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두 가지 화(禍) (8:13-9:21)
 첫 네 나팔 재앙은 짝으로 주어졌다. 첫 두 나팔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두 민족인 유대 나라와 로마제국을 다룬다. 이후의 두 나팔은 배도한 기독교와 그 배도의 두려운 결과를 취급한다. 이 네 나팔은 기본적으로 충성되지 못한 자들, 즉 “땅에 거하는 자들”(8:13) 위에 바야흐로 임하게 될 나머지 세 나팔의 화에 앞서 주신 하나님의 경고였다.

독수리의 경고 (8:13)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독수리.
 헬라어 아에토스(aetos)‘콘도르’(vulture)나 ‘독수리’(eagle)를 의미하는데, 이 곳의 아에토스는 아마도 콘도르일 것이다(계 19:17-18 참조), 구약에서 콘도르는 임박한 심판과 재난의 상징이다(신 28:49; 겔 32:4; 39:17; 호 8:1 참조), 하박국은 침략하는 갈대아 인들을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합 1:8) 콘도르로 묘사하였다.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묘사된 독수리는 예수께서 재림과 관련하여 언급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마 24:28; 눅 17:37)
화, 화, 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번 언급된 “화”(헬, 우아이 ouai) 중에서 첫 번째 화로 (8:13; 9:12; 11:14; 12:12; 18:10, 16, 19), 요한계시록의 칠 복에 대응한다(계 1:3 어구 해설 참조).
땅에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에서 이 구절은 언제나 불신자들을 지칭한다(계 6:9 어구 해설 참조).
(주해)
 네 나팔 재앙은 이제 끝났다. 이어서 요한은 나머지 세 나팔 재앙이 가져올 운명을 큰 소리로 선포하면서 공중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본다. 그 독수리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라는 삼중 형태의 경고를 발한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한 호세아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호 8:1)

 또한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14장 6~7절과 언어적 평행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14장 6~7절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경고의 기별을 선포하면서 공중을 날아가는 천사를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 독수리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상징이다. 두려운 화를 선포하면서 공중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묘사한 것은 바야흐로 다가오는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함이다(계 19:17 참조). 독수리가 선포하는 세 개의 두려운 화는 남은 세 천사들이 차례로 그 나팔을 불 때 발생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악인들을 가리킨다(3:10; 8:13; 11:10; 13:8, 14; 17:8 참조). 비록 첫 네 나팔이 ‘화’ 자체였을지라도, 그것들은 주로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이제 장면은 하나님의 경고에서 마귀의 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바뀐다. 이제 이 화들은 사라진다. 그 뒤의 두 나팔 재앙은 “영적 고통과 죽음”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계속적으로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마귀의 활동 결과다.25)

 나머지 세 나팔 재앙에서, 복음을 계속적으로 대적하고 배도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 위에 하나님의 심판은 격화된다. 최악의 심판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
다섯째 나팔 (9:1-12)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
 요한계시록 8장 1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이 별은 분명히 셋째 나팔에서 언급된 별과 동일하며(8:10-11), 후에 “무저갱의 사자”(계 9:11)임이 드러난다. 야르보 콜린즈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은 가장 영광스러운 천사들 중의 하나였던 사단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이야기를 상기시킨”다고 설명한다(12:7-10; 사 14:12; 눅 10:18 참조).26) “떨어진”은 완료시제로서 다섯째 나팔을 불기 전에 이미 별이 떨어졌음을 시사한다.
무저갱無低坑.
 ‘무저’(abyss)라는 단어는 창세 전 땅의 혼돈 상태를 일컫는 말로, 창세기 1장 2절에 처음 나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70인역에는 ‘abyss’] 위에 있고,”(창 7:11 참조) 예레미야 4장 23-30절에서 이 말은, 유랑기간 동안 황폐되고 인적이 없던 팔레스타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무저갱은 밑이 없는 지하동굴로서, 그 곳에서 불순종한 천사들과 땅의 왕들이 일정 기간 죄수로 감금되어 있다가 그 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사 24:21-22), 신약의 여러 곳에서 무저갱 혹은 밑이 없는 갱(헬, 아뷔소스 abyssos)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는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의 거처로서, 어둡고 혼돈한 감옥으로 묘사한다(눅 8:31; 벧후 2:4: 유 6; 계 20:1, 3). 또한 무저갱은 사단이 불 못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천년기 동안 감금되어 있을 장소다(20:10).
열쇠를 받았더라.
 이 곳에 사용된 수동태는 히브리어의 신적 수동태로, 당시 유대교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한 어법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신성시하여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불러서 안 되는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행위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소위 신적 수동태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당신은 복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셨습니다”라는 의미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종종 신적 수동태가 사용된다.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열쇠를 그에게 주셨다는 의미다.
요한계시록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어두워지며.
 요한계시록 8장 12절 어구 해설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황충.
 구약에서 메뚜기(황충)는 심판에 대한 또 다른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메뚜기 재앙은 바벨론(렘 51:14)과 애굽(출 10:4-15) 등의 배도한 나라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또한 그 재앙들은 언약을 순종치 않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였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과 관련하여 그 메뚜기 재앙을 항오를 벌이고 싸우러 나아가는 군대로 묘사한다. 한편, 그 앞에서 땅은 진동하고 하늘은 흔들린다(욜 2:4-10),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았다(욜 2:3).

