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비밀의 언어요 영적인 기도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위의 성경절을 근거로 방언이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해야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주장한다. 과연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방언이 다른가?
A. 먼저
고린도전서 14장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왜 기록했는가? 방언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방언을 하지 말 것을 권하기 위해서였는가?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방언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방언의 남발을 염려하고 책망하고 있다. 방언은 다른 사람이 그 뜻을 모르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14:6-11). 그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요 서로 야만인이 되는 것이다(
14:11). 만일 온 교회가 모여 서로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다(
14:23).
그러므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14:19)고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방언의 은사를 모독하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지절거리는 방언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해석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B.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반부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14:2-4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한다”느니
“알아듣는 자가 없다”느니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느니
“자기의 덕을 세운다”느니 하는 말들은 다 방언을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의 탁월성에 비하여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내용을 부정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14:3의
“그러나”가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나”는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앞 문장보다 더 긍정적일 경우에는 그 전 것은 옳지 않지만 후의 것은 옳다는 것을 나타내는 접속사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1-4을 그 원래의 뜻을 풀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내가 지금부터 예언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말해 주겠다. 너희 교회에서 지금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방언이란 원래 사람들, 그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쓰는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덕만 세우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냐?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의 원래 목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알아 듣게 말하기 때문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자기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C. 고린도전서 14:14에는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혼이 기도하거니와 영혼의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방언은 영혼의 기도인가? 그렇다면 한국말로 하는 기도보다 방언 기도가 더 응답이 잘되는 영적인 기도인가? 여기의
“영”도 참된
“영적인 기도”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알지 못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즉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도라는 뜻이다. 그런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가 없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일 리가 없다.
흔히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하늘의 언어라느니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성령 만의 증거라느니 하는 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을 분석해 보면 근거가 없다. 그것들은, 예언이 사람에게 말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도 참된 영적인 기도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라는 뜻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된 말이다.