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논문 BC 1400년경부터 BC 586년까지의 고대세계
List
 Ⅰ. 서론


 이 논문에서 논의되는 역사적 기간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서부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BC 1400년경부터 BC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까지이다. 이 기간의 시작은 애굽의 세력이 아시아에서 쇠퇴하기 시작하는 때와 일치한다.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헷 왕국의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 세력은 2세기 후에 해양 백성들(Sea Peoples)의 습격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앗수르인들이 선두에 나섰으며, 잔인한 폭력으로 마침내 이란의 고지들에서 애굽의 남부 국경까지 이르는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모든 시기 동안 이전의 빛나는 자아의 그림자로서 존재하던 바벨론은 마침내 앗수르의 멍에의 족쇄를 벗어 던지고 한번 더, 비록 단명했지만 영광스러운 제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 국가들과 다른 국가들의 역사에 관한 이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대 역사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적인 민족들 가운데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는데, 처음에는 지파들의 지도자들과 사사들 밑에서, 후에는 훌륭한 왕국을 건립하여 1세기 남짓 그것을 지탱할 수 있었던 왕들 밑에서 분투하였다. 하지만 이 왕국은 두 개의 라이벌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 두 왕국은 너무나 약해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지역이며 문명인 애굽과 메소보다미아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橋梁)인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밀어닥치는 세력들에 저항할 수 없었다. 북방 왕국 이스라엘은 마침내 앗수르인들에게 삼켜졌으며, BC 722년 사마리아가 멸망한 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방 왕국 유다는 거의 1세기 반을 더 지탱했으나 마침내 바벨론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활력은 심지어 바벨론 유수 중에서도 그들의 민족적인 통일성을 보존했으며, 그 결과 유다는 포로 된 상태에서 벗어나 강하고 연합된 백성으로 부상(浮上)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기간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 왕국들과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조망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그 시대의 사건과 문화와 문명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를 관찰하는 데 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관한 간단한 개요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사사들의 지도 하에 지파 조직들로 분할되었다가 그 후에 연속적인 세 왕의 치하에서 연합체로 되었으나 마침내는 두 개의 라이벌 왕국으로 분리되는 역사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자료들을 제공한 성경 기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개혁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 하는 관점에서 그 백성의 역사를 보았고 또 그런 식으로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백성이 특별한 위기들을 겪었거나 뛰어난 지도자들을 가졌던 기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한 반면, 다른 기간들에 대해서는 자료들이 심히 부족하여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아직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間隙)들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적인 묘사는 어떤 부분에서는 개략적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마무리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다른 고대 국가들의 역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역사의 모든 기간이 신뢰할 만한 자료들에 의해 똑같이 잘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수 세기의 사건들이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역사의 재구성이 그 모든 면에서 가능하려면 더 많은 원자료들이 발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래에 제시된 개관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을 망라한 것인데, 이것의 근거로 사용된 자료들은 (1) 많은 부분이 19세기 초에 여러 가지 상형문자 혹은 설형문자로 기록된 고대 언어들이 부활함으로써 이용할 수 있게 된 문서 증거들이고, (2) 기나긴 세월의 잔해와 모래 속에 간직되었다가 최근 몇 십 년 동안 발굴자들의 삽에 의해 드러난 풍부한 자료들이다.


 Ⅱ. 아마르나 시대에서 제20왕조 말까지의 애굽

 (BC c. 1400~c. 1085)


 이 시기의 연대

 BC 660년경 이전의 애굽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연대는, 제12왕조에 속한 연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확정되지 못했지만, 제국 시대-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에 관한 이 주석의 연대는 대체로 정확하다. 여러 역사가들과 연대학자들에 의해 주어진 연대들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시기의 연대는 19세기에 확립된 이래로 거의 변경되지 않았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앞의 모든 시기들에 대한 연대는 어떤 시기에는 수 세기씩 또 어떤 시기에는 수천 년씩 단축되었다.

 여기서 고대의 연대에 관한 미묘한 문제들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애굽이 제국이었던 시기의 연대들은 어떤 왕들의 치세에 연대를 매긴 천문학적 문서들, 그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연대가 매겨진 역사적 기록들 그리고 다양한 자료에서 나온 왕들의 명단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제시된 연대들은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실제 연대들과의 차이는 기껏해야 몇 년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 오차의 범위는 확실하게 25년 이내일 것이며, 아마도 10년 미만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연대들은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연대로 여기에 제시되었다.


 아마르나 시대의 애굽(제18왕조)

 모세는 애굽이 그 당시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투트모세 III세가 확립한 애굽 제국은 모세의 생애 동안 그 경계선이 남쪽으로는 아뷔시니아(Abyssinia) 고지들과 북쪽으로는 유브라데강까지 이르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부(富)가 나일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 지역에 세워진 카르나크(Karnak), 룩소르(Luxor), 데이르 엘-바리(Deir el-Bahri)의 신전들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수천 년 동안 인간과 자연의 파괴력을 잘 견뎌냈고 여러 세대의 방문객들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BC 1445년경부터 1405년경까지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던 때(참조 제2권, 91~99), 애굽 제국은 아멘호텝 II세(BC c. 1450~1425)와 그 아들 투트모세 IV세(BC c. 1425~1412)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손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 다음에 보좌에 오른 왕은 아멘호텝 III세(BC c. 1412~1375)로서 그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직접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그 조상들이 이룩한 제국의 결실을 풍부히 누렸다. 그는 생애 초기에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며 누비아(Nubia)까지 한 차례의 군사 원정을 이끌었으나, 그 후에는 엄청난 사치와 지나친 안일 속에 살았으며, 최후의 날들은 그의 미라에 있는 농양(膿瘍)들이 보여 주듯이 썩은 치아를 가진 살찐 약골로 보냈다. 그는, 평민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랑스러워하던 뛰어난 여인인 티위(Tiy)와 결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왕가에 외국의 피가 또한 크게 유입되었는데, 그것은 외국의 공주들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며, 그 공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는 미탄니(Mitanni)족의 길루케파(Gilukhepa)였다. 인도-유럽 계통의 후리인들(Hurrians)이 통치하던 북쪽의 그 메소보다미아 왕국은 이전에는 제18왕조의 초기 왕들의 세력에 최대의 적수였으나 이제는 애굽과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고 있었다.

 아멘호텝 III세는, 정기적으로 공물로 그에게 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부를 항상 애굽을 부요하게 만든 것으로 간주하였고, 자기편에서 더 이상의 어떤 노력이 없어도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아시아 제국이 와해되면서 울리는 먼 소리를 감지하지 못했다. 북쪽의 헷족,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다루기 힘든 지방 군주들 그리고 바로 그 지방들로 침입하던 하비루(Habiru)가 그 제국의 모서리들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그리하여 애굽의 세입에 현저한 감소를 야기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게으른 바로는 제국 쇠퇴의 조류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크나톤(Ikhnaton)

 아멘호텝 III세는 통치 말엽에 자신의 아들 아멘호텝 IV세(이크나톤)를 동위왕으로 세웠다. 이크나톤이 홀로 한 통치는 BC 1375년경부터 136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한 학자는 그를 “역사상 첫 번째의 개성파”, “매우 예외적인 사람”(브레스티드[Breasted])으로 지칭한 반면, 다른 학자는 그를 “반미치광이”(벗지[Budge])로 묘사했다. 근래의 저술가들은 그를 “바로들의 보좌에 앉았던 자들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쉬타인도르프[Steindorff]와 젤레[Seele])이라고 말했으나 다른 사람은 그를 여자 같고, 비정상적이며, 여자들에게 지배당한 인물로 묘사했다(펜들베리[Pendlebury]).

 아멘호텝 IV세, 즉 그 왕이 종교 혁명 후에 자신의 이름으로 일컬었던 이크나톤은 애굽의 전통적인 아멘(Amen) 종교와 관계를 끊고 태양 원반 아텐(Aten)을 그의 영토의 최고의 유일신으로 승격시켰다. 그 자신은 비록 육체적으로 약골이었지만 강한 의지력을 소유했으며, 아멘 종교와 예배를 짓밟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테베(Thebes)는 아멘과 매우 강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멘호텝은 수도를 나일강 하류 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위치로 옮겨서, 거기에 아케타톤(Akhetaton)이라고 일컫는 도성을 건설했으며 그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 정신(廷臣)들, 시인들, 건축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격려 하에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비로소 애굽에 소개된 새로운 사실주의 형태의 미술을 발전시켰다. 미술가들은 그 당시의 관습이었던 전통적인 이상주의적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아름답든지 추하든지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들을 그리고 그 모형들을 만들었다. 이때까지는, 예를 들면 모든 왕은 늙었거나 젊었거나, 얼굴이 잘 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간에 젊고 활기찬 사람-이상적인 신-통치자(god-ruler)-으로 묘사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왕을 불룩 튀어나온 복부와 길쭉한 두개골과 긴 턱을 가진 모든 추한 모습 그대로 조각하고 그렸다. 그의 늙어가는 아버지는 살이 쪄서, 자루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아트(ma‘at)가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진리”로 번역되었으나 “질서”, “정의” 그리고 “올바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마땅히 되어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즉 이상적으로보다는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원칙에 있어서 그 젊은 왕은 자신의 시대보다 훨씬 앞서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이해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혁명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가 거느린 미술가들은 만대의 걸작품 몇 점을 낳았는데, 예를 들면 현재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네페르티티(Nefertiti)의 흉상 그리고 새와 식물을 사생(寫生)한 벽화들이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다른 시대의 화가들은 아름다움에 있어서 이 벽화들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 왕의 새 종교는 일신교 - 하나의 우주적인 신에 대한 믿음-로 불렸다. 하지만 이 용어가 이크나톤이 도입한 종교의 이름에 옳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혁명 후에 그가 아톤 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신하들은 아톤을 경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처럼 왕을 자신들의 신으로 계속해서 경배했으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 계속적인 예배를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왕이나 그의 시대의 어떤 시인은 태양 원반을 창조자-신으로 찬양하는, 아톤에 대한 찬송가 하나를 작곡했다. 이 찬송가는 어떤 점에서는 시편 제 104편과 어법 및 구성이 평행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시편 제 104편을 아톤 찬송가의 히브리어 판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을 지지하는 타당한 증거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신을 생명과 복지를 산출하고 유지하는 최고의 창조신으로 찬양하는 시인은 누구나 아톤 찬송가나 시편 제104편에 있는 것과 어딘가 비슷한 용어와 표현들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왕은 아름다운 네페르티티와 결혼했는데, 아마르나에 있는 한 조각가의 작업장에서 발견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녀의 흉상은 고대 미술의 걸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 국왕 부처는 딸 여섯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가족의 삶은, 동시대의 그림들이 나타내듯이, 매우 행복하고 자연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군주는 그 딸들 중의 하나에게 입맞춤을 하거나 그 아내를 애무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도록 했는데, 이전에 어떤 애굽 왕도 그 자신과 가족들이 그렇게 묘사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

 이크나톤이 자신의 새 수도에 궁전들과 태양 신전들을 건축하며 그 시대보다 훨씬 앞선 자연주의적 미술을 후원하는 동안, 그의 측근들은 그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아톤을 제외한 모든 다른 신의 이름을 모든 기념물에서 정으로 쪼아냄으로써 옛 종교를 근절하려고 애썼다. 신전들은 폐쇄되었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관례적인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 정책이 보수적인 집단들 속에 뿌리깊은 적대감을 야기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크나톤을 향한 이와 같은 증오심은 외국세 수입이 점진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증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외국세 수입이 감소됨에 따라 애굽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더 커졌고 그와 동시에 국민은 빈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제국의 점진적인 와해로 인하여 초래되었다. 아시아에서 애굽 세력이 약해지는 첫 징조들은 아멘호텝 III세 치하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으나 이크나톤의 약한 통치 하에서 더욱 명백해졌다. 이크나톤은 자신의 새 종교를 실천했고, 아톤에게 찬송가를 불렀으며, 자신의 새 수도를 떠나기를 거절했으며, 그의 유명한 조상들이 수많은 군사 정벌로 쌓아 올린 외국 소유들이 하나씩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마르나 편지들

 이크나톤의 단명하고 불운한 수도였고 현재는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로 불리는 아케타톤의 폐허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서판이 많이 들어 있는 문서 보관소에는 동시대의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많은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1887년에 발견된 이 수백 개의 점토판(참조 제1권, 117, 141; 제2권, 93)은 미탄니,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의 우호적인 왕들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봉신들과 바로가 주고받은 서신들의 공식 파일들에서 나온 것들이다. 아마르나 편지들이 아멘호텝 III세와 아멘호텝 IV세(이크나톤) 때에 던져 준 것보다 더 많은 빛을 고대 세계의 제한된 기간에 대해서 던져 준 발견물들은 거의 없었다.

 이 편지들은, 강력한 헷족이 애굽 제국을 압박하고 북부 수리아의 많은 지역을 점유함에 따라 아시아에서 애굽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아시아의 지역적인 왕조들이 서로 싸워서 더 강력한 왕조가 약한 왕조를 전복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세력과 영토를 확장했다. 애굽의 봉신인 체하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어디서든지 애굽의 이권과 대항하여 싸운 봉신들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자는 압드-아쉬르타(Abd-Ashirta)였으며, 후에는 그의 아들 아무루(Amurru)의 아지루(Aziru)였다. 그들은 비블로스(Byblos), 베이루트(Beirut) 그리고 그밖에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의 해안 성읍들과 같은 많은 부유한 인접 지역들로 그들의 영토를 확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많은 지역 통치자들은 그들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기 위해서 애굽의 약세를 이용했다. 이 기간 동안 요단 동편(Transjordan) 방향으로부터 그 지방을 침략했던 하비루도 있었다. 도성들이 잇달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방백들 가운데서 예루살렘의 왕처럼 애굽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고자 노력하던 자들은 침략하는 하비루에게 대항하고자 바로에게 군사적인 원조를 호소하면서 대단히 흥분된 편지를 계속적으로 써 보냈다. 하지만 반역과 침략의 조수를 저지하려는 충성된 방백들과 지방 행정관들의 모든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공식적으로 애굽은 모든 호소에 귀를 막고 있었으며 수리아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한 듯했다. 이 상황은 아마르나 편지들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침공한 사건을 다루는 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아마르나 편지들 속에 나오는 하비루가 히브리인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참조 창 10:21; 14:13 주석).

 이크나톤은 자신의 치세 말기에 사위 스멘크카레(Smenkhkare)를 동위왕으로 세웠다.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스멘크카레는 4년 동안 통치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햇수는 아마도 그의 장인의 치세 기간에 모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크나톤이 죽은 후 다른 사위, 즉 “아톤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젊은 투탄카톤(Tutan- khaton)이 왕위에 올랐다(BC 1366~1357). 그는 보수주의자들의 압력을 견뎌낼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했으며, 아멘 제사와 종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테베로 돌아가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투탄카멘(Tutankhamen)으로 바꾸었고, 수도 아케타톤(아마르나)을 버렸다. 그는 많은 신전들을 수리하고 아멘 제사장들을 복위시키며 아멘 종교를 그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시킴으로써 선왕들의 “이단”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10년도 되지 않는 치세 후 그가 죽었을 때 제18왕조의 아마르나 이전 시대의 모든 왕들이 묻힌 테베 서부에 있는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그는 장엄하게 매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1922년에 발견될 때까지 그 경이로운 보화들과 함께 도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유일한 왕의 무덤이기 때문에 투탄카멘의 이름은 여염(閭閻)집에서 쓰는 말이 되었다. 그는 비록 애굽의 긴 역사 속에서 하찮고 단명한 통치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나 애굽의 다른 어떤 왕보다도 더 잘 알려져 있다.

 투탄카멘은 자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과부가 된 그 아내는 헷 왕 슈빌룰리우마(Shubbiluliuma)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그에게 그 아들 중 하나가 자기와 결혼하여 애굽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헷 왕은 처음에는 이 이상한 요구에 당황했으며, 그 왕비의 진실성에 관하여 조사했다. 그는 마침내 그것에 만족하여 헷 왕자 중 하나를 애굽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왕자는 도중에 길목에서 매복한 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역대 바로의 정신(廷臣)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인 에예(Eye)가 계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투탄카멘의 과부를 억지로 자기와 결혼하게 했으며 그리하여 애굽을 몇 년간(BC 1357~1353) 통치했다. 그는 보좌뿐만 아니라 선왕의 영안 신전(mortuary temple)과 조상(彫像)들도 찬탈했다.

 약 4년간의 통치 후에 에예가 죽자 정부의 통수권은 이전의 군대 사령관 하름합(Harmhab)이 접수했으며, 그는 34년간(BC 1353~1320) 통치했다. 그는 보통 제19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계수된다. 하름합은 두 선왕보다 아마르나 혁명에 덜 물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나라의 사제단과 보수주의자들에게 더욱 잘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이크나톤, 스멘크카레, 투탄카멘 그리고 에예 시대 동안에 애굽의 합법적인 통치자였던 것처럼, 아멘호텝 III세가 사망한 때부터 자기의 통치 연도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네 통치자는 찬탈자들, “이단자들”로 간주되었고, 그러므로 후기 왕들의 명단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리하여 공식적으로는 아멘호텝 III세 다음에 하름합이 바로 따라온다.

 하름합이 스스로 세운 첫 번째 과업은 이전 수십 년의 허약한 통치 기간에 심하게 와해된 것으로 보이는 애굽의 내적인 질서와 안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그의 칙령은 “질서와 진실을 확립하고 사기와 거짓을 추방하기 위하여” 발해진 것이었다. 사법 제도에서 사제들에게 특별한 권리들을 부여했으며, 영토 내의 관리들이 저지르는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잔인한 처벌로 위협했다. 그의 모든 역량이 나라의 질서 회복을 위해 소요된 것 같으며, 그는 이 무렵에 완전히 상실되었던 아시아에 있는 영지(領地)들을 탈환할 시간도 힘도 없었다. BC 1412년에 투트모세 IV세가 사망한 이래로 수리아나 팔레스타인에는 애굽 왕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 바로는 그곳에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BC 1405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침입하기 시작했을 히브리인들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애굽 왕들의 간섭 없이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제19왕조

 하름합은 자녀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가 지명한 후계자인 군대의 장군 람세스 I세(Ramses I)가 그 뒤를 이었다. 람세스 I세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짧은 기간(BC 1320~1319) 통치한 후에 사망했으며 보좌를 그의 아들 세티 I세(Seti I, BC 1319~1299)에게 물려주었다. 세티 I세와 더불어 새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다시 한 번 애굽의 세력이 느껴졌다. 그는 아시아의 영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확고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성공적인 시도들을 감행했다. 애굽의 신전 벽들과 팔레스타인의 에스드랠론 계곡의 동쪽 끝에 있는 벧산(Beth-shan)을 발굴할 때 발견된 큰 석조 기념물에 새겨진 기록들은 그 왕이 재위 첫 해 동안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음을 나타낸다. 그의 주된 목표는 지나간 시대에 애굽 수비대들이 점유했던 몇몇 중요한 도성들을 되찾고 요단강 동편의 북부에 있는 비옥하고 부요한 하우란(Hauran) 지방으로 통하는 무역로들을 한 번 더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는 3개 사단을 거느리고 야노암(Yano‘am), 벧산 그리고 하맛(벧산의 남쪽) 도성들을 동시에 공격하여 정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벧산에서 발견된 그의 승전 석비는, 그가 그 도성을 재점령하여 그곳에 애굽 수비대를 주둔시켰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갈릴리 바다의 동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텔 엣-쉬합(Tell esh-Shihab)에서 발견된 다른 승전 기념비에 의하면, 그 후에 그는 요단강을 건너 하우란 지방에 있는 어떤 부유한 지역들을 점령하였다.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 벽들에 새겨진 그의 공식적인 기록들과 카데쉬에서 발견된 승전 석비의 단편(斷片)에 의하면, 세티 I세는 서부 팔레스타인과 요단강 동편에 있는 어떤 중요한 도성들을 재점령한 후에 수리아로 방향을 돌려 오론테스(Orontes) 강변의 카데쉬(Kadesh)를 재정복했다. 그 후의 원정에서 세티 I세는 배반한 아무루 왕국을 징벌하고, 헷족에게 북부 수리아에 대한 애굽의 권리들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북쪽으로 더욱 더 전진하였다. 비록 1세기 전의 양(量)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수리아의 전리품들과 레바논의 백향목이 한 번 더 애굽으로 들어왔다. 비록 그 애굽이 이전 제국의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한 번 더 그 새 제국은 아시아에 있는 외국 지역들과 백성들을 다스리는 의기양양한 통치자가 되는 만족을 누렸다.

 세티 I세의 치세 동안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유로운 문화 교류가 애굽과 아시아 사이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바알, 레셰프(Resheph), 아나트(Anath),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와 같은 가나안 신들과 다른 신들이 애굽의 예배 제도에 받아들여졌다. 애굽 종교는 고립성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국가적인 독특성을 상실했다. 이제부터는 마술, 제사 의식, 그리고 신탁(神託)이 더 많이 강조되었으며, 운수신(Fortune)과 운명신(Fate)이 애굽인들의 종교 생활에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람세스 II세와 헷족

 아시아 제국을 재정복하는 정책은, 그 통치 기간이 예외적으로 긴 바로 그 다음 왕 람세스 II세(BC 1299~1232)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는 애굽의 많은 기념물에 새겨진 선왕들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바꿈으로써 애굽의 많은 기념물들을 자기의 것으로 삼았으며, 자신이 시행한 대규모의 건축 활동과 함께 이 기념물들이 그에 의해서 세워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람세스 II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실제 명예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고대의 기념물들에서 람세스 II세의 이름보다 더 자주 발견되는 바로의 이름은 없다. 그 결과 초기의 애굽학자들은 그가 성취한 일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명성을 그에게 돌렸다.

 람세스 II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헷 왕 무탈루(Mutallu)는 그 젊은 바로가 무엇을 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하나의 예방책으로 수리아 방백에게 애굽으로 급히 가서 그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조언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아시아에 있는 그의 영지들을 확보하려는 단호한 의지가 람세스의 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자 그 헷 왕은 아나톨리아(Anatolia)와 수리아의 연합체를 결성했다. 그리하여 그 자체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수리아에 있는 애굽의 다른 영지들도 합병했다. 약 30,000명의 그 연합 군대는 북부 수리아를 애굽 제국에서 벗어나 있게 하려고 작정했다.

 람세스는 그 시대의 도전에 맞서야 한다고 확신했다. 아멘(Amen), 라(Ra), 프타흐(Ptah.), 그리고 세트(Set)와 같은 신들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 헷 연합체의 세력과 그 힘이 아마 비슷할 네 사단을 거느리고 그는 북쪽으로 진군했다. 헷 군대는 오론테스 강변의 카데쉬에서 애굽인들을 기다렸으며, 그곳에서 람세스와 무탈루 사이의 그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은 애굽 전역에 걸쳐 숱한 기념물들에 글과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헷족은 람세스에게 덫을 놓았다. 람세스는 도망병으로 가장한 헷 병사 한 명을 붙잡았는데, 그 병사는 무탈루가 퇴각하여 카데쉬를 떠나 북쪽에 있는 더 나은 방어 위치로 갔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카데쉬 도성의 뒤편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람세스는 악의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아멘 사단과 함께 엘-무카디예(El-Mukadiyeh) 시내를 건너 북쪽 제방 위에서 진영을 쳤다. 그 다음 사단인 라 사단이 바로 그 시내를 건널 때, 무탈루는 그의 군대의 일부와 함께 오론테스 강을 슬쩍 건너 라 사단 후방으로 들어가서, 놀란 애굽인들을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멘 사단과 라 사단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동안 람세스의 다른 두 사단은 남쪽 11킬로미터 남짓한 지점에서 여전히 행군 중에 있었다.

 람세스가 영웅적인 행위로써 어떻게 자신의 군대를 구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적인데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임박한 패배를 찬란한 승리로 전환시켰다는 그의 주장이 숱한 기념물들에 공포되어 있지만 이것은 에누리하여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헷족도 마찬가지로 애굽인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람세스가 그의 군대의 과반수 이상을 구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겠지만, 승리했을리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서로 빼앗기 위해 겨루던 지역은 헷족이 보유하게 되었고 애굽은 영구히 그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헷 문서들은 헷족이 레바논 지방에 침투하여 남부 수리아에 있는 다메섹까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만약 그들이 람세스가 주장한 대로 패배했다면 거의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2명의 헷 통치자들, 즉 우르히-테슈브(Urhi-Teshub)와 핫투쉴리쉬 III세(Hattushilish III)의 치세 동안 애굽과의 관계는 점점 더 평화로워져서 마침내 람세스 II세 제21년에 두 왕국 사이에 우호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문의 애굽어 판(版)은 오늘날 카르나크의 신전 벽에서 볼 수 있고, 헷어 판은 헷 제국의 수도인 캇투샤쉬(Khattushash, 현재의 보가즈쾨이[Boghazko..y])의 왕립 문서 보관소에서 출토되어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매우 잘 알게 되었다. 그 두 서류에는 왜 조약이 체결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협약의 비준에 앞서 외교적 협상들이 있었음을 언급하는 전문(前文)이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서 그 조약은 상호불가침 선언도 포함하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그들 각각의 세력권에 대한 지리적 경계를 규명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맹약에는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반역자들에 대처하는 상호 협조, 그리고 정치적 망명자들을 각기 상대편에 이양할 것에 대한 동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문서는 그 조약의 규정들을 위반하는 왕에 대해 가하는 여러 가지 신적 제재(制裁)로 종결되어 있다.

 이 우호 조약은 헷 왕국이 존재하던 나머지 기간 동안 유효했다. 그 조약이 체결된 지 13년 후에 람세스는 헷 공주와 결혼했으며 두 왕가 사이의 많은 서신 왕래는 그들 간에 존재한 우호적인 관계를 증거하고 있다. 람세스 II세의 아들 메르넵타(Merneptah)의 치세 동안에 기근이 아나톨리아를 휩쓸었을 때, 메르넵타는 그 곤경을 완화하기 위해 헷족에게 곡식을 보내주었다. 이 사건 이후로는 헷족에 관하여 들리는 이야기가 더 이상 없었다. 보가즈쾨이에서 나온 발굴물들은 그 도성이 해양 백성들에 의해 BC 1200년경에 파괴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이 민족들이 그때에 헷 제국에 종언을 고한 자들이다.


 람세스 II세와 아피루(‘Apiru)

 많은 학자들은 람세스 II세가 압제의 바로였다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첫째로 출애굽기 1장 11절이 국고성(國庫城) “라암셋”(Raamses)과 “비돔”(Pithom)을 히브리인들이 건축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람세스 II세가 그 도성을 아름답게 하고 수도로 삼았을 때, 그가 타니스(Tanis)라는 지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치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테베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자신이 그 도성에 묻혔다. 게다가 그의 긴 통치 기간은 엄청난 수의 노예들에 의해 수행된, 애굽 전역에 걸친 대규모의 건축 활동으로 특징을 이루며, 그 노예들 가운데는 아피루(하비루 및 히브리인들과 동일시되는)가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학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상태로 있은 것이 람세스 II세의 치세 중의 일로 보는 데에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다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몇몇 고고학적인 증거가 추가되었는데,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벧엘 그리고 다른 곳들에서 나온 발굴물은 이 도성들이 BC 14세기가 아니라 13세기에 파괴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이론에 대하여 몇몇 유력한 반대가 있다. 열왕기상 6장 1절사사기 11장 26절과 같은 성경절에 있는 명백한 연대기적 진술문들은 13세기 후반에 일어난 출애굽과는 조화될 수 없고, 그보다 적어도 2세기 먼저 있은 출애굽의 연대를 요구한다.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까지의 사사들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의 그 부분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무리를 범하지 않고서는 약 150년의 기간으로 압축될 수 없다.

 게다가 13세기 출애굽을 옹호하는 자들이 출애굽 때의 바로로 간주하는 메르넵타 왕의 명각도 이 이론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이 명각은 그 왕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인들과 조우했으며 그들을 패배시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메르넵타는 단지 몇 년 동안만 통치했다. 따라서 만약 출애굽이 그의 통치 하에 있었다면, 약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이스라엘인들은 그가 죽었을 때 여전히 시내산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을 패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메르넵타를 출애굽의 바로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기록들을 더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13세기 출애굽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애굽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메르넵타는 가나안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인들을 만났다고 추정한다.

 더욱이 람세스 II세 치하의 출애굽을 지지하는 듯한 증거는 이 주석이 선호하는 좀 더 이른 출애굽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13세기 출애굽의 증거로 자주 지적되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라암셋(Rameses 또는 Raamses)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후대의 서기관들이 옛 지명들을 그들 당시의 지명들로 고쳐 썼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참조 창 47:11; 출 1:11 주석). 람세스 II세의 문서들에서 노예 노동자들로 언급된 아피루(‘Apiru)는, 출애굽 전에 애굽에서 압제받던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고서도 하비루인들 혹은 히브리인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안에도 람세스 II세는 그의 건축 활동에 히브리 노예들을 고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예들은 사사들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행한 군사 활동들을 통해 그의 수중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어떤 팔레스타인 성읍들의 폐허가 BC 14세기를 나타내는 층(層)들에서 파괴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150년 후의 흔적을 나타내는 사실도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여호수아 때에 정복된 몇몇 성읍들의 파괴는 완전한 파괴가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인들은 그것들을 점유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가나안인들의 수중에 남겨두었다(참조 삿 1:21, 27~33주석). 고대의 장소들로 판정된 것들이 모두 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면, 텔 베이트 미르심은 옷니엘이 정복한 성읍인 드빌(Debir, 수 15:15~17)로 판정되었으나,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경우에는 매우 근사한 판정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던 결정적인 증거가 여기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애굽으로부터 480번째 되는 해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에 기초한 성경 연대기(참조 제2권, 96)는 15세기 출애굽을 요구한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v, 23; 부조와 선지자, 204, 514, 514, 627,; 선지자와 왕 229, 230,). 따라서 많은 성경학자들이 람세스 II세가 압제의 바로요 그의 아들 메르넵타가 출애굽 때의 바로였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함께 13세기 출애굽설은 거절해야 한다.


 메르넵타

 람세스의 열세 번째 아들 메르넵타가 BC 1232년에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으며, 리비아인들이 시도한 심각한 침략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가 성공적으로 이 시도에 저항했으며, 9,000명의 포로를 잡아왔는데 그중에는 1,000명 이상의 헬라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승전 석비에서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의 몇몇 성읍과 족속들에 대한 원정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중요한 문단은 다음과 같다.

 “테헤누[리비아 부족]는 황폐하게 되었고,

 핫티[헷족의 땅]는 진정되었고,

 온갖 악과 함께 가나안은 정복되었고,

 아스글론은 이끌려 갔고, 게셀은 사로잡혔고,

 야노암은 멸망당했고,

 이스라엘은 황폐하게 놓여 있고, [더 이상] 씨가 없다.

 후루[호르족의 땅]는 애굽을 위해 과부가 되었다.”

 이미 언급된 이 유명한 문단은, 메르넵타가 그의 팔레스타인 원정들 중의 하나에서 이스라엘인들과 마주쳤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도성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아스글론, 게셀, 야노암 그리고 호르족 또는 후르족의 땅 사이에 이스라엘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그 왕이 그들을 어느 곳에서 만났는지를 시사한다. 먼저 언급된 성읍들은 남서부 팔레스타인에 놓여 있은 반면에, 후루(Hurru)라는 이름은 그 땅의 남동부의 거주민들(에돔)을 나타낼 수도 있고, 애굽의 명각들에서 자주 사용된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반적 용어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백성”을 의미하는 한정사를 가졌고, 다른 이름들은 “외국”을 뜻하는 상형문자 한정사를 가진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그 당시 그들이 마주쳤던 이스라엘인들이 정착된 백성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성경에 묘사된 사사 시대 동안의 상황과 일치한다. 메르넵타의 출정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여전히 싸우고 있던 그 기간 동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애굽의 기념비에서 고정된 거주지를 가진 한 국가로서가 아니라 정착되지 않은 한 백성으로 묘사될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메르넵타의 시대로부터 흥미로운 기록들이 나왔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이민국 직원들에 비교될 수 있는 공무원들로서 애굽의 북동부 전방을 수비하던 공무원들에 의한 기록들이다. 이 기록들은 그 국경을 통과하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직무를 포함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애굽의 외교적인 분야에서 봉사하고 있던 사절들이었다. 나일강의 삼각주(Delta) 지역에서 가축들을 위하여 일시적인 목초지를 찾을 수 있도록 허용된 에돔의 한 부족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 문서들은, 전방이 잘 수비(守備)되고 있으며, 제19왕조 동안에 승인되지 않은 개인이나 단체가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제20왕조

 메르넵타의 사망은 애굽에서 여러 해 계속된 정치적 혼돈기의 시작을 알렸다. 많은 왕들이 잇달아 신속하게 보좌를 계승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심지어 수리아인이었다. 그 땅은 마침내 출신을 알 수 없는 세트낙트(Setnakht)라는 사람에 의해 이 안타까운 정세로부터 구해졌으며, 그는 제20왕조의 창립자가 되었다. 그가 람세스 III세(BC 1198~1167)가 된 그의 아들에게 보좌를 물려주었을 때, 애굽은 그 나라를 중대한 위험에서 구원할 강력하고 열정적인 왕을 한 번 더 갖게 되었다.

 람세스 III세 통치 이전 애굽의 쇠약기 동안에 리비아인들이 삼각주의 비옥한 지역에 잠입하여 그 나라의 내적 안전을 위협하는 점차 커지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속적인 위협이었는데, 이는 침략이 있을 경우 그들은 애굽의 서쪽 국경 너머에 살고 있던 그들의 동포들과 명분을 같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람세스 III세는 그의 치세 제5년에 리비아인들에 대항해 출정하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다. 그는 그들 중에서 12,535명을 죽였고 수천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고 주장했다.


 해양 백성들

 서쪽에서 오는 위험을 피한 후 람세스는 북동쪽으로부터 그보다 훨씬 더 큰 다른 위험을 대해야만 했다. 그레데, 헬라, 에게 제도(Aegean Islands) 그리고 아마도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로부터 온 소위 해양 백성들(Peoples of the Sea)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우가릿(Ugarit)과 같은 북부 수리아에 있던 많은 나라들과 함께 트로이(Troy, [드로아]) 그리고 그 다음의 헷 왕국과 같은 소아시아의 연안 도성들을 공략하여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최대의 문명국인 비옥한 나일 계곡으로 침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베니게(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의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내려갔다. 그들 중에는 티엑케르(Tjekker)인들과 블레셋인들이 있었는데, 블레셋인들은 소가 끄는 이륜 짐마차에 가족들을 태우고 왔다. 두 부족 다 해양 백성들의 이주가 끝난 후 팔레스타인의 연안에 정착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람세스 III세는 재위 제8년에 팔레스타인 경계선에서 그 적대 세력과 만났다. 대전투에서 그는 장차 침략할 자들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그들의 해군이 나일강의 수로들 중 하나에서 상륙을 시도했을 때 그것을 파멸시켰다. 이와 같이 람세스는 애굽을 침입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지만 티엑케르인들과 블레셋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정착한 후에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비옥한 연안 지역을 지배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은 아마도 해양 백성들이 이동하기 전에 그곳에 와 있던 어떤 블레셋 족속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해양 백성들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그 지방에는 인종적으로 연관된 백성들로 구성된 강력한 분견대(分遣隊)들이 들어왔다.

 람세스 III세가 서부 테베에 건축한 신전이면서 헬라 시대 이전의 모든 애굽 신전 중에서 오늘날 가장 잘 보존된 신전인 메디네트 하부(Medinet Habu)에 그 왕은 그가 수행한 전투들을 기념비적인 부조(浮彫)로 묘사했다. 이 그림들은 람세스와 싸운 서로 다른 민족들의 특징을 보여 주기 때문에 대단한 가치가 있다. 블레셋인들은 그들 특유의 깃털 투구를 쓰고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언제나 그것으로 식별될 수 있다. 또한 다른 해양 백성들인 셰르덴(Sherden, 아마도 사르디니아인들), 시쿨리(Siculi, 시칠리아인들), 서부 소아시아에서 온 다르단인들(Dardanians), 에게 제도에서 온 아가야인들(Achaeans) 그리고 다른 민족들도 있는데, 모두 그들 특유의 투구 혹은 다른 특정적인 표지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육상과 해상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 이 부조들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 동안 동부 지중해 지역들에서 일어난 인종 이동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예증적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 이동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의 후배지(後背地)에 살았고, 연안을 따라 있는 주요 가도(街道)들이 그 시대의 결정적인 전투들을 목격했다. 그러나 후기 사사 시대에 블레셋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연안 지역들에 대한 그들의 장악력을 견고히 했고, 이스라엘 민족의 존속을 위협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산지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종속시켰다. 블레셋인들과의 갈등은 오랜 세월이 소요되는 것임이 판명되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이 삼손의 지휘 아래 시작되어, 사무엘과 사울의 지휘 아래 계속되었으며, 다윗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완결되었다.

 람세스 III세는 애굽을 외적인 위험에서 구하는 일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내적인 안전도 증진시켰다. 한 문서는 다시 한 번 “여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 어디든지 성가신 일 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만족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의 치세 말에 있었던 것으로서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는 저 위대한 파피루스 해리스(Papyrus Harris)에는 그 왕이 여러 신전과 신들에게 바친 모든 선물과 그 왕 이전에 신전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에 관한 개요가 포함되어 있다. 이 귀중한 문서는 그 시대 동안의 애굽의 세속적 경제와 종교적 경제에 대한 주된 정보 자료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주요 문제점이 이 필사본에 의해 제기된다:

 (1) 그 왕의 선물들은 이전의 소유물들에 더해졌는가, 아니면 그것들이 옛 소유물에 대한 왕의 승인이 되는가?

 (2) 이 선물들과 소유물들은 애굽 전체의 경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리하여 이 문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 왔다. 브레스티드(Breasted)는 애굽 인구의 약 8퍼센트가 신전 봉사에 참가했으며, 국토의 약 15퍼센트가 종교적 재산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섀델(Schaedel)은 그 수치가 각각 20퍼센트와 30퍼센트였다고 주장한다. 어느 수치가 옳든 간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 당시 애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왕도 그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음이 명백하다.


 쇠퇴하는 애굽

 람세스 III세는 고위 국가 관리들 외에 그의 첩 몇 명과 그의 아들 중 적어도 하나가 연루된 후궁 음모에 희생되었음이 명백하다. 이 사건의 조사를 다루고 있는 몇 개의 사법 기록과 내려진 선고들은 오늘날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 문서들은 고대 애굽의 사법 체계에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사건이 조사되고 있는 동안 요셉이 갇힌 옥에 함께 갇혔던 두 관원장의 경우에 흥미로운 빛을 던져준다(참조 창 40:1~3).