 다섯째 재앙의 메뚜기들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이 메뚜기들은 전갈 같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상징적이다(9:3, 5). 그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독침을 가지고 있다(9:10).

 둘째, 메뚜기들은 일반적으로는 식물을 공격한다. 그러나 다섯째 나팔의 메뚜기들은 식물이 아니라 사람을 해한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어둡게 하는 구름, 병거의 덜커덩 거리는 소리를 내는 군대와 같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다를 침범하는 메뚜기 떼를 본 요엘의 묵시에서 빌어왔다(욜 2:2-10 참조).

 다섯째 나팔의 메뚜기들이 무저갱, 곧 마귀적 세력들의 거처가 된 감옥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메뚜기들이 마귀적 세력을 상징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감금되었다가 이제는 해하는 일을 위하여 풀려난다.
요한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
 성경에서 풀과 푸른 나무는 종종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계 8:7 어구 해설 참조). 다섯째 나팔 재앙이 풀이나 푸른 나무는 해하지 않고(초목이 인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한다는 사실은 여기에 사용된 것이 상징임을 뒷받침해준다.
요한계시록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요한계시록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다섯 달 동안.
 이 기간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메뚜기의 수명은 다섯 달이라는 설도 제기되어왔다. 이 설에 의하면, 이 재앙으로 해를 당하는 기간은 메뚜기의 한 세대 전체에 해당하는 기간이 될 것이다.27) 다섯 달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연일(年日) 공식에 기초한 역사주의적 해석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제안에는 문제가 있다. 다섯째 나팔 재앙의 구약적 배경에 관한 연구는 우리를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구약의 오직 창세기에서만 다섯 달이라는 기간이 언급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다섯째 나팔 장면에서와 같이 이 기간은 창세기에 두 번이나 나온다(창 7:24; 8:3). 그것은 필시 요한이 다섯 달 동안 땅과 그 거민들을 해하는 마귀적 메뚜기들을 홍수 이야기에 빗대어 묘사하는 것이리라.
요한계시록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
 바클리가 설명하듯이, 전갈은 길이가 6인치에 이르는 가재처럼 생긴 독충이다. 전갈은 가재와 같은 집게발로써 먹이를 포획한다. 전갈은 긴 꼬리 끝에 있는 굽은 집게발로 먹이를 쳐서 그 속에 독을 주입한다.28)
그 꼬리에는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마귀적 메뚜기들은 그 꼬리의 독침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이사야는 그들의 거짓 가르침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선지자들과 관련하여 꼬리라는 은유를 사용하였다(사 9:14-15), 요한계시록 12장 4절에서, 큰 붉은 용, 곧 사단 자신(12:9 참조)은 그의 꼬리로 하늘별들, 아마 천사들의 삼분의 일을 휩쓴다. 사단의 꼬리는 필시 그의 기만과 설득을 상징할 터인데, 그는 꼬리를 사용하여 하늘 존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였고, 자신을 추종하도록 오도(誤導)하였다(12:9 참조). 다섯째 나팔 장면에서 꼬리의 상징적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계 13:13-14 참조).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히브리어 아바돈(abaddon)‘멸망’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아바돈은 죽음과 스올이 연루되어 있는 멸망의 장소를 가리킨다(욥 26:6; 28:22; 시 88:11; 잠 15:11; 27:20 참조). 요한은 멸망을 의인화하여 아바돈으로 칭하고 있다. 아볼루온(apollyon)은 아바돈에 상응하는 헬라어로서 ‘망하게 하는 자’ 또는 ‘파괴자'를 의미한다. 망하게 하는 자는 사단에게 적절한 이름이다. 사단은 분명히 이 마귀적 메뚜기들의 왕이며, 마태복음 12장 24절에서 말한 ‘귀신의 왕’이다(마 25:41; 계 12:9 참조). 예수님은 사단을, 도둑질하며 죽이고 멸하기 위해 오는 도둑으로 묘사하신다(요 10:10), 파괴자라는 이름은 땅에서 행하는 사단의 성격과 특성에 잘 맞는다(12:12-17 참조).
(주해)
요한계시록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요한계시록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다섯째 나팔이 울릴 때, 요한은 한 별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이것은 분명 셋째 나팔에서 떨어진 별, 즉 쑥으로 명명된 ‘큰 별’이다. 이 별은 강들과 물 샘에 독을 넣었고, 신선한 물 공급원으로부터 마시는 자들을 영적으로 죽게 만들었다. 떨어진 이 별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사단을 대표하며, 무저갱의 천사로도 알려졌다(계 9:11; 사 14:12; 눅 10:18; 계 12:7-10 참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은 가장 영광스러운 천사들 중 하나인 사단의 타락을 상기시킨다. 그에게 무저갱을 여는 열쇠가 주어졌다. 무저갱은 마귀의 세력들이 감금되어 있는 어두운 감옥이다(눅 8:31; 벧후 2:4 참조), 그것은 마귀적 흑암의 세력의 본부를 대표한다. 그러나 흑암의 권세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마귀의 세력들은 그분의 통제하에 있다(계 1:18 어구 해설 참조), 사단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풀고 그 문을 열도록 허용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이 악의 세력들은 이제 악한 일을 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떨어진 별은 큰 풀무에서 나는 연기처럼 빽빽한 연기구름이 나오는 무저갱을 연다. 요한계시록에서 연기는 심판에 대한 또 다른 상징이다(14:11; 19:3 참조), 큰 풀무의 연기처럼이라는 표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될 때 ‘옹기점 연기같이’ 올라간 연기를 생각나게 한다(창 19:28).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하셨을 때, 연기가 ‘옹기점의 연기같이’ 올라갔다 (출 19:18). 다섯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무저갱에서 나오는 연기는 하늘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운다. 넷째 나팔에서는 부분적으로 어두웠으나 이제는 그 범위가 전체적이다. 해와 공기가 무저갱의 연기로 어두워졌다. 이 장면은 너무 어두운 나머지 피차를 알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처소에서 이동할 수조차 없었던 애굽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출 10:22-23). 이 어두움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다섯째 나팔 재앙은 특별하고도 매우 두려운 재앙이다.
요한계시록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이어서 요한은 솟아오르는 무저갱의 연기에서 나오는 무서운 메뚜기 떼의 침입을 목격한다.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보통의 연기가 아니라, 해를 가려 칠흑같이 어둡게 하는 유난히 거대한 메뚜기 떼의 연무다. 애굽의 재앙에서 메뚜기들은 하늘을 어둡게 하였다(출 10:15). 요엘은 천체를 어둡게 한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였다(욜 2:2-10). 이러한 구약의 장면들은, 무저갱에서 나온 거대한 메뚜기 구름 때문에 넷째 나팔 재앙에서 어두움이 더 심해졌다고 시사한다. 어두움은 복음을 흐릿하게 만든다. 백성이 생명의 근원이신 복음을 거절할 때, 그 결과로 그들은 악한 세력의 고통을 받는다(요 3:18-21 참조).

