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의 장르에 속하는데, 신약에서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요한계시록이 유일하다. 이 책은 현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색다른 상징과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다양한 주석과 기타의 연구들이 이 책의 상징과 장면들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애써 왔다.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주석에서부터 주로 현재의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들과, 은유적 추측에 근거한 상상으로부터 해석하는 대중 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해석들이 주석서들만큼이나 수가 많고 다양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인봉(印封)된 책으로 선언하였다. 심지어 절망한 한 주석가는 “요한계시록 연구는 사람을 미치게 하거나 미친 채로 방치(放置)한다”고까지 말하였다.1)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이 표명한 부정적 태도와 이 책의 특이한 언어나 난해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은 삶의 고통과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며 지배하고 계시는지를 의심하는, 역사상 각 세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소망의 근원이 되었다. 이 이상한 책은 복음에 적대적인 세상에 의해 거절과 핍박을 당하여 절박한 도움이 필요하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무적인 자원들을 공급하여 주었다. 이 책은 그들에게 이 책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주적 쟁투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하늘이라는 실체와 현안들을 일별(一督)하게 해주었다. 이 책의 중심 기별을 이해하게 될 때, 독자들은 감동을 받아 고결한 삶을 살게 된다. 엘렌 G. 화잇은 요한계시록을 더 잘 이해하면 반드시 전혀 다른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2)

 본 주석서는 종종 잘못 해석되고 오용(誤用)된 신약의 이 책을 이해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함에 본 주석서는 독자들에게 본문을 탐구하고 영감의 저자가 뜻한 의미에 이르는 해석으로 이끌고자 한다. 독자들은 이 어려운 책이 복음의 기별을 담고 있으며, 진실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연구하기 전에, 요한계시록 전체와 관련된 일반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은 관례다. 본 주석서도 예외는 아니다. 서론의 전반부에서는 저자, 기록 시기, 기록 목적, 주요 주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올바른 해석 방법 등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을 다루며, 서론의 후반 부에서는 본 주석의 목표를 기술하고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조와 윤곽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단순히 요한이라 하였다(계 1:1, 4, 9; 22:8). 그는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屬州)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계 1:4, 11), 그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권면을 한다.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1:9)고 소개한다. 이 사실은, 그가 아시아의 교회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이 책의 신뢰도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이레내우스(Irenaeus),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을 포함한 초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의3) 증거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세베대의 아들이요 제4복음서와 세 편지서의 기자인 사도 요한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참으로 제자 요한에 의해 쓰인 것인지에 대해 의심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과 제4복음서가 동일한 사람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하는 한 논증에 의하면, 두 책 사이의 언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문법은 단순하나 정확한 반면, 요한계시록의 헬라어는 문법적으로 매우 불규칙 하며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헬라어에 정통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더욱이 서술 형식과 신학적 내용이 다르다.

 두 책의 형식과 신학적 내용이 다른 이유는 요한계시록이 묵시적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이상한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솔직한 기록이다. 요한의 문법이 불규칙한 것은 그가 팔레스타인 유대인이었고, 헬라어가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자신의 언어를 교정하며 다듬어준 서기(書記)와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에베소에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바울과(롬 16:22; 고전 1:1; 16:21; 골 4:18 참조) 베드로가(벧전 5:12) 서기나 편집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은 필시 그런 도움을 받지 못했을 밧모 섬에서 죄수로 지내며 요한계시록을 직접 기록하였다. 이점 역시 요한계시록과 제4복음서 사이에 왜 그토록 형식상의 차이가 많은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자들은 요한계시록과 제4복음서 사이에서 현저히 나타난 유사점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신약의 모든 책 중에서 제4복음서와 요한계시록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요 1:1-14; 계 19:13 참조)으로 칭하고, 그를 “어린양”으로 부른다(비록 헬라어 상으로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요 1:29, 36; 계 5:6-8 참조), 두 책은 스가랴 12장 10절“그를 찌른 자들”이라는 말을 인용한다(요 19:37; 계 1:7 참조).4) “거하다”라는 동사가 나오는 곳도 신약에서 이 두 책뿐이다(요 1:14; 계 7:15). 그리고 두 책은 증거 혹은 증언의 말씀 위에 기초되어 있다(요 21:24; 계 1:2 참조), 덧붙여 요한 복음에서 많이 강조된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요한계시록에도 나타난다(2:27; 3:5, 21).5) 요한계시록이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22:17)라고 초청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선포한다. 외관상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증거는 사도 요한이 신약의 마지막 책의 저자라는 전통적 견해를 충분히 지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장소와 기록 연대

 요한은 오늘날의 터키에 속한 소아시아의 남서쪽 해안으로부터 약 50마일 떨어진 에게 해 (Aegean Sea)의 작은 돌섬인 밧모 섬에서 지내며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 섬은 로마 당국이 죄수들을 유배 보냈던, 오늘날의 알카트라즈(Alcatraz, 샌프란시 스코의 작은 섬으로 예전에 연방 교도소가 있었다. 역자 주) 같은 일종의 강제 노동 수용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밧모 섬이 유형지로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희박하다는 점 때문에 어떤 현대 학자들의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요한이 얼마 동안 이 섬에서 유배를 당했다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계 1:9) 밧모 섬에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 진술만으로는 그가 밧모 섬에 핍박의 결과로 유배되었는지, 아니면 자원하여 선교사로 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6)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傳承)이 확인하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가 통치하는 기간(서기 81-96) 동안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로마 당국에 의해 밧모로 유배되어 그 곳 채석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였다.7) 후에 그는 네르바(Nerva) 황제에 의해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가는 허락을 받았다. 밧모에 있는 동안,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묵시들을 보았고, 그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목회 서신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계 1:11). 이 서신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 팎의 증가 일로에 있는 여러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내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로마가 기독교를 적대시할 시절에 기록되었다. 그 적대감은 마침내 직접적인 핍박으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정확한 기록 연대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일반적으로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시기(서기 54-68)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네로 가이사(Nero Caesar)에 해당하는 히브리 글자의 수치(數値)는 666이라는 가정(假定)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 8절의 짐승의 수다.8) 또한 네로가 죽은 후에 동방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도 있었다(계 17:9의 어구 해설 참조).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논쟁들은 순전히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네로의 핍박은 그 성격상 개인적인 것으로 주로 일종의 광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중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제4복음서가 요한계시록 후에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동일하게 제기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이렇게 잡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한은 예루살렘에 수년간 머물렀으며, 마침내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에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정착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그가 언급하는 교회들은 상당 기간 그 자리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 교회들은 영적 쇠퇴와 배도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일부 교회들에서는 배도가 신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른 연대는 그러한 역사적 상황과 맞지 않다. 왜냐하면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60년대 초가 되어서야 세워졌고, 더욱이 그 교회들은 네로의 통치 기간 동안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요한의 제자였던 폴뤼카르푸스(Polycarp, 서기 60-150)의 제자인 이레내우스(Irenaeus)를 포함한 초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9)

 셋째,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에 대한 대중적 요구에 응하기를 거절함으로 고난과 압제를 당하던 때에 기록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안(Augustus Octavian, 기원전 27 - 서기 14) 때부터 로마인들에 의해 살아 있는 황제에 대한 숭배가 조장되었지만,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 서기 37-41)는 자신을 경배하라는 요구를 한 첫 황제였다. 자신을 경배하라고 요구한 다음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서기 81-96)였다. “바로 이 황제 치하에서 황제 숭배의 문제가 처음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10) 널리 퍼져 있었긴 해도, 가이사 숭배는 특별히 아시아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 곳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당국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 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인들에 대한 핍박이 광범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다가올 많은 폭력적 핍박의 전조(前兆)가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두려운 환경에 처한 압제받는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하여 계획되었으며, 그들로 미래의 위기에 대처할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요한계시록이 일 세기 말에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

 요한계시록은 원래 서신 형태로 기록되었다. 어떤 편지는 그것을 이해하는 원리는 그 편지가 누구에 의해 기록되어, 누구에게 보내졌으며,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였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첫 독자들, 즉 그 편지가 원래 보내졌던 사람들에 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기별을 보낸 이유와 그 기별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11)

 요한계시록이 일차적으로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일곱 교회를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 1:4)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명하셨다.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일곱 교회에 보내라.”(계 1:11) 더욱이 이 교회들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등에 있는 교회라는 것이 파악되었다. 이 교회들은 상당 기간 그 자리에 있었다. 요한은 에베소에 거주하며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종종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일 세기의 마지막으로 치달으며, 그 교회들의 상황은 영적 쇠퇴와 배도로 꼴 지워졌다. 증가 일로에 있는 안 팎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 교회의 외적 문제

 외부로부터 유입된 상당한 문제들이 요한 당시의 아시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괴롭혔다.

 첫째,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반대와 고소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이방신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일과 부도덕한 풍습으로 특징 지워진 축제들을 회피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하나님만 섬긴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내몰렸다(로마인들은 황제를 숭배하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무신론자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고소되었는데, 그러한 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고 여겨졌다. 예배 드릴때 그들의 자녀를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그들의 법적 지위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교회들이 직면한 두 번째 문제는 박해였다.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는 교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은 버가모 교회의 안티파스(Antipas, 안디바)가 신앙 때문에 로마 당국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고 기록한다. 박해는 서머나(2:10)와 빌라델비아(3:10)의 교회들도 위협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교회의 신자들 중에 믿음이 약하고 헌신이 부족한 사람들은 떨어져나갈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박해가 거세질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12) 이 모든 요인들은 교회 안에 불안을 조성하였다.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에 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들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 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은 초기 교회 역사에서 두 종파 간의 연결이 결별로 바뀌는 상황을 묘사한다. 결별은 서기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가속화되었다. 서기 70년의 전쟁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과의 싸움에서 유대인들과 합세해 싸우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회당에서 환영 받지 못하였다. 예루살렘 멸망 직후, 유대인들은 회당 예배를 마감할 때에 낭송하였던 17가지의 축도에 열여덟 번째를 첨가하였다. 실제로 그것은 축도라기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였다.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18번째의 축도 낭송을 거절하였고, 그 결과 마침내 회당에서 쫓겨났다.

 일 세기 말경,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와 증오로 점철되며,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추방당하였고, 법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 당국에 의해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로 인정받아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특권을 누리며, 황제 숭배는 면제받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자체는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두 번이나 언급한다(계 2:9; 3:9). 유대인들은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으로 자신들을 사단의 종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시아 교회의 내적 문제

 내적 문제들도 아시아의 교회들을 괴롭혔다. 일곱 기별이 말하듯이, 그 교회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문제들에 대하여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어떤 교회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신실했던 반면, 교회지도자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으며 요한을 적대하였다. 다른 교회 이를테면 두아디라, 사데,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 등의 경우,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도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데 교회에는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을 뿐이었다(계 3:4).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겨우 “적은 능력”만 있었다(계 3:8). 라오디게아 온 교회는 배도 상태에 빠졌는지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한은 분명 그 교회들의 많은 사람에게서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하였던 근본 문제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성적 부도덕으로(계 2:14-15, 20 참조), 예루살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절하라고 했던 바로 그 두 가지였다(행 15:20). 이 두 가지 문제는 아시아 교회들의 연합을 위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아시아 지역의 대중적 요구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내의 그리스도 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었던 사회의 일원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모든 시민의 의무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다. 무엇보다도 모든 시민들은 이방 신전에서의 종교 축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였다.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모욕과 사회적 고립, 그리고 경제적 제재를 당하였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축제에 가담하는 것과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였다. 첫째 문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이교 축제에 참여한 자들은 일반적으로 지방의 수호신에게 바쳐진 고기가 주를 이룬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축제들은 자주 술 취함과 부도덕한 행위로 끝을 맺었다. 이교 축제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신전 매춘에 관한 것으로, 신전 매춘은 많은 고대 이교의 한 부분이었다. 신전 창녀들과 성관계를 하는 목적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사회를 번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지위를 원하는 자들은 이러한 종교적 요구들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교 축제에 참여함은 그리스도인의 신조와 가치를 타협하는 행위였다.

 아시아의 교회들은 이교 축제에 참여하는 문제로 양분되어 있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요구에 단호하게 맞섰다. 어떤 무리들은, 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사업의 이득과 상업적 번영을 위하여 타협을 지지하였다. 요한을 반대한 이런 자들은 여러 이름들로 지칭되었다(계 2:6, 20 어구 해설 참조). 에베소 교회에서 그들은 니골라 당으로(계 2:6), 버가모 교회에서는 발람 당으로(계2:14),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이름의 한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여자의 추종자로 알려졌다(계 2:20). 이 세 그룹은 모두 요한을 반대하였고, 타협을 옹호하였으며, 그리하여 이들은 아시아 교회의 많은 사람들로 음행을 조장하며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게 하였다(계 2:14, 20). 그들은 거의 확실하게 “이교의 사회 생활은 사단의 역사에 대하여 열린 들이요, 그 곳에 뛰어든 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주변의 이교 사회에 가능한 한 많이 참여하고 그들이 사는 도시의 일상 생활에 동화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믿었다.13) 그들은, 통치자에게 복종하라고 권 면한(롬 13:1-8; 딤전 2:1-4 참조) 바울의 글에서 자신들의 논리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또한 이방인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전 8장; 롬 14장 참조).