 많은 연약한 왕들이 람세스 III세의 뒤를 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람세스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지금은 람세스 IV세부터 XI세(BC 1167~1085)로 계수된다.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애굽에는 왕권이 꾸준히 쇠퇴했고 그와 상응하게 사제들의 영향력은 증가했다. 애굽의 종교적인 시민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강력한 계층을 형성하던 아멘(Amen)의 사제단은 마침내 왕조를 전복하고 그들 자신의 대사제를 왕으로 세웠다.

 정치력과 경제력의 쇠퇴와 함께 애굽의 내환(內患)이 심각해졌다. 람세스 III세는, 수 세기 동안 애굽의 성읍이었던 에스드랠론(Esdraelon) 계곡의 벧산(Beth-shan)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왕이다. 비록 람세스 VI세의 조상(彫像)의 대좌(臺座)가 므깃도 발굴 중에 나타났으나 이 왕이 팔레스타인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 청동 조상은 예물로 팔레스타인에 보내졌을 것이다. 시내[반도]의 동광(銅鑛)에 있는 명각들에 마지막으로 언급된 왕의 이름은 람세스 IV세인데, 이것은 그의 후에는 더 이상 채광 목적으로 원정대가 시내(Sinai)로 파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국외 소유지를 잃어버리게 됨으로 빈곤과 불안이 더해지고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다. 보리 한 자루의 가격이 2데벤(deben)에서 8데벤으로 올랐다. 스펠트(spelt, 값싼 종류의 밀)는 람세스 VII세부터 X세까지 왕들의 치세 동안 1데벤에서 4데벤으로 올랐다가 나중에 2데벤에서 안정되었다. 생활비가 증가함에 따라 정부의 세입이 떨어졌고, 그 결과 정부는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줄 수 없었다. 이것의 여파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파업인 정부 근로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곳들, 예컨대 왕실의 엄청난 묘지를 그 모든 신전들과 함께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하는 서부 테베와 같은 곳에서는 여러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어려운 상황이 발생된 또 다른 이유는 공무원에게 만연된 부패였다. 한 예로서 하(下)애굽에서 상(上)애굽에 있는 엘레판티네(Elephantine)의 크눔(Khnum) 신전으로 가는 곡식을 선적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던 한 관리의 경우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그가 횡령죄로 재판을 받았을 때 9년 동안 접수한 6,300자루의 곡식 중에서 576자루, 즉 전체의 약 9퍼센트만 배달했음이 드러났다. 91퍼센트의 곡식은 그가 어떤 서기관들, 감독관들, 그리고 크눔 신전에 배속된 경작자들과 합작하여 횡령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기록들은 또한 주민들에게 두통거리였던, 유랑하며 약탈하는 군인들의 무리와 끊임없는 무덤 도굴 사건들에 관해 말한다. 금과 은으로 된 막대한 보물들이 서부 테베의 왕들과 왕비들의 계곡에 있는 왕실 무덤들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주민들이 경제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보물들을 손에 넣고자 시도한 일들에 관하여 읽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무덤 도굴에 관한 조사 내용을 기록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심지어 공무원들도 그 절도죄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한 도굴 사건들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투탄카멘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든 왕의 무덤이 결국 약탈되었다. 고고학자들을 위해 남겨진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제20왕조의 말엽(BC 1085)에 애굽은 그 길고도 얼룩진 역사에서 가장 침체된 상태들 중 하나에 이르렀다. 이전의 부와 영광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웬아몬(Wenamon) 이야기와 한 풍자적인 편지가 나타내듯이 애굽의 사절들은 외국에서 멸시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나타났다. 애굽은, 수 세기 후 히스기야 때 한 앗수르 장교가 조롱하여 일컬은 바와 같이 “상한 갈대”가 되었다(왕하 18:21). 사사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쇠약함은 어린 이스라엘 국가에게는 축복이 되었으며,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강한 이웃 세력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다.


 Ⅲ. 미탄니 왕국(BC c. 1600~c. 1350)


 제18왕조 동안 애굽의 최대 적수는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미탄니(Mitanni) 왕국이었다. 비록 최근의 발견물들이 이 모호한 세력의 역사에 빛을 좀 던지기는 했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헷어로 된 기록들을 통해 알려진 그 고대 수도 왓슈카니(Washshukani)의 대지는, 비록 텔 할라프(Tell Halaf) 인근의 상부 카부르(Chabur)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믿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 지역 전체의 고대 원주민은 아람어를 말하는 아람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통치자들은 BC 17세기에 그 지방을 차지했던 후리인들(Hurrians)이다. “후리인”은 거대한 인도-유럽계 인종의 한 분파인 아리안(Aryan)족의 민족 이름이며, 한편 미탄니는 후리인들이 통치하던 국가 이름이다. 그들의 왕과 고위 관리들의 이름은 아리안의 이름과 유사하며, 그들의 신들의 이름은 인도의 베다(Veda)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미트라스(Mithras), 바루나(Varuna), 인드라(Indra), 나사탸(Nasatya) 등이다.

 비록 미탄니 왕국의 시작은 모호하지만, 후르인들은 BC 17세기경 이 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헷족들은 바벨론을 정복하고 멸망시킨 후 아나톨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의 왕 무르쉴리쉬(Murshilish)의 지휘 하에 후리인들과 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BC 15세기가 되어서야 그들의 왕들의 이름이 기록된 자료들, 특히 그들이 몇 차례 마주친 투트모세 III세와 아멘호텝 II세의 애굽 기록들에 나타난다. 하지만 BC 15세기 말경에 애굽과 미탄니의 왕실간에 우호 관계가 확립되어 이어진 몇 세대 동안 애굽 왕들은 미탄니 공주들을 아내로 삼았다. 미탄니의 아르타타마 I세(Artatama I)는 그의 딸을 투트모세 IV세에게, 슈타르나 II세(Shutarna II)는 그의 딸 길루케파(Gilukhepa)를 아멘호텝 III세에게, 그리고 투쉬랏타(Tushratta)는 그의 딸 타두-케파(Tadu-khepa)를 아멘호텝 IV세에게 주었다. 이때가 바로 “아마르나 편지들”의 시대(BC 14세기)인데, 그 편지들은 다른 것들과 함께 특히 애굽과 미탄니의 후르인들 사이의 우호 관계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적대 관계에서 우호 관계로 변한 것은 북서쪽에서 새로운 세력인 헷족이 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헷족이 그들의 영향력을 점차 동부 소아시아의 전 지역에 확장하고 수리아와 북부 메소보다미아-그 당시에는 애굽이나 미탄니의 영토-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느껴지게 하고자 시도했을 때, 이전의 두 대적들은 필요에 의해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 노력들은 강력한 헷족을 오랫동안 저지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크나톤 바로 의 연약한 통치 하에서 애굽은 더 이상 아시아 문제들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못한다는 사실이 수리아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그래서 BC 1365년경 미탄니의 맛티와자(Mattiwaza)는 그 당시의 강력한 헷 왕인 슈빌룰리우마(Shubbiluliuma)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수리아에서의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했다. 그 사이에 북동부의 후리인들은 후리(Hurri)라는 이름 하에 별도의 왕국을 세웠다. 그 왕들 중 두 사람(미탄니의 슈타르나[Shutarna]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은 알려져 있는데, 둘 다 BC 14세기의 인물이다.

 14세기 중간 이후로는 모든 고대 자료들이 미탄니 왕국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으나 BC 1325년경부터 1250년까지의 앗수르의 기록들은 이전의 미탄니와 같은 지역에 놓여 있던 하니갈바트(Hanigalbat) 왕국에 관해 말한다. 하니갈바트의 왕들의 이름은 이전의 미탄니 왕국의 왕들처럼 아리안(Aryan) 계통의 이름이기 때문에 하니갈바트는 미탄니를 계승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나라의 서부 지역들은 헷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동부 지역들은 앗수르의 일부가 된 것을 보면, 그 나라는 세력과 영향력이 거의 없고 범위가 작은 나라였다. 이 왕국은 아마도 BC 13세기에 끝장났고 몇몇 조그만 도성 국가로 해체되었다가 후에 앗수르의 팽창기 동안 그 나라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후르 왕국의 역사는 아직도 좀 모호하지만 위에서 한 묘사는 후리인들이 BC 제2천년기의 인종들의 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제시한 것이다. 그들은 고대 세계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했고, 애굽의 기록들을 통해알려진 바에 의하면 심지어 남부 팔레스타인까지 이르렀다. 성경에서 후리인들은 호리인들(Horims 또는 Horites; 참조 창 14:6; 36:20, 21; 신 2:12, 22)로 불렸다. 팔레스타인에서 후리인들의 중요성은 어떤 기간들에는 애굽인들이 그 전체 땅을 쿠리(Khuri)라고 일컬은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여호수아가 사망한 직후에 이스라엘을 8년 동안 압제하다가 마침내 갈렙의 동생 옷니엘에게 패배한 메소보다미아의 왕 구산-리사다임(Chushan-rishathaim, 삿 3:8~10)은 아마 BC 14세기의 미탄니 왕들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투쉬랏타(Tushratta)가 구산-리사다임과 동일시되어 왔으나, 후자는 BC 1365년 이후의 기간에 다스린 왕들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Ⅳ. BC 1400년경부터 1200년경까지의 헷 제국


 그 나라의 역사 초기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대 헷 왕국은 제1권(144, 145쪽)에서 논의되었다. BC 1400년 이전의 헷 왕국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 왕들의 계승도 학자들 사이에 토론의 대상이다. 하지만 BC 1400년 이후의 헷 왕국은 역사의 완전한 조명 안으로 들어온다.

 그 왕국의 수도 캇투샤쉬(Khattushash)는 소아시아의 할뤼스 강(Halys)1)의 대 만곡부 내부, 현재의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Ankara)에서 멀지 않은 마을 보가즈쾨이(Boghazko..y) 근처에 있었다. 인도-유럽계 민족인 헷족은 인종적으로 후리인들과 관련이 있었으며, 후리인들이 바벨론인들과 앗수르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메소보다미아의 문명과 문화의 산물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의 대부분도 그들로부터 취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바벨론 설형문자 자체(字體), 어떤 미술 형태, 서사시와 신화 같은 문학적인 산물들 그리고 심지어 신들과 종교적인 개념들까지도 인계받았다. 하지만 근래에 비로소 해독(解讀)된 그들의 상형문자 자체 같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헷족은, 그들의 미술 작품이 애굽인들이 달했던 높은 수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무모하고 반(半)야만적인 국민이었으며, 또한 다른 국민들처럼 신전을 건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법률은 그들이 고대의 대부분의 다른 국민들보다도 훨씬 더 친절하고 자비로웠음을 나타낸다.


 헷 세력의 발흥(勃興)

 헷족의 왕들 가운데 역사에 알려진 첫 번째 위대한 왕은 BC 1375년경부터 1335년경까지 통치한 슈빌룰리우마(Shubbiluliuma)이다. 다소 성격이 모호한 어떤 대이변이 그가 보좌에 오르기 조금 전에 그 나라에 닥쳤다. 비록 이 대이변에 대한 기록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동부 소아시아의 몇 속국들이 그 영주들에게 대항해 일어나 헷족의 수도 캇투샤쉬를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슈빌룰리우마가 보좌를 획득한 후 그의 첫 번째 관심은 수도를 재건하고 왕국 안에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러 번의 원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헷족의 왕이 다시 한 번 동부 소아시아의 서로 다른 백성들을 주관하게 되자 그는 경쟁국인 미탄니를 향하여 방향을 돌렸다. 그의 첫 번째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미탄니의 왕 투쉬랏타가 애굽의 바로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그가 헷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블로스의 립-앗디(Rib-Addi)가 기록한 아마르나 문집 중의 다른 편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슈빌룰리우마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슈빌룰리우마의 두 번째 수리아 원정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그는 미탄니 왕국의 수도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남부 수리아로 침투하여 레바논까지 들어갔다. 내부 문제들이 투쉬랏타의 가문에서 일어나서 그 결과로 그가 살해되었을 때, 슈빌룰리우마는 그에게 피신해 왔던 투쉬랏타의 아들 맛티와자(Mattiwaza)를 보좌에 앉히고 그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두 왕가를 결속시켰다.

 애굽의 역사를 논의할 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투탄카멘(Tutankhamen)의 미망인이 헷 왕에게 요청하여,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자기에게 보내어 자기의 남편과 애굽의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그 헷 왕이 유브라데 강변에 있는 도성 갈그미스를 공략하던 때였다. 이 요청에 응하여 보내진 왕자는 나일강 지방에 도착하기 전에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 범죄에 대한 소식을 접하자마자 슈빌룰리우마는 애굽인들을 대항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으나 20년간 헷 나라를 휩쓴 염병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의 승리를 기뻐하지도 못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슈빌룰리우마의 아들 가운데 네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들 중 둘은 아버지의 생애 동안에-한 아들은 알렙포를, 다른 아들은 갈그미스를-통치했다. 셋째 아들 아르누완다 III세(Arnuwanda III)는 그의 아버지를 이어 헷 제국의 보좌를 계승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 무르쉴리쉬 II세(Murshilish II)가 보좌를 획득했다. 상당한 수의 동시대의 문서들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이 왕의 치세 기간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실제적으로 아버지의 제국을 재건해야만 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다시 그의 형 마르누완다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반란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소아시아의 여러 백성들과 수리아 그리고 애굽의 수비대 병력을 대항한 군사 원정들로 가득하다.

 그 다음 왕 무탈루(Mutallu)도 속국민인 가쉬가(Gashga)족이 일으킨 심각한 반란을 겪었는데, 그들은 헷 수도인 캇투샤쉬를 정복하고 파괴했으며 그 헷 왕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 일시적인 수도를 세우도록 했다. 어떤 이유로 북부 수리아의 지방 왕국 아무루(Amurru)가 이전에 그것이 속해 있던 애굽을 지지하여 헷족과 인연을 끊길 원했을 때, 무탈루가 개입하여 그의 동맹국들과 함께 아무루를 강제하여 애굽 제국과 떨어져 있도록 했다. 그가 오론테스(Orontes) 강변의 카데쉬 전투에서 애굽 왕 람세스 II세를 만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람세스는 그의 옛 권리들을 주장하기 위해 북부 수리아로 왔었다. 카데쉬에서의 그 유명한 전투는 이미 람세스 II세의 통치 역사와 관련하여 묘사했다. 비록 람세스 II세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을지라도 그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그 전투로 인해 헷족은 다소 이득을 얻었다. 이러한 결론은, 카데쉬 전투 후에 헷족이 이전에는 자신들의 종주권 하에 있지 않던 수리아 영토를 차지했다는 사실로부터 내려진 것이다.


 애굽과의 우호 관계

 그 다음 헷 왕 우르히-테슈브(Urhi-Teshub)는 7년 동안 무사히 통치했으나, 그 무렵에 스스로 왕이 되어 자신을 핫투쉴리쉬 III세(Hattushilish III)라고 일컬은 그의 삼촌에 의해서 폐위되어 추방되었다. 애굽과의 관계는 그의 치세 처음 몇 해 동안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헷 왕이 바벨론 왕 카다쉬만-투르구(Kadashman-Turgu)에게 보낸 편지로 알게 되었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바벨론이 애굽에 너무 우호적인 것에 대하여 바벨론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애굽과 친선을 도모하여 람세스 II세 제21년에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두 국가 간에 긴밀한 협력의 시대가 열렸으며, 13년 후에 람세스 II세와 핫투쉴리쉬의 딸과의 결혼에 의해서 그 협력이 강화되었다. 헷족은 에게해의 백성들 간의 불안한 동요를 다가오는 악의 전조로 보았을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동부 및 남부 이웃들-바벨론의 카스인(Kassite) 통치자들 및 애굽인들-과 우호 관계를 열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방책들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애굽도 바벨론의 카스인들도 헷족이 소아시아, 수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통과하여 나아가는 해양 백성들의 저항할 수 없는 전진에 희생되지 않도록 할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세 명의 헷 왕들, 즉 투탈리야 IV세(Tuthaliya IV), 아르누완다 IV세(Arnuwanda IV), 그리고 그의 후계자는 비교적 연약한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의 치세에 관하여 빛을 던져줄 만한 문서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리아에 있는 봉신 왕국 아무루와 맺은 한 조약은 앗수르 상품들의 통상을 정지시켰고 앗수르 상인들이 그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앗수르가 이제는 우세해져서 적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 준다. 애굽의 메르넵타는 투탈리야 IV세의 치세 중에 있은 극심한 기근 동안에 곡식을 선적하여 보내줌으로 헷족을 도왔다. 그러나 헷족의 세력은 이제 과거의 것이었으며, 그들의 몰락은 더 이상 연기될 수 없었다.


 헷 제국의 몰락

 BC 1200년경에 큰 재난이 헷 제국에 갑작스런 종말을 가져왔다. 이것은 바로 그 때에 모든 헷 문서 자료들이 갑작스럽게 중단된 것과 “핫티가 황폐되었다”는 애굽의 진술문에 의해 입증된다. 방금 북쪽 나라들을 통해 급류처럼 쏟아져 들어온 해양 백성들을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이 하나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러한 관찰과 일치하며, 아나톨리아의 성읍들은 적들의 침략을 받은 후 이때에 불탔음을 보여 준다.

 비록 이전에 속국이었던 북부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의 도성 국가들이 BC 9세기에 앗수르인들에게 모두 흡수될 때까지 몇 세기 동안 헷족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갔으나, 헷족의 문화와 정치적 영향력은 헷 제국의 소멸과 함께 소아시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론테스강 유역의 하맛, 유브라데강 유역의 갈그미스 그리고 케이한 강(Ceyhan River) 유역의 카라테페(Karatepe)와 같은 도성들은 헷족의 문화와 함께 토착의 아람 문화 혹은 심지어 베니게 문화가 균형지게 잘 혼합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도성들은, 솔로몬이 활발하게 교역을 했고(대하 1:17), 엘리사 시대의 수리아인들이 사마리아의 포위 공격을 해제할 때 그들이 두려워했던(왕하 7:6, 7) 헷 국가들이었다. 이 도성 국가들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앗수르 기록들에서도 헷 왕국으로 불린다. 사실상 수리아 전체가 헷 제국 시대의 앗수르어 표현으로는 헷 나라로 알려졌다. 북부 수리아의 도성들이 BC 9세기와 8세기에 앗수르인들에 의해서 정복되어 파괴되고 그 주민들이 추방되었을 때 헷족의 문화, 언어, 문자들에 관한 모든 지식이 완전히 사멸하였다가 최근에야 2,500여 년간의 긴 잠에서 부활했다.


 Ⅴ. 해양 백성들의 발흥과 성장(BC c. 1400~c. 1200)


 메르넵타와 람세스 III세 시대의 애굽 자료들에 언급된 해양 백성들은 이 애굽 왕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그리고 헷 제국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 백성들에 관한 우리의 자료들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단지 호메로스(Homer)에 의해 보존된 전설들, 그들에 대한 애굽인의 언급들, 약간의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성경의 몇 진술들뿐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여러 애굽 문서에서는 해양 백성들이라는 이름이 루기아인들(Lycians), 아가야인들(Achaeans), 사르디니아인들(셰르덴), 시칠리아인들(시쿨리[Siculi]), 다내아인들(Danaeans), 웨쉬웨쉬(Weshwesh), 테우크리아인들(Teucrians, 티엑케르[Tjekker]), 그리고 블레셋인들(펠레셰트[Peleshet])을 가리키는 집합명사로 나타난다.

 애굽은 그레데, 에게해의 섬들, 그리고 헬라 본토의 백성들과 약간의 관계가 늘 있었는데, 이것은 그 지역들에 애굽의 물품들이 존재하고 애굽에 에게의 토기들이 존재하는 사실을 볼 때 확실하다. 애굽에서는 아멘호텝 III세의 시대까지 그레데산(産) 토기가 다른 헬라 지역들의 토기보다 더욱 빈번하게 발견된다. 또한 이 시대까지 유럽에서 발견된 애굽 물품들의 대부분이 그레데에서 나타난다. 아멘호텝 III세 후로는 그레데와의 관계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애굽 물품들은 그레데에서는 오직 두 곳에서만 발견되는 반면, 헬라 본토와 다른 섬들에서는 일곱 곳에서 나타나고, 이것은 그 지역들과 더욱 강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레데에서 나오는 고고학적 증거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마노아 II기(Manoan II)라고 불리는 그레데의 풍요한 문화는 크놋수스(Cnossus)의 거대한 궁전의 파괴로써 끝났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BC 1400년과 1350년 사이에 발생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침공해 들어오는 민족들의 더 원시적인 문화가 이 파괴에 뒤따랐다.

 아틀란티스(Atlantis)의 강력한 해상 세력의 멸망 혹은 소멸에 관한 호메로스의 전설들은 이 미지의 침입자들 앞에 쓰러진 그레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침입자들은 다른 헬라 부족들을 지배한 그레데의 세력뿐만 아니라 그 문화까지 파괴시켰다. 이 사건은 또한 헬라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에 관한 전설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그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 헬라 신화에서 사람 몸에 소머리를 가진 괴물-역자 주)가 빠져 있던 미로(迷路)를 설치한 그레데의 미노스(Minos)의 억압에서 헬라인들을 해방시킨 영웅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게해의 속국들은 단결하여 그들의 긴 배들을 가지고 매우 오랫동안 애굽 및 다른 나라들과의 수지맞는 무역을 독점해 오던 미노스의 갤리선(galley 船)들과 싸운 것은 확실하다. 그레데 함대가 파괴된 결과로 풍요한 그 섬이 침략을 받아 그곳의 문화가 파괴되었다. 그때부터 중부 지중해의 무역은 에게해의 백성들, 특히 소아시아 연안과 헬라 본토 백성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해양 백성들의 이주

 그러나 백성들의 이주는 그레데의 파괴와 점령으로 멈추지 않았다. BC 13세기에 이르러는 헬라어를 말하는 백성들이 소아시아의 서부 연안들을 공략을 하여 영구적으로 점유했으며, 람세스 II세의 말년에는 해양 백성들과 리비아인들이 서부 삼각주 지역에 들어와서 거의 멤피스(Memphis)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성문들까지 그들의 정착지를 확장했다. 람세스 II세의 아들인 메르넵타는 이 백성들의 대량 침략을 직면해야만 했으나 그들을 패배시키고 애굽을 이 서부의 위협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해양 백성들에 의한 중부 아나톨리아의 대침략이 일어난 것은 바로 메르넵타의 시대였다. 이 침략은 헷 제국의 종말과 우가릿(라스 샴라[Ras Shamra])과 같은 부요한 북부 수리아 도성들의 멸망을 단락지었다. 구브로도 이 서부의 침략자들에 의해 점유되었다. 이 백성들을 두 번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시킨 람세스 III세가 그들의 위협을 어떻게 모면했는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블레셋인

 나일 지방을 점유하려는 이 시도들이 실패한 후 애굽인에 의한 대량 학살을 피하고 포로가 되지 않은 대부분의 침략자들은 서부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티엑케르인들과 블레셋인들은 그 지방에 머물렀다. 블레셋인들은, 팔레스타인의 남부 연안 지역에서 수 세기 동안 살아온 것이 분명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어떤 부족들을 거기서 만나(참조 창 21:34; 26:1; 출 13:17, 18), 그들의 군사적 힘을 꽤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블레셋인들이 예전에는 아브라함 및 이삭과 조약을 맺으려고 애쓸 정도로 약했고(창 21:22~32; 26:26~33), BC 12세기 이전에는 애굽의 기록들에 그들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팔레스타인의 산간 후배지를 점유한 이스라엘인들에게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블레셋인들이 그레데를 침입하여 그곳의 고대 문화를 파멸시킨 백성들 중의 일부였음이 명백하다는 사실은, 블레셋인들을 “갑돌[그레데] 섬에 남아 있는” 자로 부르는 예레미야 47장 4절이나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올라오게 했다고 말하는 아모스 9장 7절과 같은 본문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다른 본문들(삼상 30:14; 겔 25:16; 습 2:5)은 그렛[그레데]인들과 블레셋인들이 동일한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한데 묶어놓는다. 체포된 블레셋인들과 사르디니아인들 그리고 다른 해양 백성들을 그의 군대의 병사들로 삼았던 람세스 III세의 관례와 비슷하게, 다윗은 “그렛 사람”“블렛 사람”, 즉 그레데인들과 블레셋인들로 이루어진 호위병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삼하 15:18; 왕상 1:38, 44). 사실상 이 외국인 용병들과 가드에서 온 600명의 블레셋인들(삼하 15:18)만이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에게 충성되게 남아 있었던 병사들이다.


 Ⅵ.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기의 이스라엘(BC c. 1350~c. 1050)


 BC 제2천년기 후반부 동안의 앗수르와 바벨론의 역사는, 이 나라들이 그 기간 동안 서부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후기의 역사와 관련하여 논의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기와 그들이 사사들의 통치를 받거나 적국의 압제를 받던 기간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국가들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성경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연구할 차례이다. 이 기간 동안 가나안 군소 국가들의 역사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별도의 항목들로 다루기보다는 적절한 지점에서 언급할 것이다.


 이 기간의 연대

 가나안 점령과 히브리 왕정(王政)의 확립 사이의 시기는 사사 시대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의 연대는 솔로몬의 사망 연도에 따라 정해진다. 이 주석이 기준으로 삼는 연대기(제4권의 논문 “출애굽부터 바벨론 유수까지의 성경 연대기”를 참조하라)는 솔로몬의 사망을 BC 931/930년에 둔다. 히브리 달력은 가을에서 다음 가을까지를 1년으로 하므로 솔로몬이 사망한 때는 BC 931년 가을부터 930년 가을 사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가 재위 제4년의 봄인 시브월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왕상 6:1)는 BC 967/966년이었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966년 봄이었다(참조 제2권, 96).

 이때는 출애굽 후 480년째 되는 해였다(왕상 6:1). 따라서 출애굽 첫 해의 시브월은 479년 앞인 BC 1445년 봄에 있었으며, 출애굽은 그 앞의 달(1445년 아빕월)에 있었고, 요단강을 건넌 일은 그로부터 40년 후(수 5:6, 10)인 BC 1405년에 있었다.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 중에서 40년은 사울의 통치에 해당하는 몫으로(행 13:21), 40년은 다윗의 통치에 해당하는 몫으로(왕상 2:11), 그리고 4년은 솔로몬의 통치에 해당하는 몫으로 빼야 한다. 480년에서 이 84년을 빼면 사울의 대관식은 출애굽으로부터 396년째 되는 해, 즉 가나안 침공으로부터 356년째 되는 해에 있었던 것이 되고, 따라서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까지의 기간은 BC 1405년~1051/1050년이 된다.

 또 다른 연대기적 쐐기는 입다가 사사로서 봉사를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향촌들 ...에 거한 지 300년”(삿 11:26)이라고 한 진술이다. 이 300년은 모세의 생애의 마지막 해 동안에 그의 지도 하에 이 지역을 정복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참조 신 2:26~37). 이 진술은,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돌라 그리고 야일의 사사로서의 임기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압제의 기간들과 함께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지도 하에 있었던 정복 기간이 모두 가나안 정복과 입다 시대 사이의 300년에 포함될 것을 요구한다.

 이 기간들을 300년 안에 짜 맞추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사들은 동시대에-아마도 한 사사는 요단강 동편에서, 다른 사사는 서부 팔레스타인에서 혹은 한 사사는 북쪽에서, 다른 사사는 남쪽에서-통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지파들은 그 땅의 한 지역에서 안식과 안전을 누리고 있는 때에, 다른 지파들은 압제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은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서 거둔 승리로 인해 끝이 난,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한 압제(삿 4장)에서 볼 수 있다.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에서, 여러 지파들이 그 압제자의 폭정에서 해방되기 위한 싸움에 그들의 형제들을 돕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삿 5:16, 17). 이 지파들은, 에훗이 모압인들과 아말렉인들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한 후 80년 동안 그러했듯이, 그들 자신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동안은 아마도 목숨을 거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의 연대기적 진술들에 의하면, 입다로부터 사울의 대관식까지의 기간은 57년이다. 입다가 암몬인들의 18년 압제를 끝내며 동쪽에 있는 지파들을 통치하는 동안, 블레셋인들은 서쪽에 있는 지파들을 압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로에서 300년 동안 있었던 법궤를 엘리 때에 포획했다(부조와 선지자, 514,). 이와 같은 블레셋의 압제 기간 동안 삼손은 그 이방인 압제자를 괴롭혔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삿 13:5) 시작했다. 아마 사무엘도 삼손과 동시대인이었을 것이며, 삼손은 남서쪽에서 활동했고, 사무엘은 중앙 팔레스타인의 산지에서 활동했을 것이다(삼상 7:16, 17).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현명하게 인도한 마지막 사사였다. 첫 왕 사울이 선택되기 전 오랜 기간 그는 그의 백성의 단독 지도자였다(부조와 선지자, 591,).

 이 시기의 비교적 확정된 애굽의 연대기와 성경의 연대기의 여러 주요 연도들로 인하여 사사 시대의 연대를 실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대조 연대표를 얻게 되었다.


 가나안의 백성들과 그들의 문화

 팔레스타인의 최초의 원주민은,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의 이름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셈 계통이 아닌 민족이었다. BC 제2천년기 말엽에 아모리인들이 가나안에 침입하여 수 세기 동안 그 땅의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 초기의 헷족에 관해서는 그들의 후기 제국 시대로부터 유래하는 문서들에서 그 흔적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인데, 그들 역시 후르족이 그랬듯이 팔레스타인의 어떤 부분들, 특히 남부에 정착하였다. 창세기 10장 15~19절에서 가나안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 열한 백성들 중에서 헷족과 아모리족은 이미 언급되었다. 다른 백성들 중에서 여섯은 수리아와 베니게에 살았다. 즉 시돈족과 스말족은 해변에 살았고, 아마르나 편지들에 언급된 아르크족(Arkites)은 이르카타(Irqata)를 수도로 하여 트리폴리(Tripoli)의 북쪽에 살았으며, 신족(Sinites)은 그들의 수도가 시안누(Siannu)로 앗수르인들의 기록들에 언급되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르바드족(Arvadites)은 그들의 수도가 북부 베니게에 있었고, 하맛족(Hamathites)은 수리아의 내륙에 있었다. 나머지 세 가나안 족속들, 즉 여부스족, 기르가스족, 히위족에 관해서는 성경 외의 자료들에서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고대의 위대한 두 문명-남쪽의 애굽과 북쪽의 메소보다미아-사이에 위치한 땅에 살고 있던 이 모든 백성들은 그 땅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는 히브리인들이 침입할 당시 이미 수세기 동안 애굽의 정치적 지배 아래 살아 왔지만, 메소보다미아의 문화적 영향이 애굽의 문화적 영향보다 더 강했다. 이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인종적인 유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백성들은 바벨론과 앗수르에서 사용된 언어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셈 언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대군주들의 문화보다는 동쪽의 문화와 더 밀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 언어와 문자가 서로 다른 도성의 통치자들 사이와, 그들과 애굽 궁정 사이의 모든 서신 거래에 사용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동쪽 이웃 나라들에서처럼 그들에게도 점토판이 필기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 필기술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설형문자로 된 문건들이 세겜, 다아낙, 텔 엘-헤시(Tell el-H.esi) 그리고 게셀과 같은 여러 팔레스타인 발굴지들에서 발견된다는 사실과, 비록 애굽에서 발견되기는 했을지라도 원래는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에서 온 수백 통의 아마르나 편지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사사 시대의 잠정적인 연대기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애굽 왕들 헷 왕들
제 18왕조
가나안 침공 1405 아멘호텝 III세 1412~1375 핫투쉴리쉬 II세
여호수아와 장로들 치하의 이스라엘 1405-1364 이크나톤, 스멘크카레 1387~1366
투탈리야 III세
아르누완다 II세
옷니엘이 구산-리사다임의 8년 간의 압제로부터 해방함 1356 투탄카멘, 에예 1366~1353 슈빌룰리우마
40년의 안식 1356~1316 하름합 1353~1320  
제 19왕조
   
아르누완다 III세
무르쉴리쉬 II세
  람세스 I세 1320~1319  
  세티 I세 1319~1299  
에훗이 18년간의 모압인의 압제로부터 해방함 1298 세티의 팔레스타인 원정 1319  
  람세스 II세 1299~1232 무탈루
남쪽과 동쪽 지파들의 80년 간의 안식 1298~1218 카데쉬 전투 1295  
북쪽에서 야빈의 20년간의 압제 후 드보라와   우르히-테슈브
바락이 해방시킴 1258   핫투쉴리쉬 III세
7년간의 미디안 입제로부터 기드온이 해방함 1211 메르넵타와 다른 연약한 왕들 헷 왕국의 종말 1200년경
  1232~1200  
제 20왕조
기드온의통치 1211~1171 람세스 이세 1198〜1167  
세겜에 대한 아비멜렉의 왕권 1171~1168 해양 백성들에 대항한 전쟁 1194~1191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1168~1074 람세스IV~XI세 1167~1085  
클레셋 압제의 시작 1119    
제 21왕조
삭손의 공적 1101~1081    
컵궤를 빼앗김, 엘리의 죽음 1099    
계벤에셀 전투, 블레셋의 패배 1079 (애굽의 왕들로서의 아멘의 대제사장들)  
  1085~950  
사사사무엘 1079~1050    

 또한 부조 시대 말엽에 아마 시내 반도의 광산 지역에서 발명된 새로운 알파벳 문자(참조 제1권, 118, 674)가 지금 논의중인 이 기간에 퍽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알파벳 문자로 기록된 짧은 명각들이 라기스, 벧-셰메쉬(Beth-shemesh), 세겜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새로운 문자로 글을 쓰고 싶어했고 또한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이 문자를 선호한 것은 어렵고 귀찮은 설형문자나 수백 개의 글자들을 가진 상형문자보다 이 새로운 문자가 명백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으로 들어가기 이전 시대에 속하는 팔레스타인 도성들을 발굴해 보면, 그 주민들이 특히 도성 방어 공사나 바위 터널 건설에 있어서 높은 수준의 기능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부스족은 예루살렘 성읍 안쪽에 도성 밖으로 꽤 거리가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과 같은 수준의 깊이까지 수직적인 수갱(竪坑)을 팠다. 그들은 이 수갱의 바닥에서 그 샘까지 수평적인 수로를 팠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비상시에 그 도성을 떠나지 않고도 그 수로를 통해 샘으로부터 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견고한 바위를 깎아내 만든 약 67미터 길이의 거대한 계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수로 터널이 게셀에서도 발굴되었다. 이 터널은 입구의 높이가 약 7미터이고, 폭이 약 4미터이지만, 끝부분에 이르면 매우 가늘어진다. 그 지붕은 원통형이며, 경사진 계단들에 이어져 있다. 그것은 바위 표면 아래로 약 29미터, 그리고 현재의 표면 고도로부터 약 39.5미터 밑에 있는 큰 샘에서 끝난다. 연장들이 낸 자국들은 그 작업이 부싯돌 연장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단편(斷片)들을 분석해 보면 그 터널은 히브리인들이 침입한 지 오래지 않아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게셀 주민들이 터널 끝에서 힘있게 솟는 샘과 마주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신비이다.

 히브리인들이 침입할 당시 가나안인들의 높은 수준의 물질 문화를 증거하는 이 공학적 위업들은 근래에 밝혀진 가나안인들의 많은 업적들의 실례들이다.


 가나안인의 종교와 예배 행습

 비록 이스라엘 시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즈음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미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은 매우 비열한 것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의 신전과 신성시된 장소들의 발굴로 가나안에서 유래된 예배 대상물들(cult objects)이 출토되었다. 고대의 우가릿인 랴스 샴라에서는 신화적 성격의 가나안 문서가 많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알파벳식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BC 제2천년기 중반의 가나안 사람들의 언어, 시, 그리고 종교에 관해 많은 빛을 던져주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이 침입하여 정복한 그 땅의 종교에 관한 우리의 주된 정보의 자료를 이룬다.

 팔레스타인에는 성경에서 바모트(bamot), 즉 “산당”(high places)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옥외 성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산당들”에 매혹되어 그것들을 접수하였고, 하나님은 한 장소, 즉 성소가 위치할 곳에서만 경배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신 12:5, 11)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여러 선지자들이 이 이교 예배 장소들을 비난했으나(렘 7:31; 19:13; 32:35; 호 4:12, 13, 4; 10:8; 암 2:8; 4:4, 5), 백성들에게 그곳들을 단념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아마샤, 웃시야, 그리고 요담과 같은 몇몇 가장 선한 왕들조차도 그것들을 파괴하지 않았다(왕하 14:3, 4; 15:4, 34, 35).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잘 보존되었다가 발굴된 산당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과 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게셀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은 건축 활동의 흔적이 전혀 없는 개활지(開豁地)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개의 동굴이 있었으며, 그중 몇 개는 재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뼈들은 남자, 여자, 어린이, 영아, 소, 양, 염소 그리고 사슴의 뼈이므로, 그것들은 아마도 희생 제물의 유해일 것이다. 그 동굴들 중 두 개는 좁고 꼬불꼬불한 터널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중 하나는 문의하는 예배자가 신탁(神託)을 듣는 신성한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작은 동굴에서 속삭인 말은 모두 큰 동굴에서 분명히 들을 수 있다. 두 동굴을 연결하는 벽에 있는 구멍 앞에는 아마 우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예배 대상물이 한때 서 있었고, 그 예배자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슷한 신탁 장소들이 헬라와 메소보다미아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된 동굴 중앙에 큰 바위덩이가 있었고, 그 위에 한 영아의 해골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희생된 아이의 유해인 것 같다.

 지상에서는 일렬로 서 있는 열 개의 돌기둥이 발견되었다. 이 기둥들 중 키가 가장 큰 것은 높이가 거의 3미터 35센티미터이고 가장 낮은 것은 약 1미터 70센티미터이다. 히브리어로 이러한 돌기둥은 맛체바(mas.s.ebah), “주상”(참조 레 26:1; 신 16:22; 미 5:13)이라고 불리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기둥”(pillar, 「개정표준역」)이다. 이러한 기둥들이 태양 숭배와 관련되었는지, 또는 “신성한” 팔루스 에렉투스(phallus erectus)3)를 나타내는 다산(多産)의 상징이었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개의 제단들이 또한 산당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 바위 바닥에는 아마도 헌주(獻酒, libation) 또는 “전제”(奠祭, drink offerings)를 받기 위해 사용했을 컵 모양의 많은 구멍이 있었다.

