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인의 개봉 (6:1-17; 8:1)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시기에 합당하셨다. 두루마리를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 등극하셨고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서 온 우주를 다스릴 모든 권위와 권세를 받으셨다. 완전한 왕의 자격으로, 그리스도께서 인봉된 두루마리의 일곱 인들을 하나씩 떼실 때, 일련의 사건들이 지상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들을 자세히 분석할 때, 일곱 인은 그 자체가 사건이 아니며 오히려 인을 뗄 때에 수반되는 사건들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곱 인의 개봉은 형태와 비중이 다른 두 묶음, 즉 넷으로 된 것과 셋으로 된 것으로 생생하 게 나타난다. 첫 네 인이 개봉되며 말 탄 네 기사(騎士)의 장면으로 이끈다(6:1-8). 마지막 세 인이 개봉되며 다가오는 종말의 때로 우리를 이끈다. 다섯째와 여섯째 인(6:9-17)은 성도들의 인치는 사건이 삽입됨으로써 일곱째 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8:1), 이 부분은 본 주석의 다음 장에서 분석할 것이다.

 네 말 탄 자(6:1-8)

 그리스도께서 첫 네 인을 떼실 때, 요한은 네 말과 그 탄 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았다. 네 말 탄 자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과 관계가 있다. 왕국의 복음은 세상 만국에 전파되고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경험한 후 그것을 다시 거절할 때, 그 결과는 칼, 기근, 그리고 온역 등의 상징적인 용어로 묘사되었다. 말들이 수반하는 칼, 기근, 그리고 온역 등은 복음을 거절하거나 불순종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예비 심판이다.1) 그러나 이 심판에는 구속적 목적이 있는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우고 그들로 회개케 하기 위함이다.

첫째 인의 개봉 (6:1-2)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오라.
 본 절의 변형(變形)들이 고대의 여러 사본에 나온다. 흠정역은 “와서 보라”로 되어 있는 어떤 헬라어 사본들을 따른다. 그러나 거의 변경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포함한 최상(最上)의 사본들은 더 짧은 형태인 “오라!”로 되어 있다. 즉, 네 말 탄 자에게 활동 장면으로 하나씩 나오라는 명령이다(6:1, 3, 5, 7).
요한계시록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흰 말.
 흰 말과 그 탄 자에 관하여는 세 가지의 주요 견해가 있다.

 (1) 현대의 여러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 장면은 문자적인 것으로, 1세기의 군사력과 군사적 정복을 가리킨다. 흰 말과 그 탄 자는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 지역에서 살았던 호전적 민족인 파르티아 인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그들은 로마인의 원수로 로마인들에게 끝없는 위협이 되었다.2) “그들은 전쟁에 능한 기사들로서 기민한 기동성과 화살을 다루는 기술로 유명하였다.”3) 그러나 과거주의자들의 문자적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문자적 해석은 이 장면에서 예언적 의미를 빼앗아 버린다. 그것은 일곱 인의 묵시가 갖는 신학적 구조와 맞지 않다.

 둘째, 말의 흰 색깔이 파르티아인들을 대표한다는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인들은 문자적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둘째 견해에 따르면, 말 탄 자들은 복음의 반대자들로서 “적그리스도와 악의 세력”을 대표한다.4)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다른 세 말이 재앙을 가져왔으므로, 이 말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지지자들은 활을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말한 구약의 구절들을 제시한다(렘 49:35; 51:3, 56; 겔 39:3; 호 1:5 등 참조). 또한 그들은 요한계시록 후반부의 중심 주제들 중 하나가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11장13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복하는 짐승을 6장 1-2절에 나오는 언어로 기술한다. 이 외에 그들은 첫째 인의 흰말 탄자와 요한계시 19장의 말 탄자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주목한다. 이 모든 점들을 미루어 볼 때, 6장 1-2절의 말 탄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3) 압도적 증거가 제시하는 세 번째 견해에 의하면, 흰 말을 탄 자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되었고, 오순절에 시작된 승리의 복음 전파를 상징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흰 색깔은 언제나,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나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지칭하며 악의 세력과 관련해 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조지 래드가 주목하듯이,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에서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은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1:14). “신실한 자들은 그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으며(2:17), 흰 옷을 입을 것이다(3:4, 5, 18). 이십사 장로들은 흰 옷을 입었다(4:4), 순교자들은 흰 옷을 받았다(6:11), 큰 무리도 흰 옷을 입었다(7:9, 13). 인자는 흰 구름을 타고 나타나신다(14:14). 그분은, 흰 말을 타고 흰 옷을 입은 하늘 군대에 둘러싸여 흰 말을 타고 오신다(19:11, 14).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흰 보좌에 좌정해 계 시는 분으로 나타난다.”(20:11)5)

