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4:1~37)
 다니엘 4장은 주로 1인칭 단수로 기록된 느부갓네살 왕의 편지이다. 그것은 바벨론에 있는 왕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두 주재 사이의 또 다른 투쟁에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다. 이 장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서 공적으로 읽혀지도록 의도된 공개편지였다. 그것은 왕의 사적 경험에서 유래된 긴 고백을 포함하며, 책의 앞부분에 이미 나왔던 찬미의 양식으로 솜씨 있게 지어진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글을 올렸다.

 이 장에 나오는 주요 사건은 연대가 나와 있지 않으나, 왕 자신의 말로 묘사된 이야기의 문맥은 대부분 바벨론 도시에 집중된 큰 건축 계획으로 특징지워진, 왕의 통치의 두 번째 국면 “건설자 느부갓네살”의 시기를 말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긴 통치의 마지막 해들에 계속되어 야한다는 것에 동의한다.1)

 성경 학자들에게 흥미를 끄는 여러 사건들이 이 장과 앞 장 사이에 발생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두 번째 침공에서 예루살렘은 다시 포위되었다. 공식적인 바빌로니아의 기록은, 특별히 유다 땅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 사건에 대하여 말한다. “제칠 년, 기스래월에, 악갓 왕(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군대들을 점호하였고, 하티 땅(Hatti-land)으로 진군해 들어가서, 유다 도시들을 향해 진을 쳤고(즉, 에워쌌고) 아달월 둘째 날에 그는 도시를 공격하여 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거기에 자신이 선택한(문자적으로 마음에 드는) 왕을 임명하였고, 많은 조공을 받아 (그것들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2)

 세 번째 바빌로니아의 군사 원정에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불로 멸망되었다. 유다에서는 이들 사건을 큰 비극으로 보았다. 그것들이 애가서에서 회상되었다.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국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무릇 지나가는 자가 너를 향하여 다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성이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되어 놓여 있는 동안에, 바벨론 성은 완벽히 건설되고 있었다. 그 성의 건축자, 느부갓네살 왕은, 건축 공사에 사용되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수천의 벽돌로 인하여 매우 우쭐 하였다. 그의 자랑하는 말 가운데, 왕은 그의 “궁전을 나의 왕권의 자리로, 나의 백성의 찬사를 위한 건물로, 나라를 위한 연합의 장소”3) 로 묘사한다. 이 진술은,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사 13:19)로서 바벨론에 대해 말하는, 성경 예언서에 나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이들 자료에서 모아진 증거 외에, 느부갓네살 왕 마지막 30년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제4장의 이야기는 이 경험의 끝에,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가 전에 도전했던 거룩한 존재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번 이상, 이 왕을 “주의 종”으로 부른 것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렘 27:6; 25:9; 43:10 참조).

 이 장 가운데, 두 찬미가 왕의 이야기를 가운데 두고 괄호로 묶고 있는데 하나는 시작부분에 나오고 또 하나는 끝 부분에 이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이야기와 찬미는 모두 1인칭과 3인칭 형식의 기사를 결합한다. 아래에 제시된 구조는4) 영어 성경의 본문에 기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히브리 성경은 다니엘 4장 1~3절3장의 결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1. 왕의 찬미(4:1~3)

 2. 꿈 [1 인칭 기사] (4:4~18)

 3. 해석 [3 인칭 기사] (4:19~27)

 4. 꿈의 성취 [3 인칭 기사] (4:28~33)

 5. 왕의 찬양 [1 인칭 기사] (4:34~37)

 다니엘의 꿈에 대한 설명과 왕이 그의 교만을 압박받는 자들에 대한 자비로 바꿀 것에 대한 그의 청원이 이 장의 핵심이다. 히브리 성경 가운데, 10b~17절은 시가로 기록되었다.
왕의 찬양 (4:1~3)
 이 장은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게끔 모든 곳에서 선포되도록 의도된 찬미로 시작한다.
(어구(語句) 해설)
다니엘 4: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느부갓네살 왕
 느부갓네살을 “바벨론 왕”으로 부른, 다니엘 1장 1절에 관한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고대 편지 저술 양식”에 따르면, 저자의 이름과 칭호는 먼저 언급된다.5)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
 다니엘 3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이 목록은 보편성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이 장과 앞 장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중 하나이다. 그 수신자들은 느부갓네살 당시에 알려진 온 세계를 포함한다. 같은 개념이 아래 이어진 대구되는 행에 의해 강화된다. 이러한 형태는 “모든 종족적이며, 정치적이고, 언어적인 구성요소에 대한 암시로서 다니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3:4, 7, 29참조).6)
천하에
 문자적으로, 본문은 “모든 땅에서” 라는 의미의 ‘베콜—아라’이다. 문맥 가운데, 그것은 “온 제국에서”를 의미한다. 유사한 보편성의 개념이 “땅끝 까지”(시 2:8; 72:8)와 “무궁하며”(사 9:7)라는 성경적인 표현 가운데 발견된다. 이 장에서 “땅”에 대한 단어가 8번 나오는 데 그 중에,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하는 하늘에 대한 단어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네 번은 느부갓네살의 통치와 관련된 것이다(4:10, 11, 20, 22). 이 편지가, 국제적인 거래와 외교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의 보편적인 성격을 말한다.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로다
 “너희 번영이 더해지기를!”이라는 표현인 ‘쉘라메콘 이스게’는 고대 근동에서 왕의 선포 가운데 나오는 공식적인 인사 형태이다. 그것은 또한 다니엘 6장 25절에서 발견된다. 원문 가운데 나오는 첫 번째 단어는, 그것이 건강과 물질적이며 영적인 번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 라는 단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공통적인 셈족어로 사용되는, 아람어 ‘쉘람’(히브리어 샬롬)이다. 같은 단어가 에스라 7장 12절에서 에스라에게 보낸 아닥사스다의 편지의 서론에서 언급된다.
다니엘 4: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그 이적이여
 “징조와 기사”를 말하는 단어인 아타이야 웨팀하이야는, 다니엘 6장 27절에서도 사용되었다. 함께 사용될 때 “놀라운 이적”으로 번역되는 단일 개념(중첩어)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대등한 히브리 단어의 조합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하면서,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온다(출 7:3; 신 4:34; 7:19; 13:2; 시 135:9; 사 8:18).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 3장 2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내게
 문자적으로 본문은 “나와 함께”라는 뜻의 임니이다.
다니엘 4: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절은 대구법 열로 훌륭한 시다. 대구되는 단어에는, 크도다와 능하도다; 이적과 기사, 나라와 권병, 영원한과 대대에 이르리로다 등이 있다. 문자적으로 그 구절은 “그의 징조, 그것들이 얼마나 큰 가! 그의 기사, 그것들이 얼마나 능한가” 라는 뜻이다.
능하도다
 “강하게, 능하게 되다”라는 의미의 어근 타카프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에 적용된다. 4장에서 다른 네 번의 경우(11, 20, 22, 30)에는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업적에 적용된다.
영원한 나라요
 다니엘 2장 4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왕국이 영원하다라는 진술은 느부갓네살이 인정하기를 거부한 앞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진리이다.
권병Dominion은
 “권병”을 뜻하는 명사 ‘숄탄’ (“통치자”를 뜻하는 숄탄 참죄)은, “다스릴 권위”를 함축한다. 그것은 “왕국”에 해당하는 명사 ‘말쿠’ 와 대구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용어는 4장에서 매우 중요하며 또한 7장의 이상의 핵심 용어이다. “통치”“왕국”이라는 단어는 이야기의 끝에 나오며(34절), 그와 같이 4장에서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주해)
다니엘 4: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1인칭 단수로 기록하면서, 이 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앞 이야기에서, 세 히브리인들에게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자가 누구뇨?”(3:15)라고 함으로, 감히 하나님께 도전했던 왕에 의하여 능력 있는 방식으로 선포된 개인적인 증언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명령을 내렸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증거한다. 한 때는 그의 최측근 관원들을 불신했던 두려워하며 분노한 통치자는 “이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 되었다.... 구절들을 읽어가면서, 탈무드의 랍비는 소리쳤다. 왕이 모든 노래와 찬양을 다윗으로부터 뺏았았다”

 이 장을 시작하는 찬미는 2장 20~23절에 나오는 다니엘의 찬미의 반향이다. 찬미는 강한 대구법으로 되어있고, 보편성의 개념을 “모든” 또는 “온” 같은 용어들로 가득차 있다. 이 보편성의 개념은 이 장 가운데 국제적인 외교와 거래를 위한 제국의 언어로 사용된 아람어의 존재로 더욱 강화된다. 비록 이런 자기 인식의 형태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특징이었지만, 다양성의 개념이 그것과 밀접하게 묶여 있으며, 그것은 여기에서 백성과 나라들과 방언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통하여 표현된다(3:4, 7, 29 참조).