 또한 구약에서 메뚜기들은 심판의 상징이다. 다섯째 나팔 장면에서 올라온 메뚜기들은 보통의 곤충이 아니다. (메뚜기들이 통상적으로 그러하듯이) 식물을 공격하는 대신, 이 메뚜기들은 전갈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을 공격하며 괴롭힌다. 그들의 지도자는 무저갱의 천사, 곧 사단이다(계 9:11). 이 상징을 푸는 열쇠는 누가복음 10장 17-20절에 나와 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 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구절의 뱀과 전갈을 마귀나 악령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셨다. 계시자 요한이 다 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메뚜기의 침입을 묘사할 때, 이 본문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것은 다섯째 나팔의 메뚜기들은 무저갱이 그들의 거처인 마귀의 세력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바울은 이들을 어두움과 악의 세력이라고 하였다(엡 6:12).
요한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요한계시록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마귀적 메뚜기들은 이제 땅을 해하기 위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그들은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해할 수 없고, 오로지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 해친다(9:10 참조), 이 인침은 요한계시록 7장에 기술되어 있다.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아시고 인정하는 사람들이다(딤후 2:19), 그들은 보호를 받으며 이 마귀적 공격으로부터 해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을 마귀적 권세의 해침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주신 보증은 여전히 확고하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마귀적 메뚜기들은 백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괴롭히도록 허용된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것이다. 풀려난 마귀적 메뚜기들은 감당키 어려운 심리적 고문과 자살적 고뇌를 야기시킨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8:3 참조). 욥은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 사람에 관하여 언급하며(욥 3:21), 예레미야도 사람들이 살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그날에 대하여 말한다(8:3).

 이 마귀적 괴롭힘이 가해지는 기간은 다섯 달이다. 이것은 다섯 달 동안 계속적으로 땅에 해를 끼친 창세기의 홍수를 생각나게 한다(창 7:24; 8:3). 이 기간 동안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큰 홍수가 그들을 해할 수 없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처럼, 참된 신자들은 땅과 그 거민들을 다섯 달 동안 해하는 마귀적 메뚜기들의 재앙으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요한계시록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요한계시록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요한계시록 9: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요한계시록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마귀적 메뚜기들의 기원과 사명을 기술한 후, 요한은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한다. 그들을 묘사함에, 그는 ‘처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귀적 메뚜기들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말들 같다(욜 2:4 참조), 그들은 왕관 같은 것을 쓰고 있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그 머리털은 여자의 머리털 같고, 그리고 이는 사자의 이 같다(욜 1:6 참조). 그들의 비늘 모양의 외형은 철 흉배 같고, 그들의 날개 소리는 전쟁터의 병거 소리 같다(욜 2:4-5 참조).

 요한이 이 묘사의 세부 사항들이 해석되기를 바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기괴한 언어는 여호와의 날에 관한 요엘의 예언과 매우 닮았다.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욜 2:4-10).
마귀적 메뚜기들에 관한 묘사는, 비록 여러 세부 사항들이 요한에게서 온 것일지라도, 요엘의 묵시에서 끌어온 것이 자명하다. 한 편으로, 이 마귀적 메뚜기들의 모습이 두렵게 묘사된 것은 악한 세력들의 기괴한 특성과 그들의 무서운 해악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이 상징적 표현은 경고로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함이다. 악한 세력들은 오랜 기간 제어되어 있었다. 그러나 흑암의 권세들이 역사상 이전에 결코 없었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풀려날 때가 이르렀다.

