신전매춘(神殿賣春)으로서, 그것은 고대의 많은 이교의 한 관습이었다.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지위를 원한다면 누구든지 이러한 종교적 요구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 확연히 나뉘어졌다. 아시아에서 이방교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신조를 타협한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모든 시민들의 의무였던 신전 매춘을 금지한 예루살렘회의의 결정(행 15:20)을 순종하여 따른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을 지지한 자들도 있었다. 그런 방종을 허용하는(permissive) 가르침과 음행은 버가모의 발람 당과 두아디라 교회의 악한 여인 ‘이세벨’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이세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도덕을 자행하게 하고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게 하였다(계 2:14, 20), ‘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을 따르 는 자들’ 그리고 ‘이세벨’ 등은 타협을 조장하는 세 그룹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 교회에게 많은 해를 끼치고 있었다.17) 바클리가 제시하듯이,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것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암시한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고전 8장 참조)을 곡해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의 방종으로 전도(類倒)시켰다.18)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헬라어 니카오(nikao)‘승리자가 되는 것’, ‘승리하는 것’, ‘이기는 것’ 등을 의미한다. 현재분사는 계속적인 승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계속하여 이기다’ 또는 ‘계속하여 승리하다’라는 의미다. 이기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반복 주제다(2:7, 11, 17, 26; 3:5, 12, 21; 5:5; 12:11; 15:2; 17:14; 21:7), 스트랜드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로 본다.19) 로버트 찰즈(Robert H. Charles)가 말하듯이,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제대가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저자 요한이 가르치듯이, 그 전쟁은 가장 연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승리자로 입증할 수 있는 전쟁”임을 암시한다.20)
낙원.
 페르시아 어에서 빌려온 단어로서, ‘공원’ 혹은 ‘정원’이라는 의미다. 70인역에서 ‘낙원’이라는 단어는 에덴동산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창 2:8-10),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낙원은 구속받은 자들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아담이 누렸던 영생의 선물을 공유하게 될 회복된 에덴동산을 상징한다.
(주해)
 요한은 일곱 교회의 순회로를 일곱 도시 중 밧모에서 가장 가까운 에베소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계신 자로(계 1:16 참조), 또한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는 분으로 에베소 교회에 소개하신다(계 1:12 참조). 일곱 별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대표한다(계 1:20), 그리스도께서는 전 교회를 완전히 통제하신다. 그분은 교회에 임재해 계시며, 교회의 사정과 필요를 훤히 아신다.
요한계시록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요한계시록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 교회는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칭찬을 받는다. 그들은 힘에 겨운 수고와 인내를 하였다. 그 곳의 신자들은 지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압제를 견뎌내었다. 즉, 그들은 “그들이 전파하는 기별의 순결을 위하여 인내”하였다. 교리적으로 교회는 건전하였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았으며,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였다. 그 교회는 니골라 당의 관습을 미워하였다(2:6), 니골라 당은 그리스도인의 타협을 지지하였고, 이방인의 관습을 조심성 있게 따르는 것은 하등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견해를 동료 그리스도 인들에게 조장한 이단 무리였다(2:14-15 참조).22)

 에베소 교회의 이단인 니골라 당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의 순결성과 순수성을 위협 하였다.”23) 약 50년 전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경고하였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좋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50년 후에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윌리엄 바클리에 의하면, 니골라 당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모든 이단들 중 가장 위험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가르침이 성공했더라면, 그 결과는 기독교가 세계를 바꾼 것이 아니라, 세계가 기독교를 바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정이 있는 에베소 교회는 이 거짓 교사들을 시험하였고,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었다. 에베소 교회는 건전한 교리와 행위를 보전하는데 매우 단호하였다.

 열정적이고, 인내심이 있고, 교리적으로 건전했던 에베소 교회에 그러나 무엇인가 잘못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 식은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의 신자들을 부드럽게 책망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이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그들의 “첫 사랑”이 사라지고 있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묘사한 것 같이(2:2),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의 형편 중 하나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에 대한 초기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 이제 사라졌다.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주 예수에 대한 믿음”“모든 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엡 1:15; 행 20:37-38). 그러나 이 교회 초기의 종교적 특징들이 점차 부족해졌다. 열정은 사라졌고,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피차간의 사랑을 잃기 시작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종교는 율법적이고 사랑이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짓는다. 에베소 신자들은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단을 다루고 교리적으로 건전치 못한 자들을 징계함에 있어, 그들은 분명히 가혹하고, 비판적이며, 비평적이고, 흠잡기를 좋아하였다. 교리의 건전성을 강조하며 동료 신자들의 정통성을 점검하느라, 교회는 사랑이라는 복음의 특성을 팽개치며 율법주의가 되고 있음이 명백하였다. 건전한 교리, 열정적인 일, 그리고 교회 질서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고전 13장), 에베소 신자들은 건전한 교리와 열정적인 수고를 매우 강조하였다. 좋은 결정이었으나, 그들은 초기 그들을 특징지었던 그리스도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오로지 복음만이 종교적 의무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애정이 깃들인 사랑 사이에 균형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잊어버렸다.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
 높은 표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애를 썼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 첫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 가지 위대한 명령으로 강력히 호소하신다.
계속 기억하라.... 회개하라.... 첫 사랑을 가지라.
첫째, 그들은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했다. 헬라어 본문이 가리키듯이, 에베소 신자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았다.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마음에 품어 과거를 새롭게 하며,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돌아서라고 촉구하며, 회개하라고 우리를 권고하신다. 전 교회는 회개하라는 요청을 받는데, 이는 전 교회가 사랑이 식었음을 암시한다. 회개는 삶의 전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현재의 상황을 단호하게 깨뜨리는 것이다.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은 사람으로 첫 수고를 하도록 움직이게 한다. “첫 수고”“첫 사랑”의 결과다. 필립 휴즈(Philip E. Hughes)는 이렇게 말한다.

첫 사랑에서 떠나는 것은 타락이다. 그것은 헌신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쇠 퇴의 증상이다. 왜냐하면 첫 사랑과 첫 수고는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전자에 게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첫 사랑이 사라지면 첫 수고도 사라진 다. 첫 수고는 이기심 없는 열정과 기쁨의 헌신이 그 특징이 된다. 첫 사랑을 회복한 다는 것은 첫 수고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안녕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25)
그리스도인이 첫 사랑의 경험으로 돌아가면, 언제나 첫 수고의 경험을 낳는다.

 회개의 증거는 하나님과 동료 신자들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꼴지어진 헌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에베소 신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은 탕자의 경험을 반사한다. 탕자는 먼 나라에서 돌연히 자기 집과 자신이 누렸던 이전의 신분을 기억하고 단호하게 돌이켰다(눅 15:17-19). 마찬가지로, 에베소 신자들은 그들의 이전 헌신을 기억하라고 촉구 받는다. 그들은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그들의 헌신을 특징지었던 그 일들을 시작해야 한다.26)

 만일 에베소 신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처음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증인들은 촛대로 언급된다(11:4).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되라는 요청을 받은 것같이(사 42:6-7; 49:6; 60:1-3 참조), 에베소 교회도 그러한 요청을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에 빛이 되라는 부르심을 거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빛을 가진 백성이었던 그들을 제하시고 그 부르심의 기장(emblem)을 교회로 옮기셨다.”27)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서 빛이 되라는 요청을 받는다(마 5:14-16; 빌 2:15). 만일 교회가 빛을 비추라는 그 부르심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그 존재의 본질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옮겨졌듯이, 그 증거의 촛대는 그 자리 에서 옮겨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22:14 참조), 이 구절은 “그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창 2:9)가 있던 에덴동산을 상기시키는데, 그 동산 안에는 창조시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의미하였다(창 3:22). 범죄 후, 아담과 하와가 추방되고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그 실과를 먹는 것이 금지된 것은 바로 그 동산에서였다(창 3:23-24). 이 상황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뀌었다. 그리스도를 신실히 따르는 자들은 (요한계시에서는 회복된 에덴동산이라고 묘사된) 새 땅에서 그 생명나무에 접근할 것이다. 그 곳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다(계 22:2), 생명나무는 사망과 고통이 없는 영생을 상징한다.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는 회복된 에덴의 영원한 집이 약속되었다. 그 곳에서 이기는 자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영생의 선물을 갖게 될 것이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에베소 교회에 보낸 기별은 복음을 위한 열정적 사랑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강력한 호소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며, 초창기에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헌신했을 때, 그들이 신앙 공동체 내의 다른 신자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의 “수고”를 했는지를 음미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그리스도의 기별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즉, 그 관계를 새롭게 하는 출발점은 첫 사랑의 경험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탕자처럼(눅 15:11-24),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첫 사랑의 경험으로 돌아가고, 그 관계의 초기 특징이 되었던 “첫 수고”를 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으로 삼아야 한다.

 전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한 편으로는 사랑해야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순종해야 하는 일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복음의 사랑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복음의 순종적 측면을 쉽사리 도외시할 수 있다. 의무와 건전한 교리의 보존에 초점을 맞춤으로 종종 이단을 폭로하고 그것을 대항하여 싸우면서,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자주 피차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춤이 없이 교리와 교회 질서를 옹호하는 것은 무용하며, 복음에 기초되지 아니한 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생명이 없는 죽은 종교다. 참 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인데, 한 편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또 다른 한 편은 피차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 수직적, 수평적 관계에 기초되어 있다.
역사적 적용.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예수님의 기별을 그 지역적 의미를 넘어서 기독교 역사의 특정 기간에 적용하고자 애쓸 때, 그 교회의 상황이 충성과 선행의 특색이 있는 사도시대(그리고 그 이후 얼마간)의 기독교회의 영적 상황과 일치함을 발견한다. 이 기간은 복음에 대한 사랑과 충성으로 꼴 지워진 교회의 위대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즈음, 곧 일세기의 마지막 십 년에, 그리스도인 교회는 그 첫 사랑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 리하여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성에서 떠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1세기의 기독교를 적절히 대표할 수 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2:8-1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서머나.
 서머나는 현대의 이즈미르(Izmir, 터키 서부의 항구-역자 주)로 에게해 동쪽 해안의 브리기아와 리디아 교차로에 위치한 무역 항구도시였다.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40마일(64km) 지점에 있었다. 1세기경, 인구 약 20만 명 정도의 서머나는 자유 도시의 위상을 지닌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과학과 의학이 발달했던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유명한 육상 경기장, 도서관, 그리고 약 2만 명 수용이 가능한 그 속주에서의 가장 큰 공공 극장은 서머나의 자랑거리였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으며, 빼어나게 아름다워 ‘아시아의 영광’ 이라고도 불렸다. 유명한 서사시인 호머의 출생지로 로마와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대 세계에서 데아 로마(dea Roma, 여신 로마)를 위하여 신전을 건축한 최초의 도시라는 설도 있다.