 어떤 저술가들은 천하라는 표현을 과장법으로 보며,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장소와 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기도에서 솔로몬 왕은 “바다에서 바다까지와 강에서 부터 땅 끝까지”(시 72:8) 다스리기를 구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서론적 담화를 공식적인 인사인,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끝낸다. 이 인사는 잘 알려지고 다양한 측면이 있는 “평화” 라는 단어 쉘람을 포함한다. 여기서 그것은 함축적으로 “번영”으로 번역된다.
다니엘 4: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다니엘 4: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어떤 분으로 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왕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탈출에는 유사한 신성의 개입이 동반되었다. 신명기 6장 22절에는,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셨다고 말한다. 왕의 두려움, 권능 교만의 결합은 그러한 반응들을 찬양, 기쁨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떤 분에 의하여 적절히 다루어졌다.

 이 구절의 핵심 표현은 내게이다.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께 대한 왕의 경험을 현재의 것과 대조시킨다. 그가 전에는 오직 하나님께 대하여 다니엘로부터 듣고 다른 사람의 생애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보았으나, 이번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대면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었다. 이 거룩한 권능의 밀접한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는 경외심과 찬양 가운데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압도당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일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가 어떻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거의 놀라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앞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데 실패 했던 핵심적인 교훈, 하나님의 왕국과 통치만이 영원하다는 결론으로 인도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과 통치사이의 대구법은 시편 145편 13절에서도 발견된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꿈 (4:4~18)
 이제 왕은, 수수께끼와 같은 꿈에 대한 이야기와 다니엘이 그것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와 함께, 1인칭 단수로 그의 꿈에 대한 설명을 진행한다.
(어구(語句) 해설)
다니엘 4: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나 느부갓네살
 이 장에서 1인칭 대명사 나, ‘아나’의 사용은 이야기에 권위를 더해준다. 그것은 또한 느부갓네살의 자기—중심적인 언어를 보여 준다. 왕이 담화를, 다만 “나” 에 왕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같은 방식으로 끝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와 같이 두 단어는 왕의 담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 나옴으로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덧붙여서 이 절과 다음 절은 집과 궁전, 형상과 이상 등과 같은 단어와 함께 몇 경우의 대구법을 포함한다.
편히 있으며
 쉘레라는 단어는 “휴식을 취하다” 또는 염려로부터 자유롭다를 의미한다(시 73:12; 122:6; 렘 49:31). 같은 단어가 다니엘 6장 4절에서 태만의 의미로 사용된다(스 4:22; 6:9 참조).
평강할 때
 “싹이 나다, 번식하다”를 의미하는 용어 ‘라난’은 자주 푸른 나무(신 12:2; 왕상 14:23; 사 57:5; 렘 11:6; 호 14:8)과 식물처럼 왕성한 사람(시 37:35; 52:8)들에 대해 사용된다. 이 절은 시편 92편 12~14절에서와 같이 이 용어를 집이라는 단어와 결합시킨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이야기 속에서 이 용어의 사용은 한 나무가 크게 차지한 꿈을 예기하게 한다.
다니엘 4: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두려워하였으되
 왕은, 독자들의 긴장감을 고무시키면서, 그가 꿈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그것에 대한 그의 반응을 묘사한다. 신상의 갑작스러운 파멸로 인해 느부갓네살의 두려움을 일으킨 첫 번째 꿈에서와 같이 여기서 나무의 베임은 왕을 놀라게 하였다.
다니엘 4: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박사
 다니엘 2장 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이 절에 나오는 다양한 요소들이 독자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이 절과 다음 절에 나오는 박사들의 목록을 2장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술사에 대한 애굽 용어인 ‘하르투마이야’를 포함하여, 둘 모두의 구절에 공통적인 것이 분명하다.
불러다가
 같은 단어의 사용에 관해서는, 다니엘 2장 24, 25절를 참조하라.
다니엘 4: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술사Astrologers
 원문은 “갈대아인들”을 나타내는 단어 ‘카스다예’이다. 다니엘 2장 2절에 대한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갈대아인들은 신바벨론의 지배계급이었고, 다니엘 2장 48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그들의 지도자였다. 어떤 해석가들은 만일 박사들이 꿈의 의미를 알았을지라도 그들은 꿈의 내용으로 인해 그것을 말하기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니엘 4: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그 후에Finally
 원어 ‘웨아드 오호렌’은 문자적으로 “마침내”라는 의미다. 어떤 학자들은 왕이 고의적으로 다니엘을 회피했다고 제시한다. “궁지에 몰린, 느부갓네살은 이제 히브리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그 어떤 거룩한 기원을 갖고 있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진리, 기대하지 않았던 진리가 그에게 타격을 가했다.”8)
다니엘
 다니엘 1장 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여기서 왕은 다니엘의 이름—그의 히브리 이름과 바빌로니아 이름—을 모두 언급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나머지 박사들과는 다른 계급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방법일 수 있다.
벨드사살
 다니엘 1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를 통하여, 다니엘은 그의 히브리 이름보다 바빌로니아 이름으로 알려졌다는 가정은 매우 논리적이다.
내 신
 이 구절에서 내 신이라는 말을 무심코 입 밖에 냄으로, “왕은 다니엘의 능력을 그의 바벨론 신에게 돌리려고 했다”9)는 것이 제시되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과 같이, 벨이라고 알려진 마루, 말둑 신을 경배하였다(사 46:1; 렘 50:2; 51:44). 어떤 학자들은 다니엘의 바빌로니아 이름인 벨드사살과 이 절에서 벨신의 이름과의 어원적 연결은 그러나 해석가들은 자신의 견해를 그것에 부여하기보다는 본문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거룩한 신들의 영
 이 장의 세 곳 이상에서 왕은 다니엘이 그 안에 특히 “거룩한 신들의 영”인, ‘루악엘라힌—카디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4:8, 9, 18).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이 매우 영적인 것을 묘사하는 당대의 관용어를 반영한다(단 5:11, 14 참조). “거룩한 신들”에 대한 마지막 두 단어인 ‘엘라힌 카디쉰’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여호수아 24장 29절에 사용되었다.

 어떤 해석가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읽는데 왜냐하면 “신들”에 관한 아람어 복수 명사 ‘엘라힌’은 히브리 이름인 ‘엘로힘’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 그 말은 “유대인이 아닌 군주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복수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11) 어떤 이교적 용어들은 성경의 독자들을 혼란시킬수 있으나, 그것들이 사용된 것은 우리에게 전달된 이 이야기들의 상황이 보여진 곳이 바벨론이나 메대 페르시아 같은 곳이었음을 지지한다.