 비록 구약에서 활은 종종 원수의 세력들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무기다(사 41:2; 애 2:4; 3:12; 합 3:8-9; 슥 9:13). 말 탄 자가 쓰고 있는 스테파노스 면류관은 요한계시록에서 언제나 그리스도 또는 그분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얻으신 승리와(계 5:5-6) 그분의 백성이 당신의 피와 그들의 증거로 죄를 정복할 때 쟁취하는 승리에 비춰 볼 때(계 12:11), 그 면류관은 그리스도께서 쓰시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흰 말을 탄 자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상징한다는 결론이 합리적이다.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이 비유적 표현에 대한 구약 배경 성경절은 하박국 3장 8-9절시편 45장 3-5절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말을 타시고 그 손에 활을 가지고 계신다. 요한계시 19장 11-12절은 백마와 그 탄 자를 묘사한다. 그 탄 자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며, 그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로서 그 머리에 승리의 많은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다.
면류관.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스테파노스는 왕관이 아니라 승리의 관이다. 즉, 올림픽 게임에서 승리자들에게 주어진 화관이다(더 자세한 설명은 요한계시록 2:10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이 면류관은, 한 번을 제외하고는(9:7), 요한계시록에서 규칙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된다(2:10; 3:11; 4:4, 10; 6:2; 12:1; 14:14).
(주해)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첫째 인을 개봉할 때, 요한은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레같은 소리로 ‘오라’ 하는 말을 듣는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자처럼 생긴 첫째 생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레 같은 소리는 사자의 소리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계 4:7), 그 음성에 따라 흰 말을 보았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았다. 윌리엄 바클리는 “흰 말은 정복자의 상징”이라고 지적하였다. 로마 장군은 승리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하여 흰 말을 타는 관습이 있었다.6) 이 극적인 장면에서, 요한은 복음이 온 세상에 승승장구하면서 전파될 것을 상징적 언어를 통해 보았다. 흰 말을 탄 자는 “교회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이 점차적으로 세계를 정복해 나갈 것을”을 상징하는 것 같다.7) 요한계시록 19장 11-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흰 말을 타고 출전하신다. 래드가 말하듯이, 요한계시록에서 흰 색깔은 “그리스도에 대한 일관된 상징, 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혹은 영적 승리와 관련된 어떤 것”이다.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말을 타고 손에 활을 들고 나가서, 그분과 자기 백성의 원수들을 정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합 3:8-13; 시 45:4-5; 사 41:2; 즉 9:13-16 참조),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말을 타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돌아오셔서 심 판과 공의를 행하신다(19:11-16).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그분이 왕관을 쓰고 계신 반면, 6장에서는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거의 언제나, 면류관은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와 승리하는 자기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승리의 죽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왕을 이기셨고 정복하셨다(요 12:31-32; 16:11),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구속할 수 있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선언되었다(계 5:9). 이제 6장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얻으신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께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분의 주권과 통치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셔야 한다(고전 15:25), 어떤 반역적 지역들은 아직 정복되지 않았고, 석방되어야 할 죄의 포로들은 여전히 많다. 그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고전 15:24) 그 때, 그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서 왕관을 쓰실 것이다(계 19:12).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보좌에 등극하시고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넘겨진 것은 오순절 때였다(계 5장). 존 폴린이 관찰하는 대로, “어린양의 등극시 하늘에서 비준된 것은 이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그의 백성의 경험 속에서 가동되고 있다.”9)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승리적 죽음과 하늘 보좌로의 그분의 개선의 등극은 성령의 강림을 가능케 하였다(요 7:39).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복음의 선포가 추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 하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 정복은 분명히 영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 성령과 그분의 신실한 백성에 의한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이끌고 복음을 그들의 삶에 가져다 주심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기 시작하셨다.

 예배소 교회에게 보낸 기별처럼(2:1-7) 첫째 인의 개봉 장면은 역사적으로 사도 시대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백마를 탄 자의 정복은 사도 시대, 즉 1세기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요한 당대에 시작하여 재림 때까지 이어갈 기독교 전 역사에 걸쳐 진행되는 복음의 진전을 총괄적으로 묘사한다.10)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정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승리하며 그분의 왕국을 계속 확장하실 것이다.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둘째 인의 개봉 (6:3-4)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헬라어 퓌로스(puros)‘불같이 붉은’을 의미한다. 붉은 색은 피와 압제의 색깔이다. 모압 인들은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았다(왕하 3:22-23),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죄를 진홍같이 붉다고 하였는데(사 1:18),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였기 때문이다(사 1:15-23).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붉은 색깔의 짐승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음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계 17:6). 둘째 인의 장면에서 붉은 색은 핍박과 피 흘림에 대한 적절한 색깔이다.
서로 죽이게 하고.
 이 묵시는 구약의 여러 장면들을 생각나게 한다.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각 사람은 자기의 형제, 친구, 그리고 이웃을 칼로 죽였다(출 32:27-29). 또한 그 장면은 칼로 피차를 죽인 미디안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삿 7:22), 애굽에 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애굽 인들을 격동시켜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라고 하였다(사 19:2).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실 때, 피차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슥 14:13). 헬라어 스파조(sphazo)‘살해하다’, ‘살륙하다’라는 뜻으로 전쟁터에서의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용어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5:6, 9, 12; 13:8) 복음 증거로 인한 그분의 성도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된다(6:9; 18:24).
(주해)
요한계시록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요한계시록 6: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둘째 인을 뗄 때, 요한은 불같이 붉은 말을 보라는 둘째 생물의 소리를 듣는다. 이 생물은 아마도 송아지 모습을 한 생물일 것이다(4:7), 송아지는 희생제물의 상징이고 이 장면의 문맥과 잘 맞는다. 이 말을 탄 자는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 불같이 붉은 색깔의 말은 땅에서 화평을 제하는 말 탄 자의 사명과 부합한다. 첫째 인의 장면에서 흰 말과 그 탄 자를 이해하는 것은 둘째 인의 해석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들을 이해하는 결정적 요소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첫째 말을 탄 자는 그리스도 복음의 정복과 세상에 대한 복음 전파를 묘사한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큰 축복을 경험한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와 평강을 약속 받는다. 이 평강은 틀림없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진 결과로서 오는 복음의 완전한 평강이다(요 14:27; 16:33). 그러나 복음 기별을 거절하므로 평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사야는 말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 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백성이 복음에 대한 사랑을 거절할 때, 그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평강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자연히 반대와 분리가 일어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 24:9-10; 10:21-22, 34-36 참조)