 더욱이 마귀적 메뚜기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있으며, 그 꼬리에 다섯 달 동안 백성을 괴롭힐 권세가 있다. 그들은 그 침으로써 백성을 괴롭힌다(9:3 참조), 꼬리는, 인간을 오도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며,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사단이 사용하는 기만을 상징한다(계 12:4 참조). 이사야서에서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은 꼬리로 언급되었다(사 9:14-15). 마귀적 메뚜기들이 행한 해악은 분명히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적이다. (후에 나오겠지만, 파괴적 철학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동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다).
요한계시록 9: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실제 메뚜기들과는 대조적으로(잠 30:27 참조), 전갈 같은 이 마귀적 메뚜기들은 그들의 왕으로 무저갱의 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파괴)이요, 헬라어로 아볼루온(파괴자)이라는 두 언어로 소개되었다. 마귀적 메뚜기들의 왕은 분명히 하늘에서 떨어진 별로서 사단 자신이다(계 9:1). 그는 무저갱에 대한 권세를 받았으며, 여전히 땅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은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라 하였다. 그의 이름은 파괴자로서 파괴하고 상하게 하는 그의 행위를 적절히 정의해준다(요 10:10 참조), 그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의 추종자들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로서 일곱째 나팔소리가 날 때에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계 11:18). 사단의 특별한 일은 악의 세력들을 조직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항해 싸울 이 지구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쟁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최후의 전쟁을 위한 준비는 여섯째 나팔에서 묘사된다.

 앞에서 우리는 첫 네 나팔들이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셋째 나팔의 쑥 재앙은 중세 시대의 대 배도를 상징적 언어로 기술한다. 넷째 나팔에서 빛의 근원들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16 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있은 중세 이후의 계몽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합리주의, 회의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등이 그 특징을 이루었고, 계몽 시대의 최종적 생산물인 세속주의와 함께 기독교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분명히 셋 째와 넷째 나팔들에 묘사된 영적 쇠퇴와 배도의 결과다. 교회가 복음에 충실하였더라면 세상의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째 나팔은 세속주의 세계에서의 영적 상태와 그러한 상태의 결과가 18세기에서 우리 시대에 미치고 있음을 가리킨다. 한스 라론델이 설명하듯이, “전통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대체되었다.”29) 교회의 억압적 규율은 이신론(理神論), 상대주의, 허무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무신론적 철학으로 대체되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세속적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타인들에게서, 그리고 자신들에게서 소외되었다.30) 한 편으로, 무신론적 철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허한 고뇌와 무의미한 삶을 만들어 내었다.31) 다섯째 나팔의 상징적 장면에서 우리는 세속적 남녀들의 절망을 관찰할 수 있다. 즉, 하나님도 없고 미래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다. 이것은 물의 자양분을 받고 자라는 푸른 풀이나 나무들과는 대조적이다.

 다른 한 편으로, 무신론적 철학은 마귀적 세력들을 풀어놓았다. 자신들은 하나님과 결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의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영적 가치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러나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저항함으로써 이들은 사단에게 이 공허를 채울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마귀적 무저갱에서 올라온 연기는 주로 감정에 기초해 종교를 장려하는 기독교 내의 다양한 운동들에서 관찰된다. 그것은 마음과 행위의 종교를 대신하였다. 이 마귀적 연기는 널리 퍼진 뉴에이지 운동과 이슬람의 점증하는 활동들에서 똑같이 관찰할 수 있다.

 마귀적 해악으로부터의 유일한 안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다섯째 나팔은 그리스도를 떠난 종교에 대하여 경고한다. 선지자 아모스 때에 이스라엘이 죄의 삶을 선택하고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게 하였을 때(암 6:1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에 메뚜기 떼를 불러들이셨다. 이것은 다섯째 나팔이 묘사하는 장면에 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이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거역하고 거절하고 오히려 (셋째와 넷째 나팔에서 기술되었듯이) 어두움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마귀적 메뚜기들의 괴롭힘을 받게 되었다. 바울은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요한계시록 9: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요한은 다섯째 나팔이 바로 첫째 화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하면서 그 장면을 결론짓는다. 두 개의 화가 아직 다가오고 있다. 악인들은 더 무서운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서곡에 불과하다.
여섯째 나팔 (9:13-2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하나님 앞 금단.
 이 곳의 금단은 분명히 일찍이 요한계시록 8장 3-4절에서 언급된 향단이다(계 8:3 어구 해설 참조). 구약 성전에서 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 내가 너와 만날 곳”에 있었다(출 30:6 참조).
요한계시록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큰 강 유브라데.
 구약에서 큰 강(창 15:18; 신 1:7; 수 1:4)으로 일컬어진 유프라테스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 원수들을 분리시킨 국경을 상징하였다. 유프라테스 건너편 지역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큰 원수들, 즉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되었다(사 7:20; 렘 46:10), 이스라엘에 대한 이 원수 국가들의 공격은 마치 둑이 넘쳐 유다 땅을 휩쓸고 그 목에까지, 즉 예루살렘까지 차는 유프라테스의 파괴적인 물과 같다고 이사야서에 묘사되었다(사 8:7, 8).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유프라테스 강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유프라테스는 로마의 동쪽 국경으로, 그 건너편의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에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본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부터 기마병들이 침입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현대 주석가들은 그 기마병들은 로마가 매우 두려워했던 파르티아 군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32) 로마 군대는 그들에게 세 번이나 패하였다(기원전 53, 35년 그리고 서기 62년), 이로 인하여 로마인들은 이 동방 세력이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심지어 유대 묵시문학들도 파르티아 군대의 종말적 침공을 예상하였다.