 바벨론에서의 다니엘의 명성은 애굽에서의 요셉의 명성과 같았다. 요셉은 “신에 감동한 사람”(창 41:38)으로 알려졌다.
다니엘 4: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박수장
 다니엘의 권위와 지위를 묘사하는 “박수장”이라는 칭호 ‘라브 하르투마이야’는, 다니엘 2장 48절에서 사용된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나 비슷한 것이다. 이 절에서 왕이 사용한 이 칭호는 더욱 긴 것을 생략한 형태이며 2장에서 사용된 것보다 더 공식적인 것일 수 있다. 또한 이와 “이방” 용어의 존재는 다니엘서 이야기가 원래 바빌로니아 배경에서 나온 사실의 진정성을 더해준다.
거룩한 신들의 영
 다니엘 4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은밀한 것
 다니엘 2장 1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에스겔 28장 3절에 나오는 단어와 비교하라.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우냐?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냐?”
내가 꿈에 본
 이 말은, 왕이 박사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도록 요구한, 제2장의 이야기와 대조 되어있다.
다니엘 4: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히브리 성경(Biblia Hebraica Sttuttgartensia) 에서, 10b~17절은 시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본즉
 이것은 책의 후반부에서 이상을 보는 자가 그 이상을 소개하는 표준적인 양식이다(7:2, 6, 7 등),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에서, 그는 “큰 신상을 보”았고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선” 것을 보았다. (2:31).
한 나무
 “한 나무”라는 명사 ‘일란’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성경에서, 나무는 의인(시 1:3)이나 매우 교만한 사람(사 2:12, 13; 10:34)에 관한 상징이다. 예를 들어, 키가 큰 나무는 자주 교만한 인간의 상징이다(시 37:34, 35; 사 2:12~19; 14:4~20; 겔 17:3, 4; 31:39; 슥 11:2). 이와 반면에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하나님 왕국의 진행을 나무의 성장에 비유하셨다(눅 13:19).
땅의 중앙에
 이 나무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생명나무가 에덴 “동산 가운데”(창 2:9)에 위치 했음을 상기시킨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바벨론이 온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비슷한 방법으로, 후기 역사에서 로마는 이러한 중심이 된다고 여겼다.
높더니
 “크다, 높다”는 단어 삿기는 또한 2장의 신상을 묘사한 장면에도 사용되었다. 이 나무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의 고가 하늘까지 미치는 것으로 확인된 어떤 세계적 나무였다(11절).
다니엘 4: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다니엘 4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크다”라는 뜻의 라브와 “힘세다, 강하다”라는 뜻의 탁쾨프 등 두 형용사는 3절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한다. 여기서 “자라다” 라고 번역된 아람어 ‘라브’다니엘 2장 31절에서 신상을 묘사하였다.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꼭대기”를 나타내는 아람어 ‘룸’은 앞 절에서 “고”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상징적으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 그것의 높이는 바빌로니아의 과대망상증적 언어를 우주적으로 가정한다. 이 본문은 성경의 독자로 하여금 시날 평지에서 건축자들에 의해 수행된 야심적인 계획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창 11:4; cf. 사 14:13, 14; 겔 31:3) 하기를 원했다. 7장8장의 작은 뿔은 같은 야망으로 특징지어지며, 다니엘 11장 36절의 경멸할 만한 왕도 마찬가지이다.
땅 끝
 이 표현은 다음 절에서 더 상세히 설명된 세계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비유일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땅끝은 자주 바벨론 통치의 범위와 연결된다.
다니엘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그늘에 있으며
 와디 브리사(Wadi Brisa)에서 발견된 느부갓네살의 비문에는 비슷한 말이 나와 있다. “그 영원한 그늘 아래, 나는 모든 백성을 평화로이 모았다.”12)
무릇 혈기 있는 자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종류를 언급한다. 본문은 나무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향력과 권능에 관해 말한다. “나무는 ‘땅 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NRSV ‘온 땅’). 그것은 ‘만민의 식물’을 제공하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었다(11, 12절). 하늘 선고의 내용은 ‘살아 있는 모든 자는’ 누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13)
식물을 얻더라
 본문은 나무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식물을 제공함을 두번 진술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나무의 특징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연관성을 지적한다고 말한다(cf. 창 2:9).
다니엘 4:13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내가...받은 이상
 책의 예언적인 부분에서, 이것들과 비슷한 말들이 통상적으로 이상 가운데 새로운 발전을 소개한다(cf. 7:2, 7, 13).
또 본즉
 다니엘 4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한 거룩한 자
 “순찰자와 한 거룩한 자”를 뜻하는 두 단어 이르 웨카디쉬는 두 사람이 아닌 하늘로부터 온 한 존재를 묘사한다. 두 단어는 중첩되어 있으며 함께 “거룩한 기별자”를 의미한다.

 첫째 용어는 “깨어 있다”는 어근 ‘우르’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이 장 외에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으나(13, 17, 23절), 그것은 후기 유대인 저술에서 널리 사용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를 고대 근동에서 “왕의 눈”으로 알려진 직위에 관련시켰다.

 두 번째 용어는 다니엘(8:13)과 성경의 다른 곳(욥 5:1; 15:15; 슥 14:5)에서 천사를 묘사한다. 이 존재는 하나님 회의의 일원이다(시 89:16, 7). 하나님과의 그 근접성으로 인해, 그도 거룩하다. 그는 결코 주무시지 아니하며 항상 깨어 있다.

 주석가들은 이 사람을 에스겔(겔 1:17, 18) 선지자와 스가랴(1:10; 4:10)가 본 자들의 비교되는 특별한 천사계급의 일원이라고 여겨 왔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이 졸 때, 큰 소리로 깨워야 되는 이방 신들(왕상 18:27)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시 121:4; cf. 시 7:6, 7; 44:23; 59:4; 사 51:9) 참된 하나님과 대조된다. 더욱더 그의 눈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데”까지 미친다.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성경에서 자주 이것들과 비슷한 단어들이 심판 가운데 지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묘사한다. 비슷한 실례가 창세기에서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이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창 11:5).
다니엘 4:14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소리질러 외쳐서
 문자적으로 ‘카레 베하일’은 선포자가 “힘있게 소리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독자로 하여금 다니엘 3장 4절에서 반포하는 자가 왕의 명령을 크게 외치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신약에서 대구는, 두 번째 천사가 “큰 소리”로 기별을 외치는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나온다.
나무를 베고
 이 절에서 발견되는 명령은 복수 형태로 주어진다. 어떤 해석가들은 명령들을 하늘 회의에서 직접 준 것으로 이해한다(사 40:1; 왕상 22:19~22 참조). 하나님에 의한 1인칭 복수 형태의 유사한 사용에 대해서는 창세기 11장 7절“자, 우리가 내려가서...”를 참조하라.
그 열매를 헤치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대적들은 “우리가 그 나무[선지자]와 과실[거룩한 말씀]을 함께 박멸하자”(렘 11:9)고 말하면서 그를 대항하는 계교를 꾸몄다.
다니엘 4: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그러나
 “그러나”에 해당하는 단어 ‘버람’은 아람어에서 강력한 반의 접속사다.
그 뿌리
 많은 번역가들은 “뿌리”에 대한 원어를 번역하는 데 “그루터기(stump)”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잇콰르 샤레쇼히’라는 전 표현의 의미는 땅에 버려지는 “주근(taproot)”이나 “근경(rootstock)”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뿌리를 땅에 남겨두는 행위는 회복의 소망을 전달해 준다(욥 14:7; 사 6:13; 11:1 참조).
철과 놋줄로 동이고
 이들 두 강한 물질로 이루어진 줄은 그것이 더 자라나는 것이나 멸망을 막기 위하여 그루터기를 둘러매는 데 사용되었다고 제시되었다(대하 24:12). 족쇄와 장치가 철과 놋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삿 16:21), 이곳의 동사를 동물이나 (cf. 왕하 7:10 참조) 전쟁 포로(시 149:8 참조)를 묶는 것과 관련시키는 것이 더 낫다. 아람 용어 ‘에수르’는 나무가 “결박됨”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문맥은 왕이 “동물적인 상태 가운데”14) 있게 됨을 말한다. 이 절에서 그 단어는 자주 키가 큰 나무가 한 야생 짐승으로 바뀌는 은유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된다. “나무에서 사람을 표상하는 것으로”15) 의 유사한 변천에 대해서는, 에스겔 31장 18절을 참조하라. 다니엘의 해석이 여기에 언급된 두 금속의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않음에 주의하라(cf. 4:26).
그것으로Let Him
 미완료 상태의 여러 동사들이 권유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있게 하라....”(청유형으로 이해됨)는 이 포고 대상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하늘 이슬
 이 절에 목록으로 나와 있는 모든 준비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주목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16)
그것이 그 분량을 같이하리라Let him live
 문자적으로 본문은 ‘할라케’, “그의 분량이 되게 하라 (let his lot be)”
짐승으로 더불어
 이 말은 느부갓네살이 땅의 짐승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 인간 존재로서 말하는 두 성경 구절(렘 27:5, 6; 단 2:37, 38)과 대조된다. “현재의 구절은 왕의 상태의 풍자적 반전을 포함한다.”17­)
다니엘 4: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설화 가운데 이 시점에서, 은유에 명백한 변천이 있다. 나무는 짐승의 마음을 가진 인간 존재가 된다. 다니엘서 가운데 표상의 섞임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위해서는, 독수리의 날개와 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자 같은 짐승이 나오는, 7장 4절을 참조하라. 비슷하게도 시편 23편에서, 두 다른 은유가 여호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는 먼저 시편 기자의 목자로 묘사되고 그 다음에는 그의 주인으로 말한다.
그 마음은His mind
 문자적으로 본문은 ‘리베’, “그의 마음”이다. 마음은 지성이 위치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후에, 그의 해석 가운데, 다니엘은 왕이 매우 비정상적인 변신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짐승의
 인간 존재를 말하는 ‘아나샤와’, 짐승을 말하는 ‘헤와’, 두 명사는 서로 대조되어 있다.
일곱 때
 다니엘서 가운데 칠이나 칠십이라는 수는 시험이나 심판의 문맥에서 사용된다. 실례를 위해서는, 왕이 풀무를 일곱 배가 뜨겁게 하라는 다니엘 3장 19절과 포로 생활이 칠십 년이 될 것이라 말하는 다니엘 9장 2절을 참조하라(렘 25:11 참조).