 요한은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 문제에 대해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관상 바울과 요한 은 대립되는 것 같은데, 요한은 어떤 식의 타협에 대해서도 쟁론을 벌였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 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교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타협하는 것이며 사단 자신을 영예롭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비추어,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성하기 위하여, 만일 필요하다면,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또는 사업적 번영을 희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의 근본 목적은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었던 상황과 문제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증대하는 로마의 적대감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 침입한 이단과 점증하는 배도에 직면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의 상황은 위협적이고 적대적이며 미래가 암울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역사의 주관자”시라고 요한계시록은 선언한다. 그분은 현재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한 함께 하실 것이다. 그분은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종말적 절정에서 자기 백성을 온전히 옹호하실” 것이다.14)


 요한계시록 해석 지침

 성경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묵시 문학이냐 아니면 예언이냐를 놓고 오랜 논쟁을 벌여왔다. 책 자체는 예언이라고 선언하며(계 1:3; 22:7, 18-19), 그 기별은 묵시록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예언적 묵시록적 형태의 편지로서 실제의 장소에 있는 실제의 인물, 즉 로마제국의 속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졌다(1:11 참조), 편지로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어떠한 예언이나 신약의 편지서처럼 시간과 장소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원래 다른 장소와 시기에 살던 사람들, 즉 문화와 생활 환경이 다르며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책인데, 어떻게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에도 적절한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다음 단원은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에 접근하는 기본 원칙들을 제시한다.


 성경 주석의 기본 단계

 성경의 본문을 연구하는 학문과 기술을 ‘해석학’(hermeneutics)이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해석’(interpretation)을 의미한다. 성서 해석학은 고대의 성경 본문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해석적 과정이다. 해석학이 성경의 본문 분석에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주석’(exegesis: “이끌어내다” 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차용한 단어)이라 한다. 주석은 영감 받은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성경 세계와 오늘날의 독자들 사이의 간격을 메꿈으로 성경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과정이다. “독자가 성경 본문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스스로 말하게 함”이 주석의 목적이다.15) 주석은 서로 동떨어진 절(verses)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원(units)과 구절(passages)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어의 의미, 문장 속에서 단어 사이의 관계, 구절의 구조 및 그 구절의 전 후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원이 연구된 다음, 그 단원들은 집적(集積)되어 통일되고 일관된 성경주제를 형성한다. 다양한 성경 주제를 모은 것을 성서 신학이라 칭한다.

 성경 주석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본문이 기록되었을 때, 본문이 무엇을 의미했느냐(What the text meant)를 알아내는 것이다. 성경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발견하기 전에, 우리는 저자 당대의 독자들에게 저자가 전하고자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주석의 이 단계는 영감 받은 저자가 원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왜 말했는지를 알아내는 단계다. 어떤 이유로 그가 본문을 기록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을 찾음에, 해석자는 원 독자들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즉 그들의 사회적 배경, 영감 받은 저자로 하여금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들의 관심사 등을 먼저 배워야 한다.

 둘째, 해석자는 그 본문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언어적, 문학적, 역사적, 지리적,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 등을 파헤쳐야 한다. 그렇게 본문에 접근하려면 연구에 필요한 모든 엄정성을 비롯하여 자료들을 이용한 자발적인 노력과 진지한 참여 등이 있어야 한다.

 동일한 원칙이 예언의 말씀에 적용된다. 모든 성경 예언은 기본적으로 그 저자의 시대를 다룬다. 영감 받은 저자의 시대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한, 미래의 어떤 기간을 위한 예언의 의미는 베일에 싸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요한계시록은 원래 요한 당시의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계 1:4; 1:11 참조).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은 1세기의 아시아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더글라스 에젤(Douglas Ezell)의 관찰은 유익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사라질 것이라는 염려를 하지 않도록, 나는 요한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참된 예언적 특성을 지지하는 강력하고도 긍정적인 말을 하고자 한다. 그는 선지자이며, 그의 기별은 묵시록 형태의 예언이다. 그러나 무엇이 예언인가? 실제로 그것은 본질상 ‘선언’(forth-telling)이다. 선지자는 당대를 위한 하나님의 기별을 가지고 있었다. 예언(foretelling)은 특별한 시기와 장소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한 기별들에서 생겨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재 행동 방식은 미래에서도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나누고자 했던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별은 미래가 아니라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예언이다. 요한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분의 확실한 말씀을 전하였다. 종말과 관련하여 그의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한 요한은 미래의 화폭 위에 큰 붓으로 그렸다. 요한은 자신의 시대를 마치 종말에 바짝 붙은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벧후 3:8-10)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위기를 당면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종말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청중의 현 상황과 최후의 미래와 관련하여 오직 하나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에 비추어 그들은 궁극적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고, 그 뜻을 당시의 역사적 위기에 사는 백성에게 적용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드러내신 현재의 방식 때문에, 선지자들은 피할 수 없는 여호와의 날을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심판과 구원을 위해 오신 것같이, 종말의 때에도 반드시 심판과 구원을 위해 오실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요한의 기별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관한 내용이라는 이해와, 이 위기는 최후의 대단원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이해가 서로 상치되지는 않는다. 요한은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 상황은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한 요한에게 도약판이 되었다(계 19:11 이하 참조), 하나님께서 로마를 확실히 무너뜨리실 것처럼, 종말의 ‘바벨론’도 무너뜨리실 것이다.16)

 주석적 분석의 두 번째 단계는,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본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the text means)를 연구하는 것이다. 원래 성경의 책들이 저자 당대의 백성에게 보내진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 본문의 의미는 당시 독자들의 시대를 넘어선다.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시의적 절한 기별은 어느 곳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시간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기별이다(벧후 1:19-21 참조). 요한계시록도 예외는 아니다.


 전통적 해석 방법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종종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접근 방식에 의해 모호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네 개의 뚜렷한 접근 방식이 사용되어왔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이 네 개의 접근 방식 중 하나를 따르고 있는 반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주석 방식에 전통적 접근 방식중 둘 혹은 그 이상의 것에서 최상의 장점들을 취합한다.


 과거주의(Preterism). 과거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이 기본적으로 1세기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있던 그리스도인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주의자들은 계시자 요한이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일들을 내다볼 수 있었겠지만, 요한계시록은 아무런 미래 예언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요한 당시 임박한 로마제국의 박해에 직면한 여러 교회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었다. 임박한 박해가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과거주의의 기본 가설은 요한계시록이 1세기에 로마가 가했던 전반적인 교회 핍박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주께서 곧 오셔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당신의 백성을 구할 것이기에 요한은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여 인내하도록 독려할 목적으로 책을 기록하였다. 이런 접근 방식의 문제점은 로마제국이 1세기의 교회를 전 제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핍박했다는 견해를 지지할 만한 확실한 어떤 성경의 외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17) 요한계시록 자체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지역적 박해들을 언급한다(계 2:10, 13; 3:10 참조), 이 박해로 인해 요한 자신은 밧모 로 유배되었다(계 1:9).


 이상주의(Idealism). 이상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갖는 역사적 목적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다. 이들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어떤 역사적 기간이나 장소에 적용할 수 없고, 오히려 현재 진행 중인 선악간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상징들은 역사상 어떤 특정한 사건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상징들이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상 어느 시점에 사는 신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시대를 초월하는 윤리적 진리와 원칙들이다. 이상주의자들의 해석 방식은 과거주의의 사상에 기초되어 있다. 이 이상주의는 요한의 묵시가 갖는 여하한의 문자적 또는 역사적 중요성도 간과해 버린다.


 미래주의(Futurism). 과거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미래주의는 책 전체의 의미를 미래에만 둔다. 미래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특히 4-22장)이 재림 직전과 후에 일어날-심지어 우리의 눈에 보기에 미래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전적으로 종말에 사는 마지막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주의 (Historicism). 역사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사도 시대로부터 종말 때까지 이어지는 미래의 역사에 대한 예언적 윤곽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 해석 방식은 요한계시록이 연속적 역사 기간을 다루는 다니엘서에 그 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은 “서방 세계와 그리스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역사적 운동과 사건”을 묘사한다.18) 그리고 그러한 예언들은 현재 성취되고 있다.

 이 모든 접근 방식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의 말대로, “각각의 접근 방식은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에 일정 부분 중요하게 기여 한다.... 어떤 접근 방식도 그 자체로서는 충분하지 않다.”19) 그가 이어 말하듯이, 계시자 요한은 “자신이 처한 직접적인 상황에서 기록하였고, 그의 예언들은 역사에서 성취될 것이었으며, 그는 미래의 완성을 고대하였고, 역사 진행의 배후에서 작용한 원칙들을 드러내었다.”20)

 그러나 각각의 방식은 비판을 받기 쉽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과거주의가 강조한 점은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확실히 이 책은 1세기 말 아시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당대에 뜻하는 것을 알았다.21)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1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요한 당대 혹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적용을 하였던지 간에, 이 책의 예언의 성취는 요한의 관 점에서 볼 때 미래를 위해 유보되었다. 과거주의의 문제점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특성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원래 임박한 박해에 직면한 요한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소망을 주기 위하여 이 책을 보내었을지라도, 요한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역사상의 사건과 관련된 예언적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4:1),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요한의 시대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전 역사에 걸친 각 세대의 교회에 어떤 시대, 어떤 장소든-유익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상주의의 접근 방식에 관하여도 동일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각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는 각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한 주제와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윌리엄 존슨(William G. Johnsson)이 언급한 대로, 대논쟁(the Great Controversy)의 우주적 성격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은 “전 역사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복적으로 적용된다.”22) 책 전체를 통하여 각기 다른 호소가 종종 “누구든지”, 혹은 “누구나”와 같은 말로써 시작한다. 과거주의처럼 이상주의의 주요 문제점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특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공언하였다. 요한은 묵시에서 본 것들 을 단순히 책에 기록하여 교회에게 보냈다. 그 책이 참으로 역사상 어느 시기에 사는 신자에게라도 적용될 원칙을 포함하는 한편, 그 책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 하여 보여 주려는 것이다(1:1). 요한계시록에 대한 과거주의와 이상주의의 접근 방식은 예언적 요소들이 고려되고 요한 이후의 시대에 적용할 때에만 약간의 효력을 지닌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요소들은 나머지 두 개의 접근 방식, 즉 미래주의와 역사주의에서 의미 있게 적용된다. 미래주의 해석이 이바지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이 요한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했던 만큼, 이 책은 그 시기 너머의 미래를 가리키기도 한다. 많은 사건들은 우리의 시점에서조차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상당수의 사건들은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며,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미래주의 자들은 요한계시록이 다만 마지막 때 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 시대를 통하여 세상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에는 약점이 많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 방식은 요한계시록이 요한의 시대 이후로부터 종말 전까지의 세대들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책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역사주의적 접근 방식은 이런 잘못을 바로 잡는다. 현대 학자들에 의하여 역사주의 해석 방식이 부인되거나 좌시됨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역사주의적 접근 방식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임을 드러낸다. 역사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사건들이 과거와 미래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여러 세기 동안의 사건에도 일어나는 것을 용인한다. 비록 재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승천 때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망라한다. 그러나 강력한 증거는, 본문의 장면과 상징들이 요한의 시대와 마지막 때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한 사건들을 지적한다는 것 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주의자의 접근 방식은 자주 본문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를 역사적 성취에서 찾으려는 노력 때문에 오용되었다. 많은 역사주의자의 본문 주석은 적절한 구약적 배경보다는 주로 풍유적(融論的, allegorical) 방법에 기초되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에 관한 설명도 성경에서 보다는 종종 신문 기사나 역사책에서 가져왔다.