 서머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환난과 궁핍”(계 2:9)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로 인해 교회는 비참하게 되었고,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첫째, 그 도시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즈음, 황제 숭배는 의무적이었다. 일년에 한 차례 모든 로마 시민들은 신성한 가이사의 제단 앞에서 향을 피우는 종교적 의무를 해야 했으며, 그렇게 할 때 증명서가 발부되었다. 거절하면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에 참여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서머나 사람들은 매우 공공연하게 그들을 대적하였다.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두 번째 요소는 거대하고 강력한 유대인 집단으로,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다. 신랄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일에 이방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지방 정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 을 모욕하고, 악의적인 고소를 하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대항하도록 선동하고, 그리 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당국자들을 자극하였다(그리스도인들은 식인 행습, 무신론자,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28) 요한은 이 유대인들을 “사단의 회”로 묘사하였다.(3:9). 무서운 위험에 빠져 있었을지라도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충성하였는 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극심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였다. 순교당한 사람들 중에는 2세기 전반 서머나 교회의 유명한 감독이었던 폴뤼카르푸스(Polycarp)가 있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에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을 알게 되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헬라어에서 ‘살아나셨다’ 라는 말은 부정과거 시제로서 과거에 완성된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환난.
 헬라어 쓸립시스(thlipsis)는 기본적으로 ‘압박’, ‘부서질 정도로 무겁게 누르는 무거운 짐’ 등을 의미한다.
가난.
 헬라어 프토케이아(ptöcheia)‘극심한 가난과 궁핍’, 곧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의 미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
 요한계시록 2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또한 본 주석의 서론 중에서 “아시아 교회의 외적 문제”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두려워 말라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라.
 헬라어에서 현재명령법은 계속적이고 지속 적인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현재시제는 당시의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이 걱정하고 두려워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열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열흘이 시간적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에 대한 고대의 통상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창 24:55; 삼상 25:38; 단 1:12-15; 행 25:6 참조).30) 데이비드 아우니는 모든 손가락의 합이 열이라는 사실과 아마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1)‘열흘’은, 바벨론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시험했던 열흘처럼, 서머나 공동체의 충성과 인내를 시험하는 기간을 대표한다(단 1:12-15).32)
생명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용어는 야고보 1장 12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밖에 신약에서 의의 면류관(딤후 4:8),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등으로 부른다. 면류관에 대하여 사용된 헬라어에는 왕관에 해당하는 디아데마(diadéma, 이 말에서 영어의 ‘diadem’이 파생 되었다)와 본문에서 사용된 스테파노스(stephanos)의 두 단어가 있다. 스테파노스는 왕관(王冠)이 아니라, 잎이나 꽃으로 만들어진 화관(花冠), 곧 승리의 관이다. 그것은 서머나에서 열린 올림픽 게임에서 승리한 경주자들에게 주어졌으며, 승리에서 오는 기쁨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종말적 선물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스테파노스“없어질 면류관”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 승리한 교회는 그 머리 위에 열두 별들로 된 스테파노스를 쓰고 있다. 이 구절에서 “...의(of)”‘... 으로 구성된’을 의미하며, 따라서 생명의 면류관은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생명을 받는 것이다.33)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가장 근접한 도시로서 에베소 북쪽 약 40마일(64km) 지점에 있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낸 기별은 일곱 기별 중에서 가장 짧다.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소개하신다(2:8; 1:7 참조),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소개는 계속적으로 무서운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에게 매우 적절하다. 이 말은 요한이 일찍이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들었던 말씀이다. “두려워하는 것을 멈춰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살아 있는 자요 나는 죽었었노라. 보라 내가 영원토록 살아 있느니라.” (1:17-18) 우리는 일찍이 “처음이요 나중이요.”라는 표현이 구약의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보았다. 예수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상기시킴으로 당신의 기별을 시작하신다. 그분은 삶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셨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자신을 서머나 신자들과 동일시함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자신이 직접 어려움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 받는 백성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이라는 그 약속에 신실하시다.
요한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은 무서운 위기에 처해 있다. 환난은 헬라어로 부서질 정도로 무겁게 누르는 짐밑에서 겪는 호된 시련을 의미한다. 이 압제는 외부, 즉 황제 숭배의 요구와 중상 모략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왔다. 둘째, 신자들은 너무도 가난했다. 헬라어 본문이 암시하듯이, 그들이 가 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가난은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핍박의 결과다. 그것은 물질적 부를 자랑하며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나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뚜렷이 대조된다(3:17), 가장 부요한 도시들 중의 한 곳에서 살고 있었으나,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은 극도로 가난하였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은혜와 믿음에는 부요하였다.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
 서머나 신자들은 외부로부터 엄청난 압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더 어려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들은 열흘 간 - 즉,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열흘간 시험을 받은 것같이(단 1:12-15),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시련 받으며 투옥 당할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일지라도, 이 시험은 매우 혹독할 것이다. 고대 세계의 감옥은 일반적으로 피소된 자가 사형 또는 유배의 선고를 기다리던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네가 바야흐로 받으려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멈춰라.
 이것은 오히려 부드러운 견책처럼 들린다. 분명 서머나 신자들은 걱정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는 것을 멈춰라! 내가 관할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을 경험하였고, 다시 살아났다. 나는 처음이 요 나중이요, 나는 나의 약속에 신실하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다시 권면하신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이 교회는 이미 신실하였는바, 예수님은 계속적인 충성을 재촉하신다. 충성의 상급은 “생명의 면류관,” 즉 생명으로 된 관이다. 그것은 왕관이 아니라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 즉 화관으로, 승리에서 오는 기쁨을 암시한다.

 서머나 신자들은 그들의 눈을 상급에 고정시켜야 한다. 압제와 고통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며, 충성하는 자는 상급을 받을 것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바울은 확신과 큰 기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참으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끝까지 충성하는 자는 생명으로 이루어진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둘째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은 악한 자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20:14). 그것은 영생과 정반대이다. 서머나 신자들은 육체적 죽음을 계속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성된 자에게, 육체적 죽음 은 일시적인 것이며 잠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활의 소망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둘째 죽음이다. 즉, 부활이 없는 영원한 사망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인하여,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분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 를 가지고 계신다(계 1:18),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히 살아계신다. 충성된 자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므로 의인들에게 임할(계 20:14; 21:8)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계 20:6 참조).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삶의 압제하에서, 또는 적대 주의와 불의의 압제하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용된다. 이 기별은 다가오는 고난이 두려워 무서워할 자들을 위해 주신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권면하신다. “두려워하는 것을 멈춰라! 내가 통제하고 있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현재 일이나 영원한 것이나, 아무것도, 아무도, 너희를 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참조)
역사적 적용.
 서머나 교회의 경험은 2-3세기 동안 로마제국 전역에서 신실한 기독교회가 당했던 혹독한 핍박의 기간과 일치한다. 역사주의적 해석자들은 일반적으로 “열흘”(2:10)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시작하여 그의 후계자 갈레리우스(Gallerius) 때가지 이어진 악명 높았던 제국의 간헐적인 핍박(서기 303-313년)에 적용시켰다. 또한 복음의 단순성에서 더 멀리 떠나버린 것이 이 기간의 특징이었다. 이렇듯, 서머나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2세기 초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윤허하는 유명한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을 발하는 서기 313년경까지를 대표할 수 있다.
버가모 교회에게 보낸 그리스도의 기별 (2:12-17)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요한 당시 버가모는 서머나 북동쪽 40마일(64km) 정도에 위치한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의 수도였다. 버가모는 정치적 중요성 외에도, 전 헬라 문명권에서 지식의 중심 지로 각광 받았다. 약 20만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버금가는 유명한 도서관이었다. 버가모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 의과대학에서 수학한 고대 세계의 명의(名醫) 갈렌(Galen)의 고향이었다.