그 때에 천사들이 모여서 동쪽으로 파르티아와 메대를 밀치고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왕들을 흔들 것이며, (그리하여) 불안의 영이 그들 위에 임하여 그들의 보좌로부터 그들을 흔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침상으로부터 사자처럼,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들 자신들의 양떼 사이를 뚫고 나갈 것이다. 그들은 나의 택한 자들의 땅으로 올라가 짓밟을 것이며, 나의 택한 자들의 땅은 그들 앞에서 타작마당이나 대로처럼 될 것이다.33)
본문은 이 묵시문학의 기자가 곡(Gog)에 관한 에스겔의 예언을(겔 38-39장) 어떻게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파르티아에 적용하였는지를 나타낸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요한의 예언이 파르티아 인에 의한 문자적 침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34)이 예언이 로마 제국과 관련하여 성취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이는 그 예언이 전 세계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2억이라는 마병대(馬兵隊, 계 9:16)의 규모는 요한이 파르티아 군대의 문자적 침공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 마귀적 침공에 관한 예언을 전달하는 일에, 요한은 곡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과 잘 알려진 1세기의 로마의 근심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비즐리 머레이가 말하듯이, “왜냐하면 그가 기다리고 있는 군대는 어떤 인간의 군대보다 훨씬 더 두려운 군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진실로 극악무도한 군대다.”35)
네 천사.
 “큰 강 유프라테스에 결박되어 있는” 네 천사는 분명히 요한계시록 7장 1-3절의 네 천사와 동일하다. 요한계시록 7장의 네 천사는 땅의 네 바람을 단단히 붙들어 바람이 땅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는 반면, 요한계시록 9장의 네 천사는 마병대로 이루어진 군대들을 제어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7장 3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을 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반면, 여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그들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풀려난다(9:15, 18),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 네 천사에 의해 억제되고 있는 파괴적 바람과 마병대는 서로 상응하는 것 같다. 이들은 아마도 여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묘사된 마귀적 군대 일 것이다(계 9:16-19).
요한계시록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네 천사가 ... 놓였으니.
 이 곳의 수동태형(놓였으니)은 신적 수동태다(계 9:1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마병대.
 마병대에 관한 묘사는, 마병대가 다섯째 나팔의 마귀적 메뚜기들과 동일하나 환경은 다르다고 암시한다. 먼저, 마귀적 메뚜기들의 모습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된 말들과 같았다(9:7, 9). 그 메뚜기들은 무저갱에서 나온(9:2-3) 반면, 마병대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 원수들 간의 상징적 국경인 유프라테스 강에서 나왔으며(계 9:14 어구 해설 참조), 둘 다 흉배를 가지고 있다(9:9, 17). 더 나아가, 메뚜기들과 마병대 둘다 그 꼬리에 권세가 있다(9:10, 19). 메뚜기들이 사자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는 반면, 말들의 머리는 사자들의 머리 같다(9:8, 17).

 여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마병대의 해로운 활동은 다섯째 나팔의 메뚜기들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들로서 마귀적인 파괴 활동이 더 강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만만2억.
 문자적으로, ‘이만만(two myriads of myriads)’, 혹은 ‘20,000×10,000’ 이다. 여기서 숫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상징적이다.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침을 받은 144,000인의 성도들과는 대조적으로, 시편 68편 17절의 하나님의 병거들처럼 셀 수 없는 무리를 대표한다.36)
요한계시록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요한계시록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불과 연기와 유황.
 성경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의 조합(合)은 언제나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연관되어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처럼 쏟으셨다. 그리하여 그 연기가 풀무불의 연기처럼 올랐다(창 19:24, 28; 눅 17:29).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악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시 11:6; 사 34:9-10; 겔 38:22),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 다(계 14:10-11). 이 세 요소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사단과 그의 군대를 불 못에서 멸할 때 사용된다(계 20:10; 참조 19:20; 21:8). 요한계시록 9장 1-18절은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A 그들의 입에서

   B 나오고 있었다.

      C 불과 연기와 유황

         D 사람 삼분의 일이 이 세 재앙으로부터 죽임당했다.

