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500년경에 로마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공화국이 되었다. 때때로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상존(常存)하는 독재 권력에 대한 공포로 인해 공화 정부의 형태와 그에 관한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전 2세기 동안 오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이 생겨나면서, 적어도 로마인들의 관심이 이탈리아 반도 내에만 국한되었던 때에는 그런 대로 만족스러웠던 정부 형태로는 더 이상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가 어려워졌다.
BC 1세기경까지 이런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은 국가 정치 구조의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당시 국가 지도자들 간에 경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감히 군주라는 명칭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율리오 가이사)가 군주의 칭호와 대권을 열망했기 때문에 결국 BC 44년 3월 15일에 암살되고 말았다는 두려움이 대중에게 퍼져 있을 때이다. 그 사건은 이후 15년간이나 로마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갔으며, 다른 때였더라면 로마의 세력이 붕괴하는 신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당시 로마의 권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강력한 속주 백성이나 외세가 없었던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당시에 속주들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비록 수많은 악습으로 쇠약해지기는 했어도 로마의 재정 구조는 이 중대한 시기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고대의 강건한 로마인들의 특성과 하부 구조, 특히 지방 자치령에 남아 있던 법률과 행정력 덕분에 로마는 일개 국가와 세계 정부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부가 혼란스러웠지만 강철 같은 공화정은 굳건했다.
제2차 삼두정치
삼두정치란 세 명의 지도자가 다스리는 정부 형태를 말하는데 제1차 삼두정치(참조 제9권, 47) 이후, 더 자세히 말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 후 공백기간에 제2차 삼두정치 체제가 형성되었다.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 안토니우스(Antony)는 죽은 카이사르의 재산과 로마 근교에 주둔해 있던 카이사르 군대의 지휘권을 차지했다. 카이사르의 조카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는 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비범한 정치적 총기를 과시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며 안토니우스의 강성해지는 세력을 견제했다. 결국 이들은 분쟁을 조정하면서 또 하나의 떠오르는 정치 거물인 레피두스(Lepidus)를 포함시켜 동맹을 형성했다. 이 동맹은 제2차 삼두정치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상호 협정 하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Julius Caesar Octavianus)의 이름을 채용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이탈리아와 서부의 일부 속주들에 대한 통치권이 부여되었다. 레피두스에게는 나머지 서부 지방이 배정된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헬라와 동부지방을 맡았다. 무기력해져서 다루기 쉬워진 원로원에 의해 이 협정은 합법화되어 BC 42년까지 그 기능을 유지했다.
계속된 정치적 책략으로 로마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고, 경쟁자 중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다. BC 36년에 레피두스는 정치적으로 무력해졌고, 권력 투쟁은 서부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부의 안토니우스의 양 체제로 좁혀졌다.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고대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왕가의 규율이 지배하며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Cleopatra)가 있는 애굽에 본거지를 두었다.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애굽을 자신의 사유재산처럼 통치했으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서 남동생 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함께 길렀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아내 옥타비아(Octavia)와 이혼하고 곧이어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그때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로마의 왕이 되려 하고, 왕비로는 이방 여자인 클레오파트라를 세우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옥타비아누스의 최상권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 강성해졌음을 느끼자 안토니우스에 맞섰고, BC 31년 헬라 서부 해안에서 벌어진 악티움(Actium) 대해전에서 그를 완전히 물리쳤다. 클레오파트라는 전투 중에 자신의 함대를 철수해서 애굽으로 돌아가 버렸다. 안토니우스도 장군들이 최선을 다해 스스로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둔 채 그녀를 따라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최고 권력이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돌아갔는데 당시 그는 나이 서른의 젊은이였다. 그는 이듬해에 애굽을 공격하여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물리쳤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클레오파트라도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안토니우스처럼 자살했다. 선대의 바로(Pharaoh)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전례를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도 애굽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삼았다. 최후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얻은 승리로 인해 옥타비아누스가 반론의 여지없는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면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는 공식적인 전환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Ⅱ. 옥타비아누스, 아구스도 황제(BC 27~AD 14)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의 요소들을 한데 모으면서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는 모든 단계를 합법화하는 데 신경썼다. 그는 공화정 형태를 계속 유지했고, 사실상 황제였는데도 처음에는 스스로 황제 자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BC 27년 1월, 그는 아구스도(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는데, 이 칭호는 그의 눈부신 업적들에 대한 감사와 경외를 표현한 것이었다. 같은 해에 속주들에 대한 10년간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로마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는데, 제국 권력의 실질적 기초를 놓기 위해서는 군대의 통수권이 필요했으므로(참조 제9권, 48) 역사학자들은 로마 역사에서 이 해를 제정 시대의 원년으로 잡는다. 원로원에서는 매년 그를 집정관으로 삼는 투표를 실시했으나, BC 23년에 이르러 최고 속주 집정관의 통치권을 부여받고 호민관의 권한을 받았다(참조 제11권, 25). 이러한 권력은 주기적으로 갱신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손안에 권력의 요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구스도는 계속 공화정 형태로 통치했다. 그의 집정관직은 계속 유지되었고 호민관직도 마찬가지였다. 원로원은 계속해서 통치 활동을 했고, 아구스도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 집정관(proconsul)들에게 고분고분한 속주들의 통치권을 일임했다. 이런 속주 집정관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총독”이다(참조 행 13:7, 8, 12; 18:12; 19:38). 하지만 아구스도는 집정관의 권위를 통해 모든 속주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구스도는 다루기 힘든 속주들의 통치는 직권으로 남겨 놓았다. 그는 이런 속주에는 자기의 대리자인 특사(legate)를 보냈는데, 수리아(Syria)의 총독도 아구스도의 특사였다. 그는 모든 속주에 자신의 재정 대리인인 속주 재정관(procurator)도 배정했다. 일부 작은 속주에서는 속주 재정관이 통치자였다. 신약 시대의 유대 총독(마 27:2; 행 23:24)은 속주 재정관이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속한 동시에 수리아의 특사에게도 어느 정도 속해 있었다.
공화정 아래서 민회(comitia), 즉 시민의 모임은 귀족 정치 성격을 띤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있었다. 실제로 원로원에는 속주들에 대한 최고 지배권이 있었던 반면에 민회는 도성에서 지역 사법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아구스도의 통치 아래 민회는 단지 형식뿐이었고, 그의 후임자인 디베료(Tiberius,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이름만 남았다. 입법권은 원로원의 수중에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황제에게 종속된 기구에 불과했다.
BC 13년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아구스도는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즉 국교의 대사제가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위인데, 이는 주로 일정을 조정하는 권한을 가져서 간접적으로 선거 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수중에 가장 중요한 종교, 군사, 사회 권력을 쥐어 더 필요한 것이 없게 되었다.
아구스도의 통치는 순조로웠고 성공적이었다. 사실 그의 통치로 로마는 분열의 위기에서 헤어났다. 제국은 훌륭하고 강건하게 통치되었다. 유명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는 광대한 제국 안에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지만 적어도 25만 명이 넘는 강력한 군대가 존속했기에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대해 M. 로스토프체프(M. Rostovtzeff)는 이렇게 평한다: “외세 침략의 위험은 사라졌다.... 심지어 변경 속주에서도 인근 종족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옹호자이자 보호자인 아구스도의 명성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지경까지 올라갔다”(A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2:197).
제국의 후계자 문제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국내 조직은 단단한 토대 위에 서있었다. 시민권의 확대가 제한되었다. 노동시장과 공공질서를 위해 노예 해방을 신중하게 조절했다. 혼인법이 재정비되어 독신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취한 아구스도의 다양한 정책으로 로마는 한동안 철저한 도덕적 부패와 국가적 파멸의 지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구스도는 치세 동안에 종교로 귀의하라고 장려했다. 이것은 종교의 이익 때문은 아니었고, 아구스도와 그의 고문들도 특별히 신뢰하지 않던 옛날 로마 신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신들에 대한 존경심과 종교적 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에도 좋다는 인식에서 나온 결과였다.
조세제도
아구스도 이전, 즉 공화정 시대에 로마 정부는 세금 징수원들(publicani)을 통해 속주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조세제도를 시행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이외의 지방 자치령에서 세금 징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각 세금 징수원(publicanus)은 자기 지역에서 일정 금액을 속주 정부에 납부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는 그가 자기 지역에서 계약한 금액을 거둬들이고, 거기다가 자기 사리와 수익 차원으로 돈을 얼마든지 더 취했다는 말이다. 아구스도의 통치 하에서는 조세제도가 개정되어, 세금 징수원들이 일부 간접세는 계속 마음대로 거뒀지만 직접세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언급한 “세리”는 분명히 로마 관원이 아니라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고용한 하급 세리였다. 세리는 이유 없이 바로 죄인으로 분류되며, 팔레스타인의 대중에게 증오와 경멸을 받았다(참조 마 9:9~11). 참조 제10권, 75.
교통수단
역사를 만드는 데는 운송수단의 수준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로마 제국의 세력과 전대미문의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로마 군단의 훌륭한 통제는 로마 제국의 잘 발달된 도로체계와 연관지어 이해해야만 한다.
로마는 바다를 통해 정복한 속주와 동맹 맺은 속주들과 교류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탈리아의 성읍과 속주들을 로마와 연결시키는 도로를 닦았다. 지역마다 사용 가능한 재료가 풍부했다. 가옥과 공공건물 건축에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응회암이 도로 건설에도 유용했다. 두껍고 거친 돌 기초 위에 자갈과 모래를 덮은 뒤, 응회암 벽돌을 놓아 예상했던 자리와 맞으면 그 자리에 접합시켰다. 도성 주변, 특히 로마처럼 교통량이 많은 곳의 포장도로 표면은 화강암 판이었다. 도로의 가운데 부분은 둑이나 테라스처럼 올라와 있어서 특권층이 왕래하거나 급행 운송에 사용한 반면, 양쪽 가장자리 길은 지역주민이나 완행 운송을 위한 것이었다. 도로는 구릉이나 산까지도 통과했고 협곡이나 좁은 골짜기에는 아치가 가로질러 놓임으로써 여행자들의 길을 단축시켰다.
BC 133년 시민 혁명 지도자인 가이우스 그락쿠스(Gaius Gracchus)는 자기 형에 이어 권력을 잡은 후 이탈리아의 도로 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세력의 경계가 동서남북 전방위로 뻗어갔기 때문에 로마 도성의 중앙에서 시작된 도로는 제국의 국경선까지 이르렀다.