 잘 보존된 또 다른 산당이 에돔인들의 수도인 페트라(Petra) 근처의 산들 중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비록 이 신성한 장소는 훨씬 후대(BC 1세기)의 것일지라도 아마 이전 시대의 비슷한 장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큰 제단이 원석을 깎아 만들어졌다. 6단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화로(火爐)가 나온다. 제단 앞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큰 뜰이 있고, 돋워진 대(臺)가 중앙에 있는데 그곳에서 희생제물을 도살했다. 목욕 재계 예식과 관련하여 사용하기 위해 거의 정사각형인 물 탱크를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다. 이 산당에도 전제를 붓기 위한 특유의 컵들이 있었으며, 근처에 방첨탑 모양의 기둥들이 서 있었는데,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 산당은 불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나안인의 신전들이 므깃도와 벳산과 같은 팔레스타인 도성에서도 발굴되었다. 이 신성한 구조물에는 보통 두 개의 방이 있는데, 예배의 대상물인 우상이 원래 서 있던, 높은 단을 가진 내실은 주된 성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가나안인의 예배는 신전과 산당에 한정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수많은 작은 돌 제단들은 백성이 희생제물을 바치던 개인적인 사당들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돌 제단은 보통 한 덩이의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 화로는 윗 부분에 있었으며, 네 개의 뿔이 네 모서리에 있었다. 예배 대상물이 팔레스타인의 발굴지마다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것들 대부분은 성적 특징이 두드러진 나체(裸體)의 여신을 나타내는 소상(小像)들인데, 이것은 그것들이 가나안인의 예배의 중심을 이루던 다산(多産) 종교와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가나안의 신들

 가나안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의 선두에는 엘(El)이 있었는데, 이 신은 “세월의 아버지”(father of years) 또는 “사람들의 아버지”(father of men)라고 불렸고, 황소로 상징되었다. 그는 위계가 가장 높은 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늙고 지쳤으며, 따라서 나약하고 쇠약하다고 생각되었다. 후대의 베니게인 학자, 비블로스의 필론(Philo)에 의하면, 엘에게는 세 아내,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 아세라(Asherah) 그리고 바알티스(Baaltis, 아마도 아나트[Anath]일 것임)가 있었는데, 그들은 동시에 그의 누이들이었다. 우가릿 문서들에서도 아세라는 엘의 아내로 확인되고 있다.

 바다의 후견인인 아세라는 일반적으로 “바다의 아세라”(Asherah of the Sea)로 불리지만, 가나안과 애굽에서 공히 “신들의 여창조자”(creatress of the gods)와 “성하”(聖下, Holiness)로도 불린다. 그녀는 그림이나 부조(浮彫)에서 보통 사자 위에 서서 한 손에는 백합화, 다른 손에는 뱀을 잡고 있는 아름다운 나체의 창녀로 나타나 있다. 그녀는 나무 줄기(왕하 17:10; 「제임스왕역」에는 “작은 숲들”[groves])로 상징되어 숭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스라엘인들 사이에 쉽게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아세라에게 바쳐진 예배 상징물들을 포로 이전 기간 동안 거의 계속해서 숭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통탄스러운 배도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가나안 여신은 “임신은 하지만 출산은 하지 않는 위대한 여신” 아스타르테, 히브리어로 아쉬토레트(‘As∨toret)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방패와 창을 휘두르며, 질주하는 말에 나체로 걸터앉아 있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블로스의 필론에 의하면, 베니게인들은 그녀에게 포쏘스(Pothos, “성욕”[性慾])와 에로스(Eros, “성애”[性愛])라는 이름을 가진 두 아들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투박한 형태의 아스타르테 각판(刻板)들이 팔레스타인 발굴지들에서 많이 나오지만, 그것들이 초기 이스라엘 지층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벧엘, 기브아, 텔 엔-나츠베(Tell en-Nas.beh) 그리고 실로에서 수행된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사실은 초기의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인들의 우상들을 기피했음을 보여 준다.

 가나안인들의 세 번째 주된 여신인 아나트는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부도덕하고 피에 굶주린 신이다. 그녀가 자신의 오라비 바알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가나안 신화에 항구적인 주제가 되었으며, 심지어 애굽인들의 문학에도 침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동정녀”로 불렸는데, 이것은 처녀성에 대해 가나안인들이 갖고 있었던 타락한 관념에 기초한 이상한 칭호이다. 그녀의 피에 대한 굶주림은 만족을 몰랐으며, 그녀의 전쟁 공적들은 많은 문서에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동쪽과 서쪽의 백성들을 쳤고, 곡식 단 모양처럼 머리와 손을 베어 버려 그들이 메뚜기처럼 날아다녔다는 주장이 나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기사(騎士)들의 피에 무릎이 잠기고 영웅들의 핏덩이에 엉덩이가 빠진 채로 기뻐 날뛰면서 그 머리들을 그녀의 등에, 그 손들을 그녀의 허리띠에 묶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에서 너무나도 많은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의 간이 웃음으로 부풀어올랐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들을 죽이는 일도 즐겼다. 예를 들면 모트(Mot) 신이 죽은 것도 그녀가 한 일로 여겨졌다. 그녀가 모트 신을 칼로 쪼개고, 부채로 까불러 불 속에서 태운 후 손 맷돌에 갈아 마침내 들판에 뿌렸다.

 바알은 비록 주신(主神)은 아닐지라도 가나안 만신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신인 엘의 아들이요 아나트의 오라비로 간주되었다. 그는 번개, 천둥 그리고 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사 목적을 위해 전적으로 비에 의존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 그가 산출력(産出力)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건기의 초기에는 바알이 악한 신 모트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마도 첫 강우 때에 있었던 연례적인 그의 부활 축제는 큰 기쁨과 축제의 기회였다. 바알은 우가릿의 모든 신화적인 시와 사실상 모든 종교적인 문학의 주된 인물이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로 돌아섰을 때,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함으로써 바알의 무력함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바알 숭배의 도입은 그들의 땅의 산출력을 증가시키지 않고 사실상 기근을 가져온다는 것을 배우도록 계획하셨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이 비의 신으로서 무력하다는 사실, 실제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결론적인 논증을 제시했다.

 이름이 언급된 이 신들 외에도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기능을 가진 많은 다른 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인들의 복합된 종교, 가나안 신들의 여러 가지 업적들, 그들의 피에 대한 갈망, 그들의 악덕과 부도덕한 행위들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대충 살펴보는 것 이상으로 더 다룰 수가 없다. 그런데 가나안 종교란 단지 그 백성의 도덕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만족하자. 어떤 백성도 그들의 신들보다 그들이 더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를 수는 없다. 만약 신들이 근친상간, 간음 그리고 음란을 행한다면, 만약 그들이 유혈과 분별 없는 살인을 무척 기뻐한다면, 그들을 예배하는 자들은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전들에서 남녀간의 의식상 매춘이 행해졌고, 이 “신성한” 집들에서 동성연애자들이 인정된 조합을 형성했으며, 축제일들에는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부도덕적인 주신제(酒神祭, orgies)가 신전과 산당들에서 행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다. 화가 난 신을 달래기 위해 영아들이 제단에서 희생되거나 산 채로 매장되었고, 뱀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가나안인들은 비탄과 애통의 때에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자신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일, 즉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는 금지된 풍습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알게 된다(레 19:28; 신 14:1).


 가나안 종교의 영향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적 사상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넘겨주기를 거절하여 이세벨의 손에 죽음을 당한 나봇의 이야기에 의해 잘 예증된다(왕상 21장). 아합의 요구를 나봇이 거절하자 그 왕은 감정이 깊이 상하여 비통하게 되지만 나봇에 대항하여 어떤 일을 행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베니게 공주요 바알과 아세라 같은 가나안 신들과 여신들을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그의 아내는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을 즉시 제안했다.

 우가릿 문학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여신 아나트(Anath)는 아크하트(Aqhat)의 소유인 아름다운 활을 몹시 갖고 싶어했다. 그녀는 아크하트에게 금과 은을 대가로 받고 활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아크하트가 이를 거절하고 그녀에게 스스로 하나를 만들라고 조언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영생을 약속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전혀 소용이 없자 아나트는 그를 죽일 음모를 꾸며서 탐내던 활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세벨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 이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들에 관해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도는 환경에서 교육을 받은 한 여인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슷한 수단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나안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도록 이스라엘은 명령을 받았다. 가나안인들의 예배와 연관된 종교 및 부도덕성을 이해하게 될 때, 그런 것을 행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이 왜 그렇게 엄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넘

 성경 비평가들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신화이며 그토록 엄청난 무리가 건너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그 강이 흐름을 멈춘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사실상 역사는, 지난 700년 동안 적어도 두 경우에 요단강이 갑자기 흐름을 멈추고 수 킬로미터의 하상(河床)이 수 시간 동안 말라 있었다고 기록한다. AD 1267년 12월 8일, 전날 밤 지진의 결과로 다미에(Damieh) 맞은편의 서쪽 제방 큰 부분이 강으로 떨어져 16시간 동안 완전히 그 흐름을 막아버렸다. 이곳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일어나 쌓”였던(참조 수 3:16 주석) 바로 그 위치이다.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서 멀지 않은 성경상의 도성 아담(Adam, 아다마[Adamah])인 텔 엣-다미예(Tell ed-Damiyeh) 근처에서 강 계곡이 협곡으로 좁아지는데, 이런 일은 강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과 같은 사건을 비교적 쉽게 일어나게 한다.

 1927년 7월 11일에 그 강은 다시 말라버렸다. 격심한 지진으로 텔 엣-다미예의 얕은 여울 가까이에 사태가 발생하여 강의 서쪽 제방 한 부분이 옮겨져 21시간 동안 강의 흐름을 막아 텔 엣-다미예 인근 평야가 대부분 침수되었다. 마침내 이 물은 평상시의 운하로 되돌아갔다. 이 두 경우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보려면, 존 가스탱(John Garstang)과 J. B. E. 가스탱의 저서 여리고의 이야기(The Story of Jericho, [1940]), 136, 137과 D. H. 콜너-아미람(D. H. Kallner-Amiram)의 논문이 게재된 Israel Exploration Journal 1 (1950~1951): 229, 236을 참조하라.

 이 증거에 비추어 비평가들은 입장을 바꿔 이제는 틀림없이 여호수아 당시의 요단강의 그 기적을 단지 하나의 자연 현상, 곧 지진의 결과로 처리하고 싶어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설명도 하나님이 기적들을 행한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더 낫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지진이 발생하여 그 강의 상류 약 32킬로미터 지점을 막을 것을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을까?”라고 묻고 싶다. 심지어 더욱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어떻게 그가 그 지진이 일어날 정확한 순간을 알 수 있었기에 그 물이 흐르기를 멈출 바로 그때 제사장들의 발이 강의 제방에 닿을 수 있게(참조 수 3장) 법궤를 멘 그들을 전진하도록 지시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성경 비평가들은 지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또는 그들이 지진이 일어날 시각이나 날을 예언하거나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그것의 영향을 조절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아니오”이다. 그리고 “아니오”라고 울려 퍼지는 이 대답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단순한 성경의 진술에 대한 그들의 어리석은 반대들을 영원히 지워버린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켰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땅을 흔들어 그것을 떨게 만든다(시 60:2; 사 2:19, 21)는 것과 그 요소들이 그의 뜻을 성취한다(시 148:8)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땅의 흔들림이, 비록 사람들에 의해서는 지진으로 묘사될지라도, 이 요단강의 경우에는 진실로 기적이다.


 여호수아의 지도 하의 가나안 침입

 여리고는 침입하는 히브리인들의 길을 가로막는 첫 번째 도성이었다.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는, 중세 이래로 현대의 여리고에 가깝고 요단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토루(土壘) 텔 엣-술탄(Tell es-Sult.an)과 동일시되어 왔다. 그 도성의 고대 폐허를 발굴할 때 존 가스탱 교수는, 그가 지진 탓으로 돌리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여 주는 성벽들의 잔해를 발견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는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폐허를 발견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0년대에 캐쓸린 M. 케년(Kathleen M. Kenyon) 박사의 지휘 하에 더 진행된 발굴은 그 성벽들을 좀 더 이른 세기의 것으로 지정하는 증거를 내놓았으나, 도성 밖에 있는 가옥의 일부분과 무덤들 속의 약간의 토기 외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유물을 하나도 발굴하지 못하였으며, 이 토기들은 14세기에 그곳에 매장되었음을 시사한다.4) 불행하게도 그 토루의 상층은 특히 침식으로 인해 너무나도 심하게 파괴되어 왔기 때문에 차후의 유물은 사실상 흔적조차 없게 되었다. 그 장소가 여리고의 함락에 관한 성경 이야기(수 6장)에 빛을 비출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할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이 정복한 첫 도성인 여리고가 가나안인들이 자초(自招)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결과로 함락되었음을 알고 있다. 견고하게 요새화된 그 도성이 갑자기 파괴되고 그 안에 있던 것들과 주민들이-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모두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여리고의 함락 후에 탈취한 그 다음 도성은 작은 성읍인 아이였다(수 8장). 고고학자들은 아이를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유디트 마르케-크라우제(Judith Marquet-Krause) 여사의 지도 하에 세 차례 발굴된 엣-텔(et-Tell)의 폐허와 동일시했다. 하지만 성경은 아이를 여리고보다 훨씬 작은 곳으로 말하고 있는(참조 수 7:3) 반면, 발굴된 그 도성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가장 큰 도성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판단은 옳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발굴 결과에 의하면 엣-텔은 이스라엘인들의 정복이 있기 수세기 전에 파괴되었으며, 여리고가 이스라엘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이미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있어 왔다. 하지만 뱅상(Vincent)이 제안한 바와 같이, 그 도성의 폐허는 여호수아 시대에 소수의 인구를 위한 주거지로 사용되던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이라는 이름은 “폐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가 옳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 그 성읍의 진짜 위치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장차 발견될 수도 있다.


 중앙 가나안을 정복함

 여리고와 아이의 함락으로 가나안의 중앙부가 침입자들 앞에 전개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이 내륙으로 전진했을 때, 그들은 기브온 및 다른 도성의 주민들에게 속아서, 저들이 가나안의 주민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방금 전에 그들과 상호 원조 동맹을 체결했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도성들을 취할 수 없었으며, 기브온과 이스라엘의 동맹에 분개하여 이웃 도성의 왕들이 그들을 공격했을 때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수 9장).

 이전에 모세에 의해 주어진 명령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인들은 세겜으로 가서 제단을 쌓고, 석회를 바른 돌 기념비에다 율법을 새겼다(참조 신 11:29~32; 27:1~8; 수 8:32~35). 백성의 절반은 에발산에 서고 나머지 절반은 그리심산에 서 있는 동안, 모세에 의해 규정된 축복과 저주가 그들에게 낭독되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인들이 그 지방의 중앙에 있는 세겜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의 땅을 그들이 소유하기에 앞서 아무런 적대행위도 없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성경은 세겜을 항복하게 한 사건들에 관해 침묵하고 있지만, 바로 몇 년 후에 예루살렘의 왕이 바로에게 쓴 한 통의 아마르나 편지(289번)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어떻게 세겜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예루살렘의 왕은 하비루(히브리인들)가 너무 강하게 되었으므로, 아직은 그들에게 대항하는 그와 다른 왕들이, 세겜이 항복했듯이 그들의 도성들을 넘겨줘야 할 위험이 있다고 불평한다. 이 중대한 문구(文句)는 “라바야(Labaja)와 사크미(Sakmi [세겜]) 땅이 [모든 것을] 하비루[히브리인들]에게 준 후에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겜의 왕은 기브온인들의 전례를 따라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 항복한 그 도성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아모리인의 왕은 남부 팔레스타인의 다른 네 왕들과 동맹을 맺어 기브온을 취하려고 위협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기브온인들의 긴급한 탄원에 응하여 여호수아는 그 다섯 왕을 맞서 출정하였으며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낮이 길어졌던 아세가와 막게다의 기억할 만한 전투에서 그들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 다섯 왕은 여호수아의 수중에 떨어져 살해되었고, 계속되는 출정에서 남쪽의 많은 가나안 도성들을 취하였다. 하지만 패배한 주민들을 멸절시키거나 그들의 성읍을 점유하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다. 도리어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도성들을 취한 후 그것들을 그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요단강가의 길갈에 있는 진영으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수 10장).

 그 후에 북쪽에서 하솔 왕 지도 하에 적대적인 동맹에 대항하여 군대가 출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 결과로 있게 된 메롬(Merom, 훌레 호수[Lake Huleh]) 전투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한 번 승리했다. 비록 그들이 하솔을 완전히 파괴하고 도망하는 적들을 추격하기는 했지만 그 땅의 이 부분을 영구히 점유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고, 그들이 이미 남부 지방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들의 패배한 적들에게 넘겨주었다(수 11장).

 정복기 동안 수행된 다른 유일한 출정은 헤브론에 대항하여 싸운 갈렙, 드빌에 대항하여 싸운 그의 아우 옷니엘(수 14:6~15; 15:13~19; 삿 1:10~15),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싸운 유다와 시므온 지파들(삿 1:3~8)의 출정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출정 중에 취한 많은 도성들은 점유되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예루살렘(참조 삿 1:8, 21; 삼하 5:6~9), 다아낙(참조 수 12:21; 삿 1:27), 므깃도(참조 수 12:21; 삿 1:27), 게셀(참조 수 12:12; 왕상 9:16) 등등이다. 성경 기록은 또한 블레셋, 베니게, 그리고 북부 및 남부 수리아와 같은 지역 전체(수 13:2~6)가 점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가나안 정복, 점진적인 과정

 이와 같은 상이한 진술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정복기 동안에는 단지 발판을 얻기 위한 시도만 있었다는 것이다. 지역적인 여러 왕들과 연합 세력들은 서부 가나안에 정착하려는 히브리인들의 권리에 불만을 품고 겨루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의 성읍들은 그때 확실히 점유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인들이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그들의 성읍과 요새들로부터 이동시키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인들은 지난 40년을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보냈기 때문에 천막 거주자들로 가나안에 정착한 것을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가축을 위한 목초지를 찾을 수 있고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가나안인들과 같이 요새화된 성읍에 살고 싶은 열망이 없었다. 비록 여호수아가 그 지방을 12지파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 분배는 대체로 그 각 지역들을 그들이 완전히 점유하리라는 기대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여호수아 15장부터 21장에 주어진 목록들을 연구하면 분명히 나타나는데, 수 세기 후까지도 점유되지 않았던 많은 성읍들이 거기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더욱 강해짐에 따라 그들은 가나안인들을 속국으로 만들었고(삿 1:28) 마침내는 그들을 쫓아냈다.

 이 과정은 점진적이어서 수 세기가 걸렸으므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이전에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13장 19절에서 바울은 아마 여호수아부터 솔로몬까지의 이 긴 정복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최초기의 신약 필사본들에 의하면 이 본문은 “그가 가나안 땅의 일곱 국가들을 멸망시켰을 때, 그는 그들의 땅을 약 450년 동안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었다”(「개정표준역」)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땅 전부가 실제로 유업으로서 점유되기까지 약 450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성경적인 증거들을 종합해서 볼 때, 히브리인들의 점진적인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 상황은 아마르나 편지들과 그 기간 및 그 다음 수 세기 동안의 성경 밖의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증거들에 의해 지지받는다. 전체가 BC 14세기 전반에 기록된 아마르나 편지들은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훌륭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편지들 중 많은 것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며, 가나안인들의 견해에 따라 기록된, 그 지방에 존재하던 혼란 상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예루살렘 왕 압두-케바(Abdu-Kheba)의 편지들인데, 그는 애굽의 왕이 그의 원조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심하게 불평했다. 왜냐하면 하비루-아마 히브리인들(참조 창 10:21; 14:13주석)-가 그 지방에서 세력을 얻고 있는 한편, 그와 그 땅의 다른 지방 통치자들은 그들을 대항하여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지(271번)에서 그는 “내 주여, 왕은 당신의 땅을 하비루의 손으로부터 보호하소서. 그리고 내 주여,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종들이 우리를 쳐부수지 않도록 왕은 우리를 데리고 갈 병거들을 보내주소서”라고 썼다. 그의 모든 탄원이 수포로 돌아가 무기도 군대도 지원받지 못한 사실에 대한 유감을 토로하면서 그는 “왜 당신은 하비루를 좋아하시고, [충성된] 총독들을 싫어하시나이까?”(286번)라고 매우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바로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하비루가 왕의 모든 땅을 약탈하나이다. 만약 올해 [왕의 싸움에 왕을 돕도록 보내진] 궁수(弓手)들이 있다면, 내 주여, 왕의 땅들은 [본래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궁수들을 [보내지] 않으면 내 주 왕의 땅들은 잃어버린 바 될 것이옵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편지를 바로에게 읽어 줄 서기관에게 바로의 모든 팔레스타인 땅들이 잃어버린 바 되고 있으므로 왕에게 능변으로 그 문제를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몇 마디 개인적인 말을 덧붙였다.

 예루살렘의 왕 압두-케바의 편지들에서 따온 몇 개의 인용문-이밖에도 훨씬 더 많이 인용할 수 있지만-은 정복기 동안과 여호수아서에 묘사된 기간 직후에 가나안인들 자신이 그들의 지방의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나타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예루살렘, 게셀, 므깃도, 악고, 라기스 및 다른 도성의 왕들처럼 많은 가나안 왕들은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난 수 십 년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도성 국가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들의 날이 헤아려졌고 그들이 증오하는 하비루가 그들의 보좌와 소유를 취할 것이라고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편지들은 드러낸다.

 이러한 정황은 성경 기록들을 연구하여 얻을 수 있는 사실과 잘 부합한다. 하지만 아마르나 편지들에 나오는 왕들의 이름은 성경에 그 동일한 도성들의 통치자들로 언급된 것과는 같지 않다. 예루살렘의 왕은 여호수아 10장 1절에서는 아도니세덱으로 불렸으나 아마르나 편지들에서는 압두-케바이고, 게셀의 왕은 여호수아 10장 33절에는 호람이었으나 아마르나 편지들에서는 야파후(Yapahu)인 것 등등이다. 이 차이는 만약 시간 요소가 고려된다면 쉽게 설명된다. 그 지방으로 침입한 것이 BC 1405년에 시작된 직후 여호수아에서 언급된 가나안 왕들은 패배하여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반면에 아마르나 편지들에 언급된 왕들은 수년 후 히브리인들이 그 지방에 정착하여 여러 지역들을 차지하던 때에 살았다.

 예루살렘, 게셀, 므깃도 그리고 다른 도성들처럼 이미 언급된 몇몇 도성들은 히브리인들이 침입한 후 수세기 동안 본토 왕들이나 애굽 총독들의 수중에 머물러 있었음이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기록들에서도 입증된다. 예를 들면, 중요한 가나안 요새인 벧산은 여호수아에 의해 므낫세에게 할당된 도성들 중 정복되지 않은 도성으로서 사사기 1장 27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사실은 갓의 통치자가 벧산에 수비대를 갖고 있었다는 아마르나 편지(289번)의 언급에 의해 확실시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이 그 당시 그 도성을 차지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4세기 말엽에 애굽의 세티 I세는 그의 첫 번째 아시아 출정 동안 그 도성을 점유하여 신전들 내에 승전비들을 세웠다. 게다가 벧산의 폐허에서 근년에 발굴된 그와 유사한 람세스 II세의 석비와 BC 13세기의 다른 애굽 기념물들의 존재는, 이 도성이 히브리인들이 그 땅의 큰 부분들을 점유한 동안에도 오랫동안 애굽의 손에 머물러 있었음을 입증한다. 므깃도와 몇몇 다른 도성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사(士師)들의 시대

 약 300년에 걸친 이 시대는 사사기를 끝맺는 말(21:25) 가운데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때로 그 특징이 잘 묘사되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강함과 약함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산간 지역들에서 발판을 놓은 후에 그 지방의 국가들 가운데서 살았다. 그들은 실로에 성소를 세웠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대부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유목민처럼 텐트 속에서 살았으며, 그 지방의 성읍들을 거의 점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파 단위로 분열되어서 국가적인 통일성이 부족했으며, 그들에게 통일성이 있었더라면 그들 주변의 많은 적들에 저항할 힘을 가졌을 것이다. 드보라의 노래는, 심지어 위기와 절박한 필요의 때에도 어떤 지파는 그들 자신이 압제자들에게 침해를 받지 않았다면 괴롭힘을 당하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무관심하게 지냈을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인들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그 지방의 종교 및 예배 제도와 가까이 접촉하게 되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 백성의 대다수가 가나안 종교를 받아들였다. 반복된 배도의 기간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나약한 기간들 후에 따라왔는데, 이러한 상황은 더 강력한 적들에게 그들을 압제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고난의 기간에는 변함 없이 한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하나님의 백성을-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인도하여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았다. 동시에 그는 대개 군사적인 지도자였으므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파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모아서 압제받는 자들을 자유케 했다. 이 위대한 지도자들은 각각 “사사”(士師, judge) 즉 히브리어로 쇼페트(s∨opet.)로 불렸다. 이 칭호는 그 영어 단어가 암시하는 것 이상의 힘과 권위를 포함했다. 그들은 사법적 및 군사적 기능들뿐만 아니라 영적 및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했다.


 초기 사사들

 이 사사들 가운데 첫 번째는, 메소보다미아의 왕 구산-리사다임에 의한 8년간의 압제에서 그의 민족을 해방시킨, 갈렙의 동생 옷니엘이었다. 이 왕은 아마도 미탄니(Mitanni)족의 왕자들 중의 하나였을 것인데, 그의 이름은 성경 밖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탄니의 원자료들이 단편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기간은 아마도 왕들이 신속히 계승되었던, 애굽의 제18왕조의 마지막 해들-스멘크카레, 투탄카멘, 에예, 그리고 하름합의 치세-과 일치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애굽의 강력한 바로인 세티 I세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여 에스드랠론 계곡의 동부 지역에서 가나안인의 반란을 분쇄한 것이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가나안 성읍들이 종주국인 애굽에 다시 예속되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인들은 아마도 그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애굽인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성읍들을 점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티 I세는 북쪽의 지파인 잇사갈의 히브리인들과 조우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벧산에서 발견된, 빈약하게 보존된 기념물에서 “야르뭇(Jarmuth) 산의 히브리인들[아피루]은 타야루(Tayaru)족과 함께 루마(Ruhma)의 유목민들을 공격하는 데 관여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타야루와 루마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야르뭇은 여호수아가 잇사갈의 영토에서 레위인들에게 할당한 성읍들 중의 하나였다(수 21:29). 따라서 세티 I세는 잇사갈 지파의 히브리인들과 싸웠을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그의 동맹국을 공격한 것 때문에 그들을 징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히브리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과히 멀리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기록들이 그것을 지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 300년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하는 사사기에는 이 긴 기간에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만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사사인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임으로써 모압인들, 암몬인들 그리고 아말렉인들에 의한 18년간의 압제에서 남쪽 지파들을 해방시켰다. 에훗의 영웅적인 행동 후에 남쪽 지파들이 누렸던 80년간의 안식은 부분적으로 애굽의 람세스 II세의 오랜 치세와 일치했다. 이 바로는 이스라엘인의 수중에 있지 않던 해안 도로를 따라 팔레스타인을 거쳐 진군하여 오론테스 강변의 카데쉬에서 헷인의 왕을 만나 유명한 카데쉬 전투를 치렀다. 람세스와 헷인들은 모두 여기서 승리를 주장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람세스는 그의 아시아 속국들에 관해 진지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에스드랠론 계곡에 놓여 있는 팔레스타인 도성인 벧산과 므깃도에 수비대를 보유했으며, 아마도 어떤 전략적인 해안 도성들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이 성읍들에 대한 자기들의 소유권을 탐하지 않는 한, 그들이 팔레스타인의 산간 지역에 정착한 것은 바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는 일이었다.

 몇 개의 명각에서 람세스 II세는 애굽에서 자신이 벌인 여러 건축 활동들에 히브리(아피루) 노예들이 투입되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인들이 때때로 팔레스타인에서 그의 군대 지휘관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결론짓는다. 이 이스라엘인들은, 람세스 II세의 치세 동안의 20년간 가나안 왕인 하솔의 야빈이 히브리인들을 압제했을 때, 야빈에 의해 노예가 되었을 수도 있다. 드보라와 바락의 영웅적인 지도력은 이 불행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드온의 사사직

 남쪽에서 있던 모압의 압제로부터 에훗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킴으로써 시작된 80년간의 안식은 7년간 계속된 미디안의 압제로 깨졌다. 람세스 II세의 아들 메르넵타가 유명한 이스라엘 석비(Israel Stele)에서 자랑하는, 팔레스타인을 급습(急襲)한 일이 아마도 이 기간에 있었을 것이다. 그 석비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으므로 이스라엘은 남겨진 “씨”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기록은 일반적인 애굽인의 과장하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절시켰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가 한 말에 비춰 볼 때, 그 이 무렵에 팔레스타인 어딘가에서 이스라엘인들과 조우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걸출한 사사들 가운데 하나인 기드온은, 충실하고 방심하지 않으며 담대한 적은 무리의 이스라엘 용사들로 거대한 외국 군대를 쳐부수고 그의 백성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켰다. 그의 공적과 사사직 기간에 관한 이야기는 또한 지파들 사이의 분쟁이 때때로 불꽃을 튀겼다는 사실과, 그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왕권-기드온이 지혜롭게 거절한 명예이기는 하지만-을 제안한 것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그들은 통일된 지도력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중대한 사건들이 40년간 기드온의 평화로운 사사직 기간에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산간 지역에 살고 있는 동안 해양 백성들은 해안 지역들을 따라 이동하여 람세스 III세의 치세 동안 애굽을 침입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기간 동안 지상과 해상에서 피비린내나는 싸움들이 있었다. 이 침입자들에 대한 애굽인의 승리들은 마침내 백성들의 이와 같은 대이동의 조류를 돌려놓았으며, 앗수르의 침입에 앞서 국가적인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중대한 위험들 중의 하나에서 애굽을 구원했다. 패배한 부족들 중의 더러는 다시 그들이 나왔던 소아시아를 향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부족들은 팔레스타인의 비옥한 해안 지역들에 정착했다. 이들 중에는 아름다운 샤론 평야의 갈멜산 남쪽에 있는 돌(Dor)의 근처에 정착한 티엑케르족과, 오랫동안 남부 팔레스타인의 몇몇 해안 성읍을 점유해 온 상관된 부족들을 강하게 만든 블레셋인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의 거주지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그 중대한 사건들의 추이를 상당히 염려하며 지켜보았을 것이나 이 블레셋인들이 곧 그들의 가장 모진 원수가 되리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기드온이 40년간의 사사직 봉사 후에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도움으로 모든 형제들을 살해하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통치권을 찬탈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단 3년간만 지속되었고, 시작 때처럼 유혈로 끝났다. 소위 말하는 그의 왕국이 세겜 인접 지역 너머까지 세력을 확장했는지는 의문스럽다.


 후기의 사사들

 그의 후에 잇사갈의 돌라(23년간)와 길르앗의 야일(22년간)이 사사가 되었다. 그들의 시대에 관해서는 중요한 사건들의 기록이 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사사직 45년간은 다소 평온 무사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일이 죽은 후에 두 번의 압제가 대략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하나는 암몬인들에 의해 동부에서 있었으며 18년간 계속되다가 약탈 대장 같은 입다에 의해 끝났으며, 다른 하나는 블레셋인들에 의해 서부에서 있었으며 40년간 지속되었다. 블레셋인들의 이 압제는 이전의 어떤 곤경의 때보다도 히브리인들에게 더 비참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입다는 그가 암몬인들을 대항하여 해방 전쟁을 시작했을 때 하나의 중요한 연대기적 진술을 했다(삿 11:26).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모세의 지도 하에 아모리 왕 시혼에게서 취한 헤스본과 인근 성읍들에 300년 동안 살아 왔으며 암몬인들은 이 성읍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놓고 다툴 권리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입다의 6년간의 사사직은 40년의 광야 체류가 끝난 지 약 300년 후, 따라서 BC 1106년경에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동쪽 지파들이 암몬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서쪽에 있는 지파들은 블레셋인들의 광포를 견뎠다. 블레셋인들은 애굽의 람세스 III세를 이은 극도로 연약한 계승자들에 의해 괴롭힘을 받지 않는 남부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에서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한 후, 그들의 주의를 후배지로 돌려 인접해 있는 이스라엘 지파들, 특히 단, 유다, 그리고 시므온 지파를 예속시켰다. 이 압제는, 사무엘이 소년으로서 그 집안에서 성장했던 시절 곧 엘리가 대제사장이었을 때 시작되었다. 이 압제가 시작된 직후 삼손이 태어났으며 성년이 되자마자 그는 20년 동안 그의 나라의 압제자들을 괴롭게 했으나 종내는 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삼손은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받아 블레셋인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만약 그의 품성이 훈련을 받았더라면 그는 불명예스럽게 죽는 대신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되었을 것이다. 블레셋인들이 아벡의 전투에서 이기고 법궤를 포획하며 또한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인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 전투는 사사 시대 동안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악의 시점을 기록했는데, 성막이 여호수아에 의해 실로로 옮겨진 후 약 300년이 된 때였다(부조와 선지자, 514,). 따라서 이 사건이 있은 연도는 약 BC 1100년이다.

 비참한 아벡 전투 후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의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우월한 무력과 전쟁 기술을 가진 블레셋인들에게 대항하여 성공적인 전쟁을 치를 준비가 곧바로 되어 있지 않았다. 압제는 20년간 더 계속되었으나 사무엘의 지도 하에 이스라엘인들이 에벤에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로 끝났다(삼상 7:13; 부조와 선지자, 591,). 에벤에셀 전투 후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평화스럽고 매우 성공적인 사사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왕을 구하는 민중의 요구에 굴복할 때까지 약 30년간 계속된 것이 확실하다. 사무엘이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던 그의 아들들은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나 백성에게 거부당했다.

 사울이 전국의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영웅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정부 형태는 신정(神政, theocracy)이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친히 임명하셨고 그들이 과업을 수행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부 형태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통치자를 둔 왕정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세습군주제로 발전하였다(신정은 공식적으로 십자가에서 끝났다. 시대의 소망, 737).


 사사 시대 동안의 상황

 사사 시대의 대부분 팔레스타인에 편만했던 유감스러운 상황들은 애굽에서 나온 두 문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것들은 매우 흥미롭고 시사하는 바가 많으므로 그 내용들을 여기에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문서는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통과하는 마하르(mahar, 애굽의 사절)의 여행이 기술되어 있는 풍자적인 편지이다. 그 문서는 BC 13세기 후반부의 것으로, 기드온이 종식시킨 미디안인의 압제와 같은 시대의 문서일 것이다.

 그 문서는, 팔레스타인 도로들이 “하늘까지 닿은” 사이프러스, 상수리나무, 백향목이 무성하여 여행하기가 어렵다고 기술한다. 여기에는 사자와 표범이 허다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삼손과 다윗의 경험(삿 14:5; 삼왕 17:34)을 회상시키는 대목이다. 그 사절은 두 번 강도들을 만났다. 어느 날 밤에 그들은 그의 말과 옷을 훔쳐갔고, 다른 경우에는 그의 활, 칼집이 있는 칼, 그리고 전통(箭筒)을 훔쳐갔다.

 그는 또한 베두인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마음이 온순하지 않았다”고 그들에 관해 말하였다. 그는 그의 혼이 “그의 손 안에 누워 있는” 동안 전율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의 머리털이 곤두섰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도덕적으로 모범이 아니어서 욥바에서 그 지방 소녀와 함께 엉뚱한 짓을 하다가 잡혔으며, 애굽의 고운 아마포로 만든 그의 셔츠를 팔아서 자유에 대한 대가를 간신히 지불할 수 있었다.

 편지 형식으로 기록된 이 이야기는, 사실이든지 허구든지 간에 팔레스타인의 지지(地誌)와 지리(地理)에 관해 주목할 만한 지식을 제공한다. 잘 알려진 다른 많은 장소와 함께 이것은 므깃도, 벧산, 악고, 세겜, 악삽, 그리고 사렙다를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좋지 않은 도로, 강도, 그리고 난폭하게 보이는 베두인들이 흔히 있던 그 지방에서 느껴지던 불안전한 상태를 생생하게 예시(例示)한다. 팔레스타인에서 경험한 슬픈 상황들에 관한 기술은 사사기 19장에 묘사된 여행하는 레위인의 경험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진술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벡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긴 후 블레셋의 압제가 절정에 달했던 BC 11세기 전반에 기록된 것으로서, 애굽의 왕실 대리인인 웬아몬(Wenamon)이 아멘(Amen)의 범선을 짓기 위한 백향목을 사기 위해 베니게의 항구 도성인 비블로스까지 한 여행을 기술한다. 웬아몬은 제사장-왕(priest-king)인 테베의 헤리-호르(Heri-Hor)에 의해 파송되었으며, 노중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게 하도록 아멘 신의 신상이 그에게 하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백향목을 살 돈으로 겨우 약 470그램의 금과 2.9킬로그램의 은을 받았다.

 웬아몬은 배로 애굽을 떠났으나 티엑케르인들의 수중에 있었던 베니게의 항구 도성 돌(Dor)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금과 은을 도난당했다. 그는 도난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기를 거부한 그 지방의 왕에게 불평을 품었다. 웬아몬은 도난당한 돈도 도둑도 찾지 못한 채 돌에서 9일을 보낸 후 스스로 약 2.8킬로그램의 은을 훔쳐 비블로스로 항해했다. 하지만 비블로스의 왕은 29일 동안 그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그에게 도성 밖에 있도록 명령했다. 그가 도착한 지 29일째 되는 날 왕의 시동(侍童) 가운데 하나가 아멘의 이름으로 환상적인 격분 상태에 빠져 웬아몬에게 회견을 허락하도록 그 왕에게 권고했다. 회견하는 동안 그 왕은 매우 무례했으며, 이전의 백향목 선적에 대하여 약 93킬로그램의 은이 지불되었다고 웬아몬에게 말하면서 공식적인 신임장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이 레바논 지방의 영주라는 사실과 애굽에 대한 의무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지만, 자기 백성이 나일 지방의 문화에 많이 빚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비블로스의 왕은 결국 애굽에 백향목을 선적해 보내기로 동의하였고, 그것을 위한 대금으로 애굽으로부터 짐승의 가죽, 파피루스 두루마리, 왕실의 아마포, 금, 은 등 배 한 척 분량을 받았다. 그리하여 원하던 백향목들이 잘려져 선적되었다. 바로 그때 그 베니게 왕은 웬아몬에게 이전의 사자(使者)가 비블로스에서 17년을 기다리다가 결국 백향목을 구하지도 못하고 거기서 죽었음을 상기시켰다. 이것은 아시아에서 애굽의 위신이 쇠하여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과 그 대사들은 더 이상 그들이 이전에 받기에 익숙해 있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웬아몬에게 지적하기 위한 의도였다.
에굽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에 있는 시삭의 승전 부조

  애굽의 시삭(큰 인물 그림)이 로호보암의 치세 때에 침입한 후 정복한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그의 신에게 바치고 있다. 성읍들은 각각 그 성읍 이름이 몸에 각인된 히브리인의 그림으로 나 타나 있다. 삽화(우측 상단): 좌측의 흰 사각형 속에 있는 부분을 확대한 12개의 성읍 그림.
조공을 바치고 있는 예후를 보여 주는 살만에셀 교세의 검은 방첨탑

  <= 좌측 앗수르 왕 살만에셀 II세가 세운 “검은 방첨 탑.” 아마도 그의 연대기의 최종판이 새겨진 것으로서 레이어드(Layard)가 니므롯(Nimmud, 성경의 갈래[Calan])에서 발견했으며,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것 은 네 측면을 가진 검은 경석(硬石)으로 된 기둥으로 꼭대기가 신전탑을 닮도록 조각되었다. 그 네 측면에 횡으로 각각 네 패널의 다섯 무리가 새겨져 있는데, 다섯 나라의 항복을 나타낸다. 꼭대기와 부조를 아래의 큰 부분에는 앗수르가 이룬 정복을 연도별로 수록하고 있는 설형문자로 된 명각들이 있다. 각 무리 위에 새겨진 한 줄의 글은 그 부조의 설명문이다. 꼭대기에서 두 번째의 무리는 이스라엘의 예후와 그의 공물을 나르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네 부조로 이루어져 있다.