 양질의 요한계시록 주석은 전통적인 접근 방식들 중 어느 특정한 것을 본문 위에 놓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저자가 어떤 해석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떻게 본문을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 해석이 문맥에 부합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미리 결정된 사상의 틀속에 해석을 붙들어 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한 해석은 종종 본문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어떤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본문 주석과 해석 방법은 저자의 의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저자는 본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 중 어디에 적용해야 하는지를 말해야 한다. 해석자는 자신의 사상을 책에 부과하지 말고 반드시 본문이 그 해석을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해석 방법

 계시자 요한 자신이 자신의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서, 자신이 밧모 섬에 있는 동안 묵시 중에 본 것은 근본적으로 두가지-“이제 있는 일”“이 일 후에 장차 될 일” 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술한다. 요한계시록 4장 1절에서, 요한은 묵시 중에서 “장차 될” 일, 즉 일곱 교회에 보낸 일곱 기별(1:9-3:22; 계 1:19에 대한 설명 참조) 이후에 될 일을 보라는 말을 들었다. 많은 학자들은, 1장 19절“이제 있는 일”은 아시아의 일곱 지역 교회(1:9~3:22)에 보낸 기별들을 지칭하며, “장차 될 일”은 4장 1절 - 22장 5절을 가리킨다고 인정한다.23) 그러나 4장 1절- 22장 5절의 몇몇 묵시가 요한의 관점에서 과거를 가리키고 있듯이(4-5장 그리고 12장을 포함한 여러 묵시들), 1장 9절 - 3장 22절은 미래의 성취를 기다리는 상당수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초기의 일곱 교회 회중들이 점점 늘어나는 문제와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통하여 보내신 일곱 기별은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신자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 9절 - 3장 22절은, 어떤 구절은 예언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선언(forth-telling)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첫 세장을 이해하는 첫 단계는, 요한 당시의 아시아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첫 세장이 무엇을 뜻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개관: 요한계시록 1:9-3:22을 참조하라).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절과 관련하여 상황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묵시는(예를 들면, 4-5장, 그리고 12장) 과거를 다루고 있을지라도, 이 부분은 주로 요한의 관점에서(계 4:1) 가깝고도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다룬다. 앞에서 보았듯이, 압제받고 짓밟히던 요한 당대의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정체성과 생존에 관하여 걱정하였다. 그들이 처한 무서운 환경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활동하며 다스리고 계시는지, 교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전체(그 중 특히 1:9-3:22)가 그들의 염려를 드러낸 반면,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절은 그들에게 교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르치기에 특별히 적합하였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절의 묵시들은 전 기독교 시대를 거쳐 종말적 절정에 이를 때까지의 교회와 세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도록 의도된 것 같다.(여기서 역사주적 해석 방식은 커다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이 예언들은 기본적으로 그 의도와 계획에 있어서 앞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24)

 요한 당시와 그 이후 200년 간의 시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절에서 그 당대를 위한 적절한 기별을 발견하였을 것이다.25)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실 것을 굳건히 믿었다. 그들은 종말의 징조들이 그들의 시대에 성취된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추측컨대, 요한계시록 17장의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묘사에서, 그들은 제국 로마에 대한 상징을 보았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의 연합은 그들의 현재적 경험을 반향하였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용과 13장의 상처받아 죽게 되었다가 낫게 된 바다짐승의 이미지에서, 그들은 “제국 로마의 권력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과 음모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어, 그 이후 200년 간 그들을 더욱 무겁게 내려 누를 것”임을 인지하였다. “우리는 로마서 13장요한계시록 13장 사이의 큰 변동을 주목한다. 로마서 13장에서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었다. 그러나 후자에서 국가는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26) 게다가 이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바다짐승을 높이는 일에 매진했던 땅의 짐승 배후에서 제국 종교의 요소들”도 보았을 것이다.27) 그리고 18-19장의 요한의 묵시에서, 그들은 필시 제국 로마의 붕괴에 대한 예언들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대 바벨론을 확실히 무너뜨리신 것처럼, 마침내 종말적 바벨론, 곧 제국 로마 자체를 무너뜨리실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절의 상징에서 요한 당시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적용과 상관성을 보았던지 상관없이, 묵시를 기록하는 요한의 의도와 목적을 발견하는 일은 필수적인데, 이는 그 묵시들이 1세기 이후의 것들(4:1 참조)을 취급하고 있다고 요한 자신이 분명히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언어가 곳에 따라 매우 상징적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 5절까지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우선 본문에서 요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를, 그러고나서 원 독자들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 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를 푸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에 설명하겠지만, 그 언어는 분명히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 4장 1절 - 22장 5 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들의 직접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분명 영감 받은 저자의 의도나 목적과는 상반될 것이다.

 이렇듯 요한계시록 자체가, 역사적 방식을 이 책의 내용을 정당하게 해석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관점에서 저술되고, 여기서 천명된 성경 해석학의 원칙을 적용하는 본 주석은 요한계시록을 구절구절 탐색한다. 각 단위들은 모아지고 일관된 주제들로 무리를 지으며 함께 엮어져 요한계시록 전체를 위한 통일된 기별을 만들어낸다. 본 주석서의 궁극적 목표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간을 뛰어넘는 말씀으로 무슨 기별을 전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의미를 현대의 삶의 정황과 필요 속에서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성격

 묵시 저술의 전형적 형식으로, 요한계시록의 크게 구별되는 특징은 독특하고도 상징적인 언어다. 요한은 바로 허두에서(계 1:1) 그가 기술한 책의 내용들이 자기에게 상징적 또는 비유적(figurative) 언어로 계시되었다고 말한다(헬라어 세마이노 semaino“표시로 알리다”라는 의미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실재나 다가오는 사건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으로 여겨 사진처럼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기별들은 상징적, 또는 비유적 표현들로 전달된다. 요한은 자신이 본 묵시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계 1:1-2 참조). 그러나 그 묵시들의 언어는 영감받은 저자를 통하여 전달된 인간의 언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요한 당대의 시간, 장소, 그리고 환경에 적절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성격을 심사숙고하며, 이 책의 예언들을 탐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문자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듣고 이해하도록 의도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의 상징들을 이해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시대의 언어였기 때문이다.28)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의미 있는 해석을 끌어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원래의 독자들이 그 상징과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했을 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안전 장치로서 문맥이 문자적 의미를 의도하였다고 분명히 밝히지 않는 한,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여러 장면과 활동은 성격상 상징적 또는 비유적이라는 전제 하에 접근해야 한다. 밧모의 요한, 일곱 교회, 그리스도, 환난, 전쟁, 죽음 등과 같이 사람과 사물이 문자적으로 의도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를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상징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상징적인 책이라고 해서 요한계시록의 언어가 추상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 같은 책이라는 의미다.29)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는 진공 상태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현실에 확고히 기초되어 있었다. 존 폴린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그 어휘가 전달하는 의미들은 자신들의 과거 경험의 소산물이다. 언어는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에 한정된다. 미래에 관한 것도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의 언어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30)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종종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 그 예언이 전달된 언어는 우리 시대의 것이 아니라 영감 받은 저자의 시대와 장소의 언어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일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셨던 그 상황에서 본문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우리 시대의 시간과 장소에서 더 적합한 의미를 부가하기가 너무나 쉽다. 본문에 사용된 언어의 본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성경의 본문을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재구성하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으 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3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이 본 묵시들을 기술함에 있어 그가 수집하여 사용한 상징과 이미지의 출처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만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의 출처들은 구약, 유대인의 묵시록, 1세기 소아시아의 환경 및 신약 등 최소한 네 가지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자료

 자신이 본 묵시들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1세기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부응한 반면, 상징들은 거의 전적으로 구약에서 끌어왔다.32) 비록 그가 예언을 기록함에 있어 구약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을지라도, 단지 “한 단어는 여기서, 한 개념은 저기서, 또 다른 곳에서 한 절을” 인유함으로, 구약의 상징을 많이 사용한다.33)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요한계시록의 404 절 중에서 278 절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구약 인용이나 인유를 포함한다고 증명되었다.34) 그러므로 이 책은 “구약의 절들을 완전히 모자이크” 한 것처럼 보인다.35) 윌리엄 밀리건(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이 “교회의 과거 추억, 사건, 사상 및 언어 속에 완전히 잠겼다. 구약에서 끌어오지 않은 상징(figure)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또는 구약에서 끌어오지 않은 자료로 만들어진 단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주장한다.36) 이것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과 구약 사이의 유사성들을 인지하였을 것이며, 마침내 “구약의 배경에 비추어 그 책의 상징들”을 이해했으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37)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풀기 위하여 오늘날의 독자들은 가장 적합한 구약의 배경을 찾아내야 한다. 존 폴린은 “구약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없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 책의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38) 또한 그는 구약이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 나오는 것은 “구약이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의 의미를 푸는 주요 열쇠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관찰한다.39) 예를 들어, 본 주석서는 4~5장의 묵시가 어떻게 이스라엘 왕들의 대관식(신 17:18-20; 왕하 11:12 참조)에 기초되어 있으며, 구약의 언약에 나오는 저주들이(레 26:21-26 참조) 어떻게 일곱 인의 묵시적 배경이 되고, 유리바다 위에 서서 모세와 어린양의 승리를 노래하는 144,000 인이 어떻게 출애굽기 15장의 명백한 인유(引輪, allusion)이며, 요한계시록 16장 12절-18장 24절의 장면이 바사 왕 고레스와 그의 군대의 바벨론 점령 역사에 어떻게 기초되어 있는지 등을 보여 준다(사 44:26-45:7; 렘 50-51장 참조). 나팔, 무저갱에서 나온 메뚜기, 소돔과 애굽, 시온 산, 바벨론, 유프라테스, 아마겟돈 전쟁 등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빌어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그분의 계획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현재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에 과거의 언어를 사용하신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특별히 창조, 홍수, 출애굽, 하나님과 다윗 왕과의 언약 및 바벨론 유수 등 거룩한 역사의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사건들에 기초되어 있다.40)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미래 구원 활동은 하나님의 과거 구원 활동과 매우 흡사할 것이라는 이해 위에 독자들의 믿음이 구축되도록 의도되었다. 과거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 바로 그 능하고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도 동일한 일을 행하고 계시는데, 그분은 자기 백성의 미래와 관련하여 주신 약속들을 분명히 지키는 하나님이시다. 제칠 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은 다음의 사실을 지적한다.


...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이러한 [구약] 인용문과 인유들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은 그 것들이 나타내는 요한계시록 구절들을 이해하는 첫 단계다. 그런 다음 상황에 맞춘 [adapted]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요한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문맥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것은 인명과 지명, 사물, 그리고 사건, 사고 등에 적용된다.41)

 만약 구약의 배경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바르게 이해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폴린은 “그러한 이해가 없다면 요한계시록의 의미는 상당히 숨겨진 채로 남게 된다”고 강조하였다.42)


 소아시아적 배경

 또한 요한계시록은 1세기 소아시아의 실세계를 반영한다. 요한은 당시의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이 본 묵시를 기록했다. 비록 대부분이 구약에서 끌어온 것일지라도, 그가 본 묵시를 기록하기 위하여 사용한 자료는 원 독자들의 시대, 장소 그리고 배경 속에서 변형되었다. 언어는 종종 당대의 그레코로만(Greco-Roman)의 관습과 주제들로 채색되었다. 자신의 계시를 이방의 환경과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영감 받은 선지자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이방 세계와 대화할 때,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순수성을 위협한 이방 사상들을 논박할 때, 그리고 이방 종교들을 비판하면서, 요한은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상징과 개념들은 “당시의 소아시아에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익숙하였을 생생한 표현으로 요한에게 다가왔다.”43)

 여러 주석과 다른 연구들은 요한계시록의 여러 장면과 비슷한 고대의 어떤 내용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유사점이 책임 있게 다뤄질 때, 그러한 정보들은 독자들에게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묵시의 그레코로만적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과 고대 그레코로만 세계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아우니(David Aune)는44)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곧 요한계시록 1장 13-18절의 열쇠를 가지신 분과 하늘과 지옥의 문들의 열쇠를 가졌다고 여겨진 헬라 여신 헤카테(Hekate)의 묘사 속에서 유사성을 끌어낸다(계 1:18의 어구 해설 참조).45)

 또한 요한계시록 4, 5장의 묘사는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의 대관식에 기초되어 있는 반면, 어떤 연구들은 그 장면이 어떻게 로마제국의 법정과 이교 예식을 똑같이 원 독자들의 마음에 상기시킬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46) 같은 맥락에서, 요한계시록 21장 10절-22장 5절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이상적이고 안전한 도성에 관한 고대의 개념을 반향한다.