정부 관리들만 이용할 수 있던 역참 체계도 아구스도가 세웠다. 각각 말 40필씩을 비치한 역참은 8~10킬로미터마다 배치되었다. 전령들은 파발마를 이용해서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리인 16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하루 만에 갈 수 있었다. 네르바 황제(Nerva, 96~98)의 치세에는 역참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고 그 비용은 제국의 재정으로 충당하였다.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황제는 이 특권을 제국 전역으로 확장했으나, 이후의 통치자들은 도로의 보수 유지를 기존의 “공공세”에 추가하여, 도수관 유지비, 전령 업무비, 통과 군대 분담금 등으로 이미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던 지방 자치령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이런 광범위한 간선망은 일차적으로 제국의 물자 보급로를 지키거나 국경을 방어하는 데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도로 위로 아무리 다른 이들이 여행한다 하더라도 로마 병사들의 육중한 발길은 항상 있었다. 물론 이외에도 높은 자와 낮은 자, 바쁜 자와 느긋한 자, 말을 탄 자와 당나귀를 탄 자, 가마를 탄 자나 걸어가는 자, 빠른 전차에 탄 자나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탄 자도 그 길로 여행했다. 기독교 시대 첫 세기에는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선교 계획을 이루고자 통일된 제국의 평화는 물론 편리한 로마 도로를 활용했을 것이다.
로마의 약점과 강점
역사학도가 아구스도 통치기의 평화와 번영을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던 앞선 세기와 비교한다면(참조 제9권, 46, 47), 아구스도가 권력을 장악할 즈음에 로마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붕괴에 얼마나 가까웠는지에 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참조 제9권, 48). 오직 로마 군단에게만 통일을 이룰 유력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더 이상 로마라는 국가에 충성 맹세(사크라멘툼[sacramentum])를 하지 않고, 흡인력과 지도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전리품과 약탈물을 얻게 해 주는 대장군(imperator)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안정에 기여한 또 다른 요소로는 조상과 비교하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백성이 법을 기본적으로 존중했다는 점이다. 정부 관리들이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백성은 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정력에서도 타고나고 비범한 소질을 소유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강력한 통치와 그가 실시했던 개혁들 또한 분명히 부패 속도를 늦추는 데 일조했다. 그의 통치력은 아구스도가 지배력을 공고히 할 때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와 유사하게 로마는 아구스도의 통치력으로 인해 무능한 황제들이 절망적으로 연이어 등장하는 쇠퇴기를 버텨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같은 지도자들의 중흥기에 이르렀다. 후자의 통치는 로마 문명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참으로 훌륭했기 때문에 황금시대라고 불릴 만했다. 이 황금시대의 영향 덕분에 제국은 일련의 폭군들이 출현해 통치했던 기간을 버티어, 로마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284~305)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306~337)의 강력한 통치기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아구스도의 사후 한 세기 동안 황제의 권좌를 계승한 대부분의 인물에 관해서는 언급할 만한 업적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하고도 일관된 황위 계승 방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는 당시의 상황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아구스도의 모든 통치 권력(참조 제9권, 48)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황제의 직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구스도는 자신의 축적된 권세를 부자 세습 같은 수단으로 영속시키고자 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자기를 계승할 만한 젊은 친척들도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다소 싫어했지만 디베료를 양자로 입양했다.
아구스도가 죽자 디베료만이 황제 지위에 적법한 유일한 후보자로 남았다. 그의 즉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했던 제도들을 보면 제국의 구조적 약점이 드러난다. 이후의 황제들도 비슷하게 친척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조처로 인해 안정된 황통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도리어 제정 첫 세기 동안은 딱할 정도로 미미한 인물들이 세계의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2세기가 시작되면서 황제들은 혈연이 아니라 개인 자질에 근거해서 후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 유능한 인물들에게 황제의 보좌가 돌아갔다.
Ⅲ. 디베료(AD 14~37)
아구스도의 후계자 디베료(Tiberius)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 일부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혹평을 받은 사람이다. 직접 지휘하지 않았던 몇몇 출정에서 얻은 승리를 제외하면 그의 통치는 분명 나약하다고 여겨졌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든,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 되고자 했든 간에, 그는 자기가 속한 시대를 잘 이해했다는 점을 거의 입증하지 못했다. 그는 젊었을 때 군대 막사의 경험에서 일부 채용한 기준들에 따라 기계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형편없는 보좌관과 소문에 둘러싸여 이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 중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사법상의 고소가 당연한 일로 여겨진 것이다. 당시에는 민간 소송 절차가 없었다. 고소하는 일이 직업화했다. 법률 위반 사실을 목격했거나 그런 혐의를 의심하는 시민 혹은 누군가를 그런 고소에 연루시키기 원하는 시민은 누구나 이를 정당하게 고발하여 범죄자를 기소할 수 있었다. 디베료 치세에서 고소인(delator)이라 불리는 직업적인 고소자 계층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우연히 자기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고발했다. 당연히 그것은 정의를 빙자한 것이었지만, 디베료는 그 제도를 옹호했다. 진기하게도 이런 관행은 바로 황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불쾌한 이야기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의 명성은 역사가들의 손에 의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군대
로마 군대의 능력은 훌륭했다. 한동안 로마 군단은 20년간 근무하는 직업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군인들의 충성 맹세가 로마 정부보다는 대장군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은 이미 언급했다. 아무튼 군인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헌신적으로 싸웠다. 군대의 사기는 최고였고 거듭해서 적군에 비해 정신과 솜씨 면에서 우수함을 입증했다. 아구스도와 디베료의 치세에 국경 지방과 정복한 속주를 따라 전 제국 곳곳의 전략적 요충지에 로마 군단을 영구 주둔시키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AD 23년에는 정규 로마군 25개 군단이 최고의 군사 통제력으로 제국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라인(Rhein)강 상류와 하류 지역은 각각 4개 군단이 맡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에는 세 개 군단만 있었다.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를 제외하고, 자국 군대가 있으면서도 공물을 바치던 왕국이었던 북아프리카는 2개 군단이 지켰고, 애굽에는 2개 군단만 필요했다.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에는 4개 군단이 주둔했다. 드라게(Thrace)도 공물을 바치던 왕국이었지만 자국 군대를 보유했다. 도나우(Donau)강 하류에 2개, 모에시아(Moesia)에 2개 그리고 달마디아(Dalmatia)에도 2개 군단이 있었다. 총 25개의 군단은 거의 동일한 병력의 병참 부대들로 인해 더 증가하여, 각 군단을 5,000명으로 봤을 때 전체는 약 25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중무장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수의 부대에는 기병대도 있었다. 군단에는 공병대도 있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효과적인 공성 무기류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군단들로 구성된 부대는 대장군 혹은 임페라토르(imperator)의 지휘를 받았으며, 각각의 군단은 특사가 통솔했다. 군단마다 백부장이라고 알려진 장교의 지휘 아래 50명에서 1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약 50개의 백인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종교
통치 초기에 디베료는 백성의 종교 생활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이시스(Isis) 사교 집단을 축출했는데, 이는 그 사교 숭배의 특징인 부도덕한 악습 때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내에서 유대교 예배도 중단하도록 명령했으며, 실제로는 모든 유대인을 나라에서 추방하도록 명령했다(디베료와 유대인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제10권, 74을 참조하라). 그는 점성가들의 사교도 철폐하고자 노력했다. 적지 않았던 이 부류는 태양과 달과 눈에 보이는 다섯 행성들을 연구하고, 주문을 통해 이 천체들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신들에게 신령한 도움을 보장받으려고 했다(참조 제1권, 174, 175). 그러나 점성가들을 억압하려던 디베료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통치 후기에는 그가 친히 그들의 비법에 귀의하고 말았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들과 논의했고, 그들의 권면 때문에 점점 비관적이고 침울해졌다.
국가 행정
디베료 치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영토 확장은 없었지만, 그는 동떨어진 속주 관리를 공고히 하고자 많은 일을 했다. 드라게는 로마 총독의 통치를 받다가 곧 합병되었다. AD 17년에 갑바도기아(Cappadocia)의 왕 아르켈라오(Archelaus)가 사망하자, 그의 왕국도 속주 재정관이 다스리는 속주가 되었으며, 동시에 동쪽 변경에 있던 콤마게네(Commagene) 왕국도 속주 법무관(propraetor)이 통치했다. 불안하고 부유한 유대 속국은 아구스도가 파견한 속주 재정관의 지배 하에 놓였고(참조 제10권, 72), 디베료는 이것을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유대는 더 넓은 수리아의 사법권 아래 있었고, 유대의 속주 재정관은 속주의 수도 안디옥에 상주하던 수리아의 총독에 속한 사람이었다. 수리아는 칼키스(Chalcis), 에메사(Emesa), 다메섹(Damascus), 아빌레네(Abilene) 같은 작은 자치주에 둘러싸여 있었다. 참조 제9권, 160쪽 지도.
디베료가 통치한 초기 9년은 괜찮았으며 통치도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만하다. 하지만 AD 23년경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디베료의 대신이던 세야누스(Sejanus)가 야심을 품고 자기 주인 대신에 황제가 되기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여러 정치 동맹을 맺고 디베료가 가까운 친구 가운데서 찾을 만한 지지 세력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황제의 직계 가족도 예외가 아니어서,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Drusus)가 지병으로 죽자 당시의 역사가들은 세야누스가 그를 독살했다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디베료의 말년
디베료는 고소인들을 지지하고, 점성가들을 믿고, 파렴치한 대신 세야누스에게 자유를 준 결과 모진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왕궁은 황제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 소문과 유언비어와 섬뜩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점성가들의 암울한 예언은 그의 마음에 최악의 영향을 끼쳤고, 세야누스의 음모는 디베료마저 위협했다. 우울함, 개인의 안위에 대한 공포 그리고 수도의 분위기 자체에 대한 증오심에 압도된 디베료는 모든 것을 철수시키고 다시는 로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이곳저곳을 순회하기는 했으나, 결코 이탈리아의 오지(奧地)나 외국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는 남은 13년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카프리(Capri) 섬에서 지냈다.
하지만 은거 중에도 그는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다. 염세주의와 공포심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결국 세야누스를 죽이게 되었다. 단순히 그가 아름다운 섬으로 은거해 들어갔다고 해서 황제에 대한 떠들썩한 소문이 그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소문은 더 무성해졌다. 백성은 디베료의 사생활에 대한 진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은거하던 별장에서 떠들썩한 주신제에 몰두한다는 이야기들이 유포되었다.