 신약에는 복음 전파가 언제나 백성을 분리시킨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는 본문들이 많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10:21 참조) 이 구절은 둘째 인의 장면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적절히 정의한다. 둘째 말을 탄 자는 검을 받았고, 그의 사명은 땅으로부터 화평을 제하는 것이다. 문맥은 검이 반대와 분리를 상징한다고 가리킨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실을 확증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이 모든 것은, 둘째 말을 탄 자는 복음을 거절한 결과를 상징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둘째 말은 첫째 말을 뒤따르는데, 이는 복음이 전파되어 받아들여지게 되면 언제든지 핍박이 뒤따른다는 의미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이 그들의 검을 피차에 겨누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백성이 나누어지며 서로를 박해하게 되고, 그리하여 “서로 미워”한다(마 24:10). 다섯째 인의 장면은, “그들이 고수했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부르짖는 모습을 묘사한다(계 6:9-10), 헬라어에서, 요한계시록 6장 9절‘죽임을 당한’에 해당하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6장 4절의 붉은 말을 탄 자의 사명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본문은 이 순교자들이 죽은 이유는 복음 선포에 대한 그들의 충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그분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을 신원하실 때까지 잠시 쉬라는 말을 듣는다(계 6:11 참조). 그 약속된 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분의 머리에 왕관을 쓰고 예리 한 검을 가지고 오셔서 복음을 거절하고 자기의 충성된 백성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19:11-16).
셋째 인의 개봉 (6:5-6)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검은.
 요한계시록에서 검은 색깔은 어둠과 연관이 있다. 태양이 “총담같이 검어”졌다(6:12), 신약에서 어둠은 복음의 부재를 상징한다(예, 마 4:16; 눅 1:79; 요 1:5; 3:19; 행 26:18; 골 1:13; 요일 1:5).
저울.
 구약에서 저울은 기근을 상징한다. 고대 세계에서 무게를 달아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극심한 식량 부족을 의미하였다. 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만일 그 백성이 불순종한다면,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레 26:26) 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그 거민들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 4:16).
요한계시록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
 헬라어 코이닉스(choinix)는 한 되와 같은 뜻의 건량(乾量)이었다. “한 되의 곡식은 한 사람의 일일 식량이었고,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하루 평균 노임에 해당하는 로마의 은전이었다.11) 로버트 토마스(Robert L. Thomas)에 의하면, 기근의 때에 하루치 식량을 얻는데 하루 품삯이 들었다.12) 밀은 고대 세계에서 주식이었고, 밀보다 싼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주식이었다. “이 장면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묘사한다. 한 사람이 벌 수 있는 모든 것, 즉 한 데나리온을 다 써야 소가족이 필요한 만큼의 가장 싼 음식을 살 수 있는 때다. 평상시에는 한 데나리온으로 열둘에서 열다섯 배의 식량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13)
해치다.
 헬라어 아디케오(adikeo)‘상처를 주다’, ‘...에게 해를 끼치다’ 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도처에서 악행자들에 대한 심판과 관련하여(2:11; 9:10, 19),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것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11:5). 또한 상징적으로 그것은 땅과 초목들을 해하고 파괴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될 수 있다(7:2-3; 9:4).
(주해)
요한계시록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셋째 인을 뗄 때, 요한은 검은 말을 보라는 세 번째 생물(아마도 사람 같은 얼굴을 가진 생물, 4:7)의 소리를 듣는다. 셋째 말을 탄 자는 그의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식량이 부족한 때를 가리킨다. 그 때란 “기초 생필품에 부풀린 값을 매겨 (저울에) 달 때”다(레 26:26; 겔 4:16 참조).14) 셋째 인을 뗄 때 나타난 장면은 기근 상태를 묘사한다. 네 생물 중간에서 나온 음성은 아버지나 그리스도 자신의 음성일 것이다. 그 음성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는 말로써 엄청난 기근의 상태를 전한다. 밀 한 되는 아마 한 사람의 일일 평균 식량일 것이다. 한 사람은 자신만의 생존에 소용될 만큼의 식량을 사기 위해 자신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불해야 되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훨씬 싼 값의 질이 떨어지는 보리를 하루 품삯으로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식량난의 예증으로, 고대 세계에서 빵의 부족은 극심한 기근의 징조로 간주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곡식, 포도주, 기름은 삼대 주요 곡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밀은 식사의 필수품이었던 것인 반면, 기름과 포도주는 사치품이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구약에서 곡식, 기름, 포도주는 생활의 일상적인 필수 품목을 대표하는 것으로 반복하여 함께 언급된다. (신 7:13; 11:14: 28:51; 대하 32:28; 호 2:8, 22; 욜 2:19). 이 세 곡물은 성경의 땅에서 생활 필수품이었으며, 진짜 사치품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15) 감람유와 포도는 땅에 뿌리가 얕게 묻히는 곡식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곡식보다 훨씬 더 쉽게 가뭄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뭄이 필수품인 기초 식량을 손상시키고 파괴시켰을 것이다. 그런 반면, 셋째 인을 뗄 때의 기근으로 인한 재앙의 고통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었다.

 검은 말을 탄 자는 실제적인 양식의 기근보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기근을 대표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모스의 예언은 그 기근이 영적 기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만일 셋째 인의 검은 말이 복음의 선포와 전파를 상징하는 첫째 인의 흰 말과 반대된다면, 셋째 인의 개봉은 영적 기근을 묘사하는 셈이다. 곡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할 것이다(마 13:3-30; 눅 8:11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이거나(마 4:4), 예수님 자신을 상징할 수도 있다(요 6:35-58; 고전 10:16). 따라서 이 영적 기근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셋째 인의 개봉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결핍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기근은 치명적이 아니다. 또한 그 음성은 기름과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운 구원을 상징하며, 기름은 성령을 대표한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들지라도, 복음의 기별이 사람의 눈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성령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게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셋째 인이 언제, 어디에서 개봉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소 모호하여 명료치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본문은 분명히 한다. 그분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여전히 열려 있다.16)
넷째 인의 개봉 (6:7-8)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청황색 말.
 헬라어 클로로스(chlöros)는 푸른 채소에 사용되었다(막 6:39; 계 8:7; 9:4), 고대 세계에서 그것은 병자의 모습에도 사용되었다. 넷째 인의 문맥에 비추어, 그것은 ‘황 색을 띤 초록’ 또는 ‘창백한'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당히 부패된 시신과 비슷한 잿빛 회색의 창 백한 색깔이다.” 17)
사망과 음부.
 요한계시록 1장 1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땅 사분의 일.
 요한계시록에서 “땅 사분의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이 있고, “땅 삼분의 일”은 사단의 주권과 관련이 있다(계 8:7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6: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넷째 인을 뗄 때, 네 번째 생물(아마도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 존재일 것이다.)은 시신의 잿빛 회색과 같은 창백한 색깔의, 또는 병색이 짙은 환자 모습의 색깔인 청황색 말을 호출 한다.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서, 사망과 음부(하데스)는 매우 두려운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의 통제하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여기, 곧 넷째 인을 뗄 때, 사망과 음부는 복음을 거절함으로 인한 궁극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것 같다. 사망은 셋째 인을 뗄 때 묘사된 기근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사망과 음부-이 두 원수는 일시적이다. 사망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 성경의 기별이다. 그러나 사망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망과 음부가 둘째 사망에서 그 종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20:14).

 사망과 음부는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었다. 그들이 권세와 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은 사망과 음부가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통제 하에 있다(1:18). 그들의 권세가 땅 사분의 일에만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각 인(印)은 땅의 사분의 일과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각 말은 그 사분의 일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할 것이다.

 네 말들은 7장 1절의 사방의 바람과 평행을 이루며, 이 사방의 바람은 땅의 네 모퉁이와 관련되어 있다(계 7:1의 어구해설 참조).