 “시기, 기간”을 말하는 아람어 ‘이단’은 어떤 한 기간을 표현할 수 있다(단 2:8; 3:5 참조). 같은 단어가 다니엘 7장 25절12장 7절에서 “년”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절의 문맥에서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그것을 “년”으로 옮긴다. 이것은 칠십인역에 나오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견해이며 요세푸스에 의해 확증되었다. 유명한 유대인 주석가 라시는 건설하는 데 칠년이 걸린, 예루살렘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가 “칠 년” 동안 형벌 받았다고 주장하였다.18)
다니엘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거룩한 자
 두 명사가 함께 복수로 사용된 다니엘 4장 1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라시는 이 경우에 선고에 대한 결정은 “그의 하늘 법정”19) 에서 하나님의 회의의 결과로 이르러 왔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명사의 복수 형태는 이 구절에 기초하여 “거룩한 자는 먼저 위의 가족과 상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20) 고 결론을 내린 탈무드의 현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거룩한 자”에 대한 용어는 하늘 주재의 구성원에 대하여 사용된다(시 89:7; 슥 14:5). 어떤 사람은 순찰자들은 거룩한 회의를 구성하는 존재들이라고 결론 내렸다(욥 1; 2; 렘 23:18).21) 다니엘 4장 24절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선고를 발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
 성경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에 대한 거룩한 칭호 ‘일라야’는 그것이 언급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지적하면서 자주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된다. 그것은 특별히 시편에 나타나며(시 91:1, 9) 또한 누가복음에도 나타난다(1:32, 35, 76).
지극히 천한 자
 “천한 자”라는 뜻의 ‘세팔이’는 다니엘서에서 “낮추는”(4:37) 행위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문맥에서는, “온유”와 비슷한 개념으로 긍정적인 형태의 “낮춤”이 마음에 의도된 것일 수 있다. “지극히 높으신 자”와 그가 높이시는 “지극히 천한 자” 사이에는 분명한 대조가 있다. 이런 형태의 운명의 반전이 여러 성경구절에서 발견된다(삼상 2:8; 욥 5:1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 가운데 그녀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눅 1:52)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다니엘 4:18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나 느부갓네살 왕
 다니엘 4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벨드사살
 다니엘 1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거룩한 신들의 영
 다니엘 4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다니엘 4: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다니엘 4: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1인칭 단수로 가운데 직접화법을 사용한 것은 왕의 자기중심적 모습을 전달해 주지만 이야기에 신뢰성과 권위를 더해준다. 그것은 이 장을 “힘 있는 신앙 고백”22)으로 만든다. 이 이야기 가운데 여러 요소들이 독자로 하여금 2장 가운데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이들 유사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왕의 꿈이 그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단 2:1; 4:5)

 2. 박사들은 왕을 도울 수 없었다(2:10, 11; 4:6, 7)

 3. 다니엘/벨드사살이 왕 앞에 나타난다(2:25; 4:8)

 4. 왕이 다니엘에게 고한다(2:26; 4:9)

 5. 다니엘은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2:27, 30; 4:19)

 6. 왕의 꿈은 “큰” 대상을 포함한다(2:31; 4:11)

 7. 첫째 시나리오는 낙관적이다(2:31~33; 4:10~12)

 8. 둘째 시나리오는 비관적이다(2:34, 35; 4:13~17)

 9. 그 적용은 “오, 왕이여....”로 시작한다(2:36~38; 4:22)

 10. 왕은 결말에서 겸손하게 된다(2:46; 4:31~33)

 11.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2:47; 4:37)


 두 장 사이에 여러 다른 점들 중 가장 뚜렷한 것은, 2장의 시작에 그가 박사들에게 터트린 직접적인 분노와 날카롭게 대조되어 있는,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왕이 휴식 속에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이번에 왕은 공개적으로 꿈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고 인정한다. 2장에서는 그의 큰 두려움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일으켰음을 포함한다.
다니엘 4: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다니엘 4: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다니엘 4: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 4: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책 가운데 두 번째로 박사들이 황제를 돕도록 소환된다. “아마도 바벨론 박사들은 매우 중요한 기구이므로 그것을 건너뛰는 것은 모욕이었다.”23) 그러나 한번 더, 느부갓네살은 개인적으로 그의 꿈을 해석하는 데 무력한 박사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왕은 비록 꿈을 인하여 놀랐지만 침착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박사 다니엘이 주위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히브리인 군주가 하나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언급하는 방법이었다. 이야기의 긴장감은 히브리인 박사가 왕의 질문의 결말에 가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기초된다. 아합 왕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함으로”(왕상 22:8) 미가야 선지자를 무시하려고 했듯이 황제는 의도적으로 다니엘을 회피하려 하였는가?

 바벨론의 박수장 벨드사살로 알려진 다니엘의 역할은 이제 자리를 잘 잡았고 왕은 다니엘이 은밀한 것을 풀 수 있다고 확신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통찰이 그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기인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다니엘의 바빌로니아 이름인, 벨드사살과 연결시킨 자신의 신인 마르둑(벨)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진실로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큰 지혜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24)
다니엘 4: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다니엘 4: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다니엘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첫 번째 꿈에서와 같이 왕은 큰 물체를 보았으나 이번에 그의 관심과 찬탄을 사로잡은 것은 높이 솟은 나무였다. 그 나무는 땅의 중앙에 심겨졌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세계적인 나무”로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나무를 에덴동산 가운데 위치한 생명나무와 비교하였다(창 2:9). 나무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다는 사실은 건축자들이 “하늘에 닿게 하자”(창 11:4)고 건설한 도시와 바벨 탑의 건설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더욱이 나무는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을 위하여 그늘식물을 제공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나무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145편 15, 16절에는 모든 그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말한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오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다니엘 4:13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다니엘 4:14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다니엘 4: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다니엘 4: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왕의 첫 번째 꿈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이 꿈의 후반부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지상 밖에서 오는 기대하지 않은 세력이 거대한 물체의 기초를 친다. 멸망을 선언하는 선고가 거룩한 기별자 또는 “거룩한 순찰자”라고 부르는 사람에 의하여 선언된다. 성경의 문맥에서, 이 용어는 수호천사의 특별 계급의 일원이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언급할 수 있다(시 121:4). 욥기 7장 20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로 불렀다.

 본문은 이 존재가 하늘로부터 내려 왔음을 특별히 말한다. 성경에서 이 말은 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지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술적인 표현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 21). 더욱이 다니엘 4장 24절은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기별자에 의해 선포된 선고의 근원임을 확언한다.

 그 나무는 잘려지게 되었고 그 가지와 잎사귀 열매들은 헤치게 되었다. 결정론은 성경의 묵시적 예언의 특징이다. 하지만 주요 차이점은 이 꿈 가운데서 그 멸망이 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의 뿌리는 보존되었는데, 이것은 장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사항이다. 욥은 말하였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고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가운데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 같거니와”
(욥 14:7~9).


 15절에서, 해설자는 “슬며시 나무의 운명의 대한 상징적 이상(왕을 나타냄)에서 느부갓네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더 현실적인 묘사로 나아간다. 아람어에서, ‘나무’로 번역된 명사는 남성이며, 그러므로 ‘그것(it)’‘그것의(its)’로부터 ‘그(him)’‘그의(his)’로 전환은 분명하지 않다.”25)

 그 변천은 동물이나 전쟁 포로를 묶는 데 사용되는 철과 놋의 사용에 대한 묘사 가운데 나온다. 시편 149편 8, 9절은 거룩한 용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희 왕들을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니


 짐승의 마음을 가진 나무/사람은 일곱 때/ 시기 아마도 칠 년을 야생의 동물들과 식물들 사이에 살게 될 것이다
다니엘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4:18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이 꿈의 목적은, 이 장에서 세 곳 이상에서 진술되는데, 하나님이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것(단 4:17, 25, 32)을 보여 주려는데 있었다. 이 말들은 소위 “히브리 성경의 불멸의 선포 중 하나” 26) 라고 불리는 것을 구성한다. 그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다니엘이 왕에게 일찍이 한 말을 기억나게 한다.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을 왕에게 주셨고(단 2:37).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주제는 다니엘 1~6장에 모든 이야기를 통하여 흐르는 주홍실이며 그것들을 다니엘 7~12장의 묵시적 이야기 가운데 가능한 가장 강력한 형태로 제시되는, 같은 주제를 하나로 묶는다”27) 고 잘표현 되었다. 유사한 진술이 책 전체에 퍼져 있는, 거룩한 심판의 실재적 주제에 대하여 진술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주 인간을 놀라게 한다. 마리아의 말 가운데 그는 “권세 있는 자를 그 가운데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눅 1:52). 그녀의 말은 시편 113편 7, 8절의 진술에 기초되었다.