늙은 디베료는 여행하던 중에 병이 들었다. 그는 모든 의학적 도움을 거부하고 자기를 위해 개최되는 놀이들에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결국 병상에 눕고 말았다. 거기서도 그는 자연사를 맞이할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풍문에 따르면 왕좌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가이우스(Gaius)의 장인이요 세야누스의 후계자인 마르코(Marco)가 늙은 황제를 이불로 질식시켜 확인 살인을 했다고 한다.
Ⅳ. 가이우스 칼리굴라(AD 37~41)
디베료의 양자이자 일반적으로 칼리굴라(“유아용 군화”라는 뜻임)로 알려진 가이우스가 이때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와 친구로 지냈다(헤롯가와 로마의 관계에 관해서는 제9권, 50~52; 제10권, 71~74, 78을 참조하라). 이 팔레스타인 출신 왕자는 영토가 로마에 넘어간 다른 약소국들의 왕자들과 함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에서 그는 글라우디오와 그의 어린 조카 칼리굴라와 친구가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칼리굴라는 나약하고 신경질적이며 방탕하게 살던 젊은이로서, 동방의 독재 방식에 관한 아그립바의 지도를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 미래에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일과 관련된 불행한 기초를 놓고 만다.
그렇지만 초기에는 그도 통치를 잘했다. 전면적인 사면을 선포하여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정치적으로 유배되었던 자들을 귀향시켰다. 기사 계급 중에서 부유한 자들을 뽑아 원로원의 새로운 의원으로 삼았다. 속주에 살던 많은 주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눈에 띄게 번영하던 시기였고 분명히 백성을 만족시켜주었다.
하지만 즉위 1년 후 칼리굴라는 방탕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백성에게 값비싼 향락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원로원 의원들까지도 놀이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실제로 그도 친히 원형경기장으로 내려가 검투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칼리굴라가 헤롯 아그립바를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로 세우고 헤롯 아그립바 I세로 삼은 것은 재위 첫해였지만,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계속 로마에 머물게 했다. 아그립바를 분봉왕으로 등용한 직후 아그립바의 숙부인 필립(Philip)이 죽자, 가이우스는 그에게 필립의 사분(四分)영주의 지위를 내리고 아빌레네(Abilene)와 코엘레-수리아(Coele-Syria)까지 주었다. 참조 제9권, 148.
칼리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에게 자기를 숭배하도록 요구했고, 자기의 신상을 여러 지역에 세웠는데, 그중 한 곳이 유대인이 많이 살던 애굽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였다. 유대인들은 철학자 필론(Philo)을 필두로 하는 대표단을 뽑아, 로마에 가서 황제 신상에 경배하라고 자기들에게 강요하지 말 것을 황제에게 탄원하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의 신앙 양심에 완전히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대표단이 칼리굴라를 만난 일은 허사였다. 필론의 어떤 탄원도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자기의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도 이에 경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신상 하나를 예루살렘 성전, 곧 반항할 채비가 되어 있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 세우라고 주장하려던 즈음인 AD 41년에 죽고 말았다.
칼리굴라는 통치를 잘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선대의 카이사르를 모방하고 자신의 의무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다. 하지만 선황인 아구스도나 디베료처럼 공화정 형태로 통치하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는 원로원을 경멸했고 대장군(imperator)이나 집정관이 아니라 왕으로서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했다. 건물들을 부숴버리고 다른 건물을 대신 세웠다. 그는 거대한 도수관을 건설했는데, 그 유적은 아직도 로마시 여행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는 동양풍의 호화스러움을 갖추어 카이사르의 왕궁을 재건했다. 그는 티베르 강 입구에 로마를 위한 새로운 항구 시설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항구는 효율적일 수 있었겠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완공되지 못했다. 게다가 낭비가 심해 디베료가 절약해서 잘 채워둔 재정을 탕진했다. 칼리굴라는 충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이었으며, 두말할 나위 없이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다. 장난이 심한 성향과 더불어 잔인성도 드러냈는데, 모든 로마 백성에게 단 한 개의 목이 있어서 그들이 공유한 목을 한 번에 쳐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겨우 4년간 통치했다. 그는 자기가 모욕을 주었던 친위대의 한 장교에게 암살당했다. 친구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그의 시신은 헤롯 아그립바가 수습해서 묻을 때까지 버려져 있었다.
칼리굴라가 사망했다는 말이 원로원에 전해지자 황위 계승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두고 즉각 논쟁이 벌어졌다. 로마가 다시 원로원 체제로 돌아가야 옛 공화정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연설이 있었다. 그러면 황위 계승에 관한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비록 카이사르가 한 일 중에 나쁜 것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통치 아래 로마가 번영했으니 칼리굴라의 후계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Ⅴ. 글라우디오(AD 41~54)
칼리굴라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접한 친위대 군병들은 노획물을 찾기 위해 왕궁으로 몰려갔다. 그들 중 한 명이 겁에 질린 채 휘장 뒤에 숨어있던 칼리굴라의 삼촌이자 당시 50대였던 글라우디오(Claudius)를 발견하고는 붙잡아 다른 군병들 앞에 끌어내서 “여기 우리의 황제가 있다”라고 웃으며 소리쳤다. 이 말이 퍼져나가 곧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삽시간에 전 친위대가 로마 제국의 황제인 글라우디오를 둘러싸고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로마 원로원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제국의 왕좌는 군사 독재(military dictatorship)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 임명권은 친위대에서 전장에 있는 로마 군대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실 글라우디오의 경우에는 백성이 이미 원로원 앞까지 몰려와서 한 사람을 황제로 세우라고 요구하고 있었기에, 군인들이 글라우디오를 거명하자 원로원에서는 서둘러 그를 황제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로마는 군사 독재자 한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글라우디오는 괴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조롱당하고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동년배들과 즐겁고 평범한 교제를 나누지 못한 그는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 특히 역사 연구에 할애했고, 다량의 저술을 남겼으며, 연극에 관심이 있었고, 골동품 애호가였다. 그는 과거 로마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살던 시대의 로마 정세에 대해서는 분명 어두웠을 것이다.
국가 행정
글라우디오는 스스로 관대한 통치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치범과 유배간 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몰수한 재산도 되돌려줬다. 사원을 복원하고 거기서 빼앗았던 신상들, 특히 칼리굴라의 신상을 세우기 위해 치웠던 신상들을 되돌려줬다. 그는 군사력이 필요한 곳에 일부 군단을 보내 국경을 넘어 이동하게 했고, 제국 전역의 여러 속주에 세운 로마 식민 도시로 인해 유명해졌다.
글라우디오가 이룩한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원로원을 재조직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원로원의 의원 자격에 포함된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의원들을 제명하는 대담성이 있었다. 그런 뒤 원로원 의원의 기준을 충족시킬 정도로 부유한 기사들로 충원했는데, 이 기사들 중 다수는 속주에서 뽑힌 자들이었다. 이로 인해 원로원은 진정한 의미의 대의 조직이 되었고, 제국은 거대한 지방자치제의 부속물이 아니라 수도를 중심으로 황제의 통치를 돕는 부속 도성과 속주들로 이뤄진 광대한 국가가 되었다.
AD 47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는 제국 내에 7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이것은 AD 14년의 인구 조사에 기록된 약 5백만 명보다 굉장히 많이 증가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아구스도 이래 상대적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시대 덕분에 인구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입증되었다. 또한 제국 전역에 걸쳐 시민권이 널리 확장된 것도 드러났다. 이 7백만 명이라는 숫자에 여성과 아동의 수를 더해야만 하는데, 기번(Gibbon)의 계산에 따르면 로마 시민과 그들의 가속을 합친 총수는 약 2천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이 숫자에 다시 시민권이 없었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속주 백성과 로마 세계에 거주한 노예 집단을 합산해야만 한다. 1세기 중반의 총 인구수를 1억 2천만 명이라고 추정한 기번의 계산이 너무 많긴 하지만, 8천만에서 1억 명 사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참조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 B. Bury, 1:42).
골동품에 대한 흥미 때문에 글라우디오는 마음으로나 정신으로 모두 진정한 로마인이었다. 그의 궁정 주위에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외국인, 즉 비(非)로마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관대했지만, 그는 이들이 전심으로 충성하지 않는다는 증거에 유의했다. 그는 유대인들도 관대히 다뤘으며, 이들은 디베료 치세 때보다는 분명히 더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도 유대인 가운데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글라우디오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참조 제10권, 80, 81). 이때 추방된 자들 중에는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설교할 때 알게 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있었다(참조 행 18:2).
유능한 황제가 되고자 노력하는 글라우디오의 근면성은 놀라웠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포룸(Forum, 대광장)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으로 백성을 위해 재판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자신들의 문제를 얘기하고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도움을 구했다. 이따금씩 그가 자리를 떠나려고 일어서면 그들은 모든 사건을 다 들을 때까지 앉아 있어달라고 떼쓰곤 했다. 그는 건축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는데, 대개가 칼리굴라 시절에 시작된 공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티베르 강 입구가 침적토로 막혀버렸기 때문에 로마에 매우 유용해진 오스티아(Ostia)의 새로운 항구 건설이 성공적으로 마쳐졌다. 그는 칼리굴라가 착수한 거대한 도수관 공사를 완성했고, 로마에 물을 대기 위한 거대한 터널도 완성할 수 있었다. 브리튼(Britain)이 완전히 정복되어 그 지도자 중에 카락타쿠스(Caractacus)가 로마로 잡혀왔다. 갈리아(Gaul)에서는 드루이드교도가 진압되었고 브리튼에서도 상당 부분 진압되었다.
글라우디오는 많은 시간과 돈을 로마 대중의 여흥에 사용했지만, 분명히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물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마치 골동품 애호가가 진정으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오래된 로마인의 일과를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재정은 고갈되었다. 곡물의 수확은 적었으며 백성은 이를 두고 황제를 비난했다. 그가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일할수록, 그들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더 많이 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늘 인기 있는 통치자가 되지 못했다.
개인 생활
게다가 그는 방종을 일삼았고, 나이가 들수록 술잔과 음식에 절제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끈질기게 일해서인지,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과식을 하곤 했다. 그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갔고, 궁중 생활의 해악과 음모로 인해 그 과정은 더 가속화되었다.
