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논문 BC 586년부터 400년까지의 고대 세계
List
 Ⅰ. 서론


 이 기간의 배경

 이 논문은 유대인의 포로로부터 귀환까지의 기간, 곧 신(新)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세계적인 두 세력이 차례대로 일어난 시기를 다룬다. 이 기간은 잔인하고도 전쟁에 능한 인물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유다 나라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멸망시킴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 대참사 이후에 우리는 메소보다미아 계곡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압제자가 정치적으로 약화되고, 동쪽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조짐들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새로 일어나는 세력들이란 처음에는 메디아인들, 조금 후에는 페르시아인들이었다. 바벨론의 강자 느부갓네살이 죽자, 단명했던 세 명의 통치자들이 차례로 그의 보좌를 차지했다. 어쩌면 이사야가 장차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자로 묘사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정치권에서 새로운 별로 부상한다는 소식과 함께, 바벨론이 약화되는 증거가 정세를 주시하던 유대인들에겐 분명히 드러났다. 고레스가 메디아와 엑바타나를 함락하고, 이어 난공불락의 수도로 여겨지던 사데와 함께 리디아도 함락했다는 믿기 어려운 승전보가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빨리 뛰었을까! 마침내 그들은 동방의 새로운 강대국이 약해진 바벨론 제국을 끝장내는 모습을 보았다.

 새로운 황제 고레스는 마음이 넓고 인도적인 군주로서 유대인들의 모든 기대와 예언을 상세한 면까지 다 실현시켰다. 그는 유대인들의 귀환과, 그들이 성전을 중건하고 그 의식을 회복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귀환한 포로들은 그들의 옛 고향에 도착하여 수많은 난관과 싸워야만 했는데, 특히 주변 민족들이 나타낸 적대적인 태도와 행위에 맞서야만 했다. 성전 중건은 굉장한 어려움 속에서 거의 20년 만에 이루어졌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위기가 가장 심각했으며, 여러 가지 위기를 당한 후에 유다인들은 아닥사스다 I세 때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거의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고, 아닥사스다 왕은 BC 457년에 에스라를 유대로 보내면서 비상한 권한을 부여했다. 에스라의 사업은 나라 안에 있는 대적들의 방해를 받았지만, 마침내 느헤미야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하여 성공적인 결말을 가져왔다. 느헤미야의 사업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성경의 자료는 침묵에 빠지고, 중간사 시대가 시작된다.


 논문의 목적

 이 논문은 조그만 유다 나라의 역사를 그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대조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는 하나씩 따로 연구할 경우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사건들이 성경에는 대개 짤막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고고학적 및 역사적인 증거에 비추어 연구할 때에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세기가 채 못되는 이 기간을 위한 근거 자료가 어떤 부분은 매우 풍부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극히 부족하다.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부터 약 50년 후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귀환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하여는 성경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유다 나라의 회복에 대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역사서들(에스라와 느헤미야)조차도 그 진술 가운데 다루지 못한 커다란 공백을 남기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성경 이외의 근거 자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바벨론 제국 시대에 관한 자료도 매우 한정되어 있으며, 페르시아 시대의 어떤 기간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이런 자료는 매우 다양하며 그 신빙성도 다르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공식적인 문서들은 희귀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방대한 자료인 헬라의 역사책들은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얼룩져 있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며 종종 신뢰할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 시대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역사가들에게는 그것들도 유용하고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근자에 있었던 고고학적인 발견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이 기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크게 더해 주었는데, 다음의 개관은 현재까지 입수된 증거들에 근거한 것이다. 이어지는 페이지에 묘사된 역사적인 상황은, 앞으로 더 많은 근거 자료들이 발견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을 더해줄 경우, 당연히 어떤 세부 사항은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기간의 연대기

 이 기간의 연대기는 얼마간의 천문학적인 기록들과 다수의 연대를 기록한 문서들에 의하여 잘 확립되어 있다. 연대에 관한 문제들은 제8권에 수록된 연대에 관한 논문에서 충분히 살펴 볼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해야 할 사실은, 이 논문에 나오는 여러 사례 가운데서도 분명해지겠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한 정확한 날짜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이 기간에 대한 연대 계산이 불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거 자료가 단편적이기거나 그 자료들의 연대에 관한 정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하는 이 기간 내의 날짜가 분명한 문서라면, 그것이 페르시아, 헬라, 유다, 애굽이나 기타 다른 나라의 문서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BC 연대 구조로 쉽게 환산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나 성경 이외의 자료들의 경우, 대개는 기록된 사건들의 날짜가 매겨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날짜가 정확하게 매겨지지 않았다. 그러한 사건들은 관련된 모든 요소를 면밀하게 연구하여 연대의 틀 속에 맞춰 넣어야 한다. 그런 경우 학자들의 결론들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며, 그런 방법으로 매겨진 연대는 절대적인 정확성을 주장할 수 없고, 매겨진 연대가 근사치(近似値)라는 것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서 고레스가 아스튀아게스(Astyages)를 이긴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 연대가 제시되었을 경우, 독자는 그 연대를 매기게 된 우리의 근거 자료들이 두 가지 상이한 해석을 허용한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이 논문에 제시된 날짜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저술에서 볼 수 있는 날짜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이 논문의 것이 다른 데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하거나 덜 정확한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좀 더 근래에 나온 증거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경우에는 한 가지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증거를 서로 달리 해석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날짜가 필수적이고 그것을 없앨 수는 없지만, 독자는 고대 역사의 많은 날짜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며, 여기에 제시된 어떤 날짜가 후일에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BC 586년부터 400년까지의 고대 세계 연대표

 

* 불확실한 연대

+ 정해진 연대만 알 수 있음


 다행히도 여기서 다루는 기간의 오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몇 년을 초과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실제 연대와 이 논문에 제시된 연대는 1년 이상 차이가 나지 않으며, 이어지는 내용들 가운데 나오는 많은 연대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BC 6세기와 5세기는 역사상 그 이전이나 이후의 여러 기간보다는 연대적으로 좀 더 안전한 토대 위에 기초했다.

 앞 페이지의 도표는 이 기간에 다스리던 서로 다른 왕조들 사이의 비교 연대를 제시해 준다. 제시된 연대들 가운데 유대의 지도자들과 애굽, 바벨론, 페르시아(BC 539년 이후) 왕들의 통치 연도는 정확하지만, 메디아와 리디아 통치자들의 연대는 불확실하다.


 Ⅱ. BC 586년부터 539년까지의 신(新)바벨론 제국


 BC 7세기 나보폴랏사르가 창건한 이래, 유다 나라가 그 수도 예루살렘과 함께 멸망된 BC 586년까지의 신(新)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제3권, 126~128에 수록되어 있다.


 느부갓네살 II세(BC 605~562)

 유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에 느부갓네살은 전쟁 외의 다른 방면에 관심을 돌려 방대한 건축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이런 방면의 자기 업적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의 수많은 건축 명각들이 나타내 준다. 바벨론은 사실상 느부갓네살이 재건했다. 그는 도성을 확장하였고 그 도성을 새로운 요새로 둘러쌌으며, 동시에 옛 궁궐터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건축한 새 궁궐도 둘러쌓았다. 에사길라라고 불리는 마르둑의 대(大)신전을 아름답게 단장했고, 그의 부왕이 왕위를 차지했을 때에는 폐허가 되었던 신전고탑 에테메난키도 완성하였다. 느부갓네살의 치세 중에 바벨론과 기타 지역에서 수많은 다른 신전을 중건하거나 신축했으며, 메소보다미아 역사상 다른 어떤 기간보다도 더 많은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를 정복한 이후 느부갓네살의 군사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현존하는 바벨론의 연대기(참고 문헌 목록에 나오는, D. J. Wiseman, Chronicles of Chaldean Kings [626~556 B.C.] in the British Museum을 참조하라)에는 나보폴랏사르와 느부갓네살의 수차례 군사 원정과, 네르갈-샤르-우추르(Nergal-shar-us.ur)의 한 차례 원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의 치세 11년 이후로는 아무 기록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두로와 13년 동안(BC 585~573) 싸웠음을 암시해 주는 현존하는 자료가 있다. 교만한 해상 강국이었던 두로는 난공불락의 섬이 차지한 유리한 입지 조건을 믿고 바벨론 군주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진노를 자초했다. 느부갓네살이 두로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기 1년 전 선지자 에스겔은 그 부유한 상업 도성의 운명을 예언했는데, 두로는 육지에 광대한 주거 지역과 창고, 병기고, 공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안에서 떨어진 조그만 바위섬에는 안전한 조선소들이 있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에스겔의 예언대로 육지에 있는 두로를 정복하고 파멸하긴 했으나, 여러 해 동안 섬을 공격했어도 허사였다. 그러나 두로는 마침내 자국의 왕을 유지한다는 조건 아래 항복했고, 바벨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두로의 국내외 제반사를 계속 감시하던 바벨론의 고위 판무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전에 유다와 이웃해 있던 아람, 암몬, 모압 가운데서 말을 잘 듣지 않는 집단들과 애굽을 치기 위하여 한 번 원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요세푸스의 주장대로는 그 때가 느부갓네살의 재위 23년(BC 582)이었다. 또한 BC 586년의 예루살렘 붕괴 후에 본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반대하는 활동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활동은 느부갓네살의 응징 활동을 초래하여, 예레미야 52장 30절에 의하면 745명의 유대인들이 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두로에 대한 포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갈대아 사람들은 실망했고, 에스겔의 말(29:18~20)이 나타내 주듯이 13년간 포위 공격을 했던 노력에 비하면 그 성과는 만족스럽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애굽에서 풍성한 전리품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 가운데 언급된 느부갓네살의 애굽 원정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영국박물관에 있는 서판의 단편 하나는 느부갓네살이 재위 37년(BC 568)에 애굽의 아마시스와 벌인 전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애굽에는 분명히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을 이 전쟁에 대한 애굽인의 기록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우리에게 에스겔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여 줄 만한 현존하는 바벨론의 기록조차도 없다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이 전쟁 후에도 아마시스가 계속하여 애굽을 다스린 것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그를 용서하고 보좌에 복귀시킨 것으로 보인다.

 느부갓네살 대왕의 마지막 7년에 대해서는 세속 역사 자료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니엘서는 느부갓네살이 7년간 정신이 이상했을 때의 기록이 있는데, 그는 정신 이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단 4장). 기록자들은 통치자들의 결점을 애써 감추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당시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멜-마르둑, 네르갈-샤르-우추르, 라바쉬-마르둑(BC 562~556)

 고대의 가장 훌륭한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느부갓네살이 43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BC 562년 10월 초에 사망하자,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이라고 되어 있는 그의 아들 아멜-마르둑이 보좌에 올랐다(BC 562~560).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악하고 부절제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성경은 그가 투옥되어 있었던 유대인의 왕 여호와긴을 용서해 주고, 그에게 왕의 명예를 베푼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데(렘 52:31~34), 그것은 아멜-마르둑이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이송된 지 37년째 되는 해였다.

 아멜-마르둑은 자기 부친의 능력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며, 2년도 못되는 통치 후에 혁명당원들에게 살해되었고, 그들은 저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네르갈-샤르-우추르,(헬라어로 네리글릿사르)을 왕위에 앉혔는데, 그는 느부갓네살의 존귀한 방백(렘 39:3, 13)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위였고 따라서 아멜-마르둑의 매부였다. 네르갈사레셀(BC 560~556)는 연대기에 기록된 대로 557/56년에 길리기아를 침공했다. 그는 신전과 왕궁을 건축했고, 자기 원수들을 멸망시키고 적대자들을 화형(火刑)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교적 나이 많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4년도 못 되는 짧은 치세 후에 죽었다. 그를 계승해 그의 아들 라바쉬-마르둑이 보좌에 올라 BC 556년 5월과 6월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다스렸다. 그 후에 공모자 집단이 그를 심하게 고문하여 죽이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보니두스를 바벨론의 왕으로 삼았다.


 나보니두스(BC 556~539)

 이 새로운 통치자의 조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의 부친은 나부-발라추-이크비(Nabu-balat.su-iqbi)라는 이름을 가진 하란의 통치자였던 것 같으며, 그의 모친은 아마도 슈무아-담카(Shumua-damqa)로서,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기념비에 의하면, 그녀는 신(Sin, 달의 신)의 여(女)제사장이었으며 아슈르바니팔 당시로부터 하란의 신(Sin) 신전에서 그 직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견해는, BC 610년에 하란이 메디아와 바벨론 사람들에게 정복되었을 때, 그녀와 어린 아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고, 거기서 그녀는 느부갓네살의 규방에서 첩으로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총애받는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은 그녀의 아들인 나보니두스에게도 총애를 베풀었는데, 느부갓네살이 그를 BC 585년에 메디아와 리디아가 전쟁을 할 때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나라의 행정에 영향력이 있는 관리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딸들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 것 같으며, 그런 이유로 인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벨사살의 부친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인데, 이 경우 히브리 용례에 따라서 부친이란 “조상” 또는 “조부”를 의미한다(단 5:11). 다음의 가계도는 신(新)바벨론 제국의 여러 통치자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데, 나보폴랏사르부터 나보니두스까지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겼다.

 

 나보니두스는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할 때에 보좌에 올랐다. 메디아는 바벨론의 선행(先行)한 나약한 통치자들 밑에서 대담해져 하란 지역을 합병했다. 그것은 공격 행위였고, 그냥 내버려둔다면 또 다른 침략을 조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보니두스는 하란을 재정복하는 일을 자기 즉위 첫 해의 첫 번째 임무로 간주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강하고 단호한 군주가 될 전망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왕의 관심사가 너무 광범위하고 계획이 원대(遠大)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월신(月神)인 신(Sin)을 경배하기 좋아했으며, BC 610년 이후로 폐허가 되었던 하란의 신(Sin) 신전을 재건하였다. 또한 그는 우르에도 신전을 세우고, 자기 딸을 신(Sin)의 사제로 삼았으며, 자기 나라의 고대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옛날의 기록들을 발굴했다. 하지만 그는 동쪽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고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음에 언급하는 그의 아라비아 원정이었을 것이다.

 BC 553년에 동부 팔레스타인을 원정하는 동안 나보니두스는 병에 걸려, 회복을 위해 레바논으로 갔다. 그는 즉시로 자기 아들 벨사살을 불러 왕권을 위임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왕가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여 자기가 없는 동안 바벨론에서 보좌를 찬탈하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제국 확장의 새로운 계획을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에 벨사살은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552년 초에(이때가 맞을 것이다) 공동 통치자로서 자기 부친의 이름으로 본토 지역들을 통치했다. 그런 상황은 그가 다니엘을 특별한 방법으로 높여 주고자 원했을 때, 그 나라에서 세 번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그 자신은 둘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가 자기 권한 내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단 5:16).

 나보니두스는 병에서 회복되자 곧 아라비아 북서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여 데마(Tema)의 오아시스를 정복했는데, 그곳은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주거지가 되었고, 거기에 커다란 왕궁들을 건축했다. 왜 그런 원정을 했는지 진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로 간 이유는 메소보다미아가 이란의 메디아와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간 사건 때문에 안전한 수도를 하나 더 갖기 위함이었거나, 혹은 그가 정신병에 걸려서 그곳과 같은 은둔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나보니두스는 데마에서 적어도 재위 11년 곧 BC 545년까지 머물렀으며, 그 기간에 아라비아 남부에 있는 족속들을 여러 차례 침공하여 성공을 거뒀다.

 그 동안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의 지도층 집단, 특히 제사장들을 완전히 멀리했다. 그가 오랫동안 수도(首都)를 떠나 있게 됨으로 신전(神殿)들에는 대개 많은 수입원을 제공했던 여러 가지 신년 축제들이 생략되었으며, 그가 신(Sin)을 편애했기 때문에 마르둑 제사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벨사살의 내정 실책은 다수의 바벨론 사람들 가운데 국정의 변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두 통치자는 정권의 고삐를 매우 든든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반란이 시도되었더라도 그런 것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실패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니두스의 통치 초기에 동방 정계의 하늘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는데, 그는 메디아의 봉신왕(封臣王)인 고레스로서 페르시아 족속의 통치자로 알려졌으며, 자신을 “안샨(Anshan)의 왕”이라고 칭했다. 그는 자기를 다스리던 메디아인 영주 아스튀아게스에게 반역하고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한 후에, 나보니두스가 벨사살을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을 즈음인 BC 553년(다른 자료에는 550년으로도 되어 있음)에 메디아의 왕을 폐위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동방 민족들로부터 오는 위험이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리디아의 왕인 사데 사람 크뢰수스(Croesus)가 애굽 왕 아마시스와 나보니두스에게 새로운 동방 세력과 싸우기 위해 동맹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보니두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격언대로, 크뢰수스는 BC 547년에 페르시아의 영토를 침공했으나 자기의 군사력을 오판(誤判)한 결과, 그의 동맹군들이 고레스와 싸우기 위해 조직을 갖추고 그를 도우러 올 시간도 되기 전에 수도와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후 몇 년에 걸쳐 고레스는 당시에 이란 고원에서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이르는 제국 안에서 자기의 세력을 굳혔다. 몇 년간의 준비를 더 갖춘 다음, BC 539년에 이르러 마침내 고레스는 약해진 나보니두스의 제국을 향해 진군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자기 영토와 접경을 이루던 구티움(Gutium)의 비옥한 동편 지역을 침공하여 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점령했는데, 그 지역은 동쪽에서 침공해 올지도 모르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느부갓네살이 건축한 메디아 성벽(Median Wall)의 보루를 이루던 곳이다. 나보니두스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53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나보니두스는 여러 성읍에 있는 신상들을 바벨론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고레스가 쳐들어 올 경우 그가 지방에 있는 신(神)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방 주민들과 제사장들의 분노를 더욱 샀는데, 그들은 그가 저희 신들을 강탈해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행동은 주로 마르둑 신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수도 성읍에서 종교적인 경쟁심을 증폭시킴으로, 바벨론에 있는 제사장들끼리도 적대하도록 만들었다.