  => 우측 상단: 이스라엘 왕 예후의 항복을 나타내는 네 패널 중 하나. 예후는 공물을 바치기 위해 앗수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패널은 네 명의 앗수르 내시들의 시중을 받는, 왕위의 상징물을 온전히 갖춘 살만에셀 III세를 나타낸다. 예후의 머리 위로 아슈르 신의 상징을 볼 수 있다. 설형문 자로 된 설명문에는 “야와 마르 훔리(Laua mar Humri: 예후, 오므리의 아들)의 공물” 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단: 좌측 꼭대기에서 두 번째 나타나 있는 패널을 확대한 것. 공물을 나르는 5명의 히브리인이 옮기는 물건들은 예후가 바친 공물의 일부인데, 설형문자로 “은, 금, 금 사플루(saplu) 사발 한 개, 바닥이 뾰족한 금 화병 한 개, 금 컵(umbler)를, 금 물통들, 주석, 왕의 홀(笏) 한 개 [그리고] 나무로 된 푸루투(puruhu)”라고 열거되어 있다.


 마침내 웬아몬이 애굽을 향하여 비블로스 항구를 막 출항하려고 했을 때, 그는 티엑케르인들이 그를 붙잡고 백향목 선적분을 빼앗으려고 그들의 배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배를 타고 그럭저럭 구브로로 도망했다. 거기서 그는 불친절한 원주민들의 손으로부터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불행하게도 그 파피루스는 이야기의 이 부분에서 찢어졌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의 나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애굽인들이 그것을 기록하여 보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웬아몬의 사명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이 사사 시대 동안 팔레스타인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들을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교훈적이다. 그것은 애굽이 아시아에서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는 것과 이전 시대에는 애굽의 사절이 도착하면 경외심이 퍼졌으나 그 당시는 경멸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게다가 우리는, 여행이 안전하지 못했다는 것과 사람들이 강도질을 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아무도 생명에 관하여 자신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본다.


 Ⅶ. 쇠망하는 애굽-제21왕조부터 재25왕조까지

 (BC c. 1085~663)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 시기는 매우 하락한 위치에 있는 애굽을 보여 준다. 원 자료가 희귀하여 이 기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지식에는 큰 간극(間隙)들이 존재한다. 이 시기의 애굽 연대기도 불확실하고 성경의 간략한 언급과 메소보다미아의 기록에 의존한다. 이 기간의 몇몇 애굽 왕들만 성경이나 설형문자 자료들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BC 663년 이전의 모든 연도들은 다만 대략적으로 맞을 따름이다.


 제21왕조의 제사장-왕들(BC c. 1085~c. 950)

 연약한 람세스 왕조인 제20왕조는 BC 1085년경에 끝났다. 동부 삼각주의 타니스(Tanis)는 정치적인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그 기원이 모호한 스멘데스(Smendes)는 거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왕이 되었으며, 한편 아멘의 대제사장인 헤리-호르는 자신을 예전에 상부 애굽의 수도였던 테베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 두 경쟁자는 정치적 세력이 거의 없었고, 애굽의 문화적 수준은 급속하게 떨어졌다. 비록 헤리-호르의 손자가 타니스의 왕의 딸과 결혼했지만 정치적 연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시기 동안 애굽의 정치적 세력의 퇴조는 이미 살펴본 대로 웬아몬이 비블로스로에서 그의 사명을 수행할 때 받았던 취급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 왕조의 마지막 왕들 중 하나는 아마도 솔로몬의 애굽인 장인이었을 것이다(왕상 3:1).


 제22, 제23 리비아 왕조(BC c. 950~c. 750)

 제21왕조에서 제22왕조로의 변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새 왕조의 첫 왕 셰숑크(Sheshonk)는 성경의 시삭(Shishak)인데 리비아 군대 사령관이었으며 아마 BC 950년경 보좌를 찬탈했을 것이다. 제19왕조 말기와 제20왕조 초기에 리비아인들은 전쟁 포로로서 많은 수가 애굽에 들어왔다. 그때 해양 백성들에게 대항한 람세스 III세의 전쟁에서 군인으로 이용되었다. 그들은 용병(傭兵)들로서 많은 왕들을 섬겼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상부 애굽의 북쪽 지역의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에 있는 가족처럼 명예와 관직을 얻었는데, 그 가족의 일부는 군대에서 장교로 봉사했으며 다른 이들은 애굽 도성과 지구(地區)의 총독이 되었다.

 셰숑크가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테베의 제사장 왕조를 없앨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아멘의 대제사장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다시 한 번 종교적 중심지인 테베를 왕정에 묶어 애굽의 정치적 연합을 달성했다. 그 새 왕은 수 년간 그 나라에 질서 있는 상황을 회복하느라 바빴으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셰숑크는 애굽에서 손을 뺄 수 있게 되자마자 그의 주의를 아시아로 돌렸으며, 그곳에서 이전의 제국을 재현하고자 단호한 노력을 했다. 이 시도에서 그는 솔로몬 왕의 죽음과 이스라엘 왕국이 두 경쟁 국가로 분열됨으로 인해 유리하게 되었다. 르호보암 제5년에 있었던 셰숑크의 팔레스타인 출정은 열왕기상 14장 25, 26절역대하 12장 2~4절에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애굽인들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많은 도성들을 포위·공격하고 약탈했는데, 그 성읍들 중에는 부요한 도성 예루살렘이 있었고 그때 솔로몬의 보화들이 애굽으로 옮겨졌다. 셰숑크는 팔레스타인에 승전비들을 세웠다. 이 석비들 중 단편 하나가 므깃도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왕의 조상 한 사람이 비블로스 발굴로 출토되었다. 셰숑크는 애굽으로 돌아가 승리를 경축했으며 그가 정복한 도성들의 목록을 카르나크의 거대한 아멘 신전의 벽에 새기게 했는데, 거기에 새겨진 약 100개의 팔레스타인 성읍 이름은 지난 세 천년기 동안 자연과 인간의 파괴적인 힘들을 피했다. 이것들 중에서 우리는 다아낙, 므깃도, 벧산, 마하나임, 기브온, 벧호른, 아얄론 등과 같은 잘 알려진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군사 원정은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셰숑크는 아시아를 통제할 수 없었으며 영구적으로 거기에 그의 의지를 밀어붙일 수 없었다. 아시아 제국을 재조직하려는 시도는 실패작이었다. 애굽은 이전에 가졌던 힘이 부족했으며 명백하게도 2급 세력이 되어 있었다.

 제21왕조부터 제23왕조까지 왕들의 무덤 위치는, 타니스의 폐허를 발굴한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P. 몽테(P. Montet) 교수가 그 도성에서 제21왕조와 제22왕조의 몇몇 왕실의 묘를 발견할 때까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묘들은, 비록 몇몇 아름다운 금과 은으로 된 물건들이 거기서 드러나기는 했을지라도, 투탄카멘의 묘와 같이 그토록 엄청난 보화들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셰숑크의 손자 묘에서 나온 아주 훌륭한 금팔찌에는, 그것을 그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주었다고 진술하는 명각이 있다. 실제로 그것은 솔로몬 왕의 보화에서 셰숑크의 소유물로 들어갔던 금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셰숑크 I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의 아시아 군사 원정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두 리비아인들이었을 제23왕조뿐만 아니라 제22왕조의 셰숑크의 계승자들도 연약한 왕들이었다. 그 두 왕조의 왕 15명은 약 200년간(BC c. 950~750) 통치했으나 애굽은 다만 이전의 그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애굽은 세계 정치에서 한 역할도 하지 못했고이전 시대들의 제작물과 비교할 만한 건축물이나 예술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실상은 잠시 후 산헤립의 군대 사령관 랍사게에 의해 적절히 그 특성이 묘사되었는데, 그는 히스기야의 신하들에게 문자적으로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고 말했다. 비록 그의 소견은 사실상 제24왕조의 애굽을 언급했을지라도 리비아 왕조들의 정치적 허약성을 가장 잘 묘사한 말이다.


 사이스(Sais)의 제24왕조(BC c. 750~c. 715)

 타니스의 리비아인 통치가 어떻게 끝났는지, 즉 그것이 본토인 애굽 군주들의 단명했던 제24왕조에 의해 어떻게 대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BC 750년경 하(下)애굽은 서부 삼각주에 있는 사이스(Sai)의 테프낙트(Tefnakht)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왕에 대해서는 중요한 도성인 테베와 함께 구스인들에 의해 유지되던 상(上)애굽을 그가 정복하려고 시도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헬라인들이 복코리스(Bocchoris)라고 불렀던 테프낙트-그의 애굽 이름은 바켄레네프(Bakenrenef)-의 아들에 관해서 우리는 동시대의 정보를 거의 갖고 있지 않으나 후에 헬라 저술가들은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이 자료들에 의하면 그는 현명한 왕이요 위대한 입법자였다. 5년간(BC 720~715)의 짧은 통치 후에 그는 에디오피아 왕조의 첫 번째 왕에 의해 폐위되어 불에 타죽었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시대 동안의 애굽의 상황들에 관해서 우리는 매우 단편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테프낙트와 복코리스 외에도 아마 몇몇 소왕(小王)들이 하애굽 지역들을 통치했을 것이다. 열왕기하 17장 4절에는 “애굽 왕 소(So)”가 호세아를 꾀어 앗수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비록 한 애굽 기념비(베를린 박물관 소장)에 상형문자로 왕 이름 “소”가 포함되어 있고 앗수르 자료들이 그를 시부(Sib’
u)라는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우리는 아마 삼각주의 작은 지역을 통치했을 이 왕에 관해 더 이상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제25왕조의 에디오피아 왕들(BC c. 715~663)

 오늘날 일부는 애굽에 있고 일부는 수단에 있는 누비아(Nubia)는 고전적인 저술가들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에디오피아(Ethiopia)로 불렸다. 따라서 고대의 에디오피아 왕들은 누비아인들이었으며, 에디오피아인이라는 용어가 지적하는 것처럼 아뷔시니아(Abyssinia) 고원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누비아는 제21왕조까지 대부분의 역사적 시기 동안 애굽에 속해 있었다. 애굽 왕들은 때때로 반란을 진압해야 했지만, 누비아는 일반적으로 다소 조용했고 문제를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애굽인의 통치 기간은 제21왕조의 허약한 통치자들의 시기 동안인 BC 10세기에 끝났다. 이때 누비아는 애굽의 멍에를 떨쳐버리고, 바르칼(Barkal) 산과 나일강의 제4 폭포 근처에 있는 나파타(Napata)에 수도를 둔 독립 왕국을 세웠다. 수백 년에 걸친 애굽 통치 동안 누비아에 도입되었던 애굽 종교는 존속되었으며, 아멘 예배 의식은 애굽 자체에서보다 더 보수적인 형태로 행해졌다. 미국의 고고학자 G. A. 라이스너(G. A. Reisner)는 그의 나파타 발굴에서 피라미드, 신전, 그리고 궁전들을 발굴하였다. 그는 BC 10세기부터 BC 300년경까지의 누비아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그 수도를 메로에(Meroe..)로 옮길 때까지 나파타를 통치했던 왕들의 명단을 단절 없이 차례대로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었다. 메로에는 카르토움(Khartoum) 북쪽 약 209킬로미터에 위치해 있는데, 여기서 메로에 왕국은 AD 355년까지 존재하다가 악숨(Axum)의 아시니아 세력에 항복하였다.

 누비아는 BC 10세기에 독립하여 그 후로 약 200년간 격리된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누가 봐도 그 정치적 취약성이 확실하던 애굽을 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BC 750년경 누비아 왕 카쉬타(Kashta)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애굽의 모든 도성들 중 가장 유명하고 영광스러운 도성인 테베를 포함하여 남부 애굽 전체를 차지했다. 테베에 있던 아멘 신전의 최고 종교적 세력은 “신의 부인”(god’s wife)으로 불렸던, 제23왕조의 왕 오소르콘 III세(Osorkon III)의 딸 셰페누페트 II세(Shepenupet II)였다. 여자 대제사장직은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으며, 아멘의 제사장직의 충성을 애굽의 왕가(王家)에 확보하는 방편으로 왕가의 혈통을 가진 공주가 보통 차지했다. 카쉬타는 직무를 행하는 “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딸을 그녀의 계승자로 입양하도록 강요하여 아멘의 제사장직과 그 신의 엄청난 소유들을 그의 왕조에 묶어 버렸다.

 카쉬타의 아들이요 계승자인 피안키(Piankhi)는 상애굽에 대한 그의 통치가 사이스의 테프낙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애굽의 남은 부분을 정복했다. 그의 출정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가장 자세하면서도 흥미있는 역사적인 본문들 중 하나를 포함하는 큰 석비에 기술되어 있다. 비록 애굽 전역이 피안키에게 정복되었지만, 그는 다시 삼각주 지역으로부터 철수하여 테프낙트가 그것을 소유하도록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 다음 에디오피아 왕인 샤바카(Shabaka)는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BC 715년에 복코리스를 패배시키고 죽임으로써 제24왕조를 종식시켰다.

 피안키는 애굽 전역을 정복한 후에 테베를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그 숭앙받는 고도(古都)가 마지막으로 애굽의 삶과 문화의 중심지가 된 때였다. 다시 한 번 더 제18왕조의 전성기 때처럼 거대한 건축 활동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새 영광은 겨우 50년(BC 715~663) 남짓 지속되다가 앗수르인들이 애굽을 침략하여 테베를 파괴했을 때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쇠망하는 애굽

 피안키의 계승자들은 샤바카, 샤바타카(Shabataka), 타하르카(Taharka) 그리고 타누타몬(Tanutamon)이었다. 근래에 출판된 문서들에 의하면, 타하르카는 BC 690년, 즉 그가 20세 되던 해에 그의 형제 샤바타카와 동위왕으로 보좌에 올랐다. 이 동위왕 시대는 6년 후 그의 형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타하르카는, 그의 조카 타누타몬이 보좌에 오른 BC 664년까지 유일한 통치자였다. 타하르카는 성경에는 디르하가(Tirhakah)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왕하 19:9). 산헤립이 아마도 BC 690년 이후 유대 립나를 포위했을 때 그는 타하르카가 히스기야를 도와 유다를 임박한 전멸로부터 구하기 위해 그의 군대와 함께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곳에 적혀 있다. 그러나 타하르카가 히스기야를 위해 실제로 적극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랍사게가 한 진술(왕하 18:21), 즉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후 느부갓네살 때에도 사실이었던 그 진술은 사실상 에디오피아 왕조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 산헤립의 면밀한 주목을 요구했던 앗수르 제국의 다른 부분들에서 일어난 어려움과 산헤립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격변으로, 애굽은 잠시 구원을 받았고 그 종말이 연기되었으나 나일 강변의 그 오만하지만 허약한 왕국은 곧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앗수르 왕 에살핫돈(Esarhaddon)은 BC 670년에 애굽을 정복하여 7년간 앗수르의 한 도(道)로 삼았다. 우리는 북부 수리아 지역 젠지를리(Zenjirli)에 세워진 에살핫돈의 유명한 승전비를 되찾았다. 그것은 두로 왕과 애굽 왕(타하르카)을 앗수르 왕의 포로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큰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두로의 왕이 비참한 애굽의 왕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나파타에서 발견된 한 석비에서, 상애굽을 통치한 마지막 에디오피아 왕 타누타몬(Tanutamon)은 꿈 때문에 그가 새로이 애굽 정복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상애굽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심지어 하애굽의 수도인 멤피스도 차지했으나 앗수르 수비대들을 삼각주 지역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일시적이었으며,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이 그를 대항하여 진군해 테베를 정복했을 때 그는 후퇴해야만 했다. 고대의 모든 애굽 도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이 도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도성의 두 개의 큰 방첨탑은 새 시대가 도래했음과 애굽 세력이 영원히 분쇄되었음을 앗수르인들과 세계에 증명하기 위해 앗수르로 이송되었다. 나훔 선지서는 모든 고대 도성들의 여왕인 테베의 멸망이 동시대인들에게 끼쳤던 무시무시한 인상을 반영하고 있다(나 3:8).

 그 다음에 이어진 애굽 역사에 관해서는 제XIII장 “사이스 시대의 애굽”을 참조하라.


 Ⅷ. 앗수르 제국(BC 933~612)


 앗수르 제국의 시기는 이 세상의 장구한 역사에서 삽화적인 한 사건에 지나지 않으나,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역사 속에서 앗수르가 했던 결정적인 역할 때문에 성경 학도들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요성은 앗수르와 그 백성이 성경에서 약 150번 언급되어 있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6명의 뛰어난 앗수르 왕의 이름이 성경에 언급되었으며, 10명의 히브리 왕-6명의 이스라엘 왕과 4명의 유다 왕-이 앗수르 왕궁 명각들에 나타난다. 게다가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인들의 잔인한 손에 슬픈 종말을 맞이했고, 유다 왕국도 거의 이스라엘과 운명을 함께할 뻔했던 사실은 앗수르의 역사를 주의 깊게 연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앗수르 제국 시대에 성사(聖史)와 세속사(世俗史) 간의 접촉들을 이와 같이 나열해 보면 히브리 왕들의 시대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그 나라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앗수르의 본토는 티그리스(Tigris, 힛데겔) 강의 동쪽 지류들 중의 하나인 작은 잡(Little Zab) 강의 북쪽, 힛데겔 강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서부터 앗수르는 티그리스 강을 따라서 북서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뻗어 있었다. 앗수르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여러 번 이곳 저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최고(最古)의 수도인 앗수르(Assur)는 작은 잡 강에서 멀지 않은 티그리스 강 서쪽 제방 위에 있었다. 북쪽으로 짧은 거리에 카르-투쿨티-니누르타(Kar-Tukulti-Ninurta)라는 도성이 있었는데, 이 이름에는 그 도성을 세운 왕 투굴티-니누르타(Tukulti-Ninurta)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큰 잡(Great Zab) 강과 티그리스 강이 합류하는 곳에는 현재 니므룻(Nimrud)이라고 불리는 갈라(Calah)가 있고, 더 북쪽으로는 앗수르(Assyria, 앗시리아)의 도성들 중 가장 크고 유명한 도성인 니느웨가 놓여 있었다. 앗수르(Assur)에서 약 50마일(80킬로미터) 떨어진 이 수도는 전체 길이가 8마일(약 13킬로미터)인 성벽에 15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 모양은 장방형이었다. 니느웨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되는 곳에는 현재 코르사바드(Khorsabad)라고 불리는, 사르곤 II세의 수도였던 두르 샤루킨(Dur Sharrukin)이 놓여 있었다.

 앗수르인들은 인종, 언어 그리고 문명에 관한 한 바벨론인들과 밀접히 연관된 셈 계통의 악갓인들(Akkadians)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적은 민족이었으나, 야심 있는 상인들, 대담하고 용감한 용사들, 비록 무자비하기는 하나 신중한 정치 지도자들 및 정객들로 이름을 떨쳤다.

 앗수르는 돌이 많은 나라였고, 좋은 돌을 채석할 수 있는 산들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궁전 및 신전과 같은 기념비적이고 공적인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많은 돌이 사용되었다. 앗수르인들의 궁전과 신전의 거대한 많은 평석(平石)이 보여주듯이 그들은 돌을 다루는 데 명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도성이나 궁전의 성문들 옆에 서 있는, 날개가 있고 사람의 머리를 가진 황소들 혹은 사자들에서 두드러진다. 그 각각은 한 덩이의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서 무게가 약 40톤이나 되었다. 돌을 자르는 기술은 기념비적인 부조(浮彫)나 조각을 다루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원통형 인(印)과 같은 좀 더 작은 물건들을 새기는 데도 발휘되었다. 이것들은 숙련된 장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앗수르의 종교

 앗수르인들의 종교는 인종적으로 연관된 바벨론인들의 종교와 비슷했다. 사실 앗수르인들은 많은 바벨론의 신들, 예를 들면 마르둑(Marduk), 이쉬타르(Ishtar), 담무스(Tammuz) 등을 취하여 경배했다. 으뜸가는 신(神)은 아슈르(Ashur)라고 불리던 도성의 고대 지방 신인 아슈르였다. 아슈르는 그의 주된 종인 왕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날개 달린 태양으로 묘사되었지만 다산(多産)을 나타내는 나무의 상징으로도 숭배되었다. 다른 나라의 영향도 앗수르인의 종교에 명백하다. 이런 식으로 아모리인들과 같은 몇몇 민족들은 BC 제2천년기 전반 동안 앗수르인들을 지배하는 세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다간(Dagan)과 아다드(Adad) 신도 승인을 받았다. 미탄니의 후르인들과 같은, 앗수르의 다른 정복자들도 그들의 종교적 관념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따라서 앗수르 종교에서 순수하게 민족적인 것들은 거의 없고 다른 문화들에서 차용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앗수르에서 왕은 애굽의 바로와는 달리 신도 아니었고, 수메르의 왕과는 달리 신의 대리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신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통해 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여부를 보고하는 대제사장이요 장군이었는데, 그 편지 가운데 얼마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앗수르의 연대기

 앗수르인들은, 후에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이 따랐던 수정된 형태의 연도 호칭 방식을 고안해 냈다. 왕을 포함하여 고위 관리들은 평생에 한 번 1년 동안 림무(limmu)로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림무였던 해에다 그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의무도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명예직이었다. 앗수르의 림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에포뉨(eponym)이며, 따라서 림무의 이름들을 포함하는 연대 목록들은 에퍼님 캐넌(Eponym Canons)으로 불린다. 이 목록은 앗수르의 연대기, 특히 BC 900년부터 650년까지의 기간에 대한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디글랏빌레셀 I세 이전의 앗수르(BC c. 1112까지)

 이신(Isin) 왕조와 라르사(Larsa) 왕조 시대에(참조 제1권, 92) 일루슈마(Illushuma, BC c. 1850)가 독립하여 이전에 그의 대군주(overlord)에게 속했던 거대한 지역들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을 때, 앗수르의 군주들은 남부 메소보다미아를 통치하는 왕조들의 봉신이었다. 일루슈마의 아들 에리슘(Erishum, BC c. 1825), 그리고 그보다 더 그의 증손 사르곤 I세(BC c. 1780)는 세계를 지배할 생각을 갖고 처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악갓 제국의 위대한 영웅 겸 창설자를 본따서 취한 사르곤(Sargon)이라는 이름과 또한 그의 정치적 확장 계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어린 독립 국가는 성공적인 군사 원정들로 강하게 되었으며 영토는 확장되었다. 외국과의 사업 관계가 개시되었으며 무역 특구(特區)와 전초 기지들이 확보되었다. 소아시아 특구들의 문서 보관소들(소위 갑바도기아 서판들[Cappadocian tablets])을 통해 앗수르의 상업 활동 범위에 관한 많은 정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앗수르의 짧은 독립 기간은 사르곤 I세의 사망 직후에 끝나고 말았다. 소아시아와의 상업적 관계가 끊어졌고, 앗수르 자체는 출현하는 두 세력, 즉 엘람인들과 아모리인들 사이의 쟁인(爭因)이 되었다. 아모리인 샴쉬-아다드 I세(Shamshi-Adad I, BC c. 1749~1717)는, 그의 부친 일루캅카푸(Ilukapkapu)가 앗수르의 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앗수르의 왕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바벨론의 아모리인 왕 함무라비(Hammurabi)처럼 샴쉬-아다드는, 가장 의미심장한 칭호인 “우주의 왕”이라는 그의 칭호가드러내듯 메소보다미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고자 계획했다. 그는 유브라데 강변의 거대한 도성 마리(Mari)를 정복하고 아들을 그곳의 왕으로 세웠다. 게다가 수리아의 도성 마르딘(Mardin)에서 발견된 한 승전비는, 그가 또한 북부 수리아 너머로 자기 세력을 확장했음을 드러낸다. 그가 죽었을 때, 함무라비의 가장 강한 적이 사라졌다. 그의 아들과 그후의 후손들은 그의 정책들을 지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앗수르는 한번 더 이류 세력으로 퇴보했다. 함무라비와 그 후계자들이 앗수르에 대한 주권을 행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다음에는 미탄니의 후르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앗수르를 공략하여 그들의 제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 시대의 왕들의 명단에 언급된 앗수르의 왕들은 봉신에 불과했다. 미탄니의 봉신으로 그 통치를 시작하고 자신을 앗수르의 제사장 군주로 언급한 왕은 에리바-아다드(Eriba-Adad, BC c. 1390~1364)였다. 투쉬랏타(Tushratta)가 죽고 미탄니가 몰락하자 그는 다시 한 번 자유롭고 독립적인 왕이 되었다.

 에리바-아다드의 아들인 아슈르-우발리트 I세(Ashur-uballit. I, BC 1364~1328)에게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기 나라의 세력을 증진시키고자 애쓰는 앗수르 통치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애굽의 혁명적인 왕 이크나톤(Ikhnaton)과 동시대인이었다. 사실상 그 바로에게 보낸 아슈르-우발리트의 편지 두 통이 아마르나 문집에서 발견되었다. 첫 번째 편지에서 그는 그 자신을 단지 앗수르 땅의 왕으로 칭하고 있으나, 두 번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그 바로의 형제로 지칭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이전에 미탄니의 왕이 갖고 있던 세계 정치권 내의 위치를 차지하는 위대한 왕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슈르-우발리트는 정력적인 통치자였으며 자기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는 갈그미스까지 상부 메소보다미아를 점유했으며, 남부 메소보다미아에 대한 그의 지상권을 카스족(Kassite)이 사는 바벨론이 억지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메소보다미아 전역에 대한 앗수르의 세력이 심지어 제한된 정도까지라도 인정되기 위해서는 아슈르-우발리트의 사업이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여러 번 되풀이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왕실 연보(年譜)들에서 왕들이 연속적으로, 후대에 미탄니의 땅으로 알려진 이름인 하니갈바트(Hanigalbat)에 대항하여 반복되는 군사 출정을 이끌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또한 서쪽으로는 보다 강력한 헷인들을 대항해 싸웠다. 전쟁의 행운이 항상 앗수르 편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고통스러운 출정들로 인해 이미 얻었던 영토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속적인 전쟁들이 수적으로 적은 앗수르 백성의 호전적인 정신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으로 다른 거대한 국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결과 헷, 애굽 그리고 바벨론의 왕들이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위대한 왕이라는 앗수르 왕의 주장을 인정하여 그 작은 왕을 “형제”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BC 13세기에는 세 명의 위대한 앗수르 왕들, 곧 아닷니라리 I세(Adadnirari I), 살만에셀 I세(Shalmaneser I) 그리고 투쿨티-니누르타 I세(Tukulti-Ninurta I)가 있게 되었다.

 아닷니라리 I세(BC c. 1306~1274)에 관해서는 긴 명각이 알려져 있는데, 그는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는 바벨론을 패배시키고 키르쿠크(Kirkuk) 지역을 합병한 앗수르의 새로운 남쪽 국경선을 확립했다. 그는 자그로스(Zagros) 산맥에 있는 구티(Guti)족과 룰루피(Lullupi)족에 대항해 싸웠으며, 하니갈바트 전역을 침공하여 그 수도를 파괴하고 그곳에 앗수르인의 궁전을 건축했다.

 살만에셀 I세(BC c. 1274~1244)는 그의 아버지의 군사 출정을 실제로 반복했으며, 또한 그 후 시대에 앗수르의 가장 강력한 적들 중의 하나가 된, 반 호수(Lake Van) 주변의 아르메니아 지역에 있던 우라르티(Urarti, 후에는 우라르투[Urartu]) 땅의 8명의 동맹 왕을 패배시켰다. 아닷니라리는 갈라(Calah) 도성을 세워 수도를 앗수르(Assur)로부터 그 새로운 도성으로 옮겼다.

 수도를 다시 새로운 위치인 카르-투쿨티-니누르타(Kar-Tukulti-Ninurta)로 옮긴 그 다음 왕 투쿨티-니누르타 I세(Tukulti-Ninurta I, BC c. 1244~1207)는 극히 신경질적이고 광적이었다. 그는 앗수르의 첫 번째 전사-왕(warrior-king)이 되었고, 그의 무자비한 전투 방법들은 후기의 제국 시대에 잘 알려졌다. 정교한 역사 기록들은,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수바르투(Subartu) 즉 우라르투의 나이리(Nairi) 지역에 대항한 그의 군사 출정을 보고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43명의 지역 왕들, 동쪽 산지에 있던 구티족과 엘람인들, 사막의 알라무족(Ahlamu, 아람인들)과 바벨론인들을 패배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바벨론 왕을 체포했고 바벨론의 신성한 마르둑 신상을 앗수르로 가져왔다. 하지만 바벨론에 대한 그의 통치는 짧은 기간뿐이었다. 왜냐하면 엘람인들의 지원을 받은 바벨론인들이 그들의 도성이 점령된 직후에 앗수르의 멍에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투쿨티-니누르타의 종말은 그 당시 약 1세기 동안 계속된 앗수르인의 정복의 첫 번째 기간을 종결짓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앗수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련의 왕들 아래서 쇠퇴하였다. 이때 헷 제국을 정복하고 수리아를 침공했던 해양 백성들이 대체로 BC 12세기 동안인 앗수르의 쇠약기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암시는 없다.


 디글랏빌레셀 I세(Tiglath-pileser I)와 그 이후(BC 1113~933)

 앗수르인들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적합한 전사를 디글랏빌레셀 I세(BC 1113~ 1074)에게서 찾았다. 앗수르인들은 이 이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BC 14세기부터 7세기까지 상황이 유리할 때마다 일관되게 그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디글랏빌레셀은 그의 치세 첫 몇 년 동안 이전의 투쿨티-니누르타 I세의 제국을 재확립하기 시작했다. 그가 앗수르 도성에 있던 아누(Anu) 및 아다드(Adad)의 신전 초석 속에 보관했던, 지금은 유명하게 된 문서들에서 그는 그의 업적을 보고하였는데, 이 문서들은 1875년에 앗수르학(Assyriology)이라는 어린 학문이 성년에 달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문헌의 복사본을 그때 4명의 학자들에게 주었는데, 그들은 각각 독자적으로 정확하게 그것들을 번역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설형문자의 수수께끼가 풀렸음을 증명하였다(참조 제1권, 122, 123).

 그 왕은 북쪽의 나이리 땅에서 전투를 수행했으며, 다음에는 그 무렵에 소아시아로부터 동쪽으로 압박해 온 무쉬키(Mushki)족을 대항해 나아갔다. 마침내 그는 흑해에 도달했고 또한 하니갈바트에 있는 말라티아(Malatia)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그는 북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바벨론 도성인 두르-쿠리갈주(Dur-Kurigalzu), 십파르(Sippar), 바벨론, 그리고 오피스(Opis)를 취했으나 패배한 바벨론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독립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디글랏빌레셀이 건물을 짓기 위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을 벌목하려고 수리아로 진군했을 때, 시돈과 비블로스의 군주들을 포함하여 수리아와 베니게 군주들이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두로는 그 섬의 난공불락을 믿으면서 조공 바치기를 거부했다. 아르바드(Arvad)는 그 왕을 지중해 해상 여행으로 초대했으며, 그는 지중해에서 한 바다 괴물을 사냥했다. 심지어 애굽의 바로도 조심스럽게 그 강력한 앗수르 왕에게 선물들을 보냈는데, 그중에는 왕이 앗수르 도성에서 공개적으로 전시했던 악어가 있었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은 자신에게 대항하여 연속적으로 밀려오는 아람인들의 압력을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앗수르 왕은 참된 제국 건설자였으며, 그의 왕국은 그 중요성에서 적어도 이전 시대의 헷인들이나 애굽인들의 왕국과 동등했다. 그러나 이전의 제국들과 이 새로운 제국 사이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이전의 제국들은 봉신을 인간으로 간주했고, 패배한 적들을 향해 자주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보였다. 하지만 앗수르인들은 단 한 가지 목표-모든 민족들을 그들의 신 아슈르(Ashur)의 힘에 굴복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적들에게 무조건적인 항복과 멸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디글랏빌레셀의 군사적 천재성으로 인해 저지되었던 아람인들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너무나 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람인들은 바벨론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며 앗수르인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한 지역들로 점점 더 침투해 들어갔다. 디글랏빌레셀의 사후 거의 1세기 반 동안 앗수르는 티그리스 강변의 본토로 물러나서 2류 세력의 역할을 한 반면에 아람인들은 수리아와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정복에 박차를 가했으며 숱한 도성 국가들을 세웠다. 갈대아인들로 더 잘 알려진, 남쪽의 아람 부족들은 그 사이에 바벨론을 차지하여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였는데, 이 왕조는 비록 그후 수 세기 동안 자주 앗수르인들에게 방해받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6세기 중엽까지 중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슈르-단 II세(Ashur-dan II)로부터 살만에셀 III세까지의 앗수르의 부활(BC 933~824)

 또 다른 강력한 앗수르 왕이 아슈르-단 II세(BC 933~910)라는 인물로 일어났다. 그는 디글랏빌레셀 I세에 어울리는 후손으로서 우선 앗수르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재조직한 후 메소보다미아의 아람 영역을 재정복하기 시작했다. 왕실 연보들은 어떻게 앗수르 왕들이 매년 군대를 이끌고 북쪽과 북서쪽으로 나갔는지를 말하고 있다. 아슈르-단 II세, 아닷니라리 II세(BC 910~890), 투쿨티-니누르타 II세(BC 889~884), 아슈르나시르팔 II세(BC 884~859), 그리고 살만에셀 III세(BC 859~824)로 이어진 이 다섯 왕은 각각 바로 앞 전임자의 아들로서 단 한 가지 열망-아람인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재정복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BC 9세기만큼 많은 유혈 사태를 목도했던 세기도 고대에 없었을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다섯 왕의 치세 동안 북부 메소보다미아와 수리아만큼 많은 생명이 희생된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만큼 빈번하게 조약이 맺어졌다가 깨진 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살해되고 집과 논밭이 파괴되는 것을 반복해서 목도했던 속국의 백성들은 앗수르인들의 빈번한 군사 원정을 신에 의해 지정된 재앙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사 10:5). 반면에 앗수르 왕들 편에서는 그 신민(臣民)들의 계속적인 반란을 불과 칼로 보복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하니갈바트의 땅을 그 수도 니시비스(Nisibis)와 함께 정복했던 아닷니라리 II세는 매년 공물을 요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그 땅을 앗수르의 한 도(道)로 만들었다. 또 다른 반란 후에 아슈르나시르팔 II세가 이 지방을 재정복했을 때, 그는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잔인하게 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반란은 두 번 다시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앗수르 제국을 디글랏빌레셋 I세 때와 거의 같은 크기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앗수르는 이제 철권(鐵拳)으로 통치되었으며 아슈르나르시팔이 지배하는 곳은 어디든지 자비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제국은 앗수르인 방백들에 의해 통치되는 도(道)로 나뉘었다. 그 도(道)는 도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구(地區)로 구성되었다. 도의 주민들은 단 한 가지 목적, 즉 그들이 앗수르 왕의 결코 채울 수 없는 갈망을 만족시키고자 공물을 쏟아내는 일을 위해 살 정도로 앗수르의 세금 징수관들에 의해 압박을 받았다.

 BC 859년 고령에 보좌에 오른 살만에셀 III세는 그의 아버지의 제국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방법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을 새로운 지역들로 확장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는 조그만 이스라엘 왕국과 접촉을 가진 첫 번째 앗수르 왕이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 동안 상당히 큰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이때 앗수르와 애굽은 너무나도 약해서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사망한(BC 931/930) 후 히브리인의 왕국이 두 국가로 분열된 때는 앗수르 세력이 부활한 때와 일치하는데, 이때는 아슈르-단 II세가 BC 933년 보좌에 오르고 앗수르인들의 눈이 다시 탐욕스럽게 서쪽으로 향하던 때였다. 하지만 단지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국가들을 대항하여 전투가 치러지는 한, 이스라엘은 티그리스 강변의 그 강력한 국가를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새 왕들이 즉위하고 앗수르 제국이 새롭게 자꾸 팽창함으로 말미암아 침략을 받을 위험이 점점 더 가까이 왔을 때, 이스라엘의 왕들은 불안감이 증가하는 것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그들은 유다도 결국 그랬듯이 이 갈등에 빠져들었다.

 비록 아합이 BC 853년 카르카르(Qarqar)에서 살만에셀 III세를 대항해 싸우는 동맹들 중 하나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자진해서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했는지 아니면 다메섹(수리아)에 의해 억지로 그렇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 왕국 역사에 관한 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앗수르의 왕실 명각들에 이스라엘 왕들이 꽤 자주 언급된다. 그 다음 130년간 그 두 세력 사이에는 많은 이해 관계의 충돌이 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 이스라엘 왕국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국가들의 예를 따라 앗수르의 한 도(道)가 되고 말았다.

 살만에셀 III세의 무수한 군사 원정에 관해서는 글과 그림으로 그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낱낱이 기술하는 것은 너무 멀리 빗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 동안의 서부 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군사적인 업적에 관한 간략한 개요가 필요하다. 그 앗수르 왕은 상부 유브라데에 있던 강력한 아람인 국가인 비트-아디니(Bit-Adini)의 수도 틸-바르시프(Til-Barsip)를 먼저 정복했다. 그 주민은 앗수르로 추방되었고, 앗수르인 이주자들이 그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틸-바르시프는 재건되어 “살만에셀의 성”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이 도성은 길리기아(Cilicia)와 수리아의 도성 국가들에 대한 수 차례의 군사 원정을 위한 본부와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 도성 국가들의 정복으로 인해 땅에 굶주린 앗수르인들에게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은 광산과 아마누스(Amanus) 산맥의 숲이 공개되었다.