 묵시적 언어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는 유대의 묵시 문학에 속한다. 에녹1서(에티오피아어 에녹서), 에녹 2서(슬라브 어 에녹서), 에스라4서, 그리고 바룩2서와 같은 유대의 묵시 문학들 중 일부는 서기 1세기에 널리 유행하여 읽혀졌다. 그렇기에, 묵시문학은 일반 유대인들의 정서, 신학 및 기대 등을 상당히 꼴 지었다. 묵시 문학의 공통점은 저자가 “성령으로”(계 1:10 참조) 천사들과 대화하였고, 그의 이러한 묵시적 경험에 근거해 그 책의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자주 묵시 중에서 먼 곳으로 끌려가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초자연적 장면들을 보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므로 1세기의 바룩2서의 저자는 하늘의 묵시 중에서 “그룹들과 스랍들이 여호와 앞에 서서 그분의 뜻을 수행하며, 그분의 보좌 주변 사방에 서 있는데, 그들은 여섯 날개와 많은 눈들을 가졌고, 보좌 전체를 덮고 있었으며,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 하늘과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한다.47) 누구나 이 본문과 요한계시록 4장 8절 사이에 있는 여러 개의 평행구들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또한 에스라4서(1세기)의 다음 본문은 요한계시록 6장 9-11절을 생각나게 한다. “의로운 영들이 그들의 밀실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상을 거둘 날은 언제 올 것입니까?’라면서 이 문제들에 대하여 묻지 않았던가? 그러자 천사장 예레미엘(Jeremiel)이 그들에게, 그 날은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수가 찼을 때’라고 대답하였다.”48)

 묵시 문학의 저자는 초자연적 사물들과 미묘한 하늘의 실체들을 묘사하기에는 문자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발견한다. 그것들을 묘사할 때, 그는 매우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과 개념 - 예를 들어, 일곱 머리의 용, 사악한 짐승, 뿔, 별, 땅의 네 바람, 마지막 때의 싸움은 널리 유포되어 읽혀졌던 유대 묵시문학에서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의 백성이 사용하던 어휘의 상당 부분은 묵시 문학의 상징과 개념들이었음을 암시한다.49) 1세기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주요 상징을 이해하는 데 비교적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의 비유적 표현들은 그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해석자는 묵시 문학적 언어가 요한 당시의 백성에 의하여 어떻게 인지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묵시 문학을 참고해야 한다. 그렇게 하므로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신약의 평행구

 도나티앙 몰라(Donatien Mollat)가 말했듯이, 신약의 마지막에 위치한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신학적 주제들을 요약적으로 진술하는 역할을 한다.50) 구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요 5:39), 신약은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신실한 옛 백성들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51) 신약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로버트 재미슨(Robert Jamieson), A. R. 포셋(A. R. Fausset), 그리고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등이 언급한 대로, “이 책에서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이 끝나고 만난다.”52) 요한계시록의 자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 그의 생애와 봉사를 통해 해석된 구약의 상징들이 스며 있다. 묵시들을 기록함에 있어, 요한은 일차적으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다. 이들의 모든 믿음과 선포는 그들의 주님이 돌아가셨고, 부활하여 승천하셨으며, 마침내 하늘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등극하셨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촉발되었다(행 2:33-36; 롬 8:34; 엡 1:20; 빌 2:5-11; 히 12:2 참조).

 비록 형식, 어휘, 그리고 주제가 다르다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은 이전에 기록된 신약의 다른 책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평행구와 인유로 가득차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신약의 나머지 책의 신학적 사상에 기초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 많은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과 종종 바울의 진술들을 반영한다.53) 예를 들면,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을 감람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담화의 확대”로 본다.54)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기별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이 책의 다양한 구절과 유사한 신약의 구절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본 주석의 목적

 다음 내용은 본 주석의 집필 목적과 지침이다. 이들은 책임성 있는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하려는 저자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다. 요한계시록의 첫 절들은 그 책의 신적 기원을 가리킨다(계 1:1-3 참조), 폴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묵시의 기원과 관련하여 사람이 취하는 입장과 상관없이, 요한은 요한계시록이 자신의 저작이기보다 하나님이 구성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다.”55)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요한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상 가운데서 요한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요한은 그의 저술이 “예언의 말씀”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계 1:3; 22:7, 10, 18-19), 요한계시록이 1세기의 소아시아를 배경으로 인간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이 사실인 반면, 그 책에 신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은 그 책의 궁극적 의미가 종종 인간 저자의 이해를 능가했으리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벧후 1:21),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요한이 성령의 지배하에서 기록한 자신의 묵시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그 권위에 있어서 구약의 예언이나 사도들의 글과 동등하다. 그러므로 본문을 취급할 때, 요한계시록의 신적 요소를 신중히 헤아리는 것은 심히 중요하다.

 이 노선에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본 주석에서 본문이 “요한의 목적/의도”“요한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애썼던 것”을 따라 다루어질 때, 요한계시록이 단순히 인간의 저작으로 이해되고 접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엘렌 화잇의 진술은 큰 교훈을 준다.


성경은 감동 받은 사람들이 기록하였으나, 그 기록이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 양식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감동을 받은 것이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 아래서 사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적인 정신의 특징을 입는다. 거룩한 정신이 널리 스며든다. 거룩한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와 결합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말들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56)

 요한의 의도나 목적에 관한 본서의 언급은 계시 전달 사슬상 마지막 인물인 감동받은 저자의 의향에 맞추어 본문을 탐구하는 손쉬운 길을 보인다(계 1:1-2 참조).

 요한계시록은(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처럼) 본래 예언적 묵시적 양식(propheticapocalyptic style)으로 기록된 회람(回) 서신이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바울 서신과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요한계시록은 원래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보낸 것으로서, 당장의 필요와 삶의 정황들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 내용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로마제국에 국한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그 기별들 은 예언서로서 “기독교 전 역사에 걸쳐 교회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위로를 주기 위함이었다.”57)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와 재림 사이의 교회와 세상의 역사를 망라하며, 특히 종말의 때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듯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위한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된 책이다(계 1:3), 그러므로 본 주석의 목표는, 전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경험에 도움을 주도록 요한계시록을 주해(註解)함에 있다. 성경 예언은 미래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는 정해진 위치와 세상에서 할 일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극을 받아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성취되기 전에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미래 관련 사항이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함으로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들의 예언상 위치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자세한 예언 도표들을 만드는 것보다 지리 도표들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본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훌륭한 요한계시록 주석은 어떤 신학이나 계획(agenda)을 본문에 부과하기보다는 말씀 자체에 충실함으로 본문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주석은 주석자가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본 주석은 기본적으로 역사보다는 본문에 초점을 맞춘다. 존 폴린의 언급처럼, “역사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역사적 적용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성경 본문의 문학적 역동성을 놓치는 일” 도 생길 수 있다. 어떤 해석자들은 종종 본문의 세세한 것에서 곧장 역사로 건너뛴다. 그리고 다양한 역사적 적용들을 함께 묶어 전체를 통일성 있게 맞추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본문 자체 속에 있는 내부적 통일성을 종종 놓쳐 버린다. “본문이 철저하게 이해되었을 때에만 건전한 역사적 적용이 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성경 해석의 틀을 놓는 것은 성경 본문이다. 그리고 본문이 내적 역동성을 표출하고 있는 한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 본 주석서의 목적이다.58)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푸는 열쇄는 우화(allegory)가 아니라 표상(typology)이어야 한다.


 성경은 요한계시록의 최고 해석자다. 우리는 신·구약이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위해 좋은 건축 자재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보았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표현들은 “영감받은 저자의 목적과 의도, 그 책이 원래의 독자들에게 전달했던 의미”를 따라 기본적으로 성경으로 설명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 언어로 전달된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풍유적 상상이나 현재의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의 의견을 반영할 뿐이다.59)

 그리스도는 모든 예언의 중심이시다. 요한계시록의 서두는 이 책이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 1:1)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이미지는 그리스도에게 그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외의 어떤 것, 즉 역사나 미래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마저도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대한 주해와 해석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요한계시록을 해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무리 자주 거명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중요성이 요한계시록의 상징속으로 스며들게 하지 않는 한, 그 결과는 기독교적 해석이 아닐 것이다.” 60)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이미지가 궁극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찾는다.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배열

 요한계시록의 구조적 디자인은 이 책의 포괄적인 주제의 전개 과정을 이해함에 중요하게 보인다. 이는 한 구절이나 한 단원을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별개의 것으로 해석하거나 연구하는 것에 관해 경고한다. 본문의 해석은 책 전체의 일반적 목적과 일치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배열은 매우 복잡하다. 비록 요한계시록의 구조적 구성이 기별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하였을지라도, 기본 구조와 관련하여 학자들 간에 어떤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석가들과 해설가들은 영감 받은 저자가 어떤 의도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편성하였는지에 관하여 다양하게 제안하였으나, 두 주석가가 동일한 견해를 똑같이 공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음 내용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구조적 편성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제안들 중 일부다. 이 제안들을 상호 배타적이며 단정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제안은 다른 제안보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적 배열에 대해 더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할지라도, 또 다른 제안들은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 뿐만 아니라, 그 디자인과 구성에 대한 해석을 광범위하게 표현 한다. 이 모든 것을 함께 고려한다면, 그것들은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저자의 의도를 파헤쳐 줄 것이다.


 도약판(Springboard) 구절의 중요성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문학 양식의 성격을 띤다. 요한계시록의 큰 단위에 대한 더 넓은 의 미를 찾는 열쇠가 종종 앞 단위의 결론적 진술 속에 위치해 있음이 관찰되었다. 그런 진술은 앞 부분을 결론지으면서 다음 부분을 소개하는 도약판 구절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장 20절의 진술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2-3장) 앞에 나오면서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묵시(계 1:9-20)를 결론짓는다. 이 결론적 진술은 동시에 계시록 2-3장의 서론적 역할을 한다. 인침을 받은 144,000인에 관한 묵시(7장)는 어린양의 큰 진노 앞에서 누가 능히 설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요한계시록 6장 16-17절의 결론적 진술을 상세히 설명한다.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전쟁을 언급한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의 결론적 진술은 13-14장에서 발전된다. 요한계시록 15장 2-4절요한계시록 12-14장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일곱 재앙의 서론이기도 하다.

 여러 도약판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더 큰 부분을 예측해 주는 것 같다. 나중에 논의되겠지만, 요한계시록 3장 21절4-7장을 해석하기 위한 개요를 제공되는 듯하며, 11장 18절은 요한계시록 후반부 전체(계 12:1-22:5)를 위해 제공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6장 9-10절은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 재앙의 성격과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6장 9-10절의 도약판 구절이 가리키는 가장 완벽한 예가 8장 2-6, 13절에 나온다).

 도약판 공식은 해석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구절 속에 묻혀 있는 정보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영감 받은 저자가 본문 이해와 관련하여 자신의 의도를 명백히 나타냈음을 시사한다. 이 사실은 요한계시록 밖에서 창의적 해석을 구하려는 노력을 배제 시킨다. 이 공식을 무시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관한 저자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낄 것이다.61)


 신분 묘사 양식(Identification-Description Pattern).

 중요한 또 하나의 문학적 구조가 해석자로 하여금 이 책의 난해한 몇 본문을 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에서 새로운 주요 인물이 소개될 때마다, 먼저 그에 대한 개별적 묘사나 그의 역사적 역할과 활동에 의해 그 정체가 파악된다. 일단 주요 인물이 파악되면, 요한은 묵시에서 특별히 중요한 주요 인물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묘사로 이동한다. 이러한 문학적 구조는 먼저 요한계시록 1장 9절-3장 22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분이 요한계시록 1장 9-20절에서 그분의 다양한 특성을 묘사한 목록과 함께 소개되며, 그 뒤를 이어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이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성은 교회에 대한 그분의 다양한 봉사의 측면을 나타낸다.

 일곱 인의 묵시에서도 동일한 기법을 볼 수 있다. 인을 개봉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기에 앞서(계6:1-8:1), 요한은 5장에서 인봉된 두루마리의 인을 개봉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독특한 자격을 논한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의 정체(11:3-6)에 이어, 묵시에서 중요한 요소인 그들의 활동과 경험 (11:7-13)이 뒤따라 나온다. 또한 사단의 분노와 마지막 싸움에 돌입 하려는 그의 결전(계 12:17)을 언급하기에 앞서, 요한은 사단의 정체와 그의 분노와 격분의 이유를 설명한다(계 12:3-16).

 이 문학적 전략은 요한계시록 13장17장을 명백히 이해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비록 요한계시록 13장의 초점은 이 세상 역사의 최후 싸움에 모아지고 있다 할지라도, 본장에서 바다짐승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모든 것이 종말의 때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시대에 속한 ‘마흔 두 달’(13:5-7) 동안 전개될 바다 짐승의 역할과 활동들을 묘사하기 전에, 요한은 13장 1-4절에서 먼저 일반적 용어로 짐승의 정체를 파헤친다. 그런 다음, 그는 최후의 위기에서 드러날 짐승의 역할과 기능을 묘사하기 위하여 13장 8절과 함께 이동한다. 동일한 문학적 전략은 요한계시록 17장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적 바벨론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최후의 위기 때에 부활한 짐승을(17:14-18) 묘사하기에 앞서, 요한은 그들의 역사적 역할과 기능을 기술한다. 문학적 전략에서 신분을 묘사하는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영감받은 저자가 그 본문 속에 묻어둔 건전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들으니”“내가 보니” 패턴

 계시자는 종종 “내가 들으니”“내가 보니”로 표현되는 또 다른 문학 기법을 사용한다. 요한이 이상 중에 본 것을 설명하면서 드러낸 바로는, 가끔 이상 중에 어떤 것을 듣고, 직후에 그 동일한 대상을 보는데, 듣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가 보는 것은 그가 먼저 들은 것의 다른 국면이다. 다음은 이러한 문학적 기법으로 전달된 것들의 목록이다.