 고레스가 바벨론으로 진군할 준비가 되었을 때, 벨사살은 침략의 위협에 대처하고 고레스가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군대를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오피스(Opis)로 집결시켰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바벨론 군대는 비참한 패배를 당했고, 페르시아 군대는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유브라데 강변의 십파르(Sippar)까지 단번에 진군할 수 있었다. BC 539년 10월 10일에 고레스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이 도성을 점령했고, 나보니두스는 남쪽 방향으로 도주했다. 벨사살은 십파르에서 약 56킬로미터 떨어진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그 도성의 튼튼한 방어 시설만을 신뢰하고 성내에 머물렀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오만 방자한 마음 가운데 무모한 안전감을 가지고(선지자와 왕, 523), 자기 처첩들과 친구들로 더불어 솔로몬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기명들로 어리석은 술판을 벌이며 최후의 밤을 보냈다(단 5장). 10월 12일, 바벨론은 고레스 군대의 손에 들어갔는데,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고레스는 평상시에 그 도성을 통해 흐르는 유브라데강의 물줄기를 다른 길로 돌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진군해 들어갔다.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다. 남쪽으로 도망갔던 나보니두스는 도주로가 이미 차단되어 버린 것을 알고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승리한 원수의 처분에 맡겼다. 헬라의 기록에 따르면, 마음이 너그러운 고레스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그를 원방에 있는 땅 카르마니아(Carmania)를 다스리는 봉신(封臣)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갈대아 제국은 1세기가 채 못 되게 존재하다가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강력한 군주 나보폴랏사르가 창건하여, 그와 똑같이 강력한 아들 느부갓네살이 확장하고 강화시켰던 그 제국은,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에 나약한 통치자들이 이어지면서 신속하게 몰락했다. 신(新)바벨론 제국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물질적인 풍요의 영화를 구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 나라는 느부갓네살의 꿈의 예언적인 묘사 가운데 “금 머리”로 비유되어 있다(단 2:38). 그러나 바벨론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타고난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약점들은 나라의 멸망을 실질적으로 촉진하고 가속시켰다.

 1. 바벨론 민족은 노쇠했고 여러 세기 동안 아모리 족속, 캇시트 족속(Kassites), 앗수르 족속 그리고 이 당시에는 아람계 갈대아 사람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한 나라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고도 튼튼하게 하는 특성들을 갖추지 못했다.

 2.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을 갈대아 왕조에게 묶어 주는 공동 관심사와 연대감이 없었으며, 심지어 바벨론 사람들조차도 유일한 지배 계급을 형성했던 갈대아 사람들에게는 인종적으로 이방인이었다.

 이런 약점들이 느부갓네살과 같은 통치자의 능력에 의해 보완되었을 경우에는 나라가 강하고 건전해 보였다. 그러나 나보니두스처럼 여러 가지 어리석은 행동과 정치적인 실책을 범한 외에도, 여러 해 동안 수도에서 떠나 살며 나라의 현실적인 필요보다는 고대사에 더 관심을 쏟고, 국가의 수호신보다는 지역 신(神)을 더 좋아하는 나약한 통치자 아래서는, 여러 인종들로 합성된 바벨론 제국이 온전하게 살아 남을 수 없었다.


 Ⅲ. 메디아인들의 제국


 메디아인과 그들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인들과 더불어, 인도 - 유럽 혈통의 백성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들보다 앞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종족적으로 같은 계통의 다른 민족은 BC 제2천년기에 활약했던 헷 족속과 미탄니(Mitanni) 백성뿐이었다.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메소보다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여 있는 고지대에 살았는데, 그곳은 역경과 궁핍에 익숙해 있었으며, 단련되고 도덕적으로 건전하며 강한 용사들의 민족을 배출한 오지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아리아누(Arianu) 곧 “귀족”이라 불렀으며, 저희 땅은 아리아나(Ariana) 또는 이란(Iran)이라고 불렀는데, 아직도 그 이름을 사용한다.

 메디아라는 이름을 지닌 첫 번째 이란 족속들은 BC 9세기 중엽, 앗수르 왕 살만에셀 III세의 기록에는 호전적인 야만인들로 나타난다. 사르곤 II세는 BC 715년에 그들을 물리치고 정복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통치자를 다이아욱쿠(Daiaukku)라고 언급했는데, 헤로도투스는 그의 이름을 데이코스(Deikos, 또는 데이오케스[Deioces])라고 제시했으며, 메디아 제국의 창건자요 현명하고 의로운 군주라고 그의 특성을 묘사하였다. 데이오케스는 메디아 족속을 한 나라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수도 엑바타나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략 BC 700년에서 647년 사이에 통치했던,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데이코스를, 사르곤의 기록에 나오는 다이아욱쿠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물론 동명이인(同名異人)일 가능성이 있다.

 데이오케스의 아들 프라오르테스(Phraortes)는 부친이 죽은 다음 대략 BC 647년부터 625년까지 22년 동안 다스렸고, 남쪽에 살던 페르시아 종족들을 정복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앗수르와 싸우던 중에 목숨을 잃었다.

 프라오르테스의 아들 키악사레스(Cyaxares)는 BC 약 625년부터 585년까지 40년 동안 메디아를 다스렸다. 그는 앗시리아(Assyria)와 싸우기 위하여 바벨론의 나보폴랏사르와 동맹하였는데, 614년에는 단독으로 앗수르(Assur)를 정복했으며, 612년에는 바벨론과 연합하여 니느웨를 정복했다(참조 제3권, 93, 94). 바벨론 사람들은 멸망한 앗수르 제국의 가장 넓고도 문명이 발달된 지역을 흡수한 반면, 메디아는 앗수르의 북부와 북동부 영토를 물려받는 데 만족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메디아의 첫 번째 대제가 된 키악사레스는 당시에 소아시아에 영토를 가지고 있던 스구디아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였다고 헤로도투스는 기록하였다.

 키악사레스는 그의 만년에 리디아인들과 싸워야만 했는데, 그들은 사데의 왕 알뤼앗테스(Alyattes)의 휘하에서 아시아의 세 번째 세력이 되었고 아나톨리아의 맹주가 되고자 했다. 그들이 전쟁을 하던 제6년에, 우연히 “전투를 하던 가운데 낮이 갑자기 밤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신들의 노여움이 저들에게 이르렀다고 생각한 두 전쟁 당사국들은 기꺼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 협정은 중재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중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바벨론의 라뷔네투스라고 언급되었는데, 아마도 나보니두스인 것 같다. 메디아와 리디아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킨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日蝕, 밀레도의 탈레스가 이 일식을 예언했다고 알려짐)은 고대의 전투 가운데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확한 날짜를 제공해 준다. 그 협정은 알뤼앗테스가 키악사레스에게 할리스 강 동쪽의 모든 아나톨리아 지역을 주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며, 키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가 알뤼앗테스의 딸 아뤼아니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BC 585년경부터 553/552년 또는 550년까지 30년(헤로도투스는 35년이라고 말한다) 이상 통치한 아스튀아게스는 사실상 메디아 제국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의 오랜 통치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를 언급한 고대 역사가들은 고레스와 관련된 일에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만을 말하는 정도인데, 헬라의 자료에 따르면 아스튀아게스는 고레스의 조부였다. 아스튀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를 안샨에 있는 페르시아의 분봉왕 캄비세스 I세에게 주었으나, 그 딸이 한 아이를 출산하자 그 아이 고레스가 자기의 왕위를 빼앗을까봐 두려움에 시달렸던 것 같다. 아스튀아게스가 여러 번 자기 손자를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헬라의 전설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BC 553년에 고레스가 자기의 대군주를 대적하여 일어난 점을 감안해 본다면, 그의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고레스는 아스튀아게스의 군대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지만, 세 번째 접전에서 메디아의 군대 사령관 하르파구스(Harpagus)가 자기 군주를 배반하고 군대를 고레스에게 넘겨주었다. BC 550년 이전에 고레스는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를 수중에 넣었다. 또한 아스튀아게스도 고레스의 수중에 들어왔으나 친절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우리가 아스튀아게스를 카스피해의 남쪽에 있는 휘르카니아(Hyrcania)의 총독이 되게 하였다고 주장하는 헬라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다면 그렇다.

 고레스가 메디아 제국을 차지했을 때 그 나라의 외형적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메디아와 페르시아가 친밀한 관계였고, 두 왕가도 통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역사가들과 당시의 여러 나라 문서들에서 그 제국을 가리켜 “메디아와 페르시아” 또는 많은 경우에 단지 “메디아”라고만 부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아스튀아게스가 몰락한 이후에 메디아는 국사(國事)에 부수적인 역할만을 감당했는데도 그렇게 불렸다. 그러므로 메디아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나라가 이양된 것은 사실상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권세가 이양된 셈이며, 메디아의 방백들이 차지했던 관직이 페르시아 방백들에게 넘어간 셈이다. 그때부터, 영향력 있는 메디아인들이 여전히 등용되긴 했으나, 페르시아의 방백들이 정부의 최고위 직분들을 차지했고, 페르시아 시대 전반에 걸쳐 수많은 요직들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Ⅳ. 고레스로부터 다리오 II세까지의 페르시아 제국


 제국 시대의 페르시아 통치자들은 아캐메네스 왕조(Achaemenid)의 왕들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다리오 III세를 제외하고서는 모든 페르시아의 군주들이 자기들의 선조가 아캐메네스(Achaemenes)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레스와 다리오 I세의 명각들은 이 두 왕이 속한 두 가문의 계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다음의 도표가 보여 주는 대로 그것은 아캐메네스와 테이스페스(Teispes)에서 유래되었다.

 


 아캐메네스로부터 고레스 II세까지, 통치했던 왕들의 순서가 분명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위의 족보에 열거된 인물 가운데 대부분이나 모두가 얼마간이라도 페르시아의 보좌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지배 가문이 동시에 서로 다른 페르시아 족속들을 다스렸거나, 아니면 여러 번에 걸쳐 통치권이 한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초기의 페르시아 왕들이 모두 자신들을 가리켜 “안샨의 왕들”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수도가 안샨이었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곳을 이란의 남서쪽에 있는 파사르가대(Pasargadae)라고 보는 견해가 현재까지는 최선인 것처럼 보이나, 그곳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당시의 기록들 가운데 언급된 고레스 II세 이전의 유일한 페르시아 통치자는 고레스 I세이다.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의 명각들 가운데는 그가 파르수아쉬의 쿠라쉬(Kurash of Parsuash)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앗수르가 엘람을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캄비세스 I세의 형제인 자기 아들 아룩쿠(Arukku)를 니느웨로 보내면서, 그를 앗수르 황제의 분봉왕으로 세워 달라는 뜻에서 무거운 선물을 가져가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건은 BC 639년 엘람이 정복된 직후에 일어났으나, 분명히 메디아 왕 프라오르테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그 땅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기 이전이었다.


 고레스 대왕, BC 약 553~530년

 헬라의 역사가들은 젊은 고레스의 모험에 대하여 장황하게 논하지만 사실과 전설, 역사와 민간 전승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레스의 모친 만다네(Mandane)는 메디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스튀아게스의 딸이요, 고레스는 아스튀아게스의 아들인 키악사레스의 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했다는 내용은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인하여, 고레스는 자기의 조부이자 대군주인 아스튀아게스에게 BC 553년경에 반역했는데, 그의 군대는 아스튀아게스에게 두 번 패퇴했으나, 메디아의 사령관 하르파구스(Harpagus)가 자기 군주를 배반하고 고레스에게 넘어옴으로 결국 성공하여, BC 550년에는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와 그 왕을 수중에 넣었다.

 비록 고레스가 메디아의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메디아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아스튀아게스는 휘르카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고, 그의 아들 키악사레스 II세는 명목상으로 보좌에 앉혔다고 한다. 동시대의 기록들은 키악사레스 II세의 존재에 대하여 완전히 침묵하고 있으나, 고레스가 메디아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메디아의 제왕이요 자기의 장인(丈人)이었던 키악사레스 II세에게 자기와 함께 공동으로 보좌를 차지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키악사레스는 다니엘서에 메디아의 다리오라는 이름으로 거듭 언급된 그 왕일 것이다(참조 단 제6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이어지는 몇 해 동안 고레스는, 동쪽의 인도 국경에서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할리스강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제국에 자기의 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기록들은 그가 BC 548년 티그리스 동쪽에 있는 적대적인 족속들과 전쟁을 하면서, 머지않아 자기 군대에게 이르러 올 대(大)시련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고레스가 혜성처럼 당대 두 번째 대제국의 통치자로 떠오르자, 동시대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복당한 백성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이 가진 예언들은 장래에 그들을 해방시켜 줄 자로 코레쉬(Kores∨) 곧 고레스를 지명했는데(사 44:28), 이 논문의 제V장에서 보겠지만, 분명히 그들은 그가 권세를 잡고 올라올 때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나보니두스, 애굽의 아마시스, 리디아의 크뢰수스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고레스가 권좌에 출현하자, 저희의 안전과 보좌에 위협을 느끼면서 커다란 불안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돕겠다는 조약을 맺고 단결했다.

 그러한 두려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나보니두스가 메디아로부터 탈취했던 메디아의 옛 영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547년 봄에 고레스가 카부르강과 유브라데강의 크게 굽은 지점 사이에 펼쳐진 메소보다미아 상부 지역으로 진군할 때에 나타났다. 비록 두 제국의 군대 사이에 호전적인 행위는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바벨론에 대한 비(非)우호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리디아 왕 크뢰수스는 동쪽에서 자라나고 있는 위협에 대처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느꼈고, 적군이 주도권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자기가 선제권을 잡는 것이 항상 유익하다고 확신하면서, 할리스강을 건너 고레스의 영토로 진군해 들어갔다. 547년의 늦은 여름에 페르시아 군대와의 첫 번째 전투가 프테리아(Pteria)에서 벌어졌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크뢰수스는 고레스와 더 이상의 교전을 벌이기 전에 튼튼한 수도(首都)인 사데로 퇴각하여 동맹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레스가 프테리아 전쟁에서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고레스는 더 이상 직접적인 위협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혹독한 아나톨리아의 겨울을 코앞에 둔 가을에, 페르시아 군대가 저들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으로 전진하리라고는 분명히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레스 같은 천재들도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신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기는 일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은 종종 예측을 불허한다. 고레스는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고레스는 본거지로 돌아와 겨울을 나고 이듬해에 총력을 다해 다시 쳐들어가는 대신에, 전진하여 군대와 함께 먼저 사데에 도착했다. 크뢰수스가 적군에 대하여 전혀 잘못된 계산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용병(傭兵)들을 다 해산시키고 고향에 가서 겨울을 보내라고 허락한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크뢰수스는 리디아 군대의 용맹과 자기 기병대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믿고, 사데에 도착하자마자 고레스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고레스가 재빨리 기병들을 짐 싣는 낙타에 태우고, 공격하는 리디아 군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페르시아 왕의 독창력이 증명되었다. 리디아의 군마(軍馬)들은 그 이상하게 보이는 목이 긴 짐승들과 그 놈들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을 내던지고 도성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주 빨리, BC 547년 10월과 12월 사이에 동맹군들이 크뢰수스를 도우러 오기도 전에 사데는 단기간의 포위 후에 함락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크뢰수스가 처형을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긴 하지만, 리디아 왕이 고레스의 수중에 들어왔으나 그가 자기 대적의 생명을 살려준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고레스는 온 세상에 자기가 바로 하늘이 낸 놀라운 사람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승리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바벨론 성읍들과 고을에 전해졌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의 느낌은 각양 각색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이 소식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겠지만, 바벨론과 데마(Tema)에 있던 통치자들, 곧 벨사살과 나보니두스에게는 틀림없이 경종이 되었을 것이다.

 리디아를 정복한 후 6년 동안 고레스가 무슨 활동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레스와 같은 사람이 그 여러 해를 하는 일 없이 보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베롯수스(Berossus)의 보고에 의하면, 고레스는 바벨론을 향해 진군하기 전에 아시아 전역을 정복했으며, 크세노폰도 그 시기에 한 번 아라비아 원정을 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자료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 기간 동안에, 고레스는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에 대한 자기 통제 수단을 견고히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아라비아에서 나보니두스와 교전을 벌였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한 자료에서 그 왕은 자기가 직접 “그[고레스]의 나라를 정복했고” 그의 재물을 자기 거주지로 가져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이 거짓된 자랑인지, 아니면 나보니두스가 실제로 어느 때인가 고레스를 물리친 적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데가 함락된 BC 547년과 54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540년 말경에는 고레스가 자기 제국을 튼튼한 무리로 조직하고, 다가오는 바벨론과의 무력 대결에 대비하여 가공할 만한 군대를 이룩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고레스에게 예기치 않았던 행운이 이르러 그를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바벨론 동쪽 끝에 있는 구티움(Gutium) 지역의 총독이 자기 영지와 백성을 데리고 페르시아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나보니두스는 데마에서 바벨론으로 돌아와 동부 지역 전체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자기 아들 벨사살을 도와, 피할 수 없는 고레스와의 충돌에 대비했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크고도 결정적인 전투는 티그리스 강가의 오피스(Opis)에서 벌어졌는데, 그곳은 나중에 셀류키아(Seleucia) 성읍이 된 자리(현대의 바그다드에서 약 32킬로미터 강줄기를 따라 내려간 지역)이거나 그 근처이며, 느부갓네살의 대(大)성벽(great wall)에서 가깝다. 바벨론 군대가 오피스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암호를 사용한 기록들은 고레스가 티그리스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고, 그가 바벨론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기 때문에 모든 조직적인 저항은 그 즉시 사라졌고, 나라 전체가 페르시아 군대 앞에 펼쳐지게 되었다고 말해 준다. 승리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즉시 포착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들의 승리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유익을 취했다. 그들은 도망치는 바벨론 군대를 서쪽과 남서쪽으로 추격하여, BC 539년 10월 11일에는 티그리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십파르(Sippar)를 아무런 전투 없이 점령할 수 있었으며, 단지 이틀 후에는 오피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6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바벨론을 점령했다.