 그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이 말들의 성취를 다니엘의 생애와 그의 바벨론에서의 번영을 통해서 보았다. 그것이 이 장의 담화의 시작과 끝에서 그가 다니엘이 거룩한 신들의 영이 충만함으로 그의 꿈을 해석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고 말하는 이유이다.
해석 (4:19~27)
 다니엘은 요약하는 형태로 왕의 꿈을 반복하고 이어서, 강력한 경고로 결론지으면서, 그 의미를 말한다.
(어구(語句) 해설)
다니엘 4: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벨드사살
 다니엘 1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놀라 벙벙하며
 “당황하다”라는 단어 ‘에쉬토맘’은 히브리어 형태로, 다니엘 8장 27절에 나오는 이상의 끝에 다니엘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거기서 그것은 “혼절하여”로 번역되었다.
얼마동안
 이 휴지(休止)의 길이를 정확하게 결정 지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원어 ‘샤아’가 순간이나 한 시간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는, 그 단어가 “동시에”로 번역된, 이 장의 33절에서도 사용된다.
미워하는 자에게...대적에게
 두 단어는 강한 대구적인 관계와 함께 두 행 속에 나온다. 이 말들은 앗수르와 바빌로니아의 꿈 해석가들이 꿈의 악한 영향을 쫓아내기 위하여 거룩한 의식을 행할 때 사용 한 것들과 닮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맥은 다니엘은 거룩한 심판을 되돌리기 위하여 윤리적인 수단 도덕적인 회심과 같은 것을 제안하는 성경의 선지자와 같이 묘사한다. “이 점에서 다니엘은 바빌로니아 마술사보다는 히브리 선지자 같은 기능을 한다.”28)
다니엘 4: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나무
 다니엘 4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다니엘 4장 3절4장 1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다니엘 4: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나무라는 단어 ‘일란’이 이 절의 아람어 본문에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다니엘과 동시대 인물인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나라(겔 17:22~44)와 애굽의 통치자(겔 31:1~18)를 나무로 비유했다.
창대하사
 다니엘 4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크다”는 뜻의 어근 ‘라브’는 두 번은 동사로 한 번은 명사로 세 차례 이상 사용된다.
다니엘 4: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한 거룩한 자
 다니엘 4장 1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철과 놋줄로 동이고
 다니엘 4장 15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일곱 때
 다니엘 4장 1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다니엘 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
 다니엘의 해석에 의하면 거룩한 기별자에 의하여 선포된 선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된다(13, 17절).
내 주 왕에게
 다니엘은 왕을 이미 “나의 주”에 라는 의미의 단어 ‘마리’로 언급하였다. 다니엘 2장 47절에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왕들의 주재”로 불렀다. 거룩한 선포가 왕을 향해 발해진 엄중한 심판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에 대한 다니엘 태도는 매우 긍정적이다.
다니엘 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소처럼 풀을 먹으며
 풀을 뜯어먹는 동물의 광경은 때때로 성경에서 평화로운 초원의 배경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왕의 낮아짐을 묘사한다. 사람이 자신을 소처럼 생각하는 망상은 보안스로피(boanthropy)라고, 이리의 존재처럼 되는 망상은 리칸스로피(lycanthropy)라고 한다. 역사는 “짐승 대신 초인(super man)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왕이나 평범한 사람”29)의 여러 실례를 제공한다.
아시리이다
 여기서 사용된 “알다”라는 뜻의 원문 동사 ‘예다’는 성경 문맥상 매우 중요한데 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는 핵심 용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 용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애굽인을 벌하거나 그들의 땅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참하나님을 알도록 그들을 이끌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 사용된다(출 7:5, 17; 8:10; 9:29 등).
다니엘 4: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하나님이Heavens
 이 단어는 다니엘서를 비롯하여 포로 기간이나 포로 후의 다른 성경 본문에 사용된 보다 긴 칭호인 “하늘의 하나님” 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엘라 쉐마이야’의 축약형으로 보인다. 이 단어가 실제적으로 “하늘(the sky)”을 의미하는 한편, “이 장에서 하나의 표어로 나타난다(13, 20, 26, 34, 37절).”30) 주석가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완곡한 언급구약에서 오직 이 본문에 나오지 않는 용례(34절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참조)—라고 생각한다. 그 표현은 신약의 이러한 의미—예를 들면, 탕자가 아버지께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고백하는 누가복음 15장 18, 21절에서 사용된 것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다니엘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그런즉
 이 단어는 느부갓네살 앞에서 하는 다니엘의 담화의 결론을 표시한다.
간하는 것
 “선한 기쁨이 되도록” 이라는 동사 ‘쉐파르’는 왕이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고 말한 2절에서도 사용되었다.
죄를 속하고
 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대등한 동사 ‘파라크’는 멍에와 같이 물체를 “벗어버리는 것”(창 27:40)이나 행위를 “명확하게 중단함” 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31) 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 2절에서, 아론은 백성들에게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람어에서 가장 자주 확인되는 이 단어의 의미는 “끊기 위해서 (to cut off)”32)이다. 전체 절은 의를 행하는 것이 가난한 자와 압박받는 자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설명되는 대구법 위에 세워진다.
공의
 원어 지다카는 “의, 공의”라는 뜻이다. 잠언 16장 12절“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 하였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 후에는, 이 단어가 자선, 자비의 개념과 밀접히 묶여 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악한 길을 버리고 의를 행하라고 권고한다.
가난한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뜻하는 대등한 히브리어 아니는 자주 성경에 나오는 데 특별히 시편과 선지서에 많이 나온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압박받는 어떤 사람을 묘사한다(사 29:19; 32:7; 암 2:7, 8:4 참조).
혹시...하리이다
 “아마도”에 대한 표현인 ‘헨’은 다니엘의 진술을 조건적으로 만드는데 이는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기별에서도 발견되는 한 원리이다.(욜 2:14; 암 5:15; 습 2:3). 본문은 왕이 어떻게의 자신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과 회개하라는 요청에 반응 했는지 지적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장구하리이다
 “평온함”을 뜻하는 단어 ‘셀레와’4절“편히 있으며”라는 단어 ‘셀레’와 유사하다.
(주해)
다니엘 4: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4장에서 다니엘서의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자주 나오는 것은, 다니엘이 바빌로니아 이름인 벨드사살로 언급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 이야기가 바벨론 제국 전체에 선포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것으로 다니엘의 국제적인 외국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이야기에 권위를 더 부여하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 이야기에 역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 마르둑(벨) 신을 섬기는 박사들은 그 신을 경배하는 왕을 도울 수 없는 반면 그 신을 쫓아 벨드사살로 이름을 지은, 바벨론에 다니엘은 그 와중에서 그 영예를 마르둑(벨) 따위의 다른 어떤 신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돌리며 왕을 도울 수 있었다.

 꿈의 내용은 다니엘을 혼란스럽고도 두렵게 만들었다. 두려워하게도 하였다. 고대 세계에서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은 위험한 것이었다.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기별자들은 때때로 그들이 그것에 대해 책임 있는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왕은 다니엘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두려 워하지 말 것을 재확신시킨다. 하지만 다니엘의 두려움은 느부갓네살을 위한 것이다.”33) 왕은 다니엘에게 친근한 태도로 고하며 그에게 그가 왕궁에서 안전할 것을 보증한다.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다정한 관계를 보여 준다. 다니엘은 그의 꿈이 왕의 대적에게 적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며 응답한다. 다니엘의 말을, 불유쾌한 꿈의 악한 영향을 쫓아내기 위하여 바벨론에서 행하는 관습적인 의식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대신, 우리는 말들을 전형적인 동양의 예의로 보아야 한다. 다니엘은 “미리 경고를 주는 이 꿈이 당신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와 같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다니엘 4: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다니엘 4: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성경에서 나무는 자주 의인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cf. 시 92:12~15)


 하지만 특별히 다른 선지서에서는 높이 솟은 나무는 교만을 나타낸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사 2:12, 13)


 에스겔 선지자는 또 다른 교만한 메소포타미아 제국을 높이 솟은 나무로 비유했다.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레바논 백향목 이었느니라....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높으며

 (겔 31:3, 5)

다니엘 4: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다니엘 4: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다니엘 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다니엘 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다니엘은 왕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직접 화법으로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고, 선포한다. 이 절과 2장 37절의, “왕이여, 왕은 열 왕의 왕이시라”2장 38절에, “왕은 곧 그 금머리이니이다”에서와 같은 왕에 관한 다니엘의 말에는 강력한 대구가 형성되어 있다. 예언적으로 대면시키는 비슷한 표현으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한 말 가운데 나온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이야기가 줄곧 제시하듯이, “사람-나무는 느부갓네살 자신이다.” 34)