글라우디오는 결혼을 네 번 했다. 멧살리나(Messallina)와 결혼한 세 번째 결혼 생활은 특히 혐오스러웠다. 그녀의 부도덕한 행실은 의심의 여지가 있었으며, 당시 풍문에 의하면 그녀는 사실상 여러 정부(情夫)들 중의 한 명과 결혼식을 한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멧살리나는 간통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고 나서 글라우디오는 조카인 아그립피나(Agrippina)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자기 아들인 네로(Nero)가 양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황위를 계승하도록 음모를 꾸몄던 여자이다. 이는 그녀가 글라우디오의 친아들을 제거했다는 뜻인데, 실제로 얼마 후 죽이고 말았다. 아그립피나는 네로가 황위를 취하도록 길을 터주기 위해 남편이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결국에는 글라우디오를 독살할 계획을 꾸몄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독을 탄 음료를 마셨지만, 너무 과식한 탓인지 아니면 마신 포도주의 양 탓인지 모르지만 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그립피나가 부른 의사는 겉으로는 왕의 소화를 돕는 척하면서 독이 칠해진 깃털을 황제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글라우디오는 점차 인사불성 상태에 빠졌고 독의 효과로 인해 죽어버렸다. 네로가 황위를 계승했으니 이때가 AD 54년이었다.
Ⅵ. 네로(AD 54~68)
새로운 황제의 집안은 약 200년 전에 평민 계급에서 상승하여 로마 사회에서 오랜 기간 명성이 자자했다. 일족 중에는 집정관과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와 장군도 여럿 있었다. 네로(Nero)의 친아버지는 근친상간, 간음, 살인, 반역 등 여러 죄목으로 고소되었다. 그는 칼리굴라의 누이인 아그립피나와 결혼을 했고, 그들의 자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Lucius Domitius)가 역사상의 네로이다. 네로가 겨우 세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유배 보내졌으므로 숙모가 보호자가 되었다. 이 소년이 물려받은 재산을 칼리굴라가 모두 빼앗았지만 글라우디오가 후에 돌려줬다.
소년이 받은 교육에는 해로운 것이 많이 포함되었다. 그는 훌륭한 예절과 왕실 예법과 자기의 권리와 특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부패와 부도덕에도 너무나 정통했다. 그의 모습은 훌륭한 가문 출신의 로마 청년들이 많이 겪은 불행의 전형으로, 그의 교육은 제대로 감독받지 못한 하인들에게 맡겨졌다. 예외라면 그의 후견인인 세네카(Seneca) 정도이다. 이 가정교사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행 18:12) 아가야(Achaia)의 속주 집정관이던 갈리오(Gallio)의 형제로서 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철학자로 자라나서 세속적인 면으로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곁에 두는 방법과 그들과의 우정에서 유익을 얻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원칙은 그가 표명하는 스토아 철학에서 딴 것으로 훌륭했다. 그는 악한 세대와 장소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지키는 방법을 알았다. 그가 네로에게 끼친 좋은 감화력이 새로운 치세 초기에 지대했음은 명백하다. 반면에 그의 영향력이 충분히 훌륭하거나 설득력이 있지 않았음도 분명하다. 소년의 나쁜 특성과 방자함과 그 주변의 부패상을 극복하기에는 세네카의 능력 혹 어쩌면 의지가 부족했을 것이다.
네로의 어릴 적 친구 가운데는 부루스(Burrus)도 있는데, 그는 법정 경험이 많은 치안 장관이었다. 부루스는 천성적으로 빈틈없고 수양이 잘된 사람이었으며, 그 지위에 앉은 사람치고는 놀라운 도덕적 감수성을 지녔다.
네로에게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그는 아그립피나가 친아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던 글라우디오의 친아들, 브리탄니쿠스(Britannicus)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부루스가 네로를 글라우디오의 적합한 후계자로 친위대에 제시했을 때, 친위대는 그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를 논박할 세력이 없었으며, 무기력한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네로가 황제에 등극한 때는 17세 무렵이었다.
이때 아그립피나는 네로의 도움으로 여제(女帝)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황실 가마를 탔고 의견을 피력했으며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녀는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특정인을 제거하기 위해 독살자들을 고용했다. 그녀는 어린 황제인 자기 아들을 완전히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자 했다. 이런 모친의 통제를 좌절시키기 위해 세네카와 부루스는 네로의 뜻을 들어줌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자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네로의 변덕에 따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지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초기 몇 년간 네로의 행로는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다.
그의 행동들 중에는 고의로 악의를 띤 것이 많았다. 그는 브리탄니쿠스를 독살했다. 그는 정부(情婦)를 위해 아내 옥타비아를 버렸고, 그래서 아그립피나가 버림받은 옥타비아를 거둬 보호했다. 그는 글라우디오의 대신이자 아그립피나의 가신인 자유인 팔라스(Pallas)를 제거했다. 대중의 갈채에 매료된 그는 조심성 없이 경기장이나 극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제대로 변장하지도 않은 채 실제로 노상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언쟁에 끼어들기도 했다. 네로의 가장 좋은 점을 말하라면 그가 정사를 모두 대신들에게 맡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지속적으로 원로원에 정사를 모두 알려줘서 네로 어머니의 분노에 대한 방벽을 확보했다. 네로는 공공 재판장으로서 실제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무례한 대중이 왕좌를 겨냥해 쏟아놓는 조소를 무시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의 초기 통치는 꽤 괜찮았으며, 특히 후기와 비교하면 더욱 그러했다.
AD 58년은 황제가 악화된 해로 기록된다. 이 제2기의 첫 번째 사건은 네로가 왕실에서 아끼던 오토(Otho)의 방탕한 아내 폽패아(Poppaea)와 사랑에 빠진 일이었다. 오토가 자기 아내와 네로의 추잡한 관계를 반대하는 기색을 보이자, 네로는 그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루시타니아(Lusitania, 대략 오늘날의 포르투갈)로 발령내렸다. 두 번째 사건은 의심할 여지없이 폽패아의 악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립피나를 암살한 일이었다. 황제는 이 무시무시한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 두려웠지만, 그가 모친의 사망 후 로마로 되돌아오자 원로원 의원들과 백성에게 굉장한 과찬을 받았다. 그후 황제는 극도로 자기 맘대로 행동하면서도, 나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미신에 사로잡힌 채 살았으며, 비겁하며 방종과 호색을 일삼고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또한 가장 극악하고 타락한 유흥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는 부도덕을 공공연히 자행하며 촉발시키는 공공 만찬을 베풀면서 귀족과 평민들을 이런 유흥으로 끌어들였다. 대중도 철저히 부패 가운데로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부루스와 세네카는 네로 대신에 계속 활동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졌다. 티겔리누스(Tigellinus)와 루푸스(Rufus)라는 악한 사람들이 대신 총애를 받았다. AD 62년에 부루스가 사망했는데, 아마도 독살당했을 것이다. 세네카는 공직에서 물러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네로는 공개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한 후,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그녀를 죽인 후 폽패아와 결혼했다. 이때 황제의 주색잡기 때문에 재정이 바닥났고, 이에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로마의 화재
네로의 치세 중 가장 잘 알려진 이 비극적인 대학살은 AD 64년에 일어났다. 도성을 구성하는 열네 개 구역 중에 겨우 네 개만 남았고, 네 개는 전소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공공건물과 왕궁들을 포함해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여러 개가 파괴되었다. 심지어 네로의 왕궁도 피해를 입었다. 수천 채의 평민 가옥과 빈민 지대의 토끼장 같은 집들이 일소되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예술품들이 파괴되었고, 법적·역사적 가치가 대단한 문서들도 틀림없이 불에 타버렸을 것이다.
네로가 서사시 트로이의 약탈(Sack of Troy)을 외면상 비극적으로 음송하기 위한 배경으로 불을 놓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을 거부할 만한 특별한 근거는 전혀 없지만, 다른 일화들도 있다. 그중에는 그가 다만 불을 끄려는 효율적인 시도를 금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도성을 웅장하게 다시 재건하여 복구된 도성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 위한 기회로 삼고자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네로가 화재를 일으켰건 혹은 용인했건 간에 도가 지나쳤음은 사실이다. 그도 이 점을 깨닫고 신들에게 특별 제물을 바치면서 속죄를 빌었다. 그러나 화재 생존자들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스도 출생 후 100년경에 저술한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도움도 황제의 선심 전략도 하늘을 달래는 온갖 방법들도 명령에 의해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념을 없애거나 추문을 잠재우지 못했다”(Annals xv. 44; Loeb ed., Tachitus, 4:283).
기독교 박해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그는 재난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당시 상당한 세력으로 자라났음에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불법 종파 가운데서 희생양을 찾아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따라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는 악행으로 인해 미움을 받던 계층, 즉 대중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범죄자로 대신 내세워 극도로 용의주도한 잔악행위로 처벌했다. 그 명칭의 창시자인 크리스투스(Christus, 그리스도)가 디베료 치세 때 속주 재정관이었던 본디오 빌라도(Pointius Pilatus)의 판결로 사형당하여 그 유해한 미신이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일어나서 그 악습의 본거지인 유대 지방뿐 아니라 세상에서 끔찍하거나 수치스러운 모든 일이 집결하여 유행하는 수도에서도 성행하게 되었다”(ibid.). 타키투스의 의견도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네로의 그리스도인 박해를 계속 묘사한다.
“먼저 그 종파의 일원이라고 공언한 자들이 체포되었고, 그 다음 발각된 자들 중에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 많았는데, 이는 꼭 방화 때문만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증오심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최후에는 조롱이 뒤따랐는데, 그들은 야생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개들에게 찢겨 죽었거나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낮이 지나면 불을 붙여 밤을 밝히는 등불로 사용되었다. 네로는 자기 정원을 군중에게 개방하고 경기장에서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 전차 모는 전사 복장을 입고 군중과 어울려 있거나 자기 전차를 타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심한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국가의 안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만행으로 인해 희생된다는 인상 때문에 동정심이 일어났다”(ibid., 283~285).
베드로와 바울
네로가 AD 64년에 시작한 박해는 그리스도인에 관한 정책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것은 네로의 변덕과 충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취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박해가 극심했지만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는 현재로서 측량하기는 힘들다. 타키투스와 동시대 사람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 곧 새롭고 해로운 미신에 빠진 부류에게 처벌이 가해졌다”(Nero vi. 16; Loeb ed., Suetonius, vol. 2, 111).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순교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속주들에서도 그들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교도 역사가들 중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이 사도들이 네로 시절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 목소리로 언급한다. 그들 중에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c. AD 230 사망; Against Marcion iv. 5)와 유세비우스(Eusebius, c. AD 325 사망; Ecclesiastical History ii. 25 [5, 6])가 있다.
수도 로마의 포룸 외곽, 고대 원로원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래된 마메르티나(Mamertina) 지하 감옥은 여전히 관광객들에게 바울이 옥살이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소개된다. 바울의 죽음은 AD 66년에서 네로가 사망한 68년 사이일 것이라고 추산된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도 뒤이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했다고 한다(참조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iii. 1; 사도행적, 537, 538,).