 십파르가 함락되기 직전에 도성에 있던 나보니두스는 남쪽으로 피신하였으나, 며칠 후에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페르시아 군에 투항했고, 그들은 그를 살려주었다. 오피스에서 전투가 있은 후에 벨사살은 바벨론의 튼튼한 요새 안에서 원수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튼튼한 요새도 그에게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바벨론 내부에는 그를 배반하고 그 도성을 페르시아인들에게 넘겨준 원수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오피스의 전투를 끝내자마자 즉시로 바벨론을 향해 진군해 온 “구티움의 총독 욱바루(Ugbaru)”는 BC 539년 10월 12일,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입성했다.1 하룻밤의 주연에 빠져 있던 벨사살은 문자 그대로 분벽에 “글자를 쓰는 손가락”을 보았고 또 죽임을 당했지만, 그 외에는 유혈(流血)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그 도성은 페르시아 군에 의한 파괴를 면했고, 군인들은 신전이나 공공 건물의 파수병으로 배치되어 바벨론의 평상 생활이 질서 있게 유지되고, 재산을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했다.

 고레스는 그의 관대함을 통해 나라들과 성읍들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성공적인 정복자임을 입증했다. 16일이 지난 후에(BC 539년 10월 29일) 그가 직접 수도로 들어갔을 때, “바벨론의 모든 거민들이...그의 발에 입맞추었고, 환한 얼굴로 그가 왕권을 [받게 된 것을]환호했다. 기쁨으로 그들은 그를 주인으로 영접했는데, 그의 도움으로 인하여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났으며, [또한] 손해와 재난을 당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름 아닌] 그의 이름을 존경했다”(고레스의 실린더라고 알려진 고레스의 점토 원통 명각; 참조 53쪽 사진).

 대제국이 그다지도 쉽게 정복된 일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고레스처럼 정복당한 백성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진 정복자도 없었다. 갈대아의 지배 계급은, 특별히 나보니두스를 제외하고는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멀리했기 때문에, 백성은 정부의 변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환영했다. 정복당한 나라들은 자기들을 정복한 자들에게 사랑이나 충성심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페르시아의 한층 더 인도적인 통치로 인해 더 나은 삶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인들이 이미 여러 해 동안 통치했던 나라들 가운데서 그들의 정책을 입증해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책은 당시의 문명 세계에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온후함과 합리적인 정책은 고레스측에서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았어도 백성들의 환심을 사게 만들었다.

 고레스는 위대한 전사요 사령관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과 평화를 얻는 방법도 아는 현명한 통치자였다. 그는 평화 정책을 통해 자기의 진정한 위대함을 증명했다. 앗수르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은 정복한 나라들의 성읍을 파괴하고 그 거주민들을 저들의 영토 안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나, 고레스는 그들의 본을 따라 백성의 무덤을 다스리기 위해 그들을 박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정복한 성읍들을 보존해 주었고, 이전에 그들의 농가에서 강제 이주했던 백성을 돌려보냈으며, 그들에게 경제적인 혜택을 주는 정책을 시행하여 잘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 바벨론의 수도가 그 한 예이다. 바벨론을 수도들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여, 자기를 “바벨론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또한 바벨론의 주신(主神) 마르둑에게 호의를 나타냄으로써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또한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으로 옮겨 두었던 여러 신들을 본래의 성읍으로 돌려보내고, 지방의 신전들을 보수하거나 중건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희 도성 안에 수많은 이방신들과 그 경배자들이 있는 것을 보기 싫어했던 바벨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저희 신들을 돌려 받거나 파괴된 신전들을 중건하게 된 이방 성읍들과 나라들의 백성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는 페르시아인의 감독 아래 지방의 지도자들이 자기 지역 총독이 되어 저희 백성을 다스리도록 허용했고, 정복당한 나라들에게 페르시아인의 생활 방식이나 종교, 언어 등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슬기롭게 행동했다. 고레스가 시작한 이런 현명한 정책들을, 때때로 어떤 이들은 어기기도 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대체로 잘 따랐다. 하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지방의 풍습과 종교와 관례들을 존중하려고 정직하게 노력했다. 또한 그들은 거의 전(全) 세계가 알고 있던 아람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함락된 지 겨우 8년이 지난 후인 BC 530년 8월, 이란 동부의 어떤 종족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에서 고레스가 사망한 것은 커다란 손실이었다.


 캄비세스, BC 530~522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레스는 아들 캄비세스를 보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부친과는 달리 캄비세스는 인기 있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떠나기 전에 자기 형제 바르디야(Bardiya) 즉 스메르디스를 남몰래 죽이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오랫동안 수도에 없을 경우 원수들이 스메르디스를 보좌에 앉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모살 사건이 알려지고, 음모에서 살아 남았다고 주장하는 가짜 스메르디스가 보좌를 찬탈했을 때, 그 찬탈자를 제국의 대부분에서 받아들인 것은 캄비세스가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우리는 캄비세스의 애굽 원정 외에는 그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나일강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이 그의 열렬한 야망의 목표였다. 캄비세스가 애굽 원정에 나선 것이 부친의 계획을 이행한 것인지 아니면 부친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책을 저지른 것인지에 대하여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고레스가 결국은 애굽을 정벌하려고 계획했을 가능성은 있는데, 왜냐하면 애굽 왕 아마시스는 이전에 페르시아를 대적하여 삼각 동맹을 맺었던 바벨론, 리디아, 애굽의 지배자들 가운데 생존해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레스가 매번 승리를 얻은 후에는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기 전에, 슬기롭게 정복한 지역에서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했던 것처럼, 애굽을 치기 전에도 그는 이전의 바벨론 제국 전체에 걸쳐 자기의 세력을 철저하게 공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계획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나타내기 전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고레스는 현명하게도 과도한 영토 확장 계획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그 천재의 아들 캄비세스는 오직 새로운 정벌만이 자기의 이름과 명성을 확고히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BC 525년 초 캄비세스가 애굽을 향해 진군했을 때, 아마시스는 죽었고 프삼티코스 III세(Psamtik III)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원정이 처음에는 유별나게 성공적이었다. 그는 베니게 도성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두로와 그들의 해군을 그의 지휘 아래 넘겨준 구브로 섬도 있었다. 또한 사모스의 폴뤼크라테스(Polycrates of Samos)는 애굽과 맺었던 동맹을 바꾸어 페르시아와 맺기도 하였다. 애굽이 돈을 주고 고용한 군대의 장군이었던 파네스(Phanes)는 프삼티코스를 떠나 캄비세스에게로 넘어와 자기의 이전 군주를 대적해 캄비세스를 도왔는데, 특히 페르시아 군대를 안내하여 안전하게 사막을 지나 삼각주 지역에 이르도록 했다. 첫 번째 전투는 펠루시움(Pelusium)에서 벌어졌는데, 그곳에서 프삼티코스의 용병(傭兵)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캄비세스는 즉시 멤피스를 향해 진군했고, 얼마간의 포위 후에 그 도성을 차지했다. 그는 또한 6개월도 다스리지 못한 바로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리비아와 퀴레나이카(Cyrenaica)는 자발적으로 페르시아에 항복했으나, 서부 사막 원정은 막대한 손실로 인해 실패하였다. 누비아 곧 에티오피아에 대한 또 다른 원정이 성공하긴 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전체 애굽과 그 속국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구성한 연합 국가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애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캄비세스는 바로가 가졌던 칭호들을 취하고 바로가 행하던 예식적인 기능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애굽을 강력한 태수 관할 구역으로 조직하여 대리자들의 손에 맡겼는데, 이리하여 제국의 대부분이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애굽은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애굽인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행위들과 그들의 신들을 모욕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런 점에서 그의 기록들은 분명히 과장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캄비세스가 실각한 이후 정책이 변화된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헬라 역사가의 기록은 애굽인들이 자기들을 정복한 자들에게 느낀 증오심을 나타내 준다. 캄비세스가 애굽의 어떤 신전들을 파괴한 것은 사실이며, 그곳은 지배 체제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킨 곳들로 여겨지지만, 그가 어떤 신전들에는 호의를 보이고 국가의 보조금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예컨대, 그는 사이스(Sais)에 있는 네이트(Neith)의 신전을 청소하도록 물자를 제공했으며, 그 여신을 높이기 위한 축제 비용도 보장해 주었다.

 캄비세스는 BC 522년, 자기 형제 바르디야(스메르디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보좌를 찬탈했다는 말을 듣고 애굽을 떠났다. 자기가 새로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페르시아의 고향 지역과 바벨론, 기타 다른 곳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수리아를 통과하던 중에 캄비세스는 갑자기 죽었는데, 자살을 했거나 사고였을 것이다. 그는 상속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 스메르디스의 보좌가 견고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단지 6개월 조금 더 지속되고 끝났는데, 캄비세스의 먼 친척인 다리오가 그를 죽이고 보좌에 올랐기 때문이다.


 다리오 I세, BC 522~486년

 다리오가 보좌에 오르게 된 과정에 관하여는 베히스툰(Behistun) 암벽에 새겨진 왕의 장문의 명각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 명각은 19세기에 설형문자를 판독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참조 제1권, 108, 121). 여기서 다리오는 후손들을 위해, 가우마타(Gaumata)라는 이름을 가진 마기 승족(Magian, BC 8세기에서 6세기에 이란의 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사제 계급-역자 주)이 어떻게 보좌를 찬탈했는지,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캄비세스가 죽였다는 소문이 떠도는 고레스의 아들 스메르디스라고 믿도록 만들었는지 그 내력을 기록했다. 더욱이 다리오는 페르시아와 메디아와 다른 나라들이 캄비세스가 죽기 전부터 자기를 인정했으며, 스메르디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전들을 파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전임자들의 정책과는 분명히 상반되는 정책을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가짜 스메르디스가 짧은 통치 기간 중에 펼친 정책들 가운데 하나는 신전들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런 왕이 보좌에 앉아 있었으므로, 고레스가 중건하도록 허락을 내린 후 서서히 진행되던 예루살렘 성전 중건 사업을, 유대인의 원수들이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리오가 몇몇 충성된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 문서들에는 바르디야(Bardiya)라고 불린 가짜 스메르디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보좌를 차지함으로 아캐메네스(Achaemenid) 왕가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가 제국 전체의 인정을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추가적인 전쟁이 있어야만 했다. 그는 보좌를 차지하고 나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대적과 열아홉 번 전쟁을 치렀고 9명의 왕을 사로잡았다고 언급한다. 그 대적들 가운데는 나보니두스의 아들이라고 사칭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가짜 스메르디스가 보좌를 찬탈하고 캄비세스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가 휘말린 혼란은 거의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다리오는 마침내 모든 원수를 이기고, 세상이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대제국의 논란할 여지가 없는 통치자로 떠올랐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인더스강에서 서쪽으로는 헬레스폰트까지, 북쪽으로는 아라랏산에서 남쪽으로는 누비아까지 이르렀다. 다리오가 자기 통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박멸한 후에는 평화의 통치를 시작했는데, 그 통치는 거의 3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당당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다리오는 다방면으로 선정을 베풀어 제국에 속한 나라들의 복지와 행복을 증진시켰다. 다리오는 애굽에서 나일강과 홍해 사이의 운하를 완성했는데, 그것은 여러 해 전에 느고 II세(Necho II)가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애굽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해안 도로에는 물을 보급하는 기지들을 건축했으며, 제국 전체를 망라하는 매우 능률적인 우편 제도(정부의 특전[特電]을 위하여)를 조직하여,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말과 기수(騎手)들이 우편 분국(分局)들을 이어주도록 만들었다. 지방 행정의 요직에는 본토인을 임명하고, 속국 민족들의 종교 행사와 제식(祭式)에는 왕실이 후원을 해 줌으로써 왕은 큰 호감을 얻었다. 애굽에서 나온 수많은 명각들은 다리오가 나일강 지역의 얼마나 많은 신전들을 다시 열거나 수리해 주었는지, 또한 그가 애굽의 사제들에게 값진 선물들을 주어 후원함으로 그곳에서 그를 “모든 신들의 친구”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헬라의 기록들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서방 지역들에 있는 신전들과 제사 의식에 대하여 그가 나타낸 호의적인 태도가 유대인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우호적인 조서는 그들의 성전 건축을 완성하도록 허락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 의식을 위한 재정적 도움까지 보증해 주었다(스 6:6~12). 더욱이 다리오는 자기 신민들이 저들의 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는데, 그가 애굽을 다룬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애굽의 모든 법을 수집하여 출판하도록 명령했다. 그 때문에 애굽인들은 그를 가리켜 저들의 여섯 번째 입법자라고 부른다.

 그의 속국 민족들에 대한 모든 처우를 보면, 고레스의 정책을 지속하고, 호의적인 통치를 통하여 호감을 조성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다른 민족들의 종교적인 정서를 그는 보호했고, 그들의 제사 의식들을 후원하고 권장했으며, 그들의 민족적인 독특성과 관습들을 지혜롭게 허용하였다.

 그렇지만 다리오는 진정한 동방의 방식을 따라 제국을 단호하고도 신중하게 통합한 강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제국의 중심을 형성했고, 그 나라의 영광과 부를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수사(수산)에 있는 자기 왕궁에 집중시켰다. 그는 매일 궁궐 문 앞에서 15,000명의 백성에게 음식을 주었고, 신민들의 마음속에 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을 불어넣으려는 목적으로 궁중 예식을 도입했다. 누구든지 초대받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가면 목숨을 잃었으며, 그의 앞에 나타나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은 땅에 뒹굴며 무력한 인간이라는 자세로 소매 안에 손을 감추고 있어야만 했다. 그의 뜻은 크든지 작든지 간에 모든 신민들에게 곧 법이었다. 다리오는 페르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자기 아내들을 택했고, 통혼을 통해 자녀들을 줌으로써 보좌를 귀족들과 결합시켰다. 페르시아 귀족의 자제들은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고 왕의 개인 시종(侍從)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나라의 미덕, 진리를 말하는 법, 승마, 사냥, 궁술 등을 배웠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제국의 고위 관리로 선택했다. 그들이 왕궁 생활의 부유함과 영화로움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개인적으로 왕에게 애착심을 갖게 된 후에는 보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남게 되었다.

 또한 다리오는 자기 이름을 따라 다레이코스(dareicos, 다릭)라고 불린 금화(金貨)를 만들어 통일된 통화(通貨)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화(鑄貨)는 BC 7세기 이후로 리디아 사람들이 사용했으나,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때 다리오는 전 제국에 이와 유사한 제도를 채택했다. 다레이코스는 은 20세겔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왕실에서만 주조할 수 있었으나, 은전과 동전의 주조는 여러 지방 정부에 위임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의 잘 알려진 정직성도 제국의 큰 축복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이 진실하게 말하고, 그들이 사는 나라의 복지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인들은 수많은 대도시에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이(paradeisoi,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단어. 참조 창 2:8 주석)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했고, 삼림을 보호하고 훌륭한 농사 기술과 방법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다리오는 약 20년간 평화롭게 다스린 후에, 정치적으로 혼탁했던 10년을 맞았다. 헬라와 여러 번 전쟁을 했고, 국운(國運)이 오락가락하면서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은 헬라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이러한 전쟁의 씨앗은 다리오가 BC 513년, 유목하며 방랑하는 스구디아인(Scythians)을 치기 위해 첫 번째 유럽 원정을 나서는 가운데 뿌려졌다. 그 원정은 소아시아에 있는 자기 영지를 끊임없이 침략하지 못하도록, 야만족들의 본토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다리오는 헬레스폰트와 마게도냐 사이에 놓인 트라키아(Thrace, 드라게)와 그 지역에 속한 헬라 성읍들을 점령하고, 그 다음에는 스구디아(Scythia)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저희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상태였으나 다리오의 군대가 퇴각할 때까지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BC 500년, 밀레도(Miletus) 도성이 주동이 된 이오니아인(Ionian)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반란은 다리오가 다스리던 많은 헬라 도성들로 확산되었다.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행정의 중심지였던 사데가 불에 타버렸을 때, 다리오는 격분하여 그 범죄를 결코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 간단한 역사적인 논문에서 헬라 반란의 상이한 국면들과, 페르시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룬다는 것은 궤도에서 너무 멀리 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반란의 중심지였던 강대한 밀레도 도성을 BC 494년에 파멸시킴으로, 사데를 불태운 일에 대한 보복이 이뤄졌다는 언급만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다리오는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아덴 사람들을 처벌하기 원했고, 따라서 헬라 본토를 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BC 492년에 있었던 첫 번째 원정은, 아토스(Athos) 산의 갑(岬)에서 그의 함대의 절반이 폭풍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아덴과 스파르타가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통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으므로, 헬라를 치기 위한 두 번째 원정대가 BC 490년에 파송되었으나 마라톤에서 처참하게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인들이 당한 명성의 손실은 물질이나 인력의 손실보다도 훨씬 더 컸으며, 그런 사실은 마라톤 전쟁이 있은 지 3년 후인 BC 487년에 애굽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국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리오는 애굽에서 페르시아인의 통치를 회복하거나, 마라톤에서 당한 패배를 복수할 때까지 살지 못했다. 그는 나이 많고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제국을 자기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게 물려주고, BC 486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크세르크세스, BC 486~465년