 사망과 음부는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는 권세를 받았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검과 기근과 온역과 짐승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의 결과로서 그들 위에 임한 일련의 하나님의 심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그분에 대한 불성실과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그들에게 보내실 형벌들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들짐승들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자녀들을 앗아가실 것이며, 그들의 가축을 파멸시키실 것이다. 검은 그들의 언약 파기에 대해 복수할 것이며, 온역은 그들의 성읍들 중에 있을 것이었다. 그분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것이며,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레 26:21-26).18)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겔 14:21). 그 벌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불순종은 이 심판에 더욱 불을 질러 추방과 유랑에 이르게 할 것이었다(레 26:21-26; 신 32:41-43).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를 당신의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쏟으실 때”19) 일어날 일을 잘 알려진 그림으로 표현한다.

 넷째 말을 탄 자는 가장 심각한 상황을 드러내는데, 첫 세말 탄 자들의 행동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첫 네 인은 죄의 결과로서 현실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그러나 그 인들은 그 현실 속에서 희망을 준다. 이 재앙들이 두렵고 또 두려운 것 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구약 배경 본문들이 암시하듯이(레 26장; 신 32장), 이 재앙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워서 회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통제하고 계신다. 사망의 권세들은 그분의 권세 아래 있다.

 첫 네 인들에 수반된 재앙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불성실과 불순종으로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이 경험하게 될 최후의 심판의 전조요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죄의 결과인 고통과 사망이 그 종국을 맞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후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재림 후에 세워질 새 땅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계 21:1-5 참조).
네 말 탄 자 뒤돌아보기 (6:1-8)
 분명히 첫 네 인에 등장하는 네 기사는 효과적인 복음 전파와 그것을 거절함으로 인한 결과들을 대표한다. 흰 말을 탄 자는 신실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묘사한다.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분리가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거절하고 거역한다. 붉은 말을 탄 자는 복음에 대한 반대를 묘사한다. 복음을 거절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영적 기근이 뒤따른다. 검은 말 탄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근을 묘 사하는 반면, 청황색 말 탄 자는 그 기근의 결과로서 이르러올 온역과 사망을 묘사한다. 이 모든 장면들은 구약에서 끌어온 것이며, 그 장면들은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고 죄 가운데 살기로 선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영구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네 말 탄 자는 일반적인 현실 즉, 각 사람이 복음과 대면하였을 때, 그들이 무슨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 일 때, 그는 그리스도와 갖는 밀접한 관계로 인해 충만한 축복과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다. 다른 한 편으로, 복음에 대한 거절과 거역은 언제나 영적 기근과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점진적 쇠퇴의 결과를 낳는다.

 존 폴린의 제안대로, 네 말 탄 자는 특히 기독교 시대의 첫 일 천년 간 교회가 겪은 경험을 묘사할 수도 있다.20)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에 따르면 “인들이 개봉될 때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구체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21)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전반적으로 신실함이 그 특징이 되었던 초기 기독교회에서, 복음 전파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다음 기간에는 영적으로 점차 쇠퇴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근을 유발하였고, 전 중세 기간에 걸쳐 영적 사망이 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그 것은 영적 쇠퇴와 핍박의 기간이었다. 그 때 참된 믿음은 상실되어, 사랑의 복음 기별은 저항 받고, 잊어버린바 되며, 점차적으로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1장 3-14절이 암시하듯이, 네 기사의 장면은 첫 일천 년을 지난다. 그러므로 네 기사는 기독교 역사상 첫 일천 년의 역사와 시작에 초점을 두기는 하지만, 기독교 전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네 인을 개봉할 때 묘사된 심판은 부분적이요 예비적이다. 복음 전파는 어찌되었던 일세기와 함께 끝나지 않았다. 흰 말을 탄 자는 이기고 또 이기기 위하여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계 6:2). 네 기사는 미래의 현실에 대한 선봉자들에 불과하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한 번 더 최종적이고도 엄청난 복음이 선포될 것이다(계 14:6-12; 18:1-4 참조). 늦은 비로 주도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백성을 통하여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세로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 그 때 온 세계는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 질 것이다(18:1). 이 복음이 전파된 결과,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거절하고 저항한다. 이어서,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인간의 운명이 결정될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복음을 거절하고 거역한 자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네 기사에게서 암시된 언약의 저주들은 그 때 이루어져 끝날 것이다.

 네 기사의 장면은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그것은 복음 기별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것은 언제나 영적 기근과 질병과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장면을 통해 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복음의 중심 주제인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말 직전, 세상의 거민들에게 영원한 복음이 마지막으로 선포될 것이다(계 14:6-12; 18:1-4).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하고 은혜와 자비를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 3:15)

나머지 세 인의 개봉 (6:9-17; 8:1)
 마지막 세 인의 개봉 장면은 앞서의 네 인의 경우와 다르다. 네 생물의 소환도 없고 말과 탄 자도 없다. 요한계시록 6장 1-8절의 네 기사의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불성실 할 때, 그들이 경험하게 될 결과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다섯째 인의 개봉은(6:9-11) 죽임당한 순교자들이 심판을 간청하는 모습을 그리며, 여섯째 인의 개봉은(6:12-17) 하나님 백성의 원수와 압제자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다. 이 심판의 실현은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에서 묘사되어 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일곱째 인의 개봉으로 끝난다. 마지막 인이 개봉될 때 하늘은 침묵한다(8:1).