 ● 1장: 요한은 먼저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같이 큰 음성”을 듣는다(1:10); 그가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일곱 등대 사이에 거니는 예수를 본다(1:12, 13).

 ● 5장: 요한은 먼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다는 소리를 듣는다; 사자를 보려고 몸을 돌이 켰을 때에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았다(5:5-6). 두 장면 모두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자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지, 또한 어린양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 일을 하였는지 보여 준다.

 ● 7장: 먼저 요한은 싸움을 통과한 하나님의 인친 백성의 수가 144,000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7:4); 그가 동일한 무리를 보았을 때에, 그들은 아무나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로 보였다(7:9). 그러므로 두 무리는 다른 역할과 형편 속에 있는 동일한 성도다.

 ● 17장: 요한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에 대하여 들었다(17:1); 그런데 막상 그가 후에 본 것은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주 빛 짐승 위에 앉은 여자” 였다(17:3). 이것은 짐승과 많은 물이 17장 15절에 구체화된 동일한 정치적 세속적 단체를 일컫는 것임을 말 한다.

 ● 21장: 요한은 먼저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에 관하여 듣는다(21:9);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영광스러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본다(21:10-11).

 이러한 문학적 기법은 요한계시록의 어떤 중요한-특히, 7장의 구원받는 성도의 두 무리에 관한-이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이러한 이해는 영감받은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접근 방식

 요한계시록을 대하면서 그 책의 기본 구조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 란에서는 현대의 몇 학자들이 지적한 요한계시록의 여러 특이한 구조적 양식들을 대충 보게 될 것이다.


 요약적(Recapitulative) 혹은 반복적 구조.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및 일곱 대접 재앙 등 여러 가지 반복적 구조가 일곱 쌍으로 무리지어 나온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자들이 직면하는 중대한 문제는 이 일곱으로 된 무리를 동일한 사건의 병행으로 혹은 요약 반복적 기사로 이해해야 하느냐, 아니면 계속적인 또는 점진적인 연대순을 따르는 종말적 사건들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 다음에 나팔이 뒤따르고, 나팔 다음에 대접 재앙이 뒤따른다. 페타우의 빅토리누스(Victorinus Of Pettau, ?~약 304년)가 요한계시록의 요약적 방식을 도입하였는데, 이 방식은 그 후의 해석자들에 의해 약간씩 수정되었다.62)

 분명 인과 나팔 사이에 요약적 평행구들이 있는 것 같다. “개관: 요한계시록 8-9장에서 소개된 이 두 연속 사건들 간의 대조는 그들 사이에 있는 평행적 구조를 보여 준다. 먼저 나팔과 인은 각각 넷과 셋의 그룹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 다음, 두 연속 사건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의 사이에 그리고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된 막간에 의해 각각 차단된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은 1세기에 시작하여 종말에 가서 결론이 나는데, 이는 일곱 재앙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임이 분명하다. 덧붙여, 다음에 나오는 “도입적 성소 장면”의 구조가 나타내듯이, 인과 나팔은 아마 모든 기독교 시대를 망라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마지막 일곱 재앙은 분명히 이 지상 역사의 마지막에 놓여 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요약적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명백한 구절에서 얻은 정보와 통찰력은 난해한 평행구절의 신학적 의미를 풀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7장10-11장, 특히, 두 증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또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은 그것들의 언어와 내용을 볼 때, 의도적 평행구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두 가지가 분명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15-18장 개관 참조), 그 구조적 평행구들을 조사하므로 독자들은 영감 받은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의도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얻는 일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 상당수의 학자들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요한계시록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안들 중에는 사중(四重) 구조에서 팔중(八重)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각각의 제안은 ‘일곱’이라는 수에 기초되어 있다. 독자들이 요한계시록의 구조와 연관된 질문들의 복잡성을 알려고 할 때, 그 주제에 관한 견해를 완전하게 제시하려면 주의가 요망될 것이다. 여러 주석가들이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비평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자세한 비평은 하지 않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유제니오 코르시니(Eugenio Corsini)는 요한계시록을 네 그룹으로 된 일곱 사건으로 보았으며(일곱 편지,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이 그룹들이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와 기별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63)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요한계시록을 교회, 인, 나팔, 대접, 그리고 “내가 보니”라는 방식으로 소개되는 일단의 묵시 등 다섯 그룹으로 이루어진 일곱 사건으로 보았다.64)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그 각 부분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기초되어 있다. 메릴 C. 테니(Merrill C. Tenney)는 교회, 인, 나팔, 대접, 일곱 인물(여자, 용, 아이, 미가엘, 어린양,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 그리고 일곱 가지 새 것(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예루살렘, 새 성전, 새 빛, 새 낙원) 등의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였다.65) 오스틴 파러(Austin M. Farrer)도 요한계시록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으며, 각 부분은 다시 일곱으로 세분된다.66)

 다소 수정된 파러의 도식은 야르브로 콜린즈(A. Yarbro Collins)에 의해 채택되었다. 콜린즈는 서언(1:1-8), 일곱 기별(1:9-3:22), 일곱 인(4:1-8:1), 일곱 나팔(8:2-11:19), 숫자가 명시되지 않은 일곱 묵시(12:1-15:4), 바벨론(17:1-19:10)이 추가된 일곱 대접(15:1-16:21), 예루살렘이 추가된 숫자가 없는 일곱 묵시(19:11-21:8), 그리고 결언(22:6-21) 등의 8중구조를 제시한다.67) “숫자가 없는” 부분들과 두 개의 추가 부분은 매우 인위적이고 문제성이 있는 것 같다. 덧붙여, 적지 않은 학자들이 7중 구조에 관하여 논쟁하며, 7개의 주요 묵시 모두를 칠개조(七個組, Septets)로 본다.68)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요한 자신이 숫자를 매기지 않은 곳에서 일 곱으로 된 사이클(cycles of sevens)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69)는 게르하르트 크로델(Gerhard Krodel)의 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와 같이 다양한 제안 중에 맞는 내용도 상당히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이론들이 많지만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함으로 어느 한 가지 방법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독자는 조심해야 한다.”70) 데이비드 아우니는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 기초한 2중구조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1) 1장 9절-3장 22절은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신적 현현(顯現)이 중심이며;

 (2) 4장 1절-22장 9절은 하늘 여행과 함께 소개된 일련의 삽화적인 묵시 이야기다.70)

 아우니의 단순한 구조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에 의해 명백하게 제시되었다(계 1:19; 4:1 참조). 그러나 그 단순한 구조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석 방식은 요한계시록 12장이 그 책의 새로운 (종말) 부분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린다. 요한계시록 12장은 그 책을 매우 뚜렷한 세 부분으로 나눈다.


 도입부 성소 장면

 케네쓰 A, 스트랜드(Kenneth A. Strand)는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서언과 결어가 있는 여덟 개의 묵시로 나누었다. 그는 각 묵시 앞에 “성전을 배경으로 한 승리의 도입 장면”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72) 스트랜드의 연구에 기초하여, 리처드 M, 데이빗슨(Richard M. Davidson)과 존 폴린은 서언과 결어를 가진 요한계시록의 7중 구조를 지지한다. 이 7중 구조는 성전 배경을 토대로 구축되었다.73) 그들은 중요한 일곱 부분이 성소의 장면과 함께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책 전체는 성소제도 표상(sanctuary system typology)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것 같다.


 서론(1:1-8)

 1. 도입부 성소 장면(1:9-20)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2-3장)

 2. 도입부 성소 장면(4-5장)

   일곱 인을 개봉함(6:1-8:1)

 3. 도입부 성소 장면(8:2-5)

   일곱 나팔을 붉8:6-11:18)

 4. 도입부 성소 장면(11:19)

   민족들의 분노(12:1-15:4)

 5. 도입부 성소 장면(15:5-8)

   마지막 일곱 재앙(16-18장)

 6. 도입부 성소 장면(19:1-10)

   종말적 절정(19:11-21:1)

 7. 도입부 성소 장면(21:2-8)

   새 예루살렘(21:9-22:5)

   결론(22:6-21)


 일곱 개의 도입부 성소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골격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성전이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의 전 체 묵시(4:1-22:5)는 하늘 성전이라는 “유리한 고지로부터 분명히 감지”된다.74) 성전이나 성전에서 일어나는 양상에 대한 계속적인 언급 외에, 하늘 성전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장면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 앞서 묘사된다.

 이러한 도입부 성소 장면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두 개의 뚜렷한 진행을 보인다.75)

 첫째, 땅에서 하늘로, 그리고 다시 땅으로 이동하며 완전하게 순환한다.

 둘째, 하늘 성소의 개통식 (inauguration)에서 중보로, 심판으로, 성소 기능의 중지로, 마침내 성소의 부재(不在)로 확실 하게 이동하며 진행한다. 다음의 도표는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반영한다.


   1. 계 1:12-20                                        땅

      2. 계 4-5장 개통(Inauguration)

         3. 계 8:3 중보(Intercession)

            4. 계 11:19 심판(Judgment)      하늘

         5. 계 15:5-8 중지(Cessation)

      6. 계 19:1-10 부재(Absence)

   7. 계 21:1-22:5                                    땅


 평행구인 첫째와 일곱째는 땅이 배경인 반면, 둘째에서 여섯째까지는 하늘이 배경이다. 둘째와 여섯째는 성전의 예배 장면을 묘사하며, 보좌, 경배, 어린양, 이십사 장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등을 언급한다. 둘째가 성전에 관한 가장 많은 은유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섯째에서 성소 장면 속에 성소는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셋째 장면은, 향을 피우는 것을 포함하여 성전에서 진행되는 계속적인 중보 사역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 다섯째 장면은 성전에서의 중보가 중지된 것을 가리킨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의 연기로 가득 찼으며, 아무도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넷째 성소 장면은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문학적 배열은 12-14장이 요한계시록의 중심부임을 가리키며, 마지막 대쟁투의 벼랑에 서있는 교회가 요한계시록 전체의 초점이 됨을 보여 준다.

 또한 구약 성소의 지속적인 성격의 매일 봉사(tamid)에서 연례 봉사로 옮겨가는 확실한 진행이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매일 성소 봉사와 연례 성소 봉사의 패턴 위에 기초되어 있는 것 같다. 최근의 연구들은 요한계시록의 전반부와 요한이 기록했던 1세기에 성전에서 진 행되었던 매일 봉사 순서 사이에 뚜렷한 평행구들이 있음을 보았다.76)

 고대 전통에 근거하여 유대교의 법과 전통, 관례 등을 집대성한 서기 2세기 문헌인 미시나의 타미드 장에는 매일 드리는 타미드 제사의 기본적 내용이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77)타미드 봉사는 선택된 제사장이 성전의 첫째 칸에 들어갔을 때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제사장은 등을 손질하며 새로운 기름을 등에 채웠다(타미드 3:7, 9; 계 1:12-20 참조). 성전의 큰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타미드 3:7; 계 4:1 참조; 헬라어 본문은 요한이 묵시에서 문을 보기 전에 이미 열려 있었음을 암시한다), 미쉬나와 요한계시록은 꼭 같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대하여 언급한다(타미드 4:1-3; 계 5:6 참조), 어린양의 피는 성전의 바깥뜰 번제단 밑에 쏟아졌다(타미드 4:1; 계 6:9 참조), 피를 쏟은 후, 제사장은 성소의 금향단 위에서 향을 피웠다(타미드 5:4; 눅 1:8-11; 계 8:3-4 참조). 제사장이 금향단 위에서 향을 피우고 있는 동안, 회중들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타미드 7:3; 계 8:1 참조), 이어서 봉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타미드 7:3; 계 8:2, 6 참조).

 이것은 요한계시록 전반부의 사건과 성소의 매일 봉사가 그 진행에 있어서 똑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점에 대하여 폴린은 이렇게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은 타미드 의식의 모든 주요 세부 사항들의 잠재적 인유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동일한 순서를 따라 그것들을 인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이 한 조(組)로 이루어진 교회, 인, 나팔 등의 구성 요소는 계속적인 봉사 또는 타미드 봉사와 관련된 성전에서의 활동과 미묘하게 연관된다.”78) 요한계시록의 전반부는 분명히 성소의 매일 봉사를 직접적으로 따른다.