네로의 사망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산발적인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 네로는 도성을 재건하느라 분주했다. 도로들이 새로 깔리고, 수많은 미적 기법과 예술적 개발을 통해 건물들이 세워졌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재건 사업에 소요되었는데, 그 돈은 속주의 부자들과 과도한 징세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재건으로는 백성을 달래지 못했다. 불평은 이제 더 이상 서민들 사이의 불평이 아니었다. 로마인의 경제적, 사회적 지도자격인 귀족들도 정부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두 개의 음모 중 좀 더 치밀했던 음모가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재판을 받아 유죄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 중에는 네로의 오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세네카도 있었는데, 그는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은거하여 로마 도성과 그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허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네로는 그를 음모자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었고, 그는 범죄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네로는 더 방탕하고, 더 신뢰도가 떨어지며, 더 주색에 빠지고, 더 악하게 살았다. 그의 바닥없는 자기 본위는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초기부터 스스로 시인이자 예술가라고 자처하던 주장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로마가 불타기 전에 그는 동방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 했었다. 이런 계획은 로마가 재건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마침내 그는 66년에 출발해서 거의 2년간 외유했다. 그의 여행은 부패하고 썩은 허영의 공개적 과시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올 때 그는 개선식을 거행하며 로마에 들어왔지만, 국민과 특히 귀족들의 불만을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이때 네로는 속주의 장군들 사이에 심각한 이반(離反) 현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스페인에 주둔했던 갈바(Galba)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갈리아 지방의 장관 중 하나인 빈덱스(Vindex)가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갈바는 공모에 참여하기를 주저했지만 빈덱스가 음모를 진행시켰다. 네로는 빈덱스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그때는 이미 갈바가 음모를 실행하기로 결심한 이후였다. 백성은 네로를 반대하며 아우성쳤고, 원로원도 그를 경원시했으며, 친위대도 그를 경호하는 임무를 거부했다. 네로가 로마에서 도망치자 원로원에서는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네로가 무기를 자기 가슴에 겨누고 길가의 허름한 집에 누워있을 때 어떤 노예가 그것으로 급소를 찔렀다. 그가 죽어갈 때 군병들이 그를 잡아가기 위해 들이닥쳤다. 독재자는 나이 서른에 14년간의 수치스런 통치 끝에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그때가 AD 68년이었다.
Ⅶ. 갈바로부터 하드리아누스까지(AD 68~138)
네로의 후계자들(AD 68, 69)
이윽고 네로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군병들은 스페인의 대장군인 갈바(Galba)를 선출했다. 이것은 수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군병들이 황제를 옹립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이러한 선택을 통해 로마는 그때까지 카이사르의 모든 후계자들을 제공했던 오래된 율리우스 가문에서 등을 돌렸다. 갈바는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황제가 되고 싶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는 음모를 꾸민 수많은 귀족들을 사형에 처했고, 일부는 재판도 하지 않고 죽였다. 새로운 황제는 홀로 황제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피소(Piso)라는 이름을 가진 저명한 로마인을 공동 통치자로 추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피소를 임명한 일로 인해 네로의 아내였던 폽패아(Poppaea)의 전 남편인 오토(Otho)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졌다. 오토도 장군으로서 일부 군병들의 추앙을 받아 친위대 앞에 서게 되었고, 그들은 그를 황제라고 부르며 맞이했다. 군병들은 갈바를 버렸으므로 갈바가 피소와 함께 포룸에 나타나자 군병들은 그를 즉시 암살했고, 잠시 후 피소도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런 유혈과 혼란의 소문이 갈리아 지방에 이르자, 그곳의 특사였던 비텔리우스(Vitellius)는 황제에 오르라는 군병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 있던 로마 군단이 연합하여 그를 뒤따르자 그는 로마로 향해 전진했다. 오토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비텔리우스와 맞닥뜨렸지만,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비텔리우스는 수도로 행진해 들어가 힘없는 원로원에게 황제라는 승인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후보자가 일어났는데, 당시 유대의 특사로 있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중요한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낸 사람이었다. 그는 브리튼에 있는 군단의 특사를 역임하다가 결국 집정관직을 쥐게 되었다. 네로의 치세 말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심각한 소요가 발생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곳에 파견되어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동부의 군대는 그를 황제라고 공포했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던 군대들도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로마로 진군해 가서 적대 세력인 비텔리우스를 패배시켰다. 원로원은 기꺼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라고 선포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네로에게는 후계자가 세 명이나 있었던 셈이다.
이 중요한 왕조의 변화기 동안 전 로마제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외부에는 제국의 혼란을 틈탈 만한 강한 세력이 없었음에 다시 한 번 주목해야만 한다. 로마의 세력에 대항할 만한 유일한 세력인 파르티아(Parthia)도 로마인들의 손에 막 저지를 당했다. 제국 내부에는 이 동요에 간섭할 만큼 조직적인 “야당”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수도가 혼란스러운데도 제국의 일상생활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들이 존경하는 장군을 보좌에 앉히려는 군대들이 로마로 진군해 가는 경로에 있던 지역에는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부 속주의 특사와 속주 재정관과 속주 집정관들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상업에도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자본을 투자한 귀족들이 계속되는 정권 변화에 휘말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제국의 생활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어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던 100년 전과 다름없이 지속되었다. 무역도 계속 공해 상에서 진행되었다. 농부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로마의 군단들은 충성을 바칠 만한 장군들을 선택하면서 국방의 의무를 계속했다. 온갖 부패 속에서도 대중 가운데는 충직한 계층이 있었으며,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속 자녀와 함께 의무를 다하며 지역사회의 활력 넘치는 생활의 기초를 이뤘다. 사제들은 이교 신전에서 그 의무를 다했다. 신비주의 종파들의 열성신자들도 숭배를 지속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감화를 끼치는 누룩으로 계속 성장했다.
베스파시아누스(AD 69~79)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의 큰아들 티투스(Titus)에게 반항적인 유대인들을 계속 진압하도록 부탁하는 한편 천천히 로마로 진군해 갔다. 수도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수리아의 특사인 무키아누스(Mucianus)와 황제의 둘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보살폈다.
티투스는 자기 아버지가 시작한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예루살렘은 AD 70년 봄에 포위되어, 8월말에 이르러서는 모진 저항 끝에 거의 멸망된 상태로 정복되었다. 티투스는 많은 전리품과 수천 명의 포로를 이끌고 로마로 개선했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지금도 로마에 있어서 그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유대 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제10권, 84~89을 참조하라).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색 옷을 입자마자, 그를 지지했던 갈리아과 게르마니아 남부의 일부 로마 군단이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갈리아 속주에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무키아누스의 병력이 나타나자 그 로마의 군단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고 반역은 수그러졌다. 하지만 이 반역에 동참했던 부족 성향의 병참 군단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반란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로마 정부는 그때부터 부족 성향의 병참 부대들을 그들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여러 곳으로 골고루 파견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았다.
티투스가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오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를 친위대 장관으로 삼고 호민관의 권력, 곧 호민관은 아니지만 그 권위를 주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제국에서 건전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주된 공헌은 재정 분야인데, 베스파시아누스의 절약으로 인해 앞선 황제들의 사치로 고갈되었던 재정이 회복되었다. 여러 속주가 재정비되고 제국의 방위도 북으로는 브리튼까지 그리고 라인강, 도나우강,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하는 지역까지 강화되었다. 본국에서는 인상적인 건축 계획을 통해 새로운 정권에 번영의 분위기를 부여했다. 불탔던 카피톨리노의 신전(Capitoline Temple)이 재건되고 평화의 사원도 세워졌으며, 지금도 옛터가 남아 있는 거대한 콜로세움 건축도 시작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가 매우 안정되었던 탓에 79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도 티투스는 아무런 혼란 없이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티투스(AD 79~81)
이 아들은 유능한 아버지를 계승할 자격이 충분히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통치 기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초기 공약의 대부분을 성취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관한 추억은 두 번의 재해로도 빛을 바랬다. 79년에 베수비우스(Vesuvius) 산이 분화하여 도성 폼페이(Pompeii)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을 용암으로 뒤덮어 버렸다. 발굴된 폐허는 기독교 시대 1세기의 이탈리아 로마의 생활상에 관련된 지식의 보고 역할을 했다. 1년 후에 수도 로마는 다시 비참한 화재를 겪었는데, 그 화재는 3일간이나 지속되어 도성의 많은 부분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티투스는 이런 재난 때문에 비난을 받지는 않았으며, AD 81년에 사망하자 제국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아무런 반대 없이 황위를 계승했다.
도미티아누스(AD 81~96)
새로운 통치자는 진정으로 제국의 정치, 사회, 문예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가 이룬 성과들은 그의 난폭했던 독재 정치에 반발하는 증오심으로 인해 가려졌다. 그렇지만 역사에는 그의 지도력 아래 제국이 발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브리튼부터 칼레도니아(Caledonia, 스코틀랜드)까지의 출정을 윤허했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로 가서 강의 동편 땅 일부를 합병하기도 했다. 마인츠(Mainz)에 주둔했던 2개 군단의 반란도 쉽게 진압되었으며, 이로 인해 어떤 곳이든 2개 이상의 군단이 영주하지 못한다는 정책이 마련되었다. 도나우강 하류 건너편에 살던 게르만족의 반란은 어렵사리 진압되었지만, 도미티아누스가 그들과 맺은 화의는 오래 가지 못했다.
치세 초기에 그는 황제를 신격화하여 존경을 표하라는 법을 강행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을 경배하기 위해 플라비알레스(Flaviales) 사제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스스로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dominus et deus, 군주 겸 신)이라는 직함을 취했으므로, 제국 전체에 걸쳐 황제 경배를 강화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 간 것이 바로 이때라는 점은 틀림없으며, 다른 제자들도 그의 치세 때 많이 사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박해가 어느 정도로 극심했고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지는 그의 치세에 관한 1차 기록이 거의 없는 관계로 말하기 힘들다. 이에 관한 참고문헌의 대부분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서처럼 후대에 기록된 기독교 서적들이다. 이 때의 박해는 제국의 계획적인 정책을 의미하지 않으며, 네로 때의 박해처럼 황제의 독재적인 태도, 곧 로마인의 보편적인 행동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종교 단체들을 향한 황제의 적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동일한 이유로 20년 전에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특정 유대인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AD 96년에 암살당할 때까지 지속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는 원로원과의 신랄한 대립이 점점 증가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유력한 원로원 의원들이 반역죄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지만, 폭군이 사망한 뒤에 원로원은 공문서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고 그에 관한 기억도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네르바(AD 96~98)
도미티아누스를 제거한 공모자들은 96년 가을에 그의 후계자로 네르바(Nerva)라고 알려진 늙은 원로원 의원을 선택했다. 그는 고매한 인품을 소유했으나 선대 황제로부터 이어받은 문제들을 헤쳐 나갈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북부 게르마니아의 특사인 트라야누스(Trajan)를 양자로 삼아 함께 일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티투스에게 줬던 것처럼, 네르바도 트라야누스에게 호민관의 권위와 속주 집정관의 통치권(imperium)을 주었다. 역참 제도의 비용을 도성들에서 제국의 재정으로 귀속시킨 것과 국가에서 고아를 도와주는 결정을 내린 것을 제외하고는, 네르바의 치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가 98년에 죽자 트라야누스가 그의 뒤를 이었다.