다섯째 인의 개봉 (6:9-1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제단.
 구약의 성전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었다. 희생 제단은 성전 바깥뜰에 있어 그 곳에서 동물의 희생제물을 번제로 드렸다. 이 곳에 등장하는 제단은 분향단이 아니라 번제단 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구약 성전의 의식에서 피가 번제단 밑에 쏟아졌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제사장은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 4:7, 18, 25, 30~34; 8:15; 9:9) “쏟았다” 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16장 6절에도 사용되었다. 쏟아진 것은 성도들과 선 지자들의 피였다(7절이 가리키는 대로 분명히 제단 밑이다). 희생제단은 성전 안이 아니라 바깥뜰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묘사된 장면은 하늘 성전이 아니라 성전의 바깥뜰로 상징된 세상에서 일어난다. 비교적 후기의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의인의 영혼은 영광의 보좌 아래 보존되었다.22)
저희의 가진 증거.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23) 신실한 순교자들이 주장하였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했던 그들의 증거는 “예수의 증거”(계 1:2, 9; 20:4; 계 1:2의 어구 해설 참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교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증거’ 또는 ‘그들의 증거’로 표현되었다(11:7; 12:11; 계 12:17의 어구 해설 참조), 이러한 이해는 일곱 인의 개봉을 다루고 있는 묵시의 문맥과 부합한다. 이 문맥은 기본적으로 복음의 선포와 그것과 관련된 결과들을 다룬다.24) 요한계시록 6장 9절의 순교자들의 증거는 요한계시록 11장 3-10절의 두 증인들과 평행을 이룬다. 순교자들이 핍박과 순교를 당한 것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신실한 증거 때문이다(계 12:11 참조).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신원伸寃.
 헬라어 엑디케오(ekdikeo ‘복수하다’, ‘누군가를 위하여 정의를 얻어주다’)는 법적 행동을 시사하는 용어다. 예를 들면, 이 단어가 사용된 누가복음 18장 3절에서 과부는 재판관에게 부르짖는다. “나의 반대자들로부터 나를 사법적으로 보호해 주시오.”(나의 원수와 대적하도록 나에게 공의를 주시오. NIV) 누가복음 18장 5절에서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사법적으로 보호해 주리라.” 이 사법적 측면은 요한계시록 19장 2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손에 피를 갚으심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셨다(롬 12:19도 참조하라).
땅에 거하는 자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에 자주 나오는데, 악인들, 즉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핍박한 자들에 대한 전문적 용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3:10; 6:10; 8:13; 11:10: 13:8, 14; 17:2 참조). 반면, 요한계시록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로(계 13:6), 그리고 하늘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계 1:6; 5:9-10 참조).
요한계시록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흰 옷.
 요한계시록 3장 1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시오.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
 이 곳에 사용된 접속사인 헬라어 카이(kai)는 아마 보충 설명하는 ‘즉’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동일한 그룹의 두 가지 측면을 드러낸다.25)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헬라어 플레로오(pléroo)는 ‘차게 하다’, ‘가득 채우다’, ‘어떤 것 을 완전하게 하다’, ‘완성하다’라는 의미다. 본문은 바야흐로 죽임을 당해야 할 동료 종들의 수가 채워지기까지라는 뜻이든지(NASB, NIV, NKJV, NRSV, RSV의 번역처럼), 또는 죽임을 당할 그들의 동료 종들의 품성과 관련하여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든지(KJV가 그렇게 제시하는 듯이 보인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 나오는 증거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계 7:13-14; 19:7-8 참조). 일반적으로 번역자들은 때가 끝나기 전에 순교자들의 고정된 숫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상을 요한이 지니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 ‘수(number)’ 라는 단어를 보충한다. 예를 들면, 이것은 에녹 1서로부터 널리 유포된 유대인의 전승에 기초한다. “거룩한 자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의로운 자들의 수가 제공되었기 [찼기] 때문에, 의로운 자들의 기도는 들으심을 받았고, 의로운 자들의 피는 영들의 주님 앞에 가납되었다.”26)

 에스라 4서(4 Ezra)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의인의 영은 그들의 밀실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까? 즉, ‘우리가 여기 얼마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그리고 언제 우리는 보상을 받을 것입니까?’ 그러자 천사장 예레미엘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들과 같은 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다.’27) 유사한 사상이 바룩 2서(2 Baruch)에 나온다. “아담이 범죄하여 태어날 자들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을 때, 태어날 자들의 무리가 계수되었다. 그 숫자를 위하여 한 장소가 예비되었다. 그 곳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살고, 죽은 자들은 보전될지라도, 어떤 피조물도 지정된 수가 차기까지는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28)

 그러나 ‘수’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 6장 11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없다. 조지 래드가 바르게 지적하듯이, “이 진술은 어떤 수학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숫자만큼의 순교자들이 있어야 하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끝이 올 것이라고 명하신 것처럼 말이다.”29) 요한계시록은 널리 유포되어 있던 유대인들의 이해를 초월한다. 본문은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이 그들의 동료 종들, 곧 바야흐로 죽임을 당할 그들의 형제들이, 그들 자신의 품성이 완성되거나 완전해진 것같이 이들의 품성이 완성될 때까지 쉬어야 할 것을 말한다.
(주해)
요한계시록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다섯째 인을 뗄 때,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 것을 본다. 이 장면은 그들의 믿음과 복음에 대한 그들의 신실한 증언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묘사한다.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비유적 표현은 구약의 희생 의식에서 직접적으로 끌어온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번제단(레 4:7)은 드려진 희생제물이 태워지는 곳이었다. 희생제물 중 가장 신성한 부분은 생명을 상징한 피였다. 피를 쏟으면, 사람이나 동물은 죽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레 17:11-14), 흘려진 희생 동물의 피는 제단 아래 쏟아졌다(레 4:7; 8:15; 9:9). 그러므로 “그들이 쏟은 생명의 피는 하나님께 제물로서 드려졌기” 때문에 충성된 순교자들은 제단 아래 있었다.30)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는 제단 아래 쏟아진다(16:6-7).

 다섯째 인의 장면은 순교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구약의 희생 의식에서 끌어온 상징을 사용하여, 요한은 희생당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그들의 생명의 피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순교자들로 묘사한다.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제물로서의 순교 개념은 신약에서 잘 알려져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는 자들이 생각하기를 그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할 날이 이를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요 16:2). 바울은 자신을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린다.”고 하였다(빌 2:17; 딤후 4:6 참조), 이와 같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상징적 표현이다. 제단 밑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선포한 복음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1:9 참조),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충성 때문에 죽임을 당할 때, 그것은 매우 빈번히 비극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섯째 인의 장면은 그러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죽음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을 승리로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이 부르짖는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탄원은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묘사된 아벨의 피를 상기시킨다(창 4:10), 아벨의 피가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같이,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으로 인해 부당하게 핍박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분에게 부르짖는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악의적으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핍박하는 복음의 적대자들이다(6:10; 8:13; 11:10; 13:8, 14; 17:2 참조). 비록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탄원이 그들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복수에 대한 갈망으로서가 아니라 법적 공의를 탄원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눅 18:3, 5 참조). “오, 주여 얼마 동안이나 불의가 땅에서 활개 치도록 하실 것입니까? 당신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 피를 신원해 주시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이 부르짖음은 “법적 탄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 탄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순교당한 성도들을 옹호할 판결을 내릴 법적 절차를 이행하시라는 요청을 받으신다.”31) 피오렌자가 내린 결론처럼, 이 탄원은 “압제받고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옹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의 목전에서 하 나님의 옹호를 위한 탄원이다.”32)