 요한계시록의 후반부는 분명히 대속죄일의 연례 봉사 위에 구축되어 있다. 케네쓰 스트랜드(Kenneth A. Strand)가 주장하듯이,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은 대속죄일에 대한 확실한 암시들을 담고 있다(계 11:1 어구 해설 참조).79)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었다. 이 축제일의 주요 활동들은 지성소에서 이루어졌다. 요한계시록 11장 19절나오스(naos 성전의 내소; 계 11:19 어구 해설 참조)에 대하여 언급한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부분들은 대속죄일의 주요 활동이 이루어졌던 나오스에 계속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80)(계 11:19; 14:15; 15:5-8; 16:1, 17).

 “대속죄일의 중심 주제인 심판 용어와 심판 활동 또한 요한계시록 후반부의 주요 관심사다.”(계 14:7; 16:5, 7; 17:1; 18:8, 10, 20; 19:2, 11; 20:4, 12-13 참조)

 이러한 구조의 성소 장면들은 요한계시록을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암시를 던진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이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부분과 종말적 부분을 나누는 구분선이어야 함을 보여 준다( 12:1-22:5 개관 참조), 한편, 스트랜드는 요한계시록 14장 20절을 구분선으로 제안하였다. 요한계시록 1-11장(일곱 교회, 일곱 인 및 일곱 나팔)은 전체 기독교 시대에 초점을 맞추며, 요한계시록 12장 1절 - 22장 5절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에 맞춘다. 예를 들면, 이 구조는 요한계시록 4~5장의 묵시가 조사 심판 장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순절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대관식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확증해 준다 (4-11장 개관 참조), 그것은 또한 인과 나팔은 기독교 역사를 광범위하게 망라하는 반면, 마지막 일곱 재앙은 종말의 때를 배경으로 한다고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절기의 연례 주기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세운 히브리 종교력의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및 장막절 등의 연례 절기를(레 23장 참조)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81)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은 이 절기들을 맴돌고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절기들의 종말적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요한계시록 이 구약의 비유적 표현에 많이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들이 쉽사리 과장될 수 있는 반면, 요한계시록의 전체 개요는 유대인의 연례 절기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 하는 것 같다.


 유월절.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과 함께 도입 이상(introductory vision)은 유월절의 개념과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계 1:5, 17-18). 요한계시록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그처럼 강하게 강조하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으로 지칭되어 있다(계 1:5).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존 폴린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면밀히 조사하시는 일은 유월절 직전에 유대인의 각 가정에서 누룩을 제거하기 위하여 누룩을 찾던 일을 상기시킨다.”고 하였다(출 12:19; 13:7 참조).82) 또한 굴더(M. D. Goulder)는 “부활절로부터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각 교회가 예배시에 가지고 있던 고대의 전통, 즉 유월절의 초를 태우던 전통”과 크게 유사한 것을 보았다.83) 상호 교제를 위한 식사 초청(계 3:20)은 유월절의 음식을 상기시켜 준다. 유월절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성취되었다고 생각한 유일한 절기였으므로(요 19:35-37; 고전 5:7 참조), “지상의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봉사를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과 유월절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다.84)


 오순절. 요한계시록 4~5장은 오순절과 적절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늘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대관식/즉위식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열흘 동안 진행되었는데, 오순절에 그 절정에 달했다.”85) 성령이 세상에 부어진 것은 그 때였다(계 5:6 참조),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 나오는 이십사 장로들(구속받은 인간의 대표자들)의 노래는 출애굽기 19장 5~6절을 상기시킨다. 또한 보좌에서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계 4:5; 출 19:16 참조), 나팔소리(계 4:1; 출 19:16-19 참조), 그리고 올라오라’는 명령(계 4:1; 출 19:20, 24 참조) 등은 시내산 사건을 회상시킨다.86) 모세가 율법을 받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책을 취하신 것과 평행을 이룬다. 출애굽기 19장 1절-20장 23절에스겔 1장(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에 관한 묵시를 뒷받침 해주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배경 문서인)은 오순절을 위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낭독용 성구집(聖句集)이었다.


 나팔절. 요한계시록 8-9장에서 울렸던 일련의 일곱 나팔은 봄과 가을의 절기 사이에 걸쳐있던 일곱 개의 월삭 절기를 반향(反響)한다(민 10:10 참조), 나팔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심판의 날, 곧 대속죄일 또는 욤 킵푸르로 알려진 이 날을 예비하게 한 절정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나팔은 “일곱 달의 진행 순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일곱째 나팔은 나팔절 자체를 대표한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심판 용어가 처음으로 명백히 사용된 곳은 일곱째 나팔(계 11:18)임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은, 칠월의 나팔절이 대속죄일로 연결되는 심판의 시간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생각하였다(계 11:18-19 참조). 이것과 조화되어, 요한계시록 11장 19절로부터 요한계시록의 거의 끝까지에 걸쳐 점진 적으로 심판에 초점이 모아진다.”87)


 대속죄일. 요한계시록 전반부는 히브리 제사제도의 타미드 봉사 또는 매일의 봉사를 모델로 삼은 듯하다. 반면, 요한계시록 12장 1절-22장 5절은 대속죄일의 연례 봉사를 반영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을 시작으로 대속죄일의 요소들이 요한계시록의 후반부에서 언 급되고 있음을 보았다.


 초막절. 유대인의 5대 주요 절기 중 마지막 절기는 대속죄일 다음에 오는 초막절 또는 숙코트(Sukkoth)였다. 수장절(收藏節)로도 알려진 이 절기는 곡식을 추수하여 곡간에 들인 이후에 진행되었다. 그 목적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백성의 마음에 생생하게 기억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초막절은 주님 앞에서 찬양하고 기뻐하는 특별한 시간으로(레 23:40), 종려가지를 흔들고 노래하는 대축제였다.88)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초막 절에 대한 많은 암시가 있다. 추수는 끝났고, 하나님 백성의 광야 방황도 끝났다(계 14-20장).

 하나님의 백성은 추수되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장막을 치고”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 들여졌다(계 21:3). 노래하고(계 7:9-10; 14:3; 15:2-4; 19:1-10), 거문고를 타며(14:2), 종려가지를 흔들면서(계 7:9) 기념한다. 여기에 더하여, 초막절의 기본 특징들, 곧 반석에서 나온 물을 기념하는 물과 빛, 그리고 광야의 유랑 기간 동안의 불기둥 등은 요한계시록 22장 1-5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교차대구적 구조(Chiastic Structure)

 요한계시록의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주시하는 현대 학자들이 점점 늘어난다. (X자 형태의 헬라어 글자에서 유래된) ‘교차대구법 Chiasm’이라는 말은 히브리 백성에게는 전형적인 (문학 표현)조직 구조를 가리키는 단어다. 오늘날의 문학적 개요는 A-B-C 패턴에 기초하지만, 교차대구법적 개요는 A-B-A’ 공식에 입각해 있다. 교차대구법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역(逆) 평행구다. 예를 들어,


 하나님선하시다

 주님자비하시다


 라는 표현은 동의어적 평행구로서 둘째 줄은 첫째 줄의 내용을 다른 단어로 반복한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하나님선하시다

 자비하시다 주님


 라는 식의 역 평행구로 표현할 때, 이것을 교차대구법이라고 한다. 교차대구법 개요에서 본문의 절정은 중앙에 있고, 상응하는 부분들은 위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또 그것에서 멀어진다. A와 평행하는 것은 그 반대편 끝에서 a'로, b는 b'로, c는 c'로 진행되며, 마침내 그 중심에 도달한다. 교차대구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영감 받은 저자가 기록한 책의 신학적 강조점을 훨씬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연구들은 7중의 교차대구법 구조를 주장한다. 그 중 하나는 쉬슬러 피오렌자(E. Schussler Fiorenza)에 의해 제시되었다.89)


 A. 1:1-8

   B. 1:9-3:22

      C. 4:1-9:2111:15-19

         D. 10:1-15:4

      C. 15:5-19:10

   B. 19:11-22:9

 A. 22:10-21


 이 구조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상응하는 부분들 간의 평행구를 나열하기란 쉽지 않다.

 케네쓰 스트랜드는 요한계시록의 두 부분, 곧 역사적 부분과 종말적 부분이 14장을 구분 선으로 하여 자연히 나눠진다고 주장하였다.90) 스트랜드의 2중 구분은 요한계시록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반면, 문맥은 14장을 구분선으로 하는 그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문맥은 역사적인 부분과 종말적 부분을 구분하는 선은 오히려 요한계시록 11장 18절에 있음을 시사한다. 세밀한 연구는, 책의 전반부가 전체 기독교 시대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후반부 전체의 초점은 단순히 15-22장이 아니라, 종말적 구조의 틀 속에서 재림 주변의 사건에 맞 춰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91)

 본 주석이 제시하는 요한계시록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개요는 교차대구법 평행구들을 보다 정확하게 동시에 드러낸다.


 A. 서언 (1:1-8)

   B. 승리자에 대한 약속들 (1:9-3:22)

      C.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 (4:1-8:1)

         D.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와 섞임 (8:2-9:21)

            E. 요한에게 예언하라고 명함 (10:1-11:18)

               F.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 (11:19-13:18)

            E'. 교회가 종말적 복음을 선포함 (14:1-20)

         D'.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와 섞이지 않음 (15:1-18:24)

      C'.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완성됨 (19:1-21:4)

   B'. 승리자에 대한 약속들의 성취 (21:5-22:5)

 A'. 결언 (22:6-21)


서언과 결언의 평행구절
서언 평행구절 결언
1:1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22:6
1:1 “반드시 속히 될 일” 22:6
1:1 “예수께서 그의 천사들을 보내심” 22:6, 16
1:3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22:7
1:3 “이 예언의 말씀” 22:7
1:3 “때가 가까움이라” 22:10
1:4 “일곱 교회” 22:16
1:8 “알파와 오메가” 22:13

 본 교차대구법에서 전반부는 전체 기독교 시대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그것에 대응하는 후반부는 오로지 마지막 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심 부분은 요한계시록의 신학적 중심 주제를 가리킨다. 서언과 결언을 비교할 때, 평행성은 자명해진다(위의 표 참조).

 이 평행구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시작된 주제들과 개념들이 그 결론으로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평행구들의 목적은 독자들을 처음으로 데려가서, 그들이 유토피아적 꿈에 자만하여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바로 마지막 때까지 압제와 핍박을 견딜 수 있는 동기를 그들에게 부여 하려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의 내용은 새 예루살렘에 관한 자료와 평행을 이룬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은 바르게 제목을 붙인다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 21:7)가 될 것이다. 이는 요한계시록 2, 3장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많은 약속(생명나무로의 접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새 이름을 받음, 만국을 다스림, 흰옷을 입음,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음, 아버지 앞에서 시인을 받음, 성전의 기둥이 되고 결코 그 것을 떠나지 않음,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위에 기록됨,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음 등) 이 요한계시록 21장 6절 - 22장 5절에서 성취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C항은 요한계시록 4장 1절 - 8장 1절19장 1절 - 21장 4절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 양쪽 구절은 하늘의 경배 장면과 함께 시작한다. 요한계시록 4, 5장19장에는 보좌와 이 십사 장로와 네 생물, 그리고 환호하며 찬양을 드리는 경배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92)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이 두 장에서만 나온다. 요한계시록 4장 1절-8장 1절이 전체 기독교 시대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그것의 교차대구법적 대응부(對應部)는 분명히 종말적 구절들이다. 요한계시록 4,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로서 찬양을 받으시는 반면, 19장에서 울리는 찬양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과 일곱인 사이에 또 다른 평행구가 나온다. 거기에는 흰 말과 그것을 탄 자들이 면류관을 쓰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는 내용은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나 6장 2절에서 흰 말을 탄자는 화관, 즉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반면, 요한계시록 19장 12절에서 말 탄자는 왕관을 쓰고 있다. 종말적 끝이 오기까지 예수님은 왕관을 쓰지 않으며, 또한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지 않으신다.

 이 외에도 많은 평행구들이 있다. 예를 들면, 6장도 질문을 던진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나이까?” 요한계시록 19장 2절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고 “자기 종들의 피를 갚으셨”다고 진술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여섯째 인을 뗄 때의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노예들과 자유자들이 공포에 싸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숨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계시록 19장 18절에서는 왕들과 장군들과 강한 자들과 노예들과 자유자들이 재림 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요한계시록 7 장 9, 13-14절19장 7-10절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라는 초청 사이에도 평행구들이 나온다. 두 본문은 흰옷을 입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한다. 또한 7장 15-17절21장 3-4절은 하나님의 장막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인의 ‘반 시 동안’ (8:1)의 침묵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의 ‘침묵’과 상응할 것이다.