트라야누스(AD 98~117)
새 황제는 스페인의 이탈리아 토착민으로 속주 출신 가운데 선정된 최초의 통치자였다. 그는 자기를 고른 것이 훌륭한 선택임을 증명했다. 그의 품성은 건실했고 높은 수준의 행정적 자질을 갖췄으며 훌륭한 장군이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통치하면서 정부를 정연하게 번영시키고 군대도 잘 통제했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다수의 건축 계획을 착수하고 속주를 관통하는 도로들도 개수하고 연장했다. 이런 계획들에는 돈이 들어갔지만 국가 재정이 든든한 기반 위에 서 있었으므로 재정 부담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 잠시나마 증명되었다.
트라야누스의 치세 중에는 군사 출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두 번의 힘겨운 전쟁을 통해 그는 도나우강 북쪽의 다키아(Dacia)를 로마 속주의 목록에 첨가시켰다. 이후 113년부터는 파르티아 정복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아구스도가 세운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지만, 많은 역사학자는 로마 영토의 확장을 그렇게 많이 시도한 트라야누스가 현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별 일이 없었으면 번영했을 치세도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훼손되었다. 그중 한 가지는 북아프리카, 구브로, 애굽, 메소보다미아에 살던 유대인들의 심상치 않은 반란이었다. 반란의 규모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수의 로마 군병들이 투입될 정도로 심각했다. 양측 모두 인명 손실이 상당했다. 유대인들은 치열하게 싸웠으므로,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무시무시한 대량살육이 유대인들과 그 대적들 사이에서 자행되었다.
다른 한 사건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였다. 트라야누스는 그리스도인을 압제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표했다. 본도(Pontus)의 총독이었던 소(小)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가 황제에게 보낸 흥미롭고도 중요한 문서가 현존하는데, 거기에는 자기 관할구역에 기독교가 너무나 많이 퍼진 나머지 신전은 비어가고 우상숭배용 물품을 만드는 공예가들이 일을 못 찾는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발당한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고 오게 하는 정책을 펴서 그들이 자기 신앙을 인정하면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 결과 신전의 우상숭배가 상당히 회복되었다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가 한 일을 용인한다고 답신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발당한 사람은 누구라도 고발자의 이름이 고소 내용에 기명되지 않으면 기소될 수 없고 기독교 신앙을 부인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지 말라고 권고하며 조건을 명시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거나 그리스도인으로 입증된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Pliny Letters x. 96, 97).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처리에 관해 로마 황제가 입안한 일련의 명확한 정책들 중 최초의 것이었다. 이 정책은 140년 동안 폐지되지 않았기에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 AD 250년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치세 때는 좀 더 가혹한 새 법령이 공포되었는데, 그것은 전 교회의 근절을 겨냥한 것이었다.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요 그림자 같은 인물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있었다. 그의 생애의 말년에 관한 전승에 의하면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그 여정 중에 그가 일련의 서신을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들은 오랫동안 여러 학자를 고심케 만든 의문점을 야기했다. 이 편지들이 진본이라면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강력한 감독 제도가 있었다는 훌륭한 증거일 것이다.
역사가들은 트라야누스의 치세를 로마의 긴 연대기 가운데 최고 중의 하나였다는 데 동의한다. AD 117년 그가 수도로 귀환하던 중 길리기아에서 사망한 것은 제국에 크나큰 손실이었다.
하드리아누스(AD 117~138)
트라야누스는 죽기 전에 역사상 하드리아누스라고 알려진 사촌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가 황권을 계승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비범한 정력의 소유자로서 예술과 문학에 깊은 관심과 헬레니즘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부의 책임을 예민하게 느껴 제국 곳곳을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드리아누스는 영토확장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트라야누스의 치하에서 얻은 동쪽 영토에서 로마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는 수많은 행정 개혁을 실행했으며, 도로와 건물과 도수관 공사 계획에 착수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은 옛 예루살렘 터에 식민지를 세우려고 착수했을 때 시작된 또 다른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다. 그 반란이 처음에는 산발적이어서 지역별로 진압했지만, 132년의 반란은 좀 더 조직적이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가 나서야만 했다. 135년이 되서야 반란이 마침내 진압되었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명을 잃었다(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발생한 반란에 대해 좀 더 일반적인 논의를 보려면 제10권, 91, 92을 참조하라).
하드리아누스는 네르바가 시작했고 트라야누스도 뒤따랐던 제도, 곧 훌륭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황위를 물려 주는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여기까지만 다뤄도 이 논문의 주제인 신약 시대의 로마 역사에 해당하는 시기를 이미 넘어선 설명이다.
Ⅷ. 로마의 문화와 철학과 종교
로마의 문화
로마 문화는 헬라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로마인은 본래 예술이나 시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실용과 법률과 국방을 중시했다. 로마인들이 알렉산드리아 시대가 헬라 배경에서 고양되어 대부분의 동방 세계로 퍼져나간 헬레니즘 문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바로 동방의 영토 획득을 누리면서 여가를 더 누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문화를 로마인들이 즐겼기 때문에 이를 자기들의 필요에 맞게 고치고자 했다. 헬라의 극작가, 시인, 화가, 조각가, 철학자는 로마로 몰려들었고 원로원 의원과 부자들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해가 지날수록 로마의 지식층은 헬라 예술의 아름다움과 기품에 자극을 받아 주변에 넘쳐나는 헬라 문화를 모방하고 로마화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철학
로마가 헬라 철학을 모방한 것만큼 문화 차용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도 없다.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명성은 일시적으로 실추되었지만, 3세기의 플라톤 철학의 부흥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이었던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게네스(Origen)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다음에 신(新)플라톤 철학은 기독교의 종파적 경쟁자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에게 예정설의 씨앗을 건네줬다. 그래서 이교 사상의 영향력은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을 통해 계속 세상에 뻗어나가게 되었다.
소피스트(Sophist)는 냉소적인 영향력을 계속 휘둘렀다. 그들은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다. 따라서 지식과 진리는 상대적이며, 각자가 아는 것은 자신에게 진리이므로 두 개의 상반되는 명제도 각각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자 요한이 기억했던 장면, 곧 진리의 주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며 냉소적이면서도 애처롭게 물은 빌라도의 질문(요 18:38)에는 소피스트의 곤경이 예증돼 있다. 그들은 로마의 상류 사회를 어울리지 않게 장식하는 다수의 거짓 지식인들을 자기들에게로 끌어들였다.
에피쿠로스(Epicurean) 철학도 로마에서 유행했다. 이것을 옹호하는 자들은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뤄져 있다고 가르쳤다. 생명, 정신, 영혼, 육체가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과거나 미래가 없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영혼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사망시에 흩어지므로 인간의 영속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동안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견실한 사고를 가진 에피쿠로스 신봉자에게 이런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표현의 최고인 선과 유용성을 통한 만족이지만, 심약한 신봉자에게는 방종과 가장 저급한 성향을 통한 만족을 의미했다. 호라티우스(Horace)와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로마 에피쿠로스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훌륭한 윤리적 특징이 스토아 철학에 가미되었다. 이 철학의 창시자는 페니키아인 제논(Zeno)으로서, BC 300년경 아테네의 “채색된 현관”(painted porch)이라는 뜻의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에서 가르쳤다. 그는 모든 물질과 힘을 하나의 실체로 환원시켰다. 그는 생명이란 로고스(logos) 즉 모든 물질에 퍼져 있는 신령한 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에 관한 범신론적 개념이 초래되었고, 합리성이 물질계에 부여되게 되었다. 인생의 합리적인 길을 찾는다는 것은 경건한 이치와 의미의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스토아 철학가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라고 불렀다. 성공적으로 그렇게 하려면 덕, 곧 인간 삶의 최고 목표를 얻어야 했다. 국가와 인간과 자기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덕의 최고의 표현이었다. 질서가 잘 잡힌 사회는 이런 생활 방식에서 성장해야만 한다. 따라서 강력한 국가, 선한 길로 이끌고 잘 다스리는 지도자는 사회의 최적 조건이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Mars’ Hill, 마르스의 언덕)에서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을 만났다(참조 행 17:16~21).
전횡을 일삼던 도미티아누스의 후계자인 네르바부터 시작해서 70년 동안의 황제들은 스토아 철학 신봉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로마가 유례없는 “황금” 시대를 누리는 일에 기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Meditations)은 오늘날에도 지적 자극을 주는 책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스토아풍의 황제들은 이상적인 스토아식 국가를 원했기 때문에 불법 종파인 그리스도인들과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기소 처분하는 데 엄격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윤리적인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도전자들이었다.
전 세계적인 헬레니즘 형태를 지닌 헬라의 사상과 문화는 호전적이고 철학적이지 않은 로마를 정복했다. 하지만 이런 사상과 문화로도 로마는 구원받지 못했는데, 이는 헬레니즘에는 인생을 구원하는 특징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노화, 지나친 영토 확장, 자기 통제 부족, 그 자체로 최선인 것들에 진실하지 못함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 실패함으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로마는 그 자체로 효능이 없는 헬레니즘을 차용했으나 악용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기독교를 차용했으나 그것 역시 배교로 이끌었다. 군사, 경제, 정치, 윤리의 쇠퇴는 노화와 부패의 결과였다.