 수리아에서 12명의 동맹한 군주들-이스라엘의 아합을 포함하여-은 BC 853년에 카르카르(Qarqar)에서 살만에셀과 마주쳤다. 다메섹의 아다디드리(Adadidri)-성경에 언급된 3명의 벤하닷(Ben-hadad) 중에서 두 번째-가 이 동맹의 지도자였다. 비록 앗수르의 왕은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어마어마한 말로 주장하고 있으나, 그가 수리아의 적들과 처음으로 조우한 일이 기껏해야 무승부로 끝났거나 아니면 아마도 동맹국들의 승리로 끝난 사실을 그는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만에셀은 그의 목적을 잊지 않고 848년에 사실상 동일한 그 동맹에 대항하여 두 번째 시도를 했다. 또다시 동맹국들은 성공적으로 그를 저지했으며, 심지어 그의 세 번째 출정도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하사엘이 아다디드리를 이어 다메섹의 보좌에 올랐을 때, 그 앗수르 왕은 하사엘의 수도로 진군하여 그 수도의 야자수 정원들을 파괴했으나 그 도성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보좌를 찬탈했으나 싸울 준비가 되지 않던 이스라엘의 예후는 조공을 바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은 갈라에서 발견되어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는 살만에셀의 유명한 검은 방첨탑(Black Obelisk)에 묘사되어 있다. 그 앗수르 왕은 그의 전임자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남쪽으로 베이루트 근처에 있는 독 강(Dog River)가의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바위에 부조(浮彫)로 새겼다.

 살만에셀 III세는 또한 북쪽에서 다소 영토를 얻었으며, 티그리스 강의 수원(水源)에 도착하여 거기서 희생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는 사르두르 I세(Sardur I) 치하에서 독립 상태로 남아 있기로 결심한 강력한 우라르투(Urartu)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후에 살만에셀은, 두 형제가 보좌를 놓고 다툴 때, 바벨론 정치에 가담했다. 그는 바벨론이 독립을 유지하도록 허용했으나, 페르시아 만(灣)까지 진군해 내려가면서 도중에 중요한 아람 국가인 비트-야킨(Bit-Jakin)을 포함한 바벨론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금, 상아 그리고 코끼리 가죽을 조공으로 받음으로써 하부 메소보다미아의 백성에게 앗수르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앗수르의 명성과 앗수르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져서 그 왕에게 모든 성문들이 열렸다. 그토록 적은 노력으로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30년 이상 지속된 그의 치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살만에셀은 자신의 총사령관(타르탄[tartan])인 다이안-아슈르(Daian-Ashur)의 충성된 조력을 누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방백들이 심각한 반란을 일으켜 그의 평생의 사업을 망쳐 놓았다. 그때부터 BC 824년 그가 죽을 때까지 갈라에서 좀처럼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살만에셀의 아들 중 하나가 이끌었던 이 반란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늙은 왕의 후계자에 관한 결정이나 그의 대외 정책 혹은 국내 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 해체의 시기(BC 824~746)

 비록 그 제국의 세력은 살만에셀 III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기울기는 했으나, 정복된 지역들에 대한 권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왕인 샴쉬-아다드 V세(Shamshi-Adad V, BC 824~810)는 세 번의 출정에서 앗수르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일에 그는 바벨론 왕 마르둑-자키르-슘(Marduk-zakir-shum)의 지원을 받았다.

 앗수르인들이 항상 무의식적으로 그 자신들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했던 바벨론과 그 문화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샴쉬-아다드는 바벨론의 공주 삼무-라마트(Sammu-ramat)를 아내로 취하였고 왕실 명각들에 바벨론 언어를 사용했다. 비록 그와 그의 아들이 적대적인 행위들을 징벌하기 위해 바벨론을 정복할 필요를 거듭 깨달았으나, 이 두 앗수르 왕은 앗수르 문화의 어머니로 간주된 그 유명한 땅을 하나의 도(道)로 통합하는 일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BC 810년에 샴쉬-아다드 V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아닷-니라리 III세(BC 810~782)는 왕권을 이어받기에는 너무 어렸고, 그러므로 그의 아내 삼무-라마트가 자기의 아들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섭정을 했다. 그녀의 뛰어난 인격과 앗수르를 통치했던 유일한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동시대인들과 후기의 세대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으므로, 세미라미스(Semiramis)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오늘까지 이라크에 계속 살아남아 있는 고대의 숱한 전설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수로와 기념 건물과 같은 여러 고대 작품들이 그녀가 만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 이상한 종교 혁명이 아닷-니라리 III세 때에 일어났는데, 이것은 애굽의 바로 이크나톤의 혁명과 비교될 수 있다.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보르십파(Borsippa)의 신 나부(Nabu, 느보[Nebo])가 그 제국의 유일한 신 혹은 적어도 주된 신으로 선포된 것으로 보인다. 나부 신전이 BC 787년 갈라에 세워졌으며, 방백들 중 하나가 왕에게 바친 나부 신상에는 “나부를 신뢰하고 다른 어떤 신도 신뢰하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글이 나타난다. 앗수르의 종교 생활에서 나부에게 부여되었던 총애의 자리는 다른 어떤 신도 그토록 자주 인명(人名)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드러난다. 이 유일신적 혁명은 애굽에서 있었던 아톤 혁명만큼 단명했다. 앗수르의 민족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속히 그들의 무능으로부터 회복되었고, 특권의 자리들을 다시 차지했으며, 그리하여 나부를 억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일신적 혁명의 시기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성경 연대기는 요나의 봉사를 BC 793년부터 753년까지 통치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II세 시대에 두고 있다. 따라서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선교는 아닷-니라리 III세의 치세 기간에 있었을 수도 있으며, 옛 신들을 버리고 오직 한 신을 섬기라는 그의 결정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하고 단편적이어서 이 시대 동안 앗수르의 정치적 및 종교적 역사의 완전한 재구성은 아직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닷-니라리 III세의 후계자들은 서쪽으로 몇 차례의 출정을 수행했으나 속국들을 영구적으로 억압할 수도 없었고, 전에 앗수르 제국에 속해 있던 지역들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하는 우라르투의 증가하는 세력을 저지할 수도 없었다. BC 763년에 앗수르(Assur)에서 일어난 반란과 몇몇 왕들의 무기력으로 인해 앗수르(Assyria)는 붕괴 지점까지 이르렀다. 만약 한 강력한 통치자-디글랏빌레셀 III세-가 보좌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앗수르는 그보다 1세기 앞서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디글랏빌레셀 III세(BC 745~727)에 의한 신 앗수르 제국의 형성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BC 746년에 갈라에서 일어난 궁중 반란 동안 찬탈자로서 권력을 잡았으나 BC 745년 제2월까지 실제로 보좌를 취하지 못했다. 그가 예전의 위대한 제국 건설자의 이름을 자신의 통치자로서의 이름으로 택했다는 것은 그의 야망과 계획을 드러낸다. 위대한 디글랏빌레셀 I세처럼 그는 조직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앗수르 제국을 재확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새 왕은 앗수르 세력을 재확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대외 정책의 세 가지 주요 문제에 당면하고 있음을 알았다.

 (1) 바벨론이 아람인들(갈대아인들)에게 희생되었으므로 그 나라와의 관계가 분명해져야 했다.

 (2) 수리아-팔레스타인 지역들에 대한 앗수르의 통치가 재확립되어야 했다.

 (3) 앗수르의 거대한 북쪽 적수인 우라르투의 세력은 감축되어야 했다.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한 방법으로 인해 그는 가장 위대한 앗수르 통치자들 중의 하나로 불릴 권리를 얻게 되었다.

 첫째 과업은 바벨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디글랏빌레셀은 이것을 두 단계로 처리했다. 그는 즉위년에 바벨론으로 가서 그 나라의 대부분들을 점유했던 아람 부족들을 패배시켰고, 그들을 그의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시켰다. 그의 세력이 자신의 성벽 너머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던 허약한 바벨론 왕 나보낫사르(Nabonassar)는 당분간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채로 방치되었다. 디글랏빌레셀은 다른 곳에 관여하느라 바벨론을 위하여 시간을 낼 수 없었으므로, BC 734년에 나보낫사르가 사망한 후에 왕이 된 단명한 세 왕은 바벨론의 보좌에 머물러 있도록 용인되었다. 하지만 디글랏빌레셀은 그의 손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아람인 족장들이 실제적인 통치자였던 바벨론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들을 향하여 방향을 돌려서 결정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으며, 앗수르 왕에 대하여 전례가 없는 행동으로-풀루(Pulu)라는 통치자로서의 이름으로-바벨론의 왕권을 받아들이는 표시로 마르둑 신의 “두 손을 잡았다.” 앗수르는, 우월한 바벨론 문화에 대하여 앗수르 자체가 갖고 있는 열등감 때문에 결코 바벨론을 통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 왕의 통치권 아래 두 국가를 대등하게 연합함으로써 그 왕이 공히 앗수르와 바벨론의 군주가 되게 하는 기발한 해결책을 고안해냈다.

 디글랏빌레셀의 둘째 과업인 수리아의 재정복은 숱한 군사 정벌 과정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특히 알렙포의 북쪽에 있던 도성들인 아르파드(Arpad, 현재의 텔 에르파드[Tell Erfad])와 사말(Samal, 현재의 젠지를리[Zenjirli])에서 그러했다. 이 도성들을 정복하는 일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또한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도성 국가들은 유혈 전투를 벌인 후에야 비로소 항복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장기간 출정이 있은 후에 대부분의 수리아 국가들은 한 번 더 앗수르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다메섹과 이스라엘도 패배했다. 다메섹 국가(수리아)는 이스라엘의 북부와 동부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앗수르의 한 도(道)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그 나라의 남부와 함께 반(半)독립적인 봉신국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앗수르의 왕실 연보에서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불[Pul], 왕하 15:19)에게 조공을 바쳤고, 베가는 호세아로 대체되었음에 관해 읽게 된다. 사마리아와 다메섹을 대항하여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구했고 앗수르의 봉신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다메섹으로 갔던(왕하 16:10) 유다의 왕은 앗수르의 기록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름이 언급된 첫 번째 앗수르 왕이 디글랏빌레셀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기서 그는 그의 바벨론 이름 불(Pul)뿐만 아니라 그의 앗수르 이름으로도 나타난다(왕하 16:7, 10; 대하 28:20; 왕하 15:19; 그리고 역대상 5장 26절의 히브리 본문은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 곧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로 번역되어야 한다).

 디글랏빌레셀의 셋째 과업은 우라르투의 정복이었는데, 그는 이 일을 그 땅의 왕 사르두르 II세(Sardur II)와 동맹했던 국가들을 정복함으로써 시작했다. 북부 메소보다미아와 수리아의 도성 국가들을 공략함으로써 사르두르의 세력이 많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전투는 유브라데강 서쪽에 있는 쿰무(Kummuh)에서 치러졌는데, 거기서 사르두르는 심하게 패배했으나 반 호수(Lake Van) 곁에 있는 그의 수도 투쉬파(Tushpa, 현재의 토프락칼레[Toprakkale])로 피신할 수 있었다. 비록 디글랏빌레셀 이후의 투쉬파 포위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우라르투의 세력은 파괴되었으며, 앗수르인들은 우라르투의 대부분을 점유하여 그것을 울루바(Ulluba) 도(道)로 만들었다.

 정복이 있은 후에 매번 그 앗수르 왕은 원주민들을 제국의 다른 지역들로 이주시켰다. 이 정책은 백성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디글랏빌레셀은 여러 국민들을 그들의 모국과 그들이 사랑하던 토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들의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분쇄하기로 계획했으며 성공했다. 이와 같은 민족들의 교체는 그 백성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우라르투, 이스라엘, 바벨론 또는 다메섹의 시민들로 간주하지 않고 앗수르의 시민으로서 간주하는 제국을 만들기 위해 의도되었다. 따라서 유례 없이 성공적인 이 왕은 그의 앗수르 후계자들과 후에는 바벨론인들이 따랐던 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이 정책은 그 후의 근동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살만에셀 V세(BC 727~722)

 디글랏빌레셀의 아들인 살만에셀 V세는 할 수 있는 한 면밀히 아버지의 정책들을 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보좌에 오르자마자 스스로 바벨론의 왕으로도 대관(戴冠)하였으며, 그때 그는 울룰라이(Ululai)라는 이름을 가졌다. 서부의 불안으로 인해 그는 보좌에 오른 후 곧 그의 주의를 팔레스타인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그 지역을 제국 내에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디글랏빌레셀 때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가사(Gaza)의 한노(Hanno)는 살만에셀이 보좌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애굽에서 돌아와 앗수르의 봉신 군주인 이스라엘의 호세아, 하맛의 찬탈자 그리고 아르파드(Arpad), 다메섹, 시뮈라(Simyra)와 같은 도성의 통치자들과 함께 동맹을 형성했다. 애굽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이 여러 군주들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길 거부했으므로 살만에셀은 통상적인 앗수르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출정의 일부분은 반(半)독립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국가인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는데, 그 왕은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는 사마리아를 포함식 계산법(참조 136쪽)으로 3년간 포위하였으며 아마도 그의 치세의 끝 무렵에 그 도성을 취했을 것이다.

 비록 그 다음 왕 사르곤 II세(Sargon II)가 사마리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부당하며 그는 살만에셀 V세가 그의 치세 말엽에 성취한 것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증거가 있다. 하지만 사르곤은 살만에셀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사마리아를 정복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즈음에 이미 하나의 관습이 된 바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남은 자들을 북부 메소보다미아(하볼과 고산), 앗수르의 본토(할라) 그리고 북동쪽에 있는 도(道)들의 메대인 도성들로 이주시켰다. 반면에 이스라엘 땅에 다시 사람들을 거주시키기 위하여 바벨론과 구다로부터 바벨론인들을,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수리아인들을 이주시켰다(왕하 17:24).


 사르곤 II세(BC 722~705)

 이 새 왕은 찬탈자였으며, 아마도 그 전임자를 살해했을 것이다. 국내 문제들에서 사르곤과 살만에셀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든 대외 정책 분야에서는 어떤 변화도 생각해 보거나 수행하지 않았으며, 사르곤은 디글랏빌레셀이 세운 양식(樣式)을 면밀히 따랐다. 그가 가진 문제들은 디글랏빌레셀 치세 때의 문제들과 유사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디글랏빌레셀은 국가적으로 허약할 때에 보좌에 올라 사실상 무(無)로부터 하나의 제국을 건설한 반면에, 사르곤은 자신이 물려받은 것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사르곤은 부가적인 문제를 더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카우카수스(Caucasus) 지방을 통해 남쪽으로 그리고 아나톨리아에서 동쪽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인도-유럽 부족들의 침공 위협에 대처하는 문제였다.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 왕, 즉 헬라의 저술가들이 언급한 브루기아(Phrygia)의 미다스(Midas)가 그의 주된 적이었다. 갈그미스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유함으로써 미타는 사르곤과의 결판을 강요했다. 그래서 사르곤은 어쩔 수 없이 유브라데 강변의 그 유명한 도성을 차지하였고(BC 717), 그때까지 헷 문화를 생생하게 보존하면서 글을 쓸 때 헷 상형문자를 사용하던 그 주민들을 추방했다.

 루사 I세(Rusa I) 치하의 우라르투 왕국은 킴메르인들(Cimmerians)과 메대인들(Medes)로부터 혹심한 압박을 받았는데, 그것은 전통적으로 적국이었던 이 북쪽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을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르곤에게는 환영할 만한 상황이었다. 사르곤 제8년에 수행된 그의 우라르투 원정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유명한 명판에 너무나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왕의 군대를 그 진군 중에나 전투 중에나 거의 매일 추적할 수 있다. 우라르투의 정복 및 그후의 쇠약이 당분간은 앗수르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인 반면, 북쪽의 강한 완충국의 제거는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불리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앗수르로 하여금 100년 후 앗수르의 소멸에 주로 책임이 있는 새로운 야만족들과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때쯤 바벨론은 마르둑-아팔-잇디나(Marduk-apal-iddina), 즉 성경의 므로닥발라단(사 39:1)이란 매우 유능한 인물을 통치자로 맞이했다. 그는 비트-야킨(Bit-Jakin) 출신의 아람인이었으며, 사르곤은 그를 대항하는 일에 무력했다. 이것은 마르둑-아팔-잇디나를 지원했던 엘람인들의 손에 당한 쓰라린 패배의 결과였다. 12년간 사르곤은 다시 한 번 바벨론을 대적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전에는 불가불(不可不) 서쪽과 북쪽에서 원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BC 709년 그는 마르둑-아팔-잇디나를 바벨론에서 몰아내고, 앗수르의 보좌에 오른 그의 두 전임자가 그랬듯이 스스로 바벨론의 왕이 되는 데 성공했다. 1년 후에 그는 갈대아인의 국가인 비트-야킨의 중심지였던, 페르시아만 근처의 두르-야킨(Dur-Jakin)을 파괴했으며 마르둑-아팔-잇디나의 본국을 앗수르의 한 도(道)로 만들었다.

 블레셋의 해안 도성 아스돗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상태에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사르곤은 거의 분쟁 없이 지냈다. 아스돗의 통치자는 애굽, 에돔 그리고 유다의 지원을 바라면서 앗수르의 멍에를 떨쳐버리고자 애썼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그 반란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그 도성은 사르곤의 투르탄(turtan), 즉 “총사령관”(사 20:1“다르단”[Tartan])에 의해 점령되었다. 설형문자로 된 명각들을 판독하기 전에는 사르곤의 이름이 세속의 자료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의 존재 자체, 나아가서는 이사야서의 정확성이 고등 비평가들에 의해 의심받았다는 사실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사르곤의 이름은 앗수르의 기록들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들 중 하나였다. 이것은 앗수르에 관한 최초기의 발견들이 사르곤 자신의 수도 두르 샤루킨(Dur Sharrukin), 즉 지금의 코르사바드(Khorsabad)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조각품과 명각된 왕실 기록이 출토되었다.

 사르곤의 마지막 몇 년은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의 동방 원정들 중 하나에서 그의 군대는 심각하게 패배했으며, 바로 그 전투에서 그는 생명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헤립(Sennacherib, BC 705~681)

 산헤립은 그의 아버지의 치세 동안에 북쪽의 아미드(Amid) 도의 총독이었으므로, 그가 보좌에 올랐을 때는 이미 백성들을 통치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사르곤 II세의 성격과 달랐다. 그는 전쟁 장비를 기술적으로 개선하는 일과 니느웨를 앗수르 시대의 가장 영광스러운 수도로 만든 새로운 건축 방법에 예리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정치에서 그는 전혀 타협을 모르는 엄격함을 보였는데, 그것은 위대한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하며 그가 물려받은 것을 함께 유지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 약점이었다. 후세대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감명을 끼친, 그의 생애의 탁월한 두 가지 사건-그의 무분별한 바벨론 파괴와 성공적이지 못한 예루살렘 공격-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정치적 실패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산헤립이 보좌에 올랐을 때, 애굽의 도움을 믿고 있던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군주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산헤립은 서쪽으로 진군하였으며(BC 701), 그가 간 곳 대부분에서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오랜 출정 후에 마침내 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려고 라기스에 진을 쳤을 때, 유다의 히스기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히스기야는 이런 식으로 앗수르의 그 무정한 왕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러나 산헤립은 예루살렘의 무조건적인 항복 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산헤립이 필시 다른 곳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그 출정을 중단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는 그의 승전 명각들에서 새장 안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히스기야를 가두었다고 주장할 따름이었다. 그는 그 도성을 탈취했다거나 그 왕을 사로잡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유다는 당분간 구원을 받았으며, 히스기야 치세의 말엽까지 다시는 위협을 받지 않았다(참조 선지자와 왕, 339).

 BC 701년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탈취하는 데 실패한 것에 고무된 히스기야는 계속해서 반(反)앗수르 동맹에 참여했고, 이 일로 인하여 마침내 앗수르 군대들이 다시 유대로 오게 되었다. 애굽에서 타하르카(Taharka)가 보좌에 오른(BC 690) 후 있은 산헤립의 이 두 번째 출정에 대해서는 이용할 수 있는 설형문자 자료들이 없다. 그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에게 한 새로운 항복 요구는 선지자 이사야의 격려와 지지로 거부되었다. 비록 이사야는 앗수르를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하지 말도록 히스기야에게 권고했지만, 일단 히스기야가 실수한 이상, 그는 이제 왕의 편에서 왕에게 산헤립이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사 37:33)이라고 확신시켰다. 이때에 예루살렘을 구한 것은 애굽 군대가 아니라 기적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36절).

 서쪽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곳은 바벨론이었다. 산헤립이 보좌에 오르자마자 마르둑-아팔-잇디나가 엘람에서 돌아와 엘람 왕 슈트룹-나쿤데(Shutrup-nachunde)의 도움을 받아 거의 1년간 바벨론의 보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산헤립은 BC 703년에 바벨론을 향하여 진군했으며, 마르둑-아팔-잇디나를 패배시켰고, 앗수르에서 교육받은 바벨론 본토인인 벨-입니(Bel-ibni)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서쪽에서 행한 산헤립의 비참한 출정 직후에 바벨론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산헤립은 바벨론인들을 대항해서 또다시 원정을 나섰다. 이때 그 지방의 대부분이 황폐하게 되었다. 산헤립은 벨-입니를 포로로 잡고 나서 자신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를 바벨론의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엘람인들은 BC 694년에 바벨론을 탈취하였고, 네르갈-우셰집(Nergal-ushezib)을 왕위에 두었으나 1년 후에 이 왕은 산헤립에 게 사로잡혔다. 좀 더 소요가 이어진 후인 BC 692년에 갈대아인 무셰집-마르둑(Mushezib-Marduk)이 보좌에 올랐으며, 바벨론 연대기(Babylonian Chronicle)에 의하면 그는 그에 대항하여 보내진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켰다. 하지만 이제 산헤립은 바벨론의 계속적인 불안정 상태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제국에서 문제의 장소인 그곳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BC 689년에 그가 그 도성을 점령했을 때 그는 전임자들 중 아무도 감히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했다. 그는 신전과 궁전의 파편 더미를 강에 던져 그 강의 수로를 억지로 바꿀 정도로 바벨론 수도를 완전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신들은 박살냈고, 비교적 중요한 신들은 앗수르로 가져갔다. 이 행위를 바벨론인들은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약 77년 후 그들이 니느웨를 파괴했을 때 그들은 그것에 대해 끔찍한 보복을 했다.

 성경과 바벨론 연대기 그리고 에살핫돈(Esarhaddon)의 명각에 의하면, 산헤립의 생명은 그의 아들들이 앗아갔다. 이 기록들 하나하나는 이 끔찍스러운 살해에 대한 우리의 단편적인 정보에 무언가를 보태주고 있다.


 에살핫돈(BC 681~669)

 어머니가 아람인이었던 에살핫돈은 보좌에 오르자마자 그 아버지의 반(反)바벨론 정책을 뒤집었다. 그는 바벨론을 지지하는 파당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비록 마르둑 상(像)은 아슈르바니팔의 치세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나, 그는 그 파괴된 도성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앗수르를 지배하는 마르둑의 세력이 나타나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한 라기스의 포위 공격

니느웨의 궁전 큰 벽 부조(浮彫)의 한 부분(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이 부조는 유다의 요새화된 주요 도성 라기스를 앗수르인들이 정복하는 여러 단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라기스는 예루살렘의 방어를 위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남서쪽 약 48.3킬로미터에 위치했다. 여기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조공을 받았다. 부조의 이 부분은 앗수르 포위군들이 성벽을 향해 쇄도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작은 탑이 있는 성벽에 기 데 흉벽을 쌓았던(참조 사 37:33) 것으로 보인다. 경사면 위로 궁수를 그리고 방패를 가진 창병(瘡兵)들이 바퀴 달린 거대한 공성퇴(攻城战)뒤에서 진격하고 있다. 한편 성벽들 위에 있는 방어군이 그들에게 화살, 횃불 그리고 다른 날아가는 무기들을 빗발처럼 퍼붓고 있다.

 
라기스가 함락당할 때 자비를 구하는 유대인들

이것은 위에서 묘사된 것과 동일한 앗수르 부조의 다른 부분인데, 라기스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정복자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항복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왕은 천막 앞 보좌에 좌정해 있다(오른쪽). 그의 뒤에는 두 내시가 부채를 들고 서 있다. 그의 앞에는 앗수르 관리 1명과 병사 몇이 서 있다. 왼쪽으로부터 무장 해제된 많은 유대인이 무장한 앗수르 근위병들과 함께 오고 있다. 이 포로들은 자비를 호소하면서 애원의 자세로 왕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 맨 왼쪽에는 두 여인과 한 아이가 있다. 부분적으로 부서져 있는 아랫줄에는 앗수르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두 포로가 있다. 오른쪽 더 아래 구석에는 왕의 병거가 왕을 기다리고 있다. 배경은 그 도성 바깥의 작은 산들을 보여 준다. 천막 위와 왕 앞에 있는 명각들은 그 부조 전체가 라기스에 있었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히스기야의 급수 터널의 실로암 명각

이것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히브리 명각 중의 하나이며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터널의 암벽에 새겨진 것으로서 1880년에 발견된 후 도적들에 의해 서투르게 제거되어 없어졌다가 다시 회수되어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고고학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그 명각이 새겨졌던 터널은 기혼 샘으로부터 성벽 안의 새 실로암 못까지 물을 옮겼다. 그것은 산헤립의 침공 위협 하에서 히스기야가 취한 방어 조처들 중 하나인 것이 명백하다. 초기의 히브리어 문자로 새겨진 본문은 그 터널의 길이와 깊이를 언급하고 있는데, 고대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양쪽 끝에서 뚫고 들어가 중간에서 “도끼와 도끼가 마주 부딪히며” 만났는지를 말하고 있다.


 에살핫돈에 의한 애굽의 정복과 함께 앗수르 제국의 외부로 향한 세력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아슈르바니팔의 치세 동안에 최종적으로 쇠망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랬다. BC 673년에 애굽을 차지하고자 했던 에살핫돈의 첫 번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애굽의 에디오피아 왕 타하르카는 2년 후에 항복했고, 멤피스가 거의 전투 없이 함락되었을 때 그 나라 전체가 앗수르인들 앞에 무방비로 놓여 있었으며, 나일 지방의 부(富)가 앗수르로 흘러 들어갔다. 에살핫돈은 22명의 지방 군주들을 그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했으며 그들에게 앗수르 총독들을 감독으로 주었다. 애굽에서 돌아오면서 그 왕은, 그의 위대한 전임자 살만에셀 III세에 의해 남겨진 부조를 발견한 곳인 베이루트 근처의 독 강(Dog River) 가의 바위에 자신의 부조(浮彫)를 새기게 했으며, 또한 여러 수리아 도성들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것들 중 하나가 젠지를리(Zenjirli)에서 발견되었는데, 승전비에서 왕은 두로와 애굽의 왕들을 마치 야생 동물들인 양 줄로 묶어 끌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까지 그 어떤 인간도 에살핫돈만큼 위대한 권력을 소유하지는 못했었다. 아가데(Agade, 악갓)의 사르곤도 함무라비도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나 백성들을 통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박한 위험의 징후들이 이미 가시화되어 에살핫돈을 괴롭혔다. 북서쪽의 스구디아인들(Scythians), 동부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의 킴메르인들(Cimmerians) 그리고 동쪽의 메대인들과 같은 야만적인 민족들이 계속해서 세력을 얻었다. 문제를 예상한 에살핫돈은 태양신에게 이 백성이 성공할지 아니면 그들을 저지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 하나의 악으로 다른 악을 제거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킴메르인들과 메대인들을 대항하여 스구디아인들과 조약을 체결하였고, 헤로도토스가 프로토쒸아스(Protothyas)라고 부르는 스구디아인들의 두목 바르타투아(Bartatua)에게 그의 딸을 주었다.

 BC 672년에 아슈르바니팔은 앗수르의 왕세자로 선포되었고, 사실상 아버지와 함께 하는 동위왕이 되었다. 2년 후에 에살핫돈의 더 나이 많은 아들인 샤마쉬-슘-우킨(Shamash-shum-ukin)은 바벨론에 대하여 그와 동등한 위세를 부여받았다.

 에살핫돈의 통치는 암운(暗雲) 가운데 끝났다. 에디오피아의 타하르카가 다시 한 번 무대에 등장했을 때, 애굽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일로 인하여 에살핫돈은 반역자들을 징벌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나일 지방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그는 BC 669년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아슈르바니팔(BC 669~627?)

 이제 에살핫돈의 투르탄(turtan) 샤-나부-슈(Sha-Nabu-shu)가 지휘한 애굽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처벌받기 위해 니느웨에 포로로 끌려온 반역한 군주들 중의 하나인 느고(Necho)는 왕의 총애를 얻어 앗수르의 봉신으로서 애굽으로 돌려보내졌다. 그의 아들 프삼티쿠스(Psamtik)는 나부-셰지반니(Nabu-shezibanni)라는 앗수르 이름을 취했다. 타하르카의 후임자 타누타몬(Tanutamon)이 애굽을 앗수르의 멍에에서 자유케 하려고 또 다른 시도를 했으나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했다. 아슈르바니팔은 테베를 차지하여 그 아름다운 도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몇 년 후 프삼티쿠스는 앗수르의 멍에를 떨쳐버리고 애굽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앗수르가 서쪽,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부터 오는 위험들에 대처하는 일에 모든 군비를 써야 하는 때에 애굽을 속국으로 붙들어 두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나일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슈르바니팔에게는 바벨론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그의 형 샤마쉬-슘-우킨이 거기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그 반란은 실패했고, 바벨론은 탈환되었으며, 샤마쉬-슘-우킨은 그의 궁전의 화염 속에서 사망했다. 그후 아슈르바니팔은 스스로 바벨론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또한 샤마쉬-슘-우킨을 지지한 엘람을 대항하여 그리고 아라비아, 수리아 및 팔레스타인에 대항하여 여러 번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그는 흔들리는 제국을 추스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사건 현장을 떠나기 전에 대부분의 그의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친히 보는 희귀한 만족을 누렸다. 프삼티쿠스의 반란 때에 그를 지원했던 루디아의 귀게스(Gyges)는 킴메르인들과의 전쟁에서 보좌와 생명을 잃었다. 또 다른 반역자인 갈대아의 군주 나부-벨-슈마티(Nabu-bel-shumati)는 아슈르바니팔의 수중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살했다. 그리고 엘람에서는 많은 소왕들이, 마침내 교만한 엘람 왕국을 쳐부수고 그 수도 수사를 허물어버린 앗수르와 치른 여러 번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앗수르의 지나가는 영광과 왕실의 금고에 쏟아져 들어온 부(富)도 그 교만한 제국의 날들이 헤아려졌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어떤 강자가 정부의 고삐를 그의 수중에 붙들고 있는 동안은 다가오는 대재난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는, 연약한 통치자가 보좌에 오를 때는 언제나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이미 볼 수 있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많은 책을 수집한 자요 19세기 중반에 니느웨의 폐허에서 발견된 니느웨의 큰 박물관의 설립자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이 도서관 자료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의 역사와 종교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초기 정보의 대부분이 나왔다. 후에 메소보다미아의 폐허 부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엄청난 양의 설형문자 수집품은 부가적인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원래 제사장이 되기로 예정된 왕자로서 그는 세심하게 학자와 제사장의 훈련을 받았으며, 이런 이유로 그 당시의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것들을 수집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후세대들을 위하여 많은 귀중한 문헌들을 보존했으나, 그것들의 원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가 사망한 상황과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BC 626년이 그가 사망한 연도로 제시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해가 631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627년경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몇 해에 대한 에퍼님 캐넌스(Eponym Canons, 연호를 붙인 연대 목록)가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 기간에 대한 연대는 다소 불확실하다.


 앗수르 제국의 종말

 부친의 장군들 중 하나인 신-슘-리쉬르(Sin-shum-lishir) 덕분에 보좌를 차지한, 아슈르바니팔의 차남 아슈르-에틸-일라니(Ashur-et.il-ilani)는 그 다음 5년여 동안을 통치했다. 그 새 왕은 남부 바벨론을 차지했으나 갈대아 군대 장관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가 바벨론을 취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그는 바벨론을 영원히 잃었을지라도 아슈르-에틸-일라니는 메대인들을 대항한 그의 싸움에서 더 행복한 경험을 했는데, 메대인들의 왕 프라오르테스(Phraortes)가 전사한 것이다. 어떻게 그리고 어느 해에 아슈르-에틸-일라니가 일반적으로 그의 형제라고 주장되는 신-샤르-이쉬쿤(Sin-shar-ishkun)에 의해 계승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그 두 이름을 한 왕의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신-샤르-이쉬쿤은 한동안 다소 성공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벨론에 대항하여 군사 원정을 떠나 십파르(Sippar)를 정복하기까지 했다. 프라오르테스의 아들 시악사레스(Cyaxares) 지휘 하의 메대인들도 패배했다. 예전의 세력을 잃은 후 앗수르가 스구디아인들과 애굽인들과 같은 이전의 적들로부터 그때 도움을 받은 것은 이상한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앗수르의 멸망은 앗수르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다른 세력들을 낳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앗수르의 허약성을 깨닫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원리를 따라서 바벨론의 나보폴랏사르는 독립적인 왕이 된 후 곧 공격에 나섰다. 그는 군사적인 성공도 좀 거두었으나 왕이 된 후 첫 3년을 망라하는 바벨론 연대기에 드러난 바와 같이 몇 번의 패배도 했다. 현존하는 기록들의 부족으로 우리는 그 다음 7년 동안의 그의 성공과 실패에 관해서는 흑암 속에 빠져 있다. 그 연대기가 다시 이용 가능한 해인 BC 616년 나보폴랏사르는 공격에 나서서 유브라데 중부에 있는 앗수르와 아람 마을들을 정복했으나 앗수르-애굽 군대에 저항할 수 없어서 바벨론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나보폴랏사르는 옛 도성 앗수르를 차지하려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를 했다. 이 원정도 역시 실패했다. 그는 아직 독자적으로 앗수르를 패배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메대인들은 BC 614년에 타르비수(Tarbisu)와 앗수르를 함락했고, 메대 왕 시악사레스는 바벨론 왕세자 느부갓네살을 메대 공주와 결혼시킴으로써 동맹을 체결하고 조인했다. 이 정치적인 동맹은 앗수르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BC 612년 3개월의 포위 공격 후 니느웨는 연합한 메대인들과 바벨론인들에게 함락되었다. 신샤르-이쉬쿤은 가족들과 함께 궁전의 화염 속에서 사망했다. 갈라처럼 니느웨도 너무나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후세대들이 그 위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앗수르 제국은 시악사레스와 나보폴랏사르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전자는 소아시아에 대한 앗수르의 주장과 더불어 모든 북부 도(道)를 차지했으며, 후자는 메소보다미아, 수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명목상의 통제권을 인수받았다. 하지만 실제적인 통제권은 단순히 두 승리자들 간의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의 과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애굽의 원조로 아슈르-우발리트라는 이름의 앗수르 왕자는 하란을 수도로 하여 앗수르 국가를 재확립하려고 시도했으나 곧 메대인들과 갈대아인들에 의해 쫓겨났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들의 재앙이었던 앗수르는 존재하기를 그쳤으며, 그 시민들은 통치자들이 과거에 수많은 다른 민족들에게 했던 똑같은 잔인한 취급을 당했다.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예언했던 다른 히브리 선지자들처럼 나훔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나 3:18, 19).


 Ⅸ. 최초기로부터 느부갓네살 II세 때까지의 베니게


 베니게는, 비록 이 이름으로 구약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인들과 많은 접촉을 가졌으며, 이 지방의 역사는 두로, 시돈, 사르밧(사렙다), 게발(Gebal, 비블로스) 그리고 아르바드(Arvad, 아라두스[Aradus])와 같은 베니게의 도성들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발견하는 성경 학도들에게는 꽤 중요하다.

 베니게의 땅은 악고 만(Acre 灣)의 북쪽에 있고 레바논의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수리아의 좁다란 해안 지역에 걸쳐 있었고, 이것은 산들이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개의 작은 평지로 이루어졌으며, 각 평지는 해안 도성이 장악하고 있었다. 해안 평지들은 폭이 약 0.8킬로미터에서 약 4.8킬로미터까지 다양했다. 나흐르 엘-켈브(Nahr el-Kelb), 즉 베이루트 북쪽의 독 강(Dog River)과 같은 몇 장소들에는 산들이 바다로 절벽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길들은 바위를 부수어 만들어야 했음에 틀림없다. 고대에는 도성들이, 해안에서 떨어진 암석이 많은 섬들-두로와 아르바드와 같이-위에 건설되거나, 바다로 돌출한 땅이 작은 만(灣)을 형성하여 해안선이 직선으로 뻗은 해변-트리폴리와 비블로스와 같이-에 건설되었다. 이 지방은, 고대에 백향목과 다른 침엽수로 울창한 레바논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강으로부터 물을 잘 공급받았다. 베니게는 곡식, 과실 그리고 포도주가 풍부했으며, 산에서 나오는 백향목과 수리아 내지 산물의 주요 수출지로서 고대 세계의 상업 거래소가 되었다.

 그 땅의 헬라어 이름인 페니키아(Phoenicia)는 그곳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포이닉스(phoinix)-“자주색” 또는 “심홍색”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자주색 물감 재료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크나아니(Kena‘ani) 즉 가나안인들(Canaanites)이라 부르고, 그들의 지방을 가나안으로 불렀다. 이것은 베니게의 여러 도성들의 주민들이 가나안의 후손들로 등록되어 있는 창세기 10장 15~19절과 일치한다.

 베니게의 온전한 역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원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그 최초기의 역사는 완전히 모호함 속에 싸여 있다. 하지만 베니게 도성 중 하나-비블로스-는 백향목 수출을 위해 중요한 도성으로서 제3천년기의 애굽 기록 가운데 나타난다. 비블로스에서 행해진 발굴들은 애굽의 고(古)왕국 시대에 애굽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보여 주었다. 후대의 두로인들은 그들의 도성이 BC 2750년경에 세워졌다는 전통을 주장했으며, 시돈인들은 그들의 도성에 대해 훨씬 더 오래된 연대를 주장했다. 남부 베니게의 이 중요한 항구 도성들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베니게 전체가 나일 계곡의 통치자들에게 지배받던 애굽의 제18왕조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베니게인들이 애굽에 조공을 바치고 그 도성들에 애굽 수비대를 허용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경제적인 세력에 실질적으로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들의 외국 무역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대리점들은 구브로, 소아시아의 해안, 에게해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제2천년기 말엽에 그들은 경제적인 영향권을 확장했으며,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북아프리카, 스페인까지 배들을 보냈다. 그후에 영구적인 거주지들이 멀리 떨어진 육지에 만들어졌다. 이 거류지 중에서 카르타고(Carthage)가 가장 유명해졌다. 사실상 이 도성은 매우 강성해져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감히 로마의 영토 확장 정책에 도전할 정도가 되었다. 베니게의 영향권의 서쪽 끝인 스페인의 타르텟수스(Tartessus)는 “다시스의 배들”(참조 시 48:7; 왕상 10:22 주석)이 항해하여 갔던 “다시스”(Tarshish) 즉 “제련소”라고 불렸던 몇 장소들 중의 하나였다.