 또한 버가모는 거대하고도 중요한 종교 중심지로 제우스(Zeus), 아테나(Athena), 디오니 수스(Dionysus),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 등을 위해 세워진 장엄한 신전으로 유명했다. 그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는 커다란 제우스 제단이 서 있었는데, 그 제단의 중심부는 베를린의 버가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불쑥 튀어나온 바위턱에 자리잡은 높이 40피트의 제단은 마치 언덕의 중턱에 위치한 큰 자리 혹은 보좌 같았다. 온종일 그리고 날마다 제우스에게 바친 희생제물의 연기가 피어 올라갔다.”34) 그 도시 근처에는 치료의 뱀 - 신인 아스클레 피오스(Asclepios)의 거대한 신전이 서 있었다. 요한 당시에 그 신전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왔다. 버가모는 진정 “아시아 속주의 루르드”[Lourdes, 성모 마리아가 현현한 곳이라고 알려져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프랑스 남서부의 소도시 역자 주]였다.35) 제우스와 아스클레피오스는 ‘구주’라 칭함을 받았고, 뱀 (현대 의료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으로 대표되었다. 이렇듯 버가모는 황제 숭배를 지지하는 아시아의 첫 도시였으며,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헌당된 신전이 있었다. 이로써 왜 그 도시를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으로 불렀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어디 사는 것.
 헬라어 카토이케오(katoiked)‘정착하다’라는 뜻으로 영구적인 거주를 의미한다.
사단의 위位, throne.
 헬라어 쓰로노스(thronos)‘보좌’‘권위의 자리’를 의미한다 (마 19:28; 눅 1:32 참조), ‘사단의 위’란 아마 그 도시를 이방인의 종교 생활과 황제 숭배의 본거지로 지칭하는 구절이다. 버가모는 제우스와 아스클레피오스의 숭배지로 유명하며,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뱀을 상징으로 하는 종교 - 뱀을 신 자체가 성육한 것으로 간주하여 ‘구주’라는 칭호를 쓰면서 뱀과 교제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을 전율시키며, 그들에게 사단은 “옛 뱀”(계 12:9)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그리스도인들은 버가모를 사단의 위가 있는 곳으로 불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위험은 황제 숭배를 요구한 데서 기인되었다. 그 도시는 황제 숭배에 있어 아시아 속주의 중심이었다. 요한 당시, 황제 숭배는 모든 시민들의 신성한 의무였다. 그 도시의 모든 시민은 일 년에 한 차례 버가모의 지방 장관 앞에 나타나 “가이사는 구주십니다”라고 말하면서 향을 집어 황제의 흉상(胸像) 앞에 드려야 했다. 그런 다음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황제 숭배는 로마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것으로, 그 숭배에 참여하여 증명서를 받기를 거절하는 것은 핍박과 죽음을 의미했다.36)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거주한” 바로 그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하고 부인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계 2:13 참조).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헬라의 흔한 이름인 ‘안디바(Antipas)’는 필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며 끝까지 충성한 버가모의 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그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전혀 없으나, 그의 순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받은 대가였을 것이다. 후기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 중에 “청동 황소 속에서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37) 일반적으로 헬라어 마르튀스(martus)‘증인’이라는 의미다. 초기 교회 후반, 많은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그들의 신앙 탓에 죽임을 당했을 때, 마르튀스는 순교자, 즉 “죽기까지 증거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되었다(계 1:5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들은 분명히 니골라 당과 관련이 있는데, 발람과 니골라 당의 추종자들은 하나로 동일한 그룹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과 음행과 관련하여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도덕적 타협을 조장하였던 버가모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상징하였다(계 2:6의 어구 해설 참조).
회개하라.
 헬라어 부정과거 명령법은 뒤돌아서는 결정적 행위를 암시한다(계 2:5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감추었던 만나.
 유대 전승에 의하면, 언약궤 그 속에 기념물로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출 16:32-34; 히 9:4 참조)는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 예레미야가 시내산 바위틈에 숨겼으며, 메시야가 올 때까지 언약궤 속에 있을 것인 바,38) 그 때에 만나는 메시야 왕국의 음식으로 복원될 것이다. “그 일은 만나의 보고(寶庫)가 하늘에서 내려올 그 때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만나를 수년 간 먹을 것이다.”39) 버가모 교회 상황에 비춰 볼때, 감추었던 만나는 이방신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늘 만나 곧 “천사들의 떡”(“권세 있는 자의 떡”, 한글 성경 시 78:25)을 먹는 일에 참여함을 상징한다.
흰 돌.
 고대 세계에서 흰 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어졌기 때문에 “흰 돌”에 대하여 여러 제안이 있었으나, 어느 견해도 만족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문맥상, 흰 돌은 필시 텟세라(tessera) 즉,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수여되었던 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돌 위에 승리자의 이름이 새겨졌는데, 그것은 그에게 공공 축제에 입장하는 것을 포함하여 특별한 명예와 특권들을 부여하였다. 흰 돌은 버가모 교회의 승리자로 하여금 하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계 19:7-9).
(주해)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로 나타내신다(계 1:16 참조). 버가모에 본부를 둔 로마 총독은 검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생사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공언하였다. 그의 명령에 의해 어떤 사람이라도 현장에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으며, 어느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어느 순간에도 권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 보낸 기별의 바로 첫마디는 최후의 판결은 여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분에게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촉구한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하다(히 4:12),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사단적인 강함’이 있을지는 모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 강력하다.4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참으로 그분이 통제하고 계신다.
요한계시록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가.
 예수님은 이 교회의 상황을 완전히 아신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예수님은 버가모가 매우 위험한 곳임을 아신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대적하는 종교적, 도덕적 분위기 가운데서 살았다. 헬라어 본문은 그들이 버가모에 영구적으로 살았음을 암시한다. 한 편으로, 그들은 이교주의와 이교의 장엄하고 황홀한 신전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이교의 종교적 생활 양식과 부도덕한 관습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교의 생활 양식 그 자체만으로도 버가모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다는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황제 숭배는 이 교회에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였다. 어느 때나 당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소환할 수 있었고, 황제를 숭배하라고 명하고, 핍박과 죽음으로 위협하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명할 수 있었다. 타협한 자들은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이것이 그 도시로 하여금 사단이 거하는 장소, 그의 가장 강력한 통치의 장소가 되게 하였다. 13절에서, 그 도시를 사단의 통치와 거주지로 반복하여 거론한 것은, 버가모가 그 곳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장소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암시한다.

 그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충성하였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생활을 하기에 매우 위험한 곳인데,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살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 곧 사단의 가장 강력한 통치가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며 확고히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아마 버가모 교회의 충성된 자들 중 한 사람이었을 안디바가 경험한 것같이, 핍박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까지 충성하였다.

 안디바를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 자신의 칭호다(계 1:5; 3:14). 초기 교회에서 헬라어 마르튀스‘증인’이나 ‘순교자’라는 두 가지 뜻이 있었는데, 이는 진리를 증거한다는 것은 종종 순교자가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순교자이시며,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는 모든 이들은 종종 그 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는 자는 종종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다. 꼭 자기 생명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원칙들을 고수하기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디바에게 주셨던 것처럼 충성된 자들에게 “그분 자신의 칭호보다 못하지 않는” 칭호를 주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통과하신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종국에는 그분과 함께 영광을 공유하게 될 것을 뜻한다.41)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평가는 전혀 유쾌하지 않다. 버가모 교회의 신자들은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다. 안디바와 같이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들었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세속적인 행위와 생활 양식 등과의 어떠한 타협에도 반대하였다. 반면, 버가모의 다른 이들은 발람니골라 당의 교훈을 붙 들었다. 에베소 신자들이 니골라 당의 기만적인 교훈의 파괴력을 인지한 반면,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들은 이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였고, 그들의 종교에 타협하였다. 발람과 니골라 당이 함께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일찍이 그들을 에베소에서 만났고, 또다시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만날 것이다. 이 거짓 교사들은 타협을 옹호하였고, 핍박을 피하기 위해 “세상의 표준과 타산(打算)적으로 타협하는 것” 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동료 신자들을 설득하려 했다(벧후 2:15; 유 11 참조).42)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라는, 즉 세상과 분리되라는 요청을 받는다.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고후 6:17). 그러나 이 분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나 분리 또는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제자들을 데려가기를 기도하지 않으시고 “악한 자”에게서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15-16),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바울의 본을 좇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고전 9:22) 되어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할 것이다. 기독교를 세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타협한다.’ 그런데 니골라 당의 문제는 그들이 세상에서의 곤경과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충성에 있어 ‘타협책’을 쓴 것이었다.43)
요한계시록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
 버가모 교회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권면과 흡사하다(2:5 참조). 그러므로 회개하라. 만일 타협을 옹호하는 자들이 회개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두려운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속히 임하여 그의 입의 검으로 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훈계는 검으로 발람을 징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환기시킨다(민 22:23, 31-32), 미디안 족과의 전쟁에서, 발람은 자신이 부추겨서 범죄 하도록 만든 자들과(민 25:5) 함께 검으로 살해되었다(민 31:8). 유사한 심판이 버가모의 발람 당과 니골라당에게 주어졌다. 히브리서의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쪼갠다(히 4:12). 바울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언급한다(엡 6:17). 그러므로 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헬라어 현재시제는 실제적인 경고를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싸우기 위하여 가는 중인데, “그의 입의 검”으로 심판하신다(계 19:13-15 참조), 임박한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결정적으로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삼중의 약속이 주어졌다. 그들은 감추인 만나, 흰 돌, 그리고 그 돌 위에 쓰인 새 이름을 받을 것이다. 버가모의 거짓 교사들은 증명서를 얻고 곤경을 피하기 위해 우상들에게 드려진 이방의 음식을 먹음으로 타협하였다. 끝까지 충성하고 이교 축제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하늘의 음식 축제 - 감추인 만나 “천사들의 음식”(시 78:25, 한글 개역, “권세 있는 자의 떡”)에 참석할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이 떡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들고 타협하기를 거절한 승리자들만을 위하여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증명서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상급으로서 그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을 것이다.