 “오, 주여 얼마 동안이나?”라는 부르짖음은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압제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연중 끊이지 않는 탄원이었다. 이 탄원은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고 공격하도록 허락된 것과 관련한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이다(시 79:1-10), 유사한 정서가 하박국에 의해 표현되었다. 선지자는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도록 허락된 것을 보았을 때 부르짖었다.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합 1:1-4) 유랑 기간 동안 다니엘도 “성소가 짓밟히는 일이 어느 때까지입니까?”(단 8:13; 12:6-7)라고 부르짖었다.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의 상급을 거둬주실 때는 언제입니까?”라며 외경 에스라 4서의 저자는 물었다.33) 그러므로 제단 밑에서 순교당한 성도들의 “언제까지?”라는 부르짖음은 하늘 법정에서의 사면(放免)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이 “이 부르짖음을” 발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인해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동과 의인에 대한 그분의 궁극적 옹호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34)
요한계시록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충성된 순교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들으신 바 되었다. 각 사람은 흰 옷을 받았다. 이 곳의 수동태는 히브리어의 신적 수동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흰 옷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심을 시사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이 흰 옷(계 3:4-5)은 승리, 개선, 그리고 신실함의 옷이다. 후에 요한은 구속받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본다(7:9). 그들은 큰 환 난에서 나왔고, 자신들의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었다(7:13-14), 흰 옷을 받은 후에, 제단 밑에 있는 순교자들은 아직 잠시 동안 쉬라는 말을 들었다. 가라사대 [즉, 그들에게 말해지기를]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행동을 시사하는 신적 수동태를 본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순교 자들의 기도에 직접 응답하셨다.35)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의 죽음은 ‘잠시 동안’ 쉬는 것으로, 또는 ‘그들의 수고’에서 쉬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저희의 행한 일이 따”르기 때문이다(계 14:13). 복음을 거절하고 거역한 사람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계 14:11),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나지 못한다. 후에 요한은 요한계시록 19장 2절에서 이 순교자들을 본다. 그들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보좌 앞에서 환호하는 구속받은 자들의 중앙에 서 있었다. 또한 후에 그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그 동일한 영혼들이 재림 시에 부활하여 하늘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을 목격한다(계 20:4), 그 동안, 순교한 이 충성된 자들은 하나님의 사려 깊은 돌보심 아래 부활의 날까지 싶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동무 종들, 즉 바야흐로 죽임을 당할 형제들이 그들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완전해지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는 말을 듣는다. 충성된 순교자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그들은 품성에 있어 완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죄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흰 옷으로 입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동무 종들, 즉 그들의 형제들도 완전해질 때까지 쉬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동무 종들이 동일한 수준의 순종과 충성에 이를 때까지 쉬어야 한다. 그 때가 요한계시록 19장 7-8절에 묘사되어 있다. 이 곳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다(7:14), 제단 밑의 순교한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될 시기는 그 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때 당신의 충성된 백성의 원수들과 압제자들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인의 개봉 (6:12-17)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큰 지진이 나며.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땅을 징벌하기 위해 강림하실 때 땅이 함께 흔들렸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오실 때 격렬한 지진이 있을 것이다(겔 38:19-20; 욜 2:10; 암 8:8). 학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학 2:6) 이러한 개념은 성경 외의 유대 문헌에서 매우 두드러졌다.36) 여섯째 인에서 언급된 지진은 16장 18절에서 묘사된 일곱째 대접 재앙 때의 지진보다 앞서는 것 같다. 이 대접 재앙으로 종말 때의 바벨론은 파쇄되고, 그 일로 멸망에 이른다.37) 역사주의 주석가들은 6장 12절에 언급된 이 지진을 1755년의 리스본 지진으로 보았다.38)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고.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구약의 배경은 요엘 2장 31절이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욜 3:15 참조), 이사야도 해를 어둡게 하여 굵은 베로 입히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사 50:3). 별들이 빛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해가 어두워질 것이며, 달이 그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땅은 여호와의 진노로 그 자리에서 흔들릴 것이다(사 13:10, 13), 역사주의 학자들은 이 현상이 역사적으로 1780년 5월 19일에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뉴욕주 동부와 뉴잉글랜드 남부에서는 그 날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였다.39)
요한계시록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분명히 요한은 이 묘사를 이사야 34장 4절에서 택한 것 같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감람산 상의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29), 역사주의 학자들은 이 현상의 역사적 성취가 1833년 11월 13일에 그 장관을 이루었던 유성우를 일컫는 것이라고 말한다.40)
요한계시록 6: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종이 축같이 말리는 하늘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진노를 묘사한 이사야 34장 4절에서 가져왔다.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예레미야는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 들도 요동”한다고 하였다(렘 4:24), 요한계시록 6장 14절은 거의 확실히 요한계시록 16장 18절에서 다시 언급된 최후의 지진을 가리킬 것이다. 이것은 6장 12절에서 언급된 첫째 지진과 다르고 그것보다 더 큰 지진이다.
요한계시록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헬, 오르게 orge)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의 어 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요한계시록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요한계시록 6: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여섯째 인을 개봉할 때, 그 범위가 우주적인 일련의 현상 큰 지진과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과 그리고 별들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만상은 산들과 섬들을 그 자리에서 이동시키는 더 큰 지진으로 결말이 난다. 이 다섯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장면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이러한 현상은 땅에 대한 여호와의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여호와의 날로 일컬어졌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의 모든 선지서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종말적 개념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불충함으로 인해 마침내 땅을 심판하실 때다.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시되, 한 편으로는 악인들을 도륙하시기 위함이요,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 충성한 자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여호와의 날은 그 특성상 두려운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 것은 통상적으로 우주적 격변, 땅의 파멸 그리고 파괴와 연관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다(예를 들면, 욜 2:30-31암 8:8-9)요한이 사용한 언어는 여호와의 날과 관련한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케 하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사 13:10, 13).
이와 같이 요한은 여섯째 인을 떼는 장면을 묘사할 때 여호와의 날에 대한 구약의 익숙한 표현을 사용한다.