 이어지는 해석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데 유사하게도 직접적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 선고가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원되었음을 말한다(13절, 거룩한 기별자가 선고를 선포함 참조), 하나님이 땅의 동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준(렘 27:5, 6; 단 2:37, 38) 왕의 운명은 반전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고 그에게 짐승의 마음을 주실 것이며, 망상 속에서 그는 짐승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이 상태는, 본래 아람어 본문에서 특별히 지적하여 말하지 않은 기간인 일곱 때를 지낼 것이다. 다니엘서 나머지 부분에서 발견되는 문맥에 기초해 볼 때 왕의 병든 기간은 칠 년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다른 실례에서 칠과 칠십이라는 숫자는 심판의 문맥에 사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니엘 3장 19절에서 왕의 풀무를 “평일 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며 9장 2절에서 다니엘은 칠십 년의 포로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연구했다. 같은 숫자가 성경에서 홍수(창 7:2, 4 등), 기근(창 41:2~7), 언약의 저주(레 26), 전쟁에 의한 멸망(수 6; 사 23:15)과 포로(렘 25:11) 등의 문맥 가운에서 발견된다.
다니엘 4: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이 낮추는 경험은 왕을 멸망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렇게 할 때, 왕은 정상적인 위치로 회복될 것이다. 에사길라(Esagila) 성전에서 행해진 매년의 신년 축제(Akitu)에서, 황제란 단지 다스리는 신 마르둑(벨)의 대리자임을 잊지 않으려고 바빌로니아 제사장은 자기 손바닥으로 황제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왕의 꿈을 해석하며 다니엘은 지상에서 유일한 주재이신 참된 하나님을 지적한다. 수세기 후에,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 19:11)라고 말씀하셨다. “느부갓네살의 왕국이 오직 그가 참으로 왕국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만 그에게 되돌려질 수 있음은 것은 의미 심장하다. 그의 통치는 지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참으로 다스리는 분으로부터 허락된다.”35)
다니엘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은 왕이 압박과 강탈의 교만한 습관은 그만두고 압박받는 자들에게 자비로 베풀고, 권고함으로 마친다. 느부갓넷살은, 단지 말뿐만 아니라, 행위에서 의롭고 동정적인 왕이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다니엘의 권고하며 그의 말을 마친다. 성경의 선지자들에 주어진 많은 것들과 유사하다(암 5:15). 회개하라고 하는 이러한 형태의 좋은 실례는 이사야 1장 16~18절에 나온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4장은 분명히 “하나님은 자비롭지 못한 자들에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36)임을 가르친다. 자비롭지 못한 자들에게 죽기보다는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요한과 예수님 모두의 선포는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마 3:2; 4:17).

 바벨론 도시를 건설할 때 느부갓네살은 “여러 군사적 원정에서 사로잡은 수천의 노예 일꾼들을 사용하였다. 느부갓네살 제국의 확장은 높은 대가의 인간의 생명—패배한 군인들과 전쟁 가운데 죽은 그 자신의 군사들—을 지불하였다.”37) 왕의 업적이 인상적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그것들은 많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이루어졌다.

 다니엘은 왕에게 그의 선한 행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호의를 얻게 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비록 성경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존재의 구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그의 절대적인 주권에 뿌리 박혀 있으며, 그것들은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백성들을 회개로 초청하면서 용서는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성경상의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 성경의 독자들은 이 말을 아모스 5장 15절과 비교할 수 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유사한 방식으로 스바냐 2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꿈의 성취 (4:28~33)
 꿈이 성취되며 왕의 운명은 반전으로 특징지어진다. 해설가가 꿈의 성취에 관하여 3인칭으로 이야기 하는데, 36절까지 계속 묘사한다.
(어구(語句) 해설)
다니엘 4: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문자적으로 본문은 “열두 달 끝에”를 말하는 ‘리크자트 야르힌 테레아 사르’이다.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원문은 오직 지붕이라는 단어 없이 알 헤칼 즉 “궁전 위에서” 라고만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집 형태의 구조물들은 지붕이 평평했기에, 번역가들은 왕이 이미 그의 정신을 상실하였다. 오히려 이것이 정상적인 행위였음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지붕”이라는 단어를 삽입한다. 다윗 왕도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 때에 범죄 하였다(삼하 11:2~5).
다니엘 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것으로...아니냐
 이것은 왕이 요구한 수사학적 질문의 시작이다.
큰 바벨론
 다른 셈족 언어에서 이 표현과 동등한 “큰 바벨론”을 뜻하는 바벨 랍버타는 때때로 나라의 수도를 묘사한다. 예를 들어, 암몬 랍바(Ammon Rabba)는 고대인들 땅의 수도를 가리킨다(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수도인 암만), 다시 말해서 느부갓네살은 도시를 “제국/세상의 수도인 바벨론”이라고 언급한다. “큰 성 바벨론”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사용된다(14:8, 16:19; 18:2).
내가...건설하여
 주석가들과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신바벨론 수도의 건설자라는 것에 일치한다. 도시의 수천의 벽돌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이 역사적인 사실을 잘 예증한다.
나... 내가...나의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담화는 자기중심적으로 제시된다. 이는 출애굽기 15장 19, 10절의 자랑과 마찬가지로 이사야 14장 13, 14절의 바벨론 왕의 자랑하는 말과 비교될 수 있다.
능력과 권세로
 왕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찬양하는 다니엘 4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다니엘 4: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이 말이 나 왕의 입에 오히려 있을 때에
 이 말은 거룩한 심판이 왔음을 표현한다. 만일 느부갓네살의 형벌과 추방을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아담과 하와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이 말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38)는 진술과 연결된다.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히브리 전통에서, 하늘로부터 온 소리는 ‘바트—콜’로서, 문자적으로 “목소리의 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느부갓네살 왕아
 왕이 이곳에서 이름으로 불린다. ‘멜렉’, 왕이라는 칭호는 세 히브리인들이 두라 평지의 교만한 군주에게 고한 방식과 대조된다(3:16).
위가...떠났느니라
 완료 시제에서 동사 형태의 사용은 성경에서 예언적 포고의 전형적인 것이다. 이 현상은, 미래 사건을 그것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취된 것으로 말하는 것 예언적 완료로 알려졌다.
다니엘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이 절은 이미 25절에 주어진 정보를 반복한다.
일곱 때
 다니엘 4장 1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다니엘 4: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그 동시에
 문자적으로 본문 바샤아타는 “그 순간에”라는 말이다. 다니엘 4장 19절에 관한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같은 표현이 명령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고 행정가들에게 경고하는 다니엘 3장 6절에서 사용된다.
소처럼
 “같이”라는 의미의 비교 전치사 ‘커’는 제7장의 이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중요하다. 왕의 용모는 그의 행동이 변하는 것만큼 변하지 않았다.
머리털...손톱
 이 두 세부 사항은 이야기에서 새로운 요소다. 이곳에서 머리와 손톱의 길이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하고 있다. 왕의 머리와 몸의 털은 텁수룩하였고 “헝클어지고 거칠어졌다.”39) 그처럼 왕의 머리는 독수리의 털과 같았고, 발톱은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새의 발톱과 흡사했다.
(주해)
다니엘 4: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다니엘 4: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다니엘 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꿈의 성취는 3인칭으로 기술되었는데 왜냐하면 짐승은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 년 후에 왕은 꿈을 꾸었으며 그는 제국의 수도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그 제국의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3장과 연결된 경험에서 그는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배웠지만 최소한 수도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윗이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고 그를 취하려고 열망하였듯이(삼하 11:2~5), 느부갓네살도 궁전의 지붕 위를 거닐 때에 범죄했다. 하지만 다윗과 달리 느부갓네살의 죄는 교만한 것이었다.

 왕이 통치하는 동안 바벨론 도시는 그 규모가 세 배정도 확장되었는데, 건축 계획에는 그의 아내 아미티스(Amytis)로 하여금 그녀의 고향 메디아의 시골을 생각나게 하는 유명한 “공중 정원”이 포함되었다. 느부갓네살의 궁전은 벽돌과 대부분 두로에서 가져온 유명한 백향목으로 건설되었다. 교만한 바벨론 왕의 죽음은 이사야서 책에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구성된 합창단의 노래에 의해 선포된다. “네가 넘어뜨리었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작벌할 자 없다 하는도다”(사 14:8).