 성경에서 새 이름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대표한다(창 17:5; 32:27-28; 사 62:2; 65:15; 계 14:1 참조), 버가모 교회에 대한 핍박과 거짓 고소들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새 이름은 ‘좋은 이름’의 품위가 회복됨을 의미한다. 그 위에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은 이기는 자에게 재림시 하늘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특별한 특권을 부여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는 복이 있도다.”(계 19:9)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은 끔직한 환경 아래서도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기별을 분명히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에서 “충성된 증인”의 삶을 살라는 요청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사단의 영향력과 권세가 막강한 버가모에 있다면, 그들은 그 곳에 살면서 친히 “충성된 증인”이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임을 드러내야 한다.44)
역사적 적용.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교회 역사에 적용하자면, 서기 313년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의 기간이 이 교회의 상황과 적절히 맞는다고 본다. 교회는 마 침내 이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기독교가 국교로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나 외부의 압력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통이 점차적으로 가르침과 신조의 원천인 성경을 대신하고 있었다.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간 동안 요동하지 않고 복음에 충성하였으나, 4-5세기의 기독교 시대는 영적 퇴보와 배도로 특징지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교회는 타협의 유혹과 씨름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2:18~29)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두아디라.
 두아디라는 버가모 남동쪽 약 40마일(64 킬로) 지점에 위치하였다. 두아디라는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시로, 특별히 종교적, 정치적으로 주 목할 만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유력한 상업 도시로, 두아디라의 염색 공장과 자줏빛 모직 제품은 유명하였다. 빌립보의 자주비단 장사 루디아 - 유럽의 첫 개종자는 두아디라 출신이었다(행 16:14), 두아디라의 시민들은 버가모 사람들과는 반대로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분명히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황홀한 이방 종교나 이방의 생활 방식이 주는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 숭배의 압력이나 유대인 반대자들의 협박도 받지 않았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위협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왔다. 두아디라에는 많은 무역조합(guilds)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이 도시에서 교회에 대한 위협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무역조합에서 왔을 것이다. 상인이나 무역업자는 조합원이 되지 않는 한 직업을 갖거나 돈을 벌 수 없었다. 두아디라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역조합에 가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로 이 점이 커다란 문젯거리였다. 조합원들은 이방 신전에서 행해진 조합 축제에 참여해야 하였고, 주로 조합의 수호신에게 바쳐진 고기로 준비된 공동 식사를 해야만 하였다. 종종 축제는 술 취함과 부도덕한 행위들로 끝났다. 공동식사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자들은 모욕과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제재라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요한계시록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헬라어 접속사 카이는 이 곳에서 보충 설명을 하는데, ‘즉’ 혹은 ‘곧’이라는 의미다.
요한계시록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자 이세벨.
 ‘이세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적 선물을 가졌노라고 주장하며 큰 권세를 행사하였던 두아디라 교회의 한 두드러진 여성에 대한 상징적 이름일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우상 숭배를 도입함으로 이스라엘의 믿음을 부패시킨 구약의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왕상 16:31-33). 그녀가 누구였든지 간에,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그럴듯한 말로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두아디라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의 축제와 무역조합이 벌이는 축제 또한 그것과 연관된 활동에 참여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던 이세벨은 세상의 표준들과 타협하라고 종용하는 어떤 운동조직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역조합들과 관련된 활동들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였다. 이 활동들에는 종종 이방신들에게 바쳐진 음식과 술과 성적 부도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사업과 상업적 번영의 이해 관계에서” 행해졌다.45) 타협에 대한 그녀의 그럴듯한 가르침은 아시아 속주의 지역 신자들에게 많은 해를 끼친 에베소와 버가모의 니골라 당과 발람 당의 가르침과 꼭 같았다(계 2:6의 어구 해설 참조). 그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이 여선지자의 유혹을 받아 타협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었”다(계 2:20).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이것은 분명히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칠십인의 아합 왕의 자녀들에 대한 은유다(왕하 10:6-8). 물론, 요한계시록 2장 23절의 말은 상징적으로 취해야 한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예레미야 17장 10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신장(종종 ‘마음’ 으로 번역됨)과 심장을 살피는 일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음을 말한다(왕상 8:39; 잠 24:12 참조). 고대 세계에서 신장은 “감정의 중심”으로, 심장은 “지성 또는 의지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46)
요한계시록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것"-그리스도인 이 성령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지식(고전 2:10; 롬 11:33-34 참조)에 대하여 말한다. “소위 사단의 깊은 것들”이라는 구절은 니골라 당의 잘못된 가르침을 언급하는데,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할 수 있다. 즉, “사단의 깊은 것”을 아는 (죄를 모두 경험한)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은혜를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무역조합들의 활동에 가담하기를 두려워했던, 그리고 사도들의 기본적인 교훈에 충실하였고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켰던 사람들은 동정심을 가지고 우러러 보아야 한다.47)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이 말은 예루살렘 회의가 내린 결론과 관련이 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행 15:28-29)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은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길다. 예수님은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신다(계 1:14-15 참조). 서론적 묵시에서 예수님은 “인자”(1:13)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에 대한 묘사는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상기시킨다.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다(10:6), 불꽃 같은 눈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예리한 능력을 상징한다.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그분의 타협없는 요지부동을 암시한다. 교회는 분명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계 2:23)의 예리한 분별력에 의해 고강도의 면밀한 검사를 받고 있다.
요한계시록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요한계시록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두아디라 교회는 확실히 양분(兩分)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봉사와 인내를 통해 사랑과 믿음이 매우 충만한 활동적인 교회다. 신약에서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간다(갈 5:6; 엡 1:15; 6:23; 살전 3:6; 딤후 1:13; 몬 5 참조),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며(살전 1:3; 히 6:10), 인내는 믿음의 산물이다(골 1:23; 살후 1:4; 히 6:12). 요한계시록에서 믿음과 인내는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의 중요한 특징이다(14:12; 13:10 참조), 더욱이 두아디라 교회는 점차 개선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활동적인 교회라 하여 항상 믿음이 있는 교회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클리가 말하듯이, 교회에 대한 위협은 교회 밖에서 오지 않았다. 즉, 박해나 매력적인 이교 숭배, 또는 황제 숭배로부터의 위협이 아니었다. 위협은 오히려 내부에서 왔는데, 즉 하나님의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회에 가장 위험한 교리, 곧 ‘타협의 교리’로 교회를 곁길로 가게 한 자들로부터 온 위협이었다. 이 배도한 그룹은 참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바알 숭배로 대체함으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구약의 여왕 이세벨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다.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자칭 여선지자라고 불린다(2:20), 초기 교회에서 여자들도 예언의 선물을 받았다(눅 2:36; 행 21:9), 예언의 선물은 대단한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그 선물을 가졌노라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에베소와 버가모 교회 등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다. 이 두 교회들이 동일한 거짓 가르침에 둘러쌓여 있던 반면, 두아디라 교회는, 헬라어 본문이 분명히 암시하듯이, 그 가르침을 허락하였거나 묵인하였다. 그 여선지자는 세상의 표준을 따르도록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조장하여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회중이 그녀의 매혹적인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자”로 언급된 소수의 사람만이(계 2:24) 그녀의 매혹적인 영향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요한이 전한 복음에 충성하였다. 에베소 교회가 열정적인 사랑이 결핍된 채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율법주의가 되어 교리적으로 건전치 못한 자들을 엄격하게 검열하고 취급했던 반면, 두아디라 교회는 또 다른 극단으로 흘러갔다. 사랑과 복음을 강조함에 있어, 이 교회는 건전한 교리와 행위를 왜곡시킨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였다. 그리하여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과 교회의 연합에 굉장한 해를 끼쳤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인과 그 추종자들의 타협적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 분은 몇 가지 단호한 조처를 취하셨다. 첫째, 그분은 그녀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다. 그녀가 회개하기를 고집스럽게 거절했기 때문에, 그분은 그녀와 더불어 음행을 저지르는 자들(즉, 그녀의 추종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은 종종 음행이라는 말로 표현된다(출 34:15-16; 신 31:16; 호 9:1; 마 12:39; 막 8:38). 세상과 타협하고 그것을 따르려고 한 이세벨과 그녀의 동류들은 여기서 영적 불륜을 저지른 자들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최종적 조치로서, 예수님은 재앙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겠다고 경고하셨다. 비록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매우 심각한 경고다. 이 타협하는 무리에게 집행될 심판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속(敎)의 목적을 띤 하나의 경고 역할을 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2:23). 신장(정서의 자리)과 심장(지성 또는 의지의 자리)을 살피는 일은 하나님께만 속하였다(렘 17:10; 참조 왕상 8:39; 잠 24:12),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내밀한 생각들과 감정들을 꿰뚫을 수 있고 동기를 살피시는 오직 한 분의 예리한 눈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꿰뚫는 시선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계시록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요한계시록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면.
 예수님은 두아디라의 충성된 자들을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충성된 마지막 때의 백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12:17), 남은 이 사람들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동사는 지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관계를 포함하여, 경험을 통해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창 4:1; 19:5, 8 참조), 이 남은 자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사단의 기만적 교훈의 깊이를 경험하는 영적 간음에 연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사단의 기만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것이 없고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들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짐”은 분명히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에 의해 내려진 지시를 가리킨다(행 15:28-29 참조).
요한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요한계시록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요한계시록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두아디라의 이기는 자들, 즉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들은 두 배의 약속을 받는다. 첫째, 그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시편 2편 8-9절의 말씀을 기억한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8-9)

 예수님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다(게 12:5; 19:5; 마 28:18; 계 12:10 참조), 두아디라 교회의 신실하고 충성된 남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분과 권세를 공유하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계 1:6; 3:21 참조), 시편 2편에서 주어진 그 약속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20-22장에서 실현된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은 보좌 위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다스릴 것이다.