 다리오는 고레스의 딸 아톳사(Atossa)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를, 자기의 장자가 아니었지만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헤로도투스의 말에 따르면, 그 새로운 왕은 외모나 체력에서 페르시아인들 가운데는 견줄 사람이 없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군사 지도자나 군주로서 그는 고레스나 다리오에 비길 만한 후계자는 되지 못했다. 그는 심각한 패배를 여러 번 당했으나, 정치나 국사(國事)보다는 진기한 연애 사건이나 규방의 밀통 사건들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성격은 불안정하고 우유부단했지만 근본이 악하지는 않았다. 그를 미워했던 헬라인들은 그를 웃기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지만, 분명히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보좌에 오른 후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애굽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BC 485년에 그는 애굽으로 진군하여 단기간의 원정으로 그 땅을 다시 정복했다. 애굽은 자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반란을 일으키기 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노역”에 처해졌고, 크세르크세스의 형제 아캐메네스(Achaemenes)의 철권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거의 25년 동안 이 나일 강변의 국가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을 괴롭히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애굽의 반란이 진압된 지 불과 2년 후인 482년에, 바벨론에서 심각한 반란이 두 차례 일어났다. 첫 번째 반란은 벨-쉬만니(Bel-shimanni)가 주도한 것으로 8월에 일어났다. 그것이 진압된 다음 같은 해 9월에 샤마쉬-에리바(Shamash-eriba)가 주도한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크세르크세스는 젊은 사위 메가뷔조스(Megabyzos)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반란을 철권으로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당대에 세계적인 문화 중심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고레스가 파멸하지 않고 보존했던 바벨론은, 그런 불충성함 때문에 잔인한 형벌을 받았다. 크세르크세스가 그 도성의 방어 시설들과 왕궁들을 파괴한 것은 그 해였을 것이며, 그 중에는 저 유명한 에테메난키(Etemenanki)의 지구라트(신전 고탑)와 더불어 찬란한 에사길라(Esagila) 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의 군주들을 포함하여 모든 왕들이 해마다 바벨론의 새해 첫날이 되면 “바벨론의 왕”임을 확인받기 위하여 손을 잡았던 마르둑(Marduk)의 황금상(黃金像)은 페르시아로 이송되었고, 바벨론 왕국은 앗수르 도(道)와 합병되었다. “바벨론의 왕”이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는 결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였던 바벨론은 파멸되었고, 비록 그 도성은 오랜 후 알렉산더 당시까지 폐허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결코 그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참조 사 13:19 주석). 이사야가 2세기 전에 했던 예언(사 13:19~22)이 마침내 성취되기 시작했고, 그 교만한 나라는 정복한 나라들을 다룰 때에 나타냈던 교만과 불손과 잔인함에 대한 응보를 받았다.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닙푸르(Nippur)에서 발견된 기록들은, 몇 해 후에 그 땅의 대부분은 페르시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보여 준다. 그런 사실은 크세르크세스가 많은 바벨론 부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 넘겨주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설형문자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도 그런 조치로 인하여 역시 이익을 보았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이 논문의 제V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헬라와 여러 번 전쟁을 할 때에 크세르크세스에게는 불운이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오랫동안 부친이 하던 헬라와의 전쟁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의 통치를 아시아에 한정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투스는 왕의 자문관들 사이의 내분에 대하여 말해 주는데, 그의 삼촌 아르타바누스(Artabanus)가 주도하는 일단의 자문관들은 평화를 선호했던 반면에, 마르도니우스(Mardonius)가 대표하는 다른 무리는 전쟁을 원했는데, 마침내 전쟁을 하자는 무리가 왕의 지지를 얻었고, 제국 전체에 걸쳐 새로운 원정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지체한 이유는 조직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헬라 침공은 BC 480년에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넘으로 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 유명한 제3차 헬라-페르시아 전쟁을 상술하고, 페르시아의 군대를 따라 아르테미시움(Artemisium)과 테르모퓔래(Thermopylae) 나루까지 가서 레오니다스(Leonidas)가 이끄는 용감한 헬라 군대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위 교전을 펼쳤던 이야기까지 하자면 궤도를 너무 멀리 이탈하게 될 것이다. 페르시아 군대는 아덴 사람들이 포기한 아덴을 점령했으나, 살라미(Salamis) 해전에서 패했고, 패전군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BC 480년의 원정보다 더욱 비참했던 것은, 그 이듬해(BC 479) 마르도니우스가 이끈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헬라의 플라태아(Plataea)와 소아시아 해변에 있는 뮈칼레(Mycale) 갑(岬)에서 하루에 두 번 패배한 일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헬라를 떠났고, 그 후로는 그들의 통치를 소아시아 본토에만 한정했으나, 헬라는 그곳에서조차 군사적 우위를 증명했다. 헬라의 지도자 키몬(Cimon)이 이끄는 군대가 밤빌리아의 유뤼메돈(Eurymedon)강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것으로, 헬라에서 참패한 지 14년 후인 BC 466년 어느 날,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과 베니게의 지원 부대에 속한 80척의 전함이 궤멸했다. 이 전투에 대하여 헬라의 시인은 “바다가 아시아를 유럽과 떼어놓은 이래, 사납게 날뛰는 군신(軍神) 아레스(Ares)가 인간의 도성들을 지배한 이후로, 땅이나 바다에서 인간이 이룬 업적 가운데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크세르크세스의 명성은 그의 제국의 군대가 겪은 각종 참화로 인하여 엄청난 손상을 받았겠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그는 크게 번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뤼메돈에서의 심각한 패배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그의 신하 아르타바누스(Artabanus)로 하여금 왕의 생명을 위해하려는 음모를 주도하도록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초기의 음모들은 실패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에스더서에 언급되었으나(에 2:21~23), 마지막 음모는 성공하여 크세르크세스는 궁중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살해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닥사스다 I세, BC 465~423년

 크세르크세스의 신임을 얻었고 세력을 가진 대신이었던 아르타바누스(Artabanus)는 스스로 보좌에 오르고 싶은 욕망 가운데 왕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아르타바누스는 크세르크세스를 제거한 후에, 자기가 그 나약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어린 왕자 아닥사스다를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왕세자였던 다리오가 자기 부친을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아닥사스다는 그 이야기를 믿고 아르타바누스에게 다리오를 죽이도록 허락했으나, 그의 매부 메가뷔조스(Megabyzos)가 정말로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자, 그는 강력하고 위험한 아르타바누스를 살해했다.

 이 새롭고 젊은 군주는 그의 아버지 크세르크세스처럼 강력한 지도자나 장군은 아니었다. 만일 왕에게 그의 강력한 지지자요 사심 없는 메가뷔조스가 없었더라면, 아닥사스다는 오랫동안 보좌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왕궁이 있는 도성들 안에서 살았고, 전쟁은 장군들에게 하도록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의 지배를 받았는데, 대개는 어떤 정책을 따라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자문관들에 의하여 선악간에 쉽게 설득당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국이 하나로 유지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BC 465년에 페르시아군이 유뤼메돈강에서 참패한 사건과 같은 해에 크세르크세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은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의 북동쪽과 남서쪽 지역 곧 박트리아(Bactria)와 애굽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박트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진압되었지만, 애굽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리비아 통치자였던 프삼티코스(Psamtik)의 아들 이나루스(Inarus)가 삼각주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고(BC 463 또는 462), 북서쪽 삼각주 지역에 있는 옛날의 국경 요새지 마레이아(Mareia)를 본부로 삼았다. 파프레미스(Papremi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대적하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페르시아 군대가 패배하고 아캐메네스(Achaemenes) 총독은 살해되었다. 이나루스는 그의 시체를 페르시아로 보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멤피스(Memphis)와 애굽 상부 지역을 보유할 수 있었고, 애굽 남부에 있는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와 홍해를 통하여 어느 정도 본국과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BC 460년에 아덴의 군대가 이나루스를 도우러 와서 멤피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남아있는 페르시아 수비대를 성채 안으로 몰아넣은 일이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나루스를 치기 위한 원정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큰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닥사스다는 주변 민족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머나먼 애굽 원정에 성공하려면 그들의 도움과 친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 가운데는 베니게 사람들이나, 유대인과 같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민족이 속해 있었다. BC 457년에 에스라와 유대인들에게 내린 왕의 허락은, 그 당시에 여러 민족과 친선을 도모하려는 정책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BC 456년, 마침내 메가뷔조스는 애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애굽과 아덴의 군대는 멤피스에서 패배했고, 패잔병들은 프로소피티스(Prosopitis) 섬으로 도망쳤지만 베니게 함대의 지원을 받은 메가뷔조스가 강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방어군은 그 섬을 1년 반 동안이나 지켜냈지만 BC 454년 여름에 전격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나루스는 삼각주에 있는 한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보장을 받고 결국 메가뷔조스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삼각주의 서부 지역은 이나루스의 추종자였던 애굽인 지배자 아뮈르태우스(Amyrtaeus)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군대가 그를 어떻게 했는지, 애굽의 그 지역을 다시 정복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정복한 그 지역은 페르시아의 방백 아르샴(Arsham) 또는 아르사메스 (Arsames)의 손에 맡겨졌는데, 아르샴은 바벨론과 기타 지역에 많은 토지를 소유했으며, 나일강 지역을 거의 반세기 동안 다스렸다. 그의 치적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아람어, 바벨론어, 헬라어 문서에서 얻을 수 있다.

 이나루스는 페르시아인의 말을 믿고 메가뷔조스에게 항복하였으며, 페르시아로 압송되었다. 몇 년 후에 아닥사스다의 모친은 아캐메네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이나루스를 죽이도록 왕을 설득했다. 유브라데와 애굽 사이에 놓인 모든 영토를 망라하는 “강 서편”의 넓은 총독 관할 지역을 다스리던 메가뷔조스는 왕이 신의를 배반한 데에 너무도 분개하여, 처남인 왕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BC 450년경에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그를 치기 위하여 두 번이나 군대를 보냈으나, 유능한 장군인 메가뷔조스에게 격퇴당했고, 아닥사스다는 자기의 입장이 심각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시기에 페르시아의 함대가 구브로에 있는 살라미 근처에서 아덴 군대와 해전을 벌이다가 참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존폐조차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길고도 목적 없는 전쟁에 지친 아닥사스다는 BC 448년에 헬라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른바 키몬(Cimon)의 평화는 페르시아인들에게 구브로와 애굽에 대한 아덴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헬라 성읍들은 조공을 바치지 않도록 해 주었다. 또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메가뷔조스를 무력으로 제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과 메가뷔조스 사이에도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는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며, “강 서편”의 총독으로서 높은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런 모든 중대한 사건들이 메가뷔조스의 총독 관할 지역 내에 있던 유대인 구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이미 앞에서 지적했지만, 이 논문의 제VI장에서 좀 더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아닥사스다의 통치 가운데 후기 20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 시기에는 나라가 중대한 참화로 인하여 심각하게 흔들린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연약한 통치자이면서도, 여전히 선악간에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독재자였다.


 다리오 II세, BC 423~405/404년

 아닥사스다가 통치 41년 말경, 아마도 BC 423년 2월에 죽었을 때, 다시 한번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닥사스다의 장자 크세르크세스가 크세르크세스 II세로 보좌에 올랐으나, 몇몇 내시들의 도움을 받은 그의 이복 형제 세퀴디아누스(Secydianus)가 몇 주일 후에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암살자는 보좌를 지키지 못했고, 곧 다른 이복 형제 오쿠스(Ochus)에게 제거되었으며, 오쿠스는 다리오 II세로 왕이 되었다. 다리오 II세는 약골로서 자기의 아내이자 누이인 파뤼사티스(Parysatis)에게 완전히 지배를 받았는데, 그녀는 믿을 수 없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몇몇 내시들과 더불어 그녀는 실제적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일련의 수치스럽고 처참한 범죄를 통해 제국에 불명예를 가져왔다.

 그런 상태는 결국 나라 전체가 왕의 권위를 멸시하게 만들었으며, 정국을 계속되는 위기로 몰아넣는 반란을 불러왔다. 그런 반란들 가운데 한 가지는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그 반란은 왕의 형제인 아르시테스(Arsites)가 주도한 것으로, 메가뷔조스의 아들이요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르튀피우스(Artyphius)가 추종했다. 그들 두 사람은 파뤼사티스와 다리오의 말을 믿고 결국 항복했으나, 배반당하여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다리오는 그의 마지막 2년 동안 질병과, 애굽의 불안한 상황, 다가오는 죽음 후에 보좌를 계승하는 문제로 인한 집안 싸움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이나루스(Inarus)의 반역이 실패한 후에 애굽은 그 굴욕적인 처지를 꾹 참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정부가 점점 약화되는 것이 확연해지고 나라 전체에 불안이 계속되자, 애굽의 민족주의자들은 또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압제자들을 대적해 일어나게 되었다. 반란은 다리오가 사망했을 때 아뮈르태우스를 애굽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완전히 드러났다. 해방 운동은 삼각주 지역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이어져 나갔다. 세기가 바뀌기까지는 애굽 전체가 페르시아인의 손에서 해방되지는 못했음을, 브루클린 아람어 파피루스(Brooklyn Aramaic Papyri, 1953년 출판됨)를 통해 알게 되는데, 그 내용은 이 논문의 제VII장에서 다룰 것이다.

 BC 405년이나 404년에 다리오 II세가 죽고 그의 장자 아닥사스다 II세가 보좌에 오르면서, 페르시아의 역사는 성경 기록이 없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중간사 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불리는 이 기간은 주석 제9권에 나오는 논문에서 논의될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의 제VII장에서 논의될 애굽에서 나온 유대인 문헌들도 아닥사스다의 통치 초년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역사에 대한 개략은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페르시아인들의 종교

 페르시아인들의 원래 종교는 BC 제2천년기의 메소보다미아 북부의 미탄니(Mitanni)나, 후대의 메디아와 인도 같은 모든 아리아족 나라들에 널리 퍼져 있던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아리아족은 다신교를 신봉했고, 그들의 주요 신(神)들은 자연의 신들로서, 페르시아인들이 아후라-마즈다(Ahura-Mazda), 곧 “현명한 군주”(인도의 바루나[Varuna], 하늘의 군주)라고 부른 창공의 신, 빛과 약속의 신인 미트라(Mithra), 고대 아리아족의 폭풍신 인드라(Indra), 말을 모는 쌍둥이신으로 이름이 둘 다 같은 나사트야(Nasatya) 등이었다. 민간에 널리 퍼진 이 종교의 사제들은 마기 승족이었는데, 헤로도투스의 말에 따르면 모든 종교 의식과 제사에 대하여 독점권을 가졌으며,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던 고대 메디아 족속의 후예라고 한다.

 커다란 종교적 변화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유일신 종교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하여 일어났다. 그의 활동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BC 11세기부터 6세기까지 각 세기를 조로아스터가 살았던 시대라고 제시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그 세기들의 앞부분보다는 뒷부분, 아마도 고레스의 치세 중이나 그 직전이었다는 주장이 더욱 그럴 듯하다. 이런 견해의 근거는, 그 새로운 종교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다리오 I세가 마기승족에 속했던 가짜 스메르디스 가우마타가 신전들을 파괴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 신전들은 우선 조로아스터교의 성전이었으며, 마기승족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리오 I세의 그런 주장은, 마기 승족 사람들이 미워했던 새로운 종교가 이미 캄비세스 당시에 존재했고, 그 종교 의식을 위한 성전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은 아후라-마즈다(Ahura-Mazda 또는 오르마즈드[Ormazd]) 즉 “현명한 주”인데, 모든 선(善)의 원동력이며, 자신을 빛과 불 가운데 나타내는 지혜로운 창조의 영이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순수한 영들은 그를 섬긴다. 악의 원동력은 모든 마귀의 두목인 안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데, 그는 빛의 신이 창조하는 것에 악을 첨가하는 자이다. 인간은 이 영적인 세력들의 싸움 속에 휘말리게 되며, 선의 원동력이 승리하도록 이끌 책임이 있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도는 순결과 진리를 높이 평가했으며, 모든 종류의 거짓을 멸시했다. 조로아스터는 건강, 생명, 힘, 정직, 충성, 농업, 축산, 유용한 동물 보호, 악한 자가 만드는 것으로 간주되는 해로운 동물들을 박멸하는 일 등을 순결과 관련지어 이해했다. 게으름, 부정직함 또는 시체와의 접촉으로 부정해진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조로아스터는 백성의 윤리 강령을 높였고, 이란의 농부들을 교육하여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가는 높은 문화를 소유하도록 만들었다.

 고레스와 캄비세스가 여전히 고대 이란의 자연신 숭배자였는지, 아니면 이미 조로아스터의 추종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새로운 종교로 말미암아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전에 마기승족이었던 가짜 스메르디스는 옛 종교 일파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가 다리오 같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예배 장소로 사용하던 신전들을 파괴한 것에 대하여 다리오가 멸시하는 투로 말했기 때문이다. 다리오 I세, 크세르크세스, 아닥사스다 I세 등은 순수한 조로아스터교도였으며, 그들의 페르시아어 명각들 가운데 기도의 대상으로 언급된 유일한 신은 아후라-마즈다이다.

 조로아스터 자신은 다른 모든 신을 거부했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하여는 넓은 아량을 보였고, 다른 백성의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식에 대하여는 쾌히 양보해 주었다. 여타의 종교 집단에 대한 관용은, 페르시아 왕들이 현명한 통치자들이었고 서로 다른 수많은 민족과 종교 집단에 속한 저들의 신민 사이에서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 준다.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이 특히 매력적이었는지 그들에게 많은 특권을 허용했다. 그런 사실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왕들의 조서나, 엘레판티네(애굽)에서 빛을 보게 된 유대인들의 문서에 의하여 입증된다.

 페르시아 제국이 그 전성기를 지난 후,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적 순수성이 눈에 띄게 경감되었다. 다리오 II세와 특히 아닥사스다 II세 치하에서 옛날의 여러 민족 신들이 다시 들어왔고, 아후라-마즈다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한 불[火]과 하오마(haoma)를 또다시 신(神)들로 숭배하게 되었는데, 하오마는 조로아스터가 금지했던 주정음료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이 논문이 제한한 시기를 벗어나는 BC 4세기에 전개되었다.