 본문은 이곳에서 도시를 향한 느부갓네살의 찬양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교만을 정죄한다. 시편 48편 12, 13절에는 성전 경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솔로몬은 유사한 방식으로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왕상 8:13)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관하여 자랑하였다.

 왕의 짧은 담화에는 1인칭 대명사를 비롯하여 으시대는 형용사가 넘쳐난다. 이 교만한 담화 형태는 독자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려 하는 교만한 바로가 부른, 바닷가에서의 노래와(출 15:9, 10) 또한 이사야 14장 13, 14절에서 그 야망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묘사된 계명성(히브리어 ‘헤랄 벤—샤하르’)을 생각나게 한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인간의 위대함은 매우 자주 “하나님의 위대함과 경쟁하려고”40) 위협한다. 다니엘 7장 8절에 따르면, 작은 뿔은 크고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입을 가졌다. 교만은 사람들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와 달리 겸손은 행복과 성취로 인도한다.
다니엘 4: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다니엘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다니엘 4: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하늘로부터 온 왕의 교만에 대한 반응은 신속하고 결정적이었다. “왕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운명으로 고통 당한다. 인간 가족으로부터의 추방, 버림, 소외 그리고 이리와 같이 긴 머리털과 맹금의 발톱 그리고 소처럼 풀을 먹게 된다.”41) 느부갓네살의 정신병 진단은 리칸스로피로 알려진다. (사람이 이리로 착각하는 증상). 이러한 형태의 정신 장애는 사람이 자신을 망상적으로 생각하여 야생 짐승 중 하나와 같이 행동할 때 일어난다. “이러한 병으로 고통 당한 근세기의 왕은 대영제국의 조지 III세와 바바리아(바이에른, 독일 남부의 한 주역자 주)의 오토(Otto)이다.”42)

 4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경험에 관해 빛을 비춰주는 몇 개의 역사적인 배경의 단편이 있다. 하나는 그레이슨(A. K. Grayson)이 1975년에 출판한 설형 문자 단편에서 나온다.43) 이 단편은 느부갓네살 왕이 행한 이상한 행동을 기록하였다. 본문은 왕의 생명이 자신에게 가치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고, 그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나 성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이 본문이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의 말년에 느부갓네살이 “미친 상태가 되었”음을 묘사하는 유세비우스의 글에서 발견된다. 그 글에는, 왕궁의 지붕에서 페르시아 노새가 바벨론을 점령하려고 메대 사람을 앞세워 공격해 온다고 신하들에게 경고하는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은 그 사람이 야생 짐승들과 하나되어 바벨론을 버려두기를 바람으로 불길한 징조를 쫓아내려고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나보니더스의 기도”라고 제목이 붙여진, 쿰란 동굴 V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나보니더스 왕이 정신 장애로 고통 당했고 짐승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다니엘 4장의 이야기와 유사함과 또한 상이함을 가지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질병의 연속적인 단계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1) 왕은 단지 짐승과 같이 살았다. (4:15).

 (2) 그는 이제 짐승의 마음을 가진, 심리적인 변화를 경험한다(4:16),

 (3) 그의 신체적인 변화는 그의 머리와 손톱과 발톱에서 볼 수 있게 된다(4:33).

 왕의 손톱과 머리털은 길게 자랐고 그가 무엇처럼 보였고 어떻게 그가 자신에 관하여 느꼈는지의 자세한 사항이 그의 용모에 대한 본문의 묘사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은 그의 마음을 상실했는데 왜냐하면 교만과 부귀에 대한 잘못된 태도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을 능가하기를 구함으로 그는 인간성 이하로 떨어졌다.”44) 더 높고 초월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대신에 왕은 더 낮은 본성의 수준으로 내려갔다. 인간 권세에 대한 짐승의 상징은, 특별히 7장에서, 다니엘의 이상 가운데 중요한 주제가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는 그가 그의 마음보다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그의 목숨 자체가 회개하려는 자세에 달렸다.
왕의 찬양 (4:34~37)
 교차대구적인 구조로 인해, 이 장은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함께 시작한 것처럼 두 찬미의 존재는 이 장에서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어구(語句) 해설)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 기한
 이곳에서 말하는 기한은 16절23절에 언급된 “일곱 때”의 기한을 뜻한다. 원문은 ‘요마이야’ “날들”이나, 성경에서 “날”에 대한 단어 ‘욤’은 더 정확하게 꾸며주는 요소가 없으면 기간의 길이가 구체적이지 않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어떤 주요한 군사적인 활동을 취하지 않은, 기원전 582년에서 575년 사이의 칠년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나, 느부갓네살
 다니엘 4장 4절, 4장 3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이야기는 이제 1인칭 설명으로 되돌아온다.
우러러 보았더니
 이곳에서 그 표현은 비유적으로 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것과(시 25:15; 121:1, 2; 123:1, 2; 141:8참조) 그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사 40:26).
하늘
 다니엘 4장 2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그것은 이 문맥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왕의 행동은 분명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내 총명My sanity
 “지식”을 말하는 아람어 ‘만다’는 일반적으로 “총명”이나 “지식”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여기서 왕이 제정신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이성을 되찾은 것은 그보다 앞선 믿음의 행위에 기초된다. “총명은 실제적인 자기 평가와 함께 시작한다.”45)
돌아온지라
 대등한 히브리어 슈브와 함께 결부 되어서, “돌아오다” 라는 뜻의 동사 투브는 회개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회복에 관하여 성경에서 사용된다. 그와 같이 성경에서 회개는 주로 자기의 삶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찬양하며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하나님을 찬양한 3장 28절과 같이 원문은 이곳에서 “축복하다” 라는 뜻의 동사 어근 바라크를 사용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
 다니엘 4장 17절에 관한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영생하시는 자
 하나님에 관한 유사한 진술이 다니엘 12장 7절에도 나온다. 더구나 다리우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단 6:26)으로 선포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여호와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33)인 엘 올람으로 불린다.
그의 권세는...
 이 말과 그것에 이어지는 것은 시가 형식이다. 그것들은 2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찬양을 반향하는 또 다른 찬미다.
영원한 권세
 다니엘 4장 3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권세와 왕국이라는 단어는 3절에도 발견된다. 그것들은 이 장에서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다니엘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이사야 40장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앞에 열방은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느니라.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다른 어떤 선지서보다도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높은 군대(starry host)”(사 24:21; 34:4)를 온전히 지배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사야 40장 6절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분으로 묘사한다.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늘의...땅의
 이들 두 단어들은 자주 성경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된다. 두 반대되는 개념이 전체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사용되는 것은 대조법(merism[us])으로 알려진 표현 방법이다.
 다니엘 1장 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네가 무엇을 하느냐?
 왕의 찬미의 끝에 나오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의 급소를 찌르는 문구”46)로 여겨졌다.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관한 유사한 묘사를 위해서는, 욥기 9장 2절; 전도서 8장 4절 그리고 이사야 14장 26, 27절, 45장 9절을 참조하라.
다니엘 4: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 동시에
 “시간”을 나타내는 동사 제만은 일반적으로 정확한 시점을 지적함으로 “어떤 정해진 시간”으로 번역된다.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이 절은 34절의 말과 일치한다.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
 이곳에 사용된 단어는 왕궁에서 두 중요한 계급에 대하여 언급한다. 첫째 용어는 다니엘 3장 24절에서도 사용된다.
내게 조회하니
 “찾다”를 뜻하는 동사 베아는 2장에서도 공통으로 사용된다. 이절에서는 이 동사의 의미는 다니엘이 왕과의 알현을 약속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는 2장 16절의 의미와 유사하다. 이 본문과 비슷한 구절은 욥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욥 42:11)었다고 하는 욥의 이야기의 결말이다.
내게 더하였느니라
 앞의 이야기는 보상과 높임을 받는 히브리 포로들과 함께 끝난다. 이 이야기의 끝은 느부갓네살의 회복과 높임으로 특징지워진다.
다니엘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지금 나
 이곳에서 사용된 1인칭 단수 대명사는 왕이 그의 이야기를 말하는 4절과 함께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여기에 사용된 세 단어는 동의적이다. 그것들은 이곳에서 독자들에게 절충적 느낌을 주기 위하여 함께 사용된다.
하늘의 왕
 ‘멜렉 숴마이야’라는 거룩한 칭호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단 2:18)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단 2:28), “하늘의 주재”(단 5:23)와 비교될 수 있다.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살아 있고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사람의 품행과 관련이 있다.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이것은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마지막 말이다. 이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왕은 그 자신의 경험을 이처럼 단 한줄로 요약한다. “인간 통치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뜻의 대리자가 된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주권이 우주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통로가 된다.”47)
(주해)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해설은 이제 1인칭 기사로 돌아간다. 꿈에 주어진 기간의 끝에, 왕은 그의 눈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한다. 시편 기자는 말하였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시 141:8)