 두 번째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발람의 예언을 생각나게 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것이다(민 24:17), 바클리가 지적하듯이, “새벽별의 약속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약속이다.”49) 정복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분과 함께 통치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특별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다. 그들은 결코 그분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할 것이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두아디라 교회의 소수 신자들이 겪은 경험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인내에서 나타난 사랑과 믿음이, 심지어 교회의 다수가 세상의 표준과 타협하는 길로 가고, 비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을 따라가는 교회들에서도 경험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그리스 도인의 봉사와 인내는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감화력의 결과로, 그것들은 호의적인 환경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 적용하자면 두아디라 교회의 시기는 중세시대, 소위 암흑시대 (6세기부터 16세기)와 잘 부합한다. 교회의 유전(전승)이 교훈과 행위의 근원인 성경을 대신하였을 때, 두아디라 시대는 기독교 역사에서 어둡고 어려운 시기였다. 교회는 참된 성경적 교리와 선행을 가르치는 것보다 오히려 죄된 행동과 거짓 가르침, 그리고 성경과 모순되는 것들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복음의 단순성에서 곁길로 나가도록 오도되었고, 행위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배도와 기관화된 교회의 부패한 영향력을 거절한 자들은 거절과 박해를 당하였다. 이 기간 끝에 많은 개혁의 목소리들이 일어나 종교 개혁과 복음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부르짖는 여러 운동으로 가게 되었다.
사데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3:1-6)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사데는 두아디라 동남쪽 30마일(48 킬로) 지점에 위치한, 대단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약 6세기 전, 사데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들 중의 하나로 부유한 크로이소스(Croesus) 왕이 통치한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다. 로마제국에 의해 사데는 고대 세계의 그 위광(威光)을 잃어버렸다. 요한 당시, 사데는 계속적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 영광과 자부심은 현실 보다 오히려 과거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램지(W. M. Ramsay)에 의하면, “당시 아시아의 어떤 도시도 과거의 명성과 현재의 쇠퇴 사이에서 사데처럼 침울하게 대조된 도시는 없었다.”50) 제1세기에 사데는 양털과 염색공업의 중심지였다. 시벨레(Cybele)라는 여신이 그 도시의 수호신이었는데, 그녀의 신전에는 환관 사제들이 있었다. 로버트 마운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여신(헬라의 아데미 신에 필적하는)이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51)
요한계시록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일깨워.
 사데 교회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이 권고는 그 도시의 배경에 비추어 매우 적절하다. 사데는 매우 가파른 언덕에 건축되어 천연 요새로 간주되었고, 그 방비는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 도시의 지리적 위치는 시민들로 그 안전에 대하여 과신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 도시의 성벽은 부주의하게 방비되었다. 그 도시는 먼저는 페르시아의 고레스(기원전 549)에 의해, 후에는 안티오쿠스(기원전 218)에 의해 두 번이나 기습적으로 점령당했다. 두 경우 모두, 적군들이 밤에 벼랑을 타고 기어 올라갔는데, 그들은 사데인들이 전혀 보초를 서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데가 점령되고 파괴된 것은 그 도시민들의 안전에 대한 과신으로 보초를 세우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러한 부주의가 교회에 스며들었기에 “일깨라”는 경고가 발해진 것이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이 구절은 현재 명령법으로서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태도와 행위를 암시한다. 헬라어 본문은 회고의 개념이 아니라 염두에 두라는 개념을 시사한다.
회개하라.
 부정과거 명령법은 결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암시한다(계 2:5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 옷을 더럽혔다.
 이 구절은 필시 이교적 환경, 곧 아시아 속주의 일곱 교회를 괴롭혔던 문제와의 타협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생명책.
 이 책에는 의인들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 등록부 또는 하늘의 기록책이라는 개념이 있다. 구약(출 32:32-33; 시 69:28; 단 12:1)과 신약(눅 10:20; 빌 4:3; 히 12:23)은 모두 하늘의 책 - 생명책을 언급하는데, 그 책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생명책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의 이름들이 들어 있다. 다니엘 12 장 1절에서 생명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종말적 등록부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책은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종말적인 하늘 등록부다. 그러므로 그 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이라 일컬어진다(13:8; 21:27). 어떤 이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것은 그에게서 영생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후의 심판 때, 오직 그 이름이 “그 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새 땅에 들어갈 것이다(계 20:12, 15; 21:27).
(주해)
 사데 교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소개하신다. 교회에 보낸 다른 기별에서와 같이, 이러한 그림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종합적으로 묘사한 것에서 끌어왔으며, 사데 교회의 특이한 상황에 적절하다(계 1:16; 1:4 참조), 사데 교회의 신자들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각성케 하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그들에게 임하신다. 성령만이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롬 8:11 참조). 일곱 별은 교회의 “일곱 천사”, 즉 지도자들을 상징한다(계 1:20),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운명을 그분의 손에 쥐고 계시며,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경고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가.
 평가 시작부터 이 기별의 음조는 경보를 발한다. 사데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칭찬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견책만 받는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특별 한 죄나 이단 사상으로 꾸지람을 받지 않고, 다만 생명력이 없음에 대해 견책받는다. 그 교회는 살았고 활동적이라는 대단한 명성을 얻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 여기서는 성령의 역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신약은 종종 죄를 죽음으로 표현한다. 사람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는다(엡 2:1).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살아난다(롬 6:13; 엡 2:5).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탕자는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눅 15:24). 실제로는 죽어 있으면서 영적으로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자들이다. 사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도시의 특정적 상태에 동화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생명도 영도 없었다.

 사데 교회는 분명히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살았고 활동적이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다. 즉,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표준에 달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분명히 이교적 환경과 타협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옛 이야기이고, 그들의 영적 상태는 무기력하고 죽었으며,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하고도 산 믿음이 있는지를 문제 삼을 만큼 그런 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곳에도 “남은 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4절은 그들을 사데에 ... 몇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충성되고 확고하였다. 이 소수의 신자들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타협할 때, 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이 소수조차도 더 이상 영적 진전을 이루지 못해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었으며, 사데 교회 내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동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생명력 없는 교회의 상황은 아직 절망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무기력에서 탈출하고 다가오는 심판(3:3 참조)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잠에서 깨어나 계속 일깨어 있는 것이다. 이 경고는 사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들의 무기력한 상태는 계속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결과였다. 분명히 사데 교회는 사데 도시가 당했던 것과 꼭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즉, 그 도시는 자만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원수들로부터 두 번이나 함락되고 멸망되었다(계 3:2의 어구 해설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를 경고하시기 위해 이 역사적 사건들을 이용하신다.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하며, 그들의 생명력 없는 상태에서 깨어나 경계를 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그렇지 않으면, 부활의 소망이 없는 죽음이 뒤따를 것이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데의 그리스도인 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이 받았고 들은 것에 유념하라(계속적으로 기억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헬라어 본문은 그들이 잊어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자신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그들은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첫 사랑과 이전의 헌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새롭게 하여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데 신자들은 그들이 받았고 들은 것에 대하여 유의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데 교회의 신자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와 함께 그들의 현 상태에서 단호히 탈피하라고 촉구하신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처럼(눅 15:17-19), 사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전 신분을 기억해야 하며, 그들의 무기력한 현 상태로부터 결사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바클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이란, 사람이 옛 습관을 끊어버리고 새 습관을 시작하려는 결단의 순간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만일 일깨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만일 교회가 일깨지 않으면, 예수님은 생각지 않은 때에 심판으로 임하실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은 때에 도적이 오는 것같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임하심은 밤에 오는 도적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42-44; 막 13:35-37; 살전 5:2; 벧후 3:10 참조). 더욱이 그분은 졸음이 오는 무기력한 상태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데 교회에 경고하면서, 재림에 관하여도 언급하셨음을 암시한다. 사데 교회의 신자들은 그들의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 있지 못했으며,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재림에 고정되어 있지 못했다. 여기서 그들은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다. 만일 그들이 일깨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강림은 기습적으로 임할 것이다.

 소수의 남은 자들은 사데에서 신실하였다. 본문은 그들이 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타협하므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는 약속을 받는다. 이 약속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7장 9-17절19장 7-8절에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그 나라에서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본다(계 19:8; 3:18; 6:11 참조).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오늘날도 충성된 사람들은 심판 받을 때 ‘합당한 자’로 발견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사데 교회의 승리자들은 삼중의 약속을 받는다. 첫째, 그들은 흰 옷을 입을 것이다. 이것은 사데의 남은 자들에게 앞서 주셨던 약속의 반복이다(3:4). “그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계 7:14) 자들은 그 흰 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로 발견 될 것이다(계 6:11 참조), 바클리에 의하면, 로마인들이 승전을 축하할 때, 로마의 모든 시민들은 흰 옷을 입었다.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흰 옷은 승리를 얻고 충성했던 자들을 위해 준비된 상급이다(계 7:9 참조).55)

 흰 옷과 함께, 영적으로 살았다는 이름(실제로 사데 교회의 신자들은 영적으로 죽었다.)으로부터 ‘이기는 자’ 또는 ‘승리자’라고 바뀌는 새 이름이 주어진다. 이기는 자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주신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해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출 32:32-33; 시 69:28). 요한계시록에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21:27). 그러나 이름이 도말된 사람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20:15).

 이기는 자에 대한 마지막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은 언젠가 아버지 앞에서 시인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32-33; 눅 12:8-9).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현세에서 시인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에 의해 시인될 것이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에베소 교회에 보낸 기별과 같이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에 있어 온전히 마음을 바치지 못하고 양분되어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호소다. 그들은 복음을 처음으로 듣고 받아들였을 때 가졌던 동일한 열정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귀 있는 모든 자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호소 곧 성령이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호소는,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 들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인다.