 Ⅴ. 포로 중의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25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작거나 큰 집단으로 강제 이주한 후에(단 1:1~3; 왕하 24:16; 25:11; 렘 52:28~30), 이전의 유다 왕국 백성의 대부분은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귀족, 지식인, 군인, 전문가 그리고 많은 농부가 포로로 잡혀서 메소보다미아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다니엘서, 에스겔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에스더서에 언급되어 있는 성읍이나 향리(바벨론, 수산, 델 아빕, 앗돈[앗단], 그룹, 임멜, 가시뱌, 델 하르사, 델 멜라 등), 기타 농촌 지역에서도 거주했을 것이다.

 그들의 포로 생활 초년에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노예였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법은 노예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규정들을 마련해 주었고, 진취적인 유대인들은 개인의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틀림없이 주어진 모든 기회를 이용했을 것이다.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에스겔은 6년 후에 “나는 집에”(겔 8:1, 「제임스왕역」에는 “mine house”[내 집에]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라고 말할 수 있었고, 예레미야가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에게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전원을 만들라고 한 권고(렘 29:5~7)는,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여호야긴이 포로가 된 지 37년째 되던 해(BC 561)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마르둑이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고, 분명히 그때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왕하 25:27~30; 렘 52:31~34). 바벨론이 어떤 불안감이나 반(反)바벨론 운동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여호야긴을 석방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인들에게 환심을 샀으며, 착실하고 존경할 만한 시민들로 인정받았음을 나타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유대인들은 정부에서 명예와 지위를 얻었고, 다른 이들은 사업이나 전문 직종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다니엘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에스더서 등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어떻게 정부의 각 부서에 들어갔고, 심지어 나라의 최고 관직까지 차지했는지를 보여 준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충실한 문지기, 술 맡은 관원, 지방의 총독, 왕궁의 자문관들도 있었다(에 2:19; 10:3; 느 2:1; 5:14 등). 그 나라의 사회 생활에서 그들이 급속하게 상승하게 된 것은, 크세르크세스 당시에 그들이 당했던 증오(에스더서에 기술된)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사회적 및 물질적으로 융성한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발굴단이 닙푸르(Nippur) 발굴을 통하여 발견한 문서들 역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닙푸르 성에 있던 대규모 은행회사인 “무라슈 아들들”(Murashu Sons)의 공문서 보관소에는 수천 개의 점토판이 간직되어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이 중요한 성읍에서 이루어진 사업을 엿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문서들이 아닥사스다 I세와 다리오 II세 당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따라서 사실상 바벨론 유수 이후 시대의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그 이전 시대에 관하여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무라슈 아들들”이라는 은행의 고객 가운데 많은 유대인이 있었으며, 그들은 닙푸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소수 집단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문서들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고객으로, 많은 돈을 맡긴 채권자로, 심지어는 세무서의 검열관들과 지역의 행정 책임자들로 나타난다. 닙푸르에서 나온 그러한 기록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요직을 차지했음을 보여 주는 다니엘서나 에스라서의 자료들을 지지해 준다.
파사르가대(Pasargadae)에 있는 고레스의 무덤

주변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 “솔로몬의 모친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이 무덤은 고대의 기록에 의하여 바사 제국의 초대 왕이었던 고레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완전히 돌로 축조된 가옥 형태의 이 무덤은 본래 기둥으로 받쳐진 큰 강당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바사의 파이리대사(pairidaesa,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paradeisos], 낙원)라는 정원 안에 세워져 있다. 조그만 문을 통해 지금은 비어 있는 무덤의 묘실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묘실에는 알렉산더 대왕 당시까지도 금으로 만든 고레스 왕의 관(棺)이 있었다.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고레스의 원통형 명각

일반적으로 고레스의 실린더(Cyrus Cylinder)라고 불리는 고레스의 점토 원통은 바벨론의 폐허에서 호르무즈드 랏삼(Hormuzd Rassam)이 발견했다. 설형문자 명각은 BC 539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공식 문서를 담고 있으며, 그 표현 방식은 이사야의 어법과 에스라 1장에 나오는 고레스의 조서와 유사하다. 이 명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마르둑]는 모든 나라들을 조사해 보고 (연례 행렬에서) 마르둑를 기꺼이 인도할 안샨의 의로운 통치자를 찾았으며 [그리고]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를 지명했다...그의 백성의 보호자인 대 주재 마르둑은 그의 선행과 그의 의로운 마음을 기쁨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도성 바벨론을 치기 위해 진군하라고 그에게 명하고, 바벨론을 향해 길을 떠나도록 하였으며, 친구와 동맹자처럼 그의 곁에서 행진하였다...전투나 전쟁 없이 그는 그가 바벨론으로 들어가도록 했다...바벨론의 모든 백성이...그의 발에 입맞추었다....그들을 죽음에서 살려주고 그리고 모든 손상과 재난을 면하게 해준 주재(主宰)에게 그들은 기쁨으로 인사했다. 나[고레스]는 신전들과 그 안에 [오래 있던 신상들이 오랫동안 폐허되었던 티그리스의 성읍들로 돌아와서,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건립했다. 나는 또한 그들의 [이전] 모든 백성을 모으고 그들의 거처를 재건했다.”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아파다나 곧 왕궁 연회장으로 올라가는 대 계단

다리오 I세와 크세르크세스가 축조한 이 계단은 바사의 군인들과 공격하는 사자(獅子)들의 모습을 명각으로 보여 준다. 원래 아파다나에 있던 72개의 둥근 기둥 가운데 13개는 아직도 서 있으며, 이 사진에서는 7개를 볼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 부근에 있는 나크쉬-루스탐(Nagsh-I-Rustam) 바위 절벽에 있는 바사 왕실의 무덤들

오른쪽에는 다리오 I세(BC 522-486)의 무덤, 왼쪽으로는 그의 손자 아닥사스다 I세(BC 465-423)의 무덤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자동차가 무덤의 규모를 암시해 준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물질적인 면에서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도 경험했다. 함께 당하는 불행, 민족적인 재난, 고국과 성전과 자유를 상실함 등은 포로되어 간 자들에게 영적인 가치를 찾도록 했고, 옛날 고국에서 그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더 종교 지도자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이후에는 우상숭배를 버렸는데, 그 죄는 그들의 조상들이 주기적으로 빠졌던 것이었으며, BC 7세기와 6세기에 그들에게 닥쳤던 대재앙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이었다. 틀림없이 다니엘과 에스겔 같은 인물들이 백성의 영적인 교사로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교훈을 받기 위하여 그들에게 갔다(겔 8, 14, 20장).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던 고국에서 바벨론으로 가져온 선지서를 연구하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영감받은 말씀을 당시의 징조들과 비교했을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다니엘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는 “서책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의 포로 생활의 “연수(年數)를 깨달았”으며, 그 서책은 “예레미야서”인 것을 언급하고 있다(단 9:2). 이 성경절은 또한 성실하게 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은 그 예언들이 성취되리라고 믿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앗수르와 같은 압제적인 나라들에 대하여 선포된 예언들이 글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예언들이 이루어지는 것도 보았다. 이제 유대인들 가운데 신실한 자들은 바벨론에 관한 예언들이나, 고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일어날 것과, 저들의 나라가 회복될 것에 관한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자 기다렸다. 유대인들은 아리아 사람들이 역사 가운데서 역할을 수행하기 1세기 이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그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내용을 읽었다.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메디아) 사람을 내가 격동시켜 그들[바벨론 사람들]을 치게 하리니”(사 13:17).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에 바벨론이 약화됨에 따라, 이사야(13, 14, 21장)와 예레미야(50:2, 3, 10, 11)가 바벨론에 대하여 말한 예언들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바벨론 유수 초기에는 이사야 44장45장에 묘사된 해방자가 어디에서 올지 아무도 몰랐겠지만, BC 6세기 중엽에 접어들어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이란의 페르시아 족속 방백이었던 고레스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이 유배된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유대인들은 분명히 예리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고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 45:1~4)

 이 말씀은 오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저들의 해방을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는지 분명히 나타내 주었으며,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의 포로 기간(렘 25:11, 12; 29:10; 참조 사 44:28)이 다한 후에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사람의 이름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므로 고레스가 혜성처럼 권좌에 오르는 모습을 백성이 숨을 죽이고 지켜 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때는 노예가 되어 잡혀간 민족에겐, 분명히 신명이 나고 긴장과 큰 희망과 원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는 또한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다니엘과 같은 진지한 사람들이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감춰진 모든 죄를 저들의 생애에서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살피는 시기였다(참조 단 9장).

 바벨론은 이렇다 할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고레스 군대의 수중에 들어갔고, 바벨론 정부에서 이기심 없이 봉사함으로 새로운 지배자들에게도 알려졌던 유대 사람 다니엘은 새 정부에서도 고위 직분을 맡았다(단 6:3). 많은 동료들이 다니엘을 미워했지만, 그는 자제할 줄을 알았고, 자기 백성의 염원을 고레스가 귀담아 듣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니엘이 새로운 군주에게 이사야의 예언들을 가르쳐 주므로, 자기가 태어나기 1세기 이전에 영감받은 글이 자기에 대하여 얼마나 분명하게 묘사했는지를 고레스가 알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홀려버렸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을 저희 고국으로 돌려보내 성전을 중건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다니엘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면서, 조서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특별한 고백을 덧붙였다.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 이 조서는 유대인 포로 생활이 끝났음을 나타냈다.


 Ⅵ. 유대인의 회복


 고레스와 캄비세스 치하의 귀향과 성전 건축

 유대 민족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나타낸 고레스의 조서는 그의 즉위 첫해에 악메다에서 반포되었다(스 1:1). 한 해를 가을부터 가을까지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라 바벨론이 멸망한 때부터 계산하면, 그때는 BC 537년 여름이 된다.

 그 조서는 두 가지 형태로 내렸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반포했으며(대하 36:23; 스 1:2~4), 두 번째 것은 사무적인 목적만을 위한 지시 문서였다. 공적인 조서는

 (1) 예루살렘 성전 중건과,

 (2) 자발적인 의사에 근거하여, 포로로 잡혀온 모든 히브리인이 유대로 귀환하는 것,

 (3) 뒤에 남기로 선택한 동료 유대인들과 이방인 후원자들이 귀환하는 유대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내용 등을 규정했다.

 한편 사무적인 조서는

 (1) 계획된 새 성전에 관한 지시들과 정확한 세부 사항들이 포함되었고,

 (2) 건축비를 왕실 기금으로 충당하기 위한 조치를 내렸으며,

 (3) 이전 성전에서 사용하던 기명들을 회수해 유대인들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스 6:3~5).

 공적으로 반포되지 않은 공문서의 내용들이 공적인 조서에 포함되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조치들은 대중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또한 왕이 기꺼이 건축비를 부담하겠다는 사실을 공포한다면, 유대인들이나 그들의 후원자들이 재정적인 헌금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레스는 세스바살 또는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가의 유대인을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그곳은 유브라데강과 애굽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이루며, 페르시아 제국의 “강 서편”에 있는 총독 관할의 큰 지역이었다. 그 새로 임명된 총독에게 바벨론에서 찾아낸 옛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기명을 주었다. 솔로몬 성전에서 봉직했던 마지막 대제사장의 후손인 예수아(또는 여호수아)와 또 다른 지도자 9, 10명(스 2:2; 느 7:7)과 연합하여 스룹바벨은 옛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공식적인 명부에 등재된 42,000명 이상의 포로들이 고레스의 조서에 응하여 유대 귀환을 자원했다.

 에스라 2장에 제시된 상세한 명부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포로 기간 중에도 족보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고국에서 저들의 권리와 신분을 증명할 수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포로되었던 자들 가운데 귀환하는 비(非)성직자들은 한 가문에 100명 내지 3,000명 미만으로 구성된 17가문 단위로 분류되었고, 최소 42명에서 최대 1,254명으로 구성된 15집단이 향리 단위로 명부에 올랐다. 그 외에 “스나아 자손”이라고 불리는 3,630명이 한 집단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가난한 백성이었던 것 같으며(참조 스 2:35 주석), 유대 회중 가운데서 저들의 진상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들을 모두 잃어 버린 652명이 더 있었다. 포로되어 간 성직자들 가운데는 4가문에 속한 4,000명 이상의 제사장들이 스룹바벨과 합류했고, 그들의 제사장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3가문에 속한 숫자 미상의 제사장들도 있었다. 다수의 제사장들(4,389명)과는 대조적으로, 귀환을 청했던 성전의 하위직 종사자들은 소수(733명)에 불과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처럼 성전의 하위직 종사자들이 귀환을 주저한 이유는, 포로 이전 시대에 있었던 레위인들의 배도로 인하여, 미래의 성전 봉사에서는 그들이 비교적 천한 육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에스겔이 예언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겔 44:9~16). 그 외에 귀환하는 유대인들은 노비 약 7,500명과 노래하는 자들을 대동했다(스 2:64, 65).

 고레스의 조서가 BC 537년 여름이나 가을에 내려졌다고 본다면, 귀환 여정은 이듬해 즉 BC 536년 봄에 시작했으며, 그때가 일반적인 여행철이었다. 메소보다미아의 군대들은 관례적으로 외국 원정을 위해 봄철에 고국을 떠났다. 에스라는 80년 정도 지난 후 봄에 귀환 여행을 시작하여, 바벨론을 떠난 지 약 3개월 반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추종자 약 50,000명과 그들의 소유물을 운반하는 8,000여 마리의 짐승들로 구성된 스룹바벨의 대규모 여행단은 적어도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걸린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어쩌면 여름철에 고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모든 대규모 군대들처럼 그들도 유브라데 강변 길을 따라 북위 36도 인근에 이르렀거나 혹은 이전의 앗수르 본토를 통과해 아르벨라(Arbela)를 지나 요즈음의 수리아와 터키 국경에 인접한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들은 오론테스(Orontes)강까지는 거의 160킬로미터나 되며, 그 메마른 땅 중간에는 알렙포(Aleppo) 오아시스가 자리잡은 북부 수리아 사막을 횡단했을 것이다. 오론테스에 도착한 후에는 그들이 내륙 도로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베니게와 팔레스타인의 해안을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륙 도로를 이용했다면, 오론테스강을 따라 발원지로 올라가, 거기서 남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레바논 산맥과 동레바논(헤르몬산과 아마나산을 포함하는) 산맥 사이에 놓여 있는 고지대를 통과하고, 마침내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횡단해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그들은 먼저 감사 예배를 드리고 회중의 지도자들은 많은 헌물을 바쳤다. 포로되었다가 귀환한 유대인들은 이제 저희 조상들의 땅을 다시 차지하기 위하여 흩어졌다. 새해가 시작될 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새로 세운 번제단을 봉헌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 제도를 재개했으며, 제7월의 절기들을 지켰다. 그때에 성전 중건을 위한 계획도 세웠으며,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 시돈인들, 두로인들과 계약을 체결했고, 계획된 사업을 위하여 석수나 목수들과도 계약을 했다(스 2:68~3:7).

 실제적인 성전 중건 작업은 이듬해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기초석을 놓기 위하여 솔로몬이 최초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던 때와 동일한 달을 선택했다(스 3:8; 왕상 6:1). 여러 해 동안 바로 그 날을 기다려 왔던 신실한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기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설계도는 새 성전과 부속 건물들이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된 성전의 규모와 화려함에 필적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고, 그로 인해 젊은 시절에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했다(스 3:8~13).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한 후에 사마리아인들과 분쟁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전에 앗수르 제국이 정복한 지역에서 이전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앗수르 왕들이 이주시킨 여러 민족의 혼혈 백성이다.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신들과 함께 여호와도 섬겼는데, 여호와는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와서 이방신 숭배에 추가했다(참조 왕하 17:24~33).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이미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유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 동안에 사마리아인들이 차지했을 것으로 보이는 저희 조상의 소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런 지역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성전을 중건하는 일에 참여하거나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권리도 허락받지 못했다. 귀환하는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가까이 교제하는 일은 우상숭배로 인도하는 것이며, BC 586년의 대재앙을 야기한 원인은 우상숭배였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웠다. 따라서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배운 교훈을 나타내고, 북쪽에 있는 이웃들에게 그들과 저들은 상관할 것이 전혀 없다고 확고하게 선언했을 때, 결코 치료될 수 없는 절교에 이르게 되었다(스 4:1~3).

 그런 결정의 결과는 사마리아인들 편의 적극적인 적개심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였다(스 4:4). 성전의 건축 활동을 늦어지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이 “의사(議士)들에게 뇌물을 주어”(스 4:5) 약속된 왕실 기금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는 데 분명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죽은 후에 궁중에는 위기의 때에 그들의 주장을 후원하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해 줄 유대인 후견자가 없었던 듯하다. 고레스의 조서를 갱신하고 그 조서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의 재정적인 조치와 관련하여 다리오가 위협을 했던 사실은, 고레스의 조서가 시행되지 않았음을 다리오가 알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스 6:8~12).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굴의 의지로 좌절을 대처할 만한 믿음을 나타내지 못했다. 원수들에게 연합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대신 개별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노력하면서, 예루살렘의 건축 공사는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저희의 집들은 튼튼하게 건축하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사업에 나타낸 그러한 믿음의 결핍은 물가 폭등, 가뭄, 흉작 등과 같은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했다(학 1:6, 11). 그러나 다리오가 통치할 때에 유대인들이 “[고레스]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오히려 필역하지 못하였다”(스 5:16)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레스와 캄비세스의 치세 내내 성전 건축 현장에서는 약간의 공사가 진행되어 왔던 것 같다.

 BC 525년 캄비세스가 애굽으로 가는 길에 팔레스타인을 횡단할 때에, 유대인들의 대표자들이 그들의 지속적인 충성을 그에게 확인해 주기 위하여 해변 마을 어느 곳에선가 왕을 만났던 것 같다. 아무런 증거는 없지만, 애굽에 있는 엘레판티네의 유대인 문서들은 캄비세스가 애굽인들에게 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음을 암시하는데, 그가 엘레판티네에 있던 애굽 신전은 파괴했지만, 같은 섬에 이웃해 있던 유대인의 성전은 그냥 남겨놓은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고국에 와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일하면서 좌절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왕이 군대 원정에 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적대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위 관리들이나, 팔레스타인의 이웃 백성들 때문일 것이다. 그런 유대인의 원수들은 역시 페르시아 제국 전반에서 캄비세스가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왕에 대한 반감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역사의 다음 국면, 곧 찬탈자 스메르디스 치세 아래 유대인의 모든 건축 활동을 중단시킨 대목에서 논의할 것이다.