      C’ 불과 유황과 연기

   B’ 나오고 있는

 A’ 그들의 입에서37)
요한계시록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입.
 요한계시록 9장 18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말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에 의해 죽임당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입은 상징적으로 선악간의 영적 전쟁에서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를 지칭한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이 나와(1:16) 그것으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과 싸운다(2:16; 19:15, 21), 만일 누군가가 두 증인을 해하려 한다면, 불이 그들의 입에서 나와 그 원수들을 죽인다(11:5), 또 다른 측면에서, 상징적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그들의 활동에서 사단과 그의 동조자들이 사용하는 무기다. 용의 입에서 물이 나와 여자, 아마도 교회를 죽이려 한다(12:5),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짐승은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는 입”을 받았다(13:5).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13:6) 빛의 군대와 어둠의 군대 간에 있을 최후의 전쟁을 준비할 때, 요한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와” 지상 역사의 최후의 전쟁을 위하여 세상의 왕들을 규합하려고 설득하는 것을 보았다.(16:13-14) 이 모든 것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선악간의 전쟁이 성격상 실제적인 전쟁이라기보다 언어와 관련된 전쟁임을 암시한다.
꼬리.
 요한계시록 9장 10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다섯째 나팔을 부는 장면에서, 말같이 생긴 마귀적 메뚜기들은 사단 자신을 지칭하는 파괴자라는 이름을 가진 무저갱 사자(9:11)의 지도 아래 전쟁을 준비하였다(9:5).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제어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을 죽이라고 허락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백성을 다섯 달 동안만 괴롭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마귀적 세력은 땅과 그 거민에 대한 파괴적 활동을 감행할 완전한 자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요한계시록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요한계시록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요한계시록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요한은 하나님 앞에 있는 금향단의 뿔로부터 나오는 한 음성을 듣는다. 향단에서 나오는 하늘의 음성은 다섯째 인의 장면에 비춰볼 때(계 6:9, 10), 즉 압제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탄원하는 것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하다. 요한계시록 8장 3-5절에서 그들의 기도는 보좌 앞 향단에 드려지고, 그 결과로 심판이 쏟아진다. 향단, 곧 압제받은 성도들의 기도가 드려졌던 그 동일한 제단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여전히 기억되고 있음을 시사한다.38) 여섯째 나팔 장면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압제받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진행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두 가지가 밝혀진다. 첫째, 하늘의 음성이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들을 놓으라고 명한다. 여기에 더하여 본문은 이 천사들은 마귀적 세력이 땅을 멸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9:16-19). 이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치는 일을 완성하기까지 땅을 해하지 못하도록 멸망의 바람을 붙들고 있는 네 천사들을 상기시킨다(계 7:1-3). 요한계시록 7장 1-3절9장 13-16절의 뚜렷한 유사성은 두 장면을 연결시킨다. 두 장면에서, 제어하는 일과 놓아주는 일은 네 천사와 관련이 있는데, 7장의 하나님의 백성과 여섯째 나팔에서 마귀의 무리 등 등장 인물의 수가 계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만 “내가 그 수를 들으니”라는 표현이 나온다(7:4; 9:16). 이 강한 유사성은 두 장면을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라는 동일한 시간대에 놓는다.

 요한계시록 9장에서 네 천사들이 유프라테스 강에 매여 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구약에서 유프라테스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 원수들 간에 경계선을 긋는다. 그 곳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협을 주는 장소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조직된 마귀적 군대를 네 천사가 제어하는 곳은 바로 이 상징적 유프라테스 강이다. 마귀적 군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마귀의 군대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시간까지는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네 천사들은 연월일시를 위해 예비되어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정해 놓으신 순간” 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천사들을 이렇게 풀어놓는 것은 신적 수동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39) 다시 말하면, 그들이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마귀의 군대를 풀어놓는 일은 다섯째 나팔을 불 때 이미 시작되었다. 마귀적 메뚜기들은 “다섯 달” 동안 악인들을 괴롭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악인들을 파멸시키고 죽이는 것은 제어되었다(9:3-6). 이 곳, 곧 여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마귀적 마병대는 광범위한 살육을 끝낸다. 하나님께서 그 통제력을 거둘 때 (그 결과 마귀의 군대가 역사상 유례없던 활동을 하게 된다.) 바야흐로 지구민에 대한 심판을 수행할 시간이 다가온다.

 마귀의 군대의 마병대 수는 이만만(2억)이다. 내가 그들의 수를 들으니라는 구절은 분명 요한계시록 7장 4절“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와 하나님의 인 맞은 144,000의 수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 마귀의 기사(騎士)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응한 마귀의 위조품이다.40) 두 그룹, 즉 하나님의 인 맞은 백성과 사단의 군대는 세계 역사 최후의 전쟁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요한계시록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요한계시록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다섯째 나팔 장면에서와 같이, 마귀의 군대의 사명을 기술한 후, 요한은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한다. 그는 다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마귀적 메뚜기들을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말과 그 탄 자들을 묘사한다. 그들의 두려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요한은 다시 ‘처럼’ 그리고 ‘같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귀의 군대는 불 못으로부터 가져온 자재 불, 연기, 유황(계 19:20; 20:10; 21:8)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 탄 자들은 불같이 붉고 연기같이 푸른, 그리고 유황같이 노란 흉배를 입고 있다. 이 색깔들은 말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 유황 등과 상응한다. 성경에서 이 세 요소의 결합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이 말의 머리는 사자의 머리 같다. 다섯째 나팔의 경우와 같이 이 기괴한 언어는 마귀적 활동의 기상천외한 성격을 묘사하고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마귀적 말들이 자행하는 살육의 권세는 그 입과 꼬리에 있다. 여섯째 나팔 장면의 꼬리는, 여섯째 나팔이 다섯째 나팔의 연장이라고 시사하는 9장 10절의 꼬리와 관련이 있다. 여섯째 나팔은 다섯째 나팔로 시작된 마귀적 활동을 격화시킨다. 마귀적 메뚜기들의 권세의 근원이 그 꼬리에 있어 괴롭히기만 한 반면, 마귀적 말들의 입과 꼬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최후의 전투 준비에 돌입하고 있으며,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다. 이 재앙의 결과로 인간 삼 분의 일이 멸망한다.