 여섯째 인을 뗄 때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격변의 용어는 재림과 관련하여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과 거의 동일하다. 큰 환난 직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 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이 우주적 현상들 직후에, 재림의 징조가 나타나고 성도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으는 일이 시작될 것이다.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세상 끝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와 여섯째 인을 뗄 때의 장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비록 여섯째 인을 뗄 때의 언어가 구약에서 가져온 것이라 할지라도, 본문의 그 어떤 것도 이 징조들이 상징적으로 의도되었다는 암시는 없다. 오히려, 본문에서 ‘같이', 혹은 ‘처럼’(헬. 호스 hōs)이라는 단어의 반복적인 사용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 같다.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의 과실같이 떨어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파피루스 두루마리)같이 찢어진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실제적인 사건에 대한 상징적 유사성을 소개하는” 것으로, 실제적인 사건이 상징적인 어떤 것과 비교된다.41) 이것이 의도하고 시사하는 바는 하늘의 이런 징조들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요한계시록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요한계시록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요한에 의하면, 이 우주적 징조들이 나타날 때에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을 것이며,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자신들을 가려주기를 구할 것이며,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창 3:8)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숨기려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본문의 이 곳에서 우리는 재림의 언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재림이 있기 전에 12절에서 언급된 처음 지진보다 더 크고 격렬한 지진이 일어난다(후에 16장 18절에서 언급된 지진과 동일한), 여섯째 인의 장면은 여호와의 날과 관련하여 발한 이사야 예언의 직접 인유다.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사 2:19-21; 2:10 참조).
예수님도 당신의 재림을 묘사하시면서 이 언어를 사용하셨다(마 24:29), 그분은 이 초반의 사건들이 있은 후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실 것이며,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마 24:30; 눅 23:30 참조).

 그러므로 여섯째 인의 장면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로 묘사된 재림을 기술한다. 재림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고 그분의 신실한 백성을 옹호하기 위해 개입하실 때 일어날 사건이다. 제단 밑에 있는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부르짖는다. 그들의 박해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암 4:12 참조).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그의 백성의 원수들을 바야흐로 심판하려 하신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 인간 사회의 각계 각층, 즉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 등이 언급되어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장 18절의 장면은, 하늘의 청소부들이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 장면은 매우 의미 심장한 수사학적 질문으로 끝난다. 누가 능히 서리요? 이 질문은 말라기가 던졌던 질문을 상기시킨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 3:2)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자들은 바로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재림과 그것에 수반된 사건들이 악인들을 두렵게 하는 반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 다음의 약속을 붙들 수 있음을 확증한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사 54:10) 선지자 나훔이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는 질문을 하였을 때, 그는 명료한 답을 얻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6-7) 미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소망이 바로 이 곳에 있다. 요한계시록 7장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일곱째 인의 개봉 (8: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8: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고요하더니.
 일곱째 인의 개봉 장면에 나타난 고요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42) 그러나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고요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8:3-4)43) 또 다른 이들은 이 고요는 태초의 고요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창세기 1장 2절에서 만물은 암흑천지였고 고요하였다. 유대인의 묵시문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그러셨던 것처럼 이 지구를 고요속에 들어가게 하신다. “세계가,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일주일간 원시의 고요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44) 또 다른 이들에 의하면, 악인들에게 바야흐로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고 놀란 우주의 고요다(합 2:20 참조).45)

 구약의 어떤 본문들은 요한계시록 8장 1절의 고요의 가능한 의미에 대해 빛을 던져준다. 하박국(2:20)과 스바냐(1:7) 및 스가랴(2:13)의 예언들에서, 땅의 거민들은 성전으로부터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침묵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하나님의 임박한 행동을 예상하는 것은 분위기를 사로잡고, 또한 선지자가 호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여호와께서 땅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거룩한 처소를 떠날 준비를 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도착은 악인들을 무서운 절망으로 몰아갈 것이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은 초기와 후기의 유대인 저서들에서 언급된 진술들을 소개한다. 거기에는 악인들을 심판해 달라는 성도들의 기도가 들려지고 그 응답을 위하여 하늘에 고요가 있다.46) 배티스톤(Joseph J. Battistone)이 말하듯이, “요한은 고요와 심판과 주의 강림이라는 주제를 취하여 하늘의 묵시에 근거하여 자기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땅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계시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처소를 떠나” 땅의 거민들에게 의로운 심판을 하기 위해 “땅으로 향하실 때” 하늘이 어떤 모습을 띄게 될 것인지를 묘사한다.47)
반시 동안쯤.
 반시 동안의 의미는 알기 어렵다. 분명히 그것은 명시되지 않은 매우 짧은 기간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주해)
 일곱째 인을 뗄 때,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했다. 비록 그 일이 분명히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일지라도, 고요함의 효력은 아래로 땅에까지 미친다. 이 양상은 일곱 인들을 뗄 때의 문 맥과 잘 어울린다. 이 고요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파멸의 폭풍 후에 있을 고요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48) 말 탄 자들은 그들의 일을 마쳤다. 즉,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인치는 일이 완성되었다. 바람은 그쳤고(계 7:1-3), 큰 환난은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는 응답되었다(계 6:9-11 참조). 반역한 인류에게 집행될 최후의 심판에 비춰 하늘은 고요하다. 마지막 일곱 재앙은 그것의 전조이며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계 15-16장 참조), 요한 당시의 유대인들은 첫 창조 이전의 고요에 상응할 고요가 새 창조 전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49)

 참으로 이 고요는 극적인 멈춤으로서, 이것은 바야흐로 땅에 집행되려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더욱 인상 깊게 한다. 요한계시록 6장 16-17절은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 다음에 재림이 뒤따를 것임을 가리킨다. 이 고요는 천년기를 가리키거나(영원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짧은 기간),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공의를 집행하시고 새 세상을 창조하실 때인 천년기 후의 기간을 가리킬 수 있다. 이 고요는 심판이 바야흐로 집행되려고 하며, 온 우주가 평화롭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50)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곧 안식을 얻을 것이다(계 7:14-17 참조).

 더 넓은 의미에서, 이 고요는 영원한 평화의 후속 기간에까지 미친다.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널리널리 퍼져나갈 때, 온 우주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 후에 이 영원한 평화를 누릴 것이다.
6장 9~17절; 8장 1절 뒤돌아보기 (6:9-17; 8:1)
 네 말 탄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한 자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들을 상징한다. 반면, 다섯째 인의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주요 주제처럼 보이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당면하는 상황을 소개한다.51) 그 장면은 두 그룹의 백성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데, 곧 핍박하는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임을 당한 신실한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6:10)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을 부르짖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반응하고 개입하신다.