 BC 제2천년기 말까지 시돈은 베니게 항구 도성들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제1천년기 동안 두로가 선두를 차지해 여러 세기 동안 그곳을 지켰다. 베니게는 전 지역을 통제하는 통일된 정부를 만들지는 않았고 큰 도성들이 각각 그 자체의 통치자를 두고 있었으며 그 통제가 인접해 있는 비교적 작은 공동체들에게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비블로스의 많은 통치자들이, 그 도성을 발굴하는 동안에 발견된 명각들을 통해 알려졌으나, BC 제2천년기 중반 이후 비블로스의 정치적 역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히람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두로의 첫 번째 통치자였다. 그는 다윗 및 솔로몬과 동시대인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조력했다. 또한 그의 선원들은 솔로몬의 선원들과 더불어 오빌(Ophir)로 탐험하는 일에 참여했다.

 히람의 후계자들 중 하나는 아합의 악명 높은 아내 이세벨의 아버지인 엣바알(Ethbaal)이었다. 그는 두로의 왕이 되기 전에 아스타르테[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딸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을 때에도 그녀가 본국의 종교에 대해 가졌던 열정이 왜 그렇게 컸는지를 말해준다. 엣바알의 치세 동안에, BC 9세기 이후 서쪽에 있는 모든 땅을 조금씩 굴복시키려고 애썼던 나라인 앗수르와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BC 853년 카르카르(Qarqar) 전투에서 우리는 베니게의 도성 아르바드의 왕이 병사 200명과 함께 살만에셀 III세를 대항한 동맹국들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베니게 도성들은 조공을 바치기로 동의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들은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했으며 수지 맞는 외국 무역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했다.

 베니게의 역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두로가 살만에셀 V세와 사르곤 II세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었다. 두로는 5년 동안 포위되었으며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그 도성은 마침내 항복을 강요당했으며 또다시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두로는 산헤립 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산헤립이 그곳을 포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돈이 두로의 본을 따라 에살핫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함락되고 파괴되었다(BC 678). 두로는 몇 년 더 독립한 채로 머물렀으나 결국 아슈르바니팔의 힘에 의해 앗수르의 우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틀거리는 앗수르 제국이 신(新)바벨론 제국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 두로는 전환기의 정치적 어려움을 이용하여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고 바벨론에 조공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로 느부갓네살은 그 도성에 대항해 진군했다. 그는 두로의 본토를 차지하고 그 섬 도성을 13년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왕이 보좌에 머물러 있도록 허용했으나 바벨론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바벨론의 고등 판무관을 임명했다.


 Ⅹ. 수리아의 국가들


 수리아(Syria)라는 이름은 그 크기가 수시로 변했던 한 지역을 가리키는 지리적 용어이다. 오늘날의 수리아[시리아]는 고대에 수리아로 알려졌던 모든 것을 포함하지는 않고 예전에 그것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지 않던 지역들로 확장되어 있다. 로마 시대에는 북쪽에 있는 유브라데강에서 남쪽에 있는 홍해까지가 수리아로 명명되었다. 다른 시대에는 팔레스타인은 분리해서 생각했고, 북부와 중부 메소보다미아의 부분들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리적 용어인 수리아는, 동쪽은 넓은 수리아 사막이 그리고 서쪽은 지중해가, 북쪽은 타우루스 산맥이, 그리고 남쪽은 팔레스타인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지칭한다. 그리고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경계선은 악고의 북쪽에 있는 바다로부터 지금은 물이 고갈된 훌레 호수의 북쪽 요단까지 대략 직선으로 흐른다.

 이와 같이 구획된 지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두 개의 산맥과 교차한다. 서쪽 산맥은, 북쪽에서는 예벨 아크라(Jebel Akra, 1,597미터)에 의해서, 남쪽에서는 3,048미터 이상 솟아 있는 레바논 지방에 의해서 표시된다. 동(東)레바논(Anti-Lebanon) 산맥으로 불리는 동쪽 산맥은 남쪽으로 헤르몬산(2,814미터)에서 끝난다. 그 두 산맥 사이에는 현재 “쪼개진 틈”(split)이란 뜻의 베카(Beqa‘)라고 불리는 19.3킬로미터 폭의 고지 계곡이 그 두 강, 즉 남쪽으로 흐르는 리타니(Litani) 강과 북쪽으로 흐르는 오론테스(Orontes) 강과 함께 놓여 있다. 두 강은 마침내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몇몇 개울이 동(東)레바논 산맥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수리아 사막의 여러 오아시스에 물을 대는데, 그중에 다메섹이 그 주위의 정원 지역과 함께 가장 풍요롭고 큰 오아시스이다.

 베니게의 해안 지역은 산에 의해 수리아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 지역은 내지와 다소 다른 역사를 경험했으며, 전 절(前節)에서 따로 다루어졌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수리아는 본질적으로, 다메섹과 알렙포와 같이 오아시스 주변에서 번창했던 도성 국가 그리고 내륙의 강들 제방 위의 가데스, 카트나(Qatna), 하맛, 또는 알랄라크(Alalakh, 텔 아트샤나[Tell ‘Atshanah])와 같은 다른 도성 국가로 이루어졌다. 후자의 도성들은 모두 오론테스 강을 따라 인접해 있다. 후대의 전형적인 수리아 문화가 제2천년기에 미탄니 왕국으로 알려졌던 지역인 상(上)메소보다미아에서도 발견된다.

 베니게의 경우에서처럼 제2천년기 중엽 예전의 이 지역의 역사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BC 제2천년기 전반부의 애굽과 바벨론의 문서들은 때때로 수리아 도성들의 통치자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우리는 BC 2200년부터 1500년까지 서아시아의 대부분의 통치자들처럼 그들이 아모리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BC 18세기에 애굽까지 휩쓸고 내려온 힉소스 족은 나일 계곡으로 가는 길에 수리아를 통과했으며, 전형적인 힉소스 방식으로 육중한 흙 성벽으로 요새화한 어떤 중요한 도성들, 예를 들면 카트나(Qat.na)와 같은 도성들을 차지했다.

 BC 16세기에 모든 수리아가 투트모세 III세에게 정복되었으며 거의 1세기 동안 애굽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아멘호텝 III세와 이크나톤의 치세 동안에 몇몇 속국의 본토 통치자들이 애굽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스스로 독립했다. 이 반역적인 국가들 중 가장 강한 국가는 아무루(Amurru)였는데, 우리는 아마르나 편지들과 그 시대의 헷 기록들을 통해 그것에 관해 안다. 제19왕조 시대 동안 수리아를 소유하고자 하는 새 적수인 헷인들이 일어나 그 결과로 수리아는 빈번하게 두 적대 세력이 만나는 전장이 되었다. BC 13세기 말경 해양 백성들의 출현과 더불어 헷인들은 한 국가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 남은 자들은 하맛과 갈그미스와 같은 몇몇 수리아 도성들을 계속 소유했으며 수 세기 더 헷 문화를 보존했다.

 그때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평야들에서 수 세기 동안 살았던 아람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많은 강한 도성 국가들을 세우거나 접수했는데, 그중에서 다메섹과 그 북쪽에 있는 소바가 가장 강성하였다. 이 두 국가가 다윗 때로부터 자주 동시대의 성경 기록들에 언급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윗은 그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붙들어 둘 수 있었으나, 솔로몬의 치세 동안 또는 그가 사망한 직후에 그들은 다시 독립을 회복했다. 그때 이후로 수리아의 국가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원수들이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은 수리아인들, 특히 다메섹과 숱한 전쟁을 치렀다(그 전쟁들의 역사에 관해서는 이 논문의 해당되는 부분을 참조하라).

 BC 9세기 이후로 수리아의 국가들은, 앗수르의 왕들이 탐욕스러운 눈길을 던졌던 서아시아의 다른 민족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2세기 동안 앗수르는 조공의 일정한 유입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수리아의 아람인 국가를 대항하여 계속 원정을 보냈다. 마침내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민족 의식을 앗수르 제국에 대한 충성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정복된 국민들을 앗수르 제국의 외딴 지역들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수리아의 도성 국가들은 연이어 앗수르의 전쟁 무기의 무자비한 맹공격으로 사라졌다. 마침내 BC 732년 다메섹은 수리아의 마지막 도성 국가들 중 하나로 함락되어 앗수르의 한 도(道)가 되었다.

 다메섹의 함락은 그 지역에 있는 특징적인 수리아 문화의 소멸을 의미했는데, 그 문화는 다소 변화된 형태로 한동안 세계 문화로서 지속되었다. 수리아 주민이 분산되어 아람어가 퍼졌으며, 다메섹 함락 후 2세기 내에 애굽의 남쪽 경계선으로부터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과 페르시아의 땅 전역에 걸쳐, 심지어 인도의 서쪽 경계선까지 구어로 사용되거나 적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의사 전달 수단이 되었다. 수리아인들이 비록 정치적 단일체를 이루지는 못했고, 또 세계의 광범위한 부분들에 그 통제력을 확장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언어는 수 세기 후에 헬라인들이 그랬던 것과 다소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ⅩⅠ. 통일 왕국 이스라엘(BC c. 1050~931)


 이 논문의 앞 부분들에서 BC 7세기까지의 애굽과 메소보다미아의 역사를 망라했다. 여기서는, 각각 대략 40년을 통치했던 첫 세 왕들(삼하 5:4; 왕상 11:42; 행 13:21) 치하의 120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다. 제XII부와 제XV부에서는 분열 왕국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침입한 이래 세력이 천천히 성장하여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에서 살고 있는 민족들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통해 뿌리를 내렸다. 연합된 정부의 필요성을 느낄 때까지 그들은 약 3세기 반 동안 그 땅에서 살았다. 그때까지 그들은 사사(士師)라고 불리는,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인도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각 사사가 죽은 다음에 다른 유능한 지도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엄밀히 인간적, 정치적 견지에서 볼 때, 사무엘 시대에 표현된(삼상 8:5), 세습 왕권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목표를 성취하려면 영구히 그 지방을 소유한 채로 있어야 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통일성, 지도력의 연속성 그리고 안정된 정부가 필요했다. 이러한 결말(結末)은 왕들이 통치할 때 따라야 했던 원칙들을 규정한 모세가 예견한 것이었다(시 17:14~20).

 사울의 치하(治下)에서 왕국은 어린 왕의 무경험과 품성의 미숙 때문에 연약하게 머물렀던 반면, 지칠 줄 모르는 전사요 유능한 정치가인 다윗의 치하에서는 만만찮은 제국으로 세워졌다. 그 왕국은 나일 강변과 유브라데 강변의 제국들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그랬듯이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을 지배할 정도로 훌륭하였다. 하나님의 축복 하에 다윗의 천부적인 재질에 의해 세워지고 그 당시의 다른 큰 국가들의 연약함에 힘입어 이스라엘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탈 없이 지냈다. 일반적으로 평화로운 솔로몬의 치하에서도 연약함이 분명히 드러났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국은 와해되었다.

 하지만 위대한 두 왕의 치하에서 누렸던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한 추억 이외에도, 민족의 종교적 및 정치적 중심으로서 예루살렘이 자리잡은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평화의 도성”이라는 바로 그 이름은 모든 세대의 히브리 민족의 마음에 매력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들이 영감에 의해 다윗의 왕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이 지명하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왕권에 관한 개념은 결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울(BC c. 1050~1011)

 철저히 종교적인 본성(삼상 10:7, 10, 11; 14:37), 겸손(삼상 10:22) 그리고 관대한 성향(삼상 11:13)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인,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은 처음에는 비밀리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으며(삼상 10:1),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포되었고(삼상 10:17~24), 암몬인들로부터 야베스-길르앗을 성공적으로 구원한 후에 길갈에서 그의 직임을 확인받았다(삼상 11장). 그의 왕국은 위기의 때에는 그를 왕으로 추종했으나 그렇지 않은 때에는 중앙 정부의 개입 없이 그들 자신의 일들을 결정했던 다소 느슨한 지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치세의 초기에 그의 직임은 사사의 직임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일들도 있지만 심지어 그는 왕으로 선포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가축을 돌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왕권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사울은 그의 왕권이 세습적이 되도록 계획했다. 그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6.4킬로미터 되는, 현재 텔 엘-풀(Tell el-Ful)인 그의 수도 “사울의 기브아”의 부지에 성을 세웠다. 길이가 약 51.8미터, 폭이 약 34.7미터이고, 바깥 성벽의 두께가 약 1.8 내지 2.1미터 되는 그의 2층 성채가 W. F. 올브라이트(W. F. Albright)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요새화된 그 성벽들 및 모서리의 망대들과 함께 성채는 당시의 전형적인 히브리식 건축물을 나타낸다. 아마도 다윗이 수금을 왕 앞에서 연주했던 알현실로 보이는 가장 큰 홀은 가로 7.6미터, 세로 2.1미터였다.

 게다가 사울은, 비록 작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유지되는 첫 상비군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삼촌 혹은 어쩌면 사촌일 아브넬을 총사령관으로 한 3,0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삼상 14:50), 3개의 수비대 주둔 도성에 배치되었다(삼상 13:2).

 블레셋인들이 그들의 월등한 무기들과 군사적 경험으로 히브리인들을 정복하려고 애썼던 어려운 시기 동안 보좌에 앉은 그 새 왕은 종종 다른 민족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을 대항해서 싸우곤 하였다. 장군으로서의 그의 수완에 대한 첫 증거는 암몬인들로부터 요단강 건너편 도성 야베스-길르앗을 그가 구원한 것에서 드러났다. 남쪽의 아말렉인들과 에돔인들, 동쪽의 모압인들 그리고 수리아의 도성 국가인 소바의 아람인들을 대항해서도 성공적인 전쟁을 치렀다(삼상 14:47).

 하지만 이스라엘의 존립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은 블레셋으로부터 왔는데, 블레셋은 여러 히브리 도성, 심지어 사울의 수도에 꽤 근접한 곳에도 수비대들을 유지하고 있었다(삼상 14:52). 블레셋인들은 무기와 연장을 제조하고 날카롭게 하는 일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한때는 온 이스라엘에 사울과 요나단만 철로 된 무기들을 소유했었다(삼상 13:19~22).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너무나도 위협하였으므로 히브리인들은 상습적으로 동굴이나 접근하기 어려운 산중 은거처(隱居處)에서 피난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6절).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위대한 승리, 즉 그들이 동쪽 산지 지역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그 승리는 실제적인 전투라기보다는 하나의 군사적인 에피소드였다. 블레셋인들이 베냐민의 산지들을 차지하고 믹마스를 취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5~11절). 믹마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1.5킬로미터, 해발 약 610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믹마스의 통로를 형성하는 깊은 골짜기인 와디 엣-추웨니트(Wadi es.-S.uwenit.)를 남쪽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사울이 600명의 부하와 함께 와디 엣-추웨니트에 의해 블레셋인들과 분리된 게바에서 야영했을 때,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든 자가 게바가 세워진 세네(Seneh) 바위를 타고 내려가 그 와디를 건넌 후 블레셋인들이 믹마스에서 진영을 치고 있던 가파른 보세스 바위(Rock Bozez)를 타고 올라갔다(삼상 13:15, 23; 14:4, 5). 블레셋 진영에는 요나단의 기습으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고, 그 혼란은 요나단을 지원하기 위해 온 히브리인들로 인해 더 심해졌으며, 그 결과로 블레셋인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삼상 14:11~23).

 사울의 치세 동안 히브리인들과 블레셋인들 사이의 첫 번째 주된 회전(會戰)은 예루살렘과 아스글론 사이의 중간쯤, 즉 소고와 아세가 간의 서부 구릉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때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는 미움받는 블레셋인들에 대한 일련의 큰 승리들의 시작을 나타냈다. 그 주된 결과들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증진된 자유 및 블레셋인들로부터 취한 전리품들로 인하여 얻어진 상당한 분량의 부(富)였다(삼상 17장).

 그 민족과 그 왕가에 불행한 일로서 사울은 그의 많은 성공의 결과로 오만하게 되고 수양이 안 된 품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레위기의 율법과 하나님의 명령들을 위반함으로써 그는 왕권과 제 정신을 잃었다. 몇 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마지막 몇 해는 광기의 그림자 속에서 보냈으며, 그 결과로 그의 후계자가 될 운명으로 그가 알고 있었던 다윗을 죽이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의 옛 상담자 사무엘의 우정과 인도하는 손길을 잃은 후(삼상 15:17~23, 35) 그는 놉의 무죄한 제사장들을 학살한 것(삼상 22:11~21)과 자신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삼상 20:30~33)과 같은 몇몇 가장 어리석고 잔학한 범죄들을 저질렀다. 그는 강신술을 근절하려는 열의로 알려졌으나 마침내 그가 사망하기 바로 전날 조언을 위해 무당에게 호소했다(삼상 28:3~25).

 에스드랠론 평야의 동쪽 끝에 있는 길보아 산에서 싸운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블레셋인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삼상 31:1~6). 이 전투는, 사울의 오랜 통치의 모든 이득을 블레셋인들에게 잃어버릴 정도로 비참했으며, 그들은 한 번 더 이스라엘의 도성들을 점유했고, 공포에 질린 그 주민들을 그들이 예전에 살던 산중 은거처로 몰아냈다.


 다윗(BC 1011~971)

 사울이 사망한 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릴 왕으로 즉위하였다(삼하 2:3, 4). 과거에 그는 사울의 군대에서 지휘관이었고 한때는 사울의 사위였으나(삼상 18:27), 추방자로서 남부 유다의 숲과 산중 동굴에서, 그리고 사울의 치세 마지막 몇 해 동안은 한 블레셋 도성에서 살았다(삼상 19~29장). 사울이 왕으로서 거절당한 직후에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비밀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용사, 시인 그리고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삼상 17장; 삼하 1:17~27; 삼상 16:14~23). 그는 또한 깊이 종교적이어서, 비록 그가 엄청난 죄에 빠졌을지라도, 어떻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총애를 다시 얻을지를 알았다(참조 시 51편). 따라서 왕권은 영구히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확증되었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의 영원한 왕권으로 절정에 달한다(롬 1:3).

 다윗의 통치는 첫 7년간 유다에 한정되었으며, 그동안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은 요단 동편에 있는 그의 수도 마하나임으로부터 나머지 지파들을 통치했다. 두 경쟁자 왕들은 그 관계가 씁쓸했으며 쟁투와 유혈로 폭발했다(삼하 2:12~32). 사울의 군 지휘관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보좌 뒤에 있는 실권자였으며, 아브넬의 지지가 철회된 직후 이스보셋은 암살자들에게 희생되었다(삼하 3, 4장). 그의 실명은 “바알의 사람”을 뜻하는 에스바알(Esh-baal)이었던 것으로 보이며(대상 8:33; 9:39), 그것은 그가 태어났을 때 사울은 바알을 숭배할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음을 암시한다. 사무엘하를 기록한 영감받은 저자에게 이 이름은 너무나도 치욕적이어서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저자는 일관되게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을 이스보셋(“수치의 사람”)이라 부르기로 선택하였다.

 다윗은 헤브론을 그의 수도로 삼았으며, 사울의 짧은 왕조의 끝을 나타내는 이스보셋의 사망 후에 거기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즉위했다. 7년 반 동안 통치한 후 다윗은 새 수도를 세우려고 착수했다. 그는 그때까지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도성을 수도로 택함으로써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현저한 정치적 지혜를 드러냈다. 유다와 베냐민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의 요새를 정복함으로써, 그리고 왕국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중심지를 중심적인 위치이기는 하나 그 지방을 관통하는 주된 국제적인 공로(公路)에서 떨어져 있게 설치함으로써 다윗은 훌륭한 정치적인 예지를 보였다. 그때이래 줄곧 예루살렘은 중요한 도성이었으며 세계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했다.

 다윗의 치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사적인 승리들로 특색을 이룬다. 그는 거듭해서 블레셋인들을 패배시켰으며(삼하 5:17~25; 21:15~22; 23:13~17), 이스라엘을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블레셋인들을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그리고 에그론 도성들 주변의 해안 지역으로 국한시켰다. 그는 또한 모압인들, 암몬인들 그리고 에돔인들을 정복하였고(삼하 8:2, 14; 10:6~11:1:1; 12:26~31; 대상 18:2, 11~13; 19:1~20:3:3), 다메섹과 소바의 아람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삼하 8:3~13; 대상 18:5~10). 다른 민족들은 하맛의 왕과 같이 선물을 보내거나(삼하 8:9, 10) 두로의 베니게 왕과 같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의 우호를 구했다. 이런 식으로 다윗은 간접적으로 수리아의 많은 부분들뿐만 아니라 해안 지역을 제외한 서부와 동부의 모든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수 있었다. 실제적으로 유브라데강과 애굽 사이의 모든 영토가 다윗의 총독들에 의해 통치되거나 그에게 우호적이거나 조공을 바쳤다.

 다윗의 국내 정책들은 그의 대외 정책들만큼 그렇게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수세(收稅) 목적에서나 그의 왕국의 잠재적인 인력 평가를 위해서 그는 인구 조사를 하게 했는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장군 요압도 분개했다(삼하 24장; 대상 21, 22).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몇몇 다른 강한 정치적인 통치자들처럼 다윗도, 예를 들면 막간에 삽입된 밧세바 사건(삼하 11:2~12:25:2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때때로 그의 육욕에 희생되었으며, 일부다처론자로서 이 관습의 불행한 결과들을 함께했다. 그의 아들 중 하나는 근친상간을 저질렀으며(삼하 13장), 다른 한 아들 압살롬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고 후에는 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이은 전투에서 죽었다(삼하 13~19장). 베냐민 지파 사람 세바의 반역도 심각한 혼란과 유혈 사태를 야기했고(삼하 20장), 다윗이 죽기 직전 그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아도니야가 궁중 혁명에 의해 보좌를 얻으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왕상 1장). 다윗은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의 굽히지 않는 지지와 함께 그의 강한 개성으로 모든 분열 세력들을 용케 극복했다. 그 왕국은 강력한 단일체로 솔로몬에게 이양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기본적인 충성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죄에 대한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는 선지자 나단과 갓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유례 없는 성질의 약속과 축복들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의 큰 열망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던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의 손과는 달리 그 손에 피가 묻지 아니한 그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따라서 다윗은 솔로몬이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 목적으로 그 성전을 위한 땅을 사고 도면을 만들고 기금을 모았다(삼하 7장; 대상 21:18~22:5).


 솔로몬(BC 971~931)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세 번째 통치자이며 그 이름이 여디디야, 즉 “여호와의 사랑받는 자”(삼하 12:24, 25)이기도 한 솔로몬은, 보좌명(throne name)을 갖는 동양적인 관습을 따라 “평화롭다”라는 뜻의 “솔로몬”이란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통치는 이 명칭이 적절할 뿐만 아니라 인기 있게 만들었다.

 명시되지 않은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은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되도록 선택했으며, 다윗은 나이가 더 많은 아도니야를 보좌에 앉히려고 한 궁중 혁명을 겪는 과정에 솔로몬을 왕으로 선포했다(왕상 1:15~49). 비록 솔로몬이 처음에는 아도니야에 대해 온후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는 그 사건을 잊지 않았다. 솔로몬의 대적들이 범하는 사소한 실수도 보통 그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게 했다. 따라서 그 음모의 선동자인 요압과 아도니야가 결국 모두 처형되었으며,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직분에서 쫓겨났다(왕상 2장).

 초기 생애에 비범한 경건을 나타내면서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그 새 제국을 통치하는 어려운 과업에 지혜를 요청했는데, 그는 그 제국의 정치적인 문제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들인지를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지혜의 예들이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에 나오는데, 고대의 모든 다른 유명한 현인들의 지혜를 능가했다(왕상 3:4~4:34). 이 명성은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을 솔로몬의 궁전으로 끌어당겼으며, 그러한 방문들 중에서 아라비아에 있던 스바 여왕의 방문이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4:34; 10:1~10).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국은 남쪽의 아카바 만(灣)으로부터 북쪽으로는 거의 유브라데강까지 뻗쳤다. 전무후무할 만큼 이스라엘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앗수르와 애굽 둘 다 이때 매우 연약했으므로 솔로몬은 그의 이웃 국가들로부터 실제적인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육로와 해로로 큰 무역 사업들에 과감히 착수하여 그의 백성이 예전에 전혀 본 적이 없는 부(富)가 그에게 들어왔다. 따라서 그의 통치의 광휘는 마태복음 6:28, 29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전설적인 것이 되었다.

 이미 베니게인들이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했으므로, 솔로몬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라비아와 동부 아프리카로 상업적인 기획들을 전개하여 두로 선원들의 도움으로 해상 원정을 수행했다(왕상 9:26~28). 아카바 만의 상단에 있는 도성 에시온게벨은 이 원정들에 대한 귀항지로서뿐만 아니라 사해와 에시온게벨 사이의 지역인 와디 아라바(Wadi Arabah)에서 채광한 구리를 위한 상업적인 중심지로 이바지했다. 솔로몬은 또한 많은 육상 무역로를 지배했으므로 이스라엘은 애굽의 전차들과 아마포, 시칠리아의 말 그리고 아라비아의 여러 산물을 위한 거대한 집배소(集配所)가 되었다. 실제로 솔로몬의 국고를 풍요하게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동쪽으로부터 애굽으로 또는 남서쪽으로부터 메소보다미아로 들어오지 못했다(왕상 4:21; 10:28, 29).

 왕은 또한 광범위한 건축 계획들로 바빴다. 옛 예루살렘의 북쪽 모리아산에 그는, 7년만에 세워진 장엄한 성전(왕상 6:37, 38) 그리고 건축하는 데 13년이 걸린 그 자신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채를 건립했다(왕상 7:1). 그는 또한 “채워 넣은 것”을 의미하는 밀로(millo’
)를 건설했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시온과 모리아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수했다(왕상 9:15, 24).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일련의 병거 도성들이 전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이것은 대규모의 상비군과 많은 말과 병거를 요구했는데, 이 모두가 국가 예산에서 값비싼 항목들이었다(왕상 4:26; 9:15~19; 10:26; 대하 9:28). 게셀과 므깃도에서 행한 발굴들은 이러한 성경 기록들에 빛을 던져 주었다.

 왕은 그의 다양한 사업들을 위하여 강제 노동력을 사용했으며(왕상 5:13~18; 9:19~23), 기술 노동자와 선원들을 위해서는 베니게인들을 이용했다(왕상 7:13; 9:27). 웅장한 건축 계획들과 군대의 광범위한 요구는 솔로몬의 엄청난 세입조차도 그 계획에 자금을 공급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던 정도로 이스라엘 경제에 무리를 주어, 그 결과 한때 그는 필요한 목재와 금에 대한 대가로 갈릴리의 20개 성읍을 베니게에게 양도해야만 했다(왕상 9:10~14).

 동양의 군주들의 관습을 따라 솔로몬은 대규모의 후궁을 두었으며, 애굽을 포함한 대부분의 주변 국가들의 공주들과 결혼함으로써, 외국의 신들에게 바쳐진 사당들이 예루살렘에 세워지도록 허용함으로써(왕상 11:1~8) 국제적인 선의를 조장하려고 시도했다. 애굽 공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나안 사람들로터 정복한 도성 게셀을 혼인 지참금으로 가져왔는데, 솔로몬이 그녀에게 별궁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왕상 3:1; 9:16, 24) 그가 편애하던 공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국의 외적 영광, 호화로운 궁정 예식, 나라 전역에 있는 견고한 새 요새들, 강력한 군대 그리고 거대한 무역 사업들도 솔로몬의 제국이 곧 와해될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중한 세금과 강제 노동 요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풍겨나올 쇠약함의 징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정복된 민족들 사이에 동요가 있었다. 성경에는 공개적으로 솔로몬을 대적하며 나선 반역자들 가운데 오직 세 사람-에돔인 하닷,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지만(왕상 11:14~40), 솔로몬이 사망하자마자 일어났던 사건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도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경 기자들은 그들의 영웅들의 종교적인 삶에 더 관심이 있었으므로 솔로몬 왕의 세력의 쇠퇴와 그 제국의 와해의 주된 이유를 그가 종교적인 의무의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으로 언급한다. 비록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그 봉헌식에서 깊은 영적 경험을 반영하는 기도를 드렸음(왕상 8:22~61)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례 없는 일부다처와 우상숭배에 빠져(왕상 11:9~11) 어리석은 정책들을 채택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왕국의 멸망을 재촉했다.

 솔로몬이 사망하자마자 이스라엘 지파들은 두 파벌로 나뉘었고 여러 속국들은 독립을 선포했다.


 ⅩⅡ. 유다 왕국(BC 931~609)과 이스라엘 왕국(BC 931~722)


 [이 기간의 연대기의 기초가 되어 있는 원리들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 주석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라. 연대표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조하라.]


 유다의 왕들: 르호보암(BC 931~913)

 솔로몬의 분별 없는 아들 르호보암으로 말미암아 히브리 통일 왕국은 끝나고 결코 되살아나지 못했다. 르호보암이 대관식을 위해 세겜으로 갔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가 도입했던 과중한 세금 부담과 강제 노동에 대해 그의 신하들 사이에 뿌리깊은 불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합리적인 요구를 따르라는 경험 많은 모사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그들의 부담을 증가시키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그의 북쪽과 동쪽의 신하들이 솔로몬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망명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의 지도 하에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키도록 자극하였다(왕상 12:1~20).

 비록 르호보암은 열 부족이 분리될 때에 그의 형제들과 싸우지 말라는 선지자 스마야의 충고에 주의했지만, 그는 그후에 여로보암과 몇몇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렀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12:24; 14:30). 그는 또한 치세 제5년에 애굽의 셰숑크 I세(Sheshonk I, 시삭 I세[Shishak I])에게서 역사에 남을 공격을 당했다(왕상 14:25~28). 그것에 관해서는 카르나크 신전 벽에 있는 셰숑크의 승전 부조가 여전히 입증하고 있다. 이 공격은, 유다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는 도로들을 보호했던 많은 성읍의 요새들을 강화했던 사실(대하 11:5~12)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암몬 여인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대규모의 후궁을 두고 이교의 신들에 대한 예배를 그들의 모든 지긋지긋한 의식들과 함께 장려했다(왕상 14:22~24; 대하 11:21).


 아비얌과 아사(BC 913~869)

 그 다음 왕 아비얌은 짧게 통치했을 뿐이지만(BC 913~911), 여로보암 I세와 전쟁을 했으며, 모든 그의 악행에 있어서 그의 아버지를 추종했다(왕상 15:1~8).

 아비얌의 아들인 아사와 함께 선한 왕이 다시 보좌에 올랐다(BC 911~869). 그는 아세라를 위하여 우상을 세웠던 그의 할머니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남창들을 추방했다(10~13절). 종교개혁에 아사가 헌신했던 그의 치세 초기의 평화스러운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는 세라의 지도하에 있는 에디오피아인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아마도 홍해의 동쪽 해변에서 왔던 구스인들일 것이다(대하 14:9~15).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아마도 왕국 분열 후 제36년에 유다 북부 지역을 차지했을 때(대하 16:1), 아사는 그 자신의 열등한 군대를 이끌고 감히 그 북방 군대를 맞으려고 하지 않고 수리아의 벤하닷을 설득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약화시켰다.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이 믿음의 결핍 때문에 아사는 선지자 하나니에 의해 심하게 견책을 받았다(1~10절).

 아사의 마지막 몇 해는 나쁜 건강으로 특징지어지며(12절), 따라서 그는, 연대기 자료들이 지적하듯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분열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의 잠정적인 연대기
애굽 유다 이스라엘 앗수르
리비아 왕조, 950~750 (사울, 1050~1011; 다윗, 1011~971; 솔로몬, 971~931)
제22왕조   르호보암 931~913 여로보암 세 931~910 아슈르 단 II세 933~910
    아비얌 913~911    
세송크 I세   아사 911~869 나답 910~909 아닷-니라리 I세 910~889
      바아사 909~886 투쿨티니누르타 889~884
오소르콘 I세     엘라 886~885  
      시므리 885  
타켈롯 I세     오므리 885~874 아슈르나시르팔 II세
      (티브니 885~880) 884~859
오소르콘 II세 제23왕조      
  페두바스트      
세송크 II세 세송크 IV세 여호사밧 872~848* 아합 874~853 살만에셀 III세 859~824
타켈롯 II세 오소르콘 III세 여호람 854~841* 아하시야 853~852  
세송크 III세 타켈롯 III세 아하시야 841 요람 852~841  
파미 아멘롯 아달랴 841~835 예후 841~814 샴쉬-아닷 V세 824~810
세송크 V세 오소르콘 IV세 요아스 835~796 여호아하스 814~798 아닷-니라리 III세 810~782
    아마샤 796~767 여호아스 798~782 세미라미스(섭정)
    아사랴 여로보암 II세 793~753* 살만에셀 V세 782~772
제24왕조 제25왕조 (웃시야) 790~739* 사가랴 753~752 아슈르단 III세 772~754
(사이스 왕조) (에디오피아 왕조)   살룸 752 아슈르-니라리 V세 754~746
750~715 c. 715~663 요담 750~731* 므나헴 752~742 디글랏빌레셀 III세 745~727
리르나크트 피안키   브가히야 742~740  
복크리스 샤바카 아하스 735~715* 베가 752~732*  
  샤바타카 히스기야 729~686* 호세아 732~722 살만에셀 V세 727~722
  타하르카     사르곤 II세 722~705
  타누타몬     산헤립 705~681
26왕조 663~525 므낫세 697~642*   에살핫돈 681~669
프삼티쿠스 세 663~610 아몬 642~640   아슈르바니팔 669~627?
  요시야 640~609   아슈르-에틸-일라니 627?~ ?
느고 II세 610~595 여호아하스 609   신- 샤르 이쉬쿤 ? ~612
  여호야김 609~598   아슈르 우발리트 II세 612~609
  여호야긴 598~597    
프샴티쿠스 II세 595~589 시드기야 597~586   바벨론
아트리에스(호프라) 589~570     나보폴랏사르 626~605
아마시스 570~526     느부갓네살 605~562
프샴티쿠스 III세 526~525      

* 베가를 제외하고는 바로 이전의 통치가 마감된 연도와 일치하는 통 치의 초기 연도는 동위 왕직을 나타낸다. 베가의 연도는, 비록 그가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를 살해한 후에야 그 왕국의 실제적인 통치권을 갖게 되었지만 BC 753년뷰터 계산 되었다.

주: 앗수르 왕들의 연대는 봄부터 봄까지의 연도 내에 상당히 확실하게 고정된 것으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얘를 들면, 아슈르-단 II세는 933년 봄과 932년 봄 사이의 어떤 때에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더 정확한 것은 거의 없다. 느부갓내살의 통치에 대한 연대들은 천문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제22왕조부터 제25왕조까지 애굽왕들에 대한 치세 연대들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여러 왕조들에 대해 여기 주어진 연대들은 대략일 뿐이다. 제23왕조의 첫 왕들은 제22왕조의 왕들과 동시대인긓리가.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연대 추정의 가초에 관해서는 제4권의 논문 “출애굽부터 바벨론 유수까지의 연대기” IV항을 참조하라. 티브니에 관해서는 (80)? 쪽을 참조하라. 여호람과 요람의 이름들에 관해서는 (78)? 쪽에 있는 각주를 참조하라. 치세 연도들, 심지어 잘 확립되어 있는 것들도 정확한 형태로 주어져 있지 않다(931/930 등등으로, (35)? 쪽을 참조하라). 따라서 만일 본문이 특정한 즉위 연대를 제공하지 않으면, BC 연대에 더하기 혹은 빼기 1년의 여지를 허용하라.


 여호사밧으로부터 아하시야까지(BC 872~841)

 여호사밧(BC 872~848)은 그의 선한 아버지의 종교개혁을 계속했다. 비록 그가 모든 산당을 제거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그 나라를 통과하면서 율법을 설교하도록 한 공적이 있다(왕상 22:43; 대하 17:7~9). 그는 오므리 왕조와 동맹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오랜 숙원(宿怨)을 종결짓고 유다의 왕세자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켰는데(왕하 8:18, 26), 그것은 불행하게도 유다에 바알 숭배의 문을 열었던 연합이었다. 여호사밧은 또한 북방 왕들의 군사 원정들을 지원했다. 아합과 함께 그는 라못-길르앗(길르앗 라못)에 대항해 올라갔으며(대하 18:28), 이스라엘 왕 요람5)과 함께 모압에 대항해 올라갔다(왕하 3:4~27). 그는 에돔인들, 모압인들 그리고 암몬인들의 강력한 연합국과도 싸웠다(대하 20:1~30). 그러나 블레셋인들과 아랍인들과 같은 여러 민족들은 여호사밧의 업적에 너무나도 감명을 받아 그와 친선을 도모했다. 솔로몬의 오빌 원정대들을 부활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배들이 에시온 게벨에서 파선했을 때 실패했다(35~37절).

 여호람(BC 854~841)은 그와 동시대인인 이스라엘의 요람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과 함께 왕위에 있었다. 여호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좋은 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악하고 우상숭배하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유다에 바알 숭배를 장려했으며(왕하 8:18), 블레셋인들 및 아랍인들과는 성공적이지 못한 전쟁을 했으며(대하 21:16, 17; 22:1),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대하 21:12~19).

 아하시야(BC 841)는 그의 부모들의 타락한 길을 따랐으며, 그의 외삼촌인 이스라엘의 요람과 함께 수리아인들을 대항한 성공적이지 못한 전쟁에 가담했다가(왕하 8:26~29) 이스라엘의 요람을 대항한 예후의 음모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는 회복을 위해 도주했던 곳인 므깃도에서 사망했다(왕하 9:14~28).


 이스라엘의 왕들: 여로보암 I세(BC 931~910)

 다윗 왕조로부터 탈퇴하자마자 유다, 베냐민, 그리고 레위를 제외한 모든 지파들은 솔로몬으로부터 도망쳐 갔던 애굽에서 근래에 돌아온 정치적 망명자인 여로보암을 호출했다(왕상 12:19, 20). 여로보암은 밀로를 건축하는 일에 종사했던 일단의 노동자들의 감독으로서 솔로몬을 섬겼던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국내 정책들에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격려를 받아 대적하는 일에 더욱 담대하게 되었음이 분명한데, 아마도 솔로몬에게 적발되었으며 그 결과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도주했다(왕상 11:26~40).