 교회가 대단한 이름과 명성과 찬란한 업적을 가질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생명력이 없고 무기력 할 수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주님께 신실하였다고 하여 언제나 신실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전심의, 또한 원래의 열정을 되찾는 유일한 길은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유념하여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명령처럼 들리는 권고, 즉 “회개하라!”는 말로 표현된 단호한 결정과 행동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식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확고하고 단호한 결단을 해야할 결정적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이 내려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이 참으로 속한 자리에 서시게 된다.
역사적 적용.
 요한 시대의 지역 교회에 우선 이 기별이 적용되는 것에 부가하여,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16-17세기의 기독교의 상태에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이 기간을 개신교의 학구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 기간으로 칭했다. 이 기간에, 한때 교회를 일깨웠던 종교개혁자들의 활발한 세대는 사라졌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뜨거운 교리적 논쟁들에 휘말려 점차적으로 생기 없는 형식주의와 영적 무기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상승세의 철학적 합리주의와 세속주의가 몰고 온 충격의 여파로, 합리주의와 신학적 논쟁에 틈을 주므로 복음의 구원하는 은혜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쇠하였다. 이 시기의 교회는, 비록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영적으로 생기가 없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3:7-13)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빌라델비아.
 빌라델비아(현대의 알라세히르 Alasehir)는 사데 동남쪽 약 25마일 (4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일곱 도시들 중 가장 역사가 짧다. 화산으로 생긴 높은 고원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빌라델비아는 견고한 성채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빌라델비아는 버가모 왕 앗탈루스 2세(Attalus II, 기원전 159-138)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그의 동생 유메네스 2 세(Eumenes II)에 대한 사랑으로 동생에게 필라델푸스(Philadelph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고, 그 도시는 그 동생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피아(형제의 사랑)로 명명되었다. 이 번창한 도시는 로마제국의 우편로(郵便路) 상에 있었다. 처음부터 빌라델비아는 리디아(Lydia)와 프리기아 (Phrygia) 지역에 헬라어와 헬라 문화를 장려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세워졌다. 그러나 그 도시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종종 지진을 겪어야 했으며, 특히 서기 17년의 격심한 지진은 사데와 인근 도시들과 함께 빌라델비아를 초토화시켰다.
진실하[신 분]사.
 여기 사용된 헬라어는 알레씨노스(alethinos)로서 그 의미는 ‘진수(眞隨)’, 혹은 ‘비현실적인’ 것과 반대되는 ‘실제의’ 라는 의미다(거짓의 반대 개념인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쎄스 alethés와 구별되어야 한다). 구약적 배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당신의 진실하심을 지칭한다(시 146:6; 사 65:16 참조).
다윗의 열쇠.
 이 비유적 표현에 대한 직접적인 배경은 이사야 22장 20~22절이다.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열쇠는 왕의 내탕고(內容庫)의 열쇠를 말한다. 히스기야 왕에게는 엘리야김이라는 충직한 종이 있었다. 그는 왕궁의 시종장으로서 열쇠를 받아 왕의 내탕고를 전적으로 관할하며 언제나 내탕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왕의 전권(全權)을 행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김에게 한 약속을 주셨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예수님은 하늘 내탕고에 들어갈 전권을 지닌 분으로 소개된다.
요한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열린 문.
 그 도시의 전략적 위치로 인하여 빌라델비아는 동방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처음부터 빌라델비아는 의도적으로 헬라 문화와 언어를 아시아 전 지역의 이방 족속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선교 도시로서 건축되었다. 로마제국의 우편로에 위치해 있으므로 빌라델비아는 진실로 헬라 사상을 전 지역에 전파하는 열린 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의 열린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부활하신 그분이 의미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빌라델비아인들이 헬라 사상을 널리 퍼뜨리도록 길이 열린 것과 꼭같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기별을 세상에 가져갈 ‘위대한 선교적 기회’를 부여받았다.57)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의 맥락에서, ‘열린 문’이라는 은유는 봉사와 복음 전파를 위한 커다란 기회를 뜻하는 것 같다(고전 16:9; 고후 2:12; 골 4:3 참고).
요한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단의 회.
 서머나 교회에서와 같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직면한 핵심 사안은 유대인 들에게서 왔다. 요한계시록 2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면류관.
 헬라어로는 스테파노스다(계 2:10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예수님은 세 개의 위대한 칭호로 자신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소개하신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구약에 서 “거룩한 자”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분의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이사야는 묵시 중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스랍들의 노래를 들었다(사 6:3).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사 57: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사 43:15; 합 3:3 참조), 또한 신약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칭호다(막 1:24; 요 6:69; 요일 2:20), 존귀하게 되신 그리스도 께서는 이 곳에서 신적 본질의 요소를 공유하고 계신다. 또한 그분은 “진실한 분”이시다(3:14; 19:11 참조). 예수님은 진짜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신실한 백성에게 하신 모든 약속에 신실하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소개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전권을 상징한다. 그분이 여시는 것은 아무도 닫지 못한다. 이사야 22장 22절은 엘리아김을 소개하는데, 그는 왕의 신실한 청지기장으로서 왕궁과 왕의 내탕고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마 28:18). 그분은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엡 1:22)로 임명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시다(히 3: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전권을 받은 분으로, 그리고 하늘의 내탕고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분으로 빌라델비아 신자들에게 제시하신다. 그분은 이제 교회의 이기는 자 들에게 여러 가지의 다른 그리고 놀라운 약속들을 주실 수 있다.
요한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형제 사랑’의 이 교회에는 위대한 기회가 부여되었다. 예수님은 그 교회 앞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봉사를 위한 기회의 열린 문을 두셨다. ‘열린 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기회에 대한 은유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효과적인 봉사를 위한 문이 열리고”(고전 16:9; 고후 2:12).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하였다(골 4:3). 안디옥 교회에 보낸 그의 보고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에 대하여 말했다(행 14:27), 하나님께서 문을 여실 때, 아무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막을 수 없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교회다.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또한 타협이나 배도에 빠지지 않았다. 그 교회는 인내하는 교회였다(3:10).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 열어 놓으신 기회의 문에 충실하셨을지라도, 이 교회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역동적인 힘에 의해 이끌리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한 기회의 문을 열어주실 때, 원수의 세력들은 그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 언제나 거기에 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봉사를 위한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을 그에게 열어주신 것을 인해 기뻐하였을 때, 그는 “대적하는 자가 많음”을 보았다(고전 16:9),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는 것에 대해 비난하셨다(마 23:13; 눅 11:52). 분명히 이런 일이 빌라델비아에서 일어났다. 이 교회는 서머나 교회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단의 회인 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것과 같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3:9; 2:9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시며, 당신 께서 그들의 대적들을 이미 처리하고 계신다는 보증을 이 교회에게 주신다. 사단의 일을 행하고 있는 그들의 원수들이 굴복하고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교회를 위하여 기회의 문을 여실 때, 원수의 모든 권세도 그 문을 닫지 못할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종말적 시련의 때에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보증을 주신다.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때라.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일관되게 악인들을 가리킨다(6:10; 8:13; 11:10; 13:8, 14; 14:6; 17:8). 이 “시험의 때”는 분명 하나님의 원수들과 당신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지칭하는데, 그 심판은 요한계시록 16장에 묘사된 대로 재림 전에 쏟아질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저 시련의 때로부터 혹은 시련의 기간 동안 당신의 충성된 백성을 지키신다는 약속을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중보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요한계시록에서, 큰 시험의 때란, 마지막 재앙이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위에 쏟아질 때를 말 한다(계 16장), 이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질 때,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땅으로부터 옮겨지지 아니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그 시련의 때에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단 12:1 참조).
요한계시록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면.
 예수님은 교회에게 당신께서 곧 올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 교회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권면을 듣는다. 윌리엄 바클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합당치 못함이 발견되어 그들의 자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진 인물의 명단을 제시한다.58) 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야곱에게 넘겨주었다(창 25:34; 27:36), 르우벤은 유다에게 넘겼고(창 49:4, 8), 사울은 다윗에게(삼상 16:1, 13), 유다는 맛디아에게(행 1:25),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방인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넘겨주었다(롬 11:11),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고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실 때, 그가 그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제하시고 임무를 다른 누구에게 맡기신다.59)
요한계시록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기는 자를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진리의 기둥과 터”다. 바울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초기 교회의 기둥들이라고 했다 (갈 2:9). 기둥은 지지대로서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은유는 “안정과 영구성의 개념을 전달한다.” 충성된 승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전을 약속받는다. 이는 그들이 결코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자들은 또 다른 약속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약속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21장 2절과 10절에 묘사되어 있다. 후에 요한은 묵시에서 그들의 이마에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144,000인을 보았다(14:1).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며 그분의 보호하에 있다(계 22:4). 여기에 더하여,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신실한 자들 위에 쓰일 것이다. 에스겔에 의하면, 새 도시의 이름은 ‘여호와삼마’(여호와가 거기에 계시다)라 할 것이다(겔 48:35). 새 예루살렘에서 승리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경험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하나님의 백성은 거의 힘이 없을지라도, 그분은 은혜롭게도 그들 앞에 기회의 문을 열어두신다. 하나님의 원수와 그 부하들이 그 문을 닫으려고 애쓰겠 지만, 하늘 곳간의 열쇠를 가진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문을 열어 놓으실 때,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그분이 통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즉 그들의 충성의 불꽃,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그 분이 역사하시도록 허락하는 일 등을 굳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아무도 그들로부터 면류관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 적용.
 빌라델비아 교회는 개신교 대 부흥(Protestantism)으로 특징을 이루었던 18-19세기의 기간(비록 이 기간의 시작과 끝에 관하여 여러 연도가 제안되었지만)에 적절히 적용된다. 다양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한 참 믿음이 소생되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의 사귐과 자아 희생의 정신이 회복되었다. “적은 힘”(3:8)밖에 없었으나, 진실로 이 기간의 교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렬한 소망으로 채워진 선교 교회였다. 이 기간은 기독교 역사상 유례 없이 복음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3:14-22)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현대의 에스키-히사르 Eski-hisar)는 빌라델비아 남동 쪽 45마일(72km), 에베소 동쪽 약 40마일(64km) 지점에 있었다. 로마제국 도로망의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는 고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상업 및 금융의 중심지였다. 라오디게아는 엄청나게 부유하였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서기 60년경 라오디게아가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독립적이어서, 황제의 도움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재산으로 그 도시를 재건하였다 (Annals 14.27). 그 도시의 대부분의 부(富)는 의류제조업과 은행 거래에서 왔다. 라오디게아는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질이 좋은 검은 양털로 유명하여 각양 각색의 의류와 카펫에 사용되었으며,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이 상업적 번영은 그 도시를 많은 양의 금을 보유한 커다란 은행 중심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라오디게아는 의과대학으로 유명하였다. ‘프리지아 파우더’(Phrygian powder)에 기름을 섞어서 만든 안약으로 안질환이 치유된 까닭에, 그 도시는 고대 세계 전역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업적, 재정적, 그리고 산업적 번영과 성공은 라오디게아의 부유한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가득 채워주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는 생각이 분명 교회에도 스며들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헬라어 아르케(arche)‘[시간적인] 시작’, ‘기원’, ‘근원’, 혹은 ‘통치자’ 등 다양한 의미가 가능하다. 바울은 동일한 단어를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 사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의 “시작”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요 1:3 참조). 라오디게아가 골로새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과 골로새 신자들에게 편지한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라오디게아 신자들도 읽게 하라고 촉구한 것은, 라오디게아 신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묘사된 예수님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 을 암시한다. 이 단어를 ‘근원’, ‘기원’ 혹은 ‘통치자’ 등 어느 것으로 번역할지라도 문맥에 일치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차든지 더웁든지.
 헬라어 프쉬크로스(psuchros)‘얼음같이 차다’는 뜻이다(물을 결빙시키는 차가운 북풍에 대하여 말하는 집회서 43장 20절 참조), 헬라어 제스토스(zestos)‘물 끓일 정도로 뜨거운’을 의미한다. 동사 제오(zeo) ‘끓이다’는 일반적으로 ‘열심’으로 번역 되었다(행 18:25; 롬 12:11 참조).
요한계시록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미지근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개념을 라오디게아 도시의 지리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였다. 라오디게아의 모든 부와 번영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의 최대 문제는 좋지 않은 물이었다. 고대 도시의 북쪽 약 6마일(9.6km) 지점에 히에라폴리스(Hierapolis)가 있었다. 뜨거운 광천수의 거품 온천이 산기슭에서 내려왔는데, 이 물의 상당수는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라오디게아는 자연적인 수원(水源)이 없었기 때문에 약 6마일 거리의 수로(水路)를 통하여 끌어온 이 온천수들을 사용하였다. 그 물은 도시에 도달할 즈음에 미지근하게 되어 비록 목욕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지라도, 음료수로 사용하기에는 맛이 없었고, 환자 치료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61)
요한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난한.
 헬라어 프토코스(ptōchos)는 ‘지극히 가난한', ‘거지같이 가난한’ 등의 의미가 있다.62)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벌거벗은 수치.
 고대 세계에서 벌거벗음은 재판을 받아 심한 굴욕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삼하 10:4-5; 사 20:4; 겔 16:37-39; 나 3:5; 계 17:16 참조).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그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었다(눅 15:22; 계 16:15). 다른 한편으로, 좋은 옷으로 입히는 것은 큰 존귀의 표로 간주되었다(창 41:42; 왕하 25:29; 스 6:6-11; 단 5:29 참조).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두드리노니.
 현재시제는 계속적으로 두드리는 지속적인 행동을 암시한다.
저녁을 먹고.
 헬라어 데이프네오(deipned)‘저녁식사를 하다’는 의미로, ‘중요한 식사 및 환대를 위한 통상적인 식사’를 가리킨다.63) 그레코로만의 종교적 관습에서 온 성찬(聖發)에 근 거하여 데이비드 아우니는, 그리스도께서 두드리시는 문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통상적인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아우니는 이 구절 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말하는 것이지 회중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지한다. 아우니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배자와 나누시는 식사는 “주의 만찬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두 사람, 곧 예수님과 예배자에 의해서만 나누도록 의도된 식사였을 것”이다.64) 본문에서는 회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지칭하는 것 같으므로, 여기에 언급된 식사는 필시 교제의 식사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고대 근동의 보좌들은(두세 명이 앉는) 소파와 같았다.65) 그러므로 왕의 보좌 우편에 앉는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었다(왕상 2:19, 시 110:1, 에스드라상 4:29 등 참조).
(주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세 가지 칭호로 소개하신다. 첫째, 예수님은 아멘 이시다. ‘아멘'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를 거쳐 우리에게 이르러 온 말로서, 근본적으로는 ‘진실로’라는 의미다. 바클리에 의하면, 이 말은 “어떤 진술이 절대적으로 참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확증하고 보증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66) 이 칭호는 이사야 65장 16절을 기억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칭해진다(히브리어로 ‘아멘의 하나님’), 복음서에서 예수님 은 종종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헬라어로 아멘; 요 1:51 3:3, 5, 11 참조)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묘사된다. 그분은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증인이시다. 이것은 거의 확실히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의 기원이요 그것에 대하여 절대적 권위를 지닌 분이시다. 자만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아멘’으로, 또한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요 기원이시기에 세상에 대하여 절대적 권세를 가지신 유일한 분으로 소개하신다.67) 예수님의 충성된 증언은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참상태를 폭로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교회는 듣고 순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요한계시록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심한 책망으로 시작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읍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어서 매우 심각한 경고가 뒤 따른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비유적 표현은 그 도시에 공급되는 물에서 비롯되었다. 라오디게아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약 6마일(9.6km) 지점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를 공급받았다. 그 물이 라오디게아에 도달할 즈음에는 미지근하게 되어, 비록 목욕하기에는 좋을지라도, 마실 물로서는 적당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교회가 뜨겁든지 차든지 하기를 원하신다. 미지근한 상태는 타협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서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는 그들 이 무관심과 자만의 상태에 빠졌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영적 사물에 대한 그들 본래의 열정과 열성을 잃어버렸다(3:19 참조),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로는 “영적으로 피곤한 자에게 원기 회복과 영적으로 병든 자에게 치유”를 주지 못한다.68) 타협과 무관심의 태도보다 적대적인 정신에 더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반쯤의 충성과 봉사를 혐오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눅 16:13)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배도나 이단적인 사상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서 심각한 죄가 있음을 발견치 못하시나, 그렇다고 그가 보시기에 좋은 것도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 문제점은 무관심이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 나타난 라오디게아의 자부심과 자만심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라오디게아는 그 자체의 물질적 부요와 의류 무역, 그리고 인기 있는 안약 등을 자랑하였다. 분명히 이러한 정신은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다.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신뢰하였는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참된 영적 상태”에 대하여 속고 있었을지도 모른다.69) 이것은 우리에게 구약의 에브라임의 자랑을 생각나게 한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호 12:8) 서머나 교회가 가난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부요했던 반면(계 2:9),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부자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들의 영적 교만 때문에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하여 눈이 멀었으며, 그들의 실상과는 정반대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영적으로 심히 가난하였고(헬라어 본문이 암시하듯이), 벌거벗었으며, 눈이 멀었다. 알지 못하는 자, 그리고 모른다는 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둘 다 똑같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
 그리스도께서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신자들을 당신의 입에서 막 토하여 내려 하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있음을 의미한다. (3:19 참조),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은 라오디게아의 자기 기만적 상태와 부합한다. 첫째, 예수님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이 사라는 재촉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물물 교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들은 분명히 그들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신약의 본문은 베드로전서 1장 7절인데, 여기에 믿음의 시련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사람이 부를 소유할 수는 있으나 부가 행복과 영성을 사고 획득할 수는 없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그에게서 흰옷“사라”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옷은 종종 구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상징한다(계 3:4-5; 6:11; 7:9, 13-14 참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의로운] 행실”(계 19:8)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환호하였다.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나를 감쌌음이라]”(사 61:10), 구원의 흰옷은 분명히 지금의 현실(present reality)이며 미래의 약속이다(계 3:4-5 참조), 흰옷으로 입힌다는 것은 죄의 수치와 벌거벗음의 굴욕적 위치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벌거벗은 수치를 덮어주기 위해 그에게 최고로 좋은 옷이 입혀졌다(눅 15:22). 옷은 아마겟돈 전쟁시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매우 의미가 크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마 22:11-14 참조)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가련하고 곤고한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敬)적 의의 두루마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눈에 바를 안약이다. 눈에 안약을 바름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 분명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그들의 눈이 열릴 때에만 자신들이 처한 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마찬가지로 바울도 에베소의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엡 1:17-18), 라오디게아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식별력이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절망적인 상태로 버려둠을 입지 않았다. 그들에게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것은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언 3장 12절의 직접 인유다(욥 5:17 참조). 그리스도께서 는 라오디게아 신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징계하시고 교도(橋導)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고 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 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께서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 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5-11)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교회 중에서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에게만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또렷하게 하셨음은 특별히 흥미롭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실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심지어 신실하지 않은 자들도 그분의 사랑의 대상자들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들로 열심(‘뜨거운’과 같은 뜻인)을 내어 회개케 할 목적으로 징계와 견책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며, 현재의 상태와 단절하는 것이다. 바클리는 외경 베드로 행전으로부터 예수의 말씀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소개한다. “너희가 오른손을 왼손 같이 하고 왼손을 오른손 같이 하지 않으면, 위로 향한 것을 아래로 향한 것같이 하지 아니하면,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뒤에 있는 것같이 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알지 못 할 것이다.” 바클리는 다음과 같이 추가 설명을 한다.