 스메르디스 치하에서 성전 건축이 중단됨

 캄비세스는 너무도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메디아 사람 가우마타(Gaumata)가 BC 522년 3월 11일에 캄비세스의 형제 바르디야(Bardiya) 즉 스메르디스라고 자처하면서 자기를 왕이라고 선포했을 때, 제국 대부분의 백성이 즉시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 증거는 바벨론에서 가짜 스메르디스라고 불린 바르디야가 통치할 당시, 캄비세스가 죽기 전에 기록된 바벨론 문서들에서 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이전의 옛날 종교를 신봉하던 거짓 바르디야는 같은 해 9월 29일에 사망할 때까지, 새로운 종교를 박멸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다리오가 장문(長文)의 베히스툰(Behistun) 명각에서 비난한 것처럼, 바르디야는 신전들(조로아스터교의 것으로 추정됨)을 파괴했다.

 유대인들을 적대하는 무리들이 그 사기꾼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건축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이미 건축된 건물까지 파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얼마나 쉽게 얻어낼 수 있었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 조서는 그가 신봉하는 종교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박멸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신전들을 파괴하는 스메르디스의 정책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유대인을 대적하는 그의 행위는, 그들이 페르시아 선왕(先王)들의 호의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했을 수도 있는데, 그는 선왕들의 업적을 망쳐버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대적들은 분명히 그런 조서에 환호했을 것이며, 이미 건축된 부분을 공격하기 위한 그들의 권한으로 사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2년 후에 성전 중건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새로운 기초를 놓을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학 2:18, 19)을 보아서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식 문서 보관소도 예루살렘이 공격받을 때에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강 서편”의 총독인 닷드내가 몇 년 후에 순시를 왔을 때, 저들의 건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문서상의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두(口頭) 주장을 보강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있는 왕궁 문서들을 참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스 5:13~6:2).

 6개월의 스메르디스 치세와, 그 후에 나라가 안정을 되찾기까지 다리오가 보좌를 얻기 위해 몇 명의 사칭자들과 싸워야만 했던 몇 개월간은 틀림없이 유대인들에겐 걱정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묘사한 상황은, 다리오 제2년(BC 520/19)에 사역을 시작한 두 선지자의 봉사 직전에 있었던 재난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고레스와 캄비세스처럼 유대인의 후원자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도인 다리오가 정치적인 난국에서 주인이 되고, 아캐메네스(Achaemenid) 제국의 보좌에 확고히 자리잡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크게 안심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리오 I세 치하에서 성전 건축이 재개되고 완성됨

 페르시아 제국이 안정된 상태를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재개하기 위한 새로운 충동을 불어넣기 위하여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 학개 1장은 다리오 제2년 제6월(엘룰월) 1일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에게 보낸 예언적인 기별로 시작하는데, 그들은 각각 백성의 정치적·영적 지도자였다. 학개는 성전 건축을 새롭게 시작할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백성의 믿음과 열심이 부족함을 책망하면서, 그들이 겪은 재난들은 태만함의 결과였음을 지적한다(학 1:2~11). 몇 주일 후(같은 달 24일)에 지도자들과 백성은 그 권고에 유의하기로 결정했다(학 1:12~15). 학개서에 나오는 이 두 날짜는 일반적으로 1년을 봄부터 봄까지 계산하는 방식에 따라 BC 520년 8월 29일과 9월 21일로 간주된다. 학개는 초막절이 끝날 즈음, 곧 제7월 21일에 백성과 그 지도자들에게 기별을 전했는데 그때는 대략 BC 520년 10월 17일이었다. 이때에는 그가 책망의 말을 하지 않았고, 용기를 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할 때 이 새로운 성전이 초라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옛 성전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확언했다(학 2:3~9). 그런 기별을 통해 그는 그 성전에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했다. 몇 주일 후, 제8월에 예언적인 이상들을 본 선지자 스가랴가 학개와 합류하였다(슥 1:1 이하).

 현장의 준비 공사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드디어 BC 520년 12월 18일에는 새로운 기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은 언제나 특별한 경축 행사들과 연결되었고, 학개는 그 기회를 이용해 두 번 설교하였는데, 한 번은 아마도 오전에, 또 한 번은 오후에 했다. 학개는 첫 번째 설교에서 그들이 열심을 되찾은 보상으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을 백성에게 확언했다. 학개는 기초석을 놓는 그날을 주목하라고 그들에게 촉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사 그들의 비참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시는지 않는지 보라고 요구했다(학 2:15~19). 두 번째 설교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행하려고 계획하셨는지에 대한 더 큰 약속들이 포함되었다. 그런 약속들은 조건적인 것이었다(학 2:20~23).

 더 이상 원수들의 방해는 없었던 것이 확실시되는데, 이제는 원수들도 감히 가짜 스메르디스가 내렸을지 모르는 적대적인 조서를 내리도록 강요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리오는 그런 행위라면 자기 정부를 대적하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었다.

 갑자기 “강 서편(메소보다미아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강 건너편’이라고 불리던 지역) 총독 닷드내”가 자기의 모든 관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는데(스 5:3), 그것은 아마도 정기적인 시찰을 위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다리오 치세 초기에 “강 서편”“바벨론” 지역의 총독은 우쉬타니(Ushtani)라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기 때문에, 닷드내는 그의 페르시아 이름의 아람어 형태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발견되어 근래에 알려진 설형문자 서판은 그런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내 주었는데, 닷드내는 우쉬타니의 하급자로, 우쉬타니가 두 곳의 커다란 지역을 직접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강 서편”을 다스리도록 임명했던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

 페르시아의 가장 잘 알려진 전승에 따르면 닷드내는 그 자신이 공정하고 양심적인 관리임을 보여 주었다. 성전 현장에서 부지런히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보면서, 그는 당연히 왕의 허가를 받았는지 물어보았을 것이다. 총독인 스룹바벨은 그 새로운 관리의 태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 물러서 있는 동안 유대 장로들이 대답을 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첫 번째 성전을 파괴한 이야기, 그들이 오랫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있었던 사실, 또한 고레스가 성전의 보물들을 그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성전 중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려 그들이 귀환하도록 해 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닷드내는 유대인들의 성실성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으며 분명히 그들의 이야기를 믿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얼마동안 그들의 공사를 계속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공식 허가증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진상을 왕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허가증은 사마리아인들이 없애버렸거나 훔쳐갔을 것이다. 닷드내는 보고서에 유대 장로들의 이름을 부가하면서, 바벨론의 문서 보관소에서 자료를 찾아보아 줄 것과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왕이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스 5:3~17).

 닷드내의 보고를 접수한 후에 담당 관리들은 바벨론의 정부 사료(史料)들을 살펴보았다. 바벨론의 문서 보관소에서는 그 문제에 관한 자료를 찾지 못하자, 담당 관리들은 엑바타나에까지 가서 자료들을 찾도록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페르시아인들이 양심적인 사람들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마침내 고레스가 내린 조서의 공식적인 사본을 찾아내 왕에게 가져갔다. 조서에는 건축 비용을 왕실 기금으로 지불하도록 했기 때문에 조서를 내린 후로 예루살렘을 위해 얼마의 비용을 지출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지불된 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음이 드러났을 때, 다리오는 분명히 노여워했을 것이다. 그러한 태만은 왕의 조서를 얼마나 회피했으며 그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았는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닷드내에게 보낸 왕의 답변이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되어 있고, 왕의 새로운 조서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서운 형벌을 가하겠다는 위협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칙령은, 첫째, 닷드내는 유대인의 건축 공사에 어떤 간섭도 하지 말 것, 둘째, 고레스가 약속한 건축 비용은 이제 “강 서편” 지역의 예산에서 지불할 것, 셋째,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 예식에서 왕과 왕자들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스 6:1~12).

 정부의 물질적인 지원과 그들의 지도자들이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영적인 지원을 받으며 백성은 큰 열심과 기쁨으로 일을 했던 것 같다. 모든 사업은 다리오 6년 아달월 3일에 완공되어 봉헌식이 거행되었다(스 6:13~15). 그때는 봄 계산법이나 가을 계산법, 어느 쪽으로 해도 BC 515년 3월 12일이 된다. BC 520년 12월에 두 번째 기초가 놓인 때부터 걸린 실제적인 기간은 4년 3개월이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 구내의 건축 공사를 완성하는 데 필요했던 기간보다 2년 3개월이 짧다. 건축 기간이 더 단축된 이유는, 예루살렘 북동쪽 언덕의 평탄치 않은 지형 위에 넓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솔로몬이 건설해야만 했던 거대한 기초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사용할 수 있었고, 고레스와 캄비세스 치세에 구해 두었던 많은 건축 자재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새 성전 봉헌과 관련된 축제들과 그 다음 달에 있었던 무교절 행사를 묘사한(스 6:16~22) 이후에, 성경의 기록은 크세르크세스 시대까지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다리오 치세 중에는 유대인들이 번창했던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현존하는 여러 나라의 기록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처럼, 다리오의 통치는 제국에 속한 모든 지역에 유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 치세에 있었던 위기의 시간들

 에스더서는 크세르크세스 12년에 있었던 위기를 묘사한다. 여기서는 간단한 요약으로 충분할 것이다. 수사(성경에는 수산으로 되어 있음)에 있는 왕궁에 문지기로 고용된 유대인 모르드개를 왕의 고위 대신인 하만이 개인적으로 증오하면서 유대 민족 전체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이 생겼다. 불안정하고 자제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고대 세속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잘 알려진 그 왕은,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하만의 요구를 이유도 조사해 보지 않고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아름다운 유대인 소녀 에스더를 BC 479/78년에 크세르크세스의 아내가 되도록 함으로, 이미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 놓았다. 유대 민족 전체의 기도와, 에스더 개인이 왕에게 중재하여 BC 473년 3월의 어느 날에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는 이미 내려진 조서가 시행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조서는 취소할 수 없었으나, 부가적인 왕의 칙령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그들이 대량 학살을 당했을 그날은 위대한 구원의 날이 되었다. 하만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 후에, 그의 관직을 받게 된 모르드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큰 일을 했다는 찬사를 받는다(에 10:3).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한 설형문자 서판은 모르드개를 크세르크세스 당시에 수사에 있던 유력한 관리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종종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되는 에스더의 이야기는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지지를 얻고 있다.

 닙푸르에 있던 “무라슈 아들들”(Murashu Sons)이라는 사업소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기록들을 보면,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들에 흥미로운 빛을 비추는데, 그 설형문자 기록들은 크세르크세스 다음의 두 왕, 곧 아닥사스다 I세와 다리오 II세의 치세 때 기록한 것들이다. 그 기록들은 유대인들이 닙푸르 도성과 그 도성에 속한 시골 지역에서 영향력 있고 부유한 소수 집단을 형성했었음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은 거액의 돈이 취급되는 거래의 조합원으로, 지역의 행정관으로, 부유한 돈놀이꾼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모든 증거는 유대인들이 모르드개의 지도부 아래서 일종의 혜택을 누리는 시기를 보냈음을 나타낸다.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다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았을(에 10:3) 때, 그의 이름은 유대인 사회에서 귀에 익게 되었고, 많은 부모가 자녀들의 이름을 모르드개라고 지었다. “무라슈 아들들”이라는 사업소의 공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들에는 아닥사스다 I세 당시의 유대인 이름이 61명이나 들어 있다. 그곳에 언급된 61명의 이름이 60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을 나타내긴 했으나, 6명의 상이한 유대인들이 모르드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분명히 그들은 모두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서 태어났을 것이다. 얼마 후에는 그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실은 같은 회사에서 나온 문서에 언급된 46명의 유대인 이름 가운데, 다리오 II세 당시에는 모르드개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아닥사스다 I세 치하의 귀환과 에스라의 사업

 에스더서에 기록된 마지막 사건(BC 473년 봄)과 에스라서에 기록된 그 다음 사건(BC 457년 봄) 사이에는 16년의 간격이 있는데, 그 기간의 유대인 역사를 직접 조명해 주는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크세르크세스는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아닥사스다가 보좌에 올랐다. 페르시아 제국은 유뤼메돈(Eurymedon)에서 참패하는 먹구름 아래 놓였고, 이어서 BC 463년이나 462년에는 이나루스(Inarus)의 반란으로 애굽을 상실하는 일까지 겹쳤다. 애굽으로 가는 길 중간에 놓인 유대가 페르시아 정부에 대하여 계속 충성과 우호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특히 애굽을 치기 위하여 원정을 가고 있을 때(BC 456)에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의 청원(7:28)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그 당시 에스라의 직분은 페르시아 정무국의 “유대인 문제 조정관”(참조 스 7:12 주석)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정부에 이제까지 보다 더 광범위한 자치권을 허락해 줄 것과, 유대 지역의 지방법으로 모세의 법을 재도입하는 문제를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청원했다.

 왕의 조서를 통해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유대로 귀환할 것을 명했으며, 그들의 옛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모든 유대인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 조서는 더 나아가 에스라를 임명하여 유대 안의 모든 사법 체계를 재조직하고,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생업의 기초로 삼아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세우도록 하였다(스 7:11~26). 그런 조서의 역사성(歷史性)은 자주 공격을 받았는데, 많은 현대 학자들에게는 페르시아의 왕이나 왕의 자문관들이 에스라 7장에 나오는 조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 의식의 세부 사항까지 일일이 관여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VII장에서 논의되겠지만, 엘레판티네 문서 가운데 하나인 소위 다리오 II세의 “유월절 편지”는 성경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제시함으로써 근자에는 아닥사스다 I세의 조서가 진실하지 않다던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다리오의 “유월절 편지”는 페르시아의 정무국(政務局)에 한 부서가 있어서, 아마도 유대인의 법과 관습에 대한 전문가가 왕에게 법률 자문을 해 주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런 전문가들은 틀림없이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발견된 베니게어 에쉬무나자르(Eshmunazar) 명각은, 아닥사스다가 반역을 일으킨 애굽을 치기 위해 원정했을 때 시돈의 도움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팔레스타인 해안에 위치한 돌(Dor) 지역의 비옥한 곡창 지대를 시돈 사람들에게 주어 보답했음을 보여 준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유사한 그런 역사적인 기록은, 유대인들에게 예외적인 특권을 허락하는 중요한 조서는 메가뷔조스가 애굽 원정을 시작하기 1년 전에 내린 것으로, 그와 같은 정치적인 위기의 때에 유대인들과 우호 관계를 이룩하고, 그들의 지속적인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유대인들에게 그 조서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사실상 준(準)독립상태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공권력과 사법권이 본방의 지도부에 귀속되었고, 모세의 율법은 다시 한 번 그 지역의 법률이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저희를 위해 이양하지 않은 유일한 사항은 조세 분야뿐이었다. 유대인의 종교적 예배를 후원하기 위하여 왕이 유대 도의 세금에서 후한 증여와 보조금을 허락한 것은, 외방의 징세관들이 유대 지역에 무기한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에스라는 자기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자,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기와 함께 유대로 가자고 호소하였다. 니산월 초하루에 에스라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은 “아하와 강가에” 모였다. 인원 조사를 해 보았을 때 레위인이 참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어떤 레위인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후에,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5,000명이 넘는 회중은 길고도 위험한 여행 중에 보호하심을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드렸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보호해 주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페르시아 당국자들에게 보이게 될까 두려워, 감히 호위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스 8:1~23).

 여행단은 니산월 12일 곧 BC 457년 4월 7일에 출발했고, 약 4개월 후인 7월 23일경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3일 동안 쉬었다. 그 후에 그들은 성전을 위한 왕실의 모든 선물과 공식 조서를 담당 관리들에게 넘겨주고, 큰 감사 예배로 저희의 안전한 도착을 축하했다(스 8:24~36). 조서에 의하여 승인된 실제적인 중건 공사는 몇 주일이 지난 그 해 가을에 시작되었다.

 그 후 느헤미야가 새로 임명된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13년 동안, 유대에서 에스라가 활동한 내용에 대하여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에스라는 틀림없이 조서에 나오는 모든 사항을 이행했겠지만, 그가 한 일 가운데는 이방인과의 통혼에 관련된 개혁 사업의 기록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문제에 관한 보고 내용이 에스라서 전체의 4분의 1(9, 10장)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개혁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

 에스라는 분명 어떤 가정에 이방인 또는 반(半)이방인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대제사장 가정에서도 한 사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기회를 기다리면서 얼마동안은 잠잠히 일을 했다. 그 기회는 어느 날 어떤 지도자들이 그런 병폐가 존재한다는 것을 에스라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주었을 때에 찾아왔다. 에스라는 즉시 반응했다. 그는 공중 기도를 시작함과 더불어 열렬히 설교하고 회개하기를 호소했다. 그 결과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방인의 영향으로부터 자기 민족을 깨끗이 하겠다는 자발적인 결심을 했다.

 그 후 제9월(대략 12월)에 공공 집회가 열렸다. 만일 그때가 에스라가 도착한 직후였다면, BC 457년이었을 것이다. 모인 회중은 추위와 비 때문에 떨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다가 제안된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에스라에게 위임하였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 곧 유대에 거주하는 수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112명만이 그 문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대중적인 결정에 반대하는 음성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BC 457년 12월부터 456년 4월 사이에 위원회가 활동하여 각각의 경우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관련된 모든 위반자의 명단이 그 사건의 영구적인 기록의 일부로 추가되었다. 그 명단은 평신도 86명 이외에, 제사장 13명과 대제사장 가족들 4명이 포함된 성직자 27명이 이방인 아내를 얻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 병폐가 그때까지는 백성 가운데 널리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치는 백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고, 매우 쉽게 시행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에스라가 느헤미야 당시까지 예루살렘에 계속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느헤미야가 오기(BC 444) 전 어느 때인가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는(느 1:3) 원수들의 파괴적인 반대에 직면했을 것이다.