 여로보암 I세는 22년간(BC 931~910) 북방 왕국을 그 첫 번째 왕으로서 통치했다. 그는 세겜을 첫 수도로 삼았으나 나중에 디르사로 옮겼다. 디르사는 아직도 명백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나블루스(Nablus)의 북동쪽 약 11킬로미터에 있는 현재의 텔 엘-파라(Tell el-Far‘ah)에 있었을 것 같다. 므깃도의 것보다 더 큰 이 토루(土壘)에서 근래 발굴들이 행해졌으나 그곳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명백한 단서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여로보암은 그의 불만족한 남방 이웃들, 처음에는 르호보암, 그 다음에는 아비얌에게 대항하여 계속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의 땅은 또한, 비록 성경이 유다와 예루살렘만을 그 공격의 희생물로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셰숑크의 군사 원정 동안 황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거에 의하면 분명히 셰숑크가 북방 왕국도 침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카르나크 부조에 많은 북방 도성들의 이름을 새겼기 때문이다. 또한 셰숑크의 승전비 단편(斷片) 하나가 여로보암의 도성 므깃도의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여로보암은 셰숑크에게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않아서 셰숑크가 그에게 대항해서 이 군사 행동을 취하도록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 도피자로서의 여로보암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셰숑크가 일단 여로보암이 왕이 되자 왜 그토록 신속하게 그를 대항하여 방향을 돌렸는지 분명하지 않다.

 정치적인 이유들로 여로보암은 여호와에 대한 참 예배로부터의 이탈을 나타내는 종교적 예식들과 관습들을 도입했다. 벧엘과 단에 그는 신전들을 세우고 여호와를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기 위해 송아지들을 만들었다(왕상 12:27~31). 2세기 동안 이 금송아지 숭배는 “여로보암의 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를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았던 왕들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배도에 그를 따랐다고 말한다.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명각이 있는 질그릇 조각은 이 송아지 숭배에 기묘한 빛을 던진다. 그것은, “여호와는 송아지다”라는 의미인 에겔야우(Egeljau)라 불리는 어떤 남자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신 엘이 황소라고 생각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송아지의 형태로 예배했음을 나타낸다.

 여로보암은 또한 주된 축제의 달인 히브리 성력(聖曆, ecclesiastical calendar)의 제7월을 제8월로 바꿨다(32, 33절). 이스라엘의 연대기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민간의 해(civil year)가 가을에 시작되었던 남방 왕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봄에 시작되는 민력(民曆, civil calendar)이 이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남방 왕들이 그들의 통치년을 계수할 때 즉위년 제도(accession-year system)를 사용했으므로, 아마도 여로보암은 다만 다르게 하려는 이유만으로 애굽의 비즉위년 제도(nonaccession-year system)를 도입했을 것이다.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자로서 그의 통치를 시작했고 또한 하나님과 그가 정한 예배 양식에대항하여 반역한 여로보암은 그의 왕국을 가능한 가장 약한 기초 위에 세웠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사실이었다. 그의 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난 그의 왕조도 연속되는 그 어떤 왕조도 수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이스라엘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 10개의 왕조와 20명의 왕이 있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여로보암이 이끌어들였던 종교적 곤경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더 깊이 우상숭배와 이방의 부도덕의 수렁에 빠져들어 그 원수들인 수리아와 앗수르에 의해 조금씩 씹혀져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나답으로부터 시므리까지(BC 910~885)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의 사악한 통치(BC 910~909)는 그가 블레셋 성읍인 깁브돈에서 바아사에게 살해됨으로써 짧게 끝나버렸다. 이렇게 첫 왕조가 끝났다(왕상 15:25~29). 이 두려운 전례는 10개의 다른 왕조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까지 거듭 반복되었다. 바아사(BC 909~886)는 유다를 계속해서 괴롭혔으나, 유다 왕 아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다메섹의 벤하닷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얻었던 영토를 상실했다(왕상 15:16~16:7). 바아사의 왕조는 그 앞의 왕조처럼 끝났다. 그의 아들 엘라(BC 886~885)는 2년도 되지 않는 통치 후 그의 수도 디르사에서 그의 장군들 중 하나인 시므리에 의해 살해되었다(왕상 16:8~10). 시므리는 7일밖에 되지 않는 그의 짧은 통치를 바아사의 모든 친척들과 친구들을 죽이는 데 사용했다. 그때 블레셋 족에게 대항한 군사 원정에 참여해 있었다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왕으로 선포된, 엘라의 또 다른 장군인 오므리는 디르사로 진군하여 그 도성을 차지했다. 저항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시므리는 오므리에게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화염 속에서 죽었다(11~18절).


 오므리(BC 885~874)

 오므리는 네 왕이 44년의 기간(BC 885~841)에 걸쳐 보좌를 차지했던 왕조의 창립자가 되었다. 처음에 오므리는 보좌를 두고 또 다른 경쟁자인 디브니와 싸워야 했는데, 그도 백성들 중에 상당히 많은 추종자가 있었다. 오므리가 디브니와 그의 추종자들을 근절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인 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후였다(21~23절). 이것은 시므리의 7일간의 통치를 아사 제27년에, 오므리가 단독 통치자로서 보좌에 오른 일을 아사의 제31년에 배정한 15절23절의 연대기적 진술들로부터 명백하다.

 오므리의 12년간 통치는 성경 기록들이 지적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를 전략적인 장소로 선택함으로써 다윗이 예루살렘의 선택에서 했던 것과 같은 것을 이스라엘을 위해 했다. 약 122미터 높이의 이 작은 산은 찻종 같은 평야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방어될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군사력에 의해 점유되지 않고 다만 물이나 식량의 부족으로 항복했던 것이 명백하다. 발굴에 의해 그 장소는 오므리 시대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성경 기록들에서 암시된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는 그의 수도를 이 장소로 옮긴 후, 그의 아들 아합에 의해 완공된 광범위한 방어 시설들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오므리가 개인적으로 앗수르와 조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다음 100년 동안 앗수르 기록들은 오므리 왕조가 사라진 지 오랜 후에도 이스라엘을 “오므리 집의 땅”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의 인격, 정치적 성공 또는 사업 계획들이 동시대인들과 후세대들의 눈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오므리는 그의 베니게 이웃들과 충심으로 관계를 확립했으며 그의 아들 아합을 두로 왕의 딸 이세벨에게 장가들게 했다. 이 동맹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범위까지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시켰다(왕상 16:25). 그는 또한 다메섹에 경제적으로 양보하여 수리아 상인들이 사마리아의 저자거리에 가게들을 갖도록 허용했다(왕상 20:34). 이스라엘은 수리아인들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야 다메섹에서 그와 유사한 특권들을 받았으므로 오므리는 수리아인들에게 패했으며 그들에게 어떤 영토를 양도했고 경제적인 양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므리는, 유명한 모압 돌에 새겨진 긴 명각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모압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명각에서 모압 왕 메사(Mesha)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 그가 모압을 많은 날 동안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모스가 그의 땅에 대하여 화를 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모압을 차지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모압이 오므리의 아들 아합에게 바친 공물로부터 볼 수 있다. 그것은-아마도 매년-“새끼양 십만의 털과 숫양 십만의 털”(왕하 3:4)에 달했다고 한다.


 아합(BC 874~853)

 그 다음 왕 아합과 함께 연약한 통치자가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의지가 굳센 그의 베니게인 아내를 저항할 힘이 없었는데, 그녀는 그녀 자신의 종교를 최고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모국으로부터 수백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 및 선지자들을 왕의 식탁으로 데려오고, 가나안 제사 제도의 부도덕한 의식들을 도입하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임으로써 이세벨은 가장 심각한 종교적 위기를 야기했다(왕상 18:4, 19). 이 위기 때문에 그리고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몇 명의 영적 지도자들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살고 활동했기 때문에 성경은 아합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엘리야는 참 종교의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 선지자에 의해 여호와의 심판으로 예언된 3년 반 동안의 오랜 가뭄으로 인해 아합의 땅은 경제적인 파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가뭄은 여호와의 능력과 바알의 능력 사이의 쟁투가 벌어졌던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에 대해 엘리야가 승리했을 때 끝났다(17~40절). 그러나 아합이 통치하는 한 바알의 이방 예배는 번성했다. 아합이 그의 자녀들에게 바알이 들어간 이름들을 감히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데, 알려진 그들의 모든 이름, 즉 아하시야, 요람 그리고 아달랴는 여호와의 축약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하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거의 망설임이 없었다. 사마리아 발굴 동안 발견된, 각인된 질그릇 조각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그 당시와 그 다음 시대들의 숱한 인명들이 바알과 연관되어 아비바알, 바알라, 바알차마르, 바알차카르 등등으로 지어졌다.

 아합은 그가 지은 “상아궁”으로 유명해졌다(왕상 22:39; 암 3:15). 사마리아 발굴에서 발견된 아름답게 조각된 숱한 상아 장식판들은 그의 궁전 내부가 아마도 상아로 장식되어 있었을 것을 드러낸다. 그 디자인들은 수리아와 앗수르의 상아 장식들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전사(戰士)로서 아합은 어지간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두 번 수리아인들을 패배시켰다. 승리한 이 두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은 그를 굉장히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다메섹에서의 경제적인 이권을 그에게 확보해 주었다(왕상 20:21, 34). 따라서 한동안 그는 앗수르의 서쪽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 중 하나가 되었다. 살만에셀 III세가 수리아로 진군해 들어왔을 때 아합은 앗수르인들과 대항하여 그의 이전의 원수들과 공동 전선을 폈으며, 어떤 동맹국보다도 가장 많은 전차들을 소집했다. 이 사실은, 상부 티그리스의 역사적인 암석 명각에 보존된, 카르카르(Qarqar) 전투에서의 살만에셀의 적들의 명단에 밝혀져 있다. 그 명각은, 앗수르인들에게 대항해 싸웠던 3,940개의 전차 중 2,000개가 아합에게 속했던 반면 다른 동맹국들은 모두 합쳐 1,940개만 소집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52,900명의 보병 중 아합이 10,000명을 제공했다. 키르카르 전투가 살만에셀의 전진을 저지했을 때 그의 힘을 의식한 아합은 요단강 건너편 성읍인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차지하려고 다메섹을 대항해 방향을 돌렸으나 그 전투에서 생명을 잃었다(왕상 22장).


 아하시야와 요람(BC 853~841)

 그의 앞의 그 아버지만큼이나 완전히 타락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짧은 치세 동안(BC 853~852) 아마도 유다의 여호사밧과 협력하여 행해졌으나 실패로 끝난 오빌 원정(대하 20:35~37)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여호람(BC 852~841)이 보좌를 계승했다. 그의 시대에 모압의 메사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이 비록 유다의 여호사밧과 공조하여 군사 원정에 착수함으로써 모압에 비참한 결과를 안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시사하고(왕하 3:4~27) 모압 돌의 명각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재확립할 수 없었다.

 요람은 수리아인들에게 대항해서 몇 번 전쟁을 치렀다. 선지자 엘리사의 개입으로 임박한 재난을 두 번 피했으나(왕하 6, 7장) 길르앗 라못을 수리아인들로부터 되찾고자 하는 요람의 시도는 그 아버지 아합이 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실패였다. 수리아의 하사엘에 의해 상처를 입고 그는 회복하려고 관개가 잘 된 이스르엘로 갔으나 그의 군대 장관 예후에 의해 피살되었다. 예후는 이세벨을 포함하여 오므리의 전 가족을 계속하여 죽인 후 스스로 보좌를 찬탈했다(왕하 8:28, 29; 9:24~10:17).


 예후 왕조(BC 841~752)

 엘리사의 사자(使者)에 의해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예후(BC 841~814)는 오므리의 우상숭배 왕조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철저하게 바알 숭배를 근절했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의로운 열심 때문에 그 선지자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그 후손들이 4대까지 이스라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왕하 10:30). 따라서 그의 왕조는 그 국가의 존재 기간의 거의 절반이 되는 약 90년 동안 그 국가를 통치했다. 그러나 예후는 여로보암의 송아지 숭배와 관계를 끊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개혁은 불완전했다.

 예후는 그의 전임자들의 정책들과 관계를 끊고 살만에셀 III세의 봉신(封臣)이 되었으며 왕위에 오르자마자 조공을 바쳤다. 이 사건은,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는 살만에셀의 검은 방첨탑의 네 면에 묘사되어 있다. 동시대의 조상(彫像)이 존재하는 첫 번째 왕인 그 히브리 왕이 살만에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편 그의 수행원들은 공물로서 “은, 금, 금 사플루(saplu)-사발 한 개, 바닥이 뾰족한 금 화병 한 개, 금 컵(tumbler)들, 금 물통들, 주석, 왕의 홀(笏) 한 개, [그리고] 나무로 된 푸루투(puruhtu)”를 들고 있다(이탤릭체로 된 단어들의 뜻은 아직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이스라엘은 그 주된 적인 시리아의 하사엘을 대항하여 앗수르의 도움을 확보하기 위해 앗수르에 대한 그 정책을 뒤집었던 것 같다.

 17년간의 여호아하스의 통치(BC 814~798)는 처음에는 하사엘 하에서, 그 후에는 그의 아들 벤하닷 III세 치하에서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수리아인들을 대항한 잇단 전쟁으로 특징지어졌다(왕하 13:1~3). 그 결과 이스라엘은 그 영토와 군대를 많이 잃어버려 전차 10대, 기병 50명, 보병 10,000명만 남게 되었다(7절). 여호아하스의 전차 10대를 아합의 2,000대와 비교해보면 그 왕국이 50년 만에 당했던 큰 세력 손실이 드러난다. 이 서글픈 곤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누가 구원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5절“구원자”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여호아스(참조 25절) 혹은 앗수르의 왕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을 의미한다(참조 5절 주석).

 그 다음 이스라엘 왕 요아스(BC 798~782)는 수리아인들을 대항한 그의 전쟁에서 그의 아버지보다 더 성공적이었으며, 세 번 그들을 파한 후 여호아하스가 잃었던 모든 영토를 회복했다(25절). 유다의 아마샤의 도전을 받고 그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남방 왕국과 싸워야 했는데, 그것은 두 형제국 사이의 100년만의 첫 전쟁이었다. 그는 벧세메스의 전투에서 유다의 군대를 무찔러 그 왕을 사로잡고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도성의 방어 시설들을 부분적으로 파괴하고 신전의 기명들, 왕실의 보화들 그리고 몇몇 인질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다(왕하 14:8~14).

 연대기적 자료들에 의하면, 요아스와 그의 아들 여로보암 II세는 약 12년간 동위왕이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동위왕 시대로서 증거가 있다. 요아스 편에서 정치적으로 신중했기 때문에 이러한 대책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보좌에 갑작스러운 공백이 생길 때 한 국가가 겪게 되는 위험을 알고, 그가 수리아를 대적하여 해방 전쟁들을 시작했을 때, 아마도 그는 그의 아들 여로보암을 공동 통치자와 후계자로 임명했을 것이다. 비록 그 왕이 그의 군사 원정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그 왕조의 연속성이 확보되었다.

 기록상 41년간의 여로보암의 통치(BC 793~753)는 그 아버지 요아스와의 12년간의 동위왕 시대를 포함한다. 성공적이었음이 명백한 그의 통치에 관해서는 불행하게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해 일곱 절만 할애하고 있으나(23~29절) 그 절들은 잃어버렸던 영토를 그가 너무나도 많이 되찾았기 때문에 그의 왕국은 범위에 있어서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과 거의 같다고 지적한다. 유다 왕국이 붙잡고 있던 영토를 제외한다면 그의 통치 범위는 실제적으로 그 위대한 왕들의 것과 같았다. 그는 수리아의 해변 지역과 내륙 지역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를 회복했고, 다메섹과 하맛을 정복했으며, 요단강 저편 남쪽부터 사해까지 점유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암몬과 모압을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음을 뜻한다. 이 엄청난 이득은 다만 앗수르가 정치적으로 허약한 시기를 겪고 있어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로보암 II세는 명백히 강한 통치자였으나 그 아버지의 신중함과 예지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통치의 연속성을 보증할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즉시 그의 왕국은 와해되었다. 그의 아들 스가랴는 겨우 6개월간(BC 753~752) 통치하다가 살룸의 살해 음모에 희생되었다(왕하 15:8~12). 그렇게 예후 왕조는 끝났으며, 그후 즉시 그 왕국은 그 대부분의 짧은 역사 동안 그 특징이었던 정치적 무기력으로 신속히 돌아갔다.

 BC 841년부터 750년까지의 유다 왕국, 아달랴로부터 아사랴(웃시야)까지

 논의 중인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예후 왕조 시대 동안의 유다 역사를 망라한다. 아사랴(웃시야)의 통치는 그 종말이 BC 750년에 오지는 않았으나 그 연대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팽창하는 앗수르의 정복들에 치명적으로 휘말려들었던, 신(新) 앗수르 제국의 대략적인 시작을 나타낸다. 아사랴의 아들 요담은 BC 750년 그 아버지와 공동통치자로 지명되었으므로 이 연대는 유다 왕국의 역사 개요에 대한 편리한 경계선이다.

 유다의 아하시야가 BC 841년 예후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6년 동안(BC 841~835) 보좌를 차지했다. 이스라엘의 잔인하고 거리낌없는 아합의 딸인 그녀는 그녀 자신의 통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왕의 모든 씨”를 몰살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측근들이 어린 왕자 요아스를 놓쳤는데, 왜냐하면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 그리고 그의 아내요 선왕의 누이인 여호세바에 의해 구출되었기 때문이다(왕하 11:1~3).

 여호야다의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요아스(BC 835~796)는 7세로 보좌에 앉혀졌으며, 아달랴의 정부는 전복되고, 그 악한 여왕은 살해되었다(왕하 11:4~21). 그 젊은 왕은 그의 업무들을 여호야다가 지도하도록 허용하면서 바알 숭배를 제거하고 광범위한 성전 보수를 장려하며 신중하고 경건하게 행동했다(왕하 12:1~16; 대하 24:1~14).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는 냉담해졌으며, 그의 악행들 때문에 그에게 책망한다고 그의 은인의 아들 스가랴를 돌에 맞아 죽게까지 했다(대하 24:15~22). 다메섹의 하사엘이 그에게 대항해 진군해왔을 때 상당량의 성전 보화들을 주고 그 자신과 그의 나라를 구했다. 스가랴를 그가 살해한 것 그리고 국내의 종교적 불평들과 함께 이 비겁한 행동은 명백히 그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으로 귀착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종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왕의 묘실이 아니라 다윗의 도성에 장사되었다(왕하 12:17~21; 대하 24:25).

 그의 아들 아마샤(BC 796~767)는 우선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을 제거하여 그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는 이전에 유다에 속했던 에돔의 재정복을 계획하여 100,000명의 용병을 고용했으나 후에 하나님의 사람의 지시를 받고 그들을 해고했다. 그는 그 자신의 유다 군사력으로 에돔인들에 대해 승리하여 에돔의 수도, 아마도 페트라였을 셀라(Sela)를 정복했다. 한편 해고된 용병들은 유다 북부의 도성들을 약탈했다. 에돔인들에 대한 승리의 결과로 아마샤는 거만해져서 그와 싸우도록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도전했다. 현명하지 못한 이 움직임은 비참한 결과들을 초래했는데, 유다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봉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참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신뢰를 상실했다. 그는 라기스에서 암살되었다(대하 25:1~28).

 아마샤를 이어 아들 아사랴가 그의 보좌를 계승했다. 아사랴의 두 번째 이름-아마도 보좌명-은 웃시야(BC 790~739)일 것이다. 그의 통치는 정직하고, 성공적이고, 번영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 나라의 경제적 발전을 증진시켰고(대하 26:10), 장비가 잘 갖춰진 큰 군대를 양성했다(대하 26:11~15). 이것은 그로 하여금 블레셋 족과 아랍 족에 대항하여 군사 원정을 하고 아마도 유다와 아카바만 사이에 놓여 있는 에돔 영토뿐만 아니라 그 만 옆에 있는 엘랏(아마도 오늘날의 아카바에 있는 토루일 것임)을 회복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암몬족은 선물들을 주고 그들 자신을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간주했다(대하 26:8). 수 세기 동안 현저한 한 사건으로 기억되었던 심각한 지진이 그의 치세 동안 일어났음에 틀림없다(암 1:1; 슥 14:5).

 이스라엘을 번영하는 강력한 나라로 다시 한 번 만드는 데 여로보암 II세를 도왔던, 애굽과 앗수르의 정치적인 허약성은 마찬가지로 웃시야에게도 유리했다. 그 결과 그 두 왕국은, 합친다면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했던 것과 대략 같은 면적을 BC 750년에 소유했다. 이것은 마지막 히브리 번영 시대였다. BC 745년 디글랏빌레셀의 계승과 연이은 앗수르 제국의 부활은 이스라엘과 유다 둘 다 세력에 있어서 급속한 쇠퇴를 나타냈다.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해들(BC 752~722), 살룸에서 호세아까지

 강력하고 장수했던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가 암살된 후 30년간 무정부와 정치적 쇠퇴기가 왔으며 그리하여 그 왕국은 급속히 와해되어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다. 스가랴를 살해한 자인 살룸은 겨우 1개월 통치 후 그 전임자의 죽음을 따랐다(BC 752). 그는 므나헴에 의해 암살되었다(왕하 15:8~15). 므나헴은, 그의 통치에 대한 반대는 모두 매우 엄한 조처로 진압했던 잔인한 통치자였다(16절). 비록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여로보암 II세가 한때 지배했던 엄청난 수리아 영토가 이때쯤 잃어버린 바 되었음이 명확하다. 므나헴은 앗수르를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세력으로 인정하고, 그 상황들 하에서 가능한 가장 현명한 과정을 따라 디글랏빌레셀 III세가 그를 평화롭게 남겨둘 수 있도록 엄청난 양의 조공을 자원해서 바쳤다. 디글랏빌레셀은 그 당시 수리아 영토의 많은 부분까지 앗수르의 통치를 회복하고 있었다. 국민들로부터 특별세로 거두어들인 므나헴의 공물은 성경(19, 20절)과 앗수르의 기록들에 공히 언급되어 있다.

 므나헴의 아들인 브가히야는 그 이전의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의 왕들처럼 암살될 때까지 겨우 2년간(BC 742~740) 보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를 살해한 자인 베가는, 연대기적 수치들이 지적하듯이, 자신의 통치 연도를 므나헴이 즉위한 때부터 계산했다. 이는 아마 그가 예후 왕조나 살룸 왕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마지막 두 통치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12년간의 통치를 그 자신의 통치 부분으로 포함시켰다. 베가의 연대기적 수치들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아마도 그가 그 나라의 하찮은 부분을 통치하면서도 므나헴과 브가히야를 합법적인 통치자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통치 연도들을 찬탈한 이유들이 무엇이든 간에 약 8년간(BC 740~732)만 단독 통치를 한 것이 매우 확실하다.

 베가는 그 전임자들의 친(親)앗수르 정책을 중단하고 다메섹의 르신 II세와 수리아의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반(反) 앗수르 동맹을 체결했다. 다음에 그는 반 앗수르 동맹에 유다가 참여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유다에 대항해 진군했다. 이 원정은 수리아-에브라임 전쟁(Syro-Ephraimite War)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유다에 대단한 피해를 입히고 그 영토의 얼마를 합병했지만, 그 동맹국들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었다. 유다의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디글랏빌레셀은 베가의 왕국으로 진군해 들어가 갈릴리와 길르앗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이 지역 주민들을 동쪽으로 강제 추방했다(왕하 16:5~9; 15:27~29). 그는 또한 블레셋까지 멀리 해변을 차지했다. 앗수르의 침략은 이스라엘과 수리아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을 분쇄했다. 디글랏빌레셀은 수리아를 공격하여 다메섹을 정복하고 왕 르신 II세를 체포했다(BC 732). 수리아와 정복된 이스라엘의 부분들은 앗수르 지방들이 되었고 그리하여 앗수르 총독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호세아(BC 732~722)

 베가의 불행한 통치는 암살자 호세아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끝났으며, 호세아는 20대 왕인 동시에 마지막 왕으로서 보좌에 올랐다.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호세아를 보좌에 앉혔다고 주장하며, 베가의 통치는 그의 비참한 정책들의 결과로 그의 신하들에 의해 전복되었음을 지적한다. 호세아는 앗수르의 봉신 왕으로 관대히 다루어지는 권리와의 교환으로 중한 공물을 바쳤다. 매년의 공물의 양이, 이제는 이전 왕국의 하찮은 부분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국가에게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반란을 일으켰다. 애굽의 제24왕조의 연약한 왕으로서 당시에 그 땅 일부를 통치했던 소(So)와 희망 없는 동맹을 맺어 앗수르를 대항한 데는 자포자기가 호세아의 주된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아버지 디글랏빌레셀 III세를 계승하여 앗수르의 보좌에 오른 살만에셀 V세는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3년 후 견고하게 요새화 된 그 도성을 차지했다(왕하 18:10). 그 도성의 함락은 아마 살만에셀 V세의 마지막 해(BC 723~722)에 일어났을 것이다. 사르곤 II세는 훨씬 후의 명각들에서 그의 통치 첫해 동안 그가 사마리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필시 왕으로서 이렇게 주장할 권리는 적어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명백히 살만에셀의 군대 장관이었으므로 실제로 그 도성의 정복 및 이스라엘 포로 27,290명의 강제 추방을 집행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의 멸망은 북방 이스라엘이 두 세기 정도의 비극적인 역사 후 끝나게 됨을 나타냈다. 반역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태어났으므로 그 나라는 생존의 가능성이 없었다. 20명의 왕들이 보좌에 올라 평균 10년 반 통치했으며 그중 7명은 전임자를 살해한 자들이었다. 그 첫 왕은 여호와를 나타내는 우상적인 조상(彫像)을 세우고 부패한 예배를 도입했는데, 그를 계승한 모든 통치자들이 이 “죄”에 그를 추종했으며, 어떤 왕들은 거기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더했다.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과 같은 개혁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봉사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왕국은 그토록 오래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BC 750년부터 731년까지의 유다 왕국, 아사랴(웃시야)부터 요담까지

 성공적인 오랜 통치 후에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그것은 분향하려고 성전으로 들어간 것에 대한 징벌로서 내려진 것이었다(대하 26:16~20). 그리하여 그 왕조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현명한 조처로 그 아들 요담이 동위왕으로 임명되었다(왕하 15:5). 왕세자를 동위왕으로 임명하는 정책은 1세기 남짓 아마샤로부터 므낫세까지 이어졌다.

 웃시야의 문둥병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그 질병에 걸린 희생자는 격리되었으며, 왕조차도 평생 강제 고립에 순복하도록 요구되었고 죽을 때 따로 매장되었다. 1931년 예루살렘 감람 산에서 러시아 고고학 박물관이 수집한 것들 중 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에는 아람어로 된 다음과 같은 명각이 있었다: “여기로 유다의 왕 웃시야의 뼈들을 옮겨왔다. 깨우지 말라!” 그 자체(字體)의 모양은,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웃시야의 뼈들이 새로운 안식처로 옮겨진 때인 그리스도 당시쯤 혹은 그보다 조금 일찍 그 명판(銘板)이 절단되었음을 나타낸다.

 요담(BC 750~731)은 문둥병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하여 12년간 통치한 후 그의 재위 16년에 그 아들 아하스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요담은 겨우 4년을 더 살았다(참조 왕하 15:33; 비교 30절). 그 아버지처럼 요담도 비교적 고결한 통치자였다. 동시대의 세 히브리 선지자들인 이사야, 호세아, 미가가 아마 그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수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에 의해 실패로 끝난 침략을 목도했는데, 그 침략이 아마 아하스를 동위왕으로 임명한 이유였을 것이지만 유다의 존립에 대한 주된 위협은 그 후에 왔다.


 아하스(BC 735~715)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그 선지자들의 영향력에 무감각하게 지냈으며 우상들을 숭배했다. 그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왕하 16:3, 4).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불신하고 거절한(사 7:3~13) 후 그는 디글랏빌레셀 III세에게 의존했으며, 성전과 왕궁으로부터 취한 보화들을 주고 그의 지원을 받았다(왕하 16:7, 8). 디글랏빌레셀이 다메섹을 정복했을 때 아하스는 그 측근자들 속에 나타났다. 다메섹에서 그는 앗수르의 예배 양식에 친숙해져서 즉시 그것을 그 자신의 왕국에 도입하려고 착수했다. 따라서 그는, 그가 거기서 보았던 것과 같이 앗수르의 제단을 만들도록 다메섹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지시를 보냈다. 이 새 제단은 솔로몬이 번제를 위해 세웠던 것을 대체했으며 한동안 계속해서 사용되었다(10~16절).

 아하스도 그의 전임자들처럼 그 아들 히스기야(BC 729~686)를 동위왕으로 임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유다 왕국이 필시 앗수르와 불화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그가 보았을 때였다. 히스기야의 통치에 관해서는 성경과 세속의 자료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가 이용 가능하다. 열왕기하 18~20장에 묘사된 사건들은 이사야 36~39장역대하 29~32장에서의 것과 평행이다. 히스기야 당시 선지자 미가의 메시지들에 관한 다른 정보는 예레미야 26장 17~19절에 주어져 있으며, 사르곤 II세와 산헤립의 명각들은 그 당시 앗수르의 두 군사 원정에 대한 성경 밖의 자료로서 도움이 된다.


 히스기야(BC 729~686)

 히스기야는 선한 통치자였으며, 아마도 그의 악한 아버지가 BC 715년에 죽은 후 일련의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성경 기자는 그를 매우 칭찬했다(왕하 18:3, 4). 그는 또한 블레셋 지역들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으며, 국가적인 방어 체계를 강화시켰고, 창고들과 양 우리들을 만듦으로써 무역과 농업을 장려했다(왕하 18:8; 대하 32:28, 29). 그의 통치의 현저한 기술적인 업적은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으로부터 예루살렘 도성 안의 보다 낮은 저수지까지 약 653.3미터의 터널을 뚫은 것이었다(대하 32:4, 30; 왕하 20:20). 이런 방식으로 그는 예루살렘에 계속적인 급수를 확보했다. 심지어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기혼의 물은 여전히 이 터널을 통해 실로암 못까지 흐르고 있다.

 1880년 그 터널을 통해 걸어가던 소년들이, 지금은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있지만 그 터널이 완공된 후 바위에 새겼던 히브리어 명각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터널이] 뚫렸다. 그리고 그것을 뚫은 방법은 이렇다. 아직도 [일꾼들] 각자가 상대편 동료를 향해 도끼를 [들어올리고 있었을] 때, 그리고 뚫리려면 아직도 3규빗 더 남아 있었을 때 상대편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이는 바위 오른쪽[과 왼쪽]에 갈라진 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터널이 뚫렸을 때, 석수들 각자는 상대편 동료와 도끼가 마주쳐 부딪혔고 마침내 그들은 서로 만났다. 그리고 물은 샘으로부터 못까지 1,200규빗을 흘렀으며, 석수들의 머리 위로 바위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거대한 앗수르 군대의 기적적인 파멸로 귀착된 산헤립의 유다 침공 중 한 경우에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앗수르의 봉신 신분을 상속받았으나 앗수르 왕들이 메소보다미아에 바쁘게 관여하고 있는 동안 히스기야는 애굽 제25왕조의 에티오피아 왕들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멍에를 떨쳐버릴 희망으로 그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격렬하게 그러한 정책을 반대했으나(사 18:1~5; 30:1~5; 31:1~3) 히스기야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 왕은 그 결과들이 무엇일지라도 앗수르와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고, 따라서 그는 그 제국과 관계를 단절했다. 그 결과 그는 수 차례 앗수르 침공을 겪었다.

 그러나 사르곤 II세에 의한 팔레스타인 첫 침공은 심각한 결과들을 수반하지 않았다. 유다는 해변 지역만 잃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이사야는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애굽과 그 모든 동맹국들에 대한 그의 예언들을 엄숙히 선포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사 20장). 첫 번째 거대한 타격은 산헤립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BC 701년에 왔다. 그의 군대는 증기 로울러처럼 그 땅을 통과해 지나가면서 그 행로에 파멸과 폐허만 남겼다. 너무 늦게 히스기야는 그의 정책을 뒤바꿔 라기스에 있던 산헤립에게 조공을 보냈다. 그러나 산헤립은 예루살렘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산헤립이 그 도성을 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것을 포위했다는 것밖에 주장하지 못한 그 자신의 말로써 입증된다. 광대한 그의 영토의 다른 어떤 곳에서의 사건들이 더 절박했으며, 그 결과 그는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갔던 것이 분명하다.

 열왕기하 20장에 묘사된 히스기야의 병은 그가 죽기 15년 전 그의 재위 14년 앗수르 침공과 대략 같은 때에 있었음에 틀림없다(왕하 18:13; 20:6; 18:2). 히스기야에게 치료를 약속했을 때 이사야는 그에게 또한 그 도성이 점유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했다(왕하 20:6)는 사실은 그 병이 산헤립의 군사 원정 직전에 생겼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또한 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추방된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잇디나[Marduk-apal-iddina])의 사자들에게 그토록 우호적이었는지 설명해준다. 비록 그는 앗수르가 용서하지 못할 적이었지만, 아마도 히스기야는 독립을 위한 자신의 투쟁에서 환영할 만한 잠재적인 동맹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과의 동맹을 반대하여 경고했던 이사야는 추방된 바벨론의 왕과의 동맹도 마찬가지로 반대했다.

 약 10년 후 애굽의 타하르카가 보좌에 올랐을 때 산헤립은 반항적인 히스기야와 막판을 강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먼저 급송했다. 그 유다 왕은 이사야의 격려를 받고 이 요구를 거절했으며 하나님이 개입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확실한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 그 거대한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무서운 재난을 만났다(왕하 18, 19장).


 므낫세부터 요시야까지(BC 697~609)

 히스기야의 생애 마지막 15년은 아마도 그의 황폐된 국가를 재건하는 일로 바빴을 것이다. 연대기적 수치들이 지적하듯이 그는 죽기 10년 전쯤 그의 아들 므낫세를 동위왕으로 삼았다. 55년간 므낫세의 긴 치세(BC 697~642)는 사악으로 가득했다. 그는 바알에게 제단들을 세웠고, 아스다롯을 섬겼으며, 마법을 사용했고, 어린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드렸으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았다(대하 33:1~10). 앗수르 왕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은 므낫세를 그들의 봉신으로 언급한다. 그의 통치 중 어느 때 그가 반란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두 앗수르 왕 중 하나가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다(11절). 니느웨가 아니라 바벨론으로 그가 끌려갔다는 것이 비록 이상하게 보이지만, 이 당시의 앗수르 왕들은 바벨론을 그들의 두 번째 수도로 간주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므낫세의 위반은 매우 심각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용서받아 그의 이전의 지위로 회복되었다(12, 13절). 그동안 앗수르 관리들이 그 나라를 통치했는데 아마도 철저히 약탈했을 것이다. 바벨론으로부터 유다로 돌아왔을 때 므낫세는 그의 나라가 극심하게 곤궁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당시의 한 문서를 볼 때 명백하다. 거기에는 암몬 나라는 금 2미나를, 모압은 금 1미나를 공물로 바친 반면 불쌍한 유다는 다만 은 10미나를 바쳤다고 언급되어 있다. 므낫세가 겪었던 고생은 적어도 그를 회심하는 지점까지 이르게 하는 유익을 가져왔다(12~20절).

 므낫세의 아들 아몬(BC 642~640)은 그 아버지가 회심하기 전에 그랬던 만큼 완전히 사악했다. 그 결과 2년간의 짧은 통치 후 그의 종이 그를 살해했다(왕하 21:19~26; 대하 33:21~25).

 아몬의 어린 아들 요시야(BC 640~609)는 그 아버지가 암살되자 보좌에 올랐다. 종교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그는 15세 혹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산당들, 신성시 된 이교의 기둥들, 그리고 바알 제단들을 폐하기 시작하여 숱한 개혁을 시작했다(대하 34:3). 요시야의 재위 18년(BC 623~622)의 성전 수리 공사 중 “율법책”(선지자와 왕, 392)이 발견되었다. 그 교훈들을 익히 알고 난 후 그는 유다 왕국 전역에 걸쳐 그리고 이전의 이스라엘 왕국의 인접 지역들에서 이교 사상과 우상숭배를 완전히 추방하기 시작했다(왕하 22장; 23; 대하 34:6, 7). 이것은 BC 722년 이래 앗수르 지방이었던 영토에 대해 그가 어떤 종류의 정치적 통제를 확립했음을 지적한다. 비록 BC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의 무기력과 앗수르 제국의 급속한 분열로 인해 열 지파의 이전 영토가 너무 익은 사과처럼 요시야의 무릎으로 떨어졌던 것 같다. 그는 그의 힘과 영향력을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종교 개혁들을 확실하게 하는 데 적용했으며 때아닌 그의 죽음을 제외하곤 성공을 거두었다. 요시야의 생애 마지막 몇 해는 신(新)바벨론 제국의 출현과 일치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것들은 이 논문의 제XV부에서 기술될 것이다.

 신앗수르 제국 시대 동안 아사랴의 마지막 해들부터 요시야까지의 유다 역사에 대한 이 짤막한 개요는 서글픈 장면을 드러낸다. 비록 유다는 북방 이스라엘에 닥쳤던 비극적 운명을 모면했지만 그 나라는 앗수르의 중한 공물 요구로 그 모든 자원이 고갈될 대로 다 고갈되었다. 히스기야 때는 영광스럽고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했으나 그때조차도 이전의 정치적 대 실책들에 대해 무서운 값을 치렀으며 유다는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완전히 황폐되었다. 예루살렘만 파괴를 피했었다. 하나님에게 대한 충실 혹은 불순종에 비추어 그들의 민족의 정치적 역사를 보았던 성경의 기자들은 유다에 닥쳤던 그 많은 불운들이 배도의 결과였음을 보여 준다. 이 시대 동안 통치했던 절반 수의 왕들이 하나님에게 불충실했으므로 그 나라가 순조롭게 되어가지 않았던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ⅩⅢ. 사이스 시대(Saite Period)의 애굽, 제26왕조(BC 663~525)


 이 시대는 거의 한 세기 반 동안 계속된 애굽의 정치적 부흥과 관계가 있다. 애굽은, 남쪽 출신의 외국인들에 의해 통치되던 바로 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다시 한 번 독립을 되찾았고 북쪽 출신의 애굽인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았다. 이 왕조는 사이스(Sais)에서 일어났으므로 보통 사이스 왕조(Saite Dynasty)로 불린다.

 이 시대의 역사는 헤로도투스의 기사에 주로 기초하고 있으므로 많은 세부 사항에서 정확성이 결여된다. 예를 들면, 느고 II세(Necho II)가 느부갓네살에게 심하게 패배한, 성경과 고고학이 증거하는 갈그미스 전투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있는 결함들의 이유는, 그가 그의 저작을 기록된 문서들이 아니라, 묘사된 사건들이 80년 혹은 그 이상 과거가 되고만 BC 445년경에 애굽을 방문하는 동안 확보했던 구두(口頭) 정보에 기초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투스의 보고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많은 정확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을 체질하고 보다 동시대에 가까운 자료들 및 성경에 주어진 정보들과 비교할 때 대략 믿을 만하도록 그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을 그것들이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아마 제24왕조의 테프낙트의 후손일 사이스의 도성 군주 느고 I세(Necho I)는 에살핫돈에 의해 왕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그는 타하르카 시대 동안 앗수르를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였으므로 죄수로서 앗수르로 보내졌으나 아슈르바니팔의 신임을 다시 얻는 데에 성공하여 사이스에서의 그의 직임과 보좌로 회복되었다.