 마귀적 말들은 괴롭히고 해하기 위하여 그 꼬리를 사용한다. 그것들의 꼬리는 뱀 같고, 머리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해친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 사단은 ‘하늘별의 삼분의 일’, 혹 천사들을 쓸어갈 능력을 가진 ‘옛 뱀’으로 지칭되어 있다. 이사야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꼬리로 언급한다(사 9:14-15). 꼬리는 사단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그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짓 가르침과 기만에 대한 상징이다.

 마귀적 말들이 그 꼬리로 사람을 괴롭히는 반면, 그들은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는 그 입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것은 사단의 입에서 나오는 세 마귀[영들]와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에 등장하는 그의 동류들을 생각나게 한다(계 16:13-14 참조). 요한계시록 12장 15절에서 여자를 죽이기 위하여 물이 토해진 곳은 용의 입이다. 또한 이것은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짐승을 상기시킨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계 13:5-6)

 이 모든 것들은 빛의 군대와 흑암의 군대 간에 있을 최후의 투쟁이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말로 싸우는 것이며 사상적 투쟁이다. 즉, 무력이 아니라 설득을 통해 마음을 점령코자 하는 전쟁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그런 전쟁이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 10:3-5; 엡 6:10-12 참조).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요한계시록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요한은 이런 관찰과 함께 전체 장면을 종결 짓는다. 백성 중의 남은 자들, 즉 이 재앙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엄청난 고통과 대량 학살을 초래한 여섯째 나팔 재앙은 인간 중 ‘삼분의 일’에 영향을 미친다(9:15, 18). 마귀적 파멸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한다. 재앙이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못한다. 그들의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들은 보지도, 듣지도, 그리고 걷지도 못하는 귀신들과 금, 은, 동, 돌, 그리고 나무로 된 우상들을 계속적으로 섬긴다. 이 언어는 다니엘서 5장 23절에서 빌려왔는데,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들을 섬김으로써 바벨론 몰락을 초래하였다(시 115:4-7 참조).

 더 나아가 악인들은 그들의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죄들을 우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롬 1:18-32; 계 21:8; 22:15 참조), 취합하면, 이 악들은 귀신들을 섬긴 열매다. 악인들은 귀신들에 의해 고통을 받으나, 그들은 계속적으로 귀신들을 섬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심판을 경험하기를 원치 않으시며, 회개하여 그분에게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벧후 3:9). 그러나 악인들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한다면, 망할 것이다(눅 13:3, 5).

 여섯째 나팔의 장면은 분명히 우리를 종말의 때로 이끌어간다. 이 장면은 아마겟돈 전쟁의 준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고, 그 실제적 전쟁은 책의 후반에 묘사되어 있다(계 16:12-16). 여 섯째 나팔은 세상의 마지막 위기를 가리키며, 종말이 가까워옴에 따라 그 특징으로서 마귀의 활동들이 격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귀의 권세들과 상징적 바벨론의 기만적 교리들과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다. 데스몬드 포드(Desmond Ford)는 이렇게 말한다. “속죄의 피와 그리스도의 의의 향기, 하나님의 강들과 샘들로부터 오는 성결함,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거절하는 무리들은 마귀의 교리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며, 궁극 적으로는 마귀를 대항할 아무런 보호막을 갖지 못한다.”41)

 악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군대 그리고 사단과 그의 군대들이 두 무리 사이에 있을 최후의 싸움을 위하여 집결한다는 신호다(계 16:12-16), 하나님께서 땅의 거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실 때, 마귀는 이런 격렬한 활동을 전개한다(계 14:6-13).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분께서는 죄로 굳어진 마음들이 반응하여 결정적으로 돌아서기를 바라신다.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계 10:1-11:14)에, 또한 땅의 거민들에게 보낼 경고의 기별들을 가지고 공중을 날아가는 세 천사의 그림 속에 영원한 복음의 마지막 선포가 묘사되어 있다(계 14:6-13).
8:13-9:21 뒤돌아보기
 일곱 나팔에 관한 묵시는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묘사된 압제받고 고통받은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련의 역사 개입을 상징적 언어로 묘사한 것이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 일곱 나팔의 서론적 장면은(계 8:2-5)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하늘에서 들으신 바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보낸 대답은 명확하다.

 “그리 멀지 않다.” 일곱 나팔을 불 때 상징적으로 묘사된 사건의 목적은, 악의적으로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압제하고 핍박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계심을 당신의 백성에게 확증하는 것이다(계 8:13).

 우리는 첫 네 나팔 재앙이 하나님의 경고이며 구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첫 네 나팔 재앙의 목적은 악인들을 회개시키고, 그 회개의 시간이 신속히 끝나가고 있으며 자비의 문은 영원히 닫히게 된다고 경고하려는 것이다. 화에 대한 독수리의 삼중 선포는 첫 네 나팔 재앙들의 경고 심판과 마지막 세 나팔의 마귀적 화 사이에서 과도기를 형성한다. 마지막 세 나팔의 화는 복음을 지속적으로 적대하고 거절함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내린다.