 네 말 탄 자는 특별히 첫 천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복음에 불성실했던 자들에 대한 여러 심판을 상징할 수 있다. 반면,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폴린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기사들에게서 암시되었던 박해의 결과, 특히 둘째 기사에 의한 박해를 본다. 그러므로 다섯째 인은 네 기사보다 시간상 더 후의 것을 대표한다. ‘언제까지’라는 구절이 다니엘 7장 21, 25절; 12장 6-7절에서 중세의 대 환난에 적용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6장 10절은 그 동일한 시기의 순교자들이 항의하는 부르짖음을 적절히 대표한다.”52) 여섯째 인은 우리를 세상 역사의 종말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할 다가오는 심판을 묘사한다. 그 때 이들은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6:17) 하며 공포로 울부짖는다.

 그 날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 맞은 백성이라고 하면서, 7장은 위의 질문에 답한다. 또한 그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 위에 쏟아질 최후의 심판과 땅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치는 일이 완성되기까지는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7:3), 이것은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에게 주신, 그들의 동료 종들도 함께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응답과 상응한다. 7장의 나머지 부분은 일곱째 인의 고요가 그 특징이 된 천년기와 그 후속 기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은 옹호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안식을 찾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어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8장 2-5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통당하는 백성의 기도를 듣고 계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은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리 멀지 않다. 나는 나의 거룩한 백성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이미 심판하고 있다.” 일곱 나팔을 부는 것과 제단 밑에 있는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곧 네 천사들에게 주신 명령,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계 7:3)는 명령과는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치는 일이 완성될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개시될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2절은 신원받은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돌릴 그 날로 이끌어간다. 이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이유는 그분이 “당신의 종들의 피에 대하여 복수하”셨고, 또한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다(계 16:5-7 참조).

 제단 밑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오, 주여 언제까지...”라는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중 끊이지 않고 부르짖는 그 외침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신 것같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같은 일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께서 그 길을 밟고 지나셨다는 사실에서 여전히 위로를 찾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죽기까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될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 할 것이다. 존 폴린의 말을 들어보자.

교회들을 호위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계 1~3장)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계 4~5장), 당신의 백성이 고통당하거나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세상을 홀로 걷도록 강요받을 때에라도, 그분은 그들을 아시고 돌보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이 요한계시록의 종말 묵시 속에 있는 이상한 이미지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다.
6장의 인들은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확실히 묘사한다.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혹시 그들의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종종 의아해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영광과 화려함은 복음의 반대자들과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늘에서 인들이 개봉될 때, 지상 역사와 경험의 냉혹한 현실들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이 현실들이 어린양의 통제하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어린양은 이미 통치하고 계시며(계 5장), 또한 그분의 완전한 왕국은 곧 완성될 것이다(계 11:15-18).53)
요한계시록 6-7장은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 이 땅에 살며 시련과 고통을 겪는 하나님의 압제받는 백성에게 지속적이며 강력한 기별을 보낸다. 데이비드 마샬(David Marshall)이 말하듯이, “요한계시록은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삶을 액면 그대로 그린다. 그러나 또한 그 현실 속에서 희망을 준다.”54) 비록 바람이 기괴하게 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 와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늘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는 확고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관할하신다. 약 2천 년 전에 주어진 약속은 여전히 확고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註) ——————
1. Paulien, “The Seven Seals,”223–224. 
2. Charles, 1:160; Caird, 122;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4; Morris, 102. 
3. Ladd, 97. 
4. Johnson, 473. 
5. Ladd, 98. 
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8. 
7. Paulien, “The Seven Seals,” 229. 
8. Ladd, 98. 
9. Paulien, “The Seven Seals,” 229. 
10. 상게서, 230.
11. Charles, 1:166. 
12. Thomas, Revelation 1-7, 422. 
13. Ladd, 100. 
14. Mounce, 155. 
15. Ladd, 101. 
16. Paulien, Bible Explorer 3.3. 
17. J. M. Ford, 108. 
18. 바클리도 이 사실을 지적한다(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9). 
19. 상동. 
20.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Paulien, “The Seven Seals,” 233-234를 참조하라. 
21.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75.
22. 바벨론 탈무드 Shabbath 1526 (Epstein, 2/2:780) 참조; J. M. Ford, 111을 보라. 
23. Mounce, 158(그는 이 구절이 순교자들 자신들의 증언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Gerhard Pfandl, “The Remnant Church and the Spirit of Prophecy,”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313: Hans K.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of the Bible (Sarasota, FL: First Impressions, 1997), 283–26. 
24. H. Strathmann, “martus, et al.”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4:501-502에서 스트라트만이 말했듯이.
25. Aune, Revelation 6-16, 411; 참조 Beckwith, 527. 
26. 1 Enoch 47:4(Charlesworth, 1:35). 
27. 4 Ezra 4:35-36(Charlesworth, 1:531). 
28. 2 Barch 23:4-5a(Charlesworth, 1:629). 
29. Ladd, 106. 
30.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1. 
31. Joel N. Musvosvi, Vengeance in the Apocalypse, Andrews University Seminary Doctoral Dissertation Series 17(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1993), 232. 
32. Fiorenza, Revelation, 64. 
33. 4 Ezra 4:35a(Charlesworth, 1:531). 
3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4. 
35. J. M. Ford, 111. 
36. Testament of Moses 10:3-7(Charlesworth, 1:932); 2 Baruch 70:8 (Charlesworth, 1:645). 
37. Paulien, “The Seven Seals.”236;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라론델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책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40-141을 보라.
38.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79 참조. 
39. 상게서, 참조 
40. 상게서, 5:502. 
41. Paulien, “The Seven Seals,”237. 
42. 다양한 견해의 목록을 보려면, Aune, Revelation 6-16, 507-508을 참조하라. 
43. Charles, 1:223-22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40-41; J. M. Ford, 130; Morris, 116; Caird, 106-107;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70–83. 
44. 4 Ezra 7:30(Charlesworth, 1:537). 
45. Morris, 117; Ladd, 122-123; Mounce, 178-179; Beale, 446-452. 
46.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71-83; 그는 Charles(1:223-224)의 책에서 도움을 입었다고 했다. Beale도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451-452). 
47. Joseph J. Battistone, God's Church in a Hostile World(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89), 108. 
48. Paulien, “The Seven Seals,” 237. 
49. 예를 들어 4 Ezra 6:39; 7:29~31 참조. 
50. Paulien, “The Seven Seals,” 237. 
51. J. P. Heil, “The Fifth Seal (계 6:9-11) as a Key to the Book of Revelation,” Biblica 74 (1993): 220-243 참조. 
52. Paulien, “The Seven Seals,”235-236. 
53. 상게서, 238-239. 54. Marshall,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