 D항의 평행구들도 자명하다. 양쪽 구절에는 성소 장면과 함께 소개된 묵시들이 나온다. 그러나 8장 2-6절에서는 중보 사업이 하늘 성전에서 계속되는 반면, 15장 8절에서는 중보 사업이 성전에서 중지되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일곱 나팔은 자비가 섞인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 일곱 대접 재앙은 자비가 섞이지 않고 쏟아질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 59쪽의 비교 도표는 두 재앙 사이의 확실한 평행구들을 나타낸다.

 이 교차대구법적 개요에는 일곱 나팔 재앙이 역사적인 부분에 있는 반면, 일곱 대접 재앙의 집행은 종말적 부분에 있다. 이 구조는 나팔과 대접 재앙들이 언어와 내용에 의해 의도적인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팔 재앙들은 미래에 집행될 최후의 일곱 재앙에서 한껏 발휘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또한 심판에 대한 사전 경고다.

 마지막으로, E항에서는 요한계시록 14장 1-20절요한계시록 10장1절-11장 18절이 평행을 이룬다.



일곱 나팔 일곱대접
첫째 땅 (8:7) 땅 (16:2)
둘째 바다가 피로 변함 (8:8-9) 바다가 피로 변함 (16:3)
셋째 깅들과 샘들 (8:10-11) 강들과 샘들 (16:4)
넷째 해달별들 (8:12) 해 (16:8-9)
다섯째 무저갱의 어두움 메뚜기 떼 (9:1-11) 짐승의 보좌가 어두워짐 (16:10-11)
여섯째 유프라테스 강 (9:14-21) 유프라테스 강 (16:12-16)
일곱째
큰 음성 : 왕국이 임함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심 (11:15-16)
큰음성: 다 이루었다 (16:17-21)

 요한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는 사명을 받았다. 이어서 두 증인은 “땅에 거하는 자들”(11:1-14)에게 예언한다. 14장은 먼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기술하며(14:1-5), 이어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 선포를 묘사한다(14:6-13), 두 부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11:13; 14:7)과 그분을 두려워하는 일(11:18; 14:7)에 대하여 언급한다.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상급을 주고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망하게 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14장은 먼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모으는 일을 곡식의 추수로 기술하고, 이어서 포도주 틀로 짓이기는 것을 악인들의 심판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우리를 교차대구 구조의 중심 항으로 이끌어간다(계 12-13장), 거짓 삼위, 곧 사단과 그의 두 동맹자인 바다짐승과 땅 짐승 대(對) 그리스도의 대쟁투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초점이다. 이 부분은 대쟁투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자료의 틀을 이루는데, 특히 이 세상 역사의 끝에 있을 최후의 싸움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의 삼중 구조

 요한계시록의 구조와 관련하여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본 주석은 서언(1:18)과 결어(22:6-21)를 포함한 요한계시록의 삼중 구조를 따른다. 이 구조는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 기초하여 볼 때 자명하다. 그리고 11장 19절은 완전히 새로운 단원을 소개한다. 후에 보겠지만, 이 새로운 단원은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기술한다.

 첫 주요 단원은 요한 시대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로 이루어졌으며(1:9-3:22), 둘째 큰 단원은 요한의 때로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포괄하는, 일곱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 개봉에 초점을 맞춘다(4-11장), 그리고 셋째 큰 단원은 이 세상 역사의 종말적 절정과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실현(12:1-22:5)을 다룬다.

 이 세 개의 큰 단원의 각 부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도입 묵시로 시작한다. 요한계시록 1장 9-20절은 일곱 교회의 기별들을 제시하고(2-3장), 4~5장은 일곱 인으로 봉함된 두루마리를 열며 시작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17절은 이 책의 종말적 단원을 소개한다. 각각의 도입 묵시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역할을 묘사한다. 도입 부분에서 그려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각 단원의 나머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묘사는 각 단원과 관련된 주제와 내용을 정의한다.


 1.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도입 이상(계 1:9-20)과 함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계 1:9-3:22)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주요 단위는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묵시로 시작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계 1:9-20), 이 곳에서 그리스도는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교회들 사이를 거닐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을 일일이 섬기신다. 그분은 각 교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문제와 필요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계시된 모든 것들을 기록하여 교회들에게 전달하라고 요한에게 명령하셨다(계 1:11). 교회들에 보낸 각 기별은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시작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호소로 끝난다. 소개와 호소 사이에 편지를 받은 각 교회의 실제적 상황, 조건, 그리고 필요에 적합한 그리스도의 맞춤 기별이 있고, 교회가 위치한 도시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함께 소개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교회가 다가오는 위기를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방문하신다. 만일 교회들이 결정적으로 돌아서고자 한다면, 그들을 아시는 분의 기별을 경청하기만 하면 된다.

 요한계시록의 첫 세 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 소개와 함께 이 책의 예언적 단원(4:1-22:5)을 세울 기초를 놓는다. 이 장들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성격과 목적을 결정한다. 즉,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약속을 역사를 통하여 교회에게 재 확증한다.


 2. 종말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도입 이상(계 4~5장)과 함께 인봉된 두루마리의 개봉(계 4-11장)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큰 단원은 다윗 계보의 약속된 왕이신(4-5장) 그리스도의 묵시로 시작한다. 이 도입 장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주 통치자이자 세상의 주권자로 등극하시는 장면을 상징적 언어로 묘사한다. 일곱 인으로 봉함된 두루마리를 취한 것은 모든 권세와 주권 이 그리스도께 이양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취함으로 그분은 아버지 우편에 있는 우주의 보좌 위에 좌정하셨다. 이제 예정된 다윗 계보의 종말적 통치자로서(계 5:5 참조), “그분은 자신이 완성하신 구속 사업에 기초하여 역사의 종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권세 있게 이행하 라는 소명을 받으신다.” 93)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5장은, 6-11장의 진술을 해석하는 출발점이 된다. 일곱 인의 개봉과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을 통하여, 6-11장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이 땅에 재림하실 때 까지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단원은 “역사 속의 사건들과 상황들”을 묘사한다. “이것들은 종말적 절정의 때에 인봉된 두루마리를 열기 위한 예비 단계들이다.”94) 요한계시록 4~5장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설사 그들이 적대적인 세상에서 압제와 고난을 경험할 지라도, 우주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그들의 주님이요 왕이신 분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심을 확실히 보증한다. 그분은 이 세상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끝내실 것이며, 악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하실 것이다.


 3. 그리스도, 묵시적 미가엘인 그리스도의 도입 이상(계 12장)과 함께 인봉된 두루마리의 내용(계 12:1-22:5)

 요한계시록의 세 큰 단원들 중 마지막(12:1-22:5)은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의 한 부분을 공개하는 것처럼 보인다(12:1-22:5 개관 참조). 본 단원은 12장 1-17절에서 그리스도와 사단 간의 대쟁투를 소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곳에서 요한계시록의 전사 미가엘로 묘사된다. 하늘 군대 사령관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승리자시다. 사단을 하늘에서 땅으로 추방하심으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올라 가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패배시키셨다. 또한 기독교 시대의 전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패퇴시키셨다. 계속된 패배로 인하여 좌절한 사단은 마침내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분노하였다(계 12:17), 최후의 싸움에서 기필코 이기겠다는 확고한 결심으로 그는 두 동맹자-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와 연합한다. 거짓 삼위를 형성함으로, 그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13-22장)은 우주적 드라마의 결론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궁극적 실현으로 이끌어가는 사건들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12장의 목적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증을 주기 위함이다. 성도들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묘사된 최후의 싸움에서 그 전선(戰線)에 서 있다.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워 사단을 패배시키신 것 같이, 그분은 최후의 위기에서도 당신의 마지막 때의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다. 미래는 종종 어둡게 보일지 모른다. 종말적 사건들이 위협하고 두렵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단이 이미 그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흑암의 군대가 최후에 패배할 때까지 싸우실 것이다. 사단적 삼두 정권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은 불 못에서 그들의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계 19:20-20:15).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새 예루살렘에서 승리를 기뻐하는 중에 안식을 맞이할 것이다(계 21:1-22:5).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의 큰 단원에 등장하는 세 도입 이상을 간략히 분석함으로 영감 받은 저자 요한이 의도한 주요 주제를 정의하며, 본 주석의 신학적 관점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단순히 경고하는 데 있지 않고(역사적이든 종말적이든), 충성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음을 보여 준다. 그 계획은 독자들에게 미래를 계시한다기보다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전 역사를 통하여, 특히 종말의 시기 동안에, 당신의 충성된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확증한다(마 28:20 참조).

 앞에서 언급한 삼중 구조에 기초하여 요한계시록을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1. 서언 (1:1-8)

   서론 (1:1-3)

   인사말과 축도 (1:4-6)

   책의 주제 (1:7-8)


 2.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 (1:9-3:22)

   A. 도입 이상: 제사장과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1:9-20)

      밧모 섬의 요한 (1:9-11)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이상 (1: 12-20)

   B.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기별 (2: 1-3:22)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기별 (2:1-7)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기별 (2:8-11)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기별 (2:12-17)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기별 (2:18-29)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 (3:1-6)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 (3:7-13)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 (3:14-22)


 3. 인봉된 두루마리의 개봉 (4:1-11:19)

   A. 도입 이상: 왕이신 그리스도 (4:1-5:14)

      하늘 보좌 이상 (4:1-11)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 (5:1-14)

   B. 일곱 인의 개봉 (6:1-8:1)

      첫째 인의 개봉 (6:1-2)

      둘째 인의 개봉 (6:3-4)

      셋째 인의 개봉 (6:5-6)

      넷째 인의 개봉 (6:7-8)

      다섯째 인의 개봉 (6:9-11)

      여섯째 인의 개봉 (6:12-17)

      막간:

         인 받은 성도들과 큰 무리들 (7:1-17)

         인받은 성도들 (7:1-8)

         큰 무리들 (7:9-17)

         일곱째 인의 개봉 (8:1)

   C. 일곱 나팔의 재앙 (8:2-11:18)

      도입 장면: 성도의 기도 (8:2-6)

      첫째 나팔 (8:7)

      둘째 나팔 (8:8-9)

      셋째나팔 (8:10-11)

      넷째 나팔 (8:12-13)

      다섯째 나팔 (9:1-12)

      여섯째 나팔 (9:13-21)

      믹간 (10:1-11:14)

         펴놓인 작은책 (10:1-11)

         두 증인과 성전 척량 (11:1-14)

      일곱째 나팔 (11:15-18)

   D. 성전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나타남 (11:19)


 4.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의 내용(12:1-22:5)

   A. 도입 이상: 전사(戰士)이신 그리스도 (12:1-17)

      여자. 아이, 그리고 용 (12: 1-17)

      하늘의 전쟁 (12:7-12)

      사단과 여자의 후손 (12: 13-17)

   B. 두짐승 (13:1-18)

      바다에서 나온 짐승 (13: 1-10)

      땅에서 나온 짐승 (13: 11-18)

   C.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최후의 기별 (14:1-20)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 (14:1-5)

      세 천사의 기별 (14:6-11)

         첫째 천사의 기별 (14:6-7)

         둘째 천사의 기별 (14:8)

         셋째 천사의 기별 (14:9-11)

      신실한 남은 자들 (14:12-13)

      땅의 두 추수 (14:14-20)

   D. 마지막 일곱 재앙 (15:1-16:21)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기 위한 준비 (15:1-8)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음 (16: 1-21)

         첫째 재앙 (16:1-2)

         둘째 재앙 (16:3)

         셋째 재앙 (16:4-7)

         넷째 재앙 (16:8-9)

         다섯째 재앙 (16:10-11)

         여섯째 재앙 (16:12-16)

         일곱째 재앙 (16:17-21)

   E. 음녀 바벨론과 부활한 짐승 (17:1-18)

      음녀 바벨론 (17:1-6a)

      부활한 짐승 (17:6b-18)

   F. 바벨론의 심판 (18:1-24)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외침 (18:1-8)

      바벨론을 위해 애곡함 (18:9-24)

   G. 두만찬 (19:1-21)

      어린양의 결혼 만찬 (19:1-10)

      하나님의 대만찬 (19:11-21)

   H. 천년기와 최후의 심판 (20:1-15)

      사단의 운명 (20:1-10)

      최후의 심판 (20:11-15)

   I. 회복된 지구 (21:1-22:5)

      새 하늘과 새 땅 (21:1-8)