언제 오른손이 왼손이 되고 왼손이 오른손이 되며, 언제 앞에 있는 것이 뒤에 있는 것이 될 수 있는가? 분명히 사람이 돌아설 때다. 위로 향한 것이 언제 아래로 향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사람이 거꾸로 서 있을 때, 즉 그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할 때, 그의 가치관이 전도될 때,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평범한 것으로 보일 때, 그가 삶에서 버린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때다. 회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70)
라오디게아 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문 앞에 서 계신 인상적인 그림에 의해 가장 잘 예증되어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장면은 아가서에 나오는 연인이 사랑하는 자의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5:2-6), “근동에서 식사를 나누는 것은 애정과 우정의 강한 유대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가오는 메시야 왕국에서 누리게 될 친밀감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71) 그들의 맹목적인 자만심에서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의 밖에 세워두었다. 그들의 종교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었다. 리언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까지는 서신이 교회 전체에게 말하지만, 이제는 대상이 바뀐다. 만일 누구든지란 말은 개인에 대한 호소다. 교회 전체가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어떤 개인들은 경고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72)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문 앞에 서서 상호간의 친밀한 사랑의 식사를 위하여 집안으로 초청해 달라고 요청하신다. 그분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는다. 너무 늦어 버릴 때가 곧 올 것이기에 미지근하고 절반만 헌신하는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그들의 실제적 신분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우주의 보좌에서 이미 높이 되신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또 함께 일으키사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엡 2:6). 만일 우리가 고대 근동에서, 보좌는 “단 하나의 자리로 된 것이 아니라 흡사 소파와 같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그림은 훨씬 더 선명해진다.73)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를 공유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이미 하늘에서 높임을 받았다(계 1:6; 5:9-10 참조). 그러나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은 재림시에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이다(계 20:4-6 참조).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물질적 그리고 일시적인 번영에 그들의 신뢰를 두는 자들, 곧 그들의 물질적 번영은 하나님의 호의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만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향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처럼, 그리스도와 그들의 관계에서 미지근하고 온전한 헌신을 하지 않을 때, 최선의 해결책은 예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 게 하라.”(계 3:18)