 프삼티쿠스 I세(Psamtik I, BC 663~610)

 느고 I세가 타누타몬(Tanutamon)에게 살해된 후 그의 정력적인 아들 프삼티쿠스 I세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에디오피아 왕조가 앗수르인들에 의해 애굽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프삼티쿠스는 그 전쟁 동안 했던 값진 봉사들에 대한 보상으로 멤피스의 왕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나라의 다른 부분들은 여러 지역 군주들의 통치 하에 놓여졌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이 그 형제에 의해 주도된 바벨론 반란을 평정하는 일에 바쁘게 관여하고 있을 때 프삼티쿠스는 영리한 조처로 어려움 없이 용케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루디아의 귀게스(Gyges)의 도움으로 그는 BC 655년 테베를 차지했고 14년이 지난 후 모든 애굽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프삼티쿠스는 용병들의 도움으로 그의 통치를 확립했고 유지했다. 이오니아 섬들 출신의 그리스인들,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들, 소아시아 출신의 카리아인들(Carians) 등이 그의 군대에서 종사했고 그의 요새들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리스 식민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그 주민들로부터 20퍼센트의 수입세를 받았으나 제사장들과 군인들은 세금을 면제했는데, 이는 애굽 왕이 그 선의가 필요했던 가장 중요한 이 두 계급의 충성을 보유하기 위함이었다. 그 시대의 문화는 고전 시대의 모방이나 부활을 나타냈다. 고 왕국의 피라미드들이 수리되었고, 고대의 직함들이 부활했으며, 피라미드의 시체 안치소 명각들이 다시 베껴져 무덤 벽들에 새겨졌고, 부조들이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프삼티쿠스는 애굽을 재통일하고 그것의 정치적 독립을 재확립한 후 제18 및 19왕조의 애굽 아시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640년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진군하여 블레셋 성읍 아스돗을 수년간 포위했으나 그 당시 스구디아인들의 침공으로 제국 건설에 대한 그의 꿈은 끝장나고 말았다. 그는 중한 조공을 바치고 그 자신을 구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애굽이 침략 받는 것을 피했다. 스구디아인들은 이미 그들의 병참선(兵站線)을 지나치게 확장했기 때문에, 그들도 프삼티쿠스의 회유적인 교섭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이며 체면을 잃지 않고 예정했던 침공을 철회하게 되어 기뻐했던 것 같다. 바벨론의 기록들에 의하면 애굽은 메대인들과 바벨론인들에게 대항하여 앗수르가 최후의 투쟁을 하는 동안 수 년간 앗수르를 지원했던 것이 명백하다. 명백하게 프삼티쿠스는 동쪽의 새로운 세력들에 대한 완충국으로서 앗수르가 계속 생존하기를 원했다.


 느고 II세(Necho II, BC 610~595)

 프삼티쿠스의 아들 느고 II세가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의 정책들을 따랐다. 그는 메대인들과 바벨론인들을 대항한 아슈르-우발릿의 허약한 앗수르 군대를 돕기 위해 BC 609년 봄이나 여름에 북진했다. 명백히 바벨론인들의 동맹이었던 유다의 요시야 왕은 므깃도 근처에서 그를 저지하다가 그곳 전투에서 입었던 상처 때문에 죽었다. 느고의 북진은 바벨론 연대기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앗수르 왕국의 종말을 피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느고의 군대는 패배를 당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므깃도 전투가 있은 지 3개월 후 그는 수리아 립나의 임시 본부에서 유다에 공물을 부과하고 요시아의 반(反) 애굽적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친 애굽적인 그의 형제인 여호야김으로 대체했다(대하 35:20~24; 36:1~4). 시돈에서 발견된 느고의 비석은 또한 그가 그 해들 동안 베니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증거이다. 한편 그 바벨론 연대기는 BC 606/605년에 애굽이 바벨론 수비대들에게 거둔 두 번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앗수르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후 바벨론인들은 애굽 세력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늙고 병든 나보폴랏사르는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대항하도록 왕세자 느부갓네살을 보냈다. BC 605년 봄이나 초여름에 싸웠던 연이은 전투에서 애굽인들은 두 번 패했는데, 처음은 갈그미스에서, 잠시 후에는 하맛 근처에서였다. BC 605년 8월 느부갓네살이 수리아 전역의 그리고 아마 또한 팔레스타인의, 도전을 받지 않는 영주였을 때 그는 애굽을 침공할 예정이었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사망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며 즉시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느고와 애굽은 구원을 받았다. 비록 애굽 군대는 갈그미스에서의 패배 후 아마도 결코 다시는 유브라데강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BC 601년 한 번 더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막대한 손실을 가할 정도로 충분히 강한 채 남아있었다.

 느고는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를 만들기 시작했던 공적을 세운 자로 생각되는데, 그 계획에서 120,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술자들이 그에게 홍해의 수위가 지중해의 수위보다 높으며 운하가 완공되면 홍해의 물이 그 운하로 쏟아져 들어와 하부 애굽이 침수될 것이라고 확신시켰을 때 완공 전에 그 일을 포기했다. 이 실수를 인정하고 다리오 I세는 약 80년 후 이 운하를 완공했다. 그것은 현재의 수에즈 운하의 선구적인 존재로 수 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우리에게 느고 당시에 베니게 선원들이 아프리카의 첫 일주 항해를 3년 걸려 성공했다고 말한다.


 프삼티쿠스 II세(Psamtik II, BC 595~589)

 느고의 아들 프삼티쿠스 II세에 관해서는 그가 누비아를 재정복하려고 시도했다는 것과 그가 한 번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는데(존 라일런즈[John Rylands] 민용[民用] 문자 파피루스, 11번), 반 바벨론 저항 세력을 아마도 조직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것 이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예레미야 27장 3절은 이 활동 당시를 언급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여러 다른 나라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으나 바벨론을 대적하는 반란의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아프리에스(Apries, BC 589~570)

 성경의 호브라(렘 44:30)인 아프리에스는 그 아버지의 일을 계속했으며 바벨론에 대항해 활동적으로 음모를 꾸몄다. 느부갓네살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권했던 자가 그였다. 그는 두로와 구브로를 대항한 해전에서 승리했고, 시돈을 점유했다. 베니게 전체가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속국이 되었다. 아르밧, 두로 그리고 시돈에서 발견된 고대의 애굽 유물들은 수리아의 해안 전역에 걸쳐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 준다. 이 성공은 팔레스타인의 좀 더 작은 도성 국가들이 애굽 군대에 그들의 신뢰를 두고 바벨론에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감명을 주었다. 호브라는 실제로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 포위한 군대를 예루살렘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한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렘 37:5~11).

 아마도 느부갓네살의 통치 동안에 아스글론의 왕 아돈(?)에 의해 기록되었을 아람어 편지가 몇 년 전 애굽에서 발견되었다. 이 편지에서 아돈은 바로에게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남진하고 있으며 아벡까지 전진했다고 말한다. 그는 저항할 수 있도록 애굽의 즉각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시드기야 왕처럼 애굽의 거짓된 권유를 듣고 바벨론 대(大)군주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한 팔레스타인 통치자의 애처로운 호소는,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 당시 백성들의 모든 희망이 애굽 군대가 행동하지 않음으로 혹은 바벨론을 대항한 그들의 싸움에 그 군대가 그들에게 제공했던 부적절한 도움으로 산산조각 났을 때 그들이 느꼈음에 틀림없을 엄청난 실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편지는, 유다 주위의 국가들이 느부갓네살을 충실히 섬기도록 권하고 그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경우의 끔찍한 결과들을 그들에게 경고한 예레미야의 예언들(렘 27:2~11)이 얼마나 참되게 성취되고 있었는지를 예증한다.

 군사적인 반란 과정 동안 군대 사령관 아모세(Ahmose)는 병사들에 의해 애굽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자 아프리스는 그의 군대의 충성된 부분과 함께 아모세와 싸웠으나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억지로 아모세를 동위왕으로 인정했다. 2년 후 두 통치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발발하여 아프리스가 죽었으며, 아모세는 관대하게 왕으로 매장해 주었다.

 아프리스가 죽은 지 오래지 않은 BC 568년 아마시스(Amasis, 아모세)는 느부갓네살이 이끈 군사 원정 형태의 심각한 위협과 직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문서가 잘 보존되지 못해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그의 재위 37년에 애굽으로 진군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약 3년 전에 에스겔은,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포위 공격했던 “보수”로 여호와가 애굽을 그에게 줄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비록 애굽에 대한 BC 568년의 군사 원정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을지라도, 아마시스가 패배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겔 29:17~20).

 그러나 아마시스의 치세(BC 570~526)는 대부분 평화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친구였으며, 그리하여 애굽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애굽 도성 나우크라티스(Naucratis)는 그 나라의 주된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이 바로는 그의 해군으로 구브로를 장악했으며 또한 리디아의 크로에수스(Croesus), 스파르타인들 그리고 BC 547년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대항하여 바벨론의 나보니두스와 조약들을 체결했다.

 아모세의 오랜 통치 후 그의 아들 프삼티쿠스 III세(BC 526~525)는 단 1년간 통치했다. BC 525년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왕 캄뷔세스는 애굽을 정복하고 프삼티쿠스를 추방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태수가 통치하는 페르샤의 한 관할 구역이 되었다.


 ⅩⅣ. BC 626년부터 586년까지의 신(新)바벨론 제국


 바벨론 제국은 앗수르인들이 메소보다미아 계곡의 주인이 되기 전에는 길고도 찬란한 역사를 누렸다. 악갓 출신 사르곤의 제국과 아모리 왕 함무라비의 제국은 바벨론에게 영광을 안겨 주었었고, 이 바벨론은 여러 세기 동안의 정치적 무능(無能)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이 기간 동안에 앗수르인들이 고대 세계의 이 부분을 통치하였다. 바벨론의 언어와 문자, 그것의 문학과 문화는 고전적 원형들로 간주되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바벨론인들의 신(神) 마르둑은 모든 메소보다미아 민족들을 매혹했다. 앗수르인들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메소보다미아에 군림했던 수세기 동안 거듭 바벨론을 정복하고 점유했으나 보통 그 나라를 존중하여 대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결코 앗수르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지 않고 항상 다른 속국들과는 다른 지위를 누렸다. 산헤립은 감히 그 도성을 파괴했으나 그의 동시대인들과 많은 앗수르인들조차 그것을 너무나 신성모독적이요 참람된 죄로 간주했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도성을 재건했다.

 바벨론을 둘러쌌던 이 고대의 그리고 불멸로 보이는 영광은, 앗수르 제국이 멸망한 후 신 바벨론 제국이 사람들의 마음에 신속히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제국의 기억에 채 1세기도 안 되는 단명했던 그 역사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광채를 더해 주었다.

 나보폴랏사르에 의한 신바벨론 제국의 확립과 앗수르에 대한 그의 군사 원정은 앗수르 제국의 와해와 관련하여 이미 논의했다. 이 논문은 예루살렘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만 고대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45년간의 사건들은 이 주석의 다른 책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자료들

 아직도 완전히 분명하지는 않은 이유들로 신바벨론 제국 시대와 동시대의 역사적인 명각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경제 사본들은 이 시대에 관해 상당한 빛을 비추어주며 건축 명각들은 바벨론 군주들의 광범위한 건축 활동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왕실 연보(年譜)들 혹은 전시(展示) 명각들은 앗수르 황제들의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개탄스럽게도 역사적 명각들이 없는 것과 연대기들이 희귀한 것이 예전에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기를 꺼리던 바벨론인들의 태도 때문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우연히 그렇게 보존되다가 발견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 바벨론 연대기는 오랫동안 부분적으로 알려지고 출판되었다. 1923년과 1956년에 신바벨론 시대의 연대기들 전집이 (여태껏 출판되지 않은 몇 부분들로서 영국박물관의 설형문자들 중에 발견된 것을 포함하여) 출판되었다. 이것은 나보폴랏사르의 치세 중 7년의 단절을 제외하고는 그의 즉위년부터 느부갓네살의 치세 제11년까지 매년의 정치적 사건들의 기록을 제공한다. 비록 단절된 것이기는 하나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 치세 동안의 오랜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하지만 대체로 신바벨론 시대의 역사 재구성을 위해 이용 가능한 설형문자 기록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성경이 성경 역사의 어떤 다른 시대보다 더 세부적인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사항이다.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요세푸스의 저작들에서 발견된 것 그리고 이용 가능한 설형문자 기록들의 것과 더해져서 유다 왕국의 종말을 표했던, 이 의미심장한 고대 세계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꽤 분명한 그림을 이어 맞출 수 있게 한다.


 연대기

 신바벨론 제국의 연대기는 고정되어 있다. 베를린 박물관의 한 점토판은 느부갓네살의 치세 제37년에 행한 많은 천문학적 관찰에 관한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천문학자들이 검토했을 때 묘사된 그 현상들은 BC 568/567년 봄부터 봄까지에 해당하는 바벨론 역년에 일어났음이 명백해졌다. 이런 식으로 느부갓네살의 치세 제37년을 BC 연도로 정확한 날짜까지 정할 수 있으므로 그 당시의 연대가 정해진 수만 개의 상업 문서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 군주와 신바벨론 제국의 다른 왕들의 통치 전반을 재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확보된 연대기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캐넌(Canon of Ptolemy)에 포함된 바벨론 왕들의 명단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신 제국 시대의 연대기는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사실들에 기초해 있다.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BC 626~605)

 앗수르의 이름뿐인 마지막 왕들 하에서 바벨론의 독립적인 군주였던 나보폴랏사르에게 예외적으로 유리하게 사건들이 진행되었다. 그는 수 년 동안 마르둑-아팔-잇디나(므로닥발라단)가 얻기 위해 싸워 오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갈대아 군주국 하에서 바벨론 제국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최대의 적인 앗수르가 먼지 속에 멸망하는 것을 보는 기쁨도 누렸다. 니느웨가 BC 612년 메대인들과 바벨론인들에 의해 멸망했을 때 시악사레스와 나보폴랏사르는 둘이서 그 쓰러진 거상(巨像) 앗수르의 영토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명목적으로 페르시아 만(灣)으로부터 메소보다미아, 수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애굽 경계까지 달했던 한 제국이 그 바벨론 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메대인들은 이전의 앗수르 제국의 북쪽 지방과 아나톨리아 지방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게다가 그 시대에 관해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한 그 두 새로운 세력들 간의 관계는 충심으로부터의 것으로 머물렀고 결코 깨지지 않았다. 그들의 상호 우호 관계는 나보폴랏사르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느부갓네살과 메대 공주 아무히아(Amuhia, 아뮈히아[Amyhia])의 결혼으로 조인되었다.

 니느웨가 함락된 후의 몇 년은, 새로 얻은 영토를 공고히 하는 일과 앗수르 왕국의 남은 자들을 궤멸(潰滅)시키는 일에 사용되었다. 이들은 하란 지역에서 그들의 왕 아슈르-우발리트 II세(Ashur-uballit. II)의 지휘하에 애굽 병력의 지원을 받아 생존을 위해 싸우던 자들이다. 수년 동안 바벨론 왕은, 비록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에 틀림없을지라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BC 609년에 이르러 앗수르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때 이래 더 이상 군사적인 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애굽의 왕 느고는 요시야에 대한 그의 승리를 통해 유대를 점유하게 되고 수리아와 북부 메소보다미아 부분들도 차지했다. 나보폴랏사르는 그 자신이 앗수르 제국에게 속했던 영토들에 대한 상속자로 간주했으므로 애굽이 느고에 의해 점유된 아시아 영토들을 점유한 채 있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BC 606년 말에 이르러 나보폴랏사르는 그의 메소보다미아 영지를 평정시켰으며, 바벨론 수비대 군사들이 몹시 괴롭힘을 당하던 서쪽의 애굽 위협에 더 주목할 수 있었다. 그 늙은 왕은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왕세자인 느부갓네살에게 애굽인들에 대한 군사 원정이 위탁되었다. 애굽 군대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들은 먼저 유브라데 강변의 갈그미스에서, 몇 주 후에는 수리아의 하맛 근처에서 얻어졌다. BC 605년 여름 아브(Ab)월 8일(605년 8월 15일경)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그에게 그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바벨론으로 귀환하게 되었고 엘룰(Elul)월 1일(9월 7일경) 보좌에 올랐다.


 느부갓네살 II세(Nebuchadnezzar II, BC 605~562)

 나보폴랏사르는 느부갓네살 II세라는 훌륭한 계승자를, 바벨론은 성공적이고 뛰어난 왕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성경과 최근에 발견된 바벨론 연대기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특히 유대에 대해 수 차례 군사 원정을 수행했으며, 그의 제국에 속해 있던 나라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그의 힘과 자원을 평화의 일들에 바쳤다. 그의 주된 야심은 그의 수도를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대도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자금이 궁전, 신전, 요새를 건축하는 데 사용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건설한 것이 아니냐?”(단 4:30)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건설한 그 도성의 묘사는 다니엘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에 언급되어 있다.


 ⅩⅤ. BC 609년부터 586년까지의 유다 왕국


 연대기

 다행스럽게도 애굽과 바벨론의 연대기가 요시야로부터 시드기야까지의 시대에 대해서는 잘 확정되어 있다. 어떤 유대 왕들의 연대들은 천문학적 기록들에 기초된 바벨론 연대들과 일치한다. 따라서 유다 왕들의 BC 연대 결정은 정확도가 높게 확정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바벨론 연대기 부분은 유다의 다섯 왕들(므낫세부터 여호야김까지)의 연대들을 이전의 출판물에서보다 1년 더 앞으로 옮기고 있지만 중요한 몇 사건들을 확증하고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의 즉위년들을 정확히 산출한다.


 요시야의 죽음과 여호아하스

 12절에는 유다의 역사를 요시야 왕의 시대까지 추적했다. 그의 통치의 주된 부분은 앗수르 제국이 분열하던 해들에 놓여 있는데, 그때 앗수르인들은 그들의 서쪽의 영지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으며, 바벨론은 이 영지를 그때까지도 아직 접수하지 못했다. 요시야는 이전에 이스라엘 왕국에 속했으나 좀 더 근래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통치되었던 상당한 부분들의 영토로 그의 영향력, 아마 정치적 지배력조차도 확장하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했다.

 한동안 요시야는 메소보다미아의 상황 때문에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애굽 세력의 부활을 상당히 염려하며 지켜보았다. 애굽이 앗수르의 완전한 붕괴를 방지하고자 하는 정책을 수행한 사실을 고려하면, 애굽 군대들이 요시야의 통치 동안 수 차례 팔레스타인을 통과했음에 틀림없다. 요시야는 바로가 다만 앗수르를 계속 살아있도록 하는 것 이상의 다른 계획들, 즉 아시아에 이전의 애굽 제국을 재건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으며, 그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적인 이권을 위해 앗수르와 정치적인 지원을 주고받기로 제안했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요시야가 실제로 바벨론의 나보폴랏사르와 협정을 맺고 그의 바벨론 동맹을 돕기 위해 느고 II세에게 저항했는지 아니면 만약 애굽인들과 앗수르인들이 바벨론인들을 패배시킨다면 유다는 애굽이나 앗수르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다만 기초하여 그의 입장을 취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자의 이유가 아니면 후자의 이유가 그로 하여금 느고가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지 못하게끔 맞서도록 하는 불행한 결단을 촉구했음에 틀림없다.

 이 전투는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있었다. 그 연도는 애굽인들이 그 해에 하란에서 앗수르인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는 바벨론 연대기에 기초되어 있다. 요시야는 치명상을 입었으며(참조 대하 35:20~24 주석), 패배한 유다는 애굽에 항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때 느고는 요시야에 대한 그의 승리를 좇지 않고 서둘러 계속 북진했다. 그는 바벨론을 대항하기로 한 결단에 더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그곳에서의 승리가 그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행동의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요시야의 23세 된 아들 여호아하스는 비록 장남은 아니었지만 대중의 요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왕관을 쓰게 되었다(왕하 23:30, 31). 그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정책에 따라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친(親)바벨론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느고(Pharaoh-Necho)에게는 그가 반(反)애굽적이었음을 의미했다. 느고는 북부 메소보다미아와 수리아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한 후에, 유다가 자신의 계획들을 방해한 것에 대하여 그 나라를 징벌하기로 결심했으며, 따라서 수리아의 립나에서 여호아하스를 자기 면전으로 소환했다. 이 요구와 더불어 여호아하스가 순복했다는 사실은, 유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 틀림없다는 것과, 그때쯤 자신을 팔레스타인의 의심할 여지 없는 주인으로 간주한 느고를 그 나라가 저항하기에는 무력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느고는 겨우 3개월 통치한 그 젊은 왕을 사로잡아 포로로 애굽에 보냈다.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그의 형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으로 왕에 임명했다. 이 새 왕은 친애굽 성향으로 알려졌다. 은 100달란트와 금 1달란트의 조공이 부과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백성으로부터 강제로 징수했다(왕하 23:32~35).


 여호야김(BC 609~598)

 여호야김이 왕으로 있은 11년간(BC 609~598)은 유다의 최후의 몰락을 촉진시킨 추잡한 우상숭배와 사악으로 특징지어진다. 경건한 그 아버지와 정반대인 그는 선지자를 살해하기까지 한 여러 불경한 행동들로 악명을 떨쳤다(왕하 23:37; 렘 26:20~23).

 여호야김은 아마 그의 치세 제3년까지 애굽의 봉신이었을 것이다. 최근 발견된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BC 605년 바벨론의 왕세자 느부갓네살은 북부 메소보다미아에서 애굽인들과 싸우도록 그 아버지에 의해 급파되었다. 갈그미스와 하맛 근처에서의 두 전투에서 그는 결정적으로 애굽인들을 패배시켰으며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수 있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억지로 여호야김을 바벨론의 봉신으로 삼고, 성전 보물들의 한 부분을 취하며, 어떤 왕자들을 볼모로 잡았는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그 볼모 중에 있었던(단 1:1~6) 때는 본국으로 대피하는 패배한 애굽인들을 추적하는 중이었음에 틀림없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메소보다미아로 퇴각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의 장군들의 수중에 그 원정 동안 이미 잡은 포로들을 맡기고,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 가능한 최단거리 경로를 통해 바벨론으로 귀환했다(Josephus Contra Apion I. 19). 왕이 죽을 때는 항상 본국에서의 반란 즉 보좌를 차지하려는 찬탈자의 시도가 있을 위험이 있다. 이런 이유로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군대가 바벨론에서 긴급하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때에 먼 애굽에서 그 군대가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은 본국에 어떤 대적도 없었으므로 갈그미스와 하맛 근처의 전투들의 결과로 그의 무릎에 떨어진 서쪽의 영토들을 완전히 지배 하에 두려는 과업으로 즉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인들이 “핫티-땅”(Hatti-land)이라고 불렀던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연이어 3년 동안 그가 전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언급된 유일한 군사적 행동은 아스글론의 점령과 파괴이므로 저항은 가벼웠음에 틀림없다. 그의 군사 원정들은 주로 영토를 편성하고 매년의 공물들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을는지 모른다.

 비교적 평온했던 이 3년 동안 유다의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의 충성스러운 봉신으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4:1). 그러나 바벨론에 대한 매년의 조공이 그 땅에 중하게 부과되었으므로, 그는 힘을 회복하고 있었던 애굽으로 그의 충성을 돌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의 관심을 그의 봉신들과의 문제들의 주요 원인인 애굽으로 향하게 했다. BC 601년 기슬레(Kislev)월(11~12월)에 있었던 애굽 군대와의 전투는, 바벨론인들이 후퇴했기 때문에 중한 손실과 더불어 무승부로 끝났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그 다음해 동안 본국에 머물러 BC 599년 말엽의 새로운 원정을 감행하기 전에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그 자신의 군대 얼마쯤으로 지원을 받은 그의 몇 서쪽 봉신국들이 유다를 급습하여 괴롭히도록 허용했다(왕하 24:2). 그때 3,023명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강제 추방되었다(렘 52:28). BC 598년 12월 갈대아 군대들은 필시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전 보물들은 한 번 더 바벨론으로 탈취되어 갔다. 그 왕은 차꼬에 채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의 반란에 대한 징벌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하다. 여호야김은 강제 추방되기 전 갈대아인들의 수중에서 받은 거친 취급 때문에 혹은 자연적인 원인들로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체는 성문 밖에 던져져 거기서 수일 동안 더위와 추위에 노출되어 놓여 있다가 “나귀같이” 수치스럽게 매장되었다(렘 22:18, 19; 왕하 24:6; 대하 36:6; 렘 36:30; Josephus Antiquities x. 6. 3 참조).


 여호야긴(BC 598/597)

 18세된 아들 여호야긴이 여호야김을 계승했으나, 겨우 3개월 통치했다(BC 598/597). 느부갓네살이 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그 새 왕을 포로로 잡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하튼 기록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여호야긴이 즉위한 직후 또 다른 서쪽으로의 원정을 시작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여호야긴은 바벨론 연대기에 의해 확정된 특정일인 BC 597년 아달(Adar)월 2일(3월 16일경) 그 어머니와 그의 모든 신하들과 함께 항복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볼모잡아 갔으며 그 대신 그의 삼촌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는 또한 그때 성전 보물들로 남아있던 모든 성전 기명들, 7,000명의 병사들, 그가 찾아낸 모든 숙련된 장인들을 바벨론으로 이송했다. 그 장인들은 그의 광범위한 건축 사업들에 유용할 것이었다(왕하 24:8~16).

 여호야긴이 아직도 유다의 왕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바벨론에서는 볼모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결론은 유다와 바벨론의 포로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포로들은 여호야긴이 보좌로 되돌아가고 거룩한 기명들이 되돌려지기를 기대했다(렘 28:3, 4; 29장).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벨론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는 여호야긴의 통치 연수에 의해 사건들의 연도를 매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을-에스겔이 그랬듯이-여호야긴이 사로잡힌 연수로써 연도를 매긴 것이 확실하다(겔 1:2; 40:1).

 이 결론들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에서 상당한 확증을 찾아냈다. 벧세메스와 텔 베이트 미르심(아마도 드빌일 것임)에서 출토된 세 개의 토기 항아리 손잡이들은 모두 “여호야긴의 청지기 엘리아김의 소유임”이라는 동일한 압인(押印) 자국을 갖고 있다. 이 발견물들은 여호야긴의 소유물이 몰수되지 않고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청지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BC 592년-여호야긴이 항복한 지 5년 후-으로 연대가 매겨진, 바벨론의 폐허에서 발견된 몇몇 점토판들은 바벨론 왕이 먹을 것을 주던 어떤 사람들을 위해 왕궁 창고에서 제공된 식료품의 목록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그의 가정교사 그나야가 있는데, 여호야긴은 “유다의 왕”으로 거듭 언급되어 있다. 여호야긴이 왕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 그가 이 기록들에 언급된 어떤 사람들보다도 20배의 배급량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감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는 것과 같은 사실들은, 유다의 상황들로 인하여 그러한 행동 노선이 타당하게 된다면 그가 그의 보좌로 회복될 날을 기다리면서 느부갓네살에 의해 한동안 붙들려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후 어느 때, 예레미야 29장에 묘사된 사건들과 관련하여, 아니면 시드기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여호야긴이 감금된 것이 확실하다. 이 감금은 그가 사로잡힌 지 제37년까지 계속되었다가 바로 그때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마르둑(Amel-Marduk), 즉 성경의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이 그를 석방하고 용서했다(왕하 25:27~30). 하지만 이 사건은 바벨론 포로 기간에 해당하므로 이 논문의 범위 안에 있지 않다.


 시드기야(BC 597~586)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의 숙부를 유다의 보좌에 앉혔을 때, 그는 그 왕의 이름을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의 맛다니야로부터 “여호와의 의”란 뜻의 시드기야로 바꿨다.6) 느부갓네살은 이 이름이 그에게 그 왕이 그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했던 엄숙한, 충성의 맹세를 그 왕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는 것이 되도록 아마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대하 36:13; 겔 17:15~19). 그러나 시드기야는 연약한 성격의 인물이었으므로, 비록 때로는 올바르게 행하고 싶어했으나, 그의 통치 역사가 분명히 보여 주듯이 대중의 요구들에 의해 그 자신을 정로에서 벗어나도록 허용했다. 수년 동안, 요세푸스에 의하면, 8년 동안(Antiquities x. 7. 3)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충성스럽게 머물렀다. 한때 그는 그의 충성을 느부갓네살에게 확신시키려고 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렘 29:3~7). 시드기야는 자신의 재위 제4년(BC 594/593)에 바벨론으로 여행했는데(렘 51:59), 이는 아마도 자신의 충성의 서약을 새롭게 하도록 소환을 받았거나 다니엘 3장에 묘사된 예식들에 참여하도록 소환을 받았거나 해서일 것이다. 차후에 시드기야는 그의 부하들, 특히 바벨론을 대항하여 애굽의 지원을 받도록 그를 몰아붙이는 왕자들의 계속적인 압력을 받고 애굽인들과 동맹을 맺었다(참조 렘 37:6~10; 렘 38:14~28).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강력한 경고들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 동맹은, 아마도 프삼티쿠스 II세가 BC 590년 팔레스타인에 직접 나타나 온갖 종류의 보증의 말과 도움의 약속을 한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공격하는 일을 신중하게 자제했던 느부갓네살은 그의 서쪽 영지들을 애굽에게 전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시드기야의 배반이 분명해지자마자 유다를 향해 진군했다. 그 나라의 모든 성읍들을 차지한 후 그는 1세기 전 산헤립이 했던 것을 실제로 되풀이하여 전 국토를 조직적으로 황폐화시켰다. 이 불행한 시대로부터 최근에 도시 라기스의 발굴에서 발견된 유명한 라기스 편지들(참조 렘 34:7 주석)이 유래되었다. 도기 단편(陶器斷片)에 잉크로 기록된 이 편지들은 아세가와 라기스 사이의 전초 기지를 맡고 있던 장교에 의해 라기스 요새의 지휘관에게 보내졌다. 그것들은 그 당시 그 나라에 편만했던 통탄할 상황들을 생생하게 예증하며 많은 세부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그때 예루살렘에서 살던 예레미야가 한 진술들을 확증한다.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은 BC 588년 1월 15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BC 586년 7월 19일까지 계속되다가(왕하 25:2; 렘 39:2) 마침내 갈대아인들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기근 상황이 편만했던 그 도성 안으로 성벽을 뚫고 들어왔다. 30개월간의 긴 포위 공격은, 바벨론을 패배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애굽 군대에 의해 한때 잠시 중단되었다(렘 37:5). 예루살렘 성벽 돌파가 있었을 때 시드기야는 도망하려고 시도했다. 그 돌파에 따른 혼전 속에서 그는 용케 그 도성을 떠나 여리고 평지에 도달했지만 그곳에서 잡혔다. 시드기야는 립나에 있던 느부갓네살의 본부로 이송되어 그 아들들이 살해되는 것을 보고 그의 두 눈이 뽑혔으며,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보내졌다. 그의 주요 대신들은 처형되었고, 다른 모든 신하들은 잡혀갔다(왕하 25:4~7, 19~21; 렘 52:10).

 예루살렘은 조직적으로 약탈당한 후 파괴되었다. 성벽들은 헐렸고, 성전, 궁전들, 그리고 모든 다른 집들은 소실되었다. 그 불은 그 불행한 도성에서, 열왕기하 25장 8절예레미야 52장 12, 13절의 두 날짜가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BC 586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 격렬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가고, 그 나라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약간 남겨졌다.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관할하는 방백으로 미스바의 유대인 그달랴를 임명했다(왕하 25:22; 대하 36:20).


 방백으로서의 그달랴(BC 586)

 그달랴는, 비록 열왕기하 25장 25절에 연도가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얼마나 오랜 후에 그가 암살되었는지 불확실하지만, 짧은 기간 방백으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그 안에서 옥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군대 장관에 의해 풀려나 미스바에서 그달랴와 합류했다. 또한 패주로부터 벗어난 몇몇 유대인 야전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도착했다. 그들 중 하나는 시드기야의 친척이요 열광적인 군주 지지자인 이스마엘이었는데, 그는 그달랴와 그 참모진 그리고 미스바의 갈대아 수비대를 살해하고 암몬족과 합류하려고 애썼는바, 이는 아마도 그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느부갓네살에 대한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계획은 시드기야의 또 다른 장군이었던 요하난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요하난은 이스마엘을 저지하고 그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이스마엘은 8명의 부하와 함께 암몬인들에게로 도피했으나, 요하난 및 그와 함께 있었던 군대의 남은 자들은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갔으며, 예레미야와 바룩을 억지로 그들과 합류시켰다. 이런 식으로 유다의 포로 전 역사는 끝난다.


 참고문헌

 고대 역사와 고고학을 다루고 있는 저서들을 언급하는 간략한 참고 문헌에 대해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1권을 참조하라. 다음의 부가적인 책들은, 비록 본 주석에서 발표된 의견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논문에서 논의된 기간의 국면들에 관해서 참고하기에 유용하다.

 바벨론 연대기(Babylonian Chronicle). 아래의 “Wiseman” 항목을 참조하라.

 Bright, John. A History of Israel. 2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이 책은 온건 보수파 학자가 쓴 것인데, 출애굽 연대나 에스라의 봉사와 느헤미야의 봉사의 시대 순서와 같은 어떤 점들에서는 본 주석서에 제시된 역사 해석과 상이하다.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s. I, II, 3d ed.; Vol. III, original ed. 본 주석의 논문인 “출애굽부터 바벨론 포로까지의 성경 연대기”의 참고 문헌에 있는 항목을 참조하라.

 Noth, Martin. The History of Israel. 2d ed.; New York: Harper and Row, 1960. 479쪽. 이 책은 자유주의 학자가 저술한 것인데, 브라이트의 견해들 그리고 본 주석서에 제시된 견해들과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저서이다.

 Olmstead, A. T. History of Assyri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3. 695쪽. 이 책의 역사는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 발견된 많은 자료들이 앗수르 역사 그리고 특히 그 연대기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많은 것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로 된 좀 더 최근의 책도 아직 이 책을 대체하지 못했다.

 _______. History of Palestine and Syria to the Macedonian Conques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1. 664쪽. Reprint: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72. 이 책은, 그 저자가 히브리인들을 고대 세계의 한 부분으로 묘사하며 그들이 격리되어 살았던 것처럼 그들을 다루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고등비평가인 저자는 그가 택한 성경의 원자료를 매우 자유주의적으로 다루었다.

 Parker, Richard A., and Dubberstein, W. H. Babylonian Chronology, 626 B.C

 A.D. 75. Providence, R.I.: Brown University Press, 1956. 47쪽. 이 책은 원자료로부터 페르시아인들과 셀류쿠스 왕조에 의해 채택되었던 바벨론 연대기 방식을 재구성한다. 끝에 있는 역법(曆法) 표들은 어떤 바벨론 연대일지라도 그 B.C. 해당 연대를 정확도가 꽤 높게 전환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든다.

 Smith, Sidney. Early History of Assyria to 1000 B.C. London: Chatto & Windus, 1928. 418쪽. 이 책은, 비록 새로운 발견물들이 초기의 많은 왕들의 배치를 바꿨기 때문에 그 연대기가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개관서이다. 이 논문에서 주로 논의된 기간인 BC 1500년 이후에 대한 스미쓰의 제시는 받아들일 수 있다.

 Thiele, Edwin R.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Rev. ed.,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5. 232쪽.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학자가 쓴 이 책은 솔로몬의 죽음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시대에 대한 히브리 연대기를 다룬다. 이 책은 주로 그 시대 역사의 연대기적인 면들에서 중요한 책이다.

 Wiseman, D. J., ed. Chronicles of Chaldean Kings (626~556 B.C.) in the British Museum. London: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61. 99쪽, 21 pl. 이 책은 바벨론 연대기(아래의 부가적인 주석 참조)라고 불리는 일련의 연대기 기록들에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추가하는 설형문자 점토판들(1956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음)의 본문과 번역이다. 이 본문들은, 여태껏 이용 가능한 역사적 원자료가 거의 없는 신 바벨론의 역사 시대, 나보폴랏사르의 초기와 말기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첫 11년에 극히 중요하다.


 추가적 설명

 바벨론 연대기의 새로운 부분들(위의 “Wiseman” 항목을 참조하라)은 성서상의 사건들과 바벨론의 사건들 사이에 시간적 일치들이 많이 있는, 성서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부가적인 빛을 던진다. 이로 인해 본 주석서에서 특별히 유다와 애굽의 어떤 사건들과 재위 연대들에 1년의 변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른 연대들은 확증되었다. 예를 들면, 본 주석서에서 여호야긴의 체포에 대해 언급한 해인 BC 597년은 (그 연대를 BC 597년 아달[Adar]월 2일, 즉 대략 BC 597년 3월 16일로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에 의해 확증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해가 BC 598년인지 아니면 BC 597년인지에 관한 학적인 논쟁이 해결되었다. 다른 한편 본 주석서의 영문 초판은 갈그미스 전투를 BC 604년 연대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제 그 전투는 BC 605년 봄이나 초여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 새로운 점토판들은, 애굽의 군사 원정이 BC 609년에 한 차례 있었으며 BC 608년에는 전혀 없었다고 언급함으로써 므깃도 전투에 대한 연대를 이전에 주장하던 BC 608년 대신에 BC 609년으로 확증한다. 이것과 차후의 다른 발견들 때문에 특별히 이 논문에서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여러 변경을 가했다. 여호야김의 사망 연대와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들의 연대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역자주

 1) 현재의 키질 강(Kizil River)으로서 터키에서 가장 긴 강이다-역자 주.

 2) 여러 사사들과 이 기간의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연대들을 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여기 주어진 연대들은 하나의 제안일 뿐이다. 애굽 왕들에 대해 주어진 연대들은 대략의 연도이다.

 3) ‘발기(勃起)된 남근(男根)’이란 뜻임-역자 주.

 4) 케년에 의한 발굴물들이 가르스탱의 결론들을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만들지도 모를 가능성은 재림교회 주석 총서 영문 제1권에서 예감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은 주석 총서 영문 제1권이 재판 과정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주석 총서 영문 제1권의 재판 124, 125쪽은 좀 더 새로운 정보에의 영향을 받았다.

 5) 여호람과 요람의 이름들은 성경에서 교체 가능하도록 사용되어 있다. 그러나 편의상 이 주석서에는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을 지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요람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을 지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참조 왕하 8:16).

 6) 왕하 24:17을 참조하라-역자 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