 여섯째 나팔 장면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하는 144,000인의 인침과 아울러 파괴적 바람을 제어하는 네 천사들의 장면과 현저한 평행을 이룬다. 존 폴린은 이 평행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두 부분에서 제어하는 일과 놓아주는 일은 네 천사와 관련이 있다. 두 부분에서 백성이 계수되는데,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계수되고,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그것에 대응하는 마귀의 위조품들이 계수된다. 그리고 이 두 곳은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 수를 들으니[에쿠사 톤 아리쓰몬 ekousa ton arithmon]”라는 비밀스런 언어가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만일 유예 기간이 여섯째 나팔 내내 열려 있고 일곱째 나 팔이 울릴 때 닫힌다면, 여섯째 나팔은 요한계시록 7장 1-8절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대응물이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종말 직전의 마지막 기회다.42)
일곱 인을 개봉한 경우에서와 같이,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의 장면 사이에 막간이 삽입되어 있다.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의 개봉 사이에 있는 막간은 여섯째 인의 장면에서 제기된 단호한 질문, 즉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누가 능히 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다(계 6:17). 마찬가지로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된 막간은 여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막간은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있을 지상 역사의 신속한 종말을 선포한다(계 10:7).43) 둘째, 그것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대 회집과 집약적 준비의 때를 가리킨다. 사방의 바람을 제어하고 있었던 유프라테스 강의 네 천사들은 풀려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일이 그 완성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계 7:1-3). 풀려난 천사들은 제어하고 있던 바람을 놓을 준비를 한다. 놓여난 바람은 “땅과 바다를 해”하기 위 하여 전속력으로 불어 지상 역사를 끝장나게 한다.

 답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심각한 질문이 있다. 종말 직전에 있을 최후의 전쟁을 위한 대 준비의 기간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요한은 그의 독자들을 불확실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일곱 인의 개봉에서와 같이,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에 있는 막간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파멸적인 바람을 완전히 제어하는 천사들에 의해 특별한 돌봄과 보호를 받고 있는 동안(계 7:3-8), 그들은 “무서운 반대와 고통”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명을 위탁 받았다(계 10:1-11:14).44) 하나님의 최후의 기별을 세상에 전파하는 그들의 사명은 상징적으로 펼쳐진 작은 책을 먹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10 장),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겪을 경험이 두 증인의 장면에서 묘사되어 있다(계 11장), 막간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워서 그들이 지상 역사의 최후의 날에 다가가며 복음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고한 보증을 주려는 것이다.

주(註) ——————
1. Roloff, 106. 
2. 1 Enoch 20:2-8(Charlesworth, 1:22-23) 참조; Tobit 12:15(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73) 참조. 
3. Robert L. Thomas, Revelation 8–22: An Exegetical Commentary(Chicago: Moody Press, 1992), 7. 
4. Mishnah Yoma 5(Danby, 167). 
5. Mishnah Tamid 5.6(Danby, 587). 
6. 상게서, 3.8(Danby, 585). 
7. Mishnah Tamid 5.6 (Danby, 587)에 묘사된 것처럼. 
8. 상게서, 12. 
9. Ladd, 126. 
10. Thomas, Revelation 8-22, 13. 
11.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370. 
12. 상게서, 388. 
13. 4 Ezra 3(Charlesworth, 1:528-529); 2 Baruch 10:1-3; 11:1; 67:7(Charlesworth, 1:623, 625, 644); Sib, Oracles 5:137-154, 160-161(Charlesworth, 1:396-397) 참조. 
14.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389. 
15. Edwin R. Thiele, Outline Studies in Revelation, Class Syllabus (Berrien Springs, MI: Emmanuel Missionary College, 1949), 168;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rumpets, 386.
16.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386. 
17. 상동.
18.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82.
19.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47: 1 Enoch 86:1: 88:14 90:24(Charlesworth, 1:63-64, 70); Test, of Solomon 6:2; 8:1-2; 20:14-17(Charlesworth, 1:967, 969-970, 983). 
20. Desmond Ford, 2:40. 
21.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398. 
22. Thiele, 170.
23. Paulien, Decoding Revelation's Trumpets, 415. 
24. 상동. 
25. Desmond Ford, 2:442. 
26. Collins, The Apocalypse, 60. 
27.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51: Mounce, 155: Morris, 126. 
28.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51. 
29.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89. 
30. Paulien, Bible Explorer 3.12. 
31.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89. 
32. 예를 들면, Swete, 121;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53; J. M. Ford, 153-154; Sweet, 172; Collins, The Apocalypse, 62. 
33. 1 Enoch 56:5-8(Charlesworth, 1:39); Ladd, 135. 
34. Caird, 122; Mounce, 200-201; Harrington, 143; Ladd, 135; Beasley-Murray, 164; Fiorenza, Revelation, 72도 포함하여. 
35. Beasley-Murray, 164. 
36. Bauer, 661. 
37. Aune, Revelation 6-16, 540에서 지적된 대로. 
38. Morris, 129-130. 
39.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93. 
40. Paulien, “Seals and Trumpets,” 196. 
41. Desmond Ford, 2:458. 
42. Paulien, "Seals and Trumpets,” 196. 
43. Ezell, 51. 
44.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