 에스라 4장 7절에 나오는 아닥사스다를 아닥사스다 I세로 보는 학자들은, 7~2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성벽과 성문을 공격한 기록을 본다. 따라서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보고한 것처럼, 성벽을 훼파한 이유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서 발견한다. 7~23절에 관한 이런 견해는, 아닥사스다가 몇 년 전에 에스라를 대할 때에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유대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일시적으로 바꾸었다고 가정(假定)할 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 1장 3절에 언급된 공격은, 에스라 4장이나 기타 성경의 다른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BC 450년이나 449년경에, 유대를 포함하는 “강 서편” 지역의 총독이었던 메가뷔조스가 페르시아 왕을 대적하여 몇 년 동안 반역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 반역의 와중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은인인 아닥사스다에게 충성함으로 메가뷔조스의 일당인 사마리아인의 공격을 받았든지, 아니면 사마리아인들이 왕에게 충성하여 유대인들을 메가뷔조스의 편이라고 고발하는 기회를 주었든지 하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메가뷔조스의 반란은 느헤미야 1장 3절에 언급된 사건의 그럴 듯한 배경을 제공해 준다.


 느헤미야의 총독 직임

 느헤미야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으나 페르시아 궁중에서 승진하여 왕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신임받고 책임 있는 지위까지 얻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그가 내시였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는 여인들의 처소에서 왕을 섬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느 2:6 주석). 그는 교육을 많이 받았고, 후일에는 훌륭한 지도자요 행정가임이 입증되었다.

 BC 445년 12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와 또 다른 유대인 몇 명이 수사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메가뷔조스의 반란 이후로 느헤미야가 만나게 된, 예루살렘에서 오는 최초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반란이 유대와의 정상적인 교통을 끊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과 분란이 있다는 소문이 느헤미야의 귀에도 들어갔겠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의 형편에 관한 정확한 소식을 간절히 듣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그의 첫 번째 질문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느 1:2)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나쁜 소식을 받았으며, 이는 예상한 것보다 더 나빴다. 그는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느 1:3)는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느헤미야는 다니엘처럼(단 9:3) 수일 동안 계속 금식하고 기도하였다.

 느헤미야는 그 후 4개월 동안 효과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실행하고자 하는 과정을 이루기 위하여 확실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왕을 섬기고 있는 자기의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중단된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어떤 이들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의 불안정한 성격과 여자들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고 “왕후”가 참석하는 좋은 기회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왕후가 느헤미야에게 호의를 나타냈을 것이며, 사전에 그를 후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그 상황을 위하여 느헤미야가 열심히 기도했지만, 변덕스러운 왕 앞에서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했다(느 2:2, 6). 그러나 왕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술 맡은 자를 유대의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공식적인 신임장을 갖추고 무장한 호위병들을 대동한 느헤미야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의 궁중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자마자 출발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는 BC 444년 초여름인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자기가 온 진의(眞意)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기의 계획을 최대한 성공시키기 위한 행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원수들의 소행과 증오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희롱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상황을 판단했고, 성벽의 남쪽 부분을 제외하고는 성벽의 상태를 살펴보았던 것 같다. 성벽의 각 부분의 상태에 관한 일차적인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는 신뢰하는 동료 몇 명을 대동하고 밤중에 순시를 하기도 했다(느 2:11~16).

 그러고 난 후에 느헤미야는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 자기의 계획을 제시했으며 그것은 그가 도착한 지 4일 째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왕의 위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했으며, 더 이상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켰을 것이다. 성전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느 2:17)는 그의 요청은 민족적인 양심과 위엄에 호소하는 웅변이었다. 어떤 이들은 위험할 때에 보호해 줄 수 있는 튼튼한 성벽이 있는 수도(首都)를 마침내 갖게 된다는 전망 속에 열광했지만, 반면에 다른 이들은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는 것 같았다. 여리고, 미스바, 기브온과 같은 성읍의 백성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는 데 기꺼이 도움을 주었지만, 스룹바벨 시대 이후로 다시 사람이 살게 된 베들레헴, 느도바, 벧엘, 기타 다른 성읍에서 도움을 주었다는 언급은 없다. 지도자들 간에도 똑같은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느헤미야를 후원했지만, 드고아의 귀족과 같은 이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다(느 3:5).

 느헤미야가 도착한 목적이 알려지자, 곧바로 주변 민족들의 정치 지도자들인 유대인의 원수들은 즉시 느헤미야의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대적들 가운데 세 명은 느헤미야를 대적하여 일한 것으로 거듭 언급되고 있는데, 현재 우리가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기록들을 통해 알게 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 암몬의 고관 혹은 귀족이었던 도비야, 드단의 아랍 리휘안족(Arab Lihyanites)의 총독이었던 게셈 등이다. 세 사람은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를 조롱했고, 반역을 일으키려고 활발하게 준비한다고 그들을 비난했으며, 무력으로 그들을 공격하고자 준비했고, 느헤미야의 암살을 획책했으며, 유대인들 가운데 불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 셀 수도 없이 시도했다. 느헤미야와 그의 활동에 대한 방해 공작은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그것이 완공된 후에야 그친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는 두려움 없이 결단하는 사람이요 훌륭한 조직가였음을 입증했다. 그는 원수들이 시도하는 노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았고, 그것들에 대하여 과도한 불안감을 갖지도 않았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을 위해 자기를 도우려는 사람들을 42조로 나누어 배치했다. 느헤미야 3장에 나오는 명단에서 그는 예루살렘 성벽의 지형을 연구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를 남겼으며, 그 외에 수많은 중요한 항목들에 관한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그는 누가 그 일에 참여했으며, 어디에서 일을 했고, 어떠한 일을 해야 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런 식의 기록 가운데서 성벽이나 어떤 문의 어느 부분은 이전의 중건 공사 때 거의 완성되었고, 근래에 있었던 공격에서는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반면에 다른 것들은 실제로 다시 건축해야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느헤미야 3장의 명부에서 어떤 건축 활동을 묘사할 때에는 “건축하였고”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다른 이들이 한 일은 “중수하였고”라고 표현한 것을 눈여겨보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은 한 조(組)로서, 골짜기 문과 성벽 약 500미터를 중수할 수 있었으나(느 3:13), 반면에 다른 조는 성벽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그 집 모퉁이에 이르는 매우 작은 부분만을 중수할 수 있었다(느 3:21)는 내용을 읽어보면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참여자의 수효가 여러 조(組)에 할당된 성벽의 규모에 큰 차이가 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나중에 성벽 봉헌식과 관련하여 언급된 에브라임 문과 같은 몇몇 문들은 손상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공사가 이루어진 부분들의 목록에는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사업을 성벽 전체와 그곳의 많은 문들을 모두 재건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전임자들이 중단했던 작업을 보수하고 완성하는 일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만일 성벽을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파괴한 뒤에 그대로 두었다면, 느헤미야는 52일 안에 그 공사를 완료할 수 없었을 것이다(느 6:15). 그가 그렇게 예외적으로 짧은 기간 내에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오랜 기간 건축 활동이 선행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비록 성벽 공사가 급속하게 진척되기는 했지만, 많은 어려움에 싸여 있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의 어떤 집단들의 관심 부족에 당면했고, 그들 중의 다른 이들로부터는 실제적인 반대를 당하기도 했다(느 4:10; 6:10~12). 게다가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이끄는 외적들은 반쯤 완성한 성벽을 공격하여 파멸시키려고 끊임없이 위협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일꾼들을 무장시켰으며, 밤낮으로 성벽을 파수했고, 항시 예루살렘을 방어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하여 경보 체계를 고안했다. 그의 단호한 결심과 개인적인 용기는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켰고, 승리를 얻게 해 주었다. 그들은 위협만 했을 뿐 그 이상 해를 끼치지 못했고, 실제적인 공격은 실현하지 못했다.

 엘룰월 25일(BC 444년 9월 21일)에 공사를 완료했다(느 6:15). 성벽은 감명적인 의식과 함께 봉헌되었다. 두 행렬이 구성되었는데, 한 무리는 에스라가 인도했고 다른 무리는 느헤미야가 인도했다. 골짜기 문에서 출발하여 두 무리는 성벽 위로 올라가, 도성의 북동쪽 모퉁이에서 만날 때까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여 서로 만나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역사 중에 도움을 베푸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제사를 드림으로 그날을 축하하였다(느 12:27~43).

 느헤미야는 자기의 주요 과업을 완수하고 예루살렘에 튼튼한 성벽을 이룩한 후에 보람 있고 평화로운 총독의 직무를 시작했다. 그는 첫 번째 직무 기간으로 12년 동안 자기 백성을 섬겼다(느 5:14). 느헤미야는 일차적으로 유대의 비(非)종교계 수장(首長)으로서 나라의 사회적 권익을 위해 일하긴 했지만, 그는 자기 백성의 영적인 복지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고리대금업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동료 시민들에게 적당한 배상을 하도록 강요하고 그들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함으로, 유대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줌으로, 자기 스스로 어떠한 보수도 받기를 거부함으로, 또한 자기 공무상의 비용을 사재(私財)를 털어 지불함으로 여러 가지 권력과 부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했음을 볼 수 있다(느 5:1~19). 느헤미야는 어떠한 총독도 자기처럼 이기심 없고 허물없는 마음을 가졌던 경우가 없었으며, 자기의 친절한 행위들을 인하여 하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한다(느 5:15, 19).

 그는 또한 성벽이 완성된 후에 그 도성이 거의 비어 있음을 보고, 예루살렘에 거주민들을 채우려는 조치를 취했다. 인구 조사를 했고, 유대 시골 지역 거주민의 10분의 1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수도로 이주할 것을 권장했다(느 7:4, 5; 11:1, 2).

 백성의 영적인 필요는 대규모 군중 집회를 통해 충족되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일련의 집회들이 느헤미야 8~10장에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와 다른 지도자들은 백성에게 율법을 읽고 설명해 주었다. 그 결과 참된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마침내 평민과 제사장들이 언약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모세의 법을 따르고,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할 것이며,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 유지와 다른 종교 의식들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담당하고, 그 외의 다른 필요한 문제들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느헤미야가 총독직을 맡은 최초의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 같다. 그의 12년 임기의 나머지 기간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 수가 없으며, 느헤미야 13장에서는 단지 그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될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취해야만 했던 몇 가지 조처들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느헤미야의 두 번째 도착 날짜나, 유대 총독으로서 그의 두 번째 임기에 관하여는 알지 못한다.

 그의 첫 번째 임기가 만료되어 유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돌아왔을 때 어떤 불미스러운 상황과 행습을 보았는데, 그러한 일들은 시간이 걸려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대적이었던 도비야가 성전 구역 내의 한 건물에 처소를 마련했고, 상당 기간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방인들이 안식일에 물건을 팔았으며, 유대인 가정에서는 또다시 이방인 아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상태는 그때쯤 기별을 전했던 것이 분명한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서도 신랄한 질책을 받았다. 느헤미야는 유대에 도착한 즉시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활발하게 일해 나갔다. 그는 도비야의 가구를 성전에서 밖으로 내던지고, 레위인들을 모아 다시 성전에서 일하도록 하면서 십일조에서 그들의 수입을 보장해 주었다. 그는 백성을 권유하여 십일조를 정규적으로 드리도록 하였고, 안식일 계명을 더 이상 범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했으며, 이방인 아내들을 쫓아내도록 만들었다(느 13:1~31).

 그런 조치들을 설명하면서 느헤미야서와 구약의 역사적인 기록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영감받은 기록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기간에 관한 내용을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사건을 더 언급해야만 하겠는데, 그것은 에스라(10:6)느헤미야(12:22)에 언급된 대제사장 요하난과 관련된 유감스러운 사건이다. 요세푸스(Antiquities xi 7.1)는 요하난의 형제 예수아(여호수아)는 아닥사스다의 군장인 바고아스(Bagoas, 페르시아어로 비그왜)의 친구였다고 말한다. 바고아스가 여호수아에게 대제사장이 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자기 형제 요하난과 성전에서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그런 흉악한 범죄로 인하여 바고아스가 성전에 들어와,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자2보다 내가 더 깨끗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매일 드리는 제사에서 양 한 마리당 세금 50드라크마를 7년 동안 강제 징수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벌을 내렸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에는 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요세푸스가 말한 아닥사스다 III세의 막강한 군장이었던 바고아스는 후대의 페르시아 역사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반면, 요하난은 여러 세대 전에 살았던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동시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레판티네의 유대인 파피루스 문서는 요하난이 BC 410년에 대제사장이었으며, 비그왜(헬라어로 바고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총독이 BC 407년에 유대를 다스렸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바고아스와 요하난 둘 다 다리오 II세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몇 년 후, BC 405년이나 404년에 아닥사스다 II세가 즉위했을 때 그들은 여전히 각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요세푸스가 말하는 그 범죄가 당시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 하나는 유대 총독 바고아스와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아들 들라야(Delaiah)가 공동으로 보낸 것인데, 이 두 사람이 연합한 사실은 특이하게 보인다. 그 당시에 바고아스는 이미 요하난의 원수였을 것이다.

 대제사장과 함께 구약에 언급된 마지막 인물이 역사의 지평선에서 떠나고 유대 역사의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 시기의 거룩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Ⅶ. BC 5세기에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빈약하고도 부수적인 자료들 가운데 예언적이거나 역사적인 성격을 띤 것들(사 19:18, 19; 렘 43:7; 44:1, 15~28)이 있으나, 이것들 외에 유대 거류지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다. 그 자료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960킬로미터 떨어진 고대 애굽의 남쪽 변경에 있는 나일강의 한 섬인 엘레판티네(Elephantine)에서 발견된 다량의 아람어 파피루스 문서이다. 이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문서들은 그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들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특히 그 시대의 유대인 역사에 관하여 그러하다.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문서들을 발견한 역사

 그 문서들의 첫 번째 뭉치는 1893년에 C. E. 윌버(C. E. Wilbour)가 구입했으나 1947년까지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96년에 윌버가 파리에서 사망한 이후, 그 파피루스 문서들은 여러 해 동안 뉴욕의 한 창고에 있던 그의 큰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마침내 그것이 브루클린 박물관(Brooklyn Museum)으로 넘겨지고, 그 속에 있던 값진 문서들이 재발견되었다. 그 후로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파피루스 문서들 가운데 최초로 알려진 것은 1904년 로버트 몬드 경(Sir Robert Mond)과 윌리엄 시슬 여사(Lady William Cecil)가 원주민들에게 구입한 것으로, 1906년에 세이스 앤드 카울리(Sayce and Cowley)사(社)가 출판하였다. 1906년과 1907년에 한 독일인이 엘레판티네 섬을 탐사하여 그러한 문서들을 더욱 많이 발굴했다. 이두아르트 자샤우(Eduard Sachau)가 그 문서들을 출판함으로, 1906년 세이스 앤드 카울리사(社)가 출판한 것들과 더불어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풍부한 아람어 자료를 학계에 제공하게 되었고, 포로 이후의 시대와 성서 아람어에 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이 모든 자료는 그 사이에 산발적으로 발견된 것들과 함께 A. 카울리(A. Cowley)가 1923년에 사용하기 편리한 책 형태로 다시 출판하였다. 1953년에는, 현재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7편의 재발견된 윌버(Wilbour)의 파피루스 문서를 에밀 G. 크레일링(Emil G. Kraeling)이 출판했다. 현재 출판된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파피루스 문서들의 수효는 100개가 넘는다. 이와 관련하여 언급할 것은,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가죽에 기록되었고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문서들처럼 BC 5세기에 쓰여진 공무상의 아람어 편지 13통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들은 엘레판티네의 문서들에도 나오는 애굽의 페르시아 총독에 대하여 언급하며, 느헤미야의 기록에 빛을 비춰주는 자료들을 포함한다. 그 발견된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33년 이전의 어느 때에 L. 보르하르트(L. Borchardt)가 애굽 상인에게서 구입한 것들로, 그 문서들은 G. R. 드라이버(G. R. Driver)가 출판했으며(1954), 현재는 새로 발견된 브루클린의 파피루스 문서들과 더불어 동방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의 예리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경 연구를 위한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문서들의 중요성

 여러 가지 면에서 엘레판티네 파피루스는 성경 연구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 문서들은 에스라서의 아람어로 기록된 부분과 같은 기간에 속한 아람어 자료와, 또한 아람어로 된 여섯 장을 포함하고 있는 다니엘서보다는 약간 후기에 속한 아람어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이 본문들은 모호한 성경 단어들의 의미를 밝혀주었고, 그 본문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단어들의 의미를 보완해 주었으며, 아람어 단어에 관한 지식을 넓혀 주었다. 그것들은 또한 성경에 나오는 아람어가 엘레판티네 문서들의 아람어와 유사함을 입증할 수 있는 많은 비교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또한, 성경의 아람어 부분이 매우 고대에 쓰이던 것임을 입증해 준다.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가운데서 발견된 공문서들은 유사한 에스라의 문서들이 참된 것임을 확증하며, 종종 그것들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懷疑)를 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음을 입증해 준다. 더욱이 그 문서들은 페르시아의 왕들이 그들과 관련된 상세한 종교적인 문제들을 조서로 내렸음을 보여 주었다. 예컨대, 엘레판티네에서 발견된 다리오 II세의 한 조서는,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유월절을 준수하라고 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에게 지시하였다.