      새 예루살렘 (21:9-22:5)


 5. 결어 (22:6-21)

주(註) ——————
1. William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d ed., The Daily Study Bible Series(Philadelphia, PA:Westminster Press, 1960), 1:2. 
2. Ellen G. White, Testimonies to Ministers and Gospel Workers(Boise, ID: Pacific Press, 1962), 114. 
3.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81.15 (The Ante-Nicene Fathers, 1:240); Irenaeus Against Heresies 4.14.2; 4.20.11(The Ante-Nicene Fathers, 1:479, 491); Tertulian Against Marcion 3.25 (The Ante-Nicene Fathers, 3:342);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6.13(The Ante-Nicene Fathers, 2:504); Hippolytus Treatise on Christ and Antichrist 36-42(The Ante-Nicene Fathers, 5:211-212); Origen Commentary on John 2.45(Fathers of the Church 80, 106). 
4.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Revelation: Vision of a Just World, Proclamation Commentaries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1), 44. 참조 
5. Donald Guthrie, The Relevance of John's Apocalypse (Grand Rapids, MI: Eerdmans, 1987), 56.
6. Merrill Tenney, Interpreting Revela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57), 15. 
7. Irenaeus Against Heresies 5.30,3 (The Ante-Nicene Fathers, 1:559–560). 
8. 이 견해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보기 위해서는 Richard Bauckham의 The Climax of Prophecy (Edinburgh:T&T Clark, 1993), 387-389 참조. 
9. Irenaeus Against Heresies 5.30.3 (The Ante-Nicene Fathers, 1:559–560); Victorinus In Appocalypsi 1.11: Eusebius Historia Ecclesiae 3. 18.1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d ser.,1:148; Jerome Lives of Illustrious Men 9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d ser., 3:9). 
10.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d. F. D. Nichol, 2d ed.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0), 7:721, 
11. Douglas Ezell, Revelations on Revelation (Waco, TX: Word Books, 1977), 26. 
12. Martin Rist,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The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TN:Abingdon Press, 1957), 12:354. 
13. G. B. Caird,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Harper's New Testament Commentaries (New York: Harper and Row, 1966), 44. Caird는 “사단”이라는 단어를 고딕체로 표시하고, 그것은 그가 논의하고 있는 성경절에서 곧바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14. Kenneth A. Strand, “Foundational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1,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13. 
15. Jon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1,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82. 
16. Ezell, 18-19. 
17. George E.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Grand Rapids: MI: Eerdmans, 1972), 8을 보라. 47 
18. 상게서, 11에서 라드의 표현으로. 
19. Robert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7), 43. 
20. 상게서, 44. 
21. William G. Johnsson, “The Saint's End-Time Victory Over the Forces of Evil,”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9. 
22. 상게서, 22. 
23. David E. Aune, Revelation 1-5, Word Biblical Commentary 52a (Waco, TX: Thomas Nelson Publishers, 1997), 105-106 참조.;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대 의견들을 보려면 Gregory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1998), 152-169 참조.
24. Strand가 구분한 “묵시적 예언”과 “고전적 예언”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Foundational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11-26); 요한계시록은 오히려 묵시적 형태로 기록된 예언의 책임을 입증한다. 아우니(Revelation 1-5, lxxx)는 4장 1절-22장 5절을 묵시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요한계시록 1-3장은 더욱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25. Johnsson, 22. 
26. 상동. 
27. 상동. 
28. 여기에 대한 설명을 더 보려면 Philip Mauro, The Patmos Visions (Boston, MA: Hamilton Brothers, 1925), 22-24를 보라. 
29. Beale, 51. 
30.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74. I 
31. 상게서, 75. 
32.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The Apocalypse (Chicago, IL: Franciscan Herald Press, 1976), 12; 이 내용은 Jon Paulien의 논문,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Andrews University Seminary Doctoral Dissertation Series 11 (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1987), 10-1219 중요한 공헌을 반영한다. 
33.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80; Paulien은 구약의 “직접적인 인유(allusions)”와 요한계시록의 “메아리(echoes)”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4. Henry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06; repri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51), cxl-clviii. 
35. William Milligan, Lectures on the Apocalypse (London: Macmillan, 1892), 76. 
36. 상게서, 72, 37.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6. 
38. Jon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94), 135. 
39.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80. 
40.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41-71. 
41.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25. 
42.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80. 
43. 상게서, 78. 
44. David Aune, Revelation 1-5 (1997), Revelation 6-16 (1998), 그리고 Revelation 17-22 (199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s, 52abc (Waco, TX: Thomas Nelson Publishers), 그 외의 유익한 자료들은 Barclay의 The Revelation of John, 2 vols. ; Fiorenza, Revelation: Vision of a Just World; John P. M. Sweet, Revelation, TPI New Testament Commentaries(Philadelphia,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0)를 참조.
45. Aune, Revelation 1-5, 104-105. 
46. Fiorenza, Revelation, 59; Aune, “The Influence of Roman Imperial Court Ceremonies on the Apocalypse of John,” Biblical Research 28 (1983):5-9, 22-23; idem, Revelation 1-5, 275-374; 아우니는 왕 혹은 제국의 칙령이 요한계시록 2-3장의 교회들에 보낸 일곱 메시지들의 형태에 미친 영향을 제시한다 (“The Form and Function of the Proclamations to the Seven Churches [Revelation 2-3],” New Testament Studies 36 [1990): 182-204; Revelation 1-5, 126-129). 
47. 2 Enoch 21:1 (James H. 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Garden City, NY: Doubleday & Company, 1983], 1:134).
48. 4 Ezra 4:35-36 (Charlesworth, 1:531); 2 Baruch 21:19 (Charlesworth, 1:629)도 보라. 
49.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38-91을 보라. 
50. Donatien Mollat, Une Lecture pour aujourd'hui: L'Apocalypse, 2d 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84), 30. 
51. Ezell, 29. 
52.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A Commentary. Critical, Experimental, and Practical,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rev.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61), 1526. 
53. 신약의 신학적 주제들과 사상들에 대한 평행절들의 목록은 Rudolf Halver, Der Mythos im Letzten Buch der Bibel, Theologische Forschung 32 (Hamburg-Bergstedt: Herbert Reich Evangelischer Verlag, 1964), 58–70: Swete, clvi-clviii에서 보라. 
54. Milligan, Lectures on the Apocalypse, 58. 
55.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44, n. 2. 
56. Ellen G. White, Selected Messages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58), 1:21. 
57. Ellen G. White, The Acts of the Apostles (Nampa, ID: Pacific Press, 1911), 581, 583. 
58.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11. 
59.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24. 
60. Paulien, “Interpreting Revelation's Symbolism,” 94. 
61. 상게서, 83 
62. Aune, Revelation 1-5, xci-xcii. 
63. Euginio Corsini, The Apocalypse: The Perennial Revelation of Jesus Christ, Good News Studies 5 (Wilmington, DE: Michael Glazier, 1983), 62–63. 
64. Jacques Ellul, Apocalypse(New York: Seabury Press, 1977), 36-45. 
65. Tenney, 38. 
66. Austin M. Farrer, A Rebirth of Images (Glasgow: University Press, 1949; reprinting,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6), 45. 
67. A. Yarbro Collins, The Combat Myth in the Book of Revelation, Harvard Dissertations in Religion 9 (Missoula, MT: Scholars Press, 1976), 13–39: idem, The Apocalypse, New Testament Message 22(Wilmington, DE: Mechael Glazier, 1979), xii-xiv; Alan Johnson, “Revelatio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12(Grand Rapids, MI: Zondervan, 1982), 411도 보라; 이 구조에 대한 비명을 보기 위해서는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7, 그리고 Aune, Revelation 1-5, xciv를 보라. 
68. 예를 들어, Ernst Lohmeyer,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Handbuch zum Neuen Testament 16 (Tubingen: J. C. B. Mohr, 1926), 181–185: J. W. Bowman, “Revelation, Book of,”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Nashville, TN: Abingdon Press, 1962), 4:64-70. 대표적인 다른 7중 개요에 대하여는 Bowman, 66-67을 보라. 
69. Gerhard A. Kordel, Revelation, Augsburg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Minneapolis, MN:Augsburg Fortress, 1989), 60. 
70. Mounce, 46;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보려면 Beale, 101-151을 참조. 
71. Aune, Revelation 1-5, c-cv. 
72. 계 1:10b-20; 4:1-5:14; 8:2-6; 11:19; 15:1-16:17; 16:18-17:3a; 19:1-10; 21:5-lla, 참조 Kenneth A, Strand, “The Eight Basic Visions in the Book of Revelation” (pp. 107-121) 그리고 “The Victorious-Introduction Scenes’ in the Book of Revelation”(pp. 267–288), in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25(1987), 이 두 기사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재판되었는데, 그것은 Symposium on Revelation-Book 1,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35-72에 나온다. 
73. Richard M. Davidson, “Sanctuary Typology” (pp. 112-115) 27 Seals and Trumpets: Some Current Discussions"(187–188)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1,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Jon Paulien,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Sanctuary, and Temple in the Plot and Structure of the Book of Revelation,”in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33:2 (1965): 247-255; Aune도 이러한 서론적 성소 장면들 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참조 Revelation 1-5, xcvii-xcviii), Davidson과 Paulien과 Strand의 출발점은 계 16:18-17:3a 이다. Strand는 이 구절들을 성전을 배경으로 한 서론적 묵시로 취급한다. 그렇게 되면 17-18장은 독립적인 묵시가 된다. 그러나 Paulien은 17-18장을 15-16장의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본다. 
74. Aune, “The Influence of Roman Imperial Court,” 7. 
75. Paulien, “Seals and Trumpets,” 188. 본 장의 계속되는 부분은 (도표를 포함하여) Paulien의 “Seals and Trumpets,” 187-189에서 가져왔다. 
76. Paulien은 그 평행구들을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225-256에서 요약한다. Daniel T. Niles (As Seeing the Invis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1], 112-114에서와 같이)는 요한계시록 1-8장과 미쉬나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이다. 그러나 Paulien이 말하듯이, Nice 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 평행구들을 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에 대한 Albert R. Treiyer의 비평을 참조하라(The Day of Atonement and the Heavenly Judgment [Siloam Springs, AR: Creation Enterprises International, 1992], 669-672).
77. 다음의 평행구들은 Paulien의 연구를 반영한다(참조 The Mishnah Tamid 1-7, trans, Herbert Danb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582-589), 
78. Paulien,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256. 
79. Kenneth A. Strand, “An Overlooked Old Testament Background to Revelation 11:1,”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22(1984): 322–325. 
80. Paulien,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256-257.
81. Farrer를 포함하여 다음 사람들을 참조하라. M. D. Goulder, “The Apocalypse as an Annual Cycle offi Prophecies,” New Testament Studies 27(1981): 342–367; Niles: Davidson, “Sanctuary Typology,” 119–125: Paulien, “Seals and Trumpets,” 190–192: idem,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257–261. 본란의 전부는 Davidson과 Paulien의 연구를 반영한다. 
82. Paulien, “The Seals and Trumpets,” 258. 
83. Goulder, 355. 
84. Paulien, “The Seals and Trumpets,” 190. 
85. Davidson, 122. 86, 상게서, 123. 
87. Paulien, “The Role of the Hebrew Cultus, ” 259–260. 
88. 초막절에 대한 제2성전의 관습을 참조하려면 The Mishnah Sukkah 1-5 (Danby, 172-181)를 보라. 
89. E. Schüssler Fiorenza, “Composition and Structure of the Apocalypse,”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0(1968): 344-356 참조; idem, Revelation, 35-36; Beale(The Book of Revelation, 131)은 9중의 구조를 제시한다. 
90. Kenneth A. Strand, Interpreting the Book of Revelation (Worthington, OH: Ann Arbor Publish ers, 1976), 43-59: C. Mervyn Maxwell은 동일한 구분을 따른다(The Message of Revelation, God Cares 2 (Boise, ID: Pacific Press, 1985), 60–61). 
91. David Marshall, Apocalypse (Alma Park: Autumn House, 2000), 57; Strand의 견해에 대한 건설적 비평은 Norman Gulley가 “Revelation 4-5: Judgment or Inauguratio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8. 1-2(1997): 64-65에서 제공한다. 또한 Paulien의 “The Seals and Trumpets,” 192도 참조하라.
92. 두 본문 간의 구조적 평행구들을 보기 위하여는 William H. Shea, “Revelation 5 and 19 as Literary Reciprocals,”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22(1984): 251-257을 참조하라. 
93. Jurgen Roloff, The Revelation of John, The Continental Commentary (Minneapolis, MN: For tress, 1993), 76. 
94. Strand, Interpreting the Book of Revelation,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