 라오디게아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분명히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안약이다. 그들에게 배도나 이단적 사상이 없고, 어떤 심각한 죄가 그들 중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자신들에 대하여 긍정적이라는 사실 등이 그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증해 주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든 교회의 관심의 초점, 즉 교회 생활, 예배, 활동들, 그리고 행동의 중심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설사 교회 전체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자만적이고 온전한 헌신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회개하라는 요청은 각 개인에게 발해진다. 예수님은 개인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다. 미지근하고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부흥하고 개혁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적용.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이 우선은 요한 시대의 지역 교회에 적용될 지라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분명히 지구 역사 마지막 기간의 기독교의 표본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기별과 아마겟돈 전쟁의 어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최후의 경고 사이에 존재하는 어구적, 개념적 유사성에 의해 지지된다. 이 마지막 교회는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인 것 같다. 그 교회는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 대격변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며 이전의 그 어떤 그리스도인 세대도 직면하지 못했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진실성의 문제와의 씨름과 미지근함으로 특징지워진, 마음이 나뉘고 자만한 교회다. 그러한 맥락으로 고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어진 기별은 세계 역사의 결론 기간에 사는 기독교인의 삶과 경험에 특별히 적합하다.
2:1-3:22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2-3장 뒤돌아보기

 본래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그리스도인 회중들에게 보낸 일곱 기별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일곱 가지 사실을 주시하였다.

 첫째, 높이 들리시며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기별들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들로 제시되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항구적인 영향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역사의 사건, 구약의 장면과 개념, 그리고 일상 생활의 사물 등을 사용하셨다. 이 기별들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는 의의를 지녔는데, 이는 그 기별들이 그들의 일상사의 현실을 반영하며, 그들의 특수한 필요와 환경을 반영하 였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기별은 비슷하게 시작하고 비슷하게 끝난다. 각 기별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호소로 결말짓는다. 그 사이에는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세밀한 통찰력의 결과로서 각 교회의 실제적인 상태와 필요에 알맞은 특별한 기별이 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필요와 생활 정황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계셨다. 예를 들면, 그분은 에베소 신자들이 첫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 알고 계셨다. 그분은 서머나 신자들이 고통당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버가모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환경과 두아디라 교회의 양분된 상태에 관하여 알고 계셨다. 그분은 사데 신자들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과 영적으로 연약한 빌라델비아 신자들을 위해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라오디게아 신자들의 자만과 무지를 알고 계셨다. 그분은 그들 모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마음의 비밀들을 읽어내시는 그분의 꿰뚫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일 교회들이 어떻게 살아가며 자신들의 신앙에 있어서 어떻게 단호히 되돌아서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의 기별을 경청하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별들의 적합성을 보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삶의 정황과 필요에 적용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각 기별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개인적 호소로 끝맺는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고 있든지 누구나 이 기별들에 유의하라는 촉구의 말을 듣는다. 아시아 속주에 있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과 필요를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동일한 그리스도시다. 교회들에 보낸 이 일곱 기별을 통해, 그분은 오늘날의 각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필요에 말씀하신다.

 셋째, 교회들에 보낸 호소에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존 폴린은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관찰하였다.74) 그분은 일곱 교회에 나타난 영적 쇠퇴 혹은 타락의 동향을 주목하신다. 비록 이 교회들 중 일부는 예수께서 그들에게서 원하셨던대로 행하지 않았을 지라도, 첫 세 교회는 일반적으로 신실하였다. 그러므로 첫 세 교회 내에서 곁길로 나간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내의 이단들이었다. 넷째 교회인 두아디라는 양분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에 있어서도 두 국면을 지녔다. 다른 한 편으로, 다섯째와 여섯째 교회, 즉 사데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과 조화되지 못했다. 라오디게아의 경우는 좋게 말할 만한 것이 도무지 없었다. 그 교회는 자만하였고 무관심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에서 떠났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달랐다. 그 교회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겠다는 경고조차 괘념치 않았다.

 또 한 편으로, 분명한 영적 쇠퇴와 함께 교회들을 향한 약속들이 점점 증가한다. 각 교회는 앞 교회가 받았던 약속보다 더 많은 약속들을 받는다. 에베소 교회에게는 생명나무가 약속되었다(2:7), 서머나 교회는 생명의 면류관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2:10-11). 셋째 교회인 버가모는 감추인 만나, 흰돌, 그리고 새 이름(2:17) 등의 세 가지 약속을 받았다. 두아디라는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 권세와 새벽별을 약속받았다(2:26~28). 교회들 중 다섯째인 사데 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할 것이며, 흰옷을 입을 것이며,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도말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3:4-5).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들은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될 것이며, 성전의 기둥들이 될 것이며, 성전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도성의 이름과 하나님의 새 이름이 기록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3:10-12). 그러나 일곱 교회의 마지막인 라오디게아는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는 오직 하나의 약속만 받았다(3:21). 실제로 이 약속은 교회들에게 주신 다른 모든 약속들을 통합한다.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 교회는 앞의 교회와 비교할때 영적으로 쇠퇴할지라도 약속에 있어서는 그 반대로 더 많이 받는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쇠퇴하여 간 반면 약속들이 증가한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는 바울의 말을 상기시킨다. 엘렌 화잇은 우리에게 “교회는, 비록 연약하고 흠이 있을지라도, 지상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관심을 쏟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는 염려로 교회를 지키시며, 당신의 성령으로 교회의 힘을 북돋우신다”고 하였다.7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그것을 얽매고 있는 자부심과 자만심의 사슬들을 끊어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신다.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마침내 주님과 구세주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계 19:5-9) 만나게 될 것은 오로지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서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보낸 일곱 기별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시켜 읽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4장에서 시작하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부분은 이 일곱 기별 위에 기초되어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당신 백성의 모든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분으로 제시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 중에 거닐며 그들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종말적 시련에 직면해 있으며 재림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약속은 마치 나팔소리 같다. “두려워하는 것을 멈춰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살아 있는 자요, 나는 죽었었노라. 그러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 있어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계 1:17-18) 예수님은 당신께서 감람산에서 하신 약속에 신실하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註) ——————
1. 고대 세계에서 에베소의 중요성과 그것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에 관하여 Aune, Revelation 1-5, 136—141: Barclay,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New York, NY: Abingdon, 1957), 11-17을 보라. 
2. Barclay,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 13-14. 
3. Aune, Revelation 1-5, 138.
4. Barclay,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 16.
5. 상게서 17. 
6. 상동.
7. Beasley-Murray, 73. 
8. Barclay,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 19. 
9. Fritz Rienecker, A Linguistic Key to the Geek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1976), 815. 
10.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62. 
11. Barclay, The Mind of Jesus(San Francisco, CA: Harper & Row, 1976), 43. 
12. Beale, 231. 
13. Irenaeus Against Heresies 1.26.3: 3.11(The Ante-Nicene Fathers, 1:352, 426-429). 
14.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7.24(The Ante-Nicene Fathers, 5:115). 
15. Hughes, 37. 
16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일에 관하여는 Aune, Revelation 1-5, 191-194을 보라. 
17. Fiorenza, The Apocalypse, 48-50 참조; 이 주제에 대한 더 폭넓은 논의를 위하여 Aune, Revelation 1-5, 148-149을 보라. 
18. Barclay, Letters of the Seven Churches, 24. 
19. Kenneth A. Strand, "Overcomer': A Study in the Macrodynamic of Theme Development in the Book of Revelation,”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28.3(1990): 237-254. 
20. Charles, 1:53-54. 
21. Thomas, Revelation 1–7, 139. 
22.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92. 
23. Hughes, 37. 
2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68. 
25. Hughes, 36. 
26. Mounce, 89. 
27. Beale, 231. 
28. 이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이 알기 원하면, Aune, Revelation 1-5, 162-164, 168-172을 보라. 
29. Morris, 63.
30. Mounce, 93-94; Aune, Revelation 1-5, 166. 
31. Aune, Revelation 1-5, 166. 
32. J. M. Ford, 395. 
33.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83. 
34. 상게서, 1:89. 
35. Charles, 1:60. 
3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15-20을 더 참조하라. 
37. Swete, 35-36. 참조 
38. 2 Maccabees 2:4-8(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265) 참조; 2 Baruch 6:1-9(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1:623). 
39. 2 Baruch 29:8(Charlesworth, 1:631); Sibylline Oracles 7:149(Charlesworth, 1:413). 
40.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90. 
41. Barclay,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 50.
42.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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