 이 파피루스 문서들은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가 그 이름으로 불린 첫 번째 왕인가, 아니면 두 번째 왕인가 하는 해묵은 논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해 주었다. 그것들이 제공한 증거는 느헤미야가 오직 아닥사스다 I세 치세 때에만 총독일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런 파피루스 문서들은 느헤미야 12장 22절의 요하난은 BC 410년에 대제사장이었음을 나타낸다. 요하난은 느헤미야 당시에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아십의 손자이므로, 느헤미야의 총독직은 요하난의 대제사장직보다 앞섰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엘레판티네의 파피루스 문서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다는 사실은 느헤미야의 이야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 문제들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한 편지에 산발랏이 언급된 해인 BC 407년에, 그가 아직도 분명히 살아 있기는 했으나 그는 이제 노인이 되어 그의 책무들을 그의 아들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산발랏이 그의 전성기, 곧 활기 있는 대적(大敵)으로 활동할 당시에 이룬 느헤미야의 사업이, BC 407년에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말아서 접고 봉인한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파피루스

BC 5세기 나일강 엘레판티네 섬에서 살던 유대인 거류지에서 나온 100점이 넘는 파피루스 문서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더해 주었다. 대부분의 파피루스들은 발견 당시에 말아서, 접고, 봉인한 상태였다. 이것은 뉴욕에 있는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된 파피루스들로 근래에 출판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봉인은 파피루스를 잡아 맨 줄을 싸서 봉한 점토 위에 찍었다. 애굽의 왕쇠똥구리 모양으로 만든 봉인은 세 가지 상형문자 인장(印章)을 보여 준다.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유대인 파피루스

이 사진은 BC 407년에 엘레판티네의 유대인 공동체가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바사 총독에게 쓴 편지의 하반부를 보여 준다. 이 편지는 3년 전에 애굽인들이 파괴한 엘레판티네에 있는 유대인 성전을 중건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의 첫 줄에는 BC 410년에 대제사장 요하난(느 12:22에 언급됨)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첫째 줄에서 흰색 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아람어 단어들은 “대제사장 요하난”“예루살렘에서” 라는 내용이다. 편지의 거의 끝에서(이 사진의 맨 밑 에 있는 흰 선으로 그려진 부분), 악명 높은 느헤미야의 대적 산발랏, 사마리아의 총독이 언급되어 있다. 이 편지는 왜 산발랏이 유대인들의 만만치 않은 원수였는가를 설명해 주는데, 그는 한 사람의 평민이 아니라 바사의 한 영지(領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파피루스 문서들과, 그것들이 나온 유대인 거류지에 대해서는 73~81쪽을 참조하라.

 
수산에 있는 바사 궁궐의 유약을 칠한 타일 벽 장식

수사(성경의 수산)에 있는 바사 왕궁의 벽들은 유약을 칠한 타일을 붙였으며 여러 가지 색깔의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모습들로 장식되었다. 이 그림에는 두 스핑크스가 묘사되었는데, 곧 날개가 있고 사람의 머리를 가진 사자들로서, 앗수르인들에게서 그 주제를 따온 것이다. 날개가 달린 태양 원반은 바사 제국의 문장(紋章)으로서,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짐승 위에 머물고 있다.

 
베히스툰 부조(浮彫)에 나오는 다리오 I세의 두상(頭像)

유명한 베히스툰 바위(참조 제1권, 108, 122) 위에 다리오 I세는 글과 그림을 통해 자기를 바사 제국의 왕좌에 앉도록 해준 승리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명각의 설형문자 글자들을 조각된 형상의 위와 아래의 바위에 새겼는데, 적어도 왕의 머리 위에 쓰인 글씨들은 납으로 채워졌으며, 그러한 흔적들을 바위의 파인 자리에서 찾았다(참조 옵 19:24 주석).


 또한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문서들 가운데 다수에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것들에는 이중적인 날짜, 곧 애굽의 법적 날짜와 그에 상응하는 유대력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중(二重)으로 날짜가 기록된 문서들은 BC 5세기의 엘레판티네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유대 달력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가을에 새해를 시작하는 음력 달력이었음이 입증되었다(제4권, 44~49).


 BC 5세기 엘레판티네에 있던 유대인 거류지

 엘레판티네 섬(애굽어 예브[Yeb])은 제1 나일 폭포 하류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을 향하여 자연적인 방벽을 이루고 있다. 그곳은 애굽 역사의 상이한 시대에 중요한 국경 요새였고, “남쪽의 문”이라고 불렸다. 프삼티코스 I세(Psamtik I) 치세(BC 663~610)에 그 섬에는 용병(傭兵)의 강력한 수비대가 있었으나, 유대인들이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프삼티코스 II세(BC 595~589)의 군대에 소속되었고, 헤로도투스의 진술에 따르면 프삼티코스 II세는 누비아(Nubia)를 치기 위한 원정을 수행했으며, 유대인 아리스테아(Aristeas)의 편지에 의하면 유대 용병들이 그와 동행했다고 한다.

 애굽의 제26왕조에 속한 왕들이 과도하게 외국 군인들에게 의존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명각들은 애굽 남부의 수비대에 이오니아(Ionian), 카리(Carian) 그리고 베니게(Phoenician)의 용병들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유대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으나, 한 구절은 팔레스타인에서 온 군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애굽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다. 예레미야는 애굽에 거주하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바드로스에 사는 자들(렘 44:1)을 언급하는데, 바드로스는 문자적으로 “남쪽 땅”을 의미하는 애굽의 지명이며, 그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엘레판티네 지역도 포함된다.

 엘레판티네의 유대인 거류지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사람들은 BC 525년 이전의 어느 때인가 그 섬에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이는 캄비세스가 애굽을 정복하였을 때 그들은 이미 안정된 거류지를 형성했고, 야후(Yahu, 야훼 또는 여호와의 단축형. 참조 제1권, 36, 37)를 경배하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르시아 정부에 점령되어 페르시아 군대의 조직으로 넘어갔고, 지속적으로 엘레판티네 요충지의 수비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군대”라고 불렀고, 그 군대는 여러 세기 동안 페르시아와 바벨론 사령관들 수하에서 기병이나 보병 중대로 나뉘었으며, 장교들은 유대식과 바벨론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군인들 가운데 애굽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굽인들을 군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페르시아 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법권은 요새의 페르시아인 사령관의 수중에 있었지만, 유대인 거류지의 내부적인 문제들은 “회중”의 우두머리가 통제했다. 유대인들은 가옥과 기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들을 소유했으며,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야후(Yahu)를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하나 건축했는데, 그 성전에는 돌로 만든 입구 다섯과 기둥들이 있었으나, 벽은 아마도 벽돌이었을 것이다. 지붕은 백향목으로 되어 있었으며, 목재로 된 문들은 청동돌쩌귀에 달려 있었다. 성전 비품 가운데는 기명들이 있었고, 성전에 있는 제단 위에 유대인들은 번제와 소제와 향을 드렸다. 유대에서는 각 사람이 성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1/3 세겔을 바쳤던 것(참조 느 10:32)과는 대조적으로 그곳에서는 2세겔씩을 드렸다. 그 성전을 건축한 유대인들은 요시야의 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요시야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유대의 종교적인 관습을 개편하여 여러 산당에서 경배하는 일을 분명하게 금지했다(신 12:13, 14; 왕하 23:8). 더욱이 그들은 야후만 아니라 여러 다른 신들도 섬겼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아쉼-벧엘(Ashim-Bethel)과 아나트-벧엘(‘Anath-Bethel)도 있었다. 아쉼(유사한 이름을 보려면 왕하 17:30 주석을 참조하라)은 다른 자료들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반면, 우리는 피에 굶주리고 부도덕한 가나안 여신인 아나트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이 어떤 면에서 므낫세 왕 당시의 신앙 수준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들은 하나의 분리된 성전과, 그들의 민족적인 하나님 외에도 이방 민족의 신들, 특히 다산(多産)을 촉진하는 신들을 섬긴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엘레판티네에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관한 흔적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또한 그때에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의 사업의 영향을 전혀 느껴 볼 수도 없다.

 BC 419년에 기록된 매우 중요한 문서 하나는, 페르시아 왕(다리오 II세)이 유대인의 종교 생활에 관한 지시를 내렸음을 보여 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특별한 문서는 보전 상태가 좋지 못하기는 하지만, 다리오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 것, 유대인들은 이 명절을 위하여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며,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이며, 누룩이 든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 등은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그런 조서를 내린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왕에게는 그런 조서를 작성할 수 있는 유대인 율법에 정통한 자문관들이 있어서, 왕이 그러한 지시에 서명하도록 설득할 만큼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까지는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비록 그런 조서를 내린 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엘레판티네에서만 나왔으나, 그 조서가 페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유대인에게 내려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 조서는 페르시아 왕들이 유대인의 종교 생활과 모세의 율법을 후원해 주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사실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볼 수 있는 유사한 조서들에 대한 기록이 진실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 조서가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그 편지를 번역하여 여기에 싣는다. [ ] 안에 들어 있는 부분은 재구성한 것이다. 이 번역은 주로 A. 카울리(A. Cowley)의 B.C. 5세기의 아람어 파피루스(Aramaic Papyri of the Fifth Century B.C. (1923)의 62, 63쪽에 나온 것을 따랐으나, 에밀 G. 크레일링(Emil G. Kraeling)이 (The Brooklyn Museum Aramaic Papyri) (1953), 92~95쪽에 제안한 내용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아래 번역의 번역자가 과거의 번역들에 동의하지 않는 몇몇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1. [나의 형제]들[에게]

 2. [예도]니야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유대인의 수[비대], 그대의 형제 하나[니야]. 하나님이 나의 형제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바라노라.

 3. 이제 금년 다리오 왕 5년에, 왕으로부터 아르[샴]에게 [기별을] 보내노니,

 4. [니산월에 유대인 수비대를 위해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라]. 이제 너희는 [니산월의]1[4일을] 헤아려

 5. [유월절을 지]키라. 그리고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는

 6. [7일간의 무교절이니라]. 너희는 정결케 하고 조심하라. 일하지 말[라].

 7. [15일과 21일에는]. 너희는 [맥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무엇이든지 [그 안에] 누룩이 [든] 것을

 8. [먹지 말지니] 니[산]월 [15일] 해 질 때[부터] 21일까지

 9. [7일 동안, 너희 중에 보이지 않게 하고] 너희 방으로 그것을 가져[오지 말며] [그]날[들] 동안 그것을 봉하여 두라.

 10. [다리오 왕]이 [명령한 대로 이 일을 행하라].

 수신: 나의 형제 예도니야(Yedoniah)와 유대인 수비대에 있는 그의 동료들, 그대의 형제 하나니[야]에게...

 군인으로서 페르시아의 통치자를 섬기는 이런 외국의 유대인들을 애굽 원주민들은 미워했다. 그런 증오심은 캄비세스가 애굽을 정복할 당시에, 엘레판티네에 있던 양의 머리를 가진 신(神) 크눔(Khnum)에게 봉헌된 애굽인의 신전은 파괴했으나, 유대인들과 그들의 성전은 그냥 두었을 때에 분명히 증가했다. 문서들이 입증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애굽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재정적으로 윤택하게 살았으며, 애굽의 원주민들을 멸시하면서 대하고 그들의 제사장들을 경멸하는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에 상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여 마침내 폭발했다.

 애굽을 다스리던 페르시아 총독 아르샴(Arsham) 혹은 아르사메스(Arsames)가 BC 410년에 애굽을 떠나 있을 때, 크눔의 제사장들은 엘레판티네의 페르시아인 사령관 위드랑(Widrang) 즉 휘다르네스(Hydarnes)를 매수해서 그의 아들 쉬에네(Syene, 아스완[Aswan])의 사령관 네파얀(Nephayan)에게 비(非)유대인 군대를 엘레판티네로 데리고 와서 유대인의 성전을 노략하고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하였다. 아르사메스가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은 휘다르네스와 네파얀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처벌받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독으로부터 성전을 재건하라는 허락을 받아내지는 못했는데, 총독은 새로운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르사메스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는 책임을 다른 이의 어깨 위에 전가하려고 했다. 그는 그 전부터 느헤미야나 다른 유대의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들이 분리주의자들의 성전 재건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요하난에게 그들의 요청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은 그 요청을 완전히 무시하고 어떤 답변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은 2년 이상을 소득 없이 기다리다가 BC 407년에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그때는 유대 지역의 페르시아 총독인 바고아스(Bagoas)에게 요청을 하는 동시에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의 두 아들에게도 보냈는데, 그들은 저희의 늙은 부친을 대신해서 다스렸던 것이 확실하다(참조 75쪽 사진). 요하난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고아스는 사마리아의 들라야(Delaiah)와 상의한 다음 엘레판티네 유대인들에게 성전 중건을 허락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새 성전에서는 유혈 제사는 드릴 수 없도록 하였다. 이 허락을 받고 아르사메스가 성전 중건 인가를 내렸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성전이 중건되었는데, 그것은 BC 402년 그 섬에 존재하던 아람어 문서에 성전이 언급된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시기 직후에 페르시아 통치를 대적하는 애굽인들의 반란이 성공하여 다시 한번 애굽에 독립을 가져왔고, 엘레판티네의 유대인 거류지도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그 섬에서 나온 유대인 문서 가운데 마지막으로 날짜가 알려진 것은 BC 400년 6월 19일에 쓰여진 것이다. 그 후로는 이 흥미로운 공동체에 대하여 침묵의 휘장이 내렸다.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쫓겨났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참고문헌

 고대 역사와 고고학을 다루는 서적들에 대한 간단한 참고문헌을 위해서는, 제1권 17~149을 참조하라. 다음에 추가한 책들은 이 논문에서 논의한 시기와 관련된 국면들을 다루고 있다. 제3권 134, 135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여기 참고문헌에 수록된 책들이라고 해서 그 저자의 견해를 이 주석이 시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Edited by J. B. Bury, S. A. Cook, F. E. Adcock. 12 vol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26~39. Volume 3, The Assyrian Empire는 X장과 XI장(written by R. Campbell Thompson)에서 신(新)바벨론 제국의 역사를 제시하고, 고대 세계에 바벨론이 끼친 영향을 다룬다. Volume 4, The Persian Empire and the West는 페르시아 자체보다는 페르시아 전쟁 동안의 헬라 역사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

 Cowley, A. Aramaic Papyri of the Fifth Century B. C. Oxford: Clarendon Press, 1923. 319 pp. 1923년에 알려진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모든 아람어 파피루스를 모은 책. 본문과 함께 번역과 해설이 실려있다.

 Dougherty, Raymond Philip. Nabonidus and Belshazzar: A Study of the Closing Events of the Neo-Babylonian Empire. “Yale Oriental Series, Researches, Volume XV.”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29. 216 pp. 저자는 벨사살에 대하여 빛을 던져주는 모든 자료를 모아서, 당시의 정확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그를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Driver, G. R. Aramaic Documents of the Fifth Century B.C. Oxford: Clarendon Press, 1954. 50 pp., and facsimiles. 애굽에서 발견된 아람어 가죽 필사본을 출판한 것으로, 아닥사스다 I세와 다리오 II세 치세 중에 애굽에 대한 페르시아의 통치에 관하여 많은 빛을 비추어 준다.

 Koldewey, Robert. The Excavations at Babylon. Translated by Agnes S. Johns. London: Macmillan and Co., 1914. 335 pp. 대중적으로 쓰였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고대 바벨론에 대한 기록으로, 15년 간의 계속된 유적지 발굴 작업을 시행한 후에 현대 발굴자가 알아낸 내용이다.

 Kraeling, Emil G. The Brooklyn Museum Aramaic Papyri: New Documents of the Fifth Century B.C. From the Jewish Colony at Elephantin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3. 319 pp., and facsimiles. 54년간이나 창고 속에 있다가 “발견된” 엘레판티네의 아람어 파피루스 문서들을 출판한 책이다. 서론부의 몇 장은 파피루스에 나타난 엘레판티네 유대인들의 역사와 종교,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주제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 영어로 된 최초의 저술이다.

 Olmstead, A. T.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8. 576 pp. 이 역사서는 헬라어, 아람어, 페르시아어, 바벨론어로 된 자료들을 다 포함하여 페르시아의 역사를 조명해 줄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참작하고자 시도하였다.

 Rogers, Robert William. A History of Ancient Persia, From Its Earliest Beginnings to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9. 393 pp.

 Smith, Sidney, Isaiah XL-LV, Literary Criticism and History. “The Schweich Lectures of the British Academy, 1940.”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44. 204 pp. 강의 II는 556년부터 539년까지의 바벨론 역사에 대한 훌륭한 고찰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주에는 풍부한 자료들을 모아 놓고 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사야서의 후반부가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국면의 역사를 포함하고 잇는데, 이것은 그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예언의 형태로 묘사한 기록이라는 저자의 고등 비평적인 견해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Wiseman, D. J. Chronicles of Chaldean Kings (626~556 B.C.) in the British Museum.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61. 99 pp., plates. 박물관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으나 (1923년에 출판한 하나를 제외하고) 1956년까지 그 내용을 출판하지 않았던 일련의 서판들을 본문과 함께 번역문과 역사적인 소개를 싣고 있다. 매년의 군대 원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가운데, 이 연대기는 나보폴랏사르와 느부갓네살의 즉위 날짜, BC 597년에 예루살렘과 그 왕(여호야긴)이 잡힌 정확한 날짜를 제시하며, 또한 요시야가 죽은 해에 관한 의문도 해결해 준다. 이 주제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제3권, 136을 참조하라.


 미주

 1. 헬라어 자료들은 바벨론이 점령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다채로운 상보(詳報)를 추가한다. 고레스는 십파르의 상류 수문들을 열어 놓아 유브라데 강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그 결과 강물은 알 키피(Al Kifi)와 네제프(Nejef)의 늪지대로 흘렀다. 그리하여 수위가 충분히 낮아져 페르시아의 병사들이 강바닥을 통해 도성 안으로 진군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도성의 내벽에 다다랐을 때, 강둑에서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문이 잠기지 않은 채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도성 안에 있는 반역자들이 열어 놓았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동시대의 기록들에 의하여 확증된 것은 아니지만, 바벨론의 함락을 다루고 있는 설형문자 명각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명각들은 바벨론 도성이 전투 없이 점령되었다고 진술한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