 이 믿음의 행동은 느부갓네살의 정신적 건강의 회복을 가져왔고, 이어서 왕이 입술로부터 하나님께 향한 찬미를 부르게 하였다. 왕의 찬미는 하나님의 주권이 영원하며(34b절), 우주적이며(35a절),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35b절),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인 인간 존재와 대조된다고 주장한다(시 115:3; 135:6; 사 40:17참조), 세상에서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최상권에 대한 것은 이사야 14장 26, 27절 에도 묘사된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그가 제정신으로 회복되면서, 느부갓네살은 오직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돌연히 그가 그분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 없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48) 성경 지혜서에서 자주 반복된 표어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잠 1:7; 욥 28:28; 시 111:10)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에게 속했는가 하는 이유다.
다니엘 4: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다니엘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더욱이 그에게 왕의 보좌가 회복된다. 그의 관원들은 정해진 기간의 끝에 그를 찾기 위해 나아간다. 그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를 보좌에 다시 앉힌다. 그는 전보다 더욱 크게도 된다. “왕은 하나님이 자신을 다스리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다스리심이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의 왕국과 위대함으로 회복된다.”49) 왕이 그의 담화를 시작하면서 한, 나 느부갓네살이라는 말은 그의 마지막 말인 여기에서도 발견 되어 이야기 가운데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왕은 하나님이 교만히 행하는 자를 낮출 수 있다고 결론 짓는다. 이 말은 전체 이야기의 교훈을 전한다. 그것들은 성경의 지혜서(잠 11:2; 29:23)와 선지서(사 2:11, 17; 13:11; 겔 16:49, 56) 등에도 나온다.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잠언 15장 33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때때로 왜 느부갓네살이 정신병이 들어 있는 동안 아무도 보좌를 찬탈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고대세계에서, 만일 사람이 악령을 갖게 되면 고통 받는 사람을 해롭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을 그 영이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또한 신바벨론 안에서 다니엘의 지위가 그를 황제와 아주 밀접한 가운데 두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유용하다. 그와 같이 그는 왕궁에서 왕이 부재중일 때에 모든 왕궁의 의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유대인 전통은,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에월 므로 왕자가 그 기간에 왕의 일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교훈의 요약
 1. 하나님과 느부갓네살

 다니엘서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이 온 세계의 최상의 통치자이심을 보여 준다. 그는 왕국의 운명을 지배하실 뿐 아니라 또한 왕들도 개별적으로 돌보신다. 더욱이 느부갓네살 왕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특히 벨사살이 5장에서 성전 기명을 망령되게 사용한 것에 대해 정죄받은 것을 볼 때, 히브리 성경에서는 결코 느부갓네살을 성전 파괴에 대한 책임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50) 사실이다.

 제3장의 결말에서, 왕은 오직 “반쯤만 회심”하였다. 4장의 시작에서, 그는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물을 얻을 능”(신 8:18)을 주셨음을 기억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끝에서 느부갓네살은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이 그 자신 안에 있음을 느꼈다.”51) 왕은 “더 이상 물리적 힘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개인적 증거의 힘에 의지한다.”52) 사실상, 이 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회개와 실제적인 회심으로 끝이 난다.”53) 왕은 수한이 차서 기원전 562년에 죽었다.54)

 포로들의 하나님께 포로 됨과 이어진 그의 회심은 그 목적이 왕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개인적 경험에서 절정을 이루고 단번에 일어 나지 않았으며 단계적으로 일어났다. 왕의 꿈은 교만에 대하여 경고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회개의 가능성과 소망을 제공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실제적으로 왕이 아니며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정할 때, 왕이 될 수 있을 것을 약속 받는다.”55) 이것이 역사를 통하여 모든 지상의 군주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아닌가? 성경에 의하면 어떤 왕들은 이 계획을 무시함으로 그들이 위기를 자초(自招)했다(출 14:5~9; 사 10:12~19; 14:12~20; 겔 28:1~10; 단 5:22~28).

 주제적으로 느부갓네살의 회심의 이야기와 대구되는 가장 긴 성경 구절은 욥기 33장 14~30절에서 발견된다. 욥의 친구 엘리후의 담화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훈련시키시는 길을 설명한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느니라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며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 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시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게 하려 하심이라.”


 2. 바벨론의 교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 그는 자신을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 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라고 소개하였다(출 34:6, 7).

 그러나 바벨의 모티브를 물들여진 성경의 문맥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것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바벨론과 바벨론적 교만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들을 향한 이같은 언사는 일찍이 창세기 11장에나온다. 그것은 이사야 14장에서 반복되며 요한계시록 전반을 통하여서 계속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초인이 되려고 하는 모든 피조된 존재나 다른 인류보다 한 걸음 더 높이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함으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고(play god)” 한 걸음 더 낮아짐으로 끝난다. 하등의 동물과 같은 본성으로 바뀌거나 사망에 직면하는 더 나쁜 것이 된다. 그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 된 상태를 거절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할 때 우리는 인간보다 못하게 될 위험 가운데 있게 된다.”56)

 충성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최상권의 개념은 환영할 소식이고 희망의 유일한 근원인 반면에, 교만한 자들에게는 이 같은 개념이 하나의 위협으로 다 가온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교만을 그분이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은 마을들에서 보았고, 청중들에게 그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가버나움에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예수께서는 언어유희로 사용하고 있을 수 있는데, 가버나움 (Caper-Nalhlum)은 “나훔(선지자)의 마을”을 의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선지자 나훔의 책은 니느웨 도시의 교만과 잔인성에 관련한 엄중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

 바벨론 교만의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의 독자는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에 주의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리라.”(눅 14:11). 이 장의 결말에서, 예레미야 9장 23, 24절의 말씀은 매우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들은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 인줄 깨닫는 것이라.’

 여호와 말이니라.”
참고
 1. Maxwell(p. 59)은 4장의 연도를 B.C.569년으로 잡으나,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Archer(p. 60)는, 느부갓네 살이 정신병의 일곱 해를 기원전 582년부터 575년까지로 보면서, 이 장을 기원전, 583년으로 연도를 매긴다.

 2. Wiseman, Chronicles, 73.

 3. Wiseman, Nebuchadrezzar, 55.

 4. Towner, 60.

 5. Baldwin, 110.

 6. Seow, 65.

 7. Doukhan, Secrets, 60, 61.

 8. 상게서, 63.

 9. Ibid.

 10. Porteous, 67; Collins, 222. Lucas(p. 109)는 대중적인 어원의 경우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11. Peter-Contesse and Ellington, 105.

 12. Collins, 224에서 인용됨.

 13. Seow, 69.

 14. Doukhan, Secrets, 65.

 15. Lucas, 111.

 16. Seow, 68.

 17. Collins, 227.

 18. Slotki, 35, 36.

 19. Ibid.. 34.

 20. The Babylonian Talmud, Sanh, 38b.

 21. Nichol, 4:790. 22. G. W. E. Nickelsburg, Jewish Literature Between the Bible and Mishnah (Philadelphia Fortress, 1981).

 22. 23, Ford, 116.

 24. Smith-Christopher, 73.

 25. Peter-Contesse and Ellington, 110.

 26 Montegomery, 236.

 27. Towner, 65.

 28. Collins, 229.

 29. Towner, 65.

 30. Baldwin, 116.

 31. 이 사실이 Ernest Vogt’s Lexicon Linguae Aramaicae Veteris Testamenti, 2nd ed.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94), 140에서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32. Hoftijzerand Jongeling, 943, 944.

 33. Goldingay, 94.

 34. Towner, 62.

 35. Smith-Christopher, 35.

 36. Berrigan, 69.

 37. Shea, Daniel, 52.

 38. Goldinggay 96.

 39. Archer, 66; Nichol, 4:793.

 40. Goldingay, 95.

 41. Towner, 64.

 42. Lucias, 111.

 43. BM 34113. Wiseman, Nebuchadrezzarr, 102, 103 그리고 G. F. Hasel, “The Book of Daniel: Evidence Relating to Persons and Chronology.”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9, no. 1 (1981):37~39를 참조하라.

 44. Doukhan, Secrets, 69.

 45. Baldwin, 116.

 46. Towner, 60.

 47. Seow, 73.

 48. Doukhan, Secrets, 73.

 49. Lucas, 118.

 50. Collins, 229.

 51. Porteous, 73.

 52. Lucas, 114.

 53. Collins, 234.

 54 Doukhan, Secrets, 77.

 55. Goldingay 94.

 56. Lucas,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