원시 종교
초기의 로마 종교는 물신숭배와 마술이 뒤섞인 간단한 체계였다. 초기 로마인은 정령 숭배자여서 나무와 돌과 특정 동물과 새 같은 물체에 영이 깃들여 있어서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 역사의 후기에도 여전히 사제는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다. “auspice”(전조)라는 영어 단어는 두 개의 라틴어, 곧 “새”라는 뜻의 아비스(avis)와 “바라보다”라는 뜻의 스페치오(specio)가 합성된 것으로,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자연 사물에 관한 이런 미신적인 관심으로 인해 대체로 장난기 많은 신령 혹은 귀신은 인간 생활에 간섭하여 해를 끼치지 않도록 달래줘야만 한다는 신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종교 의식은 일차적으로 귀신들의 간섭을 방지하고, 이차적으로는 그들의 도움을 확보하기 위해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로마 종교는 인간과 신들 간의 일종의 계약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종교 의식이 적절하게 거행되면, 신령은 자기를 달래 준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적어도 괴롭히지 말아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로마 종교에서는 숭배하던 신령들이 잊혀진 뒤에도 오래도록 이 개념은 영속되었다. 그것은 성자숭배에 반영돼 있다.
농장과 가정의 신령들(영어로 lares와 penates)는 특별한 관심을 받았으며 독특한 가정 의식을 통해 숭배되었다. 베스타(Vesta)는 화덕의 여신이 되었고 케레스(Ceres)는 들판의 여신이 되었다. 불카누스(Vulcan)는 불의 신령으로 숭배를 받았다. 이와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 경배받던 더 위대하고 강력한 신들도 있었다. 나중에 전쟁의 신이 된 마르스(Mars)가 원시 시대에는 농사의 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늘의 신인 유피테르(Jupiter)는 로마 판테온(Pantheon, 만신전)에서 최고의 신이 되었다.
확장된 판테온
로마의 신들을 모신 판테온은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더 커졌으며 로마인의 생활도 더 복잡해졌다. 경배의 대상도 실재 인격체보다는 사상이나 개념 쪽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사랑, 화덕, 모성, 다산, 부, 정치 수호신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 도성 자체의 신령까지 로마는 모든 것을 숭배했다. 이 추상적 개념들은 인격화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외국의 영향도 로마 종교에 지대한 작용을 했다. 헬라 철학으로 인해 고대 신들에 대한 로마 지식층의 신뢰가 파괴되는 현상이 촉진되었다. 불가지론이나 무신론 같은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는데,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수십 년 전에 특히 심했다. 동시에 로마 제국의 권세가 확장됨에 따라 많은 외국 신들이 차용되었다. 만약에 로마가 이미 숭배한 신들이 그와 같은 번영을 가져왔다면, 동맹을 맺거나 정복한 나라의 신들을 추가하면 더 많은 유익을 얻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외국의 신들을 인정해 줌으로 정복지 백성의 충성도 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정책적으로 로마는 정복지 백성의 정치적 및 종교적 관습 모두에 대해 놀랄 정도로 관대했고, 어디서나 가능하면 그런 관습을 손대지 않고 내버려뒀다.
오직 저항을 계속하는 속주에서만 토착 종교를 짓밟고 로마의 방식을 속주민에게 강요했다. 이런 예로는 갈리아 지방을 들 수 있는데,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는 백성을 계속 선동한다고 고발당했다. 심지어 한 세기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불안한 유대에서도 유대인들은 토착 정치 체제를 유지하도록 허용받았지만, AD 6년에 이르러 아르켈라우스(Archelaus)에 대항하는 민중의 봉기로 인해 불가피하게 제국의 속주 재정관 체제로 대체되었다. 신상이 없어서 로마인에게는 이상한 무신론으로 보였을 유대인의 종교는 그때에도 기능을 발휘하도록 허용되었다. 비록 유대인이 로마(Roma) 즉 로마의 관념상의 수호신이나 로마 정부나 황제에게 비는 것을 거절했지만, 로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여호와에 대한 경배를 지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신비주의 사교
그러나 동양의 신비주의 사교를 로마 당국이 흡족해하며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런 사교들은 굉장히 의식적이고 인격적이었다. 각 신비주의 사교의 중심은 디오뉘소스(Dionysus), 박쿠스(Bacchus), 이시스(Isis), 대모(the Great Mother, 자연을 인격화한 신), 미트라(Mithras) 같은 특정 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신봉자는 부수적으로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신봉 행위는 사교의 신 혹은 여신을 향해 이뤄졌다. 사교의 사제는 신봉자에게 필요한 지침을 준 후에 그를 가입시켰고, 단계별로 차차 사교 숭배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끌고 들어갔다. 그는 점점 신에 관한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되며, 결국 신과의 특별하고 신비로운 합일의 경험에 들어가게 된다고 믿었다. 어려울 때면 그는 이 특별한 신에게 항상 도움을 구하곤 했다.
일부 사교 의식은 비교적 조용하며 대부분 매우 은밀하게 행해지지만, 어떤 사교 의식은 난잡한 주신제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원로원에서 일부 사교를 로마에서 축출한 것도 바로 매우 부도덕하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특성 때문이었다.
아구스도 시대에는 신비주의 사교가 평민들 사이에서 매우 성행했고, 결국 백성 대부분이 믿지 않는 고대의 로마 자연신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미트라교는 흔히 페르시아의 사교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BC 70년경 폼페이우스의 군병들이 동방에서 들여온 것으로 로마 군대 내에서 굉장한 유행을 일으켰고, AD 3세기에 이르자 기독교의 상당한 경쟁자가 되었다.
황제 숭배
헬라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였다. 사랑, 아름다움, 다산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이나 땅, 바다, 태양과 같은 실재 요소들이 인격화되고 신격화되었다. 먼 과거에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판이 난 남녀 영웅들이 신으로 격상되었다. 이런 수많은 신격화된 인물들은 더 많은 신들의 거처인 올림포스(Olympus) 산에 사는 더 많은 고대 신들에 합류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신성으로 인해 인류에 대한 깊은 개인적 관심을 항상 멀리했지만, 그들도 그곳에서 세상사를 감독하면서 살아가고 사랑하고 다퉜다.
그러나 신들이 인류와 관계를 맺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사람이 크게 성공하면 이로 인해 신들의 질투가 촉발되어 신들이 그의 재물을 파괴할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람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신이 벌하지 않도록 자신의 성공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또한 때때로 남신이 여자와 혹은 여신이 남자와 친밀하게 되어 뛰어난 사람 혹은 신같이 새로운 세대를 낳기도 했다. 따라서 로마인에게는 헤르쿨레스(Hercules)라고 알려진 헤라클레스(Heracles)도 제우스 곧 로마의 유피테르와 알크메네(Alcmene) 사이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다. 아프로디테(Aphrodite) 곧 로마의 비너스(Venus)는 제우스와 인간 여성 디오네(Dione) 사이의 딸이라고 알려졌다. 신의 개입에 관한 세 번째 증거는 어떤 사람이 계획이나 사업에서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둘 때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했던 동방의 백성은 대왕에게 신령 혹은 라틴말로 부르면 수호신이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았으며, 헬라인들도 결국 그 의견을 공유하게 되었다.
여론상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광활하게 확장된 로마 영토를 통치하는 데 비범한 성공을 거두자 그도 곧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소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그러했다. 심지어 성미가 까다롭던 디베료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칼리굴라와 소심했던 글라우디오도 신으로 간주되었다. 비열했던 네로는 자기를 신으로 여기는 것에 비웃긴 했지만, 미숙한 자부심으로나마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네로가 초래했던 위험에서 로마를 건져낸 베스파시아누스는 숨을 거둘 때 “나는 이제 신이 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있는 황제에 대한 숭배는 특정 속주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졌으며, 로마에서는 황제가 사망한 후에야 신격화했고, 살아 있을 때는 황제 숭배가 장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는 국민의 숭배를 얻으려고 적극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 메시야 즉 구원자에 관해서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분이 왕으로서 승리의 귀환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을 로마인들이 들었다면, 이 두 존재가 다 황제의 경쟁자이며 두 종교 단체 모두 제국의 대적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로마가 거듭되는 유대인의 반란을 단호한 의지로 진압한 사실과 기독교를 한층 증가된 결의로 말살한 사실이 일부 설명된다. 기독교 변증가 테르툴리아누스는 AD 225년경에 쓴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게다가 황제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도 않는구나’라고 당신들은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들의 신들은 우리의 경배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성모독과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이것이 우리를 고소하는 주된 근거이다. 아니, 그것은 우리가 위반한 전부이다(Apology, 10; ANF, 3:26).
아구스도가 원수 자리를 확립했을 때와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무렵, 로마에서는 이전부터 계속되던 내전의 절망에서 벗어나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열렬한 기대가 일어났다. 영원한 평화와 안녕이 지속될 광명한 시대로 로마를 인도할 만한 아들이 아구스도에게 있었더라면 하는 희망이 있었다. 이런 구세주에 관한 희망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저자 여럿이 증거한다(참조 제10권, 68, 69).
Ⅸ. 기독교와 제국
기독교와 국가
로마인들이 종교에 관해 너그러웠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영토를 정복하고 획득하여 확장시키는 동안 그들은 새로운 백성의 신들을 받아들여 이미 소유했던 신의 총수에 많이 추가했다. 박쿠스나 이시스의 사교 집단처럼 공중도덕에 해악을 끼치거나 혹은 갈리아 지방의 드루이드교처럼 내란 집단이라고 여겨질 경우에만 그 종교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심지어 단호하고 종교적으로 완고한 유대인들마저도 로마인들은 넓은 마음으로 용인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자기 신들을 팔레스타인으로 가져올 때 왜 반대하고 폭동을 일으키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형상화되지 않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일종의 무신론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제7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비웃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이 단순히 게으름 부리는 기회라고 말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로마(Roma), 즉 로마인의 신령 혹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숭배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유대인 신앙의 특정 신조, 특히 메시야 신앙과 로마 통치에 대한 유대인의 동요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유대인들의 저항 정신과 도발적인 행동 외에도 이러한 견해 때문에 결국 유대 민족을 거의 멸망시킨 전쟁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는 정복자들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의 황제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동의하자 로마인들도 그 양보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인을 감시했고 산발적인 반역은 철권으로 진압하면서도 그들의 종교는 용인해 주었다.
유대인이 기독교를 또 하나의 유대교 분파, 즉 엣세네파나 바리새파처럼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진정 하나 이상의 측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 내부의 종교 개혁 운동이라는 개념, 즉 결국에는 기독교가 전 유대 민족에게 보급되어 모두를 구원하는 누룩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유대인 대다수는 이 견해를 공유하지 못했다. 그들 중에 수천 명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유대 민족은 공식적으로 그것을 부인했는데, 그 이유들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 앞에 유대교의 분파로 서지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국가의 기반이 없었다. 로마의 관점에서는 사교가 태동한 것으로 보였기에 4세기 초까지 전혀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네로가 로마 화제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을 때 기독교라는 손쉬운 대상을 찾았던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도, 로마가 지진과 역병 같은 재앙으로 고통받을 때도, 이 불법 분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가 손쉬웠으므로, 다른 면에서는 고결하고 자비했던 이 황제들도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했던 것이다.
로마 시민권과 기독교
로마 시민권이 어떻게 해서 수도의 특권층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확대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 치하에서는 이것이 점차 속주로 확대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개개인에게 국한돼 있었다.
사도 바울의 고향인 다소(Tarsus)는 로마 시민권을 어떻게 획득하는지 보여 주는 실례이다. 사도가 태어나기 수 세기 전부터 다소는 정치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중심지였다. 다른 상업 도시에서도 흔히 그렇듯이 거기에도 여러 민족이 혼합돼 있었다. 거기에는 원주민 외에도 알렉산더 대왕 시대와 그 이전부터 정착한 헬라인들이 있었다. 여러 번의 변천과 쇠퇴 후에 그 도성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치세 때 재편되어 더 많은 헬라인들과 헬라어를 사용하지만 혜택을 덜 받는 지방의 사람들이 길리기아와 그 수도로 몰려들었다.
필시 유대인도 다소에서 수 세대 동안 살았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세 때 더 많이 이주해 왔다. 어쩌면 이들 중 다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어서 팔레스타인을 헬라화하게 하려고 했던 안티오쿠스는 그들이 이주해 나가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그 결과 다소에는 지중해 남부의 알렉산드리아만큼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큰 유대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처럼 다소 주민 가운데도 두 부류, 곧 이방인과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둘은 상당 부분 뜻이 맞지 않았다. 참조 제11권, 108쪽 지도.
여러 해가 지나면서 다소는 자치 정부가 있는 대도시로 발전했고 이곳의 헬라인과 유대인들은 지역사회의 정식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처럼, 다소의 유대인들도 그들의 시민권을 “종족”(tribe) 개념으로 사용했을 것인데, 이는 헬라와 로마 도성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통치 도구였다. 바울이 로마서 16:7, 11, 21에 언급한 “친척”(kinsmen)은 정치적인 의미상 동료 종족, 곧 다소 출신 사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의 시민권이 로마 시민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BC 55~31년에 있었던 율리우스 전쟁에서 다소 사람들은 카이사르 편에 호의적이었는데, 이것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유용했다. 로마 시민권이 폼페이 시대나 그 이전에 다소에서 특혜 입은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지 않았다면, 모진 당파 싸움 기간 동안 율리우스 가문에 충성한 데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이때가 바울의 가족이 로마 시민권을 받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식 시민권으로서 로마의 사법권이 효력을 미치는 곳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이 여행할 때 들고 다닐 수 있는 시민권의 징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데, 이는 이런 종류의 증명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족이 언제 다소로 이주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의 가족이 로마 전쟁 초기에 팔레스타인의 기스칼라(Gischala)에서 이주했다는 제롬(Jerome)이 되풀이하는 전승은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바울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은, 그 가족이 그 지방에 바리새파가 형성된 이후인 BC 150년경에 팔레스타인에서 이주해 왔거나, 혹은 그 가족이 이전부터 이미 다소에 정착해 살던 중 바리새인들이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전파할 때 그들의 교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로마 시민권이 있는 자는 행정장관이나 경비대의 학대에서 어느 정도 보호를 받으며 기본 정의에 대한 좀 더 안정적인 청구권도 가졌다. 사형에 해당하는 고발을 당한 시민이라도 법적으로 채찍질을 받지 않았으며, 더 불리한 처사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면 로마 국가의 최고 재판관인 황제에게 항소할 권리를 가졌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공식 재판 없이 채찍을 맞았던 사실(행 16:19~24)과 최소 두 번 이상 그런 일을 당한 사실(고후 11:25)을 보면, 시민권이 있다고 해서 항상 지방 당국의 부주의나 무관심이나 전횡에서 보호받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이 있으면 정의에 대한 희망이 더 있다는 점은 빌립보의 행정장관이 이전에 바울을 대할 때 저지른 실수를 보상하고자 신중히 노력한 일(행 16:35~39)과,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하여 광신적으로 앙심을 품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났던 사실(25:8~12)을 통해 입증된다.
공식 고소에 대해 항소할 수 있는 기간은 2년이며, 그 이후에는 항소권이 파기됨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나중에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된 후 로마의 유대인들이 그에게서 어떤 죄목도 찾지 못했고(행 28:17~22), 팔레스타인에서 아무런 고발도 분명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송은 고소자의 의무 불이행으로 취소되고 그는 방면되었다.
로마의 멸망과 기독교
로마의 구조와 로마인의 공공 및 개인 생활 속에 존재했던 쇠락시키는 약점들을 놓고 보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같은 매우 능숙한 역사가가 완전히 잘못된 전제를 자신의 위대한 역사 기록의 근거로 삼아야만 했다는 점은 이상한 일이다. 1764년 10월의 한 저녁, 유명하고도 여전히 신뢰성을 인정받는 로마 제국 쇠망사(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기록한 이 저자는 고대 로마의 폐허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도성의 폐허가 그의 시야에 들어오자, 다른 많은 역사학자가 그 전후로 숙고했던 것처럼 한때 영화롭던 제국이 멸망한 원인에 관해 기번도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되었다. 로마의 계승자요 후계자라고 주장하던 로마 교회 역사를 중세 시대까지 잘 기록했던 기번은 자기가 로마의 몰락의 근본 원인을 밟혔다고 생각했는데, 그 원인은 바로 기독교라고 말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번의 이론에 반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진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를 구출했을 때 다만 치명타를 가할 강력한 외부의 적이 없었을 뿐, 로마는 이미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반복하여 로마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로 인해 때맞춰 간신히 구원받았을 뿐이다. 기독교는 로마를 구원하는 소금으로서 제국이 그 생명을 연장하는 데 일조했다. 이교 로마의 본질, 즉 종교, 법률, 행정 중 많은 부분이 로마 교회에서 지속되었으니, 로마 교회의 역사가들이 의미를 부여하며 바라보면 로마 교회가 멸망한 로마 제국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간주할 만도 하다.
미주
1. BC 31년경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하기 이전의 로마 역사의 개요를 보려면 제9권, 33~35, 45~48을 참조하라. 참조 제9권, 160쪽 지도.
참고 문헌
일차적 자료
Cicero, Marcus Tullius. [Essays.] 대부분 철학적인 내용이지만 법률과 정치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라틴어 본문과 영어 번역문이 모두 있는 키케로 작품의 표준판은 Loeb Classical Library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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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us, Flavius. The Jewish Antiquities; 그리고 The Jewish War. 참조 제10권, 93.
Velleius Paterculus, Gaius. Compendium of Roman History. 티베리우스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기술된 것으로, AD 30년까지의 내란과 원수정(元首政)에 관한 간략한 개요이다. Loeb Classical Library에 포함되어 있다.
Sallustius Crispus, Gaius. [Works.] BC 120~65년에 걸친 일차적 자료인 역사서로 후기 부분은 미완성이지만 호평을 받는다. 살루스티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Loeb Classical Library에 포함되어 있다.
The Loeb Classical Library. 여러 번역가가 다양한 고전 작품의 원본과 영어 번역본을 함께 실은 학숙적인 총서이다. 각 권은 비정기적으로 발행된다. 이 총서는 여러 출판사에서 발행했는데, 초기에는 런던의 윌리엄 하이네만(William Heinemann)과 뉴욕의 G. P. 푸트넘스 선스(G. P. Putnam’s Sons)였고, 현재는 매서추세츠 주 케임브리지(Cambridge)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 출판사(Harvard University Press)이다.
Seneca, Lucius Annaeus. Moral Essays. 네로의 스승이 쓴 철학적이고 교훈적인 논문집이다. 영어 번역본이 함께 실린 세네카 작품들의 소중한 판은 Loeb Classical Library에 포함되어 있다.
Livius, Titus. The History of Rome. 기독교 시대로 전환될 때 리비우스는 원로원 의원의 관점에서 자기가 살던 때까지 로마의 전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애네아스(Aeneas)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예술성과 교훈성이 짙으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비평적인 태도는 부족했으며 항상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작품의 중요한 부분들은 소실되어 없다. 표준판은 Loeb Classical Library에 포함되어 있다.
Suetonius Tranquillus, Gaius. The Lives of the Caesars. 참조 제10권, 94.
Tacitus, Gaius Cornelius. Annals; 그리고 Histories. 참조 제10권, 94.
이차적 자료
Boak, Arthur E. R. A History of Rome to 565 A.D. 4th ed.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5. 569쪽. 교과서 형식을 띤 정확하고 균형이 잘 잡힌 조사서로 사회생활과 예술에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인 책이다.
Bury, John B. A History of the Roman Empire from Its Foundation to the Death of Marcus Aurelius.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893. 훌륭한 교과서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Canfield, Leon Hardy. Early Persecutions of the Christia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13. 이교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행했던 박해에 관한 면밀하고 비평적인 역사서로서 하드리아누스 치세까지를 포함한다.
Fowler, William Warde. The Religious Experience of the Roman People. London: Macmillan & Co., 1911. 504쪽. 로마인의 종교생활의 변화를 고대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면밀하게 요약한 책이다.
Friedlaender, Ludwig. Roman Life and Manners Under the Early Empire. Translated from the German. 4 vols. London: G. Routledge and Sons, 1908~13. 완전히 정보 위주의 작품으로 놀라울 정도로 편견이 들어 있지 않다.
Gibbon, Edward.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 by J. B. Bury. 7 vols. London: Methuen and Co. 거의 2세기 후에도 여전히 권위 있는 서적으로서, 간결하면서도 상세하지만 반기독교 성향이 꽤 들어 있다. 베리(Bury)의 편집본이 최고의 판이다.
Glover, Terrot R. The Conflict of Religions in the Early Roman Empire. 3d ed. London: Methuen and Co., 1909. 359쪽. 로마 제국의 여러 종교의 발달에 관한 일람서이다.
Merivale, Charles. History of the Romans Under the Empire. 7 vols. in 4.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887. 일차적 자료를 토대로 기록한 책으로 상식선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비평을 가하지만 장황하고 관점이 균형 잡히지 못했다.
Mommsen, Theodor. The History of Rome. 4 vols. New York: C. Scribner and Company, 1885. 철저하고 면밀하고 편견 없는 역사서로 일차적 정보에 관해 명인다운 분석이 실려 있다.
__________. Ro..misches Staatsrecht. Vol. 1 of Handbuch der ro..mischen Alterthu..mer. Leipzig: S. Hirzel, 1871~88. 로마의 정치와 법률 체계에 관해 매